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공간(空間), 이 비어 있는 사이는 하늘을 이고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의 처소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거주공간을 하늘과 땅, 그리고 신성함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우러지는 ‘관계의 장(場)‘으로 보았다. 해가뜨는 동쪽으로 창을 내어 빛을 들이고, 해가 저무는 방향에는 교회와무덤을 두어 삶의 유한함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빛과 무덤, 교회 같은사물은 거주 공간 안에서 인간과 교류하며 삶의 유한함과 존재의 의미를 일깨운다.
하지만 오늘날의 도시는 주거라는 기능적 효율에 충실한 채 거대한콘크리트 숲 위에 세워졌다. 현대 건축은 생활편의에 따라 구역을 나누고, 최소한의 동선으로 교통망을 설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격자무늬공간에는 죽음을 묵상할 자리도, 삶의 유한함을 받아들일 여백도 없다.
하늘과 땅은 더 이상 존재를 일깨우는 터전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이용대상으로 축소되었다.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집을 "살기 위한 기 - P229

계(machine for living)"라고 정의했다. 이 선언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마술처럼 유럽과 아시아의 풍경이 바뀌었다. 대도시의 얼굴은 어디를 가나 규격화된 채 서로를 닮아갔다. 특정 장소가 지닌 고유한 분위기와 신성함은 과학기술만능주의와 효율성 앞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건축가 승효상은 ‘터의 무늬‘를 지워버린 우리 도시 건축이 결국 ‘터무니없는 삶‘을 낳았다고 말한다. ‘터무니‘는 삶의 기초가 되는 흔적이며 사물의 근본 바탕이다. 우리가 사는 땅에는 저마다의 무늬가 있어야하지만, 도시를 가득 메운 아파트 숲에서 그 무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땅의 가치는 돈으로 평가되고, 공간은 집값과 브랜드로 환산된다. 집은점점 비슷해지고, 삶의 장소성은 희미해진다.
무차별적 속도전으로 진행된 우리의 거주 방식은 매끈하고 그럴싸한 것만 곁에 두고, 어둡고 축축하며 불편한 것은 일시에 치워버렸다.
그 과정에서 죽음 역시 삶의 반대편으로 밀려났다. 우리는 윤택함과 편리함을 얻는 대신 의미를 잃었다. 죽음을 내쫓고 생생한 삶만 존재하는것처럼 보이게 만든 이 착시 속에서, 병원 장례식장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죽음의 자리를 차지했다. - P230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인생의 첫발을 병원에서 내딛게 된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의학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압도적으로 발전했다. 고도로 발전한 의학 기술 아래 구축된 의료 시스템은 이제 인간 전 생애에 걸쳐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우리는 태어나 성장하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의료 시스템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의식주 뒤에 따라붙어야 할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의료 시스템이다.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삶의 의료화(medicalization)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질병에 걸려 죽든, 늙어서죽든 죽고사는 모든 과정에 병원이 속속들이 개입하는 의료화 현상. 사실 무병장수를 꿈꾸는 지구 위의 인류 모두가 의료 기술의 수혜자임은명백하다. 하지만 질병의 의료화가 몰고 온 삶의 변화, 즉 무병장수라는보편적 욕망의 허울에 가려서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우리 주변을 낯선 시선으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 P232

간호사의 직능 정체성은 무엇보다 타자에 대한 돌봄에 있다. 여기서타자란 대개 몸과 마음이 연약한 지체들이다. 이처럼 취약한 이들을 보살핀다는 직업적 특성 때문인지, 돌봄의 곁에는 언제나 ‘헌신‘과 ‘희생‘
이라는 서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간호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돌봄 노동의 영역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희생과 봉사라는 덕목을 최우선으로 떠올린다.
특히 업무의 성격이 표준화되거나 매뉴얼화하기 까다로울수록, 혹은진입장벽이 낮아 누구나 시작하기 쉽다고 여겨지는 직종일수록 이러한 경향성은 짙어진다. 무엇보다 여성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직군에서 돌봄은 전문적인 ‘기술‘이 아닌, 특정 성별이 타고난 ‘천성‘이나‘미덕‘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문제는 돌봄에 ‘희생‘과 ‘헌신‘이라는 숭고하고 성스러운 수식어가 - P236

