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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윤

서울대학교병원 조직은행 간호사이자 성균관대학교 철학과 겸임교수로 ‘철학하는 간호사다. 병원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조직은행 업무를 담당하고, 대학에서는 응용현상학을 가르친다.
서울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간호사로 근무했으며, 한때 CTS기독교TV 앵커와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간호사로 복귀, 인체조직을 기증받아 필요한 환자에게이식하는 전 과정을 관리하고 있다. 간호사로 일하며 성균관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자는 현장에서 수많은 삶과 죽음을 마주하며 인간 존재에 근원적인 질문을 품게 되었다. 그 질문은 철학적 탐구로 이어졌고, 이 책은 임상과 철학을 오가며 죽음을 사유한 기록이다. 연명의료와 돌봄, 임종처럼 죽음을 앞두고 만나는 사건은 물론, 고립사와 안락사 등 다양한 죽음의 모습까지 폭넓게 다룬다. 죽음을 둘러싼 현실을 의료인의 눈으로 세심하게 살피고, 철학자의 시선으로 그 의미를 다시 묻는다.
죽음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은 삶과 생명의 감각을 새롭게 깨우는 일이다. 저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결국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남겨 두지 않고, 지금의 삶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보도록 이끈다.

죽음은 낯설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의 죽음은 그 어떤 것보다 낯선 사건이다. 반면 타인의 죽음은 상투적으로느껴질 만큼 익숙하다.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죽음의 학자‘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이 차이를 생생하게 설명한다. "타인의 죽음은 동물원 철창에갇힌 호랑이를 보는 것과 같지만, 자신의 죽음은 그 호랑이가 철창 밖으로 나와 덤벼드는 것과 같다." 타인의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는 대개 관찰자의 자리에 선다. 죽음의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아직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두꺼운 쇠창살 안의 호랑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러나 죽음이 나에게 직접 찾아오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쇠창살을 뚫고 나온 호랑이가 덮쳐드는 극심한 공포와 혼란을 경험하는 것이다. - P5

여행자는 낯선 곳으로 향한다. 낯선 곳에서는 익숙했던 하늘과 바람,
땅의 감촉마저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 낯섦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낯섦은 굳어버린 삶을 다시움직이게 하는 윤활유와 같다. 죽음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말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아무 감각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익숙한 명제 앞에서 잠시 멈춰 서면, 죽음은 먼관념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 찾아올 현실로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익숙한 삶에 머무는 일이안전하고 편하다. 그러나 낯선 곳으로 떠날 때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 - P8

듯, 죽음을 새롭게 보려면 마음의 절전모드를 해제해야 한다. 익숙한 생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죽음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물어야 한다. ‘죽음 낯설게 보기‘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작은 모험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죽음을 둘러싼 제도와 문화,
오래된 습관까지 새롭게 보게 된다. 너무 익숙해서 지나쳤던 것들이 낯선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나 역시 죽음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병원과 조직은행에서 일하며 죽음 가까이에 있었고, 그 곁에서 삶을 다시 생각해 보는 작은 깨달음들을 얻었다. 이 책은 그 기억과 질문을 따라, 죽음이라는 낯선사건에 한 걸음 다가가보려는 시도이다.
우리의 삶은 늘 죽음과 동행한다. 생명의 이면에 마치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죽음은 늘 밀물처럼 질문을 던지고 썰물처럼 물러난다. 파도가포말로 부서져 사라질지라도 늘 다시 다가오듯, 죽음이 던져오는 끝없는 질문에 언제나 낯선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생명처럼 아름답다. - P9

서두에 밝힌 것처럼 우리나라 노인의 38%는 집에서 죽기 원한다. 그런데 직업이 의사인 경우에는 그 비율이 현저히 높아진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의사의 63.1%가 자택 임종을 원하고 10% 정도만이 병원이나요양기관을 원한다고 한다. 아마도 의사들이 병원 임종의 민낯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 국민의료보험이 확대된 1989년 이후 우리나라의 의료 접근성은세계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병원 문턱이 낮아지면서우리는 많은 의료 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이것이 병원 임종의 큰 원인 중하나로 꼽힌다. 낮은 수가로 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병원에서끝까지 치료받다가 돌아가시는 병원 임종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약 40년 전인 1983년에는 무려 85% 가까이가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요즘 상황과 비교하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놀라운 숫자다. - P26

