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성찰과 태도
인간은 자신이 죽은 뒤에 일어날 모든 것을 내세에 투사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내세는 다소은유적인 표현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런 관념은 내세와 미래의 인류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에게서보이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후손, 미래의 인류 속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류는 영원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종교가 전에 ‘신국‘이라고 불렀던 미래의 영광스러운 인류, 그리고 오늘날 ‘계급 없는 사회‘ 또는 ‘하나 된 인류‘로 지칭하는 이상향이 생겨나는 겁니다. 이제부터 추상적 관념과 상징의 영역, 게다가 순전히 도덕적인 표상 영역에 있게 됩니다. 나는죽게 되겠지만, 나의 생각은 확신은 없지만 제게 그런 생각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 그 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내세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안심하고 죽으세요, 당신의 생각은 계속 존재할 겁니다"라고 말한다 해도 그는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그 신자가 믿는 것은 생각의 존속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화된 알레고리가 수행하는 역할은 매우 큽니다. - P55
저는 비신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곧 삶에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스피노자가 플라톤과는 반대로 지혜란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저는 죽음에 대한 철학은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실제로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삶의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죽음을 무시하고 외면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대로 저는 이 태도가 죽음을 가볍게 다루지 않고 진지하게 고려하는 유일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세에 대해 순진한 믿음을 갖고 있는 신자들은 흔히 죽음과 내세의 삶을 동일시하고, 내세는 현세가 보다 안락한 형태로 연장되는 것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내세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고, 모두 지복을 누리고, 질병이 없으며, 더는 살아 있는 게 아니므로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이런 이야기들은 죽음을 ‘경박하게‘ 만듭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겁니다. "나는 죽음을 전혀 모르고 알 수 없다. 만약 내가 무엇이든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모든 것은 삶의 변이형이고, 여전히 삶입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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