덧붙으면서 발생한다. 이러한 인식이 강해질수록 직업적 전문성은 어느덧 개개인의 ‘성품‘의 영역으로 좁혀진다. 인격과 품성의 문제는 교환경제의 논리에서 값을 매기기 어려운, 수치화할 수 없는 고유한 변수다. 상냥하고 어진 성품을 표준화된 업무 매뉴얼로 규정할 수 없듯, 우리 사회는 이를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으로 간주하기를 주저한다. 오히려 이러한 성품의 영역은 돌봄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할 ‘도리‘로 교묘하게 탈바꿈한다.
- P237

우리는 누구나 돌봄노동자가 좀 더 친절하고 따스하기를 바란다. 숙련된 전문성에 어진 성품까지 갖춘 조력자를 만난다면 그보다 더한 만족은 없을 것이다. 내 아이를, 내 노부모를 온 마음을 다해 보살펴 주길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환자의 투정과 아이의 미성숙한 행동 앞에서도, 돌봄노동자가 흐트러짐 없이 상냥한 태도와 전문 기술을 동시에
발휘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돌봄의 무게 중심이 이토록 ‘성품‘의 측면으로만 기울 때,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 특히 관련 종사자의 대다수가 여성인 현실에서 이러한 기대는 독이 되기 쉽다. 친절한 마음과 상냥한 태도는 돌봄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노동자가 당연히 해야할 의무가 되는 순간 그들의 직업적 전문성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고립되어 죽어가는 이들의 80%가 남성인 상황에서, 그 닫힌 문을 두드리는 돌봄 노동자의 95%는 여성이다. 이 수치의 비대칭은 우리에 - P237

게 기묘하고도 서글픈 풍경을 제시한다. 고립사로 내몰리는 중년 남성의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돌봄 노동자들의 삶은 어쩌면 그 어둠보다 더 짙고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기묘한 대조는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극한의 절망에 처한 이들을 돌보는 행위와, 이를 단순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행정적 성과로 치환하려는 시도가 과연 매끄러운 톱니바퀴처럼 맞물릴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돌봄’을, 과연 ‘노동‘이라는 언어만으로 온전히 서술하는 것이 타당하기는 한 것일까. - P238

국가는 ‘최소비용으로 최대 접근‘이라는 행정적 효율성을 내세워 돌봄서비스의 외연을 확장해 왔다. 취약 계층과 노인에게 복지의 손길이 닿는다는 명분은 있지만, 정작 그 서비스를 온몸으로 수행하는 노동자의 처우는 외면당했다. 수치상의 복지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현장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돌봄은 탁상행정이나 서류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활지원사와 요양보호사의 업무는 외로운 이의 안부를 묻고 말벗이 되어주는 정서적 지지부터, 거동이 불편한 이의 일상을 보조하는 일까지 서로 ‘살을 맞대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다. 고립사의 공포 앞에 선 취약 계층을 세상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 바로 이들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회의 가장 어두운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을 돌보는 노동자들 역시 노동시장의 ‘경계 밖‘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복지 치적 뒤에는 누구도 선뜻 나서기 힘든 고된 노동에대한 뿌리 깊은 경시가 숨어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힘든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이들에준다"는 식의 시혜적 태도가 만연하다. 노동자의 역량 부족을 탓하며 낮은 임금을 정당화하는 우리의 인식은, 결국 돌봄이라는 - P241

숭고한 가치를 자본의 논리로 오염시키고 있다.
돌봄 노동자가 사회적 경계인으로 머무는 한, 그들이 돌보는 대상 역시 진정한 존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이제는 복지의 성과를 숫자로만 증명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타인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자기의살을 맞대며 헌신하는 이들의 노동이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을 때, 비로소우리 사회의 복지는 좀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돌봄 노동의 현장에는 낮은 임금이라는 가시적인 문제 너머, 훨씬 더 교묘하고 뿌리 깊은 이중 구조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그림자 노동(Shadow Labor)"이다." 이는 공식적인 업무 시간을 초과하는 무임금 노동일 뿐만 아니라, 지정된 돌봄 대상을 넘어 그 집안의 온갖 잡일까지도맡아야 하는 비가시적 노동의 영역을 의미한다.
돌봄 노동은 필연적으로 대상자와의 밀착된 관계로 이어진다. 때로는 피붙이보다 더 깊은 생의 밑바닥을 공유하며, 가족보다 더 진한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밀착된 관계‘는 노동자의 처신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가족과 같은 헌신‘을 요구받거나 자기 스스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서비스여야 할 노동이 ‘도리‘나 ‘정‘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의해 경계가흐릿해질 수도 있다. - P242

