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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花樣年華
김사인(1956~)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걷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치며 - P172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P173

순간과 영원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였을까? 너무 아름다워서 시간이 오늘로 멈추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언제였을까? 기억을 더듬어보았습니다. 아마 제게는 그 순간이 어린 날의 어느 오월이었습니다. 오래 모은 용돈을 털어 누나와 놀이공원에 갔던 날.

별천지라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나 보던 장면들이 실재하는 듯한 광경. 저는 그때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큰돈을 주고 산자유이용권은 삶에 자유를 가져다준 듯했고 야간 개장 이후의
놀이공원 불빛은 마치 앞날처럼 빛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졌습니다. 차비만 겨우 남긴 채 돈은 떨어졌고 저녁을 허술하게 먹은 탓에 - P174

배가 금세 고파졌습니다. 무엇보다 다리가 아팠습니다.

만약 처음 놀이공원에 입장할 때의 바람처럼 저의 시간이
그날 멈췄다면 어땠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지금쯤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그 놀이공원에 갇혀 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이킹 가장 맨 끝자리에 앉아 지루한 낮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불가능한 가정이기는 하지만 저는 그날 이후 어떤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든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만큼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와 누나는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류장에 내려 걸으면서 우리의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시간은 눈물겹도록 애달픈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도 했고 한 시절 슬픔 없는 나라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모를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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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花樣年華
김사인(1956~)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속 어깨를 걷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치며 - P172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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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空間), 이 비어 있는 사이는 하늘을 이고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의 처소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거주공간을 하늘과 땅, 그리고 신성함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우러지는 ‘관계의 장(場)‘으로 보았다. 해가뜨는 동쪽으로 창을 내어 빛을 들이고, 해가 저무는 방향에는 교회와무덤을 두어 삶의 유한함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빛과 무덤, 교회 같은사물은 거주 공간 안에서 인간과 교류하며 삶의 유한함과 존재의 의미를 일깨운다.
하지만 오늘날의 도시는 주거라는 기능적 효율에 충실한 채 거대한콘크리트 숲 위에 세워졌다. 현대 건축은 생활편의에 따라 구역을 나누고, 최소한의 동선으로 교통망을 설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격자무늬공간에는 죽음을 묵상할 자리도, 삶의 유한함을 받아들일 여백도 없다.
하늘과 땅은 더 이상 존재를 일깨우는 터전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이용대상으로 축소되었다.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집을 "살기 위한 기 - P229

계(machine for living)"라고 정의했다. 이 선언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마술처럼 유럽과 아시아의 풍경이 바뀌었다. 대도시의 얼굴은 어디를 가나 규격화된 채 서로를 닮아갔다. 특정 장소가 지닌 고유한 분위기와 신성함은 과학기술만능주의와 효율성 앞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건축가 승효상은 ‘터의 무늬‘를 지워버린 우리 도시 건축이 결국 ‘터무니없는 삶‘을 낳았다고 말한다. ‘터무니‘는 삶의 기초가 되는 흔적이며 사물의 근본 바탕이다. 우리가 사는 땅에는 저마다의 무늬가 있어야하지만, 도시를 가득 메운 아파트 숲에서 그 무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땅의 가치는 돈으로 평가되고, 공간은 집값과 브랜드로 환산된다. 집은점점 비슷해지고, 삶의 장소성은 희미해진다.
무차별적 속도전으로 진행된 우리의 거주 방식은 매끈하고 그럴싸한 것만 곁에 두고, 어둡고 축축하며 불편한 것은 일시에 치워버렸다.
그 과정에서 죽음 역시 삶의 반대편으로 밀려났다. 우리는 윤택함과 편리함을 얻는 대신 의미를 잃었다. 죽음을 내쫓고 생생한 삶만 존재하는것처럼 보이게 만든 이 착시 속에서, 병원 장례식장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죽음의 자리를 차지했다. - P230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인생의 첫발을 병원에서 내딛게 된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의학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압도적으로 발전했다. 고도로 발전한 의학 기술 아래 구축된 의료 시스템은 이제 인간 전 생애에 걸쳐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우리는 태어나 성장하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의료 시스템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의식주 뒤에 따라붙어야 할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의료 시스템이다.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삶의 의료화(medicalization)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질병에 걸려 죽든, 늙어서죽든 죽고사는 모든 과정에 병원이 속속들이 개입하는 의료화 현상. 사실 무병장수를 꿈꾸는 지구 위의 인류 모두가 의료 기술의 수혜자임은명백하다. 하지만 질병의 의료화가 몰고 온 삶의 변화, 즉 무병장수라는보편적 욕망의 허울에 가려서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우리 주변을 낯선 시선으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 P232

