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크는 시계 돌개바람 11
발레리 제나티 지음, 김주열 옮김, 프레데릭 리샤르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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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아이들, 저학년에서 중학년까지 읽을 수 있는 ‘돌개바람’ 시리즈 신간이다. 책날개를 보니, 프랑스 작가 발레리 제나티는 이력이 독특하다. 열세 살에 이스라엘로 가서 열여덟에는 이스라엘 법에 따라 여자라도 군복무를 시작했고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가정부, 가게점원, 기자, 히브리어 교사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이 책은 작가의 이력만큼이나 톡톡 튀는 화법이 유쾌하고, 자유분방하다.

 세상에나, 키 크는 시계라니! 판타지인가, 아니면 요즘 극성스러운 엄마들이 아이 키를 크게 하고 싶어 찾아다니는 특수클리닉인가? 우선 제목이 궁금증을 유발한다. 언뜻 추측했듯이 여기서 ‘키’는 마음의 키를 말하는 것. 자전적 소재라고 여겨지는, 여덟 살 여자아이의 성장을 짧은 에피소드로 빚어낸 이야기다. 이야기는 명쾌하고 등장인물의 성격은 호감을 준다. 흔쾌한 에필로그도 인상적이며 아이 곁에 이런 부모가 있다는 건 더할 수 없는 축복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이야기 속에서 녹여둔 성장의 의미와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무엇보다 매력적이다. 소소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도 끝까지 긴장과 재미를 놓지 않으며 동시에 위트를 잃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을 중심으로 세 가지의 삼각구도가 보인다. 줄리와 엄마와 외할아버지, 줄리와 친구 클루에와 베이비시터 카트린, 그리고 줄리와 엄마와 아빠의 트라이앵글이다. 삼각형은 가장 안정감을 주는 도형이다. 사람사이의 삼각구도는 긴장을 주기도 하지만 밀고 당기는 역할을 하는 한 명으로 인해 나머지 둘이 연합하며 결국 셋이 함께 굴러가는 구도를 만든다.

 첫 번째 구도에서, 엄마와 할아버지 사이에는 묘한 적대감이 엿보인다. 아마도 돌아가신 할머니를 두고 엄마는 아버지에게 약간의 서운한 면이 남아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표면적으로 내용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할머니가 어릴 적 찼다는 골동품 같은 시계를 아직은 어린 줄리에게 주며 “오늘 주는 이 선물은 평생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게다”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아버지, 과장 좀 그만 하세요. 다른 사람 말을 따오려면 끝까지 제대로 따오든가요.” 라는 식으로 퉁을 준다. 다행인가, 솔직대범한 엄마를 덜 닮은 줄리는 조금도 마음 당기지 않는 누런 시계가 못마땅하지만 고맙다고 인사한다. 엄마의 허락을 받고 또 한 차례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시는 할아버지의 말을 막고 나서는 엄마,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두 번째 구도는 줄리와 클루에와 어정쩡한 어른 카트린이다. 수요일(프랑스 초등학교는 수요일에 쉰다)이면 줄리와 클루에는 돌봐줄 어른, 카트린과 함께 야외로 나간다. 여기서 모종의 일이 벌어지는데 줄리와 클루에를 돌봐줄 목적으로 따라간 카트린은 남자친구와 뽀뽀를 하느라 의무에 충실하지 못하고 엄마에겐 아무 일 없다는 보고를 한다. 카트린으로 대표되었지만, 아이들이 꿰뚫어보고 있는 어른들의 세계는 의외로 허술한 면이 많다. 무책임한 말을 남발하기도 한다. 실제로 꼭 그렇다는 보장도 없는 헛소리들을 늘어놓고 잔소리에 질리게 한다. 그러면서 정작 아이들의 고민이나 부족한 부분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들의 일만 표면상 해치우면 그만인 것처럼 보인다.

