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지난주 나가수에서 부른 박정현의 '나 가거든'이 들을 때마다 울컥하게 한다.
인연이란 세상 다했을 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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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8-02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이야기드렸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지난번에 차를 타고 나가면서 푸른 나무들을 보는데 엉뚱한 공상을 하게 되었어요.
인간도 말이죠, 나무처럼 봄마다 태어나고 겨울마다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공상이요.
그러면서 해마다 조금씩 자랐으면 좋겠다 이런 공상이요. 저희가 40, 50대가 되어도
봄을 맞을 수 있어서 다시 쭉쭉 뻗어나갈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이요....
하지만 언니 말씀대로 시간이 남았죠, 우리 함께 갈...... 그져, 부비부비~

프레이야 2011-08-03 20:33   좋아요 0 | URL
겨울잠, 인간도 그걸 한다면 재미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는 대개 편안한데 가끔은 불안하기도 해요
남아있는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나무 한 그루 떠올려봅니다.
지난번 마녀님이 그린 나무와 그 돌아가던 길도 생각이 나네요.
부비부비 too ^^

2011-08-03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3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