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저만 그런 건 아니었나봅니다. 《회색 인간》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김동식 작가를 한 강연장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요. 책을 내기 전 김동식 작가는 낮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지냈고 밤에 글을 썼다고 해요. 한 인터넷 게시판에 연재한글이 인기를 끌어 책을 냈다고 합니다. 자신의 게시글에 달리는 여러 댓글에 기운을 얻어서, 피곤한데도 밤마다 글을 쓸 수있었다고 말했어요. 그때 받은 칭찬이 너무 좋았다고 해요. 이이야기를 듣고 또 한 번 느꼈죠. 우선은 내가 글을 써야 독자가생기겠지만, 읽어주는 사람, 즉 독자가 있으면 글을 쓰게 된다는 사실을요. 이렇게 남은 나를 쓰게 합니다.


마감도 나를 쓰게 하는 강력한 요인이죠.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저는 이 말의 반만 맞는 것 같아요.
아무리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어도 주제를 잘 모르거나 꼭 써야 한다는 절실함이 없으면 단 한 줄의 글조차 나오지 않으니까요. 다른 무엇보다 절실함이 글을 쓰게 하는 가장강력한 동기가 되는 것 같아요. - P34

절실함은 생존 본능에서 나옵니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절실함은 두 가지에서 비롯하죠.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힘, 배고픔에서 벗어나려는 힘. 고통스럽고 배고픈 거 너무 싫잖아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죠. 이것들로부터 제 글쓰기도 시작됐고요. 마음이 너무 괴롭고 생각이 엉켰을 때 글로 정리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해서 매일 썼습니다. 자유기고가로 일할땐 기한 안에 글을 납품하지 않으면 원고료를 못 받으니까, 원고료가 없으면 쌀독에 쌀을 채울 수 없으니까 글을 썼어요. 글쓰기의 기한, 즉 마감이라는 사회적 약속 그리고 그것을 지켰을 때 주어지는 원고료라는 보상이 글을 쓰게 했습니다. - P35

그런데 직업적 글쓰기가 아니면 마감도 없고 원고료도 없잖아요. 그래서 글쓰기 강의나 모임에 참석하는 등 강제 장치를 만들어두는 것도 계속 글을 쓰는 한 방법입니다. 저는 의지가 약해서 제 결심이나 다짐을 믿지 못해요. ‘매일 매일 꼬박꼬박 글을 쓸 거야‘ 하고 아무리 다짐해도 안 쓰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책임감은 강해서 관계의 장 속에 저를 두었을때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었고요. 자기 성향을 파악해서 계속글쓰기를 할 방법을 정하시면 됩니다. 글쓰기 모임의 동료들끼리 각자 자기 돈 10만 원을 내놓고 글을 안 쓰면 못 받고 쓰면 되찾아가는 페이백 방식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마감을 만들고 원고료 같은 보상과 격려를 받는 방식을 권해드립니다. - P35

지금까지는 제 경험에 근거해서 무엇이 저를 쓰게 하는지말씀드렸어요. 여러분도 ‘어떤 상황에서 글 쓰는 내가 가장 활성화되는가?‘ 하고 스스로 돌이켜보세요. 자신의 성향에 맞는글쓰기 환경을 설계하고 계속 쓸 동력을 만들어보시고요. ‘나를 쓰게 하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글 한 편 써보시는 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 P36

1. 늘 하던 익숙한 글쓰기를 그만둔다.
2. 쉬면서 쓸데없는 일을 하거나 나를 가만히 둔다.
3. 익숙하지 않은 분야의 글쓰기를 시도해본다.


영화 보고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늘 영화 리뷰를 쓰는 사람이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영화 리뷰도 쓰다보면 어느 순간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수 있죠. 그럼 자기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쓰거나 글쓰기 모임에 참석하는 등 일상의변화를 시도해보는 겁니다. 내 경험과 관계가 바뀌어야 삶의자리가 바뀌고 보이는 것이 달라지겠죠. 관점을 바꿀 수 있는조건과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보세요 - P40

그리고 몇 년을 써도 글이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을 때는 실력을 가늠하는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 점검해보세요. 글 실력이 왜 안 늘지?‘ 싶다면 ‘내 채점표는 무엇일까?‘ 하고 고민해보라는 뜻입니다. 글을 보는 자기 기준, 잣대가 무엇인지 스스로 말해보세요. 저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관점과 해석에 둡니다. 사물과 현상을 통찰하는 힘이 있는 글인지를 중시해요.
글이 나아지고 있는지 돌아보는 주기도 고려해야겠죠. 저는 넉넉하게 잡아서 10년이에요. 한 주나 한 달 혹은 1년 간격으로 글이 좋아졌다, 안 좋아졌다 할 수 있겠지만요. 어떻게 해도 시간은 가죠. 글을 쓴 10년과 안 쓴 10년은 분명 다를 거라 - P40

고 생각합니다. ‘잘 쓰고 있나?‘ ‘왜 안 늘지?‘ ‘이게 맞나?‘ 이런고민, 주저함, 망설임, 회의감이 글을 글답게, 삶을 삶답게 해줄 겁니다. 이런 뒤척임 없이 10년을 보낸 모습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말투와 다른 표정을 갖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재밌슬럼프, 봄바람처럼 그것이 삶에 찾아오거들랑 잠식당하지마시고 글쓰기 인생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서 슬렁슬렁 잘타고 넘으시길 바랍니다. - P41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잡풀처럼 돋아나는 자기 의심과싸워야 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쓰기 전에는 ‘과연 쓸수 있을까?‘, 쓰는 동안에는 ‘이렇게 써도 되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닌가?‘, 쓰고 나서는 ‘이 글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내용일까?‘ 등등……. 생각의 잔물결이 밀려오고 밀려가죠. 이런 일을 반복하다가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합니다. ‘나한테 과연 글쓰기 재능이 있는 걸까? 재능이 없으면 글쓰기를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닌가? 이 물음은 어떤 면에선 ‘의미도 없는데 살아서뭐 하느냐‘는 물음과 같은 무게로 제게 다가오거든요. 답하기에 아주 조심스럽죠. 그래서 이렇다 저렇다 하며 일반론을 말하기보다 제 경우를 참조해 답해보려 합니다. - P42

개인 경험에 근거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단한 재능이 없어도 글쓰기를 시작할 수는 있지 않을까.‘ 글쓰기에 대한 회의감은 ‘재미‘나 ‘의미‘라는 가치 중심적인 단어보다 ‘재능‘이라는 자기 개발의 뜻을 지닌 단어를 글쓰기에 붙일 때 드는 것 같아요.
만약 제가 글쓰기를 그만둔다면 재능 없음을 비관해서가아니라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없음을 비관해서일 거예요. 더나은 세상에 대한 상상력, 인간에 대한 호기심, 살아가는 일에대한 애틋함 같은 게 없어진다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글을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능이 없으면 글쓰기를 그만두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고 싶어요.

왜 글을 쓰려고 하는가?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재능인가? - P43

우리 사회 가장자리에 있는 삶을 날카롭고 따뜻하게 그려내는 분이죠. 김중미 작가가 쓴 에세이 《존재, 감》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김중미 작가가 강연에서 청소년을 만날 때마다 늘 "어떻게 작가가 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데 그때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저는 어떻게 작가가 되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사람의 삶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정말 공감했습니다. 사람의 삶을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중미 작가의 말을 저는 이렇게이해했어요. 사람의 삶을 잘 이해하려는 노력이 글을 쓰게 한다, 즉 그 노력이 우리를 작가로 만들고 작가로 살게 한다고요. - P44

서.
글쓰기의 출발은 소박하죠. 기억 작업이고 자기 구원입니다. 저도 저 살자고 썼던 게 크고요. ‘아, 사는 게 참 힘들구나.
사람은 고통스러우면 안 되는 존재인데 이렇게 고통을 받으며사는구나.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는 법, 고통이 조금씩 견딜 만해지는 과정을 기록하면 이걸 읽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지.‘ 이 정도의 생각으로 글쓰기를 시작해본 겁니다.
글 쓰는 일은 지겹고 괴로운 반복 노동입니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기보다 찬란한 계절에 내가 꽃놀이나 단풍놀이를 안 가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 책상 앞에 앉아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와 씨름할 수 있는지, 그 고통을 감내할 만한 동력이있는지, 나는 왜 쓰고자 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쓰기의 말들》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쓰는 고통이 크면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 글 쓸 때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자기 의심은 오직 쓰는 행위에 몰입할 때만 자취를 감춥니다. - P45

사실 저도 ‘나 같은 사람이 해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있어요. 매달 칼럼을 쓰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 말고 다른사람이 쓰면 세상에 더 필요하고 재미있고 질 좋은 글을 쓸 텐데 내가 괜히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쓸 자신이 없어지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져요. 주로 글을 쓰기 싫을 때, 못 쓸까 봐 불안할 때 이런 생각이고개를 듭니다. 단행본 쓸 때도 그래요. 《알지 못하는 아이의죽음》이나 《있지만 없는 아이들》 같은 르포집을 쓰면서는 한숨으로 책상이 내려앉을 판이었습니다. 깜냥도 안 되는 내가왜 한다고 했을까, 노동 문제 · 청소년 문제·이주민 문제에 더해박한 사람, 더 오래 활동한 사람이 써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요. 원고 집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고, 책이 안 나올 것 같은두려움도 증폭됐어요. 이런 초조함과 불안감은 글을 써야 사라집니다. - P49

저도 온갖 상념이엄습할 때마다 나에게 책을 써볼 기회가 생겼다면 두려워도도망치지 말고 해보는 게 지금의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일단 막 쓰자, 대충 쓰자‘라며 스스로 달래고 긴장을 풀어주면서 썼어요. 완벽한 사람이 쓰는 게 아니라 쓰는 사람이완벽해지려는 노력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봅니다. - P50

그럴 때 말씀드려요. 글쓰기 수업은 ‘포트락 파티‘라고요.
각자 음식 한 가지씩 챙겨서 모이듯이 우리는 자기 글을 갖고모이는 겁니다. 그런 자리에서 나만 음식을 안 가져오고 남들이 가져온 음식만 먹으면 미안하죠. 글쓰기 과제를 내지 않는건, 나는 빈손이지만 남의 글만 읽겠다는 태도나 다름없습니다. 바쁘고 아프고 힘들고 등등의 사정이 있다면 전에 장 봐놓은 가지 하나, 귤 한 봉지라도 들고 온다는 마음으로 미완의 토막글이라도 내보자고요. 특히 제가 꾸리는 글쓰기 수업은 강사가 일방적으로 팁을 제공하는 강의가 아니라 함께 참여하고활동하는 워크숍 형식의 수업이기에, 서로의 삶과 삶에서 우려낸 글을 내주어야만 그 자리에서 배움이 일어납니다. - P55

이런 모습을 보면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 같아요. 다른사람이 과제를 안 하면 나도 안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과제를 하면 자기도 하게 돼요. 주변에 영향을 받는 것만이아니라 나도 영향을 끼치죠. 내 주변까지 나인 거예요.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면 소인배, ‘내 한 몸만 내가 아니다‘라고생각하면 대인배입니다.
또 한 가지, 글쓰기는 해방입니다. 나를 풀어줘야 합니다.
스무 명이 배우는 글쓰기 수업에 와서 눈치 보고, 자기 검열하고, 자기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불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을 어떻게 낼 수 있을까요? 내가 - P55

나를 풀어주고 자아를 해체해야 또 다른 내가 됩니다. 수업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학인들이 과제랑 후기를 전보다 더많이들 써내고 서로 게시물에 댓글도 달면서 분위기가 훈훈해졌어요. 저는 잔소리 회의론자인데 때로는 잔소리가 효과가있구나 싶기도 해요.


한편, 셀프 글쓰기 수업도 있습니다. 저는 대면 수업이 아닌글쓰기 책으로 하는 비대면 수업을 무척 많이 받았어요. 글쓰기 관련 책을 많이 읽었거든요. 잘 쓰고 있는지 헷갈릴 때마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어서 조급해질 때마다, 유명 작가들의 글쓰기 에세이를 찾아봤어요. 글쓰기 책이라는 수업에는 장점이많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수들에게 배울 수 있다는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는 점, 나만의 속도로 책장 앞뒤를 오가며 반복하고 건너뛰면서 배움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 등등...………. - P56

글쓰기도 그래요. ‘책 리뷰를 쓰겠다‘ ‘매체에 기고를 하겠다‘ 등 글을 한 편씩 완성하는 과정에서 글쓰기책을 읽어본다면 글 쓰다가 막히는 부분에 대한 해법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 소설가 앨리스 매티슨이 쓴 《연과 실》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내가 아는 모든 작가들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을 수업이나 비공식적인 모임, 서평, 책 등에서 배웠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을 할지, 또는 생각 자체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다.


"다른 사람"이 글쓰기 수업의 동료일 수도 있고, 책의 저자일 수도 있고, ‘글쓰기 상담소의 저일 수도 있겠죠. 쓰겠다고마음먹으면 온 세상이 다 교실이고 만인이 다 스승입니다. - P57

저도 글쓰기가 경쟁이 아니고 나눔이라서 여럿이 함께 10년이상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가 경쟁이었으면 저는 진즉에 병들었을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요. 글쓰기 수업 초반에 위축되고 조급해하는 분에게 읽어주는 문장이 있어요.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한 말입니다.


나이 든 작가는 젊은 작가에게 어떤 충고를 해야 할까? 그는 자기가 몇 년 전 들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만한 것들만 이야기해줄 수 있을 뿐이다. 기죽지 마라! 곁눈질을 하거나 당신을 다른 동 - P61

료들과 비교하지 마라! 글쓰기는 경주가 아니다. 아무도 진짜로 이기지 못한다. 만족은 노력에서 나오고, 그 결과 보상이 따른다 해도 그런 보상은 아주 드물게 오는 법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정말 좋지 않나요? 이 아름다운 충고를 제 언어로 정리하면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네요.


잘 쓴 글을 보고 기죽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니 기죽는다는 사실엔 기죽지 말고,
내가 기죽었다는 사실을 글로 써보자.
그게 글 쓰는 사람의 임무다.


