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나무를 노래함
빛이 있고 꽃이 있는 동안에도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허리를 잡고 웃고 푸지게 말을 늘어놓다가도 나는 불쑥 강대나무를 화제 삼는다
비좁은 방에서 손톱 발톱을 깎는 일요일 오후에도 나는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몸이 검푸르게 굳은 한 꿰미 생선을 사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회사의 회전의자가 간수의 방처럼 느껴질 때에도 강대나무를 떠올린다
강대나무를 생각하는 일은 내 작은 화단에서 죽은 화초를 내다 버리는 일
마음에 벼린 절벽을 세워두듯 강대나무를 생각하면 가난한 생활이 비로소 견디어진다
던져두었다 다시 집어 읽는 시집처럼 슬픔이 때때로 찾아왔으므로
우편함에서 매일 이별을 알리는 당신의 눈썹 같은 엽서를 꺼내 읽었으므로
마른 갯벌을 소금밭을 걷듯 하루하루를 건너 사라졌으므로
건둥건둥 귀도 입도 마음도 잃어 서서히 말라죽어갔으므로
나는 초혼처럼 강대나무를 소리내어 떠올려 내 누추한 생활의 무릎으로 삼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부르듯 저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서럽게 불러 내 곁에 세워두는 것이다.
* 강대나무 : 선 채로 말라죽은 나무
- 문태준 시집 <가재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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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죽음을 향해 서서히 가고 있다지만 듣기 좋은 위로의 말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 죽음을 준비해야하는 사람의 손길은 남다르다. 매주 글벗들을 만나러 올 때마다 집안 너른 화단에서 가꾸는 야생화를 꺾어와 나누어 주는 그녀의 손길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나.
그녀의 바람은 나누어 주는 것에 있었다. 그 마음을 알고 우리는 언제나 흔쾌히 받는 일에 열중한다. 그녀는 당신이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많이 나눠주기 위해 영롱한 낱말로 글을 쓰고 대담한 붓질로 수채그림을 그리고 섬세한 손끝으로 야생화 가지를 꺾어 유리병에 담아온다. 그녀가 꺾어오는 야생화들은 하나같이 꽃에 어울리는 소담스러운 이름을 갖고 있었고 그 이름과 꽃말이 적힌 종이가 유리병에 붙어서 따라왔다. 정겨운 이름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겠다. 노란 장미, 흰나리꽃, 모란, 은초롱꽃, 수국 그리고...
언젠가 그녀는 내게 수선화가 꽂힌 유리병을 건네주었다. 잘 어울린다며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 전에 먼저 가져가라고 따로 챙겨주셨다. 코를 가까이 대기도 전에 은은하게 퍼지는 수선화 향기를 그때 처음 맡아보았다. 가장 원시적이고 감성적인 감각이라는 후각에 한껏 기대어 보았다. 노오란 그 향기는 어쩌면 잠재된 기억 속에 묻혀있을 내 시원(始原)의 돌담길 아래서 수줍게 움트고 있었다.
오늘 아침, ‘강대나무’를 노래하는 시를 읽고 그녀가 건네주는 야생화 가지들을 윤창한다. 애처로운 가지와 한 떨기 꽃송아리로만 전해져온 그 목숨들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남겨두고 내게 왔다. 땅, 그곳은 목숨이 태어나고 자란 태고의 원시림 같은 곳, 돌아가야할 원천의 고향. 유려한 시간을 건너와 유리병에 꽂힌 그 가지들은 거실 한 켠 탁자 위 정지된 공간에서 선 채로 물속에 몸을 담고 말라죽어갔다. 강대나무들처럼. 나는 오늘 그들의 ‘뿌리’를 노래하고 싶다. 혼곤한 잠에 빠져있을 원초의 꿈, 뿌리를 뽑지 않고 생명을 전도한 그녀의 손길을 떠올린다.
더 가까이에도 내게 뭘 주고자 하는 사람이 생겼다. 여지껏 나는 그녀가 내게 준 것이 그다지 없다고 속으로 불만이었다. 아니 뭘 그리 해줬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어리석게도.. 지금 그녀가 내게 줄 수 있는 건 넉넉지 않다. 가난하고 늙고 병든 그녀가 스웨덴제 일렉트로룩스 잭나이프를 준 건 얼마전 병실에서였다. 밤새 가슴이 갑갑하다고 끙끙 앓던 그녀가 아침에 건넨 물건이다. 나무 손잡이가 멋스러운 그건 내가 오래 전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고 나는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아까워서 거의 쓰지 않았다며 도로 내게 주는 그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검버섯이 핀 손등, 작고 가냘픈 손가락.
그녀가 주려는 꽃은 야생화가 아니다. 안 신고 모아둔 새 스타킹들, 신혼때부터 써온 가계부 공책들, 무수한 서화 습작 종이뭉치들. 나는 꽃을 받는 사람이다. 꽃을 주는 사람의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니라 그옆에 나란히 있다. 생의 절정, 꿈의 절정, 아름다움의 절정. 생의 환희로 피어올린 꽃에 눈을 맞추며 오늘도 나는 꽃을 받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