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아프리카>를 리뷰해주세요.
눈 오는 아프리카
권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권리,라는 작가를 처음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2004년에 <싸이코가 뜬다>로 한겨례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우선 두가지 제목만 봐도 제목을 좀 특이하게 짓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호기심을 끄는 데는 일단 성공이다. 2000년부터 42개국 여행을 했으며 앞으로 북한을 가보고 싶다는 젊은 작가다. 이건 정말 대단하다. 난 꿈만 꾸고 있으니. 이 책은 저자가 352일 동안 39개국의 곳곳을 여행하면서 써내려간 소설이다. 지도와 함께 세계 여러나라의 유명한 곳을 대리여행하는 재미는 솔솔하다. 그러나 여행안내서 같은 걸 기대하면 곤란하고(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저 소설의 배경으로서 역할한다. 한국에서 유럽, 남아메리카를 거쳐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의 여정이 이어지는데 그다지 소설적인 공간적배경으로 필연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스토리의 전개에 반드시 그 공간이 유효적절하다기보다 그 공간에 스토리가 따라가는 인상이다. 그저 주인공 스무살 청년 고유석의 성장기로서의 긴 여정으로 보면 적당할 듯하다.   

저자가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는 후기에서 그는 여행관을 이렇게 적어둔다. - 여행은 제자리 버티기다. 없음에서 버티기, 외로움에서 버티기, 인생이라는 고통 속에서 버티기. 그에게 여행은 버티기 위한 삶으로, 그런 삶의 훈련으로서 한 몫 하는 것 같다. 여행이 그렇듯, 인생도 대개 있기보다는 없음, 충만감보다는 외로움이 자주 자아를 흔들어 놓는다. 그런 생각은 망상과 혼돈의 시기를 사는 유석에게 여행의 기회를 주게 된다. 유석은 저자 자신의 한 부분 또는 자화상이기도 할 것이다. 가볍고 유머러스한 서술로, 실제 여행을 하면서 겪었고 보았던 일들이 소설 속 에피소드로 재미있게 읽힐 수 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 그것이 사건과 인물의 성장에 모종의 역할을 하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너무 우연에 기대어 등장하는 건 아닌가싶다. 공간의 이동이 크고 잦고 뜬금없이 바뀌어버리는 통에 혼란스러운 면이 다소 있다. 

음모와 시기 질투, 아버지의 죽음과 그의 자화상에 얽힌 의문, 반전, 해결 등의 사건전개에 미술 예술론이 전개되는데, 이 부분은 좀 천천히 곱씹어 읽어볼 만하다. 이런 부분에선 진지한데 곧 가볍게 능청을 떨며 전체적으로 너무 무겁지 않은 서술을 이어간다. 저자가 이 소설 속에 담은 예술관에 좀더 귀기울여 보면 흥미롭다.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색다른 표현이 눈길을 끈다. 그야말로 '영감님이 오셨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오기까지 그가 바라는 건, '한 송이 할미꽃이 피어 있는 영감의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꾼이 된 심정'에 도취되는 것이다. '그렇게 파낸 영감의 정수를 그의 영혼 안에 집어넣고 그것에 생명을 부여하고 원래의 자리에서 기능하기를 바라고, 호기심과 욕심을 채울 때까지 그는 미친 속도로 영감의 무덤을 도굴'했다.(95쪽)  하지만 금세 유머러스한 문체로 가볍게 날려준다. - 그는 또한 '영감이 재채기를 하며 무덤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며 '변비 걸린 나,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영감님을 몸 밖으로 토해낼 때가 온다. 봉인되면 해제되는 날이 오듯이.'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끙끙의 시간을 오래도록 가졌다. (96쪽)  이런 식이다.  