오늘도 글감을 여러분 곁에 살며시 놓고 갑니다. - P62

공적 글쓰기에 반대편에는 사적 글쓰기가 있고 대표적으로일기가 있죠. 일기에도 자기 생각과 감정을 쓸 테니까 언어의표현 능력을 기른다는 측면에서는 글쓰기에 도움이 되겠지만결국 일기는 나만 보고 나만 이해하는 글이잖아요. 언어적 소통 능력을 향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적 글쓰기를 권해드려요. 나 아닌 타인이 본다는 점에서 SNS나 블로그, 브런치, 온라인 카페 게시판, 지면 같은 데 쓰는 게 다공적 글쓰기죠. 그리고 오프라인 글쓰기 수업, 글쓰기 모임 등에 참여해 쓸 수도 있고요. - P63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어떤 평가라도 받아들여야하지만 동시에 경계해야 할 것도 있거든요. 학교의 창작 수업이나 등단 준비반, 언론사 취업 준비반 같은 곳에서 자기 글을내보였다가 너무 호된 평가를 받아서 글쓰기가 두렵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들 하세요. 들었던 강렬한 일화가 떠오릅니다. 한교수가 책상 위에 있는 볼펜을 탁 쳐서 떨어뜨린 다음에 "이게니 글이야. 가치도 없어"라고 했대요. 또 교수에게서 "네 글은똥이야"라는 말을 들었다는 분의 이야기도 접했습니다. 끔찍합니다. 글에 대한 의견을 왜 꼭 상대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모욕이 정말로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지, 저는 회의적입니다. 만약에 제가 저런 말을 들으면 자극받아서 더 잘 써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기보다는 반발심만 생길 것 같거든요.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책이든 기사든,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그저 말로 하는 것보다 언어를 조심스럽게 고르고 표현 - P66

을 다듬는 일인데, 거칠고 뒤틀린 언사로 글쓰기를 배운다면모순이 아닐까 싶어요. 엄연히 언어폭력이기도 하고요. 김수영 시인의 시에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 라는 구절이 있는데요. 글쓰기를 배우는 과정도 사려 깊어야죠.
물론 글쓰기 합평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덕담을 나누는 자리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어떤 모욕을 당해도 결과적으로 합격만 하면 된다거나 책만 내면 다 되는, 성공의 지름길을찾아가는 자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합평을 통해서 남이 써낸 글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방법 그리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 자기 의견을 전달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이런 방법을 배우고 잘 해내는 것은 글을 잘 쓰는 방법과 다르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관계라도 가까워지면 그만큼 서로를 다치게도 합니다. 흠을 내지 않는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요.
말들이 오가는 합평에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시고요. 사람이 쉽게 안 바뀌듯이 글도 쉽게안 바뀌거든요. 쉽게 바뀐 건 금방 원 상태로 돌아오고요. 그러니까 기분 전환하시고 힘을 비축해서 다시 글을 쓰시길 바랍니다. 아까 합평 후에 눈물을 흘렸다는 학인이 쓴 후기의 한 구절을 공유해볼게요. - P67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가 리베카 솔닛도 걷기를 좋아했습니다. 사회적 참사와 재난 현장을 돌면서 글을 쓰는 환경운동가이자 르포 작가인 그는 인문 에세이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썼을 정도로 걷기 예찬자죠.
글을 엉덩이로 쓴다지만 엉덩이로만 쓸 수 없는 게 글입니다. 앉아 있다고 해서 글이 나오진 않지만, 앉아 있는 시간을 배신하진 않는 것 또한 글이고요. 그러니 옷을 성심껏 골라서 갖다놓고, 발품을 팔고, 매일 문을 열어놓는 마음으로 여러분도끈기 있게 앉아서 솟아나는 생각을 곱씹고 언어화해보세요. 손 - P71

님 한명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 문을 여는 옷 가게 주인처럼 글이 안 써져도 또 책상 앞에 앉는 거죠. 특히 개점 초기 1년은 매일 문을 열 듯이, 글쓰기를 시작했다면 적어도 1년은 산책하며 사유하고 앉아서 쓰는 습관을 들이길 권해드리고싶습니다.
오늘의 질문, "글은 엉덩이로 쓰는 거라는데, 맞나요?"에 대해 저는 니체의 명언으로 답변해보겠습니다.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 - P72

정확히 보는 것, 저도 글을 쓰며 중시하는 점입니다. 제 사생활이 많이 담긴 책 《올드걸의 시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의 독자들한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작가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솔직하게 글을 쓰나요?"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글을 쓸 때 솔직하게 쓰겠다고 마음먹진 않았거든요. 다만 정확하게 쓰려고는 노력했어요.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 말이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는지 자문자답하면서 본 것, 들은 것, 한 것을 최대한 빠짐없이 재현해보려고 노력하며 글을 썼죠. 그렇게 쓴 글을 독자는솔직하다고 느꼈고요.
솔직하고 정직하게 글을 쓰자는 말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있을 것 같아요. ‘정확하게 쓰자. 정확하지 않으면 나만의 고유함을 지닌 글이 되기 어렵고, 고유성이 없는 글은 어디선가 - P75

솔직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솔직함 그 자체가 남는 게 아니라 솔직함을 통과한 메시지가 남습니다. 무엇을 위한 솔직함이고 정직함인지 글을 쓰는 동안 놓치지 말아야겠죠. 친족성폭력 피해자가 자기 경험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쓴 글은 다른 피해자에게 용기를 줍니다. 피해자가 자기 잘못이 아니란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처한 현실을 바로 보게 하고 고통에서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한 번도 이야기되지 않은 집안일, 즉 봉인된 가족사의 말하기는 왜 중요할까요? 여성이나약자의 희생과 피해로 굴러가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안전한 관계다‘ ‘믿을 것은 가족뿐이다‘
라는 관습적인 말과 믿음으로 유지되는 가족 신화를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쓴 글은 삶의 진실을 견인합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하고 정직한 글이 좋은 글인가요?"라는 물음에 이런 표현으로 되묻고 싶어요. - P76

자기 경험을 쓴다는 것은 아프기만 한 것 같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하는 일인데, 자기가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쓰지 못하고어떤 시늉과 가식으로 문장을 채워서 가공한다면, 우리가 힘겹게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나에게 힘을 준 글이 남에게도 힘을 준다는 것, 용기도 전염된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저하던 ‘그것‘을 꼭 한번 써보시길 바랍니다. - P77

=인 행예전에 성폭력 피해자를 인터뷰했을 때 들은 말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피해 사실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느냐는 제 물음에 그는 성폭력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자기는 무관한 사람인것처럼 입 다물고 있기 싫었다고 말했죠. 자기 잘못도 아닌데위축되고 당황하고 그 기억에 끌려다니는 게 괴롭다는 거였어요. 고통을 글로 쓰고 공적인 장에 내놓으면 조금은 담담해질수 있을 테고, 그런 점에서 글쓰기가 글쓴이에게도 치유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일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서사의 편집권을 가짐으로써 그 일을 다스릴 수있게 되죠.
고통을 글로 쓰면 고통스럽던 경험이 사회의 자산이 되기도 합니다. 내 고통이 이 사회에서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위안이 되는 것 같습니다. - P81

《여섯 개의 폭력》 서문을 쓰며 류은숙 인권활동가의 말을인용했습니다. "고통을 말하는 이유는 고통의 전시장을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얘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고통 없이 살 수 없다면 글쓰기 없이도 살 수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글쓰기의 최전선》에도 썼지만 제게 글쓰기란 ‘고통의글쓰기예요. 글쓰기로 고통을 씻겨내고 극복하는 게 아니라,
내 고통을 글로 공유함으로써 타인의 고통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성장과 치유가 됩니다. 고통을 글로 풀어내는 일이 간단치않지만 시간을 낭비할 용기를 갖고 책상 앞에 앉아보시길 바랍니다. - P82

지만 굴하지 않고 썼습니다. 남한텐 시시해도 저한텐 절박한문제였으니까요. 그랬더니 저처럼 밥하는 일로 힘들고 고통받는 분들이 우르르 나타나서 공감했다며 같이 눈물 흘려주는독자가 되었습니다.
일찍이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도 말씀했습니다. "자기 내부의 불씨를 살라야지요. (...) 제 눈에 보여야 하고 마음속에 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라고요. 마음속에는 누구나 글감을 품고 있으며 고상한 글감, 시시한 글감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뭐라도 좋아요. 글감에 위계를 두지 않고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쓰면 그것이 좋은 글감입니다. 내가 내 삶을 풀어가는데 도움을 준 글이라면 다른 사람의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요.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 P94

제 글쓰기의 첫 공정은 자료 조사입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세상에 꺼내놓는 일이 글쓰기잖아요. 생각이든, 정보든, 느낌이든, 지혜든, 무엇이든지요. 가진 것이 없으면 내줄 것도 없겠지요. 반대로 자기가 많이 알고, 오래 붙들던 주제라면 그것에 관해 주제 장악력이 있겠고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도있듯이 알아야 씁니다. 그리고 글로 써봐야 내가 얼마나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도 드러나고요.
저한테 "축구에 대해서 글 써라." 하면 못 쓰지요. 축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누군가 제게 "블랙핑크에 대해서써라." 하면 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멤버들의 얼굴과 이름을 알고, 다큐멘터리를 봤고, 음악을 좋아하고, 호감이 있으니까요. 의욕적으로 인터뷰 기사도 찾아 읽고 팬카페도 들어가보는 식으로 쓸 준비를 하겠지요. 그다음에 "책 읽기에 대해서 써라."하면 이전 주제보단 더 수월하게 쓸 수 있습니다. 매일 보는 게 책이니까요. 잘 아는 주제로 글을 쓰면 자신감이 차오르진 않더라도 막막함은 덜해요. 자료 찾기는 자 - P99

신감을 ‘셀프‘로 충전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기고가로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만드는 간행물에 실리는 글을 쓸 때, 먼저 간행물의 기획자가 정한 주제를 받았습니다. "가야금 명인을 인터뷰해주세요." "연말정산에 대해 써보면 좋겠어요." "올해가 흰 소의 해니까 흰 소에 대해 써주세요." "요새 핫한 비건 식당이 많다는데, 망원동의 비건 식당 탐방기를 써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글 청탁을 받으면 글을 써서 납품했어요. 5년 정도 이런 일을 하다보니 잘 모르는 주제를 두고도 기한 내 글을 써내는 순발력이 생겼습니다. 습자지처럼 넓고 얇은 지식만 있어도 꾀부리지 않고 자료를 열심히찾으면 웬만한 글을 쓸 수 있겠다, 글이란 것은 어떤 사실을 토대로 필자가 재구성하는 일이다, 감각적인 글발을 발휘하는게 아니라 탄탄한 자료로 내실 있게 글을 써야 한다는 감을 잡았죠. - P100

등록 이주노동자, 즉 비자 기한이 만료되어 국내 체류자격을상실한 이주노동자의 자식을 말해요. 어머니, 아버지가 미등록 상태라서 아이도 미등록 이주아동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미등록 이주아동이 유엔인권아동권리협약에 의해서 고등학생 때까지는 국내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현실은외국인등록증이 없어서 학교 홈페이지 가입, 핸드폰 구입, 의료보험 가입, 다 불가능합니다. 교육받을 권리는 있고 살아갈권리는 없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불법체류 단속에 걸리면강제로 출국해야 합니다.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왔거나,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말을 쓰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아이들이랑 놀면서 한국 학교를 다녔는데 있지만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아이들. 성장기 내내 투명 인간으로 불안한 생활을 하고, 성인이 되면 한국 밖으로 추방당하니까 삶이 불안정해요. 미래를 설계할 수도 없습니다. - P101

이 모든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는 이 아이들의 존재가 드러나야 한다. 책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써내자‘라는 마음으로 집필을 결정했습니다. 계약서를 쓰고 집필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책 구매죠. 관련된 책을 검색해보고 열 권가량 구매했습니다. 그리고는 읽어야죠. 관련 단체에서 발간한 자료집도 전달받아서읽고요. 해당 이슈를 다룬 신문 기사도 스크랩해두고요.  - P101

자료 찾기 작업은 참 번거롭습니다. 체력과 시간을 많이 투여하니까요. 책 한 권을 읽기만 해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다읽은 책 내용을 일일이 정리하려면 손가락도 아픕니다. 그래도 이 과정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 글쓰기의 필수 공정이라고생각하면서 중단 없이 해냅니다. 김밥을 만들 때 장을 보고 시금치에 묻은 흙을 털어 씻고, 당근을 깎아서 채치는 등의 손질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마찬가지예요.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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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이미 나


제11회 서울레코드페어에서 음반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산울림 3집 리마스터링 앨범을 보았다. 연두색 바탕에 거친 붓질로그린 사람의 얼굴이 있고 "내 마음 / 그대는 이미 나"라고 써 있었다. <그대는 이미 나>는 장장 18분 38초에 달하는 대곡으로1978년에 나왔다. 아는 노래였지만 그날따라 엘피판에 새겨진글자가 낯선 시구처럼 다가왔다.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화두가 아닌가. ‘내 마음‘을 알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찾아서 인간은 평생을 헤맨다. ‘그대는 이미 나‘라고 할 만한 존재만 있어도 삶이 이토록고되고 외롭지 않으리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 P7

음반을 뒤집어보니 뒷면에 있는 "아무 말 안 해도 그대는 이미 나"
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타인과의 합일에 도달한 긍지의 말.
어쩐지 순정 가득한 가사가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 언어의찬미자인 나는 잡은 순간 내려놓지 못한 그 음반을, 턴테이블도 없으면서 고이 집으로 모셔왔다.
언어는 무의식을 일깨운다. 그대는 이미 나. 이것의 결핍 혹은 추구가 나를 쓰게 한 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버지니아울프의 말대로 산다는 것은 힘든 사업이다. 고통과 상실은 우리를 피해가지 않고 혼자 남은 밤은 길다. 내 슬픔을 그대가 알 - P7

아주기를 바라다가 제풀에 지치고, 그걸 말 안 하면 모르나 하고 서러워하다가, 말해도 모르는데 말 안 하면 더 모른다는 깨우침을 얻고서,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내 마음 나부터 알아주자는 데 이른 어른스러운 해결책이 내겐 글쓰기다. 나는진격의 독학자처럼 책을 쌓아놓고 줄기차게 읽고 썼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 형태는 없고 압력만 있는 슬픔을 나의 언어로 번역하여 실체화하는 작업이 없었다면 크고작은 생의 파고를 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언어를 고르고 쓰는 동안 나는 이미 충분한 나의 그대가 되어주었으니까. - P8

이미 두 권이나 썼는데 글쓰기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을 터놓았을때 나의 친구는 ‘노 프라블럼‘을 외치며 다정을 다해 이렇게말했다.
"<글쓰기의 최전선》은 《수학의 정석》같이 기본 원리를 일러주는 책이고, 《쓰기의 말들》은 사전처럼 옆에 두고 필요할때마다 찾아보는 책이고,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는 자습서같은 책이에요. 그사이 은유도 달라졌죠. 다른 은유가 쓴 다른책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 P11

낙타의 언어에서 사자의 언어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정신의 성장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 세 단계로 구분했다. 낙타는 의심없이 주어진 짐을 지고 가는 수동의 정신을 사자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을 거부하고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선언하는 부정의 정신을, 어린아이는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기쁨, 긍정의 정신을 상징한다.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충격에 빠져 혼잣말을 했다. "낙타, 나네……" 모성 이데올로기를내면화한 채 온갖 역할의 짐을 떠안고 일상의 사막을 거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이때의 각성으로 글쓰기가 봇물 터졌다. 낙타에서 사자로 어서 변신하고픈 몸부림이 글을 낳았으니, 엄마가 된 사람도 자신을 위해 행동할 권리가 있는 자주적인 존재라는 외침이 나의 첫 산문집에 고스란히 담겼다. - P12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은 다른 측면이 보인다. 낙타같은 모성이 저도 모르게 해낸 것들이 있었다. 엄마로 사는 일은 나의 욕구를 접고 타인의 욕구를 우선에 두는 일이다. 아침에 눈뜨기 싫어도 아이를 밥 먹여서 등교시키려면 일어나야하는 식이다. 그건 나보다 남을 위하는 차원이라기보다 나와남이 분리되지 않는 기이한 상태에 가까웠다. ‘그것‘에 계속 매여 있다는 점에서 육아와 글쓰기는 비슷했다. 오랜 시간에 걸 - P12

