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대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대상과 합치하지 못한다. 사랑은 ‘결합된 사랑’ 조차도 대상화한다.
*
변용은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다. 변용은 사랑에 뒤따라온다.
그러나 변용을 위해 사랑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사랑을 위해
변용을 감수한다고 거짓말해야 한다.
*
사랑은 껍데기다. 가장 민감한 껍데기.
낭심의 피부처럼 유별나게 부드러운 껍데기.
*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의 윤곽을 지우는 것이다. 아니,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는 이미 우리 주위를 흐르면서 지워
져가는 부분적인 표정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
사랑은 처음에 온다. 지혜가 끝에 오는 것과 같이.
처음이든 끝이든 모든 공식은 감옥이다.
*
사랑의 방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더럽혀진 것에 대한 사랑은 그러나 순결할 수 있다.
사랑은 ‘무엇’에 대한 관계이지, ‘무엇’은 아니기 때문이다.
*
사랑의 전제(前提)는 떨어져 있음이다. 시 - 간신히 맞붙은 상처를
다시 한번 찢어발기기.
*
사랑은 언제나 죽음을 낳는다. 죽음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
우리는 셋이서 산다 - 너와 나, 그리고 파산(破産) 혹은 끝장.
-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 /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