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계급, 인종 혹은 식민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얽혀 있는 방식은선의로 풀어갈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문제만은 아니다. 페미니스트의 국제적 연대를 위한 현실적 토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라면 성,
인종, 계급의 구분선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좀 더 강한 ‘자매애‘나 국제적 연대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 P59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측면의 구분에 대해, 새로운 페미니스트동에서는 다양한 경향으로 구분하고 이름을 붙이는 시도가 계속 되어 왔다. 그래서 어떤 경향은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혹은 ‘맑스주의자 페미니즘‘, 또 다른 이들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으로 불렸다. 대변자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서는 부르주아 페미니즘‘으로 불리기도 했다. 내가 볼 때 이렇게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페미니즘이 정말 무엇이고, 누구를 대변하며, 그 기본원칙, 사회에 대한 분석과 전략 등이 무엇인지를 좀 더 잘 이해하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이런 꼬리표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이 운동을 주로 밖에서 바라보면서 통속적인 기존의 범주에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 P59

이는 특히 구조적 기능주의와 역할이론에서 잘 볼 수 있다. 역할이론이 자본주의 아래서 가부장적 핵가족을 온존시키기 위한 이론적틀이라고 하는 비판 없이, 많은 페미니스트가 역할이론을 강조하고있다. 성역할의 정형화를 강조하면서 성차별적이지 않은 사회화를 통해 이런 성역할의 전형을 변화시켜 ‘여성문제‘를 풀어가려는 것은 구조적기능주의자의 분석을 강화해주는 것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더 깊은 뿌리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든다. 남녀 문제를 성역할의 정형화와 사회화의 문제로 규정함으로서 이는 곧 이데올로기적차원으로 넘어가게 되고, 문화적 문제가 된다. 이 문제의 구조적 뿌리는 여전히 안 보이는 것으로 남게 되고, 자본축적과의 관계 역시 여전히 가려져 있게 된다. - P62

기존의 사회이론 혹은 페러다임에 ‘여성문제‘를 ‘추가하려는 이런모든 시도는 새로운 페미니스트 반란의 진정한 역사적 추진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 페미니스트 반란은 자본주의가 가장 최근의 - P62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징후로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체제로서의 가부장제혹은 가부장적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모든 이론은 ‘문명화된 사회의 패러다임 내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이런 사회 모델을 기필코 극복해야 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페미니즘이 이런 이론들에 그저 덧붙거나, 이론들 속의 어느 망각된 지점을 찾아 맞춰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이론의
‘맹점들‘을 채우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우리의 문제, 우리의 분석은 이런 사회 모델 전체를 문제로 삼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는 적당한 대안 이론들을 아직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P63

그러나 우리의 비평은 그런 빈틈을 먼저 다루기 시작했고, 점점 더깊이 파헤쳐 나가서, 우리가 ‘우리의 문제, 말하자면,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남녀 관계가 ‘자연‘이나 식민지‘와 같은 ‘숨겨진 대륙‘ 같은 것과체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까지 와 있다. 점차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나고 있다. 여성이 어쩌다가 ‘잊혀지고‘, ‘무시되고, ‘차별받는 것이 아니며, 남성만큼 기회를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아니고, 몇몇 소수집단들 중 하나일 뿐인 것이 아니며, 다른 보편적이론이나 정책이 ‘아직‘ 수용하지 못한 ‘특수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보편인가에 대한 혹은 무엇이 ‘특수‘인가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에서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각 사회에서 생명을 생산해내는 실제적 근원인여성이 어떻게 ‘특수성‘의 범주로 규정될 수 있는가? 따라서 이들 모든이론 속에 내재한 보편적 타당성에 대한 주장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많은 페미니스트가 아직 이 점을 분명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 P63

대부분의 여성은 희생자를 돕거나 법적 개혁을 가져오는 일에 주력하게 되지만, 성폭력 문제가 공론화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른바 문명화된 사회라고 하는 허물을 벗기고 감추어진 잔인하고 폭력적인 근간을 드러나게 해준다. 페미니스트 혁명의 깊이와 폭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면, 많은 여성이 주저하면서 자신이 경험해 온 것을 모른 체한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가부장제를 타파해야 하는 엄청난 일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기된 역사적 문제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이 문제들은 역사의 의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합당한 답변을 찾아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해치는 것이아니라 한층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재건하는 데 일조하도록 해야 한다. - P64

그러나 이런 퇴행 전략은 좀 더 근본적인 구조적 변화들에 대한정치적 선언일 뿐이다. 서구 경제들은 이를 보통 ‘노동의 유연화‘라고불러 왔다. 여성이 이런 전략의 직접적인 표적이 된다. 생산과정과 서비스직의 합리화, 컴퓨터화, 자동화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인해 여성은 ‘공식 부문‘에 있는 임금이 높고, 자격을 갖춘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안정된 직장에서 쫓겨나는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따뜻한 난로가 있는 가정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여성이 쫓겨 들어간 곳은 별 자격 없이도 접근할 수 있는 낮은 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의 세계였다.  - P66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인간의 성과 섹슈얼리티가 순전히 자연적이고 생물학적 문제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여성의 혹은 남성의 몸이 순전히 생물학적 문제였던 적도 없었다(2장 참조).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사회적이고 역사적이었다. 인간 생리는 모든 역사를 통해 다른 인류와 그리고 외부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성도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범주이다. - P81

그러나 성과 젠더를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함으로서, 사람들 사이의 성적 차이를 해부학적 문제로 혹은 ‘물질적 문제‘로 다루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다시 문을 열어주게되었다. 물질로서의 성은 과학자의 대상이 되어, 과학자의 의도에 따라 분해되고 분석되고 조작되며 재구성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정신적 가치가 성에서 분리되어 젠더의 범주에 갇히게 되면, 지금까지 성과 섹슈얼리티의 영역을 둘러싸고 있었던 금기들이 쉽게 벗겨질 수 있다. 이 영역은 생물공학과 재생산 기술, 유전공학과 우생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자본축적을 위한 새로운 사냥터가 될 수 있다 - P81

자신의 몸과의 관계, 자신의 몸에 대한 무지, 피임과 관련한 문제 등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가장 친밀하고 개인적이며 개별화된 경험들을 사회화하고 그럼으로써 정치화하기 시작했다. ‘몸의 정치‘는 서구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저개발국가에서도 신여성운동을 촉발하는영역이 되고 있다. 이렇게 남녀관계의 사적이고 분리된 영역을 정치적영역으로 규정함으로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을만들어냄으로서, 부르주아 사회의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에 대한 구조적 구분에 도전했다. 이는 동시에 통상적인 ‘정치개념에 대한 비판을의미하기도 했다(Millet, 1970). ‘몸의 정치‘는 페미니스트가 의도적이고전략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몸의 정치‘는 우리 사회에서 남녀관계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억압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정한 이슈에 대해 서구 사회의 여성 대중이 분노하고 저항하면서 성장해 나온 것이다.  - P83

페미니스트운동이 성차별적 폭력의 다양한 징후들을놓고 진행될수록, 여성은 모든 민주주의 헌법이 선언하고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 중 일부, 특히 신체가 해를 입지 않을 불가침의 권리가 여성에게는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모든여성은 이런 남성 폭력의 잠재적 피해자라고 하는 암울한 사실과 힘과 교양을 갖춘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여성의 이런 기본권들을 보장할수 없다는 막막한 현실을 접하면서 많은 페미니스트는 여성해방을위한 투쟁에서 국가가 동맹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품게 된다.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근대 민주주의의 문명화된‘ 사회에서 노골적인 폭력이 사라졌다고 하는 모든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사회에서 자주 찬미는 ‘평화‘가 사실은 여성에대한 일상적이고 직간접적인 공격에 기초한 것임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깨닫기 시작했다. 독일 평화운동에서 페미니스트는 이런 슬로건을만들었다. ‘가부장제의 평화가 여성에게는 전쟁이다‘ - P87

몸의 정치 차원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여성은 말하자면 초기 여성운동이 희망했던 것과는 반대되는교훈을 배웠다. 공공영역에 여성이 참여하고, 참정권을 얻고,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것으로는 폭력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가부장적 남녀관계의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성차별적 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운동이 진행되면서 개별 남성의 명백한 ‘사적‘ 침해와 가족, 경제, 교육, 법, 국가, 대중매체, 정치 등 ‘문명사회‘의 중심 제도와 기둥들‘ 사이의 조직적인 관련에 대한 여성의 인식도 높아졌다.  - P87