쳐 체화된 이 자아의 이중 감각이 작가의 삶에 유효했다. 기본적으로 글쓰기는 협업이고 약속이다. 나에게 몰입하는 만큼나를 내려놓아야 독자가 있는 글이 된다. 또 내 입장과 동료의처지를 동시에 헤아려야 일이 돌아가고, 이번 글에서 다음 글로 넘어갈 수 있다. 오늘의 살림을 마무리해야 내일의 생활이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밥‘이라는 마감을 매일 해온 사람에겐 원고 마감을 지키는 일이 괴로워도 어렵지는 않았다. 퇴로없는 삶에 복종해온 탓이다. 인생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고, 엄마로 살면서 길러진 낙타의 근면함과 수동성이 나를 쓰는 자리에 데려다놓았고 나는 ‘그래도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 P13

글이 쓴 사람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을 보아왔다.
앞서 글쓰기 책을 쓸 때와는 달라진 나의 모습이 이 책에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가령, 예전엔 어떤 문장만 좋으면 무조건 열광하고 인용했다면 지금은 글쓴이의 사회적 좌표를 살펴본다.
백인인가, 남성인가, 비장애인인가, 이성애자인가, 서울 사람인가, 중년인가, 대졸자인가 등등. 철학서나 사회과학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손이 가는 대로 읽다보면 거의 백인 · 중년·이성애자. 남성 저자의 책이었고 그러한 사회문화적인 길들임에 별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내인생의 오빠들로 니체와 조지 오웰을꼽기도 했다. 그들의 말과 사고를 여전히 따르지만 이젠 그들의 - P13

저작에서 여성혐오적 맥락을 골라낼 수 있게 됐다.
내 인생에 만만찮게 멋진 언니들도 생겼다. 버지니아 울프와 리베카 솔닛과 오드리 로드와 박완서와 젊은 여성 작가들의 저작이 책꽂이의 명당을 차지하고 있다. 장애학과 동물권과 이주민에 관한 책을 꾸준히 들인다. 중심이 아닌 변방의 언어, 생명을 살게 하는 존엄의 언어, 이분법을 넘어선 사이의 언어가 내 삶에 들어오고 섞이면서 더욱 진중하게 말을 고르게되었으므로, 그렇지 못한 과거에 대한 반성문을 쓸 일도 늘어났다. 그래서 이번 책을 쓰면서는 혐오나 차별적 표현이 있지않은지, 인용구 원작자의 나이나 성별 등 균형을 고려했는지,
성급하고 편협하게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등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도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편견은 깨지기전까지 그것이 편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간 무비판적으로 써왔던 관습적 언어와 권력의 언어에 사자처럼 부정의 ‘아니오‘를 말할 힘과 나의 무지를 뉘우칠 용기가 조금은 생긴 것 같다. 페미니즘 연구자 베티 리어든이 표현한 대로 "가부장제가 여성에게서 빼앗을 수 없었던 하나의 힘, 즉 생명을 낳는 힘‘을 밑천 삼아 나는 낙타의 언어부터 출발해 사자의 언어 그리고 어린아이의 언어를 차근히 배워가는 중이다. - P14

타인의 구체적 삶과 닿아 있는 문장. 너무 날것이라서 아픈 문장. 아픔이 길이 되는 문장. 그가 글을 쓰면서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리고 묘사할 단어들을 찾느라 고심했을 시간을 상상해보았다. 글쓰기는 이런 일을 한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을 오래 들여다보도록 북돋운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을 만든다.
안 보이던 사람이 보이는 일은 일상의 작은 혁명이다. 배달노동자를 인터뷰한 책을 읽고 나면 건물 승강기에서 만난 배달 노동자를 이전과는 다른 눈길로 보게 된다. 어떤 대상을 표면적인 존재가 아닌 입체적인 인격으로 보는 감각이 시민의식이다. 너도 나도 쓰고 말하고 듣고 생의 경험을 교환하다보면 사적인 고민은 공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일상에 먼지처럼숨어 있는 억압의 기제와 해방의 잠재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혹자의 지적대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할 능력은 없지만 비난할 능력은 있는 사람만을 양산하는 척박한 현실에서, 책과글쓰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 이해의 심층에 도달할 수 있을까. - P16

연결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럴수만 있다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그걸 또 성실하게 세상에 전달하는 사람, 더 많은 고통과 기쁨에 연루된사람으로 살고 싶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싶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사랑받는 사람의 얼굴을 갖고 싶다(나만사랑하면 쓸쓸하므로 쌍방향을 원한다). 서로 바라보고 경청하는 일은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흐트러짐 없는 사랑의 행위지만 글을 쓸 때는 그런 포즈를 흉내라도 내게 된다. 사람을, 고통을,
말들을 오래 생각해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 듣는 사람, 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즉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 P17

"글을 못 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쓴 글이 잘 쓴 글입니다."

나 또한 글쓰기 책을 섭렵하듯 읽었지만 글은 아는 대로 써지지 않았다. 여기서 얻은 교훈은 유용한 팁이 아니라 서두르지않고 제 몸으로 써나갈 때 자기만의 언어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잘 쓸 수도 없다. 목적에 갇히지 않아야 이것저것 시도하는 놀이가 되고 재밌어야 계속 쓴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집어 든 독자들이 ‘글쓰기의 유년기‘를 편안하고 충분하게 누렸으면 좋겠다. 유년기도 없이너무 일찍부터 수험생 모드로 진입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목표가 없으면 심심하니까 이런 정도를 권해드린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가족(없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되기 같은 것들. 인권활동가 미류의 표현대로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너무 큰 용기를 요구하지 않는 세상이어서 오길 바라며 세 번째 글쓰기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2023년 새해
은유 - P19

다만 혼자 글을 쓸 때 문제점도 있죠. 강제성이 없다보니 쓰다만 미완성 글이 쌓인다는 것과 독자의 검증이 없어서 자기만 이해하는 자족적인 글을 쓸 수도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같아요. 저는 혼자 쓰고 혼자 보는 글이라도 블로그에는 꼭 완성했다고 할 만한 글을 올렸어요. 그렇게 했을 때, 복잡한 생각을활자로 가지런히 정돈한 글을 보는 쾌감이 컸어요.


여러분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독자를 위해 쓴다는 마음으로 글을 완성해보세요. 여기서 ‘완성‘이란 나를 전혀 모르 - P29

는 다른 사람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남뿐만아니라 미래의 내가 봐도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 수 있도록 표현하려는 바를 촘촘하게 객관화해서 쓰는 겁니다. 그렇게 한 편씩 쓰다보면 마음이 흡족해지고자신감이 생겨서 또 쓰고 싶어져요.


그렇습니다. 혼자 글을 쓴다는 것은 독자 없이 쓰는 것이며 독자의 반응을 초월해서 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캐나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책 《글쓰기에 대하여》에 독자와 작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독자는 거대한 미지의 존재라고 말하면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소개하죠. - P30

나는 무명인이에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도 무명인인가요?
그러면 우리는 잘 어울리는군요!
말하지 마요! 그들이 떠들고 다닐 거예요, 알잖아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되는 건!
얼마나 눈에 띌까요, 개구리처럼
6월 내내, 흠모하는 늪지를 향해
자기 이름을 불러대는 것은! - P30

시구를 언급한 뒤 이렇게 부연합니다.


그러다 책이 성공하면 작가는 "유명인이 되고, 독자 집단은 그를흠모하는 "늪지"가 됩니다. 하지만 무명인에서 유명인으로 바뀌는데는 트라우마가 동반돼요. 무명인 작가가 투명성이란 망토를 벗어던지고 가시성이라는 망토를 걸치는 과정에서요. 매릴린 먼로가말했지요. "다른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무명인은 유명인이 될 수없다."


혼자 글쓰기를 다르게 말하면 세속적인 성공의 뒤안길에서쓴다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그 시간을 소외의 시간이 아니라내면을 다지는 풍요의 시기로 생각할 수 있어야 오래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빠른 성공이 아니라 건강한 성장이니까요. 혼자 쓰는 시간 동안 자기 탐색의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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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 잘못들을 치유하려면, 이는 매우 벅찬 과업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계급 지배‘만‘이 아니라 젠더와 성, 인종적·민족적·제국주의적 억압, 정치적 지배의 전반적인 불균형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창안해야 한다. 또한 경제·금융 위기‘만‘이 아니라 생태·사회-재생산·정치 위기를 낳는 경향들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위기 경향들의 제도적 기반을 해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1세기를 위한사회주의는 사전에 ‘정치‘ 영역이라고 정의된 범위 안에서 의사결정을 민주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관할범위를 광대하게 확장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 - P277

는 바로 그 정의定義와 구획, 바로 그 틀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규정할 경우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재검토는 매우 거대한 작업이 된다. 만약 그 작업을 완수한다면(엄청난 가정법이지만), 이는 사회적 투쟁을 통해 획득한 통찰이 강령적사고와 정치조직과 만나 시너지를 일으키는 식으로, 운동가와이론가를 아우르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결합한 결과일 것이다. 이 과정에 기여하길 바라며 나는 짤막한 성찰의 세 가지 보따리를 풀어놓고 싶다. 그 목적은 앞의 논의들이 어떻게 사회주의 사상의 몇 가지 고전적인 기본 주제에 새로운 빛을 비추는지보여주려는 데 있다. - P278

첫 번째는 제도적 경계선들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본 대로, 이 경계선들은 자본주의의 제도적 분리, 즉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 착취와 수탈의 분리,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의 분리에서 발생한다. 이 분리들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위기의 장소가 되고, 투쟁의 판돈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따라서 사회주의자에게는 사회 각 영역들이 내적으로 어떻게 조직돼 있는가라는 물음 못지않게, 이 영역들이 과연 서로 분리되면서 동시에 연결돼 있는가, 그렇다면 그 방식은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중요하다. 사회주의자는 경제라는 우물 안조직에만 일면적으로 집중하기보다는(자연, 가족, 국가에 대해서도 - P278

마찬가지다), 경제를 존립할 수 있게 하는 배경조건들(사회적 재생산, 비인간 자연, 자본화되지 않은 형태의 부, 공적 권력과 경제가 맺는관계를 사고할 필요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제도화된 형태의 불의, 비합리성, 부자유를 극복하려 한다면, 생산과 재생산, 사회와 자연,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다시 상상해야만 한다.
요점은 사회주의자가 이 분할들을 단번에 청산하길 목표로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것‘의 구분을 폐지하려 한 소비에트의 재앙적인 시도야말로, 청산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경고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제도적 경계선들을 다시상상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최소한 우리의 목표는 이 경계선들을 다시 그음으로써, 자본주의가 ‘경제적‘인 것과 관련지은 긴급한 사안들을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 P279

마지막으로,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는 제도 설계 과정을 민주화해야 한다. 이는 사회적 영역들의 설계와 범위를 결정하는일을 정치적 문제로 만든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가우리를 위해 우리 등 뒤에서 결정해온 것을 이제는 우리가 집단적인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법률 이론가들이 ‘영역 재설정redomaining‘이라 부르는 것, 즉 사회의 무대들을 구획하고 각 무대 안에 무엇을 포함시킬지 결정하는 경계선의 재설정에 우리 스스로 참여해야 한다. 이 과정은 ‘메타정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정치 공간(일차적 정치)을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영역 재설정‘의 정치적 과정(이차적 정치)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어떤 사안을 정치적인 문제로 다룰 - P280

것인지, 어떤 정치적 무대에서 다룰 것인지를 스스로 정치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민주적이려면, 사회주의의 영역 재설정은정의로워야 한다. 이것의 의미 중 몇 가지는 이미 분명하다. 첫째, 의사결정은 적절히 포괄적이어야 하다. 즉 숙고하는 모든사안에 대해, 그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지배를 받는 모든 이들이의사결정에 참여할 자격을 지녀야 한다. 더하여, 참여의 조건이 평등해야 한다. 즉 비록 민주주의 안에서 개인 간에 어떤 구조적 우열이 계속 존재하더라도 참여의 권리와 기회는 동등해야 한다. - P281

그러나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지침이 되어야 할, 익숙하지 않은 생각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이것을 내는 만큼 받는pay as yougo‘ 원칙이라 칭하겠다. 온갖 형태의 무임승차와 이른바 원시 축적을 피하면서, 21세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참으로 냉혹하게 망쳐버린 저 모든 생산의 전제조건들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 사회는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서 소모하는 모든 부를 보충하거나 수선 혹은 대체하는 과업을떠맡아야 한다.
첫째로, 사회주의 사회는 상품을 생산하는 활동뿐 아니라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사람들을 유지시켜주는 돌봄 활동 등)도 보충해야 한다. 더하여, ‘바깥에서‘ 즉 비인간 자연뿐 아니라 주변 - P281

부 민중과 사회로부터 취하는 모든 부를 대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다른 필요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기댈 언덕이 되는 정치적 역량과 공공재를 보충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유인책을 주며장려하는 동시에 책임을 회피하는 자본주의식 무임승차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단서 조항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병인 세대 간 불의를 극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를 준수함으로써만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다양한 위기 경향과 비합리성을 해체할 수 있다. - P282

잉여는 시간으로도 사고될 수 있다. 즉, 잉여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하고 우리가 소모한 것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활동 이후에도 남는 시간, 그러니까 자유시간이 될 수도 있었던 시간이라볼 수 있다. 자유시간을 향한 기대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적 자유의 모든 고전적 내용에서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미래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에서 자유시간이 엄습할 가능성은 그리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서 물려받을 엄청난 부도어음에 있다. 자본주의가 생산성을 자랑하며으스대기는 하지만, 그리고 마르크스도 이를 잉여를 생산하는실질적인 엔진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나는 이런 주장을 의심한다. - P283

즉, 기층에도 최상층에도 시장은 없다. 그러나 그 중간은 그럼어떨까? 사회주의자는 중간층을 다양한 가능성의 혼합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상상해야 한다. 시장이 협동조합, 커먼즈, 자주적결사체, 자주관리 프로젝트와 공존하며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말이다. 시장에 대한 많은 전통적 사회주의의 반대는 내가 여기에서 구상하는 맥락에서는 해소되거나 완화될 것이다. 시장의 작동이 사회적 잉여에 대한 사적 전유와 자본 축적의 역학에 의해 왜곡되지도, 이런 역학에 흡수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최상층과 기층이 사회화·탈상품화된다면, 중간층에서 시장이 맡는 기능과 역할도 변형될 것이다.  - P286

그 장점 중 하나는 통상적 사회주의관의 경제주의를 극복할가능성이다. 또 다른 장점은 전통적 노동운동의 중심 주제를 넘어선 광범위한 당면 쟁점들, 즉 사회적 재생산, 구조적 인종주의, 제국주의, 탈민주주의화, 지구온난화 같은 쟁점에 대해 사회주의가 시의성을 지님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세번째 장점은 제도적 경계선들, 사회적 잉여, 시장의 역할 같은 사회주의 사상의 몇 가지 고전적 기본 주제들에 새로운 빛을 비출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더없이 중요한 사실을드러냈길 바란다. 그것은, 21세기에도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추구할 값어치가 있다는 것, ‘사회주의‘는 단순한 현학적 전문용어 - P287

나 역사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 지구를 파괴하면서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사람답게 살 기회를 좌절시키는 시스템에 대한 진정한 대안의 이름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 P288

대식세포 Macrophage, 명사.
현재는 주로 면역학에서 사용된다. 그리스어의 pakpós (makrós, ‘거대한‘)와 paysiv(phagein, ‘먹다‘)에서 유래했으며, 글자 그대로는 ‘대식가‘라는 뜻.


