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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생각해
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내면의 권태를 들추는 시크한 시선'
이국의 바다로 곧바로 이어질 것 같은 발코니. 그 마루바닥 위에 어디론가 나아갈 듯 놓여있는 투명샌들 한 켤레. 여름을 부르는 샌들 한 짝을 덮고 있는 띠지 위에 씌여있는 부제다. 나는 문득 '권태'에 붙박인다. 그리고 '내면'에, 다시 '시선'에. 작가의 시선은 표지처럼시크하다. 문장은 젊은 여성의 깡총한 치맛자락처럼 날아갈듯 군더더기가 없다. 책날개에 웃고 있는 그녀는 단아하고 섬세해 보이는 분위기에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내면이 엿보인다. 일면한 내 기억에 새긴 이미지도 그렇다. 그녀의 첫 장편소설의 탄생을 축하한다. 다소 엄살도 섞였다고 고백했지만 누구나 연애와 청춘의 그 혼란과 환희와 권태에 공감할 수 있을 거다. 나는 다소 이른 연애와 결혼을 했지만 당시 연애가 종종 고단하다 싶으면서도 참 순애보적이었다는 생각이 지금에야 든다.
흔히 우리네 삶을 한 편의 연극에 비유한다. 삶의 공허함 - 그걸 권태로 말할 수도 - 을 빗대어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텅빈 무대와 텅빈 객석을 말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스러져가는 극단의 홍보를 맡고 있던 유안이 직접 쓴 각본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과 그녀의 사소한 일상과 가족, 지리멸렬한 연애를 함께 이어나간다. 누군가의 삶이 좀더 괜찮아 보인다고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을 위악으로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헤집고 보면 자신만의 멍에에 눌려서 살아가지만 때론 그 무게가 마음대로 날아가려는 우리 삶과 우리 마음을 잡아 앉히는 역할을 해준다. 무게가 멍에가 아니라 중심잡이 역할을 한다고 느끼는 순간 삶은 권태가 아니라 끌고 나갈 만한 커다란 여행가방 같은 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평소엔 끼지 않는 안경을 극단에 갈 때는 끼고 들어가는 다소 모호한 - 청춘이 그렇듯 - 성격의 청춘 유안이 책을 덮을 즈음엔 '여름을 재촉하는 시원한 비가 내리고' 있는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곤 이상하게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소록소록 생각나는 여자가 유안이다. 나는 그가 자그마한 체격에 하얀 피부를 가진 새초롬해 보이지만 털털한 성격의 여자일 거란 상상을 해본다. 새벽안개 속을 헤치고 무작정 발을 내딛는, 그 시절의 모호함을 굳이 청춘의 특권이라 부른다면 일생에 청춘이 아닌 때가 있을까. 유안의 어머니와 오랜 세월 정을 나누는 동성친구, 유안 어머니의 팔순 어머니와 그녀가 평생 사랑한 여자, 까칠한 언니와 언니의 동거녀, 그녀들이 사랑하는 대상과 방식, 이 모든 게 유안에겐 '로맨틱 세계'다. 유안이 무대에 올리는 연극 '로맨틱 세계' 처럼 발랄한 사랑, 가까이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사랑, 소수의 사랑, 그 어느 쪽이 아니어도 세상엔 수많은 로맨틱 세계가 있다. 하지만 유안 자신의 지리한 연애는 그 반대의 세상에서 답답해 하고 있다. 선망하거나 잘 알지 못해 모호한 세계는 로맨틱하다. 하지만 내가 뒹굴어야하는 세계는 그 반대다. 유안이 이별 후 보통의 연인이 그러그러한 연애를 한다고 머릿속에서 사실화한 방식으로 승원의 흔적을 뒤질 때 그 세계는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 유안이 말했듯 할수록 바닥이 드러나는 느낌, 삶이 우울해서 일상이 평온하지 않아서 사랑에도 문제가 있다는 건 어지간히 맞는 말 같다. 그렇다고 동료의 쿨한 충고처럼 '사랑만 사랑하기'엔 너무 생각이 많다. 가만 들여다보면 유안은 대개의 사람이 그렇듯 자신 안에 '나'가 조금 더 많다. 과연 '나'를 진정 사랑해서일까?