‘일인칭 정치‘라는 개념, 대의정치의 거부,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을 분리하는 것에 대한 거부, 사적 영역의 정치화 등은 나중에서독에서 시민발의운동, 대안운동, 생태운동, ‘기초-민주주의‘를 주된정치 원칙의 하나로 삼았던 녹색당과 같은 여러 신사회운동이 계승했다. 반관료주의, 서열을 따지지 않는 활동, 중앙 집중의 배제와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활동의 강조 등 페미니스트운동의 여러 조직 원리들은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여타 사회운동 대부분이 공유하고 있다.
신페미니스트운동은 통일된 프로그램과 완성도 높은 이론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 항상 관계하고 있는 사적 영역과 자신의 몸과 관련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남성 지배에맞서는 반란을 시작하면서 이는 고유의 역동성과 힘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여성운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대다수 사람들이 처음 예견했던 것보다 훨씬 사회 구조 깊숙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정치운동으로서 페미니스트운동은 오늘날 다른 어느 사회운동보다도 더 광범한 반향을 낳는다. - P95

페미니스트가 이렇게 식민지를 만들어내는 구분을 근본적으로 넘어설 때에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지극히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유명한 자본 임금노동관계와 동일하지 않으며, 자본주의는 계속 팽창하는 성장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식민지 범주들, 특히 여성, 다른 민중, 그리고 자연과같은 식민지 범주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 점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전 세계 페미니스트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창출한,
식민지를 만들어내는 모든 구분, 특히 노동의 성별 구분과 국제적 구분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구분의 실상을 밝히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민지적 구분에 대한 강조는 다른 관점에서도 꼭 필요하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페미니스트는 비판적 과학자와 생태주의자와 함께 서구 과학과 기술의 이분법적이고 파괴적인 패러다임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 P104

뉴에이지 페미니스트와 생태페미니스트를 비롯한 여러 페미니스트가 자신들에게 ‘동양의 정신‘과 ‘치료‘ 를 향유할 수 있는 사치를 제공하면서도 착취가 이루어지는 진짜 식민지에 대해 눈과 마음을 여는 것이 꼭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총체적패러다임이 새로운 정신주의나 의식운동에 불과하게 된다면, 이 패러다임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착취의 세계적 체제에 대항하여 이를 분명히 규정하고 투쟁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본주의의 파괴적 생산의 다음 단계를 정당화시켜주는 선도적 운동으로 정리되고 말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차나 냉장고와 같은 수준 낮은 물질 상품들을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종교, 치료, 우정, 영성 등과또 폭력과 전쟁 상품 등에 집중할 것이며, 물론 그 과정에서 ‘뉴에이지‘ 기술들을 충분히 활용하게 될 것이다. - P105

나는 가부장제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부장제‘라는 개념은 신페미니스트운동이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관계들을 총체적으로, 그리고 체제적 성격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어를 찾는 과정에서재발견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부장제‘라는 용어는 여성의 착취와 억압의 역사적·사회적 측면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생물학적 해석의 여지는 ‘남성 지배‘라는 개념과 비교할 때, 덜 열려 있다. 역사적으로 가부장 체제들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사람들에의해 발전되었다. 가부장 체제들은 보편적으로, 시대와 상관없이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 P109

독립성이 여성 속에서 인간적 본성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독립성은 위에서 서술한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독립성은 여성이 혼성의 혹은 남성위주의 조직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서, 자신만의 분석과 프로그램과 방법을 통해 고유의 독자적인 조직을 세우려고 주장하면서 발전시킨 투쟁 개념이기도 하다. 독립 조직은 알다시피, 모든 ‘대중운동‘에 대해 조직, 이데올로기, 프로그램에서 항상 우위를 주장해왔던 전통적인 좌파 조직에 맞서면서 특히 강조되었다. 이런의미에서 페미니스트의 독립성에 대한 주장은 여성문제와 여성운동을 어떤 다른 외관상 좀 더 보편적인 주제나 운동 아래 수렴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여성의 독립적인 조직은 독립된 힘의기초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운동의 질적으로 다른 특질과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 P115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운동 내에서도, 다양한 하위 운동들, 예를 들면 레즈비언운동 등이 등장했다. 또한 제3세계 페미니스트운동이 발전하면서 이런 원칙이 강조되기도 했다. 여성운동에는 중앙도 없고, 서열도 없고, 공식적이고 통합된이데올로기도 없고, 공식 지도부도 없다. 따라서 다양한 자발적 활동과집단의 독립성은 운동 내에서 진정으로 인도주의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역동성과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이다. - P116

육체는 운명anatomy is destiny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에서 나타난 것처럼, 생물학적 결정론은 음으로 양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가장 뿌리 깊은 방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을 위해 싸우는 여성은 생물학적 결정론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남녀사이의 불평등하고 서열적이며 착취적인 관계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요인들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는 분석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분석의 도구인 기본 개념과 정의가 생물학적 결정론의 영향을 받았기때문이거나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 P120

자연, 노동, 성별노동분업, 혹은 가족, 생산성 등은 우리 분석에서 중심적인 기초 개념들이다. 그런데 만약 이들 속에 내재한 이데올로기적경향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이들 개념을 사용한다면, 문제가 분명해지기보다 더욱 모호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불평등이나 착취적 관계들을 타고난 - P120

것, 혹은 사회적 변화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고 설명할 때 너무 자주사용되어 왔다. 여성은 이 용어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는데 이용될 때 특히 의심해야 한다. 삶의 생산과 재생산에서 여성의 몫은 흔히 여성의 생물학적 혹은 ‘자연적 기능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여성의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은 여성의 생리활동의 연장선으로 간주된다. 여성의 가사와 육아는 출산했다는 사실과 연결된 것으로, ‘자연‘이여성에게 자궁을 주었다는 사실과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산을포함한 생명을 생산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노동이 인류가 자연과 의식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즉 진정한 인간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자연의 활동으로, 즉 식물과 동물을 의식 없이 생산해내고 이 과정에 대해 통제하지 않는 자연의 활동으로 보인다. 여성이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여성 자체의 자연성까지 포함하여, 자연의활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광범한 영향을 미치고있다. - P121

생물학적으로 오염된 자연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신비화된 것은지배와 착취, (남성)인류의 (여성)자연에 대한 지배관계이다. 이런 지배관계는 위에서 언급한 여성에게 적용된 다른 개념들에도 내재해 있다.
노동 개념을 보자. 여성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생물학적 규정 때문에,
여성의 출산과 육아, 그리고 다른 가사노동들은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다. 노동 개념은 자본주의적 조건 아래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의 생산적 노동,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여성도 그런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을 하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개념은 보통은 남성 혹은 가부장적 경향과 함께 사용된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여성은 전형적으로는 가정주부로, 즉 노동자 - P121

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 노동의 수단은, 다시 말해서 노동개념에서 암시적으로 생산을의미하는 신체는 손과 머리이다. 여성의 자궁이나 가슴은 그 범주에끼지 못한다. 따라서 여성과 남성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에서 다르게 규정된다. 인간의 신체 자체도 진정으로 ‘인간적인‘ 부분(머리와 손)과 자연적‘ 혹은 순전히 ‘동물적‘ 부분(생식기, 자궁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구분이 어느 정도는 보편적인 남성의 성차별주의 때문이라고할 수는 없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수단으로 직접 사용될 수 있고, 혹은 기계와 곧 연결될 수 있는 인체의 부분에만 관심이 있다. - P122

노동 개념에 숨겨져 있는 불균형과 생물학적 편향으로 지적할 수있는 또 다른 예는 광범하게 퍼져있는 성별노동분업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남성과 여성이 다양한 일들을 단순하게 배분하는 것처럼보이지만, 남성의 일은 진실로 인간적인 것(즉, 생각하고, 합리적이며, 계획되고, 생산적인 것 등등)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여성의 일은 다시금 기본적으로 ‘타고난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은폐하고 있다. 성별노동분업은 그 규정에 따르면, ‘인간의 노동‘과 ‘자연의 활동‘ 사이의 구분으로 바꿔 쓸 수 있다. 게다가 이 개념은 남성노동자(즉, ‘인간)과 여성노동자(즉, ‘자연) 사이의 관계가 지배관계, 심지어 착취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숨기고 있다. 여기서 착취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구적인 분리와 서열화가 일어났으며, 소비자가 스스로는 생산하지 않으면서, 생산자의 생산품과 용역을 착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평등한 공동체였다면 생산자가, 세대를 달리해서라도, 결국은 소비자가 되었을 것이다. - P122