이 책의 대부분은 코비드-19가 발생하기 전에 쓰였다. 확장된 자본주의관을 발전시키고 있던 팬데믹 전 몇 년 동안, 나는공식 경제에서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감춰진 장소‘들을 최종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 결과 여러분이 이 책에서 마주하는 것처럼, 자본이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책임은 지지않는 필수조건들, 즉 인종화된 수탈, 사회적 재생산, 지구 생태계, 정치적 권력 중 하나에 각각 초점을 맞추는 여러 장들이 집필됐다.
각 장마다 나는, 자신을 존립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토대 - P291

를 놓고 구조적으로 기꺼이 제살 깎아먹는 짓을 벌이려 하는 사회 질서가 지닌, 모순적이고 위기 친화적인 성격을 드러내려고노력했다. 즉 이 사회 질서는 돌봄을 폭식하고, 자연을 탐식하며,
공적 권력의 내장을 적출하고, 인종화된 인구집단의 부를 먹어치운다. 또한 각 장마다 나는 먹이 떼를 향해 달려드는 이들 포식자 무리 중 어느 것도 다른 것들과 떨어져 단독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빠져든, 온 세상을태워버리는 위기 속에서 모두는 한데 뒤엉킨다. - P292

코비드-19의 발생은 이 얽힘을 증명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사례를 제공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22년 4월 현재, 팬데믹은 식인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이 수렴하는 지점이 되고 있다.
즉 자연, 돌봄 활동, 정치적 역량, 주변부 민중을 둘러싼 제살깎아먹기가 죽음을 부르는 난장판으로 융합한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기능 장애의 광란의 파티인 코비드-19는 이 사회 시스템을폐지해야 한다는 요청에서 단번에 모든 의심을 벗겨버린다.
이유를 알고 싶다면, 자연을 생각해보자. 인간이 Sars-CoV-2[사스-코로나바이러스-2]"에 노출된 것은 자본이, 자신을(그리고우리를!) 존립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기둥을 놓고 제 살을 깎아먹은 것에 다름 아니다. 코비드-19의 원인이 되는 코로나바이 - P292

러스는 오랫동안 외딴 동굴의 박쥐들에게 머물고 있다가, 2019년에 어쩌면 천산갑일 수도 있지만 아직도 완전히 확인되지는않은 매개종을 거쳐 야생동물에서 인간으로 전파됐다. 그러나박쥐가 이 매개종과 접촉하게 하고 그 매개종이 인간과 접촉하게 만든 원인은 이미 분명하다. 그것은 지구 온난화와 열대 삼림파괴가 결합한 결과다. 그리고 이것만큼 분명한 것은, 이 두 과정이 자본의 소산이며 이를 추동한 힘 역시 이윤을 향한 자본의채울 길 없는 갈증이라는 점이다. 두 과정이 한데 합쳐져 무수히많은 종의 서식지를 파헤쳤고, 대규모 이동을 유발했으며, 과거에는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곤란한 처지에 놓인유기체들이 처음으로 근접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들 사이에서병원체의 전에 없던 이동을 촉진했다. 이 역학은 이미 여러 바이러스성 전염병들을 촉발했으며, 이는 모두 박쥐로부터 ‘증폭 숙주‘를 거쳐 인간으로 전파됐다. 후천성 면역결핍증HIV 침팬지를 통해, 니파ipah‘는 돼지를 통해, 사스SARS는 사향고양이를통해, 메르스MERS는 낙타를 통해, 그리고 이제 코비드-19는 아마도 천산갑을 통해 인간에게 옮겨갔다. - P293

이런 질병은 앞으로도 발생할 것이다. 이런 전염병은 자본을위해 자연을 희생양으로 삼는 사회 질서에서는 결코 우발적인부산물이 아니다. 이윤을 긁어모으는 데 전념하는 자본은 생물물리학적 부를 가능한 한 신속하고 저렴하게 전유하도록 유인책을 제시하면서도 수선이나 보충의 책임은 전혀지지 않기에,
열대 우림을 파괴하고 대기에 온실가스를 퍼붓는다. 자본은 어떤 시기든 축적에 광분하지만, 이제는 신자유주의화로 엄청나게 강력해진 탓에 치명적 역병이 해일처럼 쇄도하게 만들고 말았다. - P294

인간에 대한 코비드의 충격은 어떤 조건에서든 끔찍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충격은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구조적 모순에뿌리를 두고 신자유주의 시기에 절정에 이른 현 위기의 또 다른지류에 의해 측량할길 없이 악화됐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자본은 자연만이 아니라 공적 권력을 놓고도 제 살을 깎아먹었다.
공적 권력 역시 자본의 식단에서 빠질 수 없는 성분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발전의 모든 국면에서 자본은 이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우지만, 지난 40년 동안은 특히 광분하며 먹어댔다. 바로 여기에 난점이 있다. 금융화된 자본이 걸신들린 듯삼킨 정치적 역량은 바로 팬데믹을 완화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행운은 허용되지 않았다.
코비드가 발생하기 훨씬 전에 대다수 국가는 ‘시장‘의 요구에 - P294

굴복하여, 공중보건 인프라와 기초과학 연구를 포함한 사회적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쿠바 같은 주목할 만한 몇몇 예외가 있지대다수 국가는 구조 장비 (개인 보호장구, 인공호흡기, 주사기, 의약품, 검사키트) 비축분을 줄였고, 진단 역량(검사, 추적, 수학적 모델링,
유전자 염기순서 분석)을 빈껍데기로 만들었으며, 협력과 치료 역량(공공병원, 중환자실, 백신 제조·저장·유통설비)을 위축시켰다. - P295

게다가 공공 인프라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뒤 우리의 지배자들은 필수 보건 기능을 (이윤 동기를 따르는 공급자, 보험회사, 제약회사, 의약품 생산업체에 내맡겨버렸다. 공공성에 구속받지도않고 관심도 없는 이 기업들이 이제 전 세계의 보건 관련 노동력, 원자재, 기계, 생산 설비, 공급망, 지적재산권, 연구기관, 연구원의 알짜를 통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개인적 차원으로나 집단적 차원으로나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들이다. 이기업들은 자기네 수익 흐름을 지키는 데만 전념하며, 인류를 위한 공동의 공적 조치를 가로막는 사적 불가항력을 구축한다. 그결과는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놀랍지는 않다. 죽느냐 사느냐의문제를 ‘가치 법칙‘에 종속시키는 사회 시스템은 애초부터 구조적으로, 이루 셀 수 없는 사람들을 코비드-19에 희생시키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미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공적시스템의 붕괴는 사회적 재생산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구조적 - P295

모순과 수렴한다. 항상 자본의 소비 목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돌봄 활동은 최근 몇 년 동안 게걸스러운 폭식의 대상이됐다. 공적 돌봄 인프라를 처분해버린 바로 그 체제는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각 가정당 유급 노동시간을늘리도록 강요했는데, 1차 보호자 primary caregiver 의 경우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는 돌봄 활동을 가족과 공동체에 떠넘기면서도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빨아먹음으로써, 사회적 재생산을 불안정에 빠뜨리는 자본주의의 내적 경향을 극심한 돌봄 붕괴로까지 비화시켰다. - P296

코비드의 출현은 위기의 이러한 지류 역시 강화했으며, 새로운 돌봄 노고를 가족과 공동체에 특히 여전히 무급 돌봄 활동의핵심을 맡는 여성에게 떠넘겼다. 록다운 상황에서 아동 돌봄과학교 교육이 가정으로 장소를 옮기는 바람에 부모가 부담을 떠안게 됐고, 설상가상으로 이런 일을 해야 할 공간은 이런 목적에는 맞지 않는 제한된 집 안이었다. 많은 피고용 여성들이 아이들과 여타 친척을 돌보기 위해 결국 일을 그만두어야 했고, 또 다른 많은 여성들이 고용주에 의해 해고됐다. 두 집단 모두 노동현장에 복귀할 경우 전보다 더 낮은 지위와 급여에 직면한다. 제 - P296

3의 집단은 집 안에 꽁꽁 갇힌 아이들과 가족을 위해 돌봄 활동을 수행하면서도 재택 원격 근무를 하며 일자리를 유지하는 특전을 누렸지만, 전보다 훨씬 더 정신없이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만 했다. 그리고 특정 젠더로 엄격하게 한정되지 않는 제4의 집단은 ‘필수노동자‘라는 영예를 떠안았지만, 박봉을 받고 일회용품 취급을 당했으며, 다른 이들이 자가격리할 수 있도록 물품을생산하고 유통하기 위해 감염 위험과 가족한테 전염시킬 수 있다는 공포를 매일 감내해야 했다. 이 모든 경우에, 이제 팬데믹으로 더욱 증폭된 사회적 재생산 활동은 (자본주의 역사의 모든 국면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주로 여성의 몫으로 남았다. 그러나 어떤 여성이 결국 위 네 집단 중 어디에 속하게 될지는 계급과 피부색에달려 있다. - P297

무엇보다도 구조적 인종주의는 자본주의 시스템 발전의 모든 국면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좌익의 정통 교리와는 달리, 자본 축적은 이중으로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의 착취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과 법적으로 유효한 권리를 빼앗긴 종속적 인구집단의 수탈을 통해서도전개된다. 착취와 수탈의 이러한 구분은 전 지구적인 피부색의경계선과 일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내장된 특징인 인종적-제국주의적 약탈은 현 위기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는 대규모 생태 파괴의 지리학에 피부색을 - P297

덧칠하는데, 자본은 주로 인종화된 인구집단에게서 토지, 에너지, 광물자원을 가샘으로써 값싼 자연‘을 향한 갈증을 해소한다. 자기방어 수단을 빼앗긴 채 정복, 노예화, 인종 학살, 자산 박탈에 휘둘리는 이들 인구집단은 전 지구적 환경부담에서 터무니없이 많은 몫을 짊어진다. 그들은 자본주의 중심부에 비해 과도하게 독성 폐기물 투기와 ‘자연재해‘, 지구 온난화의 다양한 치명적 충격에 노출된 상태이며, 이제는 코비드 예방접종과 치료를 기다리는 줄에서도 맨 뒤에 서야 하는 신세다. - P298

게다가 피부색은 계급과 깊숙이 얽혀 있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현 국면에서는 특히나 심하다. ‘필수노동자‘ 범주가 보여주듯이, 실제로 둘은 분리가 불가능하다. 의료 전문가들을 논외로 한다면, 이 명칭은 떠돌이 농장 노동자, 이주민도축· 정육 노동자, 아마존사 창고 관리 노동자, UPS 차량 운전사, 노인요양원 조무사,병원청소부,
슈퍼마켓 진열대·계산대 담당자, 식료품과 포장 음식을 배달하는 긱-노동자를 아우른다. 코비드 시기에 특히 위험천만한 이 일자리들은 대개 저임금에다 노동조합도 없고 불안정하며 수당과노동보호 규정이 전무하다. 이 일자리들은 기분 나쁜 감독과 통제를 받으며, 승진과 숙련 획득의 전망이나 자율성 따위는 눈곱만큼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압도적으로 여성과 유색인으로채워져 있다. - P299

은 더 이상 백인 남성 광부, 공장 직공, 건설 노동자로 전형화될수 없으며, 이제 그 전형은 돌봄 노동자, 긱- 노동자,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다. (어쨌든 급여를 받을 경우에는 재생산 비용보다 더 적은 급여를 받는 이 현대 노동계급은 착취를 당하면서 동시에 수탈도 당한다. 코비드는 이 추악한 비밀까지 폭로했다. 팬데믹은이들 노동계급 업무의 ‘필수적‘ 성격과 이에 대한 자본의 체계적인 저평가를 대비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커다란결점을 입증했다. 노동력 시장이 일의 진짜 값어치를 정확히 계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 P300

즉, 전반적으로 코비드는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비합리성과불의‘의 광란의 파티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내적 결함을 그한계점까지 돌이킬 수 없이 증대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의 모든 ‘감춰진 장소‘들에 날카로운 빛줄기를 드리운다. 이 감춰진 장소들을 그림자에서 끌어내 햇빛에 노출시킴으로써 팬데믹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들을 만인의 눈앞에 펼쳐보인다. 그 모순들이란, 자연을 놓고 제살 깎아먹기를 벌여 지구를 불지옥일보 직전까지 내모는 자본의 충동,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진정으로 필수적인 활동에서 역량을 빼가는 자본의 충동, 자본주의 시스템이 발생시키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지경까지 공적 권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리는 자본의 충동, 인종화된 대중의건강과 점점 줄어들기만 하는 부를 먹어 치우는 자본의 충동, 노 - P300

동계급을 착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탈까지 하는 자본의 충동이다.
여기까지가 사회이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의 최대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어려운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 이 교훈을사회적 실천 속에서 실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어떻게 이 야수를 굶주리게 만들지, 어떻게 식인 자본주의를 최종종식시킬지를 놓고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 P301

국제적으로 낸시 프레이저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첫번째 계기는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신자유주의가 확고한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은 1990년대에 착수한 ‘정의‘론 작업이었다. 프레이저는 정의에 ‘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공존한다는 이차원적 정의관을 제기했고,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입장을 끈질기게 발전시켰다. 프레이저는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는 존 롤스식 정의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1970년대 이후 급속히 발전한 여성운동, 흑인운동, 성소수자운동 등이 제기하는 또 다른 정의관, 즉 문화적 정체성의 인정을 중심에 둔 정의관을 적극 수용했다. 하지만 오로지 인정에만 바탕을 두고 분배 중심 정의관을 폐기하려는 시도에도 한계가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분배와 인정 모두를 정의의 두 축으로 포섭하고 둘의 공존과 상호작용을 중심에 두는 정의관을 제시했다.  - P303

정의관은 분배, 인정에 더해 ‘대표‘의 차원을 정의의 또 다른 축으로 삼는 삼차원적 정의관으로 재구성됐다. 분배와 인정의 측면에서 불의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적 대표의 측면에서 만인의 동등한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프레이저는 이러한 정치의 무대가 과거와 달리 국민국가에 한정되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지구화 시대에 정치가 제 역할을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공론장이마련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대한 새로운 상상》(김원식 옮김, 그린비, 2010)이 이러한 정의론 갱신 작업을 결산한 저작이다. - P304

경제 위기, 극우 포퓰리즘의 창궐, 기후 급변 등으로 어지러웠던 2010년대에 프레이저는 이제까지 벌인 이론 작업의 탄탄한 토대 위에서 다른 어떤 사회이론가보다 더 맹렬히 현실에 개입했고,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삼차원적 정의관으로 무장한 프레이저는 신자유주의전성기에 정체성 정치만 강조하며 분배 요구를 등한시한(이를테면 ‘인정‘ 편향 사회운동들을 비판했고, 신자유주의가 쇠퇴한 뒤에 좌파가 아니라 극우 포퓰리즘이 상당수 대중에게 대안으로선택받는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음을 통렬히 지적했다. 프레이저는 특히 페미니즘의 대중적 확산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식의 낡은 틀에 갇혀 있는 여성운동을 향해 자기 성찰과 노선 전환을 촉구했다. - P304