 피크닉의 즐거움은 잠시, 선물로 받은 시계, 이걸 차고 다니면 쑥쑥 크는 걸 알게 될 거라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그 시계가 손목에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버리다니. 이제부터 줄리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클루에는 고민하는 줄리와 달리 어른스럽고 당차다. 일을 해결하기 위해 시간의 필름을 되감아 탐정처럼 쑤시고 다니며 이들은 의외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한다. 벗은 좋다. 줄리는 자기 앞에 예상치 못하게 버티고 선 장애물을 하나씩 건너야 하는데 그 과정이 소소하면서도 구체적인 상황으로 제시된다. 여덟 살 여자아이 줄리의, 독립 아닌 독립이 감행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세 번째 구도는 줄리와 엄마, 아빠가 꼭지점을 이룬다. 줄리는 스위스 시계를 선호하는 아빠를 인종차별자로 생각하고 목욕탕에 자신을 넣어놓고 전화수다를 떠는 엄마의 속셈을 간파하기도 한다. 여기서 웃음이 나는 건 아이의 시선이 충분히 자기중심적이면서도 거의 빗나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그건 그렇고, 중요한 건 시계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니.

 어려움에 맞닥뜨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실행하게 된 자잘한 일들이 줄리에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가 한 걸음을 떼어 딛느라 온몸이 땀으로 젖고 숟가락으로 한 술의 밥을 떠서 자기 입으로 제대로 가져가느라 손과 눈이 협응해야 하듯이, 어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줄리에게는 하나하나 넘어야할 힘겨운 장애물이다. 우리 어른들은 기다려주지 못하고 재촉하고 윽박지르기 일쑤다. 하나의 시도와 발전을 향해 폴짝 뛰어넘어야할 두려움이나 용기, 지적이거나 감성적인 능력들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기가 쉽다. 줄리의 아빠는 딸이 잃어버린 스위스제 시계에 대해 섭섭하다 표현했지만, 역시 이 엄마는 자상한 아빠보다 조금 더 멋지고 올바르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 놀라워!” (p61)

 때로는 엄마의 이런 진정어린 감탄사가 아이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지대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오르막을 타며 지속적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어느 날, 어느 일을 계기로 쑥 커버린 아이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다. 또다시 아이는 마음대로 굴고, 퇴행이나 정체기를 보일 것이다. 그러다 또, 어느 날, 어느 일로 쑥 자란다. 우리는 퇴행하는 것 같은 아이를 보면 화를 내고 정체해 있는 것 같은 아이를 보면 안달을 하기 십상이다. 줄리는 거짓말은 분명 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지금 당장 밝혀야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잘 자라고 있는 아이다. 그리 보면 할아버지가 준 마음에 들지 않는 선물이 아이를 키운 건 일면 맞는 말이다. 아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문제를 직면하게 하고 스스로 사고하게 하고 해결방법을 찾게 했다는 점에서. 하지만 그걸 차고 있어서가 아니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룬 성과라는 점에선 또 틀리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실도 가끔은 조금 기다렸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52)

 시계에 대한 줄리의 취향을 보면 배실배실 웃음이 난다. 우리가 존중해야할 타인의 취향에는 아이들의 취향도 분명 포함된다는 사실!  사랑스러운 아이 줄리를 만나며, 아직도 동물인형들을 머리맡에 주욱 앉혀두고 말 걸고 안아주는 우리집 작은딸이 생각나 더 행복해졌다.

꼬옥 안아줘야겠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도 줄리를 만나면 친구 삼고 싶을 것이다.

 

 

『키 크는 시계』는 글도 삽화도 깎아놓은 듯이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아이의 마음에 구질구질한 잔소리 한 점 남기지 않고 산뜻하게 끝나는 결말이 썩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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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02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네요. 혜경님의 리뷰가 따사롭습니다.. 2학년짜리에겐 너무 복잡한 얘길까요?

프레이야 2007-10-02 21:05   좋아요 0 | URL
아뇨, 만치님 2학년이면 딱 읽기에 좋을 거에요. 권하고 싶어요^^
(혹시 제 취향이기만 한 건지 갸우뚱 걱정되지만^^)
우리집 작은딸은 3학년인데 이것보단 글자수 많고 두꺼운 걸 읽으니까,
슬쩍 권하며 책상위에 올려 두었더니 아직 거들떠 보지 않네요.
짜식~ 책을 두께로 판단하다니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