마찬가지로 애매한 생물학적 논의가 지배적 힘을 발하는 곳은 가족 개념과 관련한 부분이다. 이 개념이 유럽중심적이고 비역사적 방식으로 일반화되어 사용되면서 핵가족이 남녀관계들을 전체적으로 제도화하는 기본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구조로 제시되었다. 또한 이 개념은 이 제도의 구조가 서열이 있고 불평등한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있기도 하다. ‘가족 내의 동반자의식 혹은 민주주의‘라는 말은 이 제도의 본색을 가리는 역할을 할 뿐이다.
‘생물적‘ 혹은 ‘자연적‘ 가족과 같은 개념은 특히 이런 비역사적인가족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이성 간의 성관계와 핏줄을 통한 자녀의 출산을 의무적으로 결합한 것에 기초한 개념이다.
몇 가지 중요한 개념에 내재해있는 생물학적 경향에 대해 이렇게간단히만 살펴보아도 이런 편향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체계적으로드러내는 것이 꼭 필요함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편향들이 불균형하고착취적인 사회적 관계들, 특히 남녀 사이의 관계들을 은폐하고 신비화시키고 있다. - P123

진화론적 사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엥겔스는 이 아주 초기의 시기를 원시시대라고 해서 인간의 실제 역사와 분리시켰다. 엥겔스는 인간의 실제 역사는 문명과 함께 시작된다고 보았다. 역사는 충분히 성숙한 계급과 가부장적 관계와 함께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엥겔스는 인류가 어떻게 원시시대에서 사회의 역사 단계로 뛰어 오르게 되었는지에 답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는 변증법적인 사적 유물론의 방법론을 ‘아직 완전히 역사시대로 들어오지 않은 원시 사회에 대한 연구에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진화의 법칙이 사유재산과 가족과 국가의 등장을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 P130

여성성과 남성성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과정의 산물이다. 역사적 단계 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다르게 규정되어 왔다. 이런 규정은 각 시대의 주된 생산양식에 기초해 있다. 이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유기적인 차이가,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물을 전유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역사 속에서 여성과 남성은 자신의 몸에 대해 질적으로 다른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모계사회에서 여성성은 모든 생산성의 사회적패러다임으로, 생명 생산의 주된 활동 원리로 해석되었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어머니‘는 오늘날의 의미와는좀 다르다. 자본주의적 조건에서 모든 여성은 사회적으로 가정주부로 (모든 남성은 생계부양자로 규정되고, 모성은 이 가정주부 신드롬의 부분이 된다.  - P136

이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만 볼 수 있으며, 사회적 상호작용 혹은 협동을 의미한다. 인간의 몸은 첫 번째 생산수단일 뿐 아니라 첫 번째 생산력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몸이 새로운 것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경험을 하고, 이에 따라 외부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대상관계는 동물과 다르게 생산적이다. 몸을 생산력으로 전유하면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이는 광범한 결과들을 낳았다.
여성의 자연에 대한 대상관계, 외부 자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신들 자체까지 포함한 자연에 대해 갖는 대상관계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여성이 자신의 몸 전체를, 즉 손이나 머리만 아니라몸 전체를 통해 생산성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몸을 통해여성은 아이를 생산하고, 이 아이의 첫 번째 음식도 생산한다. - P137

그들은 자신의 몸을 통해 여성과 같은 방식의 생산성을 경험할 수없다. 남성 몸의 생산성은 외부적 수단, 즉 도구의 중재 없이는 드러나지 못한다. 반면에 여성의 생산성은 도구 없이도 드러난다. 남성이 새로운 생명의 생산에 기여하는 것, 이는 항상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기여는 도구를 통해 외부 자연에 작용한 오랜 역사적 과정과 이 과정에 대한 숙고 끝에만 나타나게 된다. 남성이 자신의 자연적 몸에 대해 가진 인식과 자신을 바라보는 인상은 외부 자연과 상호작용하는다양한 역사적 형태와 이런 작업 과정에 사용되는 도구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남성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인식, 즉 생산자로서의 인식은기술의 발명과 통제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구가 없다면, 남자man는 사람MAN이 아니다. - P144

남성의 성기와 남성이 다양한 시대 다양한 생산양식 속에서 발명해 온 도구 사이의 유사성을 연구하는 것은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것이다. 우리 시대 남성이 남근을 스크루드라이버(남성은 여성을 스크루‘라고 한다), ‘망치‘, ‘서류철‘, ‘총‘ 등으로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역항 로테르담에서는 남성의 성기를 ‘무역‘이라고 부른다. 이런 용어는 남성이 자연, 여성,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남성의 마음속에는 노동도구와 노동 과정, 그리고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 인식이 밀접히 연관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 P14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의 기술이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에서 계속 생산적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성은 새로운 것을 생산했다. 한편, 사냥 기술은 생산적이지 않았다. 사냥에 적절한 도구는 다른 생산적 활동에 사용될 수 없었다. 돌도끼는 달랐지만, 활과 화살과창은 기본적으로 파괴를 위한 수단이었다. 이들은 동물을 죽이는 데만 사용되지 않고,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그 중요성이 있었다.
바로 이런 사냥 도구의 성격이 이후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사회적 관계들뿐 아니라 남성의 생산성이 더욱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기를 제공하는 사냥꾼이 공동체의 영양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그런 발전이 나온 것은 아니다. - P153

이런 비생산적이고 약탈적인 전유양식은 인간 사이의 모든 착취관계의 역사에서 패러다임이 되었다. 주된 메커니즘은 자율적인 인간 생산자를 타인을 위한 생산의 조건으로 변형시키는 것, 혹은 그들을 타인을 위한 ‘자연 자원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가부장적 패러다임의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가부장제는 지구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가부장적이었던 사회들에서 발전했다. 유대인, 아리아인(인도인과 유럽인), 아랍인, 중국인,
그리고 이들 각각의 거대 종교들 속에서 발전했다. 이들 문명들, 특히유대-유럽계 문명의 성장과 보편화는 정복과 전쟁에 기초한 것이다.
유럽이 아프리카의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가 약탈적인 유럽인의 침략을 받은 것이다. 이는 또한 원시공산주의, 바르바리 Barbary상부 지역, 봉건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이르는 모든곳의 역사를 단선적이고 보편적인 과정으로 보는 개념은 가부장제에대한 우리의 분석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62

그러나 ‘자연화‘ 과정은 식민지 전체와 노동계급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 여성 또한 자연으로, 자본가 계급의 후계자를 낳고 키우는 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여성을 ‘야만적‘ 자연의 일부로 보았던 반면에, 부르주아 여성은 ‘길들여진 자연으로 보았다. 부르주아 여성의 섹슈얼리티, 그들의 생산적 자율성만이아니라 생식력은 부르주아 남성에 의해 억압받고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부르주아 여성은 생계를 남성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여성이 길들여지고 남편의 소득에 의존하는 가정주부로 변모하는 것은자본주의 아래 성별분업의 모델이 되었다. 이는 여성, 모든 여성의 재생산능력을 통제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남성의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은 여성의 가정주부화과정과 병행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영역인 가정과 가족은 ‘자연, 사적이고 길들여진 자연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공장은 공적이고 사회적(‘인간적‘)인 생산의 공간이 되었다. - P167

마녀사냥은 여성의 성과 재생산 행위를 통제하는 직접적인 훈련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고, 여성의 생산성보다 남성 생산성의 우월성을 수립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마녀사냥의 이데올로기는 여성적 자연의 사악함(악sin은 자연nature과 동의어이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성적으로 통제되지 않고, 만족할 줄 모르며, 언제나 정숙한 남성을 유혹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흥미로운 점은 여성이 아직은 성적으로 수동적인 혹은 심지어 성욕이 없는 존재로, 즉 19~20세기에 간주되었던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여성의 섹슈얼한 행위는 정숙한남성, 즉 재산의 상속자인 후손을 식별할 수 있도록 여성을 통제하고싶어 하는 남성에게는 위협적인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자신의 딸과아내의 정숙을 지키는 것은 남성의 의무였다. 여성은 ‘자연‘이고 ‘악‘이기 때문에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보호 아래 있어야 했다. 여성은 영원한 소수자가 되었다. - P169

오직 남성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인이 되고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자기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기 위해, 남성은 구타나 다른 폭력적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Bauer, 1971). 여성의 사악한본성에 대한 모든 직접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은 여성에게서 다른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기능에 대한 자율성을 앗아가려는 목적과 경제 정치 문화적 영역에서 남성의 헤게모니를 수립하려는 목적에 부합했다.
성적 자율성은 경제적 자율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성 치료사와 산파를 마녀로 내몰고 비난하면서 남성 의사가 전문직화되었던 사례는 여성 생산 활동에 대한 공격의 의미를 가장 일목요연하게보여준다. - P170