간호사의 직능 정체성은 무엇보다 타자에 대한 돌봄에 있다. 여기서타자란 대개 몸과 마음이 연약한 지체들이다. 이처럼 취약한 이들을 보살핀다는 직업적 특성 때문인지, 돌봄의 곁에는 언제나 ‘헌신‘과 ‘희생‘
이라는 서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간호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돌봄 노동의 영역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희생과 봉사라는 덕목을 최우선으로 떠올린다.
특히 업무의 성격이 표준화되거나 매뉴얼화하기 까다로울수록, 혹은진입장벽이 낮아 누구나 시작하기 쉽다고 여겨지는 직종일수록 이러한 경향성은 짙어진다. 무엇보다 여성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직군에서 돌봄은 전문적인 ‘기술‘이 아닌, 특정 성별이 타고난 ‘천성‘이나‘미덕‘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문제는 돌봄에 ‘희생‘과 ‘헌신‘이라는 숭고하고 성스러운 수식어가 - P236

덧붙으면서 발생한다. 이러한 인식이 강해질수록 직업적 전문성은 어느덧 개개인의 ‘성품‘의 영역으로 좁혀진다. 인격과 품성의 문제는 교환경제의 논리에서 값을 매기기 어려운, 수치화할 수 없는 고유한 변수다. 상냥하고 어진 성품을 표준화된 업무 매뉴얼로 규정할 수 없듯, 우리 사회는 이를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으로 간주하기를 주저한다. 오히려 이러한 성품의 영역은 돌봄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할 ‘도리‘로 교묘하게 탈바꿈한다.
- P237

우리는 누구나 돌봄노동자가 좀 더 친절하고 따스하기를 바란다. 숙련된 전문성에 어진 성품까지 갖춘 조력자를 만난다면 그보다 더한 만족은 없을 것이다. 내 아이를, 내 노부모를 온 마음을 다해 보살펴 주길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환자의 투정과 아이의 미성숙한 행동 앞에서도, 돌봄노동자가 흐트러짐 없이 상냥한 태도와 전문 기술을 동시에
발휘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돌봄의 무게 중심이 이토록 ‘성품‘의 측면으로만 기울 때,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 특히 관련 종사자의 대다수가 여성인 현실에서 이러한 기대는 독이 되기 쉽다. 친절한 마음과 상냥한 태도는 돌봄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노동자가 당연히 해야할 의무가 되는 순간 그들의 직업적 전문성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고립되어 죽어가는 이들의 80%가 남성인 상황에서, 그 닫힌 문을 두드리는 돌봄 노동자의 95%는 여성이다. 이 수치의 비대칭은 우리에 - P237

게 기묘하고도 서글픈 풍경을 제시한다. 고립사로 내몰리는 중년 남성의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돌봄 노동자들의 삶은 어쩌면 그 어둠보다 더 짙고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기묘한 대조는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극한의 절망에 처한 이들을 돌보는 행위와, 이를 단순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행정적 성과로 치환하려는 시도가 과연 매끄러운 톱니바퀴처럼 맞물릴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돌봄’을, 과연 ‘노동‘이라는 언어만으로 온전히 서술하는 것이 타당하기는 한 것일까. - P238

국가는 ‘최소비용으로 최대 접근‘이라는 행정적 효율성을 내세워 돌봄서비스의 외연을 확장해 왔다. 취약 계층과 노인에게 복지의 손길이 닿는다는 명분은 있지만, 정작 그 서비스를 온몸으로 수행하는 노동자의 처우는 외면당했다. 수치상의 복지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현장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돌봄은 탁상행정이나 서류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활지원사와 요양보호사의 업무는 외로운 이의 안부를 묻고 말벗이 되어주는 정서적 지지부터, 거동이 불편한 이의 일상을 보조하는 일까지 서로 ‘살을 맞대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다. 고립사의 공포 앞에 선 취약 계층을 세상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 바로 이들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회의 가장 어두운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을 돌보는 노동자들 역시 노동시장의 ‘경계 밖‘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복지 치적 뒤에는 누구도 선뜻 나서기 힘든 고된 노동에대한 뿌리 깊은 경시가 숨어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힘든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이들에준다"는 식의 시혜적 태도가 만연하다. 노동자의 역량 부족을 탓하며 낮은 임금을 정당화하는 우리의 인식은, 결국 돌봄이라는 - P241