사망자의 사인은 단순한 의학적 관찰기록을 넘어선다. 한 개인의 삶을 사회적으로 평가하고 고립시키는 낙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둘러싼 온갖 자의적인 해석과 억측을 낳기도 하고 때로는, 그 삶 전체를 아주 편협하게 오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죽음은 단지 죽음 그 자체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반드시 명확한 원인이 규명되어야 하며, 결국 ‘질병과 진단‘이라는의학의 영역으로 귀결된다. 한 인간의 종결로서 죽음은 생물학적 종말이라는 과학적·의학적 관점에서 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의사가 발급하는 사망진단서는 이러한 의학적 정의를 최종적으로 확증하는 가장 간결한 문서다. 사망진단서는 행정의 틀로 죽음을 유형화하고 그 원인을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듯하지만, 자살한 아버지의 소리 없는 외침과 남겨진 자의 고통은 단 한 줄도 담지 못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른다는 인과론적 사고방식을 아무리 대입해보아도 그 깊은 상처와 고통은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P38

병원 직원게시판에 자주 올라오는 공지글 중 하나가 부고(告)다. 직원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경우가 가장 흔하고 조부모상 공지도 간혹 올라온다. 평균 수명이 퍽 길어졌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다만 직원이 7,000명이 넘다 보니 거의 매일 부고가 올라오는데, 잘 아는 직원의 가족이 아닌 경우에는 그저 업무의 연장선쯤으로 여겨져 무감각해지기 일쑤다.
어디 회사 게시판만 그런가. 우리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타인의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차고 넘친다. 도로 위 번쩍이는 LED 전광판에 표시되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 TV 뉴스를 장식하는 전쟁 전사자 숫자,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사망자, 세월호, 이태원 희생자 명단 등. 이 죽음의숫자들은 모두 부고들이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부상자와 사망자 숫자는 당신도 저기에 합산되지 않도록, 혹은 타인을 합산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무언의 시그널이다. - P39

그 숫자 속에는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서사‘는 사라지고 오로지 숫자 1로 기억된다. 참혹한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폭탄에 맞아 처참하게 죽어간 이름 모를 병사의 죽음은 수만리떨어진 대한민국의 나에게 그저 숫자 1에 불과한 외신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너무나 길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뉴스의 부고는 수많은 정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정보는 나의 목적 달성을위한 취사선택에 필요하거나 유용한 차원으로 소비되는 도구의 성질을 지닌다. 그래서 이런 정보에 사람의 이야기가 머물 공간은 존재하지않는다. 정보는 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내가 감당할 수준을 벗어나면 축소되고 탈색되어 원래 있던 알맹이는 사라지고 빈 껍데기만 남는다. - P40

"참혹한 전쟁터에서 청년들이 죽어 나가지. 주인공 폴이 총에 맞아 숨을 거두던 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는 최고사령부의 공식 발표가 나온다네. 거기선 백 명 이상 죽으면 이상이 있지만,
한 사람이 죽으면 아무런 이상이 없어. 그런데 죽어간 폴의 어머니에게는 과연 서부 전선에 이상이 없었던 걸까?"


사실 백 명의 죽음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이 더해진 것이다. 역설적으로 단 한 사람 죽음의 무게는 백 명의 죽음이 지닌 무게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즉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예수가 "한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라고 말한 것도 한 생명의 가치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다는 의미다.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 사회일수록 죽음의 양을 나타내는 통계 속숫자는 죽음을 누구나 납득할 만한 보편적 기호로 재단해 관리하기 쉬운현상으로 바꿔버린다. 죽음이 통계 수치로 전환되고 나면 폴의 어머니가 겪은 고통은 물론 참혹한 대량학살의 비극마저 그저 언제나 일어날수 있는 일상의 사건으로 정리된다. 스탈린이 말했다고 알려진,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잘 대변한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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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세트 - 전2권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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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첫 시선집, 독자들에게 새롭게 인사드린다
그동안 내 시집들을 읽어주신 분께
작은 의미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자신으로 말하자면 조현병이라는
절망스런 상황이 수십 년 이어졌었고
그러나 이제는 천주교에 귀의하여
환한 길을 걷고 있는 나로서도 이 시선집은
어떤 획을 긋는다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봄은 봄이지만 늘 맞던 봄이 아니라
처음으로 맞는 봄 같다

2026년 봄
최승자

일찍이 나는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개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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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김태정

​

​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무슨 유명한 다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초의선사의 다도를 본뜬 것도 아닌