그들은 때때로 전문적인 ‘직업인‘이 아니라, 효성 지극한 ‘딸‘이나자기희생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른바 돌봄 노동에서흔히 나타나는 ‘정체성의 혼란‘이다. 이러한 프레임은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주장을 가로막는 강력한 심리적 기제로 작용한다. 딸이 부모를돌보며 수당을 따지지 않듯,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밤잠을 설쳐도 초과근무라 부르지 않듯, 사회는 그들에게 헌신이라는 외피를 씌워 노동의대가를 지워버린다.
병원 현장에서 신규 간호사들은 가끔 ‘아가씨‘나 ‘언니‘라고 불린다.
이는 고도의 숙련도와 지식을 갖춘 전문 의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우고, 돌봄을 그저 여성이라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가족 내 수동적노동‘으로 격하시킨다.
돌봄이 직업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 사회는 기묘하게도 이를 ‘모성 본능‘이라는 상숫값으로 치환해 버린다. 간호사를 비롯한 돌봄 노동자들의 전문성은 본능이라는 베일에 가려지고, 여성은 태어날때부터 헌신과 희생이 각인된 존재인 것처럼 인식된다. 본성(本性)에는인위적인 노력이 필요 없다는 논리는 돌봄을 ‘공부하고 연마해야 할 기술‘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결국, 돌봄 노동은 숭고한 헌신이라는 말로 포장된 채 정당한 가치 평가의 궤도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러자 노동‘ 실태와 가족주의 프레임 분석은 이주희의 논문 (Shadow - P243

이러한 인식은 가정 안으로 들어올 때 더욱 교묘한 힘을 발휘한다.
돌봄이 공적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 안에서는 가족 구성원 중특정인에게만 과도한 의무가 지워지는 이른바 ‘독박 돌봄‘이 발생하기쉽다. 특히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 미혼 자녀나 여성 형제에게 더 큰간병의 짐을 지우는 풍경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시간이 더 많으니까", 혹은 "여자가 더 꼼꼼하니까"라는 식의 비논리적인 근거들은 돌봄의 고통을 특정 개인에게 전가하는 도구로 쓰인다. 돌봄을 당연한 본능으로 여기는 태도는 가족 간의 민주적인 역할 분담을 가로막고, 희생을 강요받는 이의 삶을 고립시킨다.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에게는 가족 중 누군가의 질병이 이중의 무게로 다가온다. 형제자매들은 가족의 한 사람인 전문 의료인에게 전폭적으로 의존하거나 심지어는 책임마저 떠넘긴다. "네가 전문가니까 잘 알잖아"라는 말은 신뢰의 표현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돌봄의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 몰아넣는 편리한 명분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간호사들은 혼란에 빠진다. ‘어디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까?‘, ‘왜 나만 이 짐을 져야 하지?‘라는 의문 속에서 고뇌하거나 심지어는 죄의식까지 느낀다. 돌봄에 참여하지 않는 형제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존재이지만, 정작 자기 마음속에는 억울함과 슬픔이 켜켜이 쌓여간다.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고 싶다는 마음과 나의 삶을 지키고 싶다는 ‘양가감정‘이 내면에서 수시로 부딪친다. - P244

가족이기에 고맙다는 말을 생략하고, 형제이기에 미안함을 덮어두는 일은 흔하다. 돌봄의 분담에서 쏙 빠져나간다고 해서 사회적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극단적으로는 얼굴을 안 보고 살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잠시의 시간과 요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쏟아붓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 P245