이 ‘문명화 과정‘이 마무리되는 시기에, 여성은 한 남성을 위한 가정주부이거나 자본가를 위한 임금노동자로, 혹은 둘 다로 훈련되었다. 이들은 수세기 동안 자신에게 사용된 실제적 폭력을 자신에게로 돌리면서 내면화했다. 그들은 이를 자진해서 한 것으로, 사랑으로 규정했다. 자기억압에서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였다(Bock/Duden, 1977). 이런 자기억압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제도적 이데올로기적소품을 교회, 국가, 가족이 제공했다. 여성은 노동과정의 조직(노동현장에서 가정을 분리하는 것), 법, 경제적으로 이른바 ‘부양자‘ 남성에게의존하는 것을 통해 이 제도에 구속되었다. - P170

이런 착취적이고, 쥐어짜내는, 전혀 상호적이지 않은 자연에 대한대상관계는 가장 먼저 남성과 여성, 남성과 자연 사이에서 수립되었고, 자본주의를 포함한 다른 모든 가부장적 생산양식의 모델로 남았다. 자본주의는 이를 가장 정교하고 가장 보편화된 형태로 발전시켰다." 이 모델의 특성은 생산과정과 생산품을 통제하는 이들 자신이 생산자가 아니라, 전유자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른바 생산성은 타자 - 결국은 여성 - 생산자의 존재와 종속을 전제로 한다. 월러스틴이말한 것처럼, ‘.... 잔혹하게도, 노동력을 낳는 이들이 식량을 기르는이들을 부양하고, 이들은 다른 원료를 생산하는 이들을 부양하고, 또이들은 공업 생산에 관련된 이들을 부양한다‘(Wallerstein, 1974:86.
여기서 월러스틴이 빼놓은 것은 이들 모두가, 이 과정 전체를 결국은무기를 통해 통제하고 있는 비생산자들을 부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패러다임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비생산자가 다른 이들이 생산한 것을 전유하고 소비(혹은 투자)한다는 사실이다. 사냥꾼- 남성은기본적으로 생산자가 아니라, 기생자이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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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미즈Maria Mies, 1931~

독일 쾰른대학 사회학과 교수이다.
오랜 기간 인도에서 작업하였고,
1979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사회과학연구원〉에 ‘여성과 개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60년대 말부터 여성운동과 여성연구를 활발히 해오고있다. 페미니스트, 환경과 세계 개발문제에 대해 여러 책과논문들을 써 왔다. 주요한 관심은 방법론과 경제학에서대안적 접근방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1993년 가르치는일에서 퇴임한 뒤부터, 여성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운동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아틱(Attac)의 여성 네트워크인 〈페미니스트아탁>의 회원이다. 저작으로 인도여성과 가부장제』(Indian Women and Patriarchy, 1980), 『에코페미니즘』(창비, 2000, 공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동연, 2013, 공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 등이있다.

옮긴이 최재인Jaein Choi, 1966~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19세기 후반 아프리카계미국인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여성과인종, 계급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서양여성들 근대를 달리다』(공저), 여성의 삶과 문화』(공저),『다민족 다인종 국가의 역사인식』(공저), 동서양 역사 속의다문화적 전개양상』(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아름다운외출』, 『유럽의 자본주의』, 『히스토리』(공역) 등이 있다.

가부장제와 자본축적이 나의 주된 이론적 작업이기 때문이기도하고, 1986년에 했던 생각의 대부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 자연에 대한 폭력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왔다. 이런 폭력의 형태는 내가 1986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고, 더 가학적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는 세계적 차원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고약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폭력의 결과로는 기후 변화를 개선할 수 없고, 지구의 자원고갈과 원자력으로 인한 오염을 회복시킬 수가 없음을 오늘날 우리는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패러다임은 끝없는 자본축적을 추구하는데, 이는 진보와 "좋은 삶"의 전제조건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 P5

내가 오래전에 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에 몇 가지가 좀 더 추가되었을 뿐,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뭘 더 말해야 하는가.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더 악화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이 책이 나온 이래 24년 동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내 분석이 여전히 유효한가? 나는 이전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고, 이 파괴적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방법에대해서도 여전히 같은 비전과 전망을 갖고 있는가? - P5

그러나 오늘날 현실을 보면, 가난한 국가나 부자 국가나 상관없이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지 않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전혀 평등하지 않다. 왜 그런가? 몇몇 여성이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국가나정부의 수장이 되기도 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목표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배적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체제를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구조에 여성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많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 체제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된 여성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성차별적·가부장적 문화를 거의 바꾸지 못했다.
1980년 무렵 유럽과 미국의 페미니스트는 왜 여성의 가사노동이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는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자본가나 남성에게 여성의 노동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짜의 선의" 혹은 "사랑의 노동"이었다. 가정주부는 남성 "생계부양자"에게 완전히 경제적으로 의존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임금을 받지 않으며, 그녀의 노동시간은 계산되지 않고, 의료보험도, 노령연금도 없다.  - P6

동시에 내 친구들과 나는 식민지민과 자연이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자본은 그들의 "생산"을 아주 적은 비용으로 전용했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나 멕시코 같은 국가에서 젊은 여성은 서구 시장에 공급할 의류 등을 세계에서 가장 싼 임금을 받고 생산했다. 이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여성 노동이 남성의 노동보다 가치가낮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방글라데시처럼 가난한 국가에서도 여성 노동은 더 저렴하다. 이곳에서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다. 오늘날 이런 심한 착취는 폭력 및 가장 잔혹한 노동환경과 결합되어 있다. 이런 노동환경은 그들의 생명까지 위협한다.
최근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의류공장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화재가 이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런 화재로 수천 명이 사망했는데, 그 대부분이 어린 여성이다. 이런 생산관계로 이익을 챙기는 자는 대기업, 유명한 국제기업이며, 이 중에는 한국 기업도 있다. 이회사들은 국제노동기구의 노동법도 의식하지 않는다.  - P7

오늘날 사실상 모든 국가가 신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운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는 세계적 자유시장이 빈곤을 없애고,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와계급 사이의 불평등을 없앨 것이며, 자본재와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세계를 개방하겠다고 설교한다. 신경제 주창자들은 "신자유주의가 모두를 위해 공정한 경쟁의 장을 창출할 것"이라는 공약을 내놓았다. 신자유주의의 주요 원리는 세계화, 자유화, 사유화, 일반 경쟁이다. 이런 원리는 국가가 자국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이를 이윤을 추구하는 초국적 기업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새로운 원리는 노동권, 환경보호법, 여성과 아동의 보호, 노동 안정성, 일자리 안정성 등을 포기하게 만든다.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철도, 우편, 전화통신 등 중요한 서비스업들이 사유화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경제원리는 세계적 합의 아래 자리를 잡았고, 세계무역기구WTO는 이런 합의의 수호자가 되었다. - P9

나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단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체제에 내재한 본질적인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체제는 최소한 5천년의 역사를가진 것으로 전 세계의 모든 ‘위대한 문명들과 문화들을 관통하며 조직했다.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가진 여성이 함께 했던 ISS의 ‘여성과 개발 프로그램 과정에서도 이 체제의 역사적 유구함과 지리적광대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체제가 여러 문화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일부는 다른데보다 좀 더 잔인하다. 이는 구조상 지금도 여전하다. 이 프로그램의 학생들이 이를 이해해 가면서, 이런 슬로건을 만들었다. "문화는 다르지만, 투쟁은 함께 한다!" 따라서 가부장제 문제는기원과 다양함에 상관없이 보통의 시공간을 곧장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해주면서, 동시에 이런 문제를 던져 준다. ‘이런 반여성적인 체제를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P18

이런 현상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는 통념과 다르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자본의 축적 또는 지속적인 성장은 거대한 인간적 그리고 인간 이외의 요소들이 식민화되는 조건 아래에서나 가능했다. 여성, 그리고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자연과 사람과 토지가 지금까지의 주된 식민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축적과정의 지하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기반이었다. 우리는 빙산의 비유를 사용했다. 자본과 임금노동이 ‘물 위로 드러난‘ 빙산의 보이는 일각이었다. 여기서 임금노동은 국민총생산에 포함되고, 노동계약으로 보호받는 노동이다.
그러나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만들어 낸 생산은 이 경제의 수면 아래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 P23

한 페미니스트가 쓴 책이 남성의 주목을 받기까지는 어느 정도의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남성이 읽기 시작하자 여기에서도 평가는 거부 아니면 찬사로, 극단화되었다. 분명히 이 책은 독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감정과 신념을 건드렸고, 이에 반응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당혹‘Betroffenhein을 만들어냈다. 내가 운동 초기부터 당혹이라는 용어를사용한 것은 페미니스트 연구와 일반적으로 실증주의적 주류 연구의무관심하고 관여하지 않는 태도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독일어 ‘당혹‘Betroffenheit은 영향을 받고 관심을 둔 상태만이 아니라, 고심하면서 무언가 하려는, 행동하려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런면에서 나는 이 책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 P24

