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치를 갈아엎을 수 있다면‘
‘권력을 지킬 수만 있다면‘

분노와 오판이 부른
민주주의위기를 되짚으며

국민은 ㅡ 어쩌다 나치를 택했고,
우파 정치인은 ㅡ 왜 히틀러와 손잡았고,
시대는 ㅡ 어떻게 민주주의의 죽음을 맞이했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 번지는 오늘날
그 오래된 물음에 새롭게 답하다




베를린의 쌀쌀한 겨울 저녁 9시가 조금 지나자 무슨 일이 벌어질 조짐이보이기 시작한다. 신학생 한스 플뢰터는 운터 덴 린덴의 주립도서관에서저녁 공부를 끝낸 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국회의사당 앞 광장을 지나가니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플뢰터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순찰하는 경찰관 카를 부베르트에게 알린다. 그렇게 시민의 의무를다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
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 Volkischer Beobachter, 국민의 감시자》의 식자공 베르너 탈러 역시 부베르트에게 다가간다. 두 사람은 국회의사당에 가까이다가가 1층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다가 내부에서 누군가 손전등을 들고있는 모습을 어렴풋이 본다. 부베르트는 손전등 불빛을 향해 권총을 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 P23

심상치 않은 소식이 속속 들려온다. 검은 코트를 입고 군화같은 부츠를신은 청년이 9시 15분에 브란덴부르크 문경찰서에 나타나 국회의사당에불이 났다고 알린다. 경찰은 시간과 내용을 조심스럽게 기록한다. 다만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깜빡 잊고 그 청년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그가 누구인지는 오늘날까지도 수수께끼다. 몇분 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의 둥근 유리 지붕 너머로 타오르는 불길이 뚜렷하게 보인다. 9시 27분, 본회의장이 폭발한다. 소방관과 경찰은 국회의사당 심장부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화재와 맞닥뜨린다. - P23

그보다 2분 전, 경찰은 불타는 본회의장 근처 복도에 숨은 수상한 청년을 체포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청년은 네덜란드 레이던 출신의 24세 석공 마리뉘스 판데르 뤼버Marinus van der Lubbe다. 웃통을 벗은 채 땀을 뻘뻘흘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방화범이라고 선뜻 자백한다. 아무도 그가혼자 방화를 저지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소방대원들은 건물 주위의 소화전뿐 아니라 근처 강에서도 물을 끌어와 불을 끄려고 서두른다. 불타는 건물을 둘러싸고 소방 호스의 물을 뿜는다. 소방 호스를 제대로 사용한 덕에 75분 만에 불을 끈다. 부동불이 아직 번지고 있을 때, 독일 정치지도자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속속 도착한다. 맨 먼저, 나치 당원으로 프로이센주의 내무부 장관인 헤르만 괴링 Hermann Göring이 온다. 몇 분 후 총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돌프 히틀러와 최고의 선전 전문가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 가 검은색 메르세데스 리무진에서 내린다. 세련되고 귀족적인 부총리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 도 도착한다. 늘 그렇듯 깔끔한 차림으로, 침착한 모습이다. - P24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인 32세의 잘생긴 루돌프 딜스Rudolf Diels는 운터 데린덴의 우아한 카페 크란츨러에서 데이트하다(훗날 딜스는 "가장 경찰답지않은 만남"‘이었다고 표현한다) 소식을 듣는다. 딜스는 가까스로 제시간에 도착해 히틀러가 길게 늘어놓는 열변을 들었다고 한다. sersele히틀러는 누가 불을 질렀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발코니에 서서 불타는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는 히틀러의 얼굴을 타오르는 불빛이 조명처럼 비춘다. 히틀러는 "이제 자비란 없다...… 공산당 임원을 보는 대로 쏴죽이자. 공산당 의원들을 바로 오늘 밤에 교수형으로 처단해야 한다!"라고 분노에 차서 말한다.
괴링은 히틀러의 바람을 담은 공식 보도자료를 곧장 내놓는다. 괴링은 - P24

국회의사당이 얼마나 심하게 피해를 봤는지 설명한 후 그 화재를 "이제까지 독일에서 벌어진 가장 무시무시한 볼셰비키 테러"이자 "피비린내나는 폭동과 내란의 시작을 알리는 표시"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공식 보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도 동시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시작한다. 자정도 되기 전 《비너 알게마이네 차이퉁 Wiener Allgemeine Zeitung,
빈 신문>의 베를린 특파원이자 오스트리아인 기자인 빌리 프리샤우어 WilliFrischauer가 신문사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보로 보낸다. "히틀러 내각에게서 청부받은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리사우어는 아마도 이 ‘청부업자들‘이 국회의장 관저와 국회의사당을 연결하는 지하도를 통해 국회의사당에 침입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회의장은 헤르만 괴링이다.  - P25

