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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쳤지만 무너지지 않는 삶에 대하여 - 탈진의 시대, 인류사 내내 존재했던 피로의 인문학 A to Z
안나 카타리나 샤프너 지음, 김지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9월
평점 :
출판사에서 받고 다른 책 읽느라 두었다가 여행 전 다 읽을 생각으로 책을 들었다. 요즘 인기 많은 힐링 도서라는 생각으로 펼쳤다가 논문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연구와 조사를 해서 쓴 책임을 알고 연필을 들고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결국 여행지에서 들고 다니며 다 읽었다. 저자는 영국 켄트 대학교 문화사 교수이기도 하고, 과학적 연구 결과와 석학들의 지혜를 바탕한 번아웃 전문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수많은 내담자들과 대화를 하며 번아웃 상태, 혹은 그 상태로 가고 있는 현대인들을 돕고자 이 책을 썼다. 남을 도우려는 책은 그 진심이 통한다고 믿는다. 책의 내용 중 많은 부분에 공감하며 읽었다.
책의 진행이 독특하다. 보통은 장과 꼭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책은 A부터 Z까지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단어 혹은 문구가 주제이다. 알파벳 중에서 책과 관련 있는 말을 찾고 그에 맞는 여러 연구 결과나 위인들의 말을 가져와 설득력 있는 글 하나하나를 완성해 갔던 그녀의 작업 방식을 상상해 본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이다. 어느 주제에 관해서는 많이 쓰고 싶기도 했을 것이고, 어떤 알파벳은 떠올리기 힘들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보았다. 어쨌든 저자는 이렇게 훌륭한 책을 완성했고, 그 덕분에 나는 번아웃과 관련한 여러 지식과 말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매슬라크가 1980년에 최초로 번아웃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와 정의를 제시했다고 한다. 그녀는 번아웃 증후군의 대표 증상으로 탈진, 괴리감, 능률 저하를 들었다. 주로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탈진에 이른 사람들은 자신이 상대해야 할 사람들을 점점 냉소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로 대한다고 한다. 서비스 직이 많아진 현대 사회에 번아웃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번아웃을 ‘에너지가 고갈되고 열정이 적고 능률이 저하되어 의욕이 떨어진 상태’로 정리하였다.(41-42쪽)
앤 헬렌 피터슨은 밀레니얼 세대에게 번아웃이 많은 이유를 ‘복잡한 사회 구조’라고 보았다.(43쪽)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멀리 있는 우리들을 연결시켜 주고, 먼 곳까지 순식간에 갈 수 있게 해 주었지만 그 덕분에 언제든 연락 가능한 상태가 된 우리는 온전한 쉼을 누리기 어렵게 되었고, 먼 곳으로 출퇴근하면서 복잡다단한 삶을 살게 되었다. 전에는 몰라도 되었던 수많은 스마트한 일들을 배워서 사용해야 하며 배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 배워야 할 새로운 것들이 등장한다는 중압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번아웃의 원인은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비평가로부터도 끊임없이 공격받는다. 특히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탈진감은 비단 오늘날만의 개념은 아니다. 과거에는 멜랑콜리아, 아세디아, 신경쇠약증으로 불렸다고 한다. 핵심 증상이 번아웃과 비슷하다. 무기력, 사고와 행동의 둔화, 신경 쇠약, 신경과민, 절망감, 비관주의를 가져온다. 멜랑콜리아는 가장 오래된 진단명으로 히포크라테스와 갈렌이 처음 기술했다고 한다. 두려움과 원인 없는 슬픔이 합쳐져 허탈감, 무기력감, 혐오감을 동반한다. 당시에는 원인을 체액의 불균형으로 보았다. 기독교 시대에 와 아세디아로 불리는 이 말은 무관심, 무기력, 무감각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음의 피로를 의미하는 아세디아는 영적 도덕적 실패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19세기 후반 급속한 산업화 중에 미국 생리학자이자 전기치료사인 조지 비어드는 ‘신경쇠약’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고, 이후 대중화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심리 질환이 아닌 신체 질환으로 보았다는 것이 특이하다. 섬세한 조직을 가진 사람이 이 병에 취약하다고 보았다. 심적 고갈 상태는 시대에 따라 예상 원인도, 치료법도 달랐던 것이다.
심적 고갈 상태를 극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취미생활을 좋은 방편으로 예를 들고 있다. 내 책 ‘태권도와 바이올린’과 맞물리는 부분이다. 취미활동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실패나 완벽이라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고(128쪽), 오늘날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창출이나 현대 문화적 조건에 반대되는 활동으로 혁명적인 행동이라고 말한다.(129쪽) 단순하고 혁명적인 취미활동의 가장 큰 장점은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순수한 기쁨을 누리며 번아웃을 극복하여 인생을 풍요롭게 가꾸어간다는 생각은 나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한다. 저자는 조깅, 피아노 연주, 그리고 무에타이를 하고 있다. 나는 태권도와 바이올린을 통해 스트레스를 날린다. 완벽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너는 안 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인내심으로 노력한다면 번아웃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저자는 또 한 가지를 강조한다. 혼자만이 아닌 사람, 자연, 예술, 신 등 타자와의 연결에 의존하라는 것이다. 이 연결성 속에서 인생의 의미가 탄생한다고 한다. 나의 존재가 왜 의미가 있는지, 우리 인류가 왜 이어져야 하는지를 생각한다면 함께 겪는 고난과 현재의 어려움들을 극복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 목소리 리뷰
https://youtu.be/-FV3M7A7A8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