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
이병율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하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자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겨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찬란'이란 말은 말 그대로 찬란하다.
말에는 혀끝으로 만져지는 어떤 기운이 있다. '찬란'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오늘도 여러 말을 했지만 내가 한 말 중 마음에 드는 게 몇 없다.
시인은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고 노래했지만 내가 감정을 참지 못하는 건 찬란하지 못하다.
찬란은 그런 게 아니다. 알고 있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나쁘다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어둠의 영토에서 나온 것이든 빛의 영토에서 나온 것이든 감정은 감정 그대로의 존재감이 있다.
나는 나의 감정들이 소중하다. 화가 나도 헛헛해도 속이 상해도 암담해도
그런 감정들 하나하나는 나의 일부분이고 나 자체이기도 하다.
하나의 길 위에 있는 크고 작은 돌멩이와 높고 낮은 풀꽃처럼 나는 그런 것들이 소중하다.
하지만 감정에 휘둘리기 시작하는 순간 감정은 악마의 흉상을 한다.
감정이 나를 휘감고 휘돌리고 짓누르기 시작하면 나는 한동안 어쩔 도리가 없다.
감정은 내가 다스려야 하는 대상인데 주객이 전도되었다. 어리석게도.
감정코칭 전문가, 함규정 님의 이 책은 쉽고 간결하면서도 꽤 유용하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팁이 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책을 이틀 만에 녹음완료 했다.
대개의 부정적인 감정, 두려움, 분노, 열등감, 그리고
쿨함(이게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감정이란 점에 주목하라) 등을 포함해
'다 잘 될거야' 같은 매사 긍정적이기만 한 감정의 실체와 분석, 극복의 처방전까지
일목요연하다. 이런 책은 해당되는 장을 펼쳐 보는 것도 괜찮은 독서법일 터.
김형경의 <사람풍경>에서 문학적 향기를 뺀, 좀더 간단하고 실용적인 책으로 보면 될 듯. 구입하지 않고 빌려서 읽고 필요한 부분만 메모해도 무방할 듯.
하지만 직장인이 아니어도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상당히 유효적절한 내용이 많다.
특히, 쿨함을 가장해 인간관계를 망치고 자신 내면의 열정을 기만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지적하는 장이라든가, 화가 날 때 어떻게 그것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영리한 반응을 말로 드러내보일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사례가 잘 나와 있다.
감정은 건강과도 밀접하다. 예를 들어 분노는 심장을 상하게 한다. 하지만 지나친 쿨함은 상대로 하여금 솔직한 친근감을 상하게 해 상대로 하여금 거리감을 만들게 하고 좋아질 수 있는 관계를 망친다. 쿨함의 정체는 '솔직하지 못함'이다. 그 근거가 두려움이든 수줍음이든 자기방어이든.
또한, 직장인을 상대로 일주일간 내게 일어났던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적어보라고 시켰더니
단 한두 가지의 말로밖에 표현 안 하더라는 실례는 놀랍다.
일주일간 우리가 느꼈던 감정들이 과연 한두가지였을까.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구체적으로 느꼈을 텐데 실로 우리는 그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내면에 일어났던 긍정적, 부정적 감정들을 스스로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대접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오늘 내가 느꼈던 감정부터 열거해보고 싶어진다. 가령,
설렘, 불안, 안심, 따뜻함, 유머, 사랑스러움, 분노, 미움, 이해, 증오, 미안함, 다시 미움, 이해안됨, 헛헛함, 허기, 욕망, 욕구,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심정, 다시 그리움, 미움, 섭섭함, 분함, 억울함, 바보같다는 생각, 양보 그리고 갈망.
책의 요지는 감정에 휘둘리는 순간 일을 그르치니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주변에 감정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 감정이 일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내 감정을 다스리는 훌륭한 도구로 여기고 감정 다스리기를 연마하라는 살뜰한 조언.
그 대상을 이겨내고 내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내 인생의 승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씀.
지당하다. 내 감정을 송두리째 흔들고 교란하고 조종하려는 대상을 이겨냈을 때 난 진정한 승자가 되는 것!
또 한가지, 감정은 얼굴에 드러난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말도 감정을 드러내는 방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굴을 짓는 대로 감정도 따라오고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감정도 따라붙는다는 사실!
웃으면 기쁜 감정이 따라오고 좋은 말을 뱉으면 그런 감정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제일 와닿은 팁이다.
어떤 면에선 말에, 표정에 감정도 굴복하는구나. 사람이란 이렇게 연약한 존재다. 동시에 유연한 존재다.
후속으로 녹음하고 있는 책은 <이케다 다이사쿠 명언 100선>이다.
개인과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저자의 깊은 통찰이 담긴 명언과 조언이
빛나는 책이다. 짧거나 다소 긴 경구들이 책의 무게와는 반비례하게 묵직하다.
이것도 내일 한 번 더 가서 마무리할 예정.
소설을 녹음하고 싶은데, 재미난 신간이 들어오지 않았다.
<내 젊은날의 숲>처럼 내가 갖고 있는 책을 가져가서 해야될 형편이다.
이런 부분 지원이 참 아쉽다. 점자도서관에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일 텐데...
일단 이 책 다음엔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생각 버리기 연습>을 녹음하고
그 다음에 소설 한 권 해야겠다. 아마도 <일곱번째 파도>를 할 듯.
가끔 녹음하다보면 주인공 감정에 이입되어 울컥해 목소리가 떨리기도 한다.
그러지 말아야지^^
아무튼 '찬란'이 문제였다.
나는 너는 모두 찬란한 존재다.
그걸 잠시 또 잊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싶다.
사랑만이 찬란하다.
나도 너도
사랑할 때만이 찬란하다.
사랑하지 않으면 빈껍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