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전국책(평정편)의 두께가 워낙 그래서 녹음을 마치는 데 좀 오래 걸렸다. 게다가 반편집까지 해야되기 때문에 녹음속도가 전보다 느려질 수밖에. 

오늘 설 전에 왠지 마치고 싶기도 하고 찜해놓고 있는 김훈의 '공무도하'를 얼른 읽고 싶은 욕심에 빗속을 뚫고 또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예 매일 출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요새 내가 하고 있는 일 중 가장 맘에 드는 일이니까.  

그래서 오늘 '전국책'과 '고슴도치의 우아함(편집)'을 마치고 드디어 '공무도하' 1A 테잎을 해놓고 돌아왔다. 김훈의 전직인 신문사 기자 경험을 살려 기자 문정수라는 남자가 나오고 출판일을 하는 나목희라는 여자가 나오는 대목까지 읽었다. 발단의 배경은 장마전선이 제주에서 북상중이고 한강이 범람하여 물난리가 나고 있는 세상이다. 주로 단문을 쓰던 그가 이 작품에서는 장문이 많다. 그의 글이 자주 그렇듯, 반점으로 토막 내어 여러개 연결된 장문이다. 또, 댓구가 되는 단어와 구절을 자주 쓰고 결국 '이거나', '이지 않거나'가 하나로 통하는 문장을 만들어 낸다.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호흡 조절을 잘 해서 읽어야할 듯.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지 궁금해서 내일도 가서 읽고 싶은데 내일 시간이 어찌 될지 모르겠다.  

그런데 녹음을 하던 중, 아래와 같은 대목에서 멈추었다. 과연 김훈이 표현한 아래와 같은 글은 어떤 글일까? 자신의 글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소망같기도 하고. 아무튼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자신만의 문체에 참, 관념의 대가라는 생각도 든다.    

나목희가 작업하는 원고는 중국의 문물학자 타이웨이 교수가 쓴 역사기행서 '시간 너머로'의 번역원고였다. 그 글의 미덕을 김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글은 과연 어떤 글인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쓸 수만 있다면 부럽다는 말이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표준으로 내세워서 이 세계를 안과 밖,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사물과 풍경에 함부로 구획을 설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언어는 개념을 내세워서 사물을 무리하게 장악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모든 보이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과 친화할 수 있었고, 친화로써 비밀에 닿았고, 그 친화의 힘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통로를 열었고, 그 통로를 따라 글은 전개되었는데, 그가 찾아낸 비밀은 단순하고 또 명료해서 비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문체는 순했고, 정서의 골격을 이루는 사실의 바탕이 튼튼했고 먼 곳을 바라보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자의 시야에 의해 인도되고 있었다. 그의 사유는 의문을 과장해서 극한으로 밀고 나가지 않았고 서둘러 의문에 답하려는 조급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의문이 발생할 수 있는 근거의 정당성 여부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글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았으며 논리와 사실이 부딪칠 때 논리를 양보하는 자의 너그러움이 있었고,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 안에 이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았고, 그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상의 무질서를 잘라서 내버리지 않았으며, 가깝고 작은 것들 속에서 멀고 큰 것을 읽어내는 자의 투시력이 있었다. 그의 글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성찰에 가까웠고 증명이 아니라 수용이었으며, 아무것도 결론지으려 하지 않으면서 긍정이나 부정, 그 너머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가 보여주는 모든 폐허 속의 빛은 현재의 빛이었다. 

                                                                             - 공무도하, 문학동네, 25-26쪽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이 2010-02-12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하게 안읽어야지 안읽어야지 하면서도 꾸역꾸역 김훈을 읽게 되요. <공무도하>도 누가 보내와 아직 책꽂이에도 못들어가고 책상위에 누워있는데 저런 구절이 나온단말이죠? 프레이야님 덕분에 또 확인하고 싶어서 읽게 될것 같아요. 좋은 꿈 꾸시고 만사형통하는 새해 맞으셔요.

프레이야 2010-02-12 18:47   좋아요 0 | URL
그의 문장, 머뭇거리기와 치고나가기를 마음대로 하며 노니는 것 같은
문장들, 때론 너무 관념적이지 않은가 싶다가도 다시 읽어보면 일면
공감되는 높고 멀고 무거운 문장들.. 매력인 것 같아요.
여기서 '높고 멀고 무거운'은 그가 즐겨쓰는 형용사를 일부러 흉내내어
봤어요.ㅎㅎ 반딧불이님도 기운찬 경인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2010-02-12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2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나무집 2010-02-12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읽을 땐 자꾸 문장이 짤리는 듯해서 싫은데(전 이런 문장에 몰입을 할 수 없어요.)
두번쯤 읽다 보면 주인공의 마음이 되고 작가의 마음이 되고 그러더라구요.

프레이야 2010-02-12 22:21   좋아요 0 | URL
저도 잦은 반점이 정말 그런 느낌이 들게 하더군요.
님 말씀처럼 그게 인물과 작가의 심리를 대변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설 연휴 단란하게 보내세요, 소나무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