눈 오는 아프리카!  이것이 상징하는 건 '영감은 어떻게 오는가?'라는 질문 자체다. 이 물음은 저자가 자신에게,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에게 묻는 것일 수도 있다. 모작에 재능이 있는 미술대학 재수생 유석은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사람들과 벌인 토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 같은 예술가의 내부에서는 그동안 단순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조합하고 재구성해서 영감을 탄생시키지. 영감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상태에서 탄생되지. 전혀 논리적이지가 않아. 나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영감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술가의 내면에 떠올라서 예술가를 무한한 상상의 기쁨으로 충족시켜 주었다가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곤 하는지 궁금해서 미치겠어. (275쪽)

 
   

 

유석이 가장 사랑한다는 에곤실레의 <변용> 등 두루 등장하는 유명작품들, 화가로서 색을 보는 눈, 예술혼을 불러주는 자신의 마돈나, 예술작품 속의 긴장, 위작과 모작에 대한 이야기가 무겁지 않게 나온다. 특히 유석은 <변용>을 보며 인생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난 이 작품을 보지 못해 모르긴 해도 소설 속에 묘사를 해두었다. 유석은 이 그림을 보며 '예술을 한다는 건 중력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도 깨닫는다.  "절망으로 절망을 이기려는 사람이 자신 말고도 지구상 어딘가에 또 있었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다"는 구절이 마음에 든다. 스무살 시절, 혼돈과 치기와 자기정체성의 모호함으로 고뇌했던 시간들!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한 그 시절의 정신세계를 떠올려 주는 구절들을 만날 수 있는 건 장점이다.  

이 소설에서 저자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점이 단점이 되기도 하고 기대 충분한 가능성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작품 전체를 이어가는 정신은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그리고 다시 들어가기'라는 신화에 가깝다. 어둡고 광막했던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 성장한 듯한 그는 자신 안의 어린아이 - 사소한 감정에 넘어지고 헤맨 아이, 최장거리를 날고 걷고 기어서 온 아이 - 를 떨쳐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는 초반에 최교수가 그에게 한 충고를 되돌려보면 두 가지 해답 중 전자를 실천한 것처럼 보인다. - "예술가가 그림자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태양의 바로 밑에 서거나 암흑 속에 자신을 가둬야 한다." (32쪽)  저자는 종결부분에서 여성성에 좀 더 기울어지는 듯하다. 고향에는 홀로 된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며 점심 준비에 바쁘다. 고향이자 어머니는 그를 키우고 나아가게 한 빛과 바다, 빗과 지팡이로 상징된다. 아이다운 영감의 소중함은 강조되고.  

 세계를 돌았지만 성장했다기보다 아이의 얼굴을 하고 돌아온 유석, 그건 역설적인 의미로 '영감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처럼 들린다. 여행은 돌아오는 데에 의의가 있다는 말은 흔한 말이지만 몇겹의 의미를 가진다. 여행을 삶으로 등치해두고 보면 그 의미가 더 또렷해진다. 그것은 나그네의 여정을 떠난 자가 고향으로 돌아옴이고, 다시 아이로 돌아옴이다. 이 책 <눈 오는 아프리카>는 여행을 이렇게 말한다. 성장을 통해 아이다운 진정한 영감을 간직하고 보석처럼 빛나는 얼굴로 '빈곤과 행복'이 공존하는 일상의 현실로 돌아옴이라고. 그저 하얀 캔버스일 뿐이었던 '눈 오는 아프리카'는 마음 속에 간직하는 동경의 이미지, 마음의 고향에 가깝다. 그 모든 경계와 습관, 익숙함과 나태함으로부터의 이탈이고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출일 것이다.       

   
 

어머니라는 빛을 통해 아버지라는 그림자를 지운다. 어머니라는 바다를 통해 아버지의 죄를 씻는다. 어머니라는 빗을 통해 아버지라는 동요를 잠재운다. 어머니라는 지팡이를 통해 아버지라는 미로를 헤쳐 나간다. 마침내 아이는 어머니라는 빛과 바다와 빗과 지팡이 없이도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운다.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한다. 색깔도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는 영감을 이용해 소박함과 인정, 빈곤과 행복이 있는 곳으로 언젠가 들어갈 것이다. (4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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