여성운동만이 아니었다. 프레이저는 "낡은 것은 무너지는데도 새것은 나타나지 않는"(안토니오 그람시) 궐위기가 하루빨리종식되려면 무엇보다도 사회운동과 좌파정치 전반이 환골탈태해야 함을 역설했다. 2020년 미국 대선 직전에 펴낸 팸플릿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김성준 옮김, 책세상, 2021)에서 프레이저는 민주당 주류의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도널드 트럼프의 극우포퓰리즘이 발호하도록 만든 원흉이기에 트럼프주의를 극복할대안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트럼프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과 상당수 중간계급의 동맹에 바탕을 둔 ‘진보적 포퓰리즘‘뿐이다. - P305

바로 이 책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에서 드디어 프레이저의 새로운 자본주의관은 전모를 드러낸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며, 자본임금노동 관계만도 아니다. 비-경제 영역이라 치부되는 사회적 재생산, 인간과 비인간 자연 간 관계, 인종화된 집단에 대한 수탈, 공적 권력의 작동 등이 없이는 착취도, 축적도, 성장도 이뤄질 수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이러한 배경조건들까지 포함한 특정한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관이 이렇게바뀌면, 당연히 시스템의 모순과 위기 역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변형해왔고 앞으로 이를 극복할 가능성을 지닌 동력에 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계급투쟁뿐만 아니라 프레이저가 ‘경계투쟁‘이라 부른 투쟁들, - P306

들, 즉 사회적 재생산, 인간과 비인간 자연의 관계, 착취와 결합된 수탈, 정치 등의 영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 역시 중요해진다. 이 투쟁들이 한데 이어지지 않고서는 복합적 사회 질서인자본주의를 변형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은 이 책의 핵심 주장에 관한 지극히 빈약한 요약이지만,
굳이 여기에서 본문 내용을 다시 장황하게 정리하지는 않겠다.
이 책 곳곳에서 프레이저가 워낙 상세하게 반복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서문"을 읽으면 낯선 개념이나 비유, 용어들 탓에 어렵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후의 장들을 읽어가다보면 어느새 저자의 논의가 익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만큼 이 책에서 노학자는 열정을 남김없이 쏟아부으며 자신의 학문과 실천 역정을 총결산한다. - P307

그렇기에 여기에서는, 어쭙잖은 해설을 덧붙이기보다 프레이저의 자본주의관이 사상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지만 간략히 짚겠다. 돌이켜보면, 고전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에도 자본- 임금노동 관계가 그 바깥에서 작동하는 전혀 다른 사회관계와 함께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음을 명확히 지적한 예외적인인물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로자 룩셈부르크다. 룩셈부르크는<자본의 축적>(황선길 옮김, 지만지, 2013)에서, 유럽 세계 바깥의식민지 인민에 대한 수탈 없이는 유럽 안에서 착취를 통해 자본축적이 계속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발상은 <좌파의 길: 식인 - P307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에서 프레이저가 발전시키는 수탈론의원형이다.
그러나 룩셈부르크에서 프레이저에 이르는 거의 한 세기에걸친 세월 동안 룩셈부르크의 명제는 자본주의 중심부의 좌파사이에서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발상이 확대될 경우 임금 노동자에 대한 착취만으로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설명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주장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도 분명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자본임금노동 관계에 포섭되지 않는 사회관계가 오히려 자본-임금노동 관계의 전제조건이 되며 자본주의 전체의 필수적이고구성적인 요소라는 발상은, 프레이저가 지적하는 것처럼, 흑인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인종 연구나 제국주의 및 그 후속 세계체제에 대한 연구 등에서만 계승·발전되었다. - P308

이러한 상황에서 돋보인 또 다른 예외적 사상가가 있었다. 프레이저가 이 책에서 직접 거명하는 미국의 생태사회주의자 제임스 오코너(1930-2017)다. 오코너는 생태주의의 문제의식이 아직 사람들에게 낯설었던 1970년대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생태적전환을 고민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저널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Capitalism, Nature, Socialism》를 창간해 생태사회주의 사상개척의 국제 실험실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오코너는 역사유물론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주장을 내놓았다. 생산력과 생산관 - P308

계의 모순만으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설명할 수 없으며, 또 다른 기본 모순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코너는 그것이 생산력/생산관계와 생산조건의 모순이라 주장했다. 생산을 무한히 확장하며 축적을 지속하려는 자본과 그 생산의 조건이 되는유한한 비인간 자연이 서로 모순을 빚으며 자본주의의 위기를낳는다는 것이었다.
역사유물론 자체를 다시 쓰려는 오코너의 시도는 이후 존 벨러미 포스터 같은 후속세대 생태사회주의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자본임금노동 관계의 외부에서 생태문제의 원인을찾으려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착취와 생태문제 사이의 유기적연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게 비판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오코너의 기본 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생태 문제가 자본주의 ‘경제‘와 그 외부(그러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적 일부인)의 경계선에서 발생한다는 이 책의 핵심 주장을 통해 오코너의 구상을 발전시킨다. - P309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에서 무어와 파텔은 이윤의 기반이되는 상품가격 이면에는 자본주의가 ‘저렴한 것‘으로 취급하며착취/수탈하는 일곱 가지 요소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노동뿐만 아니라 자연, 돈(화폐), 돌봄, 식량, 에너지, 생명이다. 프레이저가 정리한 자본주의 경제 외부의 네 가지 주요 영역과 깔끔하게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 함의만은 비슷하다. 무어·파텔과 프레이저 모두,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자본이 거두는 막대한 이윤의원천은 자본임금노동관계만이 아니며 돌봄 활동, 비인간 자연,
남반구 등에 대한 수탈이 그만큼 필수불가결하고 구성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런 인식의 전환은 현재 인류 문명을 격동시키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모순을 좀 더 복합적이고 역동적으로바라보게 할 뿐 아니라, 중심부의 자본-임금노동 관계만을 특권화했던 좌파의 전통적 시각 또한 뒤집는다. - P310

프레이저의 새로운 자본주의관이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의 교착 상태를 돌파할 대항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하려는 필사적인 집단적 노력에 아주 중대한 기여를 한다는 점만은 일단 인정해야 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려는 이들은 여전히 현실의 노동운동을 자본주의를 극복할 계급투쟁과 동일시하며 특권화하고, 오직 이를 보조하는 요소로서 다른 사회운동들을 바라본다. 반면에 이런 정통적 사고를 뛰어넘으려 한 선구적 이론가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는 현실에 다양한 사회운동이 존재함을 단순히 전제하고는,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다분히 우발적인 담론적실천을 통해 이들 사회운동들을 대항헤게모니 블록으로 모을수 있다는 전망을 내세운다. 그러나 왜 현실에 하필이면 특정한복수의 사회운동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해당 정세속에서 왜 어떤 담론적 실천이 다른 시도에 비해 더 커다란 효과를 내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관 자체를 교정하기보다는 이를 우회한 채 ‘자본주의 경제‘와 구분되는 ‘민주주의 정치‘라는 층위를 설정하고 이 층위안에서 사회운동들의 관계를 설명하려 한 탓일 것이다. - P311

또한 프레이저는 대항헤게모니 블록의 기반이 될 ‘새로운 상식‘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에 관해서도 우리의 눈을 열어준다.
그것은 생산 현장의 계급투쟁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그 ‘외부‘에서 지식인이 생산해 주입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에 따라 경계투쟁들이 활발해지면, 사회적 재생산, 인간과 비인간 자연의 관계, 수탈 대상이 되는 인구집단, 공적 권력 등의 영역을 각기 지배하는 다양한 가치와 규범이 새로운 상식의 재료(새 상식 자체는 아니지만)로 변형된다. 대항헤게모니 전략을 제안하는 최근의 여러 저작들, 가령 무폐의<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 좌파 포퓰리즘과 정동의 힘》(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 2022)이나 파올로 제르바우도의 《거대한 반격: 포퓰리즘과 팬데믹 이후의 정치》 (남상백 옮김, 다른백년, 2022)가 제안하는 전략 방향은 이러한 프레이저의 자본주의 분석과결합할 때 더욱 명쾌해지고 실천적인 힘을 얻게 될 것이다. - P312

옮긴이가 덧붙이는 군말은 이쯤에서 그치겠다. 이 책의 본문에 담긴 저자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만, 옮긴이의 부족한 능력 탓에 이러한 본문 내용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 특히 이 책에서 프레이저가 새로고안해 사용하는 개념이나 비유를 과연 우리말로 적절하게 옮겼는지 고민이 남는다. 그래서 중요한 번역마다 옮긴이 주를각주 형태로 달아,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나 혼동을 줄이려 했다. 그럼에도 독자 여러분의 많은 질정과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부디 이 책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세상을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과 격려의 원천이 되길바란다. - P313

나를 포함, 흐느끼며 일상을 견디는 이들에게 희망의 목소리가 당도했다. 한계 없는 자본주의의 위장이 터지기 직전인 당대, 이 책은 기존의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포괄적 접근을 시도한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원한다면 이 책을 권한다. 인간이라는 시한폭탄을 품고 붕괴가 임박한 지구를 알고 싶다면, 인문학 용어가 정확히 번역된 책을 찾는다면 이 책을 권한다. 적실한 자본주의입문서를 구한다면 이 책을 권한다.
- 정희진 여성학 박사,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낸시 프레이저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스트 전통에 입각한전설적인 급진 철학자이지만 흑인, 생태, 이민자, 성적 자유 운동에대한 그의 진정한 포용과 심오한 이해는 그녀를 당대 지식계에서 독보적인 인물로 만든다! 이 책은 암울한 우리 시대에 고전의 반열에오를 단 하나의 보배다.
ㅡ코넬 웨스트Cornel West, Race Matters) 저자

21세기에 걸맞은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론에 대한 자신의 수많은선구적인 공헌을 훌륭하게 종합한 아름다운 글!
-볼프강 슈트렉Wolfgang Streeck, (How Will Capitalism End?> 저자

이 책은 자신이 번성하는 바로 그 땅, 노동력, 자연세계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괴물을 소환한다. 저자는 특유의 명확하고 독창적인산문을 통해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변천, 서로 얽힌 역학을 풀어냄으로써 겉보기에 이질적인 위기와 사회적 폭력 사이의 상호관계를 드러낸다. 그를 통해 우리는 반인종주의적, 생태사회적 재생산 비평의강력한 잠재력을 보게 된다. 그리고 왜 지구와 인류의 미래가 작업장과 거리, 숲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반자본주의 투쟁을 구축하는 사회주의 좌파에 달려 있는지를 알게 된다.
ㅡ슈퍼거슨Sue Ferguson, Women and Work》 저자

저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우아한 자본주의 이론을 내놓았고, 이제 우리는 그 체제를 심판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협소한 경제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완전한 잡식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주변 모두를 집어삼키는 짓을 멈출 수 없는 체제이자 사람과 자연의생명을 파괴하는 체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위기의 시대를 구할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다.
ㅡ안드레아스 말씀Andreas Malm, 《How to Blow Up a Pipeline》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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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탈성장 운동가들은 자본주의에서 성장하지 않을수 없는 것과, 성장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을 뒤섞는 통에 정치적 명확성을 해치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가치‘이며, 후자는지구 전역에서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인간 필요의 엄청난 부분을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재화, 관계, 활동이다.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인 생태정치는 첫째로 완고한 성장의 지상명령을 해체해야 하지만, 둘째로는 어떻게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인가의 문제를 정치적 사안으로 다루면서 민주적 숙고와 사회적 계획을통해 결정되게 만들어야 한다. 또한 라이프 스타일 환경주의나커머닝의 미래 예시적 실험 같은 탈성장의 지향들은 자본주의권력과 대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 P212

게다가 종합적으로 보면, 이 운동들의 진솔한 통찰들을 다 합한다 해도 새로운 생태정치적 상식이 만들어지지는 못한다. 또한,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지구를 구할 수 있을 생태-사회 변혁을위한 대항헤게모니 프로젝트로 수렴하지도 못한다. 물론 환경을 넘어서는 핵심 요소들은 이미 존재한다. 노동권,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반제국주의, 계급의식, 친민주주의, 반소비자주의, 반추출주의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아직은 현 위기의 구조적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뿌리에 대한 확고한 진단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갖추지 못한 요소는, (생태적인 것이든 - P212

다른 것이든) 현재 우리의 모든 고통의 뿌리를 동일한 사회적 시스템에서 찾아내고 이를 통해 각 고통을 서로 연결 짓는 선명하고 확신에 찬 시각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 시스템에 이름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경제의 모든 필수 배경조건들(비인간 자연, 공적 권력, 수탈, 사회적 재생산)을 포함하도록 확대 인식된 자본주의 사회가 그것이다.
이 배경조건들은 모두 자본의 제살 깎아먹기에 필연적으로 종속되어 있으며, 현재 산산이 부서지며 흔들리는 중이다. 그러므로이 시스템에 이름을 붙이고 폭넓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완성해야 할 대항헤게모니 퍼즐의 또 다른 한 조각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 조각은 우리가 다른 퍼즐 조각들을 맞춰보고 그것들 사이의 긴장과 잠재적 시너지를 밝혀내며 다들 어디에서 비롯됐고 다 함께 어디로 가게 될지 해명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반자본주의‘라는 이 퍼즐 조각은 환경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적 지향과 비판 세력을 제시한다. 비판 세력을 통해 생태정치는 더 큰세계에 개방되며, 정치적 지향을 통해서는 주적을 집중 공략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 P213

또한 각 흐름이 그만의 아킬레스건, 즉 자본과 대결하길 꺼리는 성향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압박한다. 그런 아킬레스건은 (환상적인) 연결에서 벗어나기de-linking 로 나타나기도하고, (편향적인) 계급 타협이나 극단적 취약성의 비극적인) 평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퍼즐의 반자본주의 조각은 공동의 적을 지목함으로써 탈성장, 환경정의, 그린뉴딜 각각의 지지자들이 정확한 방향에 관한 동의를 바탕으로 함께 여행에 나설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비록 지금은 그 정확한 방향을 상상하기힘들지라도 말이다.
물론 결국 어느 방향에 닿게 될지, 혹은 지구가 계속 가열되다가 마침내 끓어오르지 않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그러나 후자의 운명을 피할 최대의 희망 역시 ‘환경을 넘어서는 반자본주의적‘ 대항헤게모니 블록을 건설하는 데 있다. 이 블록이 정확히어떤 목표점으로 우리를 인도해야 할지는 아직 불분명한 점이있다. 그러나 만약 그 목표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나는 ‘생태사회주의‘를 선택하겠다. - P214

우리는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비해 잘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것은, 이 위기가 정치영역에만 원인이 있는 고립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연시되는 상식과는 반대로 민주주의의 위기는 예의 [시민다움]civility"를 회복하거나, 정당 간 화해를 다지거부족주의에 반대하거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진실을 지향하는 담론을 옹호한다고 하여 극복되지는 못한다. 또한 최근의 민주주의 이론과도 상반되게 이 위기는 ‘민주적 에토스‘를 강화하 - P219

거나, ‘헌법의 규정력‘을 재활성화하거나, ‘경합agonism‘이나 ‘민주적 반추democratic iterations‘를 강화하고 장려하는 식으로정치 영역을 개혁함으로써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제안들은 내가 ‘정치주의‘라 부르는 오류의 포로가 된다. 경제주의와비슷하게 정치주의적 사고는 정치사회 바깥에도 인과적인 힘이있음을 간과한다. 정치 질서가 다른 질서의 영향 없이 스스로 결정된다고 여기는 탓에, 정치를 변질시키는 더 광범한 사회적 모체를 문제 삼지 못한다.
실수하지 말자.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는 사회라는 모체에 두발을 굳게 디디고 있다. 앞 장들에서 분석한 여러 곤경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위기는 광범한 위기 복합체의 한 지류이며, 다른 위기들과 떼어놓고는 이해될 수 없다. - P220