기자들은 범행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정부는 사람들을 체포한다. 소방관들이 화재와 싸우는 동안에 별개의 두 집단이 진행하는 체포가 이미 시작된다. 명단을 공들여 준비한 베를린 경찰은 공산주의자, 평화주의자, 성직자, 변호사, 예술가, 작가 등 나치에 적대적일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구든 체포하기 시작한다. 경찰은 용의자들을 알렉산더 광장의 경찰 본부로 불러들여 경찰 조서에 이름을 올린다. 모든 과정이 정당하고 공식적이다.
동시에 베를린의 나치 돌격대원들도 자체적으로 체포 작전을 벌인다.
돌격대원들도 명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체포자들을 공식적으로 기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체포자를 버려진 지하실, 창고, 심지어 급수탑에까지 데려가서 갖가지 방법으로 때리고 고문한다. 죽이는 경우도 많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를린 사람들은 그 장소들을 "야만적인 강제수용소"라고 부른다. - P25

1933년 2월 27일 월요일이다. 그날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밤, 독일 민주주의의 마지막 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국회의사당이 불탄 시기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임명된 지 정확히 4주가 지난 때였다. 히틀러는 헌법상 합법적으로, 심지어 민주적인 방식으로 총리가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는 1932년 두 차례 선거에서 표를가장 많이 얻고 국회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하면서 독일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1933년 1월 말, 육군원수 출신 대통령으로 신망이 높던85세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 Paul von Hindenburg가 마지못해, 하지만 적절한방식으로 히틀러에게 총리를 맡아 내각을 구성하라고 요청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국방부, 외교부 등 핵심 부처 장관을 자신이 지명하겠다고했다. 1932년에 잠시 총리를 지낸 프란츠 폰파펜이 히틀러 밑에서 부총리를 맡는다는 조건 역시 거래의 일부였다. 독실한 루터교도인 힌덴부르크는 가톨릭 신자인 파펜을 종교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어쨌든파펜의 후견인이었다. - P26

노련한 사람들의 눈에도 1월 30일 취임한 히틀러 총리의 정치적 위상은미약해 보였다. 미약하도록 ‘계획된‘ 자리였다. 히틀러 이전 세 명의 총리가 그랬듯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핵심 측근 몇몇이 히틀러를 총리 자리에 앉혔다. 측근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히틀러의 선동가적인 재능과 추종자들을 이용하려고 했다. 간판 역할을 할 히틀러 같은 인물이 없으면 자신들 그리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는 선거에서 극소수의지지밖에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측근들은 히틀러를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을까? 그들은 파펜 부총리와 힌덴부르크 대통령 같이 지도자 교육을 받은 귀족이자 지휘 경험이 풍부한 육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반면 히틀러는 보잘것없는 오스트리아 세관원의 이름 없는 아들이었고,
정식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모국어인 독일어로 말할 때조차 문법을실수했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서부전선에서 4년 동안 거의 끊임없이복무했지만, 일병Gefreiter 이상으로 계급이 올라간 적이 없었다.  - P27

이는 독일 정치계 전체의 관점과 놀랄 만큼 똑같았다. 펜은 히틀러에대해 "우리가 그를 고용"했다며, "몇 달 안에 우리가 그를 궁지로 몰아넣어 삐걱거리게 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기록했다. 당시 무소속이던 민족주의자 정치인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Gottfried Treviranus 는 자신이 아는모든 사람이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군대, 헌법에 짓눌려 기진맥진할 것"
이라고 예상했다고 몇 년 후에 기록했다. 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Vorwarts, 전진》의 편집장 프리드리히 슈탐퍼Friedrich Stampfer는 외국 특파원에게 "으르렁거리는 이 고릴라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습니까"라고 물으면서 히틀러 내각은 3주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덧붙였다. 막스 퓌르스트Max Furst라는 이름의 젊은 목수이자 가구 제작자(그의 정치 성향은 극좌였다. 또한 그의 룸메이트인 급진 사회주의자 변호사 한스리텐은 2년 전 베를린 법정에서 히틀러를 반대신문해서 유명해졌다)는 "아마 파펜내각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겠지"라고 생각했다.  - P28

