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 잠꾸러기야 아름북스 9
김아현 지음 / 삼성당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작은딸이 액자값을 가져가야 한다고 손을 내밀었다.
뭐? - 반에서 두 명씩 동시쓰기 뽑았는데 걸렸어. 이만오천원이래. - 뜨악 -
학교에서 불시에 동시쓰기대회를 했나보다. 쓴 걸 읊어보라고 했더니 아주 가관이다. 생활이나 체험은 하나도 없고 어디서 봤는지 멋부리려는 머릿속 단어들이 더듬더듬 아이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휴, 그렇게 가르쳤건만 얘가 왜 이 모양이지. 실망을 감추고 ‘잘 했네’ 라고 눈을 못 맞추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제목은 ‘가을’이란다. 지금 그 시는 시화 액자로 만들어져 복도에 전시되어 있나본데 나는 아직 가서 보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전부터 자주 나왔던 쓴소리이긴 하지만 교과서 속 동시도 그렇고 우리가 읽히는 동시들도 예쁜 말, 흉내말 꾸며쓰기 식으로 시를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구름은 요술쟁이’ 이런 식의 뜬구름식 비유만 무성한 시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건 어린이시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테다.

<눈을 떠 잠꾸러기야>는 초등 4학년 여자 아이의 시를 모은 어린이시집이다. 동시는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쓴 시라는 점에서 어린이시와 구별된다. 이 시집은 어린이 자신이 오래 전부터 써온 시들을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묶었다.

 이번에 4학년 아이들과 이 책을 함께 읽고 낭송도 하고 함께 이야기도 나누었다. 아이들의 반응은 거의 일괄적으로, 어른들이 쓴 동시보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고 쉽고 재미있고 친하게 느껴져서 좋다는 쪽이다. 그동안 읽어온 동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어른이 쓴 것이니 당연히 아이들의 공감대와 눈높이를 제대로 맞추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이 쓰는 비유가 아이들에게 와닿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여자아이가 아주 반가운 반응을 보였다. - 그런데 좀 깊이가 없고 어떤 시는 무슨말인지 도무지 느껴지지 않던데요. 주전자 주둥이가 왜 늘어났다는 건지. 좀 유치한 것 같기도 하고요. 억지스러운 비유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김아현 어린이가 쓴 시들을 보면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싶은 정도로 톡톡 튀는 발상이 인상적이다. 장점이라면, 전체적으로 밝고 긍정적인 성품이 느껴져 건강함을 보여준다. 뽀뽀, 사랑이나 결혼, 인생에 대한 생각까지 발랄하게 풀어 쓴 시는 이맘때 아이들의 성적 호기심과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느껴져 귀염성스럽고, 또한 의외의 성숙함에 놀라운 시도 있다.  예를 들어,

인생 (p90)

 

하늘도 사람이 걸어선 못 올라가지.
인생도 완전한 끝가지는 못 가는 거야.
처음부터 불가능한 단계로는 못 올라가는 거야.
올라갈 수 있다 해도 그게 끝은 아닌 거야. 


김아현 어린이가 이문열의 ‘하늘길’을 읽었을 리 없는데 아이가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히려 어른스럽다.

 날마다 반복되는 요즘 도시 아이들의 일상을 글감으로 한 시도 따분하다 귀찮다가 아니라 ‘즐거운 하루’라고 생각하는 아이다. 사물이나 자연의 일부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것에 자신의 감정을 담아 쓴 시들,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사랑스럽다. 땅, 보름달, 무당벌레, 가을 한라산, 바닷가에서, 붉은장미의꿈...  등등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 많은데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그속에 아이만의 상큼한 눈이 느껴진다. 그리고 생활 속 자잘한 물건들에서 신체의 일부 ‘발톱’에 이르기까지 아현이의 글감은 무궁무진하다. 깎아서 잘린 초승달 모양의 발톱을 글감으로 쓴 아래 시는 이렇다.

 발톱 (p149)


 발톱 하나가 / 떽떼구루루 굴러서 / 개미의 목마가 된다. //

 벼룩의 줄넘기도 된다. //
 풍뎅이의 머리띠가 된다. //
 어떻게? / 쓸모가 많은 내 발톱

 어찌 보면 너무 꾸며 쓴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시의 리듬감도 잘 살렸고 비유어도 신선하다. 상상력의 한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시는 정말 체험이 자연스레 묻어나지 않아 거부감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요즘 도시 아이들에게 체험이란 게 무엇일까 싶다. 이 시는 농촌이나 산골의 어린이가 쓴 시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며 읽으면, 그런 상상력의 샘마저 말라가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동시집이 아닌 이 어린이시집이 괜찮은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각 시마다 직접 그려놓은 그림도 재미있다. 이오덕 선생님이 보면 혹평을 할 것 같은 시집이지만 요즘 아이들, 자연의 체험이나 자신의 온전한 생활이 없고 엄마가 짠 일정에 따라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정도의 발칙한 상상과 건강한 성정을 오히려 칭찬하고 싶다.