숭고한 가치를 자본의 논리로 오염시키고 있다.
돌봄 노동자가 사회적 경계인으로 머무는 한, 그들이 돌보는 대상 역시 진정한 존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이제는 복지의 성과를 숫자로만 증명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타인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자기의살을 맞대며 헌신하는 이들의 노동이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을 때, 비로소우리 사회의 복지는 좀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돌봄 노동의 현장에는 낮은 임금이라는 가시적인 문제 너머, 훨씬 더 교묘하고 뿌리 깊은 이중 구조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그림자 노동(Shadow Labor)"이다." 이는 공식적인 업무 시간을 초과하는 무임금 노동일 뿐만 아니라, 지정된 돌봄 대상을 넘어 그 집안의 온갖 잡일까지도맡아야 하는 비가시적 노동의 영역을 의미한다.
돌봄 노동은 필연적으로 대상자와의 밀착된 관계로 이어진다. 때로는 피붙이보다 더 깊은 생의 밑바닥을 공유하며, 가족보다 더 진한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밀착된 관계‘는 노동자의 처신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가족과 같은 헌신‘을 요구받거나 자기 스스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서비스여야 할 노동이 ‘도리‘나 ‘정‘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의해 경계가흐릿해질 수도 있다. - P242

그들은 때때로 전문적인 ‘직업인‘이 아니라, 효성 지극한 ‘딸‘이나자기희생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른바 돌봄 노동에서흔히 나타나는 ‘정체성의 혼란‘이다. 이러한 프레임은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주장을 가로막는 강력한 심리적 기제로 작용한다. 딸이 부모를돌보며 수당을 따지지 않듯,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밤잠을 설쳐도 초과근무라 부르지 않듯, 사회는 그들에게 헌신이라는 외피를 씌워 노동의대가를 지워버린다.
병원 현장에서 신규 간호사들은 가끔 ‘아가씨‘나 ‘언니‘라고 불린다.
이는 고도의 숙련도와 지식을 갖춘 전문 의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우고, 돌봄을 그저 여성이라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가족 내 수동적노동‘으로 격하시킨다.
돌봄이 직업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 사회는 기묘하게도 이를 ‘모성 본능‘이라는 상숫값으로 치환해 버린다. 간호사를 비롯한 돌봄 노동자들의 전문성은 본능이라는 베일에 가려지고, 여성은 태어날때부터 헌신과 희생이 각인된 존재인 것처럼 인식된다. 본성(本性)에는인위적인 노력이 필요 없다는 논리는 돌봄을 ‘공부하고 연마해야 할 기술‘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결국, 돌봄 노동은 숭고한 헌신이라는 말로 포장된 채 정당한 가치 평가의 궤도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러자 노동‘ 실태와 가족주의 프레임 분석은 이주희의 논문 (Shadow - P243

이러한 인식은 가정 안으로 들어올 때 더욱 교묘한 힘을 발휘한다.
돌봄이 공적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 안에서는 가족 구성원 중특정인에게만 과도한 의무가 지워지는 이른바 ‘독박 돌봄‘이 발생하기쉽다. 특히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 미혼 자녀나 여성 형제에게 더 큰간병의 짐을 지우는 풍경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시간이 더 많으니까", 혹은 "여자가 더 꼼꼼하니까"라는 식의 비논리적인 근거들은 돌봄의 고통을 특정 개인에게 전가하는 도구로 쓰인다. 돌봄을 당연한 본능으로 여기는 태도는 가족 간의 민주적인 역할 분담을 가로막고, 희생을 강요받는 이의 삶을 고립시킨다.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에게는 가족 중 누군가의 질병이 이중의 무게로 다가온다. 형제자매들은 가족의 한 사람인 전문 의료인에게 전폭적으로 의존하거나 심지어는 책임마저 떠넘긴다. "네가 전문가니까 잘 알잖아"라는 말은 신뢰의 표현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돌봄의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 몰아넣는 편리한 명분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간호사들은 혼란에 빠진다. ‘어디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까?‘, ‘왜 나만 이 짐을 져야 하지?‘라는 의문 속에서 고뇌하거나 심지어는 죄의식까지 느낀다. 돌봄에 참여하지 않는 형제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존재이지만, 정작 자기 마음속에는 억울함과 슬픔이 켜켜이 쌓여간다.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고 싶다는 마음과 나의 삶을 지키고 싶다는 ‘양가감정‘이 내면에서 수시로 부딪친다. - P244

가족이기에 고맙다는 말을 생략하고, 형제이기에 미안함을 덮어두는 일은 흔하다. 돌봄의 분담에서 쏙 빠져나간다고 해서 사회적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극단적으로는 얼굴을 안 보고 살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잠시의 시간과 요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쏟아붓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 P245

돌봄은 본래 마음을 쓰는 일이다.
마음을 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의, 혹은 나의 슬픔과 고통을 기꺼이 끌어안는 일이다. 돌봄은 성능 개선을 위한 매뉴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이다.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돌봄이야말로 인간의 본래적 존재 방식이라는 이 처절한 실존의 민낯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과 공명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공명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등바등 살아내느라 몸에 박힌 굳은살이 어느새 마음까지 덮어버린 비정한 현실 탓이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향한 강박은 우리를 더욱 무디게 만든다. - P249

