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읽었던 기억이 아스름하다. 개정판이 나왔다. 10년이 흘러 계절이 훅 바뀌는 시점에서 다시 읽는다. 사주명리학과 주역에 관심이 많고 눈이 맑은 자칭 선무당 친구에게 선물해야겠다.
# 차서 - 시간적 순차와 공간적 질서를 오버랩시킨 개념이 곧 ‘차서‘다. 예컨대, 벚꽃이 피면 봄이다. 그때 봄이란 벚꽃이라는 공간적 표지와 벚꽃이 필 수 있는 절기라는 시간의 흐름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차서라고 한다. (51)
시작이 있으면 중간이 있고, 그다음엔 끝이 있다. 시작과 중간과 끝, 시간적 순서는 반드시 공간적 질서와 함께한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표현이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시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공간의 ‘휘어짐‘이고 공간은 시간의 ‘주름‘이다. 시공간의 리듬, 그것이 곧 ‘차서‘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에는 차서가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차서가. - P50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이 차서를 어그러뜨리는 체제이다. 순환과 비움이 아니라, 소유와 증식만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가난할 때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을 버는 행위 자체가 자기에 대한 존중감이자 타인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가 된 다음에, 먹고살 만해진 다음에도 계속 부를 증식하고자 한다면 그건 바보거나 광인이다.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부를 일구고 나면 선비를 기르기 위해 삼대가 적선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지혜다. 뒤에서 배울 터이지만 재성(재물운)이 관성(관)과 인성(명예와 공부운)으로 순환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는 반드시 정신의 가치와 함께 가야 한다는 걸, 그래야 쉬임 없이 만물을 낳을 수 있다는 걸 터득했던 셈이다. "태양은 조건 없이 베푼다"(조르주 바타유) 혹은 "베푸는 것은 하느님과 같은 일이고/쌓아 두는 것은 지옥이라네" (비노바 바베) 등의 경구도 같은 이치의 소산이다. - P61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문명의 폭주 속에서 나를 잃어버렸다. 나에게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맞으려나. 감정, 자의식, 스펙, 대체 무엇이 ‘나‘인가? 그 어떤 것도 허망할 따름이다. 그래서 괴롭고 아프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일찍이 자신에 대해서 탐구해 본 적이 없었다. (………)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 이방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오해하고 혼동할 수밖에없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서문」, 『도덕의 계보』, 청하, 1982, 21~22쪽) 결국 자신과의 소외는 자연에 대한 무지와 맞물려 있는 셈이다. - P63
굴드는 말했다. 과학이란 "자료와 편견 사이의 대화"라고. 과학이 이럴진대 운명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음양오행은 하나의 매트릭스다. 음양오행을 터득하면 세상만사가 다 보일 것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딱! 자기의 내공만큼만 볼 수 있다. 또 그만큼만 삶의 현장에 개입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개입할 수 있는 그만큼이 곧 운이고 명이다. 그래서 꼭 도사가 되거나 심령술사가 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용법이고 발심이다. 내 운명을 우주적 인드라망 속에서 보겠다고 하는. 그 명을 오로지 나의 힘으로 운전해보겠다고 하는. - P66
나의 욕망은 곧 사회적 인과의 결과물이다. 나의 질병은 곧 시대적 징후의 산물이다. 나의 욕망, 나의 질병을 탐구하고 해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자들에게 그것을 전파하고 순환시킬 수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뿐이다. 한꺼번에 다수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그것은 이미 그 안에 사람들을 도구화하고 자기를 소외시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너무 협소하다고? 그렇지 않다! 어떤 개인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존재성 자체가 사회적, 우주적 인연의 산물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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