​

  이른 봄 우이동 산기슭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래바람에 휘날리던 꽃잎 한 주먹 주워

  아무렇게나 말려 만든 그 청매화차

​

  한 사나흘 초봄 몸살을 앓다 일어나

  오늘은 그 청매화차를 마셔보기로 한다

  포슬포슬 멋대로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을까

  첫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막 끓여온 물 속에서 화르르 펴지는 꽃잎들

  갈라지고 터진 입안 가득

  오래 삭혀 말간 피 같은 향기 고여온다

​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

  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

  꽃잎 한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

  은근하게도 씁쓸한 맛

  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

  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

​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중에서

​

​

​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이 구절은 입안에 오래 남아있는 향기처럼 마음에 남는다. 매번 읽을 때마다 그렇고 가끔 나와 어울리지 않을 어떤 장소에서도 문득 떠오른다. '청매화차라니'는 가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 체념과 포기의 상징 같은 것이다. 감정이입을 쉽게 하는 나는 시인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에서 무너진다. 마흔의 나를 다시 만나는 것 같다. 시인의 생애는 '향기를 피워올리는' 거기 멈춰있고 (벌써 11주기가 지나간다.) 나는 여전한 진행형이지만 진행형일 뿐 '쓰디쓴 맛'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가을이면 단풍을 만나듯 시집을 만나본다. 시를 음미하듯 몇 편 읽고 나면 마음이 수굿해진다. 가난한 저녁도 힘이 된다.

  지난 주말은 웨딩홀 뷔페에서 접시 빼는 알바를 했다. '웨딩홀'이나 '뷔페'는 손가락도 남을 만큼의 내 일상에서 '청매화차라니' 같은 장소이고 어리버리한 신입 알바에게는 뒤섞인 음식 냄새만으로도 허기를 채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은 다르다.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 화려한 음식들과 떠들썩한 '뷔페'의 구석에서 고개를 묻고 허기를 달래는 많은 종사원들 사이에 끼여 덜 불은 컵라면에 식은 김밥을 먹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의 삶을 살아갈 때 '달콤하고 은은한' 세상은 구현되는 것이다. 모두 같을 필요는 없다. '다름'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




  두 아이가 있다.

  첫아이는 '캄보디아, 푸옥'의 아이였는데 이사를 가면서 헤어졌다.

  두 번째 아이는 '말리, 사모리'의 아이였는데 올해 성년이 되어서 자립하게 되었다. 셋째는 '에티오피아, 하브로'의 아이와 만나게 되었고 이제 네 번째 아이의 사진을 어제 받았다. 어떤 아이가 올까 궁금했는데 '말리, 베마'의 이제 5살이 된 아이다. 사진을 보내려고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여러 사람 앞에서 사진을 찍혔을 아이는 멀뚱한 날 것의 표정이다. 반갑고도 고맙다.

  후원자라고 하기에는 성의 없고 게으른 편이다. 1년에 한 번 선물을 보낼 뿐이고 편지는 아예 쓰지 않는다. 처음 두 아이 모두 헤어지게 되면서 겨우 한 통씩 보냈다. 아이들이나 사업장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성향적으로 뭔가 요란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돈 몇 푼으로 대단한 걸 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편지'는 중학교 때인가 취미로 '편지 쓰기'를 적어 넣었을 정도로 편지 쓰기를 좋아한다. 이 정도나마 글을 쓰게 된 것도 무수한 편지 쓰기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편지'를 안 쓴다. 그 아이가 내게 고맙다는 것을 강제하기 싫다. '편지'를 쓰다 보면 서로 그런 뻔한 내용들이 오고 갈 것이 두렵다. '사랑'을 가장한 '애착'도 두렵기에 적당한 거리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편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편지'는 작별 용이다.

  돌아보면 나에게도 '후원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많이 배웠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배움'이 간절하기도 했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환상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키다리 아저씨'는 부재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후원을 시작했다. 세상 어딘가의 한 아이를 위해서.

  내 마음은 그것이 전부인데 아이들이 주는 뿌듯함은 의외에서 발견된다. 가령 '청매화차라니'의 순간들마다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때가 그렇고, 적어도 세상에 와서 그럴듯한 일 한 가지는 하고 가는구나 싶은 안도감을 가질 때가 그러하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조금 다른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린 것이 아니다.

