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쇠나무의 마지막 봄날
엄원태
그 골짜기에서, 지난여름 태풍에 목이 부러진 고로쇠
를 보았다. 부러지며 찢겨 둥치에 매달린 채 쓰러진 나무
는, 머리채를 땅바닥에 퍼지른 채 엎어진 덩치 큰 여자
같았다. 안간힘을 다해 모진 비바람을 견뎌냈던 이파리
들은 창졸간에 누렇게 말라들며 제 어미의 몸에서 가녀
린 손목들을 놓아버렸다.
겨울 가고, 다시 온 봄날은 그러나 그저 어쩔 수 없어
서, 부러진 둥치로도 살아남은 뿌리는 하염없이 수액을
제 슬픔인 양 밀어올리는 것. 수액이 목메도록 차오른 둥
치, 부러진 부위에서 맑은 수액을 게워내어 제 몸통을 적
신다.
죽어가는 고로쇠나무 둥치가 꺼져가는 마지막 호흡으
로 길어올리는 눈물…… 덧없이 짧은 봄날만 아니라면,
마냥 저리 장엄하지 않으리라.
-『물방울 무덤』중 / 엄원태 /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