중상주의적 자본주의는 주변부의 숱한 노예 봉기와 식민 본국내 민주주의 혁명으로 주기적으로 들끓었고, 결국은 파멸다. 그 뒤를 이은 자유방임주의는 한 세기 동안은 튼튼히 버티다가 50년간 정치 대란을 겪었는데, 이 대란은 다양한 사회주의 혁명과 파시스트 쿠데타, 두차례의 세계대전, 셀 수 없는 반식민주의 봉기로 점철됐다. 이 국면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 시기와 전후시기를 거쳐 국가관리 자본주의가 들어서며 비로소 끝이 났다.
국가관리주의 체제에서도 정치 위기는 낯설지 않았다. 이 체제는 반식민주의 반란, 전 지구적 신좌파 봉기, 장기화된 냉전, 핵무기 경쟁의 거대한 물결을 헤쳐나가다 결국 지구화·금융화의현 자본주의 체제를 연 신자유주의의 체제 전복에 무릎을 꿇고말았다. - P223

이것이 이 장의 주된 전제다. 이 장에서 나는 우리 시대의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 중 일부로서, 현재 민주주의가처한 재앙을 짚을 것이다. 그러나 더 강력한 명제가 있다. 즉, 자본주의의 이러한 형태신자유주의]만이 아니라 그 모든 형태가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는 모순을 장착하고 있다는 명제를 주장함으로써 이전 장들에서 전개한 입장을 이어가고자 한다. 이 책 앞부분에서 논의한 것처럼, 내가 ‘정치적‘ 모순이라 부를 이러한 모순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DNA 안에 새겨져 있다. 오늘날 우리가겪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예외 상태가 아니라, 이 모순이 자본주의의 금융화된 현 국면에서 취하는 형태다. - P224

상품 생산에 투입할 물질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수도꼭지‘이면서 동시에 상품 생산의 폐기물을 흡수해주는 ‘하수구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자신이 발생시키는 생태적 비용에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사실상 자연이 저절로 그리고 무한히 스스로를 보충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 경우에도 이 뱀은 자기꼬리를 먹는 습성을 보이면서, 자신이 의존하는 그 자연적 조건을 놓고 제살 깎아먹기를 자행한다. 사회-재생산과 관련된 경우든 자연과 관련된 경우든 영역 간 모순은 자본주의 위기의 여러유형 가운데에서도 경제적인 것을 넘어서는 위기를 초래하는성향의 토대가 된다. 그 위기란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재생산 위기이고, 어떤 경우에는 생태적 위기다. - P226

이제 나는 같은 논리를 현재 민주주의가 처한 고통에도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서 ‘정치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재의 정치적 곤경은 더는 고립된 문제가 아니며, 또 다른 영역 간 모순에 바탕을 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경우에는 자본축적의 지상명령과 자본 축적의 또 다른 의존 대상인 공적 권력의 유지 사이의 모순일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정당하고 효과적인공적 권력은 자본 축적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자본의 무한한 축적 충동은 자신이 의존하는 그 공적 권력을오랜 시간에 걸쳐 불안정에 빠뜨리는 경향이 있다. 이 모순이 현재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이다. - P226

이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이런 심급들이 강력히 융합됐던 이전의 사회 형태들과는 다르다. 예를 들면, 봉건 사회에서는 노동·토지·군사력에 대한 통제가 군주와 봉신으로 이뤄진 단일한 제도에귀속되었다. 반면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이 나뉘어 각기 저마다 독특한 매체와 작동 방식을 지닌 그만의 공간을 배정받는다.‘ 생산을 조직하는 권력은 사유화되어 자본으로 발전하며, 이는 기아와 결핍이라는 ‘자연적이고‘ ‘비정치적인‘ 제재 수단만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반면 축적의 외적조건을 제공하고 ‘비-경제적 질서를 통치하는 임무는 ‘정당한‘
국가폭력과 법률이라는 ‘정치적‘ 매체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주체, 즉 공적 권력의 몫이 된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에서 경제적인 것은 비정치적이며, 정치적인 것은 비경제적이다. - P230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최선의 상태인 적이 별로 없으며, 자본주의가 순응시키려고 하는 민주주의는 어떤 종류든 흔들거리고 불안정해야 한다. 문제는 자본이 본성상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를 그렇게 만들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한편으로자본주의는 공적 권력의 식객이 되어, 축적에 필수적인 법률 체제와 억압 기구, 인프라, 규제 기관을 마음껏 활용한다. 동시에이윤을 향한 갈망 탓에 자본가 계급의 일부 분파는 주기적으로공적 권력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공적 권력이 시장에 비해 열등하다며 이를 약화시키려고 획책한다. 단기적 이익이 장기적생존을 압도하는 이런 경우에 자본은 또다시 스스로를 존립할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정치적 조건을 파괴할 위험이 있다. - P231

이런 변동은 제1장에서 내가 ‘경계투쟁‘이라 부른 것의 결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시기 변화를 보여준다. 이를 전경에 놓고 강조하는 시각을 취할 경우, 우리는 앞장들에서 이미 식별했던 네 가지 역사적 축적 체제들의 정치적 대응물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중상주의적 자본주의의 초기 근대 체제, 자유주의 식민주의적 자본주의의 19세기 체제, 국가관리 자본주의의 20세기중반 체제, 자본주의가 지구화·금융화하는 현 체제의 각 경우마다 자본주의 경제의 정치적 조건은 국민적-영토적 수준에서든, 지정학적 수준에서든 서로 다른 제도적 형태를 띤다. 또한 각 경우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모순은 서로 다른 외양을 띠며, 위기현상의 각기 다른 조합을 통해 표현된다. 마지막으로, 각 체제에서 자본주의의 정치적 모순은 서로 다른 형태의 사회적 투쟁을 촉발한다. - P233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는 농촌 인구를 (이중으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로 변화시킨 토지 수탈에 힘을 보태주기 위해 억압적 권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임금노동의 대규모 착취를 위한 계급적 전제조건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는 일단 화석 에너지와 결합되자 제조업의 거대한 이륙에, 그리고 이와 연동된 격렬한 계급갈등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일부 식민 본국에서는 전투적 노동운동과 그 동맹 세력이 계급 타협을밀어붙일 수 있었다. 다수 민족에 속한 일하는 남성들은 투표권과 정치적 시민권을 쟁취했고, 이와 동시에 작업장을 지배하고노동자를 착취할 권리가 자본가에게 있음을 사실상 수용했다.
이와 달리 주변부에서는 이러한 타협이 뒤따르지 않았다. 유럽식민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자제하는 듯한 가면도 벗어버린 채군대를 보내 반제국주의 반란을 분쇄했다.  - P235

이 모든 사실은 ‘자유방임 자본주의‘라는 표현에 의문을 품게 만들며, 그래서 나는 이를 ‘자유주의-식민주의적 자본주의‘라 부른다.
게다가 사실상 처음부터 이 체제는 경제적 불안정만이 아니라 정치적 불안정으로도 고통받았다. 민주화하던 중심부 나라들에서 정치적 평등은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긴장관계에 있었고, 일부의 의식 속에서 정치적 권리의 확대는 주변부의 가혹한 예속과 불편하게 공존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체제를 좀먹은 것은,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진단했듯이, (제약받지않고 영토를 넘어서는 자유주의-식민주의적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의 추진력과, (제약받고 영토에 얽매인) 자본주의적 민주 정치의성격 사이의 모순이었다. - P236

따라서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이 경제/정치 형세배열이 만성적으로 위기에 짓눌린다는점을 강조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경제 측면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주기적인 공황과 붕괴, 패닉으로 뒤숭숭하다. 정치측면에서 이는 격렬한 계급 갈등과 경계투쟁, 혁명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 모두는 국제적 금융 카오스, 반식민주의 반란, 제국주의 간 전쟁을 부채질하고, 역으로 국제적 격동이 국내의 격동을부채질한다. 20세기가 되면 이런 형태의 자본주의가 지닌 다양 - P236

한 모순들이 만성적인 전반적 위기로 전이돼, 마침내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새 체제의 안착을 통해 해소됐다.
이 새로운 국가관리 자본주의체제에서 중심부 국가들은 위기를 사전에 방지하거나 완화하기 위해, 자국 영토 안에서 공적권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4년 미국의 패권 아래 수립된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자본 통제로 역량이 강화된 중심부 국가들은 인프라에 투자했고, 사회적 재생산 비용의일부를 떠맡았으며, 완전고용에 근접한 상태)과 노동계급 소비주의를 촉진했다. 또 노동조합을 노사정 협상의 파트너로 받아들였으며, 경제 발전을 적극 지휘했고, ‘시장의 실패‘를 보완했으며, 자본 자체의 이익을 위해 자본을 전반적으로 훈육했다. 사적자본의 지속적인 축적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 목표였던 이러한조치들은 정치의 관할범위를 넓히면서 동시에 정치를 유순하게길들였다. 즉, 잠재적인 혁명 집단이 지닌 시민권의 값어치를 높여주고 시스템에 지분을 갖게 해줌으로써 이들을 흡수했다. - P237

그 결과 수십 년 동안 안정이 지속됐는데, 여기에는 물론 일정한 비용이 따랐다. 다수 민족에 속한 자본주의 중심부의 산업노동자에게 ‘사회적 시민권‘을 제공한 제도배열은 그만큼 아름답지는 못한 몇몇 배경조건에 의존했다. 즉 가족임금을 통한 여성의 종속, 인종적·민족적 배제, 당시 제3세계라 불리던 곳에서꾸준히 벌어진 수탈이 그것이다. 제3세계 수탈은 식민지 해방이후에도 낡은 형태로든 새로운 형태로든 여러 수단을 통해 계속됐는데, 이는 신흥 독립국이 사회를 안정시키고 발전을 지휘하며 시장을 통한 약탈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할 수 없도록 제약했다. 그 결과 정치적 시한폭탄이 설치됐고, 그 폭발은 마침내 이체제를 뒤엎을 다른 과정들과 한데 만나게 된다. - P238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경제/정치 관계를 다시 한 번 개조했다. 이 체제에서는 점점 더 지구화하는 경제의 중재자로서중앙은행과 글로벌 금융기관이 국가를 대체했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 관계, 즉 노동과 자본, 시민과 국가, 중심부와주변부,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더 결정적인 채무자와 채권자 관계의 가장 중대한 규칙들을 제정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중앙은행과 글로벌 금융기관이다. 그중에서도 채무자와 채권자의관계는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중심을 이루며, 모든 다른 사회관계들에 스며들어 있다. 오늘날 자본이 노동을 놓고 제살 깎아먹는 짓을 벌이고, 국가를 훈육하며, 가치를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전하고, 사회와 자연의 부를 빨아들이는 일은 주로 ‘부채‘ 를 통해 이뤄진다. 부채가 국가, 지역, 공동체, 가계, 기업을 관통해 흐르기 때문에, 경제가 정치와 맺는 관계에서 극적인 변동이나타난다. - P239

결국 이 체제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사적 (대기업 권력이 공적 권력을 포로로 만들도록 도우며, 또한 국내에서 공적 권력을 식민화하고 사기업의 작동 방식을 본떠 공적 권력의 작동 방식을 짠다.
그 전반적인 결과는 모든 수준에 걸쳐 공적 권력을 빈껍데기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라 밖에서는 독단적 명령 (‘시장‘, ‘신입헌주의‘의 요구)을 통해, 나라 안에서는 자본에 의한 흡수(대기업의 포로가 된 신세, 사유화, 신자유주의적 정치 합리성의 확산)를 통해, 어느 곳에서든 정치적 의제가 협소해진 상태다. 한때는 분명 민주적 정치 행위의 관할범위 안에 있다고 여기던 사안들이 이제는출입금지구역이라 선포된다. 그리고 ‘시장‘에, 즉 금융자본과 대기업 자본의 이익에 내맡겨진다. 이에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 P243

예컨대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겪는 긴급한 문제들이 기성 질서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기성 질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질서 안에서는 해결할 수없다고 직감해야만 그때에야 위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임계치에 도달한 대중이 집단행동을 통해 기성 질서를 변혁할 수 있고또 그래야만 한다고 결의할 때에만 객관적 곤경은 주체를 통해발설된다. 그때에야, 오로지 그때에야, 우리는 결단을 요구하는비상한 역사적 갈림길이라는 좀 더 거대한 의미에서 위기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다. 금융화된 자본주의의정치적 기능 장애는 더 이상 객관적이지만은 않으며, 서로 상관관계에 있는 주체적 요소와 함께한다.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대중이 기성 정치에서 이탈함에 따라, 옛날 같았으면 논평가들이 ‘즉자적 위기‘라고 말했을 것이 ‘대자對自적 위기‘가 됐다. 가장 극적인 단절은 2016년 글로벌 금융의 두 주요 요새에서 벌 - P246

어졌다. 유권자들이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에게 승리를 안겨줌으로써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설계자들을 따끔하게 혼내준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그 전부터 이미 이곳저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상당수 대중이 금융화를 부채질하던 중도파 지배정당들을 버리고, 이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신진 포퓰리스트들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많은 곳에서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글로벌 자본과 이민 ‘침략자들, 인종적 혹은 종교적 소수 집단에게서 조국을 ‘되찾겠다‘고 약속하며, 다수 민족에 속한 노동계급의 표를 끌어모았다. 좌익 포퓰리스트들은 비록 선거에서 승리한 사례는우익 포퓰리스트들보다 적지만(라틴아메리카와 남유럽은 제외), 시민사회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보였다. 이들은 포괄적으로 정의된
‘99%‘ 혹은 ‘일하는 가정‘을 위하여, ‘억만장자 계급‘의 편인 ‘부패한 시스템에 맞서 싸운다고 외쳤다. - P247

가장 훌륭히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사라진 상태에서 정치적창의성의 범위가 확장됐고, 지금까지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대안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위기를 키우는 새로운 국면이 시작됐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곤경들이 응집하는것‘만‘으로도 현재 헤게모니의 본격적 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헤게모니 위기의 중심에 경제/정치의 현 경계선을 둘러싼 공공연한 논쟁이 있다. 공적 계획이 경쟁적 시장에 비해 엄청나게 열등하다는 생각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으며, 심각한 반발을 사고 있다. 기후변화와 코비드-19 팬데믹뿐 아니라 계급적불평등과 인종적 불의의 확산에 대응하는 가운데 새롭게 힘을얻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포퓰리스트들과 민주적 사회주의자들과 합세해 공적 권력을 복권시키려 한다. - P248

소득, 공중보건, 그리고 거주 가능한 지구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사회주의자들과 급진 생태주의자들은 이에 동의하지않는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공개적으로 토론된다는 사실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상식이 분쇄됐다는 증거다. 이제는 경제/정치의 경계선을 다시 그음으로써 경제를 다스리는 정치의 역량을강화하려고 하는, (비록 내부가 분열되어 있기는 해도) 상당수에 이르는 유권자들이 존재한다. - P249

