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 이홍섭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이라
나 후회하며 어둠 속으로 나아가네
지금 녹음 중인 <올리브 키터리지>를 마치고 나면 이홍섭의 시집 <터미널>을 할 예정.
녹음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 중 끌림에 의해 손이 갔고 시를 대충 읽어보고 바로 찜했다.
그 중 '등대'는 홍상수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를 떠올려준다.
영화에는 이국의 한적한 바다마을(모항)에서 '등대'를 찾는 프랑스 여인 안나가 등장한다.
영화는 세 명의 여인 '안나'를 중심으로 세 개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에피소드를 반복하며
'안나'가 넘나드는 일상의 꿈과 현실 그리고 그 경계의 허망함을 보여준다.
'안나'는 등대를 찾고 등대에 가보길 원하지만 그곳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한다.
등대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헤매는 우리가 '안나' 안에 있고 그녀의 안팎에서는
은근하거나 노골적인 욕망들이 엎드려 혀를 낼름대고 있다. 찌질하지만 귀여운.
웃음을 자아내는 위선과 능청, 동어반복의 하나마나한 말들, 은밀하게 들끓는 눈빛.
특히 스님(특별출연 김용옥)의 깡통같은 말에 몽블랑을 강탈하는 걸로 응대하는 안나는
앙큼함이 초절정이다. 힘이 세다.
아무도 아무것도 누구도 자신을 구원해주지 못할 것을 깨달은 안나는
'나만의 또 다른 길을 떠나겠다'는 결연한 메모를 남기고 길을 간다. 뒷모습이 경쾌하다.
다음 시도 <다른 나라에서>의 안나를 떠올려준다.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 / 이홍섭
젊은 날, 절에 들어와 처음 의문을 품었던 말은
무슨 거창한 화두 같은 것이 아니라
바람결에 들은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이었다.
화두를 잘못 들어 한평생 행려병자처럼 살아가야 할 스님이나
화두를 잘 들어 한 소식 한 스님이나
간장 종지 같은 머리가 깨지기는 마찬가지.
종재기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삶은 종재기가 깨지도록 가야 하는 그 무엇이기에
이 말 속에는 더덕 애순 같은 지순함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철마다 골짜기, 골짜기를 온통 뒤덮고 난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뿌리 속으로 스며드는 더덕 향 같은 것이
이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 속에는 들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