그러나 히틀러는 총리가 된 첫 몇 주부터 파펜 내각보다 더 큰 우려를안겼다. 폭력 사태가 더 많아졌는데, 새 내각이 경찰력으로 집단 모집한나치 돌격대원들이 벌인 게 적지 않았다. 야당 신문은 문을 닫고, 정치 행사는 폐지되었다. 나치 외 정치집단은 조금이라도 정치 활동을 하는 게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렇다 해도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바꾼 건 국회의사당 화재였다.
히틀러 내각은 화재 다음 날 오전 11시에 모였다. 독일 내무부 장관 프리크는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이라는 비공식명으로 계속 불린, ‘국민과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이란 문서를 내밀었다. 국회의사 - P29

당 화재가 곧 공산주의자 폭동의 시작 징조라는 히틀러의 주장을 그대로담은 법령이었다. 국가를 지키려면 비상대권국가의 위급 상황에서 대통령이 특별한 비상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했다. 이 법령으로 독일 헌법이 보장한시민의 자유는 정지됐다. 정권이 정치적으로 위협이 된다고 여기면 누구든 재판 없이 합법적으로 가두고, 언론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사실상 없애고, 우편과 전보를 함부로 뜯어보고 아무 때나 무단 수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연방의 어떤 주정부는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다시 세우는 데필요한 조처를 하지 않으면" 독일 정부가 대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각은 법안에 찬성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그날 늦게 서명하면서 법령이 효력을 얻었다  - P30

유명한 법학자 에른스트 프렝켈Ernst Fraenkel의 표현대로 국회의사당화재 법령은 히틀러 제국의 ‘헌장‘이었다. 모든 체포와 강제 추방, 강제수용소, 악명 높은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법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법령때문에 나치가 독일의 연방제를 폐지하고, 연방의 모든 주를 지배할 수있었다. 국회의사당 화재와 그 법령은 1933년에 독일에서 산 대부분 사람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경험이 풍부한 베를린 기자인 발터 키아울렌Walter Kianulcho 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신이 태어난 베를린에 관해애달픈 마음을 담아 쓴 책에서 "처음에는 국회의사당과 책들이 불타고,
곧이어 유대교 회당이 불탔다. 그다음 독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가 불타기 시작했다..."라는 말로 결론을 내렸다. - P30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어떻게 히틀러와 나치가 자라났는지를 생각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게 괴로울 수도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분명 인류 문명에서 한 정점을 보여줬다.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은 최첨단의 현대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비례대표제 선거제, 그리고 남녀평등을 포함해 인권과 자유를 보호하는 조항을 빈틈없이 갖춘 헌법이었다. 사회·정치운동가들은 훨씬 더 많은 요구를 하면서 투쟁해 상당히많이 얻어냈다. 독일은 동성애자의 권리 운동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벌어지는 곳이었다. 또한 급진 페미니즘 운동의 본고장이었다. 여성들은투표권을 얻은 후 낙태의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했다. 사형제 반대 운동도 아주 성공적으로 펼쳐져서, 실질적으로는 사형제가 폐지되었다. 근로자들은 하루에 8시간만 일하면서 임금을 모두 받는 권리를 공화국 초기에 얻어냈다. 독일의 관용과 개방성에 이끌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이 계속 이주해 왔다. - P31

당시 독일은 정치와 사회운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도 세계를 이끌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부터 "내게 그림을 그리겠다는 아들이 있으면 파리가 아니라 뮌헨으로 보내 교육할 것"이라고친구에게 말했다. 독일 표현주의와 신사실주의 화가들(에른스트 루트비히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에밀 놀데 Emil Nolde,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오토 딕스 Otto Dix)은 당대에서 가장 흥미롭고 논란거리가 되는 작품을 창작하고 있었다. 바우하우스 학교에서 공부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음악에 관해서라면 뛰어난 오케스트 - P31

라, 합주단과 독주자들이 독일처럼 많은 나라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와 파울 힌데미트 Paul Hindemith의 어려운 고전음악 작품이든,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와 쿠르트 바일 KurtWell이 협력해 만든 흥미진진하고 현대적인 음악극이든, 독일인들이 예술의 새 미래를 열어가고 있었다. 영화는 어땠을까? 베를린은 제2의 할리우드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프리츠 랑Frite Lang, 게오르그 빌헬름 파스트G.W. Pabst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F. W. Murnau 같은 감독들은 미국보다 예술 수준이 높은 작품을 내놓았다. 알프레트 되블린 Alfred Döblin,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생애 후반기에 독일에서 살았다)와 토마스만ThomasMann,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형제 같은 작가들을 보면 문학에서도 독일이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32