공적 권력 강화론은 코비드-19 팬데믹으로 더욱 힘을 얻었다. 마스크 착용과 백신 접종에 반대하는 자유지상주의 및 경제지상주의 광신도들의 갑작스러운 증가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바이러스는 마치 교과서처럼 공적 권력의 진가를 입증하는 역할을 했다. 공적 권력은 인프라를 유지하고 공급망을 책임지며, 마스크 착용·사회적 거리두기·자가격리를 의무화함으로써 전염의 상승곡선을 완화시켰다. 검사·추적·감염자 격리를 통해 전염속도를 늦추고, 백신과 치료법의 개발·재정지원·시험·승인·분배를 전담했다. 일선 노동자frontline workers"와 위험에 노출된집단을 보호하고, 소득을 지원하며 생활수준을 지탱하고, 돌봄제공과 학교 교육 프로그램을 조직했다. 게다가 이 모두를 부담 - P249

과 혜택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적 개입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필요사항 가운데 어느 것도 사적 부문을 통해서는 충족될 수 없음이 증명됐다. 그리고 극단적인 소득 격차가핵심 문제임이 명확히 드러났다. 감염률 완화와 인명 구제를 놓고 보면, 공적 권력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광범하게 적극 배치하는 데 동의하는 정치문화를 지닌 나라들이 그렇지 않은 나라들(공적 권력을 경시하고 그 활용을 제한하는)보다 훨씬 나은 성과를보였다. 만약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합리적이라면, 신자유주의는이미 지나간 기억이 됐을 것이다. - P250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으며, 이 세상은 그 본성 자체가 비합리성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작금의위기가 신속하게 혹은 투쟁 없이 해결되리라 가정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금융·대기업 자본의 대변자들이 초국적이고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권력의 제도적 지렛대를 계속 꽉 움켜쥘 것이며,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적인 규칙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면서 새로운 길을 뚫으려는 민중의 노력을 가로막을 것이다.
게다가 일국 수준에서는 자본의 대리인들이 공공연한 저항에도 굴하지 않으며, 정치권력을 견지하거나 되찾기 위해 계속책략을 꾸밀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런 책략은 먹혀들 것이다. 현 체제에 맞서는 포퓰리스트 도전자들이 집권했다가 실망 - P250

감을 불러일으킬 때조차, 아니 바로 그때에야말로 기성 체제의대변자들은 지지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질 것이다.
이 마지막 시나리오는 2016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도널드트럼프가 선거운동 중 외쳤던 친노동계급 정책을 저버리고, 친대기업 대안으로 돌아설 때 실제 상영됐다. 희생양을 만들어 때리기에 광분하면서 지지자들의 주의를 돌리려는 초인적인 노력을 했건만, 몇몇 주요 경합주에서는 2020년 트럼프에게 패배를안겨주기에 충분한 수의 지지자들이 돌아섰다. 승자는 하필이면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이전 질서로 돌아가겠다고 맹세한 오바마의 전 러닝메이트 [조 바이든]였다. 트럼프주의를 초래한 핵심요인을 만들어낸, 그리고 앞으로도 트럼프주의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먹이를 대줄 체제가 바로 그 진보적 신자유주의인데도 말이다. - P251

그 결과가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신성하지 않은 동맹은 다수 대중의 생활 조건을 황폐하게 만듦으로써 우파가 힘을 얻을 토양을 만들어주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페미니즘이나 반인종주의 등을 신자유주의와 결부시킴으로써, 마침내 댐이 무너졌을 때 인민대중이 신자유주의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이나 반인종주의 등까지 거부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반동적 우익 포퓰리즘이이 상황의 주된 수혜자가 된 이유다. 또한 이것이 현재 우리가정치적 교착 상태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은 떼돈을 벌어들여 장막 뒤에서 웃음을 그치지 않는데도, 우리는 반동파와 진보파가 각기 양쪽에서 간판스타 노릇을 하며 경쟁하는 싸움에,
사람들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짜고 치는 그 싸움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 P253

자본이 책임을 저버린 이러한 배경조건들을 식별함으로써우리는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애초의 물음에 비정통적인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됐다. 자본주의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의 한유형이다. 이 사회에서는 경제화된 행위 및 관계의 무대가 다른비경제화된 영역들과 분리돼 그 바깥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경제화된 영역은 비경제화된 영역들에 의존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은 나 몰라라 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정치‘ 혹은 정치적 질서에 의존하면서도)와 구별되는 ‘경제‘, ‘사회적재생산‘ 영역에 의존하면서도)과 구별되는 ‘경제적 생산‘의 무대,
무책임하게 내버려진 수탈 관계에 의존하면서도)와 구별되는 착취 관계의 조합, 비인간 자연의 물적 토대에 의존하면서도)와 구별되는 인간 행위의 사회역사적 영역이다. - P268

협소한 자본주의관을 지닌 비판가들은 자본주의가 세가지 중대한 잘못을 범했다고 본다. 불의, 비합리성, 부자유가 그것이다.
첫째, 그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핵심 불의가, 자유롭지만 무자산 상태인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의 착취라 규정한다. 노동자는 많은 시간을 보상 없이 일하며, 엄청난 부를 생산하면서도 자기 지분이 전혀 없다. 이익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 계급에게흘러들어가며, 자본가는 노동자의 잉여노동과 그것이 발생시킨잉여가치를 전유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이 지시하는 그들 고유의목적, 즉 더 많은 축적을 위해 이를 다시 투자한다.  - P269

더 큰 틀에서는 이로써 자본이 끝없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여 자본의 생산자인 바로 그 노동자를 지배하는 적대적 권력으로 부상하는결과가 나타난다. 이것이 협소한 자본주의관에 따라 정의된 핵심 불의, 즉 생산 지점에서 벌어지는 임금노동의 계급적 착취다.
그리고 그 장소는 자본주의 경제, 더 구체적으로는 경제적 생산영역이다.
둘째로, 협소한 자본주의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주된 비합리성은 경제 위기로 나아가는 내적 경향이다. 영리기업이 사적 - P269

으로 전유한 잉여가치의 무한 축적을 지향하는 경제 시스템은본래 스스로를 불안정에 빠뜨리지 않을 수 없다. 기술 향상으로생산성을 증대시켜 자본을 확장하려는 충동은 이윤율의 주기적하락, 상품의 과잉 생산, 자본의 과잉 축적을 초래한다. 금융화와같은 교정책은 심판의 날을 뒤로 미루기만 할 뿐이며, 오히려 다가올 심판이 훨씬 더 혹독해지도록 만든다.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주기적 경제 위기로 중단되곤 한다. 즉 경기 순환, 주식시장 폭락, 금융 패닉, 연쇄 부도, 가치의 대규모 청산, 대량 실업 등이다. - P270

서 더불어 인종·제국주의적 억압 역시 끝내야 한다. 요컨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불의에 대한 치유책이 되려면, 자본주의경제‘만‘이 아니라 제도화된 질서 전체, 즉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어야만 한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자본주의의 ‘위기‘
라 이해되는 바두 번째 잘못인 비합리성]에 관한 우리의 관점 역시넓힌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에 내장된 것을 훨씬 넘어선몇 가지 내적인 자기 불안정화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사회적 재생산을 놓고 제 살을 깎아먹음으로써 돌봄위기를 부채질하는 체계적 경향이다. 자본이 자신이 기대는 무급 돌봄 활동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고 하는 한, 이 활동의주된 제공자인 가족, 공동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에게 주기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가하게 된다.  - P273

금융화된 현재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는 오늘날 바로 이런 위기를 발생시키는데, 예를 들어사회서비스의 공적 제공을 감축하길 요구하면서 동시에 여성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각 가정마다 유급 노동시간을 늘리길 요구한다.
둘째,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생태 위기를 초래하는 내적 경향역시 눈에 잘 띄게 만든다. 자본은 비인간 자연에서 취하는 투입물에 대해 실질적인 대체원가replacement costs" 따위는 결코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토양을 고갈시키고, 바다를 더럽히 - P273

며, 탄소를 흡수하는 숲에 침범하고, 지구의 탄소 순환 용량을 훨씬 넘어서는 탄소를 배출한다. 자본은 천연자원의 덕을 보면서도 이를 보충하거나 수선하는 비용은 나몰라라 하기 때문에, 자연의 인간적 구성요소와 비인간적 구성요소 사이의 물질대사적상호작용을 주기적으로 불안정에 빠뜨린다. 오늘날 우리는 그후과와 격돌하고 있다. 지구를 태워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은절대로 ‘인류‘가 아니며, 바로 자본주의다.
셋째, 사회-재생산과 생태의 위기를 낳는 자본주의의 경향은인종화된 인민으로부터 부를 수탈하려는 자본주의의 구성적 필요성과 분리될 수 없다.  - P274

예를 들면, 자본은 강탈한 땅, 강제 노동,
약탈한 광물에 의존하며, 유독성 폐기물의 쓰레기 처리장으로서인종화된 지역에 기대고, 점점 더 전 지구적 돌봄 사슬로 조직되는 돌봄 활동의 공급자로서 인종화된 인민에 기댄다. 그 결과 경제적·생태적·사회적 위기는 제국주의와 인종적-민족적 적대감과 한데 뒤엉킨다. 신자유주의는 이 대목에서도 위험을 고조시킨다.
마지막으로,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정치 위기로 나아가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경향을 드러낸다. 이 경우에도 자본은 공공재 - P274

에 기생해 살면서도 그 비용은 지불하려 하지 않는 양다리 걸치기를 한다. 조세를 회피하고 국가 규제를 약화시킬 만반의 태세를 갖춘 자본은 자신이 기대는 바로 그 공적 권력을 빈껍데기로만드는 경향이 있다. 금융화된 현재 형태의 자본주의는 이 게임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거대 기업은 영토에 매여 있는 공적 권력을 한참 앞질렀고, 글로벌 금융은 자신에게 맞서는 선거 결과를 무효로 만들거나 반자본주의 정부가 대중의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방식으로 국가를 훈육한다. 그 결과는 거버넌스의 심각한 위기다. 지구 곳곳의 인민대중이 기성 정당과 신자유주의적 상식에 등을 돌림에 따라 현재 이위기는 헤게모니의 위기까지 동반하며 전개되고 있다. - P275

즉,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인 것을 훨씬 넘어서는 다양한 위기 경향들을 장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5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는 이런 다양한 위기 경향들을 ‘영역 간‘ 모순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칼폴라니와 제임스 오코너James O‘Connor)를 따른다. 이 영역 간 모순은 자본주의 경제와그것을 가능케 하는 비-경제적 배경조건들을 분리하면서도 동시에 연결하는 접합부에 고정돼 있다.앞장들에서 설명한 네가지 D의 논리에 사로잡힌 자본은 자신의 전제 자체를 침식하거나 파괴하거나 고갈시키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불안정에 빠뜨리는 내적 경향이 있다. 우로보로스처럼 자본은 자기 꼬 - P275

리를 먹는다. 제살 깎아먹기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잘못 중 일부다. 따라서 이는 사회주의가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민주주의의 결핍은 자본주의에 내장된 숙명이다. 이 세번째 잘못[자유] 역시 우리가 이 사회 시스템에 관해 확장된 관점을 취할 경우 훨씬 더 크게 드러난다. 문제는 단지 작업 현장에서 사장이 명령을 내린다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정치 영역에서 민주적 목소리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위장이 경제 불평등과 계급 권력 탓에 우스워지는 것만이 문제인것도 아니다. 정치 영역이 처음부터 심하게 모서리가 잘려 있다는 점 역시 위의 문제들만큼이나 중대하다. 사실 경제/정치 분할은 민주적 의사결정의 범위를 사전에 심각하게 축소한다.  - P276

생산이 사기업에 내맡겨지면, 제4장에서 살펴봤듯이, 우리가 자연과맺는 관계, 지구의 운명과 맺는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을 어떻게 할당할지, 우리의 필요를 어떻게 해석하고 충족할지, 그래서 결국 우리의 일과 일 바깥의 삶이 어떤 모양을 떨지를 결정하는 것도 자본가 계급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제/정치 결합체는 자본가에게 사회의 잉여를 사적으로전유할 백지 위임장을 써줌으로써, 사회 발전 과정의 틀을 짜고그리하여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모든 쟁점들은 정치 의제에서 사전에 - P276

배제된다. 축적 극대화에 광분하는 투자자가 우리 등 뒤에서 이를 결정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자체만 놓고 제살깎아먹는 짓을 벌이는 게 아니라 우리도 그 식탁에 올려놓는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함께 결정할 집단적 자유를 게걸스레 먹어 치우면서 말이다. 이런 형태의 제살 깎아먹기를 극복하려면, 사회주의는 현재의 참담한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민주적인 정치적 자치의 범위를 확장해야만 한다. - P277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 잘못들을 치유하려면, 이는 매우 벅찬 과업이 될것이다. 사회주의는 계급 지배‘만‘이 아니라 젠더와 성, 인종적·민족적·제국주의적 억압, 정치적 지배의 전반적인 불균형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창안해야 한다. 또한 경제·금융 위기‘만‘이 아니라 생태·사회-재생산·정치 위기를 낳는 경향들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위기 경향들의 제도적 기반을 해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1세기를 위한사회주의는 사전에 ‘정치‘ 영역이라고 정의된 범위 안에서 의사결정을 민주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관할범위를 광대하게 확장해야 한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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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의 최대 축적을 즐기면서도 자연을 손님으로 초대하지는않으며, 이로써 경제가 자신이 유발한) 생태적 재생산 비용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도록 프로그램화한다. 그 결과 이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수록 생태계가 불안정에 빠지며, 주기적으로자본주의 사회의 날림 건축물 전체에 균열을 일으킨다. 자연을필요로 하면서도 하찮게 여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자기 신체의필수 기관을 먹어 치우는 식인종이 된다. 자본주의는 우로보로스처럼 자기 꼬리를 먹는다. - P166

우리가 어떻게 논의를 시작하는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같다.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사회는 그 DNA 안에 생태적 모순을 담고 있다. 이런 사회는 ‘자연의 파국‘을 재촉하는데, 이 파국은 자본주의의 전 역사에 걸쳐 주기적이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는 생태 위기를 몰고 오는 내적 경향을 장착하고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작동 방식의 본질적 부분으로서 생태계의 취약성을 유발하며, 이는 현재진행형의 토대 위에 있다. 이취약성은 항상 극적인 형태를 띠거나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누적된다. 그리고 결국 임계점에 도달하면 피해가 분출해 드디어 우리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 P167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재생산 조건을 살펴보자. 여기에서도자본주의는 생산만을 조직하지 않는다. 제3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공동체와 가족이 수행하는(대부분을 여성이 떠맡는) 다양한 형태의 돌봄 활동이 생산과 맺는 관계를 결정하기도한다. 돌봄 활동은 ‘노동‘을 구성하는 인간 존재를 떠받치고 협력이 이뤄질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유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사회적 필수재 공급 시스템에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를 조직하는 자본주의만의 독특한 방식은 자연을 조직하는 방식만큼이나 철저히 모순적이다. - P169

사회적 재생산 활동이 삶과 죽음의 문제와 깊이 관련돼 있다는 점을 고찰해보자. 어린이 돌봄은 사회화, 교육, 정서적 양육뿐만 아니라 임신,출산, 산후조리, 지속적인 신체 관리를 아우른다. 마찬가지로 환자 돌봄과 임종 돌봄은 몸을 치료하고 고통을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위안을 주고 존엄성을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젊든 연로하든, 아프든 건강하든, 모든 사람은육체적 안녕과 사회적 연결 모두를 위한 쉼터, 영양공급, 위생을유지해주는 돌봄 활동에 의존한다. 즉, 일반적으로 사회적 재생산 활동은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인 존재를 떠받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사회적 재생산 활동은 자연/문화 구별을 넘나듦으로써 사회성과 생물학, 공동체와 생활 터전이 상호작용하도록 만든다. - P171

