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그러나 어쩌면 매우 환경과 훈련의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헌사에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라고쓴 것은 아부나 효도가 아니라 사실 진술에 가까웠다. 나의 부모님은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가난과 싸우며 고학했고, 결국 교육을통해 가난에서 벗어났다. 경영대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엄마는 과의유일한 여성이었다니 1970년대 중반은 대체 어떤 세상이었는지……….
두 분은 경제성장기에 사회인이 되어 여유가 생기자 억눌렸던 것을해소하려는 듯,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여행 등 문화적 경험에 탐닉했다. IMF 때를 비롯해 주춤거린 시기야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내멈추지 않았다. 먹는 것에도 입는 것에도 집을 가꾸는 데에도 심드렁한 채, 신발은 길에서 만 원짜리를 사더라도 책은 매주 사들여 탑을 쌓았다. 그런 부모님 곁에서 자라는 동안 나 역시 예술을 사랑하고 즐길 수밖에 없도록 빚어진 것이다. 믿을 수 없이 큰 혜택을 받고컸다. 무형의 것을 받아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복권 당첨이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것이니 살면서 세상에 갚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p39,40


 많은 사람들이 문단의 폐해에 대해서는 자주 말하지만 장르 문학계의 비틀림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데 괴롭힘 문화로 치면 한 수 위다. 거의 매년 악플러를 잡아보았더니 비슷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업계 사람으로 밝혀지거나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얼마 전에도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안쪽의온도가 조금 떨어져버렸다. 이대로 방치하면 모두가 진저리 치는 문단보다도 더한 유독함을 뿜어낼지도 모른다. 바로 곁에서 일어나고있는 일만은 아니다. 「스타워즈」 시리즈 7, 8, 9편을 만든 제작진과배우들이 전 세계적으로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며, 「에반게리온」시리즈의 안노 히데아키가 오랫동안 상처를 받아왔다는 것을 들으며 서브컬처계의 가학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간다.
겪어본바, 대부분의 서브컬처 향유자들은 다정하고 기발한데, - P106

가끔 몇 년 전에 읽은 책 한권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집요할 정도로따라붙으며 잔인한 말들을 하는 이를 맞닥뜨리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 어렵다. 마음속의 저울이 잘 작동하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마음속의 저울은 옳고 그름, 유해함과 무해함, 폭력과 존중을 가늠한다. 그것이 망가진 사람들은 끝없이 다른사람들을 상처 입힌다. 사실 이미 고장 난 타인의 저울에 대해서 할수 있는 일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저 내 저울의 눈금 위로 바늘이잘 작동하는지 공들여 점검할 수밖에. - P107

다. 거기엔 개인이라는,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
그날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개인이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을 비행기 승객들, 매일매일 출근하던 직장인들, 전망대에 올라 희열에 찼을 관광객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던 구조대원들이었다. 메모리얼파크 바깥에는 그날 순직한 구조대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있었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역사교육을 전공하며 공부한 자세한내용들은 많이 잊었지만 그것 하나는 배운 것 같다. 배운 것을 자꾸현실과 비교해보며 다급함에 종종거릴 때가 있다. - P116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는 아래로 끊임없이 물이 떨어지는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를 둘러서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정확한 사망자 추산이 불가능했으니 누락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거기 모르는 사람의 이름 위에 손을 얹고 잠시 서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을 언제까지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놈들 머리에 폭탄이 떨어지면 좋겠어!"라든가 "그놈들 발밑에지진이 나면 좋겠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가장 순정한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것을 외면하는 - P116

독선은 얼마나 독한가? 붕괴에서 살아남은 기적의 나무 한 그루도있었는데, 다들 그 아래에서 소원 같은 걸 비는 듯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배터리파크까지 걷는데 비가 왔다. 비가 왔을뿐더러 바람이며파도가 걷기 힘들 정도였다.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보였다. 어릴 적엄마와 이모와 페리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 가까이 갔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내가 본 뉴욕은 테러를 겪기 전의 뉴욕, 쌍둥이 빌딩이 서있던 시절의 뉴욕이었다. 2001년 전에 촬영된 영화들에 그때의 스카이라인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무지근한 충격이 온다. 변하지 않을 것같은 세계가 얼마나 크게 변하는지, 나쁜 쪽으로 변할 수 있다면 좋은 쪽으로도 변할 수 있기를 늘 바랄 뿐이다. - P117

어느 정도까지 공격적으로 말해도 될 것인가가 오래 하고 있는고민이다. ‘조신하게, 예쁘게 말해‘ 하는 식의 강요는 지긋지긋해서굴절 없이 똑바로 말하고 싶은데 또 어느 선을 지나치면 따가운 공격성밖에 남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하면서도 부정적감정의 발산으로 그치지 않도록 적정 수준을 찾는 것⋯⋯⋯⋯⋯ 고민은 하는데 매번 실패하는 느낌이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정교함을잃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깎아낸 부분이 남긴 부분보다 많아 심지없는 완곡어법을 쓰게 되고, 세게 밀어붙이는 글을 쓰다 보면 꼭 엉뚱한 사람이 다치게 되어 후회스럽다. - P119