돌봄은 본래 마음을 쓰는 일이다.
마음을 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의, 혹은 나의 슬픔과 고통을 기꺼이 끌어안는 일이다. 돌봄은 성능 개선을 위한 매뉴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이다.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돌봄이야말로 인간의 본래적 존재 방식이라는 이 처절한 실존의 민낯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과 공명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공명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등바등 살아내느라 몸에 박힌 굳은살이 어느새 마음까지 덮어버린 비정한 현실 탓이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향한 강박은 우리를 더욱 무디게 만든다. - P249

오늘날의 불안은 모든 가치를 왜곡하고, 진지한 대화보다는 냉소적인 잡담 속에 삶을 방치하게 만든다. 현대 철학이 ‘돌봄‘과 ‘실존‘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대학 강의실에서 찾은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인류가 겪은 가장 참혹한 비극에 대한깊은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 P250

고독사 예방법은 죽음이 아닌, 삶을 가리킨다. 이 법은 죽음의 형식과 처리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적어도 그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발견되지 못한 죽음, 죽음에 이르게 한 삶을 보라고 한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외로움 속에서 지쳐 살다가 며칠이 지나서 발견되는그 삶을 말이다. 죽음 뒤에서야 그의 외로운 삶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현실이다.
고독사라고 쓰고 고립사로 읽는 이 작업은 고독하게 죽었다는 뜻이아니라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 ‘unlinked‘의 의미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이는 끊어진 부분을 납땜이라도 해서 다시 연결하겠다는 것, 국가가그 삶을 미리 다독이고 기록하며,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약속을 포함한다. 약속 안에는 망가진 공동체가 겪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 실패, 그리고 그 실존적 고백이 담겨 있다.
병원 밖의 죽음은 우리에게 다시금 묻는다. 의학 제도가 가닿지 않은곳에서 사라진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P2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관계를 상실할 때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동력을 잃는다. 역설적이게도 고독사는 인간 실존의 근거가 타자와의 관계이자 세계와의 연결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다. 세상은 끊임없이주체적인 삶을 가꾸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 현대인은 결코 고립된 ‘자연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정교하고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독사를 단순히 ‘혼자 비참하게 죽는다‘는 현상으로만 치부해서는안 된다. 고독사의 사망진단서를 작성한다면, 최초의 선행 사인은 단절로 인한 ‘사회적 죽음‘일 것이며, 생물학적 죽음은 그로 인한 최종 결과다. 사회적 죽음은 이제 인문학적 함의나 은유를 넘어, 실재하는 생명을 잠식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되었다. - P194

고립되어 살아가는 이들을 사회와 국가가 돌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우리 사회의 각종 법률과 행정 시스템이 지닌 본질적 한계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시스템은 개인이 처한 상황과 맥락을 최대한 단순하고보편적으로 해석하고, 합의해 만들어 낸 매뉴얼에 따라 작동한다. 따라서 지극히 다채롭고 때로는 모호하기까지 한 개인과 인간관계의 농도를 일률적이고 투박한 시스템 안에 온전히 담아내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관리가 관계의 빈구석을 완벽히 메우기 힘든 차가운 현실을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시스템의 빈구석에는 분명 살고 있으나 투명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서성이고 있다. 삶이 아닌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실존을 증명해야 했던 이들이…… - P195

고립사한 이의 냄새는 최초 발견자가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비로소 고립을 벗어나 타인의 코를 자극한다. 죽은 이의 존재감은 타인의 후각을통해 살아난다. 타인이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 갇혀 있던 냄새는 살아 있을 때의 사무치는 고독을 대변한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그 냄새를 함께하지 않았다. 김완의 《죽은 자의 집 청소에서처럼 특수 청소를 의뢰하는 것은 결국 망인이 남기고 간 쓰레기를 포함해 체취를 지워 달라는 요구다. 즉 그곳에 살았던 이의 흔적을 소거하는 일, 존재와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그들은 진정한 집을 상실하고 낯선 곳에서 손님처럼 살다가떠났다. 현대판 객사는 병원 밖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 P2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아름다운 너무나

박라연(1951~)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은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이었을 것이나

