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밴드왜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4
쇼지 유키야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붐을 타고 줄줄이 번역되어 나오는 일본소설들에 나는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몇 권 읽다가 그만 둔 것들이 있는데 그냥 취향의 차이이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약간의 거부감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하루키의 '상실의시대' 이후 참 오래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제목이 마음을 끌어 이 책을 신청하게 되었고 즐거운 독서의 기회를 얻어 감사한 마음이다.

 작가 쇼지 유키야는 그런 나로선 물론 처음 들어본 작가인데 작년에 이 작품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아 올해 5월 <쉬 러브스 유>라는 제목으로 속편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보편적 인간애에 바탕을 두고 전편에서 'All you need is LOVE'를 노래하는 이 소설이라면 속편에 속편이 나와도 반가우리란 생각이 들었다. 개성 강한 인물들이 엮어내는 살아가는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할 테고 에피소드마다 특별함이 있을 테니까. 게다가 가족 시트콤으로 각색해도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4대가 한 집에 어울려 살며 좌충우돌 겪게 되는 소소한 이야기들과 풋풋하게 풀어가는 갈등과 화해의 이야기들이 잔잔한 감동과 특별한 재미를 주었다. 마치 얼마 전 종영한 텔레비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처럼 상큼발랄하면서 눈가를 살짝 젖어들게 하는 알콩달콩, 새콤상큼한 이야기들이다.

  부담 없이 책장이 넘어가는 장점 외에도 이 책의 나레이션이나 구성은 독특하다. 독자에게 홋타 집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는 영원한 일흔여섯 살의 죽은 할머니이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시선은 깊고 따뜻하다. 말투는 정감 있고 할머니이지만 귀엽기까지 하다. 지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가족들을 한없이 포용하며 바라본다. 때로는 집안에 모신 불당에서 자신의 영적 존재감을 느끼는 손자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홀로 된 남편을 애닯아 하기도 하지만 손수 보살펴 줄 수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그녀가 소개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이력을 갖는다. 팔순을 바라보는 꼬장꼬장하지만 정 많은 남편 칸이치와 로커출신 노랑머리 60대 아들, 이복형제이면서 내적성향이 다른 여덟 살 터울의 두 손자와 화가인 미혼모 손녀, 그리고 스튜어디스 출신의 세련된 손자며느리와 두 명의 총명한 초등학생 증손. 이들 4대의 이야기가 또 다른 이웃들과 얽혀서 일어나는데 그 중심은 ‘도쿄밴드왜건’이라는 오래된 헌책방이다. 이층의 이 건물은 표지에도 그려져 있는데, 출입구에서 오른쪽으론 카페, 왼쪽으론 책방으로 갈라지는 구조다. 가족시트콤으로 만든다면 꽤 흥미로운 세트가 될 것 같다. 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책의 끝 장에서 “그 시절 많은 눈물과 웃음을 거실에 가져다준 텔레비전 드라마에” 라는 작가의 헌사가 적혀있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일 년을 돌아서 다시 '봄'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봄은 동네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선술집 이름이기도 하다. 계절의 서두마다 홋타 사치 여사는 마당의 나무들을 묘사하는데 계절마다 색다른 나무들의 풍경과 인상이 일상의 이야기들을 서정적으로 풀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우리나라의 까치밥과 비슷한 풍습이 있어 반가웠다. 겨울 편에서 마당에 세워둔 대나무 끝에 귤을 꽂아두는 장면이 나온다. 물까치, 개똥지빠귀, 참새 등등 귀여운 새들이 날아와서 쪼아 먹는다며 겨울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로 가끔 쥐가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식탁에서의 먹거리를 비롯해 일본의 풍습이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살짝살짝 나오며 흥미롭다.

문화와 문명에 관한 이런저런 문제라면 어떠한 일이든 만사해결! 이것은 홋타 집안의 이어져오는 수많은 가훈들 중의 중심 가훈이다. 그외의 가훈들은 또 얼마나 구체적이고 사려깊은지. 이거 가훈치고는 너무 거창한 거 아냐, 하는 생각은 책을 읽다보면 서서히 지워져간다. ‘도쿄밴드왜건’은 구세대와 신세대간,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문화와 문명이 충돌하는 접점에 있다. 그것은 다시, 홋타 식구들이 끓여먹기 좋아하는 짭탕찌개에 비유될 수 있는데, 다양한 재료들이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한 냄비 안에서 끓고 식구들은 각자 좋아하는 것들을 떠서 먹는 식이다. 좋아하는 것만 떠서 먹더라도 국물엔 모든 재료의 맛이 우러나있으니. 무겁고 깊은 이야기를 가볍고 경쾌하게 이야기하는 작가의 솜씨에 오히려 놀라게 된다. 이는 서문과도 같은 ‘건왜드밴쿄도?’에서 홋타 사치 여사의 정감 있는 소개말로 짐작된다. 메이지 18년에 연 이래 헌책을 파는 게 주업이면서도 시대의 흐름을 좇는 일에 뒤처지지 않는 이 특별한 고서점은 ‘낡은 가죽 부대에도 새 술은 담기는 법’이라는 창조적인 진리를 몸소 실천하는 홋타 칸이치 영감의 인생관을 반영하는 곳이다. 젊음의 특권을 인정하고 늙음의 미덕에 순응하는 재기발랄한 대사를 눈인사하듯 만나는 건 유쾌함이다.

