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져라 번져라 병(病)이여


1

개망초가 피었다 공중에 뜬
꽃별, 무슨 섬광이
이토록 작고 맑고 슬픈가

바람은 일고 개망초꽃이 꽃의 영혼이 혜성이 돈다

개망초가 하얗게 피었다
잠자리가 날 때이다
너풀너풀 잠자리가 멀리 왼편에서 바른편으로 혹은

거꾸로

강이 흐르듯 누워서 누워서


2

오늘 다섯 살 아이에게 수두가 지나가고, 나는 생각
한다. 만발하는 것에 대하여 수두처럼 지나가는 꽃에
대하여 하늘에 푸른 액정 화면에 편편하게 날아가는
여름 잠자리에 대하여 내 생각에 홍반처럼 돋다 사그
라드는 것에 대하여
 그리하여 나는 지금 앓고 있는 사람이다


3

 그리고 나는 본다, 한 집의 굴뚝에서 너풀너풀 연기
가 번져 나오는 것을 그 얼룩을
 그리고 나는 안다, 이 뜨거운 환장할 대낮의 아궁이
에 불을 지피는 한 여인을 그 얼룩을
 에미가 황해도 무당이었고 남편은 함경도 어디가 고
향이고 여인은 한때 소를 한때 묵뫼를 사랑했고 올여
름 연기를 지독히 사랑했고 불을 때는 버릇이 생겼다
는 것을 그 얼룩을

 연기는 아주 굼뜨고, 연기는 무학자이고, 연기는
나부이고, 연기는 풀이 무성한 묵밭이고
 연기는 아궁이 앞에 퍼질러 앉은 그 여인이고, 갈라
진 흙벽의 정신이고, 미친 사람이고

 나는 아니 보아도 안다, 벌써 스무 해 넘게 미쳐 지
내온 저 여인이 어떤 표정으로 지금 앉아 있는지를
 무얼 끓이느냐 무얼 삶느냐 물어도 여인은 손사래
쳐 무심히 불만 밀어넣을 것이라는 것을
 몇 통의 물을 다만 끓이고 끓이고 있다는 것을
 내 눈과 마주치곤 까르르 까르르 웃던 그 검은 얼
굴을

 

4

 하늘의 밭에는 개망초가 잠자리가 연기가 수두처럼
지나가고 있다 더듬더듬거리며 옮아 가고 있다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그래야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가재미>> 문태준 시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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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전, 큰딸의 손가락과 팔꿈치 쪽에 붉고 둥그런 반점들이 여럿 생겼다. 처음엔 별 것 아닐 거라고 예사로 여겼는데 요것들이 차츰 색깔도 선명해지면서 자신들의 행동반경을 넓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보아하니 영역을 확장해가는 전술이 대단하다. 괘씸한 건, 이제 아예 가려움증까지 유발하며 아이를 못살게 구는 것이다. 하복을 입고 다니는 여학생의 팔다리를 그 꼴로 만들어놓다니. 아이는 울상으로 짜증스러워하고 가렵다고 투덜거렸다. 자세히 보니 어릴 적에 보았던 물사마귀나 수두 같이 보이면서도 모양새나 색깔이 그것과는 달랐다. 인터넷을 뒤져서 찾아보았다. 다형홍반이라는 얄궂은 홍반 종류였다. 원인은 알레르기라고.

 아이를 데리고 처음으로 피부과를 찾아갔다. 의사도 다형홍반이라고 진단하고 약과 연고를 처방해 주었다. 며칠 전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약을 먹었는데 닷새 정도 복용하면 가라앉다가 하루 정도 복용을 멈추면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였다. 그것들의 생명력이라는 게 끔찍하다. 며칠 전, 위장에 탈이 왔나 싶게 아이가 속이 좋지 않다고 괴로워하고 피곤해 해서 약을 멈추었더니 지금 다시 그놈의 홍반은 과감하게 흉한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보는 내가 더 괴로울 지경이다. 아무래도 좀더 정밀검사를 받아봐야겠다 싶어 의사의 진료추천서를 받아두고 다음 주 목요일에 모 대학병원 피부병리과의 권위 있다는 의사를 찾아갈 요량이다.

 홍반이란 녀석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아이의 몸으로 들어간 어떤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 달째 대반란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더욱 답답하다. 아이의 몸에 일어난 한 판 시위 현장이라 치부하기엔 내 마음이 안쓰럽다. 내 어린시절 앓았던 홍역은 기억에서 지워졌다. 열다섯, 어여쁘지만 예민한 나이를 공습하는 病!  그게 어디 홍반뿐일까만은. 연기처럼 엄습해 오는 영육의 두드러기, 살아있음에 자라고 있음에 나아지고 있음에 내치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들이다. 마흔둘, 내 등에 난 뾰루지도... 무엇보다도, 예순여덟, 엄마가 얼러 달래며 싸워나가야 할 가증스러운 생명력의 암세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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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개망초가 어떻게 생겼는지 검색해서 찾아봐야겠어요. 피부과처방전 받으실때 꼭 위장에 약한 걸로 해달라고 말하셔요. 가끔 너무 독한게 들어가 있더라구요. 음, 가끔 심리적인 원인도 있던제..알레르기는요. 그리고 암이라.글쎄, 가까운 분이 앓고계시는데..꼭 암세포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 참 마음이 무겁지요.그래서 그냥 살면서 치료해갈 것이라고 생각하자고 말했는데..글쎄 그럼 한다리 건너니까 그런 마음이 아니냐고 할까 좀 망설였는데..여하간, 치료받으시는 동안 병때문에 마음이 더 지치시지 않도록, 님도 어머님도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우리는 다들 뭐하나씩은 아프잖아요 (전 오늘 좀 무리해서 운동했더니 어깨가 쑤셔요)

프레이야 2007-07-14 23:09   좋아요 0 | URL
님, 개망초는 하얗게 무리지어 피어있어요. 나들이 나가면 흔히 볼 수 있구요.
그게 꼭 백반 같나요. 아무튼 님 말씀처럼 우린 누구나 병이 있고 그건 살아있
다는 증거에요. 남의 암보다 자기의 감기가 더 크다고들 하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에요. 병은 자신만이 감당해야할 고통이지만 그만한 무게의 가치가
있기만을 바랄뿐입니다. 다 뜻이 있겠거니 합니다. 조금씩 담담해지려 해요.
너구리님, 고맙습니다. 편안한 토요일밤~
참, 어깨 쑤실 땐 어떡해야하나?

박가분아저씨 2007-07-25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 하시네요!!!!!

프레이야 2007-08-10 04:46   좋아요 0 | URL
박가분아저씨, 언제 다녀가셨어요?
이제사 봤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