유안은 가까이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을 이해해가면서 자신의 지리멸렬한 연애 혹은 사랑과 당당히 이별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외딴 산골의 살얼음이 얼린 저수지 같은 느낌'이 들어 굳이 사랑이냐고 묻지 않은 소수(일 거라 생각한)의 사랑에 비해 자신의 기반 약한 사랑 - 그것도 사랑은 사랑이다 - 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닫는다. 재영의 동거녀가 말했듯 말이 잘 통하는 사랑, 그것은 서로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랑을 뜻한다.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서로 그것을 인정하고 불편과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포함한다. '나'를 얼마나 버려야 그게 가능할까. 질투는 열등감에서 온다고 한다. 자신을 완벽하게 사랑하면 '나'에 대한 집착과 질투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니 안다고 생각하기에 - '나'에 열등감을 느끼고 '나'를 질투하고 집착한다. '나'는 내가 질투하고 집착할 만큼 잘나지 않았으니 그만해도 될 터. 그리고 더 겸손할 필요도 없을 터. 왜냐하면 겸손할 만큼 '나'가 그리 잘나지 않았으니까. 먼저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고 또 완벽하게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에 불과할지 모른다. 유안이 기억에 남을 만한 연애가 아니라 기억을 소진시키는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늘 갈등한 건 근거 있는 불안이었다.
언젠가 들은, 삶과 연애하듯 사는 것 같다는 말은 내게 상찬으로 들린다. 그만큼 삶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 모서리를 내어줄 수 있는 애심이 있는가 자문해보면 자신이 없다. 아직은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연애와 삶을 등식으로 놓고 보면 통하는 점이 많다. 연애의 방식은 삶의 방식을 좌우한다. 연애를 하면 상대의 말을 120% 듣게 된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몸짓언어와 표정까지 읽고 상대의 욕구에 공명한다. 말이 잘 통한다는 뜻은 기다려준다는 의미와 함께 우선 적극적 듣기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유안은 연극과 연애한다. 그녀는 저 많은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왜 가지 않을까, 마뜩지 않다. '연극을 보러 가자'가 아니라 '연극이나 볼까'라는 말이 아프다. 마치 '삶을 살자'가 아니라 '그냥 한 번 살아볼까' 정도의 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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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문장에서 온전한 목적어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모든 것의 주어가 되었을 때 기쁘지만은 않은 것처럼. -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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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사람이 봐주지 않아도 연인의 시선에는 가장 아름답게 포착되길 바라는, 단 하나의 주어, 단 하나의 온전한 목적어가 되고 싶은 유안의 바람은 연애를 하는 사람의 바람이다. 또한 살아가는 대개의 사람이 갖는 바람이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목적지 없이 나아가기도 한다. 가다보면 샛길로도 가고 새로운 길도 만들어 가는데 가다가 가끔은 돌아보기도 한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멈춰서 내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잊지 말자는 말이 떠오른다. '나를 생각해'는 단순한 이기적 자기애가 아닌 좀더 성숙한 자기애, 모든 사랑의 출발. '출발지로서의 나'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곳엔 수많은 '너'가 나를 세우고 이끌고 밀어주고 있다. 유안이 알든 모르든 존재하는 것이다. 유안의 말처럼 내가 잊은 사랑이라도 세상은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다.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존재라도 세상엔 도처에 나를 세우려는 '너'가 있어 오늘도 쓰러지지 않는다. 이 비 그치면 여름이 올 것이고 장성한 초록의 그늘이 생채기 많은 '나'에 드리워질 때쯤이면 더욱 깊어진 눈매를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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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은 가장 노릇을 잘 하고 있나?
아무도 영웅이 되려고 하지는 않지. 그저 영웅이 나타나기만을 바라는 거야.
그 사람의 노력과 투지, 희생을 기다리지. 과연 누가 자네들을 대신해서 희생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한 영웅은 될 수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지.
영웅도 영웅이 되기 위해 나선 것은 아니었어." -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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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극작가 겸 연출가로 이름을 날렸던 정 선생님이 유안을 포한함 극단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그리고 유안의 능력을 의심스러워하는 극단 사람들에게 그녀에게 필요한 건 격려와 지지라고 말해준다.
늙음의 지혜! 연륜은 청춘이 몸소 지불한 대가(代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