  월드비전에서는 후원금의 절반은 지역에 쓴다 한다. 지역이 같이 좋아지는 것은 아이의 환경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방식이 좋아서 '월드비전'을 선택했다. 종교적인 것은 관심 없다. 한 아이에게 3만 원씩, 다른 단체인 유니세프에도 보내니 한 달에 십만 원. 사실 최저시급의 내 급여로는 버거운 금액이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알바 하루면 해결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몸을 움직여 일을 할 때까지는 계속 해갈 작정이다. 십만 원으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뿌듯함은 '책 구매'와 함께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청매화차라니'를 잊지 않고. '김태정'시인도 고개를 끄덕여주실 것이다.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무슨 유명한 다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초의선사의 다도를 본뜬 것도 아닌

이른 봄 우이동 산기슭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래바람에 휘날리던 꽃잎 한 주먹 주워
아무렇게나 말려 만든 그 청매화차

한 사나흘 초봄 몸살을 앓다 일어나
오늘은 그 청매화차를 마셔보기로 한다
포슬포슬 멋대로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을까
첫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막 끓여온 물 속에서 화르르 펴지는 꽃잎들
갈라지고 터진 입안 가득

오래 삭혀 말간 피 같은 향기 고여온다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
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
꽃잎 한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
은근하게도 씁쓸한 맛
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
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겨울산>부분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개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소금 한 주먹 더 뿌릴까 망설이다가/ 그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제 스스로 제 성깔 잠 재울 때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것의 자존심을/ 한입 베물어본다 <배추 절이기>부분

저녁상 물리고/ 설거지도 말끔히 끝낸/ 배부른 아홉시에는/ 슬금슬금 졸음 오는 아홉시에는/ 아직 잠들기엔 이른 아홉시에는/​마감이 코앞인 시나 한편/심심한 시나 한편 써야겠다//​ 언젠가 보았던 공장 담벼락 공고판/ ‘실밥 따는 아줌마 구함/ 1EA당 50냥/ 꼬마 시다 환영‘을 낙서처럼 끄적이면서/ 아직도 그 고단한 노임이/ 1EA당 50냥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꼬마 시다 환영이라는 속보이는 문구도/ 아랍을 겨냥한 미국적 속내를 닮았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배부른 아홉시에는/ 1EA당 50냥의 노동도/실밥 따는 아줌마도 꼬마 시다도/ 아프간이나 팔레스타인만큼 먼/ 강 건너 불빛 배부른 아홉시에는,​ <배부른 아홉시에는>부분

이것도 보릿고개 덕이라면 덕이겠다/ 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 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인가 <궁핍이 나로 하여>​부분

​

부업이나마 한 일년/ 가윗밥을 넣고 아이롱을 달구어도/ 밥의 내력을 모른다는 시인/ 밤새 꾸벅이며 실밥이나 따고 있어라/ 하루종일 뺑이치는 미싱 소리에/ 서투른 가위질이나 하고 있어라// 그래도 모른다면/ 해가 지고 해가 떠도/ 기계가 멈추고 기계​가 돌아도/ 끝내 모른다면// 요 시인, 철 없는 시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만/ 생업과 부업의 차이/ 다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기계가 멈추고 기계가 돌아도/ 끝내 변하지 않는 사실/ 엄지와 검지의 굳은살로 밥이 된다는 것만 알아라/ 그것만 알고 있어라 <부업>부분

오늘은 조카가 선물해준 샤프로 시를 써보기로 한다/ 굵고 뭉툭한 연필심에 비하면/ 이 가늘고 날카로운 0.5밀리 샤프심은/ 가볍고 세련된 샤프의 자존심을 증거한다/ 아무리 정교한 세밀화라 해도/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샤프심은/ 가끔 내 삶의 미세한 신경회로를 건들이지만/ 그 정도 사소한 경박성쯤은/ 애교로 봐줄 아량도 과시하면서// 뒤꼭지만 눌러주면 무한정 심이 나오는/ 그의 놀라운 생산력은/ 몽당연필도 아쉬웠던 나의 어린 시절을 조롱하는 듯도 하지만/ 샤프로 시를 쓰는 오늘만큼/ 내 손아귀에서 내 어깨에서 내 삶에서/ 짐짓 무게를 덜어내고자 한다/ 그러므로 손끝의 힘을 빼고/ 빙판 위를 미끄러져 나가는 쇼트트랙 선수처럼/ 가볍게 여유롭게 어디 한번 중력을 탈주해보자/ 생계만큼 무거운 원고지의 중량을 통과해보자/ 그러나......// 처음으로 샤프를 쥔 손은 불안하고 또 불온하다/ 글자와 글자 사이를 곡예하듯 아슬아슬하다/ 너무 힘을 줘도 너무 힘을 빼도 안되는/ 그 적당히