선진공업화된 사회들에서 사는 사람들은 음식이 여전히 땅에서나오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토지가 식량 생산과 식량 안보의 기초라는 사실을 잘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토지는 ‘저개발국가들에게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개발‘ 사회에서도 토지에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다른 충분히 성장한 경제 모델을 보지 않는 한,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패러다임을 꿈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과정, 그들 자신의 창의성과 에너지를 발달시켜 줄 과정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오래된 집 밖으로 발을 내딛기 전에 안정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나는 자급적 삶에 대한 전망이 더 나은 대안이며, 이 대안은 이미 실행되고 있는 것을 선진공업화된 세계의 사람들에게,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고있다. 대안은 없다는 티나TINA 증후군에 사로잡히는 대신, 하늘에서떨어지는 초인을 기다리거나 기술을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여기며 기다리는 대신, 자급적 삶이라는 대안SITA, Subsistence Is The Alternative[자급이 대안이다)을 가능한 지향점으로라도 검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P35

여성해방운동은 생태운동, 대안운동,
평화운동 등 가장 광범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또한 가장 논란이 많은 신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그 존재 자체에서부터 민중속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생태문제‘, ‘평화이슈‘, 제3세계의 종속 문제에 대해서는 침착하게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토론을 이끌어갈 수 있어도,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남성과 그리고 많은 여성이 늘 지극히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각각의 개인에게 이는 민감한 이슈이다. 이는 여성운동이 다른 운동들처럼 국가나 자본가 등 외부의 적이나 기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 남성과 여성 사이의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직접 민중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 P46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이를 피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 속에 있는 남녀관계의진정한 본질을 스스로 인식해가는 것은, 돈벌이와 권력놀음과 욕망이 난무하는 냉정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평화롭고 조화로운 지대로 남아있는 마지막 섬을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이 이슈를 자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들이 한편으로는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속박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서 자신도 공범자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가고 싶다면 이제껏 해온 공모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는 이 체제에서 특권을 가진 남성만이 아니라, 이 체제에 물질적 존재 기반을 두고 있는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스트는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남녀관계에 대한 침묵의 공모를 과감하게 깨뜨리려는 이들이고, 이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은 이들이다. 그러나 이런 남성 지배 체제에 ‘성차별주의‘, 혹은 ‘가부장제‘라는 일정한 이름을 부여하며 목청을 높이는 것으로는 위에서 이야기한 양면성을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분열을 강화시킬 뿐이다. - P47

대신 서구와 비서구 여성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크게 강조된다. 오늘날 이런 식민 관계는 국제노동분업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이 관계는 백인 페미니스트의 의식에서도 종종 사라지곤 한다. 이 백인 여성의 삶 수준은상당 부분 온존하고 있는 식민지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또한 ‘백인 세계‘에 사는 흑인 여성도 이를 종종 망각한다. 이들이 ‘흑인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고 해서 이들이 자동적으로 흑인 세계에 사는 이들과 한 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Amos &Parmar, 1984 참조). 흑인 여성 역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따라, 식민지와 계급을 따라 구분되기 때문이다. 특히 계급 구분은 성과 인종을 논할 때 자주 망각된다. 현 시점에서 ‘흑인‘, ‘갈색‘ 혹은 ‘황색‘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지키는 이들에게 큰 희망이다. ‘흑인 세계‘에 사는 흑인 여성 중 일부는 ‘백인 세계‘에 사는 일부 백인 여성보다. 그리고 특히 백인 세계와 흑인 세계에 사는 대다수의 흑인 여성보다 나은 삶 수준을 누리기도 한다. 우리가 도덕주의와 개인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표면 아래를 보는 것, 성적·사회적·국제노동분업의 상호작용을 물질적이고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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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의 첫 장을 읽으면, 아니 아무 곳이나 손이 가는 대로 펴서 읽으면,
야심찬 두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의 비이성적인 타락 행위에 전율하며 내용에 빠져들 것이다. (...) 흥미진진하고, 놀랍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희생자가 쓴 일기, 생존자들의 증언, 당시의 신문기사, 개인의 편지 등에서 수없이 추려냈다. (…) 스나이더는 이런 단편적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해 경고 섞인 고발을 하며,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삼국에 살았던 사람들의 슬픈 운명을 풀어나간다.
_<킨들 데일리포스트>




지은이 티머시 스나이더 Timothy Snyder

1969년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 중유럽 및 동유럽사와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다. 현재 예일대학 역사학과교수이며, 빈 인문학 연구소 종신 연구원, 미국 홀로코스트기념관 양심위원회 위원이다. 런던정경대, 바르샤바 유럽대학 등에서 강의한다. 2000년대까지 주로 역사학자로 활동해왔지만 2010년대 들어 정치, 보건, 교육 분야에 관심을기울이며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으며, 2020년 페이스북을모니터링하는 독립 단체 ‘리얼 페이스북 오버사이트 이사회‘ 멤버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시카고트리뷴』 『네이션」 「뉴욕리뷰오브북스』 『타임스리터러리서플먼트」 「뉴리퍼블릭」 등에 기고 중이다.
주요 저서로 한나아렌트상(2013)을 수상하고 2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된 ‘피에 젖은 땅과 블랙 어스Black Earth』가있다. 스나이더는 두 책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동유럽의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한 히틀러와 스탈린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제시한다. 또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악마성의구현이라기보다는 국가가 파괴된 지대에서 국적을 박탈당한 이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무차별 학살극으로 그린다. 새롭게 발견된 광범위한 문서와 증언에 기초한 이 책들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20세기의 비극에 대해 완전히 새롭고충격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최근 저서로 트럼프 집권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폭정On Tyranny』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바 있다. 그 밖의 저서로 토니 젓과 공저한 20세기를 생각한다Thinking the Twentieth Century』, 러시아, 유럽, 미국 정치를 분석한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TheRoad to Unfreedom』 등이 있다.
랠프월도에머슨상, 라이프치히 도서상, 미국문예아카데미문학상, 카지미에시모차르스키 역사상, 프라킨 국제문학상,
안토노비치상 등을 수상했고, 카네기 펠로십을 받았다.

스나이더는 1930년에서 1945년까지 발트해 연안국들, 벨라루스,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스탈린의 인위적 기근에서1945년 죽음의 행진, 그리고 대규모 인종 청소까지 수많은 유혈이 빚어진 이 경계지역들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적 아집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입었다.
_앤터니 비버, 텔레그래프, ‘올해의 책‘

우크라이나 기근,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대숙청, 소련 포로들의 의도적 아사, 전후의 인종 청소, 이 모든 일에 대해 스나이더는 같은 현상의 다른 면들을 드러냈고,
이로써 큰 기여를 했다. 다른 이들처럼 나치의 잔혹함이나 소련의 잔혹 행위를 따로 연구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서 본 것이다. 스나이더는 이 두 체제를 면밀히 비교검토하기보다 두 체제가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범죄를 저질렀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들은 서로 더 잔혹해지도록 부추겼고, 그에 따라 각각 저지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집단 학살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_앤 애플바움, 「뉴욕리뷰오브북스」

자국의 역사를 꽤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스나이더의 통찰과 비교·대조의 놀라움 앞에서는 전율하게 된다. 스나이더의 꼼꼼하고 의미심장한 책은 ‘스탈린이 더 나쁘냐, 히틀러가 더 나쁘냐‘ ‘소련의 우크라이나 학살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 중 뭐가 더 중대한 범죄냐‘ 같은 무미건조하고 정치관이 일쑤 개입되는 물음에명확하고 통렬한 해답을 준다. 이 책은 그런 문제의 배경을 설명하고, 기록한다. 두전체주의 제국은 사람을 숫자로 만들어버렸으며, 그들의 죽음을 더 나은 미래로가는 필연적인 단계로 간주했다. 스나이더의 책은 어떤 일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를 동정심과 공정성, 그리고 통찰을 더해 설명해낸다._이코노미스트』

의도적인 집단 학살, 그 하나하나의 공포가 생생히 드러난다. (・・・) 스나이더는 희생자, 집행자, 증인들 개개인의 모습을 간략하게 보여줌으로써 이 이야기를 더욱 설득력 있게 끌어간다. 뉴욕타임스북리뷰』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동유럽에서 1400만 명이 학살당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사이의 유럽은 어디서, 어떻게, 왜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를 기록했다. 이를 들여다보면 현대 유럽과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스나이더는 중대한 공헌을 한 가지 했다. 그는 죽어간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아준 것이다. 그들을 단지 희생자로만 치부한 것이 아니라.
뉴리퍼블릭』 편집자들이 뽑은 2010년 최고의 책

