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씹으며 느리게…

그런데 비겁함으로 말하자면 수치와 불명예를 안겨 줌으로써 벌 하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임이 분명하다. 그런 규칙을 처음으로 실시간 사람은 입법가 카론다스라고 한다. 이전의 그리스 법은 전투에서 달아난 자들을 죽음으로 벌하곤 했는데 카론다스는 그런 자들을 다만 여자 옷을 입혀 광장에 사흘 동안 앉혀 두라고 했다. 그런 수치로 분기충전하게 해서 그들을 다시 쓸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피를 쏟게 하기보간 차라리 피가 솟구쳐 얼굴을 붉히게 하라. " (테르툴리아누스)
(중략)
그렇지만 수치를 당한 자들이 절망에 빠지면 냉랭해지다 못해 적개심까지 품을 수 있음을 경계 해야 한다.
(중략)
하지만 무지이건 비겁함이건 도무지 통상적인 경우로 볼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졸렬하고 두드러진다면 그것만으로 몽니와 악의의 충분한 증거로 여겨 벌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비겁함에 대한 벌에 관하여 (142~144p) - P142

그리스인들은 우리의 판단 착오에서 연유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공포를 분간했다. 그들은 그것이 명백한 이유 없이 하늘의 충동에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한 민족 전체, 군대 전체가 그러한 공포에 사로잡히는 일도 흔하다. 카르타고에 극도의 통탄을 안겨 준 것이 바로 그런 공포였다. 그곳에서는 겁에 질린 울부짖음과 고함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경보에 응하듯 사람들은 자기집에서 나와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서로서로 상처를 입히고 죽였다. 마치 상대가 자기네 도시를 점령하러 온 적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기도와 희생 제물로 신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때까지 모든 것이 무질서요 혼란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공황(恐惶)이라고부른다.
-공포에 관하여 - P154

이따금 운명은 오랜 세월 스스로 쌓아 놓은 것을 단 한순간에뒤엎을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우리의 마지막 날을 때맞춰 엿보고 있다가 라베리우스가 말한 대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외치게 하는 것이다. "정녕 내가 단 하루만 덜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마크로비우스)
그러므로 솔론의 훌륭한 충고는 받아들일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이고 철학자들에게는 운명의 호의나 무심함이 행복의 자리도 불행의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 까닭에, 그리고 위대함이나 권세는 별날 것 없는 자질이 우연히 갖게 된 외양에 불과한것이어서, 나는 그가 필경 훨씬 더 멀리 내다보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의 한결같은 행복은 좋은 천성을 가진 마음이 누리는 고요와 만족, 그리고 잘 조절된 영혼의 단호함과 침착함에 달려 있는데, 삶이라는 연극의 마지막 장,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어려울 그 최후의 부분을 어떻게 공연하는지 보기 전에는 이 행복이 그 사람 것이라고 단언하지 말 것을 그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다른 경우에는 언제나 가면을 쓸 수 있다. 철학에서 내놓는 멋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사실 겉치레일 뿐이다. 시련이 있어도 우리를 폐부 깊숙이까지 시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늘 태연자약한 얼굴을 가장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과 우리 자신이 맞게 되는 이 마지막 배역에서는 더 이상 그런 ‘척’할 수가 없으며, 평이한 제 나라 말로 또렷이 말해야 하고, 단지의 맨 밑바닥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솔직하고 단순하게 내보여야 하는 것이다. - 19장. 우리 행복은 죽은 뒤에나 판단해야 한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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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9-06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 읽고 음미했어요. ㅋㅋ
그런데 에세, 책 말이에요. 왜 넘버를 안 썼을까요? 불편해서 저는 에세 옆에 1, 2, 3 이라고 책 표지에 숫자를 적었어요.

프레이야 2022-09-06 17:59   좋아요 1 | URL
아 ㅎㅎ 그게 책등에서 숫자가 적혀 있어요 1,2,3
오늘은 죽음에 대한 사유를 읽는데 위트도 겸비하고 참 좋습니다. 진작에 그 비밀을 알고 성찰하여 글로 쓴 몽테뉴와 함께하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