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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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내 삶과 시대는 암적색 휘장으로 덮였는데, 눈 들어보면, 오 저기, 바람 부는 광휘의 새 날들, 흰 면사포를 쓴 새 신부같이, 사뿐사뿐 내게로 오고 있었다. 나는 비몽사몽 나의 꿈길로 들어갔다. 실존의 난로에선 여전히 생살이 타고 있었지만, 나의 꿈길은, 눈물보다 투명하고 초롱보다 환했다. 나는 꿈의 비단길을 타고 비행을 계속했다.-198-199쪽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청춘을 표상하고, 그것이 시들어 이윽고 꽃씨를 맺으면 그 굳은 씨앗이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이라는 씨앗은 수많은 기억을 고통스럽게 견디다가, 죽음을 통해 해체되어 마침내 땅이 되고 수액이 되고, 수액으로서 어리고 젊은 나무들의 잎 끝으로 가, 햇빛과 만나, 그 잎들을 살찌운다.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251쪽

늙은 사람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늙으면 속눈이 더 밝아지니, 젊은 애들 마음을 읽어내는 건 여반장과 다름없다. 더구나 나의 피부는 두꺼워 홍조도 감출 수 있고, 나의 주름은 깊으니 독심 품는다면 오욕칠정인들 안으로 숨기는 게 뭐 어렵겠는가. -271쪽

'나는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손은 '말굽'처럼 단단하고 나의 몸엔 '납'처럼 무거운 옷이 입혀질 것이다. 그게 내 길이었다. 생각해보면, 서지우를 핑계대면서, 어쩌면 나는 그때 스스로 본질적인 내 자신의 광포한 죽음을 불러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282쪽

관능은 아름다움인가, 연민인가. 아름다움이 참된 진실이나 완전한 균형으로부터 온다는 일반적인 논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각자의 심상을 결정하는 주관적인 기호에 따른 고혹이거나 감동이다. 그것에 비해, 연민은 존재 자체에 대한 가없는 슬픔이고 자비심일 뿐 아니라,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도덕률의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다. 그 두 가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상대적 개념인바, 완전한 합치는 쉽지 않다.-309쪽

아름다움에 대한 충만한 경배가 놀라운 관능일 수 있으며, 존재 자체에 대한 뜨거운 연민이 삽입의 순간보다 더 황홀한 오르가슴일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어찌 꿈엔들 상상할 수 있으랴.
......
사형선고는 인간이 가진 최상의 가치를 증명하는 표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 이외엔 오로지 죽임만 있을 뿐 사형선고는 없으니까.-314쪽

좋은 작가는 킬러같이 정밀하고 철저하고 용의주도해야 돼. 킬러는 바람의 방향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거든. 예술이 그렇다네. 완전하 예술가는 곧 완벽한 킬러라 할 수 있지. -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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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05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은 사람의 힘이라.
저도 늙으면 보여줄 힘이란 게 있을까요?
킬러는 너무 힘든 삶같아요 냉혹하고 냉철해야하는
그러지 못해서 이도 저도 아닌 삶을 사는 느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