눈부신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아팠을 것이나

한번쯤은
남루를 가릴 병풍이기도 했을 것이나

주인을 따라 늙어 - P142

이제
젊은 누구의 몸과 옷과
구두와 가방
아픔이 되었을 것이나

그 세월 사이로
새와 나비, 벌레의 시간을
날게 하거나 노래하게 하면서

이제 그 시간들마저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중일 것이나 - P143

어렵고도 슬픈


쓰는 일은 어렵고도 슬프다. 한 줄도 못 쓰고 있을 때는 어렵지만 쓰느라고 썼는데도 잘 못 썼을 때는 슬프다. 쓰는 일은어쩌면 나물을 삶는 일과 비슷하다. 마음속 불길이 거세거나여전히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기억이라면 글은 쉽게 무르고 바스러진다. 반대로 열망이나 진심과 거리가 멀어진 것들은 질긴 억지와 작위를 만든다. 점멸하는 죽음을 따라 벽제의 긴 언덕을 올라가는 일처럼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슬픈것은 떠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시절의 기억이 어느새 쓸만한 것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언덕은 언덕을 다 내려온 사람에게만 언덕으로 보인다. - P1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다. 반드시 사회 공동체의 관계망 속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는 바람과 원하는 때에 죽었으면 하는 기대는 동일한 의식의 흐름에서 나온 것이다. 죽음의 과정에서 동반되는 고통을 회피하고 싶은 의식이 자기결정권이라는 개인의 권리로 표현되고 나아가 사회 구성원 공통의 합의마저 이루어낸다면, 죽음의 때를 결정하는 모든 행위는 자연스럽게 사회의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궁극적 고통이 끝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Galaxy S26 Ultra - P170

단식존엄사는 일반적 자살과 달리 대개 오랜 숙고와 가족과 작별의 시간, 그리고 여러 날에 걸친 신체적 쇠락 과정을 동반한다. 이런 과정은 과잉 진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또 단식존엄사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굶주림의 고통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임종을 맞는다고 알려져 의사가 개입해 약물로 고통을 제거하는 안락사와 구별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종교계나 보수적 법조계에서는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긴다는 면에서 본질적으로 생명을스스로 끊으려는 의도가 명백하므로 결국 자살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단식존엄사를 공식적인 합법 행위로 공표할 경우, 사회적으로 상당히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이른바 ‘미끄러운경사면 이론‘에 따른 지적이다. 고령자나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삶을 포기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거세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자살로 내모는 몰인정한 사회 분위기가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로 안락사법을 일찌감치 제정한 네덜란드와 캐나다 등 - P174

에서는 안락사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며 안락사 허용 범위 역시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일반적인 안락사와 달리 단식존엄사는 법이나 종교 차원의 이슈라기보다 죽음을 맞이하는 한 인간의 자기 결단의 문제로 보는 것이 옳은 듯하다. 그리고 안락사를 불법으로 규정한나라는 많지만 ‘먹지 않을 자유‘까지 법으로 처벌하는 나라는 아직없다.
대만의 재활의학과 의사 비류잉의 어머니는 가족이 동의한 가운데3주 동안의 단식 끝에 임종을 맞이했다. 비류잉은 2022년에 출간된 자신의 책 《단식 존엄사》에서 "어머니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히눈을 감았다"고 말하고 "하늘이 도운 덕분에 모두 순탄했다"고 썼다."
의사인 비류잉은 단식존엄사를 지지한다. 그는 병원에서 온갖 치료를 받으며 죽어가는 환자의 삶이 가장 안타깝다고 한다. 환자가 그렇게죽어가는 이유 중에는 환자 본인의 의사보다 가족의 결정 때문인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비류잉에 따르면 스스로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가족의 심정은 모진 고문을 받는 것보다Lㅍ지마 서로간에 깊은 대화와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 있다면 슬프면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작별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 P175

우리 사회는 고독사 사태가 급격히 진행되는 동안, 그 본질을 사유할틈도 없이 대책 마련에만 급급했다. 이 죽음 속에 스며들어 있는 고독의 실체, 현상의 근원과 배후를 들여다보기보다 피상적인 해결에만 치중했던 것은 쏟아지는 보도 속에 들끓는 민심이 늘 정부와 사회를 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법률 제정만으로는 무의식적인 불안을 잠재울 수 없다. 대다수의 국민이 고독사 문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처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고독의 얼굴을 하고 숨어 있는 ‘고립‘을 더 또렷이 응시해야한다. - P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박혜윤