뚱한일단은 조롱과 비아냥, 일반화를 피하려고 노력한다. 복잡하게얽힌 세계에서 한 사람을 덩어리로부터 떼어내 개별적으로 보고 싶다. 내가 ‘섹시 아시안 걸‘로 요약되었을 때 상처 받았던 것처럼, 남부에서 온 아저씨도 상처 받았을 수 있다. 그 아저씨가 ‘남부‘에서 연상되는 전형적인 인종 차별주의자였더라면 그 공연을 보고 있지 않았을 확률이 높으니까. 공연자의 갑자기 드러난 날카로운 면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일반화해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차별 속에 느 - P119

껴왔을 스트레스가 왈칵 터져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회적 맥락과 개인을 동시에 온전히 이해하는 것, 내가 쓰는 언어의 요철을 없애면서도 예각을 잃지 않는 것. 그 지난한 두 가지가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인 것 같다. 실패하면 그다음 번에 다이얼을 더 잘돌릴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한다. - P120

가까워질수록 W는 불안해했고, 나는 의기양양해져갔다. 역시나백남준의 작품이었다. 커뮤니케이션 뮤지엄 앞에 서 있는 1990년 작「프리벨맨(Pre-Bell-Man)」이었다. 다시 한번 고유의 표지가 있는 작가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험이었다. 손톱만 하게 보여도 아우라를 뿜어낸다는 뜻이니 말이다. 소설가들 중에도 분명 비슷한 이들이 있다. 한 문단만 읽어도 아, 이거 그 사람이 쓴 거잖아, 하고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작가가 되는 게 그때도 지금도 꿈이다. 감각적이고 즉각적이면서도 쉬이 잊히지 않는 어떤 것, 궁극적으로 만들어내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놓칠 수 없는 괴테 하우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관람한 후에는 괴테 하우스의 외벽에 두 손을 대고 기복 신앙처럼 문운을 나눠 받길 소망했다. 이때의 여행 사진들을 보면 벽을 짚은 손등 사진이 띄엄띄엄 이어진다. - P147

 토마스 만이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썼다는 하숙집 건물은 작고 가지런했고 거미가 인사하듯이 실을타고 내려왔다. 죽고 없는 사람들이 한때 머물렀던 장소에 찾아가는마음이란 지도 위를 투명한 점선으로 뒤덮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쌓여서 천천히 그려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은, 지나간 사람들의 바통을 건네받아 나도 쓰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듯도 하다. 그 방문이 만족스러웠으므로, 기왕 거기까지 간 김에 근처의 영국 정원을 걸어보기로했다. 멀리서 본 영국 정원은 도심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풍성해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커다란 녹지를 남겨두었을까 감탄했는데, 18세기에 그때까지 늪지였던 것을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만든 것이라고 한다. - P156

인간의 몸이 아주 복잡한 유기체라는 점을 종종 곱씹는다. 하나의 통일된,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온갖 부분과 요소들이 저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 목표는 가끔 서로 상충하거나 갈등 관계에 놓이기까지 한다는 것에 대해서. 뇌가 원하는것과 위가 원하는 것이 다르고, 이 호르몬의 목표와 저 호르몬의 목표가 다른 식인데 성(性)과 관계된 파트들이 유난히 저 혼자 가지런할 리 없다. 끝없이 업데이트되는 과학과 의학의 연구 결과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몸이 이토록 복잡하고 다층적일 때, 이분법적 정체성과 모두에게 똑같은 사랑의 방식은 실제에 대한 지나치게거친 요약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사람인 어슐러 르 귄은 ‘안다‘고 말해야 할 자리에 ‘믿는다‘는 말이 끼 - P160

어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고, 이에 깊이 동의한다. 과학의 자리에 과학이 아닌 것이 들어와서는 곤란하다. - P161

그날 나는 앤서니와 헤어져 유리창을 찾아보았다. 추모관은아주 넓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창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시 머물렀다. 나도 유리창 앞에 서보았다. 그 유리창 앞에 서 있었을 성호 아버지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 성호 생각도 났다. 아이들 생각도났다. 그리고 그날 어느 창가에 서 있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날 죽었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그것이 유리창 너머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내 눈앞에 있던 것은 9·11의 어두운 건물 파편들이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그 파편너머,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상상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폐허만을 보게 되리라는경고처럼.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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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8-15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타워즈 7 8 9 제작진이 왜 공격을 받는지, 영화평을 찾아봐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제목은 몇 번 눈여겨 보아 기억하는데 옮겨주신 문단들을 보니 생각보다 천천히 소화시키며 읽어야 할 책으로 보이네요^^

2022-08-23 12:20   좋아요 1 | URL
헐~ 이런 여기에 댓글이 숨어있었군요. 덧글이 거의 전무한 서재라 덧글에 둔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세랑작가가 SF작가로 분류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여성 작가들이 장르분야에서는 독자들의 공격을 더 심하게 받는다더군요. 본인도 오래 시달렸고. 스타워즈 제작진도 그런 케이스에 해당되고... 제게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준 책이었어요. 가볍게 시작했는데 많이 무거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