지금까지 나는 생태 위기를 낳는 자본주의의 경향을 구조적 맥락에서만 상술했다. 마치 그것이 시간 바깥에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경향은 오직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형태로만 표출된다. 여기에서는 이를 ‘사회생태적 축적 체제‘라 표현하겠다. 나는 이 문구를 자본주의 역사에서교대로 이어진 다양한 국면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각 체제는 경제/자연 관계를 조직하는 서로 다른방식을 보여준다. 각 체제마다 에너지를 발생시키고자원을 추출하며 폐기물을 처리하는 독특한 수단이 중심을 이룬다. 또한각 체제는 서로 다른 확장 경로(즉 정복, 도둑질, 상품화, 국유화, 금융화)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혼합을 통해, 과거에는 외재적이었던자연의 막대한 부분을 새로 합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각 체제는 자연을 외부화하고 관리하는 독특한 전략을 발전시킨다. 그 수단은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가족과 공동체에 피해를 떠넘기는 것이고, 그 방안은 피해 경감의 책임을 국가와 정부조직, 시장에 분배하는 것이다.  - P179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유효성을 증명한 이런 수단을마음껏 활용했지만, ‘구‘세계뿐만 아니라 ‘신세계까지 아우르면서 그 규모가 엄청나게 확대됐다.
즉, 중상주의-자본주의 주체들은 주변부에 사회생태적 추출주의의 잔인한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포토시의 은광에서 생ㅡ도맹그의 노예제 플랜테이션 농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토지와노동을 기력이 고갈될 때까지 부려먹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네가 소모한 것을 보충하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외부‘로부터 강제로 흡수한 전에 없던 인간 및 비인간 ‘투입물‘을 먹어 치우기로 했고, 모든 대륙 곳곳에 환경적·사회적 피해의 자취를 남겨놓았다. - P183

포토시는 볼리비아의 포토시주에 소재한 도시다. 스페인인들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인 1545 년에 거대 은광이 개발됐다. 스페인 점령자들은 선주민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다량의 은을 채굴한 뒤, 이를 중국 등과의 무역에 경화(국제결제통화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선주민들은 인종 학살 수준의 고난을 겪은반면에 유럽에는 다량의 은이 유입돼 초기 상업자본주의가 순항할 수 있었다.


생-도맹그는 카리브해의 현 아이티공화국을 일컫던 옛 지명이다. 카리브해에서 쿠바 다음으로 큰 섬인 히스파니올라의 동쪽을 점령한 스페인인들은 이 지역을 산토도밍고라 불렀고, 섬 서쪽을 식민지로 만든 프랑스인들은 자기 지역을 생-도맹그라 칭했다. 바로 이곳에서 번성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한때 프랑스 국부의 1/4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다)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서부아프리카 해안에서 주민들을 납치·매매하면서 근대 노예제가 대두했다. 1791년에 프랑스대혁명에 화답하며 근대 노예제 철폐의 첫 막을 연 위대한 흑인혁명도 다름 아닌 이곳(현 아이티)에서 시작됐다.

석탄으로 가열된 증기가 생산 영역에서 산업혁명의 동력이되었다면, 이는 교통에서도 혁명을 일으켰다. 철도와 증기선은공간을 압축하고 시간을 단축했으며, 아주 먼 거리를 가로지르는 원자재와 공산품의 이동 속도를 높였다. 이로써 자본의 회전율을 가속하고 이윤을 불렸다.‘ 농업에 끼친 영향도 심대했다.
굶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도시로 모여들자 시골에서는 이윤이주도하는 지속 불가능한 농업으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물론 이런 제도배열은 도시와 농촌의 물질대사 균열을 크게 악화시켰다. 농촌의 토양에서 약탈된 영양분은 추출이 발생한 그 지점으로 돌아오지 않고, 도시의 수로에 유기성 폐기물로 방출됐다. 결국 석탄을 땐 자유주의-식민주의 체제는 농지를 소진시켰고, 단번에 도시를 오염시켰다. - P187

정제 석유는 사회민주주의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자동차 및유관 제조업체가 획득한 이윤은 부유한 국가들의 세수를 크게늘렸으며, 이는 전후 사회복지의 재정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아이러니를 눈치 챈 이들은 많지 않았다. 북반구에서 사회복지의 공적 지출이 늘어날 수 있게 해준 것은 남반구에서 더욱 강화된 자연의 사적 약탈이었다. 자본이 사회적 재생산 비용 청구서를 일부나마 계산해주었다고 한다면 이는 오직 저 먼 곳에서, 액수가 훨씬 더 큰 자연의 재생산 비용 청구서를 나 몰라라 할 수있었던 덕분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 이 모든 것에 연결고리 노릇을 한 것은 석유였으니, 이게 없었다면 모든 활동이 가루처럼 부서지며 중단됐을 것이다. - P192

동시에 미국은 강력한 환경운동을 낳기도 했다. 이전 체제의자연-낭만주의를 이어받아 19세기에 시작된 한 조류는 금지구역과 국립공원 창설을 통한 ‘야생보호‘에 집중했는데, 이런 조치들은 선주민의 강제 이주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복고풍에 반대하는 ‘혁신‘라 자처한 이런 ‘부자들의 환경주의‘는 기존체제를 보완하는 조치에 주력했는데, (일부) 미국인들이 산업문명에서 일시적으로 탈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산업문명과 대결하거나 이를 변혁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 P193

하지만 국가관리 자본주의가 발전하자 체제의 산업적 중핵을 공략하는 또 다른 환경주의가 알을 깨고 나왔다. 생물학자이자 환경보호론자인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1962년작 <침묵의봄Silent Spring》으로 불이 붙은 이 조류는 국가가 대기업발 공해를 줄이기 위해 행동에 나서도록 압박했다. 그 결과는 환경보호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의 설립이었고, 이는 사회적 재생산을 지원한 뉴딜 기관의 환경판이었다. 1970년에 창설된 EPA는 환경 문제를 국가 규제 대상으로 삼아 ‘외부성을 내부화함으로써‘ 시스템 위기를 진정시키려던, 국가관리 체제의 - P193

마지막 주요 시도였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슈퍼펀드superfund였다. 미국 내 유독 폐기물 오염지를 자본의 비용 지불로 정화하고자 한 것이다. 슈퍼펀드는 주로 석유화학산업에 과세하여 자금을 조달했고, 자본주의 국가의 강압적 기관을 통해 ‘오염자 부담‘
원칙을 실행했다. 이는 채찍을 당근으로 대체하며 시장에 의존하는 요즘의 탄소거래제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자연에 대한 국가자본주의적 규제는 이런 점에서 진보적이었지만, 그 근저에는 (사회적 재생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용 전가를 통한 책임 회피가 있었다. 이 체제는 생태적-‘외부성‘을 중심부의 가난한 공동체들(전부는 아니지만 다수는 유색인 공동체였다)에게 압도적으로 떠안겼고, 주변부에서는 추출주의와 환경 부담전이를 급증시켰다.  - P194

게다가 미국 환경주의의 산업 감시 진영은대기업발 공해라는 핵심 쟁점의 틀을 잘못 짰다. 생태-정치의 집행 단위로 국민-영토국가를 상정하는 바람에, 산업 폐기물 배출이 본질적으로 국경을 넘어서는 특성을 갖는다는 점을 놓치고만 것이다." 이렇게 못 보고 놓친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는지는 그 효과가 본래 전 지구적일 수밖에 없는 온실가스와 관련하여 드러나게 된다. 당시에는 이 과정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지만, 국가관리 체제가 그 존속기간 내내 이산화탄소를 쉬지 않고 만들어냄으로써 이 시한폭탄의 폭발은 급격히 당겨졌다. - P194

한편 자본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역사적 자연들을 계속 발생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리튬과 콜탄처럼 반드시 새롭게 확보해야 하는 광물이 포함되는데, 콜탄은 휴대전화의 필수 원료로서이윤이 엄청난 상품이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내전의 원인이자,
노예화된 콩고 어린이들에 의해 채굴되는 상품이다. 또 다른 신자유주의적 자연들로는 새롭게 인클로저 대상이 된 낯익은 대상들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례는 물인데, 물의 사유화는 대중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이들 대중은 ‘물질적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삶의 원천‘, 그리고 이와 연관된 자연/상품 결합체에 대한 서발턴적 관점을 지키는 데 전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196

인클로저는 자본주의의 어떤 국면에서든 필수 요소였지만,
현 체제는 교활하고도 독창적이기까지 한 새로운 인클로저 형태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새로운 독점 지대를 뽑아내기 위해 최첨단 생명공학이 최신형 지적재산법과 결합한다는 사실은 이미널리 알려져 있다. 종종 제약 대기업은 토종 식물에 기반한 신약 - P196

성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그 한 사례로 인도멀구슬나무(최근에 게놈을 해독했다)에서 추출한 성분을 들 수 있다. 문제의 성분은 이미 그 치료 효과가 남아시아 전역에 잘 알려져 있어서 여러세기에 걸쳐 사용되던 것이었다. 유사한 사례로 농업 대기업의곡물 품종 특허권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유전자 ‘개선‘이라는 개념을 근거로 바스마티 쌀 같은 곡물 품종의 특허권을 확보하려하는데, 그 목적은 이를 개발한 영농 공동체의 자산을 박탈하려는 데 있다. - P197

반대로, ‘자연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새로운 역사적 자연을생명공학을 통해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악명 높은 사례로 몬산토Monsanto의 터미네이터 씨앗이 있다. 농가에서 매년 종자를 구매할 수밖에 없도록, 의도적으로 열매가 열리지 않게 고안된 씨앗이다. 다국적기업이 자본의 자기 재생산 경로가 되는 인공적인 생명-소진 과정을 탐식하기 위해, 씨앗이 재생산되는 자연스러운 생명-소생 과정을 고의로 죽여 없애는 것이다." 이제자본은 자신이 늘 의지해온 바로 그 ‘무상의 선물‘(즉 스스로를 보 - P197

충하는 자연의 역량을 다른 이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음으로써, 사실상 자신의 자연 I 개념을 거꾸로 뒤집는다.
그 결과는 극도의 이윤과 다양한 고통의 얽힘이며, 이를 통해환경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한데 뒤엉킨다. 농민의 부채가 급증해 농민들 사이에서 자살이 유행하고, 더 나아가 전 지구적 환경 부담에서 짊어져야 할 몫이 증가해(도시의 극단적인 공해, 시골의과잉 추출주의, 점점 더 치명적인 충격을 안겨주는 지구 온난화에 유독 취약한 상태) 이미 허리가 훨 지경인 지역들이 더욱 빈궁해진다. - P198

지구 온난화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자, 국가 강제력 대신 탄소 배출권 시장이 신뢰할 만한 규제 기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아울러 일국적 차원 대신 국제적 차원이 생태-거버넌스의 사랑받는 무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환경운동도 변천했다. 야생보호의 흐름은 그 한지류가 녹색-자본주의의 권력 중심에 끌려들어간 반면 다른 지류는 점차 환경정의를 고수하는 운동이 되면서 분열되고 약화됐다. 현재 환경정의의 흐름에는 광범위한 서발턴이 포함된다. 남반구에서 인클로저와 땅뺏기에 맞서 저항하는 ‘가난한 자들의환경주의‘, 독성물질 노출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을 공격하는 북반구 반인종주의자, 송유관과 싸우는 선주민운동, 삼림 파괴와전투를 벌이는 에코페미니스트 등등. 이들 중 다수는 초국적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 중첩되고 상호 연결된다. - P200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까지 이 무대에서 보기 힘들었던 국가 중심 프로젝트가 이제 새로운 활력을 내뿜으며 다시 부상하고 있다. 좌우 양쪽에서 포퓰리즘의 반란이 일어나자유시장‘이라는 요술방망이에 대한 믿음을 분쇄하자, 일부는 국가권력이 생태-사회 개혁의 주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령 한편에는 마린 르펜의 ‘새 생태주의"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린뉴딜이 있다. 또한 노동조합 역시 녹색 인프라 프로젝트를 통한 일자리 창출에 기대를 건다(이 - P200

들은 오랫동안 조합원의 산업 보건과 작업 안전을 위해 헌신했지만 ‘발전‘ 을 제한하는 데는 조심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서는 탈성장 흐름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참여자를 발견하고 있다. 이들은 물질 처리량 급증과 소비자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대담한 문명 비판에 끌리고, 또한 채식주의, 커머닝, 사회적경제연대경제를 통한 ‘부엔 비비르buen vivir 의 약속에매혹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두를 종합한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 수 있을까? - P201

프랑스의 비대한 핵발전소
‘부엔 비비르‘는 ‘좋은 삶‘이라는 뜻인데, 라틴아메리카에서 특히 선주민운동과 환경운동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질서에 맞서는 대안의 기본 방향이자 가치로 제시되었다. 이들이 발전시킨 ‘부엔 비비르‘라는 말에는 인간이 서로, 그리고 자연과 함께 조화롭고 지속 가능하게 사는 삶의 여러 면모와 이와 관련된 다양한 관심사들이 집약돼 있다. 2008년에 에콰도르의 좌파 라파엘코레아 정부 아래에서 채택된 에콰도르 헌법은 ‘부엔 비비르‘를 경제사회 질서의기본 원리로 천명했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정치적 함의는 실천하기에는 간단하지 않아도 개념상으로는 단순하다.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생태정치가 되려면, 반자본주의적이면서 또한 환경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제시한 역사적 성찰은 이 명제를 더욱 심화시킨다.
내가 처음에 추상적인 4D 논리로 제시한 내용, 즉 자본이 자신의 의존 대상인 자연 조건을 불안정에 빠뜨리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구체적인과정으로 나타난다. 그 궤적은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중심부에서 비롯된 사회생태적 곤경은 주변부에서 약탈의물결을 촉발하며, 노략질 대상은 정치적 자기방어 수단을 빼앗긴 인구집단의 자연적 부다. 또한 매번 생태적 곤경에 대한 해법은 새로운 역사적 자연을 불러내는 마법과 그 전유를 포함하는 - P202

데, 이러한 새로운 역사적 자연은 과거에는 가치 없는 것이었으나 갑자기 황금처럼 떠받들어지면서 반드시 가져야 할 전 세계적 상품이 되고, 주인이 없기에 잡는 사람이 임자라고 편의적으로 간주된다. 결국에 가서 매번 나타나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연쇄 효과이며, 이는 새로운 사회생태적 곤경을 촉발해 순환이계속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거듭 반복된다.
각 체제마다 되풀이되는 이 과정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며전개된다. 설탕과 은, 석탄과 구아노, 정제 석유와 화학 비료, 콜탄과 유전자 조작 씨앗을 헤쳐나가며 이 과정은 정부에서부터식민화로, 신제국주의로, 금융화로 단계를 밟아나간다. 그 결과는 중심부/주변부 지리학의 진화로서, 서로를 구성하는 이두공간 사이의 경계선은 경제/자연의 경계선이 변동하는 것에 발맞춰 주기적으로 변동한다. 이런 변동을 낳는 과정은 자본주의 사회의 독특한 공간성을 발생시킨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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