서울대학교병원 조직은행 간호사이자 성균관대학교 철학과 겸임교수로 ‘철학하는 간호사다. 병원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조직은행 업무를 담당하고, 대학에서는 응용현상학을 가르친다.
서울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간호사로 근무했으며, 한때 CTS기독교TV 앵커와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간호사로 복귀, 인체조직을 기증받아 필요한 환자에게이식하는 전 과정을 관리하고 있다. 간호사로 일하며 성균관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자는 현장에서 수많은 삶과 죽음을 마주하며 인간 존재에 근원적인 질문을 품게 되었다. 그 질문은 철학적 탐구로 이어졌고, 이 책은 임상과 철학을 오가며 죽음을 사유한 기록이다. 연명의료와 돌봄, 임종처럼 죽음을 앞두고 만나는 사건은 물론, 고립사와 안락사 등 다양한 죽음의 모습까지 폭넓게 다룬다. 죽음을 둘러싼 현실을 의료인의 눈으로 세심하게 살피고, 철학자의 시선으로 그 의미를 다시 묻는다.
죽음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은 삶과 생명의 감각을 새롭게 깨우는 일이다. 저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결국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남겨 두지 않고, 지금의 삶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보도록 이끈다.

죽음은 낯설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의 죽음은 그 어떤 것보다 낯선 사건이다. 반면 타인의 죽음은 상투적으로느껴질 만큼 익숙하다.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죽음의 학자‘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이 차이를 생생하게 설명한다. "타인의 죽음은 동물원 철창에갇힌 호랑이를 보는 것과 같지만, 자신의 죽음은 그 호랑이가 철창 밖으로 나와 덤벼드는 것과 같다." 타인의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는 대개 관찰자의 자리에 선다. 죽음의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아직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두꺼운 쇠창살 안의 호랑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러나 죽음이 나에게 직접 찾아오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쇠창살을 뚫고 나온 호랑이가 덮쳐드는 극심한 공포와 혼란을 경험하는 것이다. - P5

여행자는 낯선 곳으로 향한다. 낯선 곳에서는 익숙했던 하늘과 바람,
땅의 감촉마저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 낯섦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낯섦은 굳어버린 삶을 다시움직이게 하는 윤활유와 같다. 죽음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말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아무 감각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익숙한 명제 앞에서 잠시 멈춰 서면, 죽음은 먼관념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 찾아올 현실로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익숙한 삶에 머무는 일이안전하고 편하다. 그러나 낯선 곳으로 떠날 때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 - P8

듯, 죽음을 새롭게 보려면 마음의 절전모드를 해제해야 한다. 익숙한 생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죽음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물어야 한다. ‘죽음 낯설게 보기‘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작은 모험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죽음을 둘러싼 제도와 문화,
오래된 습관까지 새롭게 보게 된다. 너무 익숙해서 지나쳤던 것들이 낯선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나 역시 죽음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병원과 조직은행에서 일하며 죽음 가까이에 있었고, 그 곁에서 삶을 다시 생각해 보는 작은 깨달음들을 얻었다. 이 책은 그 기억과 질문을 따라, 죽음이라는 낯선사건에 한 걸음 다가가보려는 시도이다.
우리의 삶은 늘 죽음과 동행한다. 생명의 이면에 마치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죽음은 늘 밀물처럼 질문을 던지고 썰물처럼 물러난다. 파도가포말로 부서져 사라질지라도 늘 다시 다가오듯, 죽음이 던져오는 끝없는 질문에 언제나 낯선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생명처럼 아름답다. - P9

서두에 밝힌 것처럼 우리나라 노인의 38%는 집에서 죽기 원한다. 그런데 직업이 의사인 경우에는 그 비율이 현저히 높아진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의사의 63.1%가 자택 임종을 원하고 10% 정도만이 병원이나요양기관을 원한다고 한다. 아마도 의사들이 병원 임종의 민낯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 국민의료보험이 확대된 1989년 이후 우리나라의 의료 접근성은세계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병원 문턱이 낮아지면서우리는 많은 의료 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이것이 병원 임종의 큰 원인 중하나로 꼽힌다. 낮은 수가로 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병원에서끝까지 치료받다가 돌아가시는 병원 임종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약 40년 전인 1983년에는 무려 85% 가까이가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요즘 상황과 비교하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놀라운 숫자다. - P26