티머시 스나이더의 연구는 세세하고 완전하다. 그의 서술은 힘이 넘친다. 스나이더는 독일과 소련의 대량학살을 들여다보며, 핵무기가 나타나기 전 20세기에 자행된 총력전이 얼마나 사악한 것이었는가를 제대로 파헤친다. 그 필수적인 작업은이제껏 터부로 남아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대부분의 전쟁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도 승자가 한 것이 대다수다. 외교와군사 작전은 대체로 서방 국가들이 주도한 것처럼 혹은 미국·영국·소련이라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동맹국들이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활약한 것처럼 그려진다. 그과정에서 홀로코스트는 전쟁과 별개의 이야기이며, 대량학살과 인류의 비극이라는 차원에서 접근된다. 『피에 젖은 땅』은 그런 관점을 뒤흔들어놓는다. () 스나이더는 이 책의 여러 목적 가운데 하나로, 더 광범위한 유럽 분쟁의 맥락에서 홀로코스트에 접근하려 했다. 그것은 곧 그 의미의 복원이었다. 상당한 논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어떤 역사가도 시도 못 할 과제이지만, 유대인들의 고난을 평가절하하는 일 없이 ‘피에 젖은 땅」은 나치의 학살 기계, 그 전모를 포착해냈다.
월스트리트저널」

히틀러와 스탈린이 어떻게 서로의 범죄를 가능케 하고, 발트해와 흑해 사이의 땅에서 1400만 명의 목숨을 앗을 수 있었는가? 예일대학의 역사학자가 필생의 작품으로 써낸 이 책은 읽고 또 읽을 가치가 있다._이코노미스트』 ‘올해의 책‘

분명 우리는 모두 알아야 한다. 모두 이해해야 한다. 모두 실감해야 한다. 스나이더의 책은 막대한 상세 자료와 소름 끼칠 만큼 노골적인 묘사로, 이 암울하지만 투명한 폭로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시대에 관한 한 이 세 가지를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 
데이비드 덴비, 「뉴요커」

이 놀랍고 가슴 아픈 역사책은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서 숨져간 1400만 명의 학살을 다룬다. 그들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만이 아니었다. 330만 명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 강제한 기근으로 숨졌고, 많은 폴란드의 엘리트 또한 숙청되었다.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들 다수는 히틀러에 의해 굶어 죽었다._
파이낸셜타임스』

의도적 대량학살에 있어 히틀러와 스탈린은 아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범죄에 대해 우리는 오랫동안 많은 지식을 쌓아왔지만, 그 성격과 정도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한 면도 있다. 적어도 이 두 거물 독재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다. 우리는 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폴란드와 러시아 서부에서, 그리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삼국에서 벌어진최악의 공포를 미처 알지 못했다. 따라서 티머시 스나이더는 「피에 젖은 땅에서20세기 중반 유럽이 겪은 악몽을 제대로, 확실하게 제시해보려 했다.
_인디펜던트』 ‘올해의 책‘

꼼꼼하게 조사 연구를 했고 (・・) 이 시기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고쳐주는 『피에 젖은 땅』은 너무나 큰 가치를 지닌 책이다. (・・・) 역사 지리학에 있어서 강력하고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애덤 호치실드, ‘하퍼스매거진」

수백만 명의 동유럽인이 독일과 소련, 유럽사 최악의 살인 정권들 사이에 갇혔다.
그들의 이야기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놀라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 『피에 젖은땅은 훌륭한 필치와 명료성과 뛰어난 가독성을 갖춘 책이다. 이 책은 놀라운 최신의 통계 자료도 많이 갖추고 있는 한편, 심금을 울리는 개인사도 담고 있다. (・・・)그중 일부는 익숙하지만, 대부분은 새롭다. 스나이더는 스탈린주의와 나치즘, 홀로코스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꿀 만큼 동유럽을 새롭게 바라보는 중요 인물이다 () 스나이더는 새로운 사고와 조사 결과를 산더미처럼 제시한다. 그 다수

가 처음 보는 것들이다. 참으로 대단한 학술적 연구이며, 여러 신화의 파괴이자 유럽 역사를 새롭게 다시 보는 시작점일 수밖에 없다. "뉴스테이츠먼,

티머시 스나이더의 책은 대단하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잔혹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주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연대기적으로나 지리학적으로나 새롭게 구축해내고, 그리하여 이 역사적 사건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_주이시 포워드』 2010년 5대 논픽션‘

「피에 젖은 땅」의 첫 장을 읽으면, 아니 아무 곳이나 손이 가는 대로 펴서 읽으면,
야심찬 두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의 비이성적인 타락 행위에 전율하며 내용에 빠져들 것이다. () 흥미진진하고, 놀랍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희생자가 쓴 일기,
생존자들의 증언, 당시의 신문기사, 개인의 편지 등에서 수없이 추려냈다. (…) 스나이더는 이런 단편적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해 경고 섞인 고발을 하며,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삼국에 살았던 사람들의 슬픈 운명을 풀어나간다.
_<킨들 데일리포스트>

"살았어, 이젠 살았어!" 고픈 배를 움켜잡고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황량한 들판을 비틀비틀 헤매고 다니던 소년은 이렇게 외쳤다. 소년의눈에 들어온 먹을거리.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 뿐이었다. 들판의 밀은남김없이 징발된 뒤였다. 그 무자비한 물자 징발은 유럽의 집단학살시대를 여는 것이었다. 때는 1933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의도적으로 기아의 늪에 빠뜨리는 중이었다. 그 소년은 결국 죽었다. 우크라이나 동포 300만 명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하에서 그녀를다시 만날 거야." 어느 소련 젊은이는 자기 아내를 생각하며 이렇게말했다. 그 말은 들어맞았다. 그는 그녀 다음 순서로 총살되었고, 그녀와 함께 묻혔다. 스탈린의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 다른 70만명과 함께였다. "그놈들은 내 결혼반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어느 폴란드 장교의 일기는 이렇게 중단되는데, 1940년에 그가 소련 - P5

비밀경찰의 손에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무렵, 폴란드를 동시 침공한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에게 희생된 20만폴란드인의 한 사람이었다. 1941년 말, 러시아의 레닌그라드에서, 어느 열한 살짜리 러시아 소녀는 낡은 일기장에 마지막 말을 이렇게다. "이제 타냐만 남았어." 히틀러가 스탈린을 배신하고, 그 도시를 포위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은 농성 끝에 굶어 죽은 400만 명의 소련인에 포함되었다. 이듬해 여름, 이번에는 열두 살짜리 유대인 소녀가벨라루스에서 아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죽기 전에 인사해. 나 무서워. 그들이 아이들을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던지고 있어."
그녀 외에도 독일군이 가스나 총탄으로 죽인 유대인은 500만 명 이상이었다. - P6

20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중앙부에서,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약 1400만 명의 사람을 살육했다. 그 희생자들이 쓰러져간 땅, 블러드랜드bloodlands는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들에 이른다. 스탈린주의와 국가사회주의가 세력을 굳히던 시기(1933~1938), 독소의 합동 폴란드 침공(1939~1941), 독소 전쟁(1941~1945) 동안, 사상 초유의 대학살이 이들 지역을 덮쳤다.
희생자들은 주로 유대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발트 연안국인들로, 그 땅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었다. 1400만명이 겨우 12년 동안, 1933년에서 1945년까지 학살되던 때는 히틀러 - P6

와 스탈린 둘의 집권기였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의 조국이 전쟁터가 되었다고 해도, 그들은 전쟁보다는 잔혹한 정책 때문에 희생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사상 최악의 살육전이었다. 그리고 참전 군인들의대략 절반이 바로 이곳, 블러드랜드에서 쓰러졌다. 그렇지만 1400만명의 희생자 가운데 전사한 병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대부분은 여성, 어린이, 노인이었다. 아무도 무장하지 않은 채였고, 대개 모든 재산을 몸에 걸칠 것조차 빼앗긴 상태에서 숨을 거뒀다. - P7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을 지켜봤던 독일계 유대인 대부분은 천수를 누렸다. 독일계 유대인 16만5000명을 학살한 일은 분명 끔찍한 범죄이지만, 유럽 유대인 전체가겪은 비극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홀로코스트 전체 희생자의 3퍼센트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1941년 소련을 침공했을 때에야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아낸다‘는 히틀러의 비전이 유럽 유대인의 가장 큰 두 분파와 연결되었다. 그의 유럽 유대인박멸의 꿈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유럽 땅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이 홀로코스트를 들여다보면, 독일은 더 많은 학살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히틀러는 유대인들만 없애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폴란드와 소련이라는 나라도 아예 뿌리 뽑기를 원했고, 그 지배 계층을 박멸함은 물론, 수천만 명의 슬라브족(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폴란드인)도 학살하려 했다. 만약 독일의 소련 침략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그 첫 겨울철에 3000만 명의 민간인이 굶어 죽었을 것이고, 수천만 명이 추방 혹은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이 계획이 실현되진 않았지만, 독일의 동방 점령 정책의 근간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했다.  - P8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을 꺾었고, 그리하여 스탈린은 수백만 명으로부터의 감사와 함께 전후 유럽 질서에서 중요한 축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저지른 대량학살은 히틀러의 그것과 맞먹는 규모다. 그리고 비전시 학살만 따져보면 한수위일 정도다. 소련을 방위하고 현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스탈린은1930년대에 수백만 명의 아사와 75만 명의 총살을 지휘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타국민을 죽인 정도에 전혀 뒤지지 않을 강도로 자국민을 죽였다. - P9

