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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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폴 엘뤼아르의 시구에서 자신의 얼굴을 떠올렸던 “나”는 조금은 이른 결혼 후 남자와는 달리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하게 소비되는 여자의 삶 - 책임이 아니라 의무 - 과 사회적 성취 사이에 놓인 간극을 체감한다.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에 남자는 크게 기여하지 않는다. 하루종일 신경줄을 팽팽히 당기고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쪽은 여자다. 그리고 그 시절의 끝에서 자신의 얼굴을 다시 생각한다. “쇠락이 바로 앞에 와 있는”, 예감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운명. 지금에 와 되돌아보면 그 “얼어붙은 여자”는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다.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수단으로서 결혼과 출산을 택한 여자의 이중성, 친절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게 다가 아닌 무신경한 남자의 역할, 비슷하게 겹쳐오는 불면의 밤과 몽유병자의 낮, 서투름에 불만과 불안과 고독이 목구멍에 차올라 땅속으로 꺼져버릴 것 같던 날들이 엊그제만 같다. “투덜거리면서 내려가는 계단의 이야기” 개인의 기억이 데려오는 공동기억과 용인된 억압, 척하며 참고 말하지 못한 것들의 치열한 발화!

현재형 문장,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마침표 대신 의도적으로 가파르게 찍은 쉼표들, 날카롭고 절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차가운 대목들. 이 책을 쓰고 에르노는 결혼을 중지했다.

그래도 나는 그런 식으로 주고받았다. 진이 빠진다. 내가 책을 사거나 쓰레기가 꽉 찬 채로 내버려두는 이런 치사한 일은, 쾌락이나 진정한 반항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복수심이다. 결혼 초부터 나는, 항상 나를 회피하는 평등의 꽁무니를 쫓아다닌다는 느낌이 든다. 한 장면, 반항, 이혼, 모든 것을 흉내 내는 멋진 장면이 남는다. 성찰과 토론을 대신하는, 한 시간 동안의 마구잡이 초토화, 퇴색한 내 삶 속의 붉은 태양.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느낀다, 분노의 떨림, 조화를 파괴하는 무례한 첫 문장을 내뱉는다, "하녀 노릇에 진절머리 나!" 그가 가면을 쓰는 것을 지켜 보고, 멋진 대답을 기다린다, 나를 자극하고, 잃어버린 언어와 폭력과 다른 것에 대한 갈망을 되찾는 걸 도와줄 대답을. - P230

우리는 자신의 삶과 자신이 바랐던 삶을 비교하지 않고, 다른 여성들의 삶과 비교하기에 이른다. 결코 남자들의 삶과 비교하지 않는다, 이건 대체 무슨 생각인가. 하지만 남자 동료들은, 절도 있고, 당당한 걸음으로, 고등학교에서부터 자신들의 자동차까지 갈 수 있고, 노동조합미팅에 가서 활동할 수도 있고, 서로 발언하고 듣고, 끔찍한 노동조건에 관해 투표할 수도 있고, 선생님은 학생들을 감시할 필요가 없다고, 선생님이 준 벌도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들 업무의 한계에 대해 깐깐하게 다툴 수도 있다. 더 이상의 추가 업무를 하지 않으려는 궤변론자들의 경이로움, 어쩌면 남자들의 습관. - P236

다시 불러오는 나의 배, 덜 놀랍다, 벌써 익숙해진 습관, 아파트에 스며드는 습한 여름, 아이가 공치기하는 호수 앞 광장의 잔잔한 열기, 그늘진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완전히 무력감에 빠졌다. 갑자기 멈춰서는 관광객들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고 걸었다. 세상과 미래로부터 나를 고립시키는 무게감, 나는 어느 날 밤엔가 드러누우러 가야 하는 보리바쥐 병원의 고문대 위로 빨리 가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외동아이와 보내는 마지막 순간들을 즐기고 싶었다. 여자로서의 나의 모든 이야기는, 투덜거리면서 내려가는 계단의 이야기다. - P245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나의 수련 기간은 끝났다. 그 후로는 익숙해진다. 집 안에서는, 커피 그라인더, 냄비 같은 것들이 내는 수많은 자잘한 소리, 집 밖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선생님, 카샤렐이나 로디에* 브랜드옷을 입은 중견 간부의 아내. 얼어붙은 여자. - P249

끝에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이제 나는 곧 내가 끔찍이 싫어했던, 주름지고 비장한 얼굴들을 닮아가리라. 미용실 샴푸대에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 있던 얼굴들을 얼마나 걸릴까. 더는 숨길 수 없는 주름, 쇠락이 바로 앞에 와 있다.
이미 나는 그런 얼굴이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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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29 1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산 아니 에르노의
<탐닉>을 읽다 말다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결혼의 중단이라...

작가에게는 모든 게 글쓰기의
소재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거둘 수가 없네요.

프레이야 2022-10-29 19:43   좋아요 3 | URL
글쓰기의 소재가 될 수 없는 건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는 용기가 없을 뿐. 글 쓰는 사람 주변의 인물들이 긴장한다는 이유도 그래서겠지요. 자기 이야긴 쓰지 말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데, 힘든 일입니다. 여러가지 시선이 있기에. 그런 점에서 문학으로 승화한 에르노가 존경스럽네요. 칼같은글쓰기로 넘어가야겠어요. 탐닉은 아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