세상의 불빛 한점


세상에 보태줄 것 없어
마음만 숨가쁘던 그대 언덕길
기름때 먼지 속에서도
봉숭아는 이쁘게만 피었더랬습니다
우리 너무 젊어 차라리 어리숙하던 시절
괜시레 발그레 귓불 붉히며
돌멩이나 툭툭 차보기도 하고
공장 앞 전봇대 뒤에 숨어서
땀에 전 작업복의 그대를
말없이 바라보기나 할 뿐
긴긴 여름해도 저물어
늦은 땟거리 사들고 허위허위
비탈길 올라가는 아줌마들을 지나
공사장 옆 건널목으로 이어지던 기다림 끝엔
언제나 그대가 있었습니다

먼 데 손수레 덜덜 구르는 소리
막 잔업 들어간 길갓집 미싱 소리
한나절 땀으로 얼룩진 소리들과 더불어
숨가쁜 비탈길 올라가던 그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허방을 짚는 손에
야트막한 지붕들은 덩달아 기우뚱거렸댔습니다​
​그대 이 언덕길 다할 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휘청거리지 말기를
마음은 저물도록 발길만 흩뜨리고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

가을 드들강


울어매 생전의 소원처럼 새가 되었을까
새라도 깨끗한 물가에 사는 물새가

물새가 울음을 떨어뜨리며 날아가자
바람 불고 강물에 잔주름 진다
슬픔은 한 빛으로 날아오르는 거
그래, 가끔은 강물도 흔들리는 어깨를
보일 때가 있지
오늘같이 춥고 떨리는 저녁이면
딸꾹질을 하듯 꾹꾹 슬픔을 씹어 삼키는,
울음은 속울음이어야 하지 울어매처럼
저 홀로 듣는 저의 울음소린
바흐의 무반주첼로곡만큼 낮고 고독한 거
아니아니 뒤란에서 저 홀로 익어가는
간장맨치로 된장맨치로 톱톱하니
은근하니 맛깔스러운 거
강 건너 들판에서 매포한 연기 건너온다

이맘때쯤 눈물은
뜨락에 널어놓은 태양초처럼
매움하니 알큰하니 빠알가니
한세상 슬픔의 속내, 도란도란 익어가는데
강은 얼마나 많은 울음소릴 감추고 있는지
저 춥고 떨리는 물무늬 다 헤아릴 길 없는데
출렁이는 어깨 다독여주듯
두터워지는 산그늘이나 한자락
기일게 끌어당겨 덮어주고는
나도 그만 강 건너 불빛 속으로 돌아가야 할까부다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호마이카상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닮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동백꽃 피는 해우소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 네루다 시집 속엔/ 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 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다만 먼지 때문에// 바람이 꽃가루를 날려보내듯/ 먼지가 울컥, 눈물을 불러 일으켰나 <눈물의 배후>부분

미황사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봄산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었듯 봄산에서 한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진달래 향기에 깊이 취했던 것도 아닌데 등산객들의 발자국 어지러운 샛길, 길이 너무 많아 차라리 길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걸까요 길 안팎에서 한나절을 헤매었습니다 바람 속 무성한 시누대 숲은 좀처럼 길을 열어주지 않고 해묵은 낙엽들은 밑에서 아프게 바스라지는데

손바닥에 잔금이 이리도 많은 걸 보니 너도 잔근심이 많겠구나, 겨울 실가지처럼 무수한 손금에서 삶의 비밀을 뒤적이듯 봄산 난마처럼 얽혀 있는 샛길에서 길을 찾듯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었습니다 곧을 태 곧을 정, 까짓거 대나무처럼만 살면 될 거 아닌가 뜻도 모르는 채 내 이름 석자에 온 생을 맡겼습니다 곧고 곧아라 삶도 사랑도, 내 이름대로만 살면 될 거 아닌가 겁도 없이

봄도 아직 이른 봄이라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에 진달래 낯빛 핏기 없이 질려 있는데 시누대는 제 울음만큼 한매듭씩 자라나는데 내 몸이 내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여 나는 자주 휘청거리곤 했지요 대나무붙이들아 늬들도 과분하게 주어진 이름들이 부끄러워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거니?