이 책은 한 정치적 대량학살의 이야기다. 1400만 명의 희생자는 모두 소련 또는 나치의 살육 정책으로 생명을 잃었으며, 그 둘 사이의전쟁으로 숨진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들의 4분의 1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어갔다. 또 20만 명은 1939년에서 1941년사이, 즉 독일과 소련이 ‘동맹국으로서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던 시기에 죽었다. 1400만 명의 학살은 때로 경제 계획의 일환이었거나 혹은경제 문제 때문에 가속이 붙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엄격하게 따지자면 결코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빚어진 일은 아니다. 스탈린은 1933년 배고픈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강제 징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히틀러도 그보다 8년 뒤, 소련 전쟁포로들의 식량 배급을 끊으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두 경우 모두 300만 명이상이 죽었다. 1937년과 1938년의 대숙청 시기에 숨져간 수십만 명의 소련 농민과 노동자는 스탈린의 명확한 지시에 따른 희생자였으며, 그것은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히틀러의 명확한 지시대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총과 가스에 희생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 P10

블러드랜드는 유럽 유대인이 살던 땅 모두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의제국이 차지하려 했던 모든 땅, 베어마흐트와 붉은 군대가 싸운 모든땅,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와 독일의 친위대ss가 힘을 집중시켰던 모든 땅이 피로 물들었다. 떼죽음이 일어난 땅은 대체로 블러드랜드에 포함된 땅이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의 정치 지형에서, 블러드랜드는 폴란드, 발트 연안,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그리고 소련의서쪽 변경지대를 의미했다. 스탈린의 죄악은 흔히 러시아에 지은 죄악으로 여겨지며, 히틀러의 죄악 역시 독일에 대한 죄악으로 불린다.
그러나 소련의 가장 심한 만행은 비러시아 변경지대에서 저질러졌고,
나치 역시 독일 바깥에서 살육의 대부분을 자행했다. 20세기의 공포는 집단수용소에 도사리고 있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희생자 대다수를 낳은 곳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다.
대량학살의 장소와 방식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이해는 우리가 20세기의 공포를 보는 시각을 오도한다. - P12

1940년대에 시안화수소는 살충제로 쓰이고 있었다. 일산화탄소는 내연기관에서 만들어졌다. 소련과 독일은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전혀 새로울 것 없던 기술인 내연기관, 철도, 화약무기, 살충제, 철조망 등을 써서 대량학살을 했다.
어떤 기술을 썼든 간에 그 학살은 개인적인 살인이었다. 굶주리고있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감시탑에 있는 장본인들의 눈에 보였다. 총살당하는 이들은 아주 근거리에서, 셋 중 둘은 소총의 가늠쇠 너머로, 셋 중 한 명은 머리에 권총이 겨눠진 채로 보였다. 중독사하게 될 사람들은 색출되고, 기차에 태워지며, 가스실로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소유한 재물을 빼앗기고, 다음엔 입은 옷을 빼앗기더니, 여성들은 머리카락마저 잃었다. 그들 한명 한 명이 다르게죽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 P16

그 엄청난 숫자에 질려, 우리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개인성을 생각못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그녀의 레퀴엠』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요. 하지만 명부는 사라졌고, 아무 데서도 볼 수 없군요." 역사학자들의 수고 덕분에, 우리는 명부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동유럽의 문서보관소가 개방된 덕분에, 그들의 마지막을 다룬 문서도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희생자들이 남긴 목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놀랄 정도다. 가령 키예프의 바비 야르에서 나치에게 생매장될 구덩이를 스스로 파야 했던 젊은 유대인여성의 회상, 빌뉴스 근처 포나리에서 마찬가지로 죽어간 사람의 말,
트레블린카에서 살아남은 수십 명의 증언도 있었다. 우리는 애써 수집된 뒤 묻혔다가 다시 발견된 바르샤바 게토"의 문서보관소도 봤다.
1940년 카틴 숲속에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에게 총살된 폴란드 장교들의 시신과 함께 남긴 일기장들도 찾아냈다. 그해에, 독일군의 살육 과정에서 생매장되려고 실려가던 폴란드인들이 버스에서 던진 쪽지들도 찾아냈다.  - P17

소련과 나치 체제를 비교하며 1951년에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그 실재성 자체가 "그런 체제들이 비전체주의적 세계 속에서 이어진다는 데 근거한다"고 썼다.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도 1944년 모스크바에서 같은 말을 더 쉬운 표현으로 남겼다. "여기서는 사람이 진실과 거짓을 판정한다. 진실이란 그저 힘의 조성물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힘의 구도에 저항하는 진짜 역사일까?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역사 자체를 쥐고 흔들려 했다. 소련은 마르크스주의 국가였고, 그 지도자들은 역사의 ‘과학자로 자처했다. 국가사회주의는 전면적인 변혁의 종말론적 버전이었고, ‘의지‘와 ‘인종‘이야말로 과거의 유산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실행에 옮긴 근거였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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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민주노총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체포조를 투입하는 등초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하루 최대 35만 명 넘게 참여하는 등 파업은더욱 확산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대학교수와지식인, 각계각층 단체의 노동법 재개정 요구 서명발표가 줄을 이었다. 농민들은 쌀과 음식을 싣고 와 농성 노동자를 격려했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려 방문과 파업을 지지하는 신문광고가 줄을 이었다.
해외교민들도 정부를 규탄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벌였다. 내가 있던 독일 마인츠대학교 한국 유학생들도 돈을 모아 『한겨레에 총파업 지지 생활광고를 냈다.
- P272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들의 기본권행사를 제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1996년 정부여당이 날치기 처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리해고제 반대 파업을 경찰력으로 해산하고 주동자를 구속했지만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은 것이다. - P273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 - P273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났을 때도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권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 P274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 동시다발적 ·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국민들은 분개했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얻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 탄핵은 야당이 국회의헌법적 권한을 오남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촛불시위는 국회가국민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데 대한 항의였으므로 헌법을 지키는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 P275

는 민주화운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일도 모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중생들이 광화문 인근에서 작은 촛불집회를시작했을 때 그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별로 없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는 재야, 학생운동, 시민단체, 야당 등전통적인 민주화운동 세력과 전혀 상관없이 젊은 어머니들과 직장인 - P275

들에게 번져나가 거대한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집회시위로 확산되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IN고했다.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 P276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2008년 이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박근혜 정부 역시 국가운영의 많은 분야에서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정책과 행태를 보이는데, 그 기반은 불합리한 제도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대 보수언론과 재벌, 공안세력이 반복 주입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시민들의 의식이 그 기반이다. - P276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 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지만 우리는 둘 모두를 해냈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자유는 개개인의 생활방식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반공 난민촌‘이었던 대한민국은 사회 전체가 ‘병영‘과 비슷했던산업화시대를 통과해 각자의 개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발현되는 민주화시대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이 겪은 사회문화적 변화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P279

앞에서 나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동력이 대중의 욕망이었다고 주장했다.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만든 것도 욕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욕망의 위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망이었다. 자아를 실현하려면 ‘살아가는 방식‘ life style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라이프 스타일은 신념이나 이상의 선택과 같은 추상적 ·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생활을 설계하는 개인적 취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언제 잠들고 깨어날지,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입을지, 어떤 직업을 선택하며 무엇으로여가를 보낼지, 결혼을 할지 말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노래를 부를지, 자녀를 몇이나 낳을지, 종교를 믿을지, 믿는다면 어떤 종교를 어떻게 믿을지, 이웃이나 직장 동료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지, 어느 정당을 지지하며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지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라이프 스타일은 그 사람의 신념과취향, 개성과 욕망을 드러낸다. - P279

지금 광장에서 살고 있다. 병영시대 정부가 한 일의 목적과 방식, 결과가 다 나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괜찮은 방법으로 훌륭한 목적을 제대로 이룬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쁜 방법으로 좋은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 목적과 방법, 결과가 모두 추악한 것도 많았다. 국가의명령에 복종하면서 병영사회의 양지에서 살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자유를 얻기 위해 병영의 담벼락을 허무는 일에 인생을 바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박해받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맨손으로 정부와싸우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많지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대통령의 신민이 아니라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자유롭게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담벼락은 결국 무너졌고 병영은 서서히 광장으로바뀌었다. - P280