 

 우리집 작은딸도 텔레비전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이다. 나는 모르는 드라마를 꿰차고 있으니 큰딸이 '아줌마'라고 놀리기도 한다. 김아현 어린이의 시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시는 아래의 시 '날 지켜 줘' 였다. 이 아이, 드라마를 많이 본 것 같다. 그것도 생활이니 생활이 묻어나지 않았다고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 같다. '도토리' 같은 시는 즐거운 경험이 잘 묻어나 있기도 하다.

 

날 지켜 줘 (p20)

 

나는 널 사랑해/그러면 날 지켜 줘./나는 너랑 결혼하고 싶어./그럼 날 지켜 줘./

나를 사랑하면 날 지켜 줘./날 지켜 줄 수 있니?/결혼하려면 날 지켜 줘.

 

 이 시 아래 그림은 하트 모양 안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입술을 뾰족 내밀고 뽀뽀하려는 모양인데, 입술 사이에 노랑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고 있다. 깜찍한 것 같으니라구. 아마 우리집 작은딸이 뭔가 종이에 그리고 있다가 내가 가까이 가면 부리나케 감추곤 하는 그림이 이런 종류의 로맨틱 판타지를 담은 게 아닐까 싶은데, 확인은 아직 못 했다.^^ 최근에 본 영화 '사랑'이 생각나 어찌나 우습던지. 제대로 통속적이니 그게 삶을 잘 반영한 것이지 않나. 이 아이, 사랑을 제대로 비꼬울 줄 안다고 생각하는 건 또 시를 읽는 내 자유겠거니.

 

 

 4학년 아이들과 함께 시 쓰기를 했는데 이 책에 담긴 시 못지않게 잘 썼다. 아이들은 누구나 시인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이나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발견할 때면 참 반갑다. 타인의 눈과 자신의 눈이 섞이고 잘 빚어져서 또 다른 세계가 빚어질 것이니 지금은 다 과정이고 그래서 미덥다.

 

 

 큰딸이 다섯살때부터 쓴 시를 한동안 모아두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없어졌다. 이렇게 모아서 한권의 책으로 묶어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게으른 엄마의 뒤늦은 후회. 그래서인지 어릴 땐 곧잘 시를 끄적거려놓던 큰딸은 지금은 시라면 킥킥거리고 간지러워한다. 시가 그렇게 우습더냐? 시를 쓰는 사람들이 생각해볼 일이다. <눈을 떠 잠꾸러기야>는 '나무를 까르르 꽃은 깔깔깔 웃게 만드는 동시'라고 부제가 달려있다. 큰딸이 간지러워하는 종류의 웃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보는 눈에 따라서, 생각하기에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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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10-05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중요해요. 꾸며쓴 시를 잘썼다해주면 다른 아이들도 어느틈에 다 그렇게 하거든요.

프레이야 2007-10-05 11:05   좋아요 0 | URL
그러니 말이죠^^ 하늘바람님 태은이에게 편지 쓰고 왔는데요^^
보셨어요? 에궁 예쁜 태은이~

글샘 2007-10-0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에게 생활글을 써 보게 하려면요, 주제를 좀 구체적으로 줘야 하더라구요.
하늘... 이렇게 주지 말고, 하늘 하면 떠오르는 사람...처럼...
아이들 동시 읽어 보면, 참 구름은 요술쟁이 풍이 많죠^^

프레이야 2007-10-05 12:04   좋아요 0 | URL
네, 글샘님도 현장에서 많이 겪으실 것 같아요.
그래서 아예 생활시 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더군요.
구체적 주제를 주는 것, 구체적 소재를 주는 것, 다 중요하더라구요.
글쎄 우리집 작은딸이 쓴 시의 제목도 '가을'이더라구요.
가을, 참 어지간히 광범위해서리.. 뜬구름 잡는 시가 나올 수밖에요.
우선 글감을 갖고 생각그물을 그려보고 거기서
구체적인 하위글감들을 다시 골라 쓰게 하니까 괜찮더군요, 전.
참, 소예 아직 못 가고 있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