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많은 여인들 중 가장 오래도록 가장 깊은 관계를 유지했던 여인은 에밀리 플뢰게로 알려져있다. 몇 년 전 읽었던 엘리자베스 히키의 소설 <클림트>에서 마음이 끌렸던 부분은 에밀리가 구스타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 또 그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이었다. 사진이나 그림, 편지나 그 어떤 역사적 기록이 보여주는 것에는 이러한 내밀한 심적 작용에는 미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그런 부분을 작가가 섬세하게 파고들었던 점이 흥미로웠다. 이 책에는 풍경화 '양귀비 들판'을 비롯해 21점의 작품이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사이사이에 실려있다.
유명한 그림 <키스>를 표지에도 담고 있는데 에밀리가 그 여인이라고 알려져있다. 에밀리는 구스타프의 이중적일 수밖에 없는 내면을 간파하고 있었고 그 사실로부터 자신을 독립적으로 지켜나갔다는 점이 영리하다. 상처를 입지 않고도 오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호감이 갔다. 꿇어앉아 키스를 받으며 황홀해하고 있는 저 여인은 절벽끝에서 발끝에 힘을 주고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감정의 매달림, 지극함이랄지. 하지만 에밀리는 구스타프가 그린 저 그림으로 자신의 위치와 두사람의 거리, 그리고 그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어떤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종류의 애정을 느꼈음직하다.
- 순간 내가 영리하고 조숙한 척해 봐야 애완고양이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먹이를 제공받고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쓰레기통을 뒤져 먹고사는 고양이들한테는 나 같은 건 한입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발톱조차 없다.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일었다.(134쪽) -
에밀리는 그가 마지막에 부른 이름이었고 그녀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준 여인이었다.
--------
사진동호인들과 카쉬 전을 먼저 보고왔던 옆지기가 내게 먼저 이 전시를 권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싶어... 길은 멀지만 큰맘 먹고 보고왔다. 간 김에 카쉬 전도 보고 싶었지만 이미 시간도 늦어버렸고 희령이도 지쳐하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옆지기는 안 들어가고 희령이랑 둘이서 들어갔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장엔 사람들이 붐볐다. 설명을 꼼꼼히 읽고, 듣고, 엄마가 아이한테 설명해주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전체적으로 질서정연했다. 모두 둘러보는 데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많은 드로잉들이 눈길을 끌었다. 밑그림이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좋았다. 예전에 피카소전에서도 보았지만 스케치한 드로잉의 날렵하고 예리한 선들의 느낌이 색을 입기 전의 날것으로 정교하다. 여인의 반누드 드로잉들은 희령이가 보기에 좀 그래서 아이손을 잡고 걸음을 좀 빨리해서 지나갔다. 알려진 그림들도 이렇게 눈앞에서 보게 되니 그 색채가 현란했다. 작업복으로 smock을 입은 모습, 황금빛 장식들, 엽서와 포스터, 평생 그를 따라다닌 가족과 질병에 대한 콤플렉스, 여인들, 철학적 주제와 알레고리로 읽히는 작품들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그의 풍경화가 마음에 쏙 들었다. 자잘한 꽃들과 깊고 푸른 초록 색감에 빨려들어 갈 듯했다. 밝지만 밝지만은 않은, 어딘지 꿈속같은, 그의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평온한 휴식과 고요한 설렘이 느껴졌다. 일년의 반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나머지 반은 에밀리와 아터 호반에서 보냈다는 그. 하고 싶은 일을 절반씩 나눠 하며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되지않을 생각을 해봤다.
(베토벤 프리즈, 그림 가져옴)
1902년 제14회 분리파 전시회는 예술의 신, 베토벤에 대한 헌사로 마련되었다. 그때 전시가 끝나면 지우기로 하고 탄생된 벽화 <베토벤 프리즈>를 볼 수 있었다. 전시장의 안쪽 하얀 벽면의 3면에 펼쳐놓았다. 다소 엉뚱한 공간 같기도 하고 그 안에 선 내가 낯설었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드는 것 같았다.
1면 Yearning for Happiness에선 하늘위를 둥둥 떠서 가는 뮤즈들의 기도의 손이 하나의 물결처럼 길게 이어지고 그 열망이 신에게 닿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황금빛 갑옷을 입은 기사(신)는 냉담해 보인다. 베토벤을 그린 것이라지. 2면 Hostile Forces에서는 적대적인 힘을 아름다운 외양으로 달콤하고 유혹적인 것으로 그려놓았다. 적대적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지 않을까. 인간 최대의 적대적 힘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 오른쪽에 그려져있는 뱀이 눈길을 끈다. 뱀은 유혹(죄악)이기도 하지만 치유의 의미! 영화 '박쥐'에서 상현과 태주가 살인을 저지른 후 악몽에 시달리며 신하균을 가운데 두고 한 침대에 돌아누워있는 장면. 그 장면에서의 시트와 이불이 떠오른다. 그 무늬와 여기서의 뱀무늬가 완전히 흡사하다. 놀라워라. 3면 This Kiss to the Whole World 에서는 이 모든 고통(질병, 죽음, 광기)과 적(욕망, 음란, 무절제)인 힘을 예술적 희열로 극복하자는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한다. 열렬히 합창하는 뮤즈들의 황홀경에 빠진 표정, 그 앞에서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남녀. 기도를 받아들인 신. 예술적 희열, 그것을 영원한 정열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줄까. 갑옷과 가면을 벗고 순연하게 부르는 시이거나 노래. 클림트가 예술가적 욕망과 인간의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였음을 방증하는 작품들이 거칠고도 섬세하며 어둡고도 눈부시다.
56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클림트는 가족력으로 두려워했으나 정작 사인은 스페인독감이었다고 한다.
- 존 말코비치가 클림트로 나온 영화 <클림트>의 마지막 장면. 양복 입은 저 청년은 28세에 요절한 화가 에곤 실레. 영화에선 나오지 않지만 그도 클림트 사후 스페인독감으로 죽었다고. 몇년 전 리뷰 올렸던 영화다.
사진 몇 장 ^^
<키스> 1907-1908 /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907
희령아, 그 사이에 서봐~
요건 희령이가 찍어줬다. 전시장 밖에 이런 서비스 장소를.. 좀 허술하긴 했지만^^
손에 든 건 누구에게 선물할 3만원짜리 도록. 전시되지않은 작품 40여점(?)인가가 더 담겨있고 2만원짜리보다 프린트도 더 잘 되어있다고 해서. 내것도 사올 걸 살짝 후회되네.
1917년 <아담과 이브>, 안경 낀 이브^^
넋놓고 보고 있네. 머그도 예쁘고...이러며. 결국 안에 들어가 이것저것 눈요기하고 들었다놨다 하기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