과학과 학문으로 쌓은 명성은 따라갈 만한 나라가 없었다. 1920년대에는 독일에서 쓴 논문이 세계 물리학 학술지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베를린대학의 교수였고, 그의 친구인 노벨상 수상 화학자 프리츠 하버 Frite Haber 가 베를린 달렘 근교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 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다. 독일이 화학과 제약 같은 산업에서 세계를 이끌고, 미국 자동차와 양이 아니라 질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이유는 아마도 독일의 과학과 대학의 수준이 탁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독일은 오랫동안 ‘시인과 사상가의 고장‘이라고 자부했는데, 1920년대에는 그 자부심이 더욱 치솟는 듯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토록앞서가고, 창의적이고, 엄청나게 현대적인 민주주의에서 인류 역사상 윤리적으로 가장 사악한 정권이 자라났다. 히틀러 제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창조성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파괴했다. 그때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 P32

도 아쉬워하는 독일인이 많다. 출판인볼프 옵스트지들러Wolf Jobst Siedler는 2000년에 "우물쭈물한 독일인은 더 이상 유럽을 위협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의 마음도 사로잡지 못한다" 14 라고 한탄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아직도 골똘히 생각한다. 드높은 문명에서그런 끔찍한 야만성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의 뿌리 깊은 믿음과직관이 혼란에 빠지는 것 같다.
인류 역사상 모든 정권 중 히틀러 정권은 최소한 한가지 면에서 유일무이하다. 진지한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히틀러 정권은 결점을 상쇄하는 점이 전혀 없는 재앙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런 정권은 이제까지 없었다. 스탈린이 다스리던 소련조차 미심쩍기는 하지만, 히틀러 정권과는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다. - P33

다만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은 히틀러 정권이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하는점까지만이다. 히틀러 정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역사에 대한 일종의로르샤흐 심리 검사좌우 대칭 얼룩을 보여주고 연상과 반응을 살피는 심리 검사와 같다. 무엇이든 우리가 가장 최악이라고 믿는 정치적 특징을 히틀러 정권에투사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모두가똑같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히틀러 정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할 때도 그런 식의 투사가 영향을 준다.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분석이 서로 정반대일 때도 많다.
1933년 독일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았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너무민주적이었던 게 문제였을까? 나치즘이 등장한 건 권력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일인이 시민으로 해야 할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나치 당원들은 과거에 빠져 있었는가, 아니면 위험할 정도로 앞서나갔나?  - P33

1933년부터 일찍이 역사학자, 철학자, 법률학자, 심리학자, 정치인, 예술가, 작가, 음악가, 사회비판적 코미디언과 여러 분야 사람들이 히틀러의 등장을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들은 갖가지 대답을 내놓았다. 대부분은 솔깃한 대답이다. 왜 또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갈까? 아직도 할 말이 있을까?
이 질문에 몇 가지 답이 있다.
먼저, 역사 지식은 천천히 퇴적물처럼 쌓인다. 항상 새로운 퇴적층이 덧붙여진다. 20세기 독일 역사는 더 그렇다. 수많은 주요 자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기록보관소, 특히 동독과 소련에 너무 오랫동안 보관되었다.
냉전이 끝나자 볼 수 있는 자료가 많아져 나치 시대에 관해 상당히 많은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새로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있다. - P34

예를 들어 1990년대에는 냉전이 끝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자본주의teal capitalism 가 드디어 승리했다고 마음껏 즐거워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세계화‘와 자극적인 우파 포퓰리즘을 더 걱정한다. 1989~1991년에 활짝 핀 꽃봉오리는 시들었고, 냉전후세계 질서는 더욱더 불안정해졌다. 우리는 세계 곳곳의 난민 문제로괴로워하고 있고, 난민 문제가 정치적 문제를 얼마나 불러올지 잘 안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테러리즘이 세계 곳곳에서 한복판을 차지하는 모습을 봐왔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시대가 여러 면에서 1990년대보다는 1930년대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35

1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나치는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나치 지도자와 행동대원들이 전쟁 중 참호에서 싸웠고, 폭력에 너무 익숙해져서 민간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게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실제 전투 경험이 아니었다. 독일인이 전쟁의 시작과 끝을 어떤 식으로 기억하게 되었는지가 정말 중요했다. 1914년 8월과 1918년 11월, 눈부신 여름과 잿빛 늦가을, 열광적인 단결과 쓰라린 분열, 승리를 꿈꾸던 때와 끔찍하게 패배한 현실이전쟁의 시작과 끝이었다. 이 개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구석구석에 퍼졌고, 독일인이 자신들의 정치 생활을 생각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모든 질문의 답을 1차 세계대전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 P36