사망자의 사인은 단순한 의학적 관찰기록을 넘어선다. 한 개인의 삶을 사회적으로 평가하고 고립시키는 낙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둘러싼 온갖 자의적인 해석과 억측을 낳기도 하고 때로는, 그 삶 전체를 아주 편협하게 오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죽음은 단지 죽음 그 자체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반드시 명확한 원인이 규명되어야 하며, 결국 ‘질병과 진단‘이라는의학의 영역으로 귀결된다. 한 인간의 종결로서 죽음은 생물학적 종말이라는 과학적·의학적 관점에서 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의사가 발급하는 사망진단서는 이러한 의학적 정의를 최종적으로 확증하는 가장 간결한 문서다. 사망진단서는 행정의 틀로 죽음을 유형화하고 그 원인을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듯하지만, 자살한 아버지의 소리 없는 외침과 남겨진 자의 고통은 단 한 줄도 담지 못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른다는 인과론적 사고방식을 아무리 대입해보아도 그 깊은 상처와 고통은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P38

병원 직원게시판에 자주 올라오는 공지글 중 하나가 부고(告)다. 직원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경우가 가장 흔하고 조부모상 공지도 간혹 올라온다. 평균 수명이 퍽 길어졌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다만 직원이 7,000명이 넘다 보니 거의 매일 부고가 올라오는데, 잘 아는 직원의 가족이 아닌 경우에는 그저 업무의 연장선쯤으로 여겨져 무감각해지기 일쑤다.
어디 회사 게시판만 그런가. 우리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타인의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차고 넘친다. 도로 위 번쩍이는 LED 전광판에 표시되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 TV 뉴스를 장식하는 전쟁 전사자 숫자,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사망자, 세월호, 이태원 희생자 명단 등. 이 죽음의숫자들은 모두 부고들이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부상자와 사망자 숫자는 당신도 저기에 합산되지 않도록, 혹은 타인을 합산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무언의 시그널이다. - P39

그 숫자 속에는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서사‘는 사라지고 오로지 숫자 1로 기억된다. 참혹한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폭탄에 맞아 처참하게 죽어간 이름 모를 병사의 죽음은 수만리떨어진 대한민국의 나에게 그저 숫자 1에 불과한 외신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너무나 길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뉴스의 부고는 수많은 정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정보는 나의 목적 달성을위한 취사선택에 필요하거나 유용한 차원으로 소비되는 도구의 성질을 지닌다. 그래서 이런 정보에 사람의 이야기가 머물 공간은 존재하지않는다. 정보는 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내가 감당할 수준을 벗어나면 축소되고 탈색되어 원래 있던 알맹이는 사라지고 빈 껍데기만 남는다. - P40

"참혹한 전쟁터에서 청년들이 죽어 나가지. 주인공 폴이 총에 맞아 숨을 거두던 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는 최고사령부의 공식 발표가 나온다네. 거기선 백 명 이상 죽으면 이상이 있지만,
한 사람이 죽으면 아무런 이상이 없어. 그런데 죽어간 폴의 어머니에게는 과연 서부 전선에 이상이 없었던 걸까?"


사실 백 명의 죽음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이 더해진 것이다. 역설적으로 단 한 사람 죽음의 무게는 백 명의 죽음이 지닌 무게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즉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예수가 "한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라고 말한 것도 한 생명의 가치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다는 의미다.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 사회일수록 죽음의 양을 나타내는 통계 속숫자는 죽음을 누구나 납득할 만한 보편적 기호로 재단해 관리하기 쉬운현상으로 바꿔버린다. 죽음이 통계 수치로 전환되고 나면 폴의 어머니가 겪은 고통은 물론 참혹한 대량학살의 비극마저 그저 언제나 일어날수 있는 일상의 사건으로 정리된다. 스탈린이 말했다고 알려진,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잘 대변한다. - P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