오늘날의 불안은 모든 가치를 왜곡하고, 진지한 대화보다는 냉소적인 잡담 속에 삶을 방치하게 만든다. 현대 철학이 ‘돌봄‘과 ‘실존‘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대학 강의실에서 찾은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인류가 겪은 가장 참혹한 비극에 대한깊은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 P250

고독사 예방법은 죽음이 아닌, 삶을 가리킨다. 이 법은 죽음의 형식과 처리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적어도 그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발견되지 못한 죽음, 죽음에 이르게 한 삶을 보라고 한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외로움 속에서 지쳐 살다가 며칠이 지나서 발견되는그 삶을 말이다. 죽음 뒤에서야 그의 외로운 삶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현실이다.
고독사라고 쓰고 고립사로 읽는 이 작업은 고독하게 죽었다는 뜻이아니라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 ‘unlinked‘의 의미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이는 끊어진 부분을 납땜이라도 해서 다시 연결하겠다는 것, 국가가그 삶을 미리 다독이고 기록하며,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약속을 포함한다. 약속 안에는 망가진 공동체가 겪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 실패, 그리고 그 실존적 고백이 담겨 있다.
병원 밖의 죽음은 우리에게 다시금 묻는다. 의학 제도가 가닿지 않은곳에서 사라진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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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상실할 때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동력을 잃는다. 역설적이게도 고독사는 인간 실존의 근거가 타자와의 관계이자 세계와의 연결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다. 세상은 끊임없이주체적인 삶을 가꾸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 현대인은 결코 고립된 ‘자연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정교하고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독사를 단순히 ‘혼자 비참하게 죽는다‘는 현상으로만 치부해서는안 된다. 고독사의 사망진단서를 작성한다면, 최초의 선행 사인은 단절로 인한 ‘사회적 죽음‘일 것이며, 생물학적 죽음은 그로 인한 최종 결과다. 사회적 죽음은 이제 인문학적 함의나 은유를 넘어, 실재하는 생명을 잠식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되었다. - P194

고립되어 살아가는 이들을 사회와 국가가 돌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우리 사회의 각종 법률과 행정 시스템이 지닌 본질적 한계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시스템은 개인이 처한 상황과 맥락을 최대한 단순하고보편적으로 해석하고, 합의해 만들어 낸 매뉴얼에 따라 작동한다. 따라서 지극히 다채롭고 때로는 모호하기까지 한 개인과 인간관계의 농도를 일률적이고 투박한 시스템 안에 온전히 담아내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관리가 관계의 빈구석을 완벽히 메우기 힘든 차가운 현실을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시스템의 빈구석에는 분명 살고 있으나 투명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서성이고 있다. 삶이 아닌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실존을 증명해야 했던 이들이…… - P195

고립사한 이의 냄새는 최초 발견자가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비로소 고립을 벗어나 타인의 코를 자극한다. 죽은 이의 존재감은 타인의 후각을통해 살아난다. 타인이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 갇혀 있던 냄새는 살아 있을 때의 사무치는 고독을 대변한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그 냄새를 함께하지 않았다. 김완의 《죽은 자의 집 청소에서처럼 특수 청소를 의뢰하는 것은 결국 망인이 남기고 간 쓰레기를 포함해 체취를 지워 달라는 요구다. 즉 그곳에 살았던 이의 흔적을 소거하는 일, 존재와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그들은 진정한 집을 상실하고 낯선 곳에서 손님처럼 살다가떠났다. 현대판 객사는 병원 밖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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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너무나

박라연(1951~)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은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이었을 것이나

눈부신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아팠을 것이나

한번쯤은
남루를 가릴 병풍이기도 했을 것이나

주인을 따라 늙어 - P142

이제
젊은 누구의 몸과 옷과
구두와 가방
아픔이 되었을 것이나

그 세월 사이로
새와 나비, 벌레의 시간을
날게 하거나 노래하게 하면서

이제 그 시간들마저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중일 것이나 - P143

어렵고도 슬픈


쓰는 일은 어렵고도 슬프다. 한 줄도 못 쓰고 있을 때는 어렵지만 쓰느라고 썼는데도 잘 못 썼을 때는 슬프다. 쓰는 일은어쩌면 나물을 삶는 일과 비슷하다. 마음속 불길이 거세거나여전히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기억이라면 글은 쉽게 무르고 바스러진다. 반대로 열망이나 진심과 거리가 멀어진 것들은 질긴 억지와 작위를 만든다. 점멸하는 죽음을 따라 벽제의 긴 언덕을 올라가는 일처럼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슬픈것은 떠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시절의 기억이 어느새 쓸만한 것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언덕은 언덕을 다 내려온 사람에게만 언덕으로 보인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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