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쇠나무의 마지막 봄날


 

엄원태

 


 그 골짜기에서, 지난여름 태풍에 목이 부러진 고로쇠

를 보았다. 부러지며 찢겨 둥치에 매달린 채 쓰러진 나무

는, 머리채를 땅바닥에 퍼지른 채 엎어진 덩치 큰 여자

같았다. 안간힘을 다해 모진 비바람을 견뎌냈던 이파리

들은 창졸간에 누렇게 말라들며 제 어미의 몸에서 가녀

린 손목들을 놓아버렸다.


 겨울 가고, 다시 온 봄날은 그러나 그저 어쩔 수 없어

서, 부러진 둥치로도 살아남은 뿌리는 하염없이 수액을

제 슬픔인 양 밀어올리는 것. 수액이 목메도록 차오른 둥

치, 부러진 부위에서 맑은 수액을 게워내어 제 몸통을 적

신다.


 죽어가는 고로쇠나무 둥치가 꺼져가는 마지막 호흡으

로 길어올리는 눈물…… 덧없이 짧은 봄날만 아니라면,

마냥 저리 장엄하지 않으리라.


             

                          -『물방울 무덤』중 / 엄원태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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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7-04-1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 님이 시를 읽어 주니 좋아요. 시인의 삶과 겹쳐 읽을 수밖에 없어 좀더 애절하게 들려요.

프레이야 2007-04-13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엄시인을 알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년째 이틀에 한 번 혈액투석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존재감은 어떤 것일지... 감히 저로선 상상하지 못하겠어요.
가슴 절절하다 느끼는 건 우리들이고 정작 시인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더군요.
몇편씩 아껴가며 읽을거에요^^

비로그인 2007-04-14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