 책은 시대의 반영이고 현실의 재현이며 개인의 정서를 통한 집단 정서의 음각이기도 하다. 이들이 만나는 ‘문화와 문명에 관한 이런저런 문제’는 대개 이런저런 헌책들과 관련되어 빚어진다. 책에 대한 애정은 물론 작가에 대한 소소한 애정도 필수다. 또한 서양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메이지를 거쳐 경제근대화에 힘쓴 다이쇼와 쇼와 시대를 관통하여 현대에 이르는 그들의 정서를 대략 어루만진다. 나츠메 소세키를 필두로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의 문호들이 열거되기도 하고 아키코를 좋아하는 영국인 머독씨를 등장시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끌어안는 방식을 취한다. 한 가지 눈에 뜨인 것은 ‘그리운 쇼와 시대’라는 대목이다. 1950년대 중후반쯤에 나왔다는 고사카 고요가 쓴 <알파벳 골목길>을 언급하며 사람들이 요즘 다시 그때 얘기들을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쇼와 시대(1926~1989년)의 군국주의 초기와는 달리 이 시기에는 전후의 국난을 극복하며 재건의 노력이 합해져 생활이 안정되어갔다. 사상,언론,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개인의 해방과 문화를 포함한 모든 면에 민주화를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보급된 시기다. 지금의 일본국민들은 오히려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니 되살아나는 군국주의 망령을 살짝 꼬집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튼 골치아픈 이런저런 일들을 해결하는데 늘 따라다니는 불문율은 러브다. 다들 생의 비밀을 갖고 있어 알아갈수록 신비한 사람들, 비극도 희극이 되고 남에겐 가십거리도 자신에겐 슬픔이 되는 말 못할 사연들을 품고 사는 사람들, 멋진 연기를 펼치며 쇼를 하듯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시끌벅적한 도쿄밴드왜건. 신세대답게 화통하니 러브로 모든 걸 해결해 주고, 그래도 미인이라면 누구나 환영한다고 외치고 아직 결혼도 안 한 것들이 손잡고 해외여행 하는 것은 가당찮다고 노여워하는 칸이치 영감을 어쩌지. 너무 사랑스럽지 않은가. 문화와 문명에 관한 한 어제와 오늘, 이곳과 저곳이 만나는 도쿄밴드왜건의 마당에는 계절마다 자랑삼는 나무들이 우뚝하다. 그 살가운 나무들에 바람 잘 날은 있으려나. 가업을 이어가는 젊음이 또한 미덥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만이 미덕은 아닌 듯. 헌 부대에도 새 술이 담기면 독특한 맛과 향을 낼 수 있을 테니..  올 유 니드 이스 러브! 빰바바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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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3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 서재에서 이 리뷰읽고 좋게 기억하고 있는데
님의 글은 또 다른 맛이 납니다.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07-08-13 10:56   좋아요 0 | URL
민서님, 더운 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 같아요.
언급되는 일본유명작가들이 많은데, 소세키만 알겠더군요.
그 작가들의 책을 찾아 읽어가면 또다른 확장의 재미도 있을 것 같구요^^

비로그인 2007-08-1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중상 이상은 하는 모양이네요 :) 전 요즘 일본소설엔 다소 물려버린 듯해서;;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8-13 10:55   좋아요 0 | URL
다소 물리셨구나. 음.. 워낙 많이 쏟아지다보니 그런가 싶기도 하구요.
성향에서 오는 것도 있을 것 같구요. 네, 잘 보셨어요. 저로선 별 넷으로
표시했어요.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2007-08-13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3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뽀송이 2007-08-1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다니 관심이 가는데요.^^
더러 일본소설이 주는 정서의 차이 때문에 한동안 읽다가, 또 한동안 멀리했다가 그러게 되요.^^;; 리뷰를 읽고 있으니 정말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잘~ 보고 갑니당.^.~ 추천!!

프레이야 2007-08-13 19:13   좋아요 0 | URL
뽀송이님, 고마워요 ㅎㅎ
어제 오늘 바람이 많이 불어 좀 시원하지요? 습도는 높지만요..
더우니 뭐 집중도 잘 안 되고 그렇더구만요. 근데 그 화장품은 왜
안 올까나? 혹시 받으셨어요?

뽀송이 2007-08-13 16:14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안왔어요.^^
14일까지 보낸다고 했으니까 곧 오겠지요.^^;;
가끔 몇일 늦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온답니다.^.~
즐겁게 기달~~~^.~ 님^^ 날이 후덥지근해요.ㅡㅜ

프레이야 2007-08-13 19:14   좋아요 0 | URL
14일까지였나요? 깜박했어요. 후훗~ 후텁지근해서 그런지
힘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