손바닥의 잔금만큼 사소한 근심들이 거미줄 치던 세월, 시누대 그 고통의 생장점이 스스로 바람을 불러일으키듯 슬픔이 나를 팽창시켰고 나는 어느덧 손금 위에서 서성이지 않아도 좋을 나이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듯 봄산에서 한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길을 찾아헤매는 내 발자국이 길 위에 길을 보태었다는 걸, 산을 내려온 뒤에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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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자

마취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 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번호가
45 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좌석번호가
11b 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리는 순리를 기억할 것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 P16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 P17

사람의 금

많은 청귤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고 몇 바늘을 꿰맸다
나는 평생 살을 꿰매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극단적으로 금이 갔다

한동안 붕대를 감고 사느라 시원하게 씻지를 못하고
손가락 형편이 나아져 목욕탕에 갔는데
죄다 보이는 건 사람 몸에 난 흉터다

꿰맨 자리
어긋난 부위
몸 한쪽이 움푹 패여 젓ㄴ룩일 수밖에 없는 걸음걸이
그나마 무사한 사람은 그동안의 나였나 싶다

그러다 하반신에 의료용 테이프를 붙이고
목욕하러 들어서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목욕의자에 앉아 떼어내는 테이프 길이만도족히 사 미터가 되는 길 걷눈질해서 보았다

태풍에 담이 허물어지면 남의 집 담만 보이고술에 되게 당한 어느 날 이후에는
술에 취해 집에 앉아 정신 놓은 사람만 보인다
자석 앞의 쇳가루처럼 당겨진다 - P46

퀘맨 손가락이 낫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매달리며 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봉합으로 살을 이으려는 것이
쩍 하고 금이 가 벌어진 사람과 사람의 처지를
이어보려는 안간힘하고 뭐가 다르겠나 싶은 것이다

붙지 않는 것들을 참 착실하게도 가려놓고 살고 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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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문을 나서며 
wyiscie z kina


새하얀 화폭 위로 깜빡이며 명멸하는 꿈
달에서 떨어져나온 파편과도 같은 두 시간.
그리운 멜로디에 실린 옛사랑이 있고,
머나먼 방랑으로부터의 행복한 귀환이 있다.

동화가 끝난 세상에는 검푸른 멍과 희뿌연 안개.
숙련되지 않은 어설픈 표정과 배역들만 난무할 뿐.
군인은 레지스탕스의 비애를 노래하고,
소녀는 고달픈 삶의 애환을 연주한다.

나, 그대들에게 돌아가련다, 현실의 세계로,
어둡고, 다사다난한 운명의 소용돌이로문간에서 서성이는 외팔이 소년과
공허한 눈빛의 소녀가 있는 그곳으로



‘정희진‘의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를 읽다가 갑자가 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가 읽고 싶어졌다. [극장 문을 나서며] 때문이었던가 보다. 극장? 사라져가고 있는 단어라는 생각에 시 보다는 ‘극장‘에 꽂혔던.
시장에 가야하는데, 할 일이 산더미인데, 생각과 달리 몸뚱이는 [끝과 시작]을 펄럭거리고 앉아 있다. 이 짓도 나쁘지는 않네.

시는. . .
가까운, 어렵지 않은,
매일 매일의 일상이다.
요즘 내 생각과 같은 [나에게 던진 질문],
깊은 눈의 시인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듯.





나에게 던진 질문
 Pytania zadawane sobie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벗이 저지른 과오 중에
나로 인한 잘못은 없는 걸까?
함께 탄식하고,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어떤 사람들은 시를좋아한다 
Nicktórzy lubia poche


어떤 사람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전부가 아닌
전체 중에 다수가 아니라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일부를 뜻함.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과
시인 자신들을 제외하고 나면
아마 천명 가운데 두 명 정도에 불과할 듯.

좋아한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말은 신중히 해석할 필요가 있음.
치킨 수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럴듯한 칭찬의 말이나 푸른색을 유달리 선호하는 이들도 있으므로,
낡은 목도리에 애착을 갖기도 하고,
뭐든 제멋대로 하기를 즐기거나,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으므로,

시를 좋아한다는 것一
여기서 ‘시‘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불확실한 대답들은이미 나왔다.

몰라, 정말 모르겠다.
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 꽉 부여잡고 있을 뿐.

끝과 시작
 Konice poczatek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 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대들보를 운반하고,
창에 유리를 끼우고,
경험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열심히 끄덕인다.
어느 틈에 주변에는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아직도 누군가는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이삭을 입에 문 채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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