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업 THE PICK UP / Douglas Kennedy / 밝은세상 (총 339쪽)

녹음 시작 2019. 1. 16 녹음완료 2019. 3.6.

 

기해년 새해 첫 녹음완료한 책이다. 어제는 경칩이었고 봄비가 촉촉히 오는 날이었다.

점자도서관으로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비는 그쳤고, 까마귀 소리가 텅 빈 하늘에 울렸다. 울음소리였는지 웃음소리였는지 누굴 부르는 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자신에게 하는 독백일지도. 언어는 원래 자신에게 말걸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촘스키는 말했다지.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눈앞 벚나무 꼭대기에 커다란 까마귀가 후루룩 날아와 앉았다. 정말 컸다. 만어사와 유후인 마을에서 보았던 까마귀 이후로 처음이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듯 한참 올려다보며 주차장으로 걸어내려갔다. 또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작년 이맘때 나는 모로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뜻밖의 일에 부딪혀 죽은 나날을 보냈다. 뜻밖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드니까.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집 <픽업>에는 12편의 소설이 담겨 있는데 모두 비슷한 인물과 상황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우리 눈에 빛이 부족하여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넘쳐 들어와도 오히려 시야가 흐려지고 대상이 뭉개져 버렸을 수 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다보면 박장대소하기도 무릎을 치기도 하는데, 결혼을 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한 스님은 결혼을 선택하고 결심한 사람의 마음을 콕 짚어준다. 무슨 진정한 사랑씩이나... 자기 주제에...  다 계산하고 결심한 거 아니었느냐고... 덕 보려고 하는 마음 아니었느냐고... 의식에서는 부정하고 싶겠지만 무의식에서는 남녀 모두 어떤 계산을 하고 선택한 게 결혼이라고.  연애는 좋은 모습만 보고 보이려는 만남이지만 결혼은 생활이고 책임이다. 연애 때 대상의 단점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굳이 그걸 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바라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니까. 여기서 자기를 속은 건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책의 일관된 주제, "인생이 절망과 실패로 점철되어갈 때 우리는 왜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에 무릎 꿇게 된다. 이렇게 인정하게 되는 순간, 대상을 미워하기보다 받아들이게 된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인생의 절반을 훌쩍 지나 종점으로 가는 길에 가속도가 붙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여생의 일들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열쇠뭉치들의 마지막 열쇠가 문을 여는 법이라지.

 

전반적으로 냉소적이고 희의적인 어조를 보이지만 이런 태도가 생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라 말하는 건 다소 성급하다. 오히려 어차피 테러리스트 같은 생을 좀더 느긋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력을 잃지 않는 태도로 살 수도 있다. 심리를 뚫는 눈에 위트를 겸비하며 술술 읽히고 이야기의 반전도 흥미로운 <픽업>의 첫장에는 키르케고르의 이런 글이 인용되어 있다.

 

이리도 할 수 있고 저리도 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다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이리 하거나 저리 하거나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다만 어느 쪽을 선책하든 깊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어느 쪽을 선택하든 후회라는 결과물을 피할 수 없다면 좀더 용감하게 시도하고 나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햇살 따스하다. 봄이라서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봄이니까 다시, 시작이다. 詩.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게 있는데 내일쯤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자. 모든 건 맞는 때가 있으니...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가 2019 부산원북원도서 후보 5권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지금 투표중이고 어느 책이 최종선정될지 모른다. 작년 최종선정도서였던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는 내가 녹음했다. 선정되자 마자 빠른 시일 내에 해야한다. 이번 해부터는 그래서 후보도서 모두를 미리 나누어 녹음하기로 한다. 나는 그 중 <어디서 살 것인가>를 골랐다. 내용 전달력도 좋고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라는 건 알쓸신잡에서 보았고 글은 어떨지 내용이 기대된다.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5권 모두 시각장애인 용 전자도서로 작업 중에 있는데 그 작업이 끝나면 녹음도서로 작업하게 된다. 빠르면 다음주 수요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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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3-0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총 339쪽을 읽으시려면 쉬운 일이 아니겠네요.
픽업, 재미있나요? 요즘 단편 소설에 빠져 있어요. 장편과 달리 하나씩 읽어 나가는 재미가 있어요.

낭독하시려면 목 보호를 위해 신경을 많이 쓰셔야겠네요. 새 시작을 앞두고 있는 지점에서 충분히 쉬시며 하시기를요.
요즘 저는 말하는 것도 힘이 든다고 느낄 때가 있답니다. 나이 탓인지...ㅋ 건강합시다.

프레이야 2019-03-09 14:57   좋아요 0 | URL
페크 님 안녕하시죠. 진짜 체력이 예전같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낭독도 말하는 것도 힘들 때가 있어요. 제대로 숨 쉬는 것도 조율이 필요한 거 같아요. 픽업은 쉽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정도인데 별점을 굳이 주자면 셋 반 정도 줄까요. 지리멸렬한 이야기이지만 재미있기도ㅠ하고요. 건강이 최고에요 아무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