이 지점에서는 인물들 개개인이 중요해진다. 1930년 이후 독일의 정지는 점점 더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국회에서 의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해법안을 통과시키고,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게 불가능했다. 민주주의 체제를 가장 심하게 파괴하는 나치와 공산당이 1932년 중반까지 국회에서의석을 제일 많이 차지했다. 나치와 공산당의 정치적 입장은 서로 정반대여서 함께 협력할 수는 없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총리들은 국회를 무시했다. 대통령과 총리들은 바이마르 헌법이 보장한 비상대권을 활용해 긴급명령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소수 지도자가 권력을 비정상적으로 휘두를 수 있었고, 지도자들의 사적인 목표와 개성이 훨씬 더중요하게 작용했다는 뜻이다. 배우였다. 또 자신의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847년에 태어난, 구시대 인물이었다. 프로이센귀족 출신에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인이었고, 독실한 개신교도여서가톨릭을 깊이 불신하고, 사회민주당을 혐오했다. 그는 헌법에 근거해 총리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었다. 1925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부터는 독일의 영웅이자 통합자라는 자신의 명망을 유지하며 바이마르 공화국을정치적으로 우경화할 방법만 찾았다. - P37

1918년 이후 독일인이 직면한 현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거의 2백만 명에 가까운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에서 졌고, 폭넓게 지지받지 못한 혁명이 일어났고, 불공평해 보이는 강화조약을 맺었고, 사회와기술이 엄청나게 변화하면서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음모론에 빠져들었다. 그저 군사적으로 패배한 게 아니라 내부의 적에등을 찔려서 패전했다거나,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자본주의자·유대인 프리메이슨 집단에 위협받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당대 다른 독일 정치인과 달리 히틀러는 이러한 현실 도피를 대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현실을 혐오하면서 정치를 경멸하게 되었다. 그보다 뭔가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를 원하게 되었다. 결코 이룰 수 없는 바람이다.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현장(거래, 청탁, 타협이 필요한)을 가까이에서 보면 별로 유쾌하지 않다. 바이마르 공화국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 P40

각 집단의분명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수많은 정당은 권력과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가능하면 타협하고 협상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아서 정부가 금방금방 바뀐다. 14년 동안 21번이나 바뀌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모든 정당이 최소한 어느 정도는 공통점이 있고, 타협할 수 있고,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1930년대까지는 독일 사회가 점점 더 심하게 분열하면서 그러한 정신이 거의 남지 않았다. 공화국을 두둔하면 그저 부패한 체제를 두둔하는사람으로 보일 때가 많았다." 통합과 부흥을 부르짖으면서 정치와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게 보일 수 있었다. 히틀러는 인종차별주의 이론가인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Chamberlain 이 자신을 "정치인과는 완전히 다르다"라고 평가하자 감격했 - P40

다. 18 나치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체제‘라는 암호로 불렀다. ‘체제‘를 경멸하면 하늘이 내린 지도자가 나라를 막막한 처지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믿기 쉬웠다. 히틀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호소했다. 물론 모두에게호소하지는 않았다. 독일 사회의 분열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히틀러는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많은 독일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
1933년 이후 나치가 한 일들은 모두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미리 보여준일들이었다. 예리하게 관찰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있었다.
소설가 프리드리히 프란츠 폰 운루Friedrich Franz von Unruh는 《프랑크푸르터차이퉁 Frankfurter Zeitung》 (프랑크푸르트 뉴스) 신문에 실어서 호평을 받은 연재 글에서 "독재정권이 들어서서 국회를 해산하고, 지적인 자유를 모두파괴하고, 인플레이션, 테러, 내란이 시작될 것" 1"이라고 썼다. "히틀러는 전쟁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20 라고 관찰력이 뛰어난 자유주의 정치인 테오도어 호이스 Theodor Heuss가 덧붙였다. 호이스는나치가 비합리성을 받아들인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운루는 한 가지만틀렸다. 단호하게 반대했던 수백만 명이 히틀러 집권을 환영할 것이라는사실은 몰랐다. 불행하게도 이 때문에 바이마르공화국은 곤경에 처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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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2-10 15: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년 5월에 읽기 시작했다가
접어둔 이 책을 오늘부터 다
시 읽기 시작했네요.

부제인 <민주주의의 죽음>
이 절절하게 다가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