저출산 현상은 산업화에 따른 출산율의 자연적 감소와 정부의 강력한 출산억제정책의 합작품이었다. 정부는 출산율 억제를 정책 목표로 설정했으며 강압적이고 노골적인 방법을 동원해 그 목표를 달성했다. 우리의 어머니 세대는 생기는 대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1960년대에는 6남매, 7남매가 보통이었다. 셋 이하면 자손이 귀하다고들 했다. 남아선호 사상이 만연한 가운데 노동시장은 고학력 사무관리직과 저학력 생산직으로 양분되어 있어서 공부를 해야 사람 노릇을 한다는 전통적인 의식이 더욱 강고해졌다. 돈이 없어서 자녀들을 다 공부시킬 수 없는 부모들은 아들 교육에 집중했다.  - P287

오늘날은 정부가 시민의 재산권 행사를 마음대로 제약하지 못한다. 정부는 2003년 전북 부안군에 방사능폐기물 처리장을 지으려 했던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외곽순환고속도로 사패산 터널 공사와 부산 천성산 터널 공사는 자연 생태계 파괴에 대한 우려와 스님들의 강력한 반대투쟁 때문에 장기간 지연되었다. 서울 용산 미군기지가 옮겨가는 평택 대추리, 해군기지를 세우는 제주 강정마을, 한전이 고압선 송전선을 설치한 경남 밀양시 상동면에서도 지역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이 길고 끈질긴 반대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병영시대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다. 정부의 정책을 내놓고 반대하는 것은 병사가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과 같았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갈 위
‘험을 무릅쓰고 대통령에게 대들 만한 토지소유자는 별로 없었다. 정부는 여론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린벨트를 지정했다. - P307

국민교육헌장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말씀‘이었다. 정부는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것은 곧 국가를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1978년 송기숙, 명노근, 이홍길, 홍승기 등 전남대 교수 열한 명은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에서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며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을 하기 위해 학교를 인간화·민주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교육헌장은 제정경위와 선포절차, 내용 모두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고 비판했다. 초안은 서울대 백낙청 교수가 작성했다. 정부는 관련 교수들을 전원 해직하고 송기숙 교수와 성명서를 외신기자들에게 배포한 연세대 성내운 교수를 구속했다. 이런 일로 대학교수들을 구속한다는 게 어처구니없는 일로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감히 국가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다니! 물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거짓말이었다. 그런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민교육헌장은 1993년 초등학교 교과서와 정부 공식 행사에서 사라졌다. - P311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인가?
그 판단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 헌법이 국민 각자에게 준 것은 교육, 근로, 납세, 국방의 의무뿐이다. 그런데 교육과 근로는 권리에 가깝기 때문에 국민의 의무는 결국 소득을 얻으면 법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가는 것, 이 두 가지밖에 없으며 우리는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와 다른 방법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지 말지는 각자 선택할 문제다. 할 마음은 있지만 공개적으로 고백하기가 쑥스러우면 맹세를 하지 않아도된다. 헌법은 양심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할 권리를 보장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민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맹세하게 한다. 나는 이것도 헌법 위반이라고 생각한다. - P312

로기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며 주관적이다. 야간통금은 신체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구속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즐거운 추억으로간직하고 있다. 그때는 자정이 다가오면 버스와 지하철이 북새통을이루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자기 발로 파출소나 경찰서에 가서 기다리다가 오전 4시가 지난 다음 귀가해야 했다. 술집과 학원은 심야영업을 할 수 없었고 기업은 철야작업 야간교대를 하기 어려웠다. 국제선 항공기가 통금 때문에 김포공항에 내리지 못하고 일본이나 홍콩으로 회항하는 일도 벌어졌다. 남자들은 교외로 데이트를 나갔다가 막차를 일부러 놓치는 것을 ‘작업의 정석‘으로 삼았다. 부처님 오신 날, 크리스마스, 12월 31일만 예외였다. 사람들은 단순히 밤거리를 걷고 싶어서 시내로 나갔다. 중학생 시절 크리스마스이브 때 대구 시내 동성로에 나갔다가 어른들 어깨 틈에 끼어발을 땅에 딛지도 못하고 둥둥 떠다녔던 기억이 난다. - P316

이것은 주민등록제도 도입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디지털 부작용이다. 2014년 1월에 터진 농협카드, 롯데카드, 국민카드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는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인터넷 본인 인증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남의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차제에 국민의 주민등록번호 전체를 다시 만들고 국가기관 말고는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거나 보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지구촌 문명국가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주민등록제도를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주민등록번호는 대한민국의 진화과정에 병영국가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화석이라 할 수 있다. - P320

2006년 개교 60주년을 맞은 서울대학교가 해방 이후 60년 동안판매가 금지되었던 책 가운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스무 권을 발표한적이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 (영희), 신동엽전집』(신동엽), ‘순이삼촌(현기영),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빨치산의 딸』(정지아), 사회주의 인간론 (에리히 프롬), 『무림파천황』 (박영창),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민중항쟁의 기록』(황석영),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민중항쟁 참가자들이 쓴 항쟁기록을 소설가 황석영이 손질해서 출판한 책이다. 1980년대 중반 ‘넘어넘어‘라는 약칭으로 회자되었던 이 책은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국민에게 널리 알린 최초의 공개 출판물이었다. 금서가 된 바람에 더 유명해진 무협소설무림파천황이 불온서적으로 지목당한 이유는 좀 우습다. 정와 사파의 대결을 변증법으로 설명한 딱 한 쪽 때문이었다. 그때 공안당국자들은 변증법을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 P321

유신시대에는 중앙정보부의 지휘 아래 법무부, 문교부, 문화공보부, 국방부, 내무부 등 유관기관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금서목록을 정했다. 명분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불온서적과 미풍양속을해치는 음란서적을 규제하는 것이었지만 정부를 비판하거나 당국자들의 눈에 거슬리는 모든 서적이 판금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를들어보자. 『길을 묻는 그대에게」(김동길), 『지성과 반지성』(김병익), 『이성과 혁명』(허버트 마르쿠제), 『전환시대의 논리』(영희), 학교는 죽었다』(라이머), 『죽으면 산다』(장준하), 『어느 돌멩이의 외침』(유동우), 『순 - P322

이삼촌』(현기영), 『해방의 길목에서 (박형규)가 포함되었다. 수필, 문학평론, 철학, 르포르타주, 소설, 사회비평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판매 금지한 것이다.
누가 어떤 절차를 거쳐 금서를 정하는지, 그 결정이 문제가 있을 경우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323

전두환 정부는 유신시대에 만든 금서목록에 『김형욱 회고록』 (박사월), 『혁명의 연구』 (에드워드 H. 카),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이야기 경제학』(김수길), 『변증법이란 무엇인가』(황세연), 『겨레와 어린이」(이오덕 외) 등 더 많은 책을 추가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파악한 판매금지도서목록은 노태우 정부까지다. 이때는 레닌, 마오쩌둥, 스탈린 등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책과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온 역사서, 북한 주체사상과 관련된 책을 대량으로 판매 금지했다. 1980년대의 혁명적 분위기에서 대학생활을 한 이른바386세대 청년들이 그런 책을 탐독했기 때문이다. 김영삼-김대중-노 - P323

무현 대통령 때는 정부 차원의 목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에 공개된 국방부의 장병 금서목록에서 보듯 개별 국가기관의 목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23권의 국방부 금서목록에는 『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북한의 우리식 문화』(주강현), 『통일, 우리 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전상봉),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노암 촘스키), 『미군 범죄와 한미 SOFA』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소금꽃 나무』(김진숙),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김남주 평전』(강대석), 『대한민국史』(한홍구), 『세계화의 덫(하랄드 슈만 외), 『삼성왕국의 게릴라들』(프레시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방부 금서목록에 오른 책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국가의 사상통제에 대한 시장의 반격이었다. - P324

민주화 이후에도 방송 사전심의제도는 폐지되지 않았다. 1993년가수 정태춘 씨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음반을 제작·발표함으로써문화관광부가 자신을 고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정투쟁을 하면서사전심의를 강제한 ‘음반 및 비디오물에 대한 법률‘에 관한 위헌심판제청을 재판부에 냈다. 마침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한 4집 앨범 ‘컴백홈‘에 수록된 <시대유감>에 대해 공윤이 가사 수정을 지시하자 서태지가 가사 전체를 삭제하고 연주곡만 수록함으로써 공윤의 검열에대항한 사건이 일어났다. ‘문화 대통령‘ 서태지의 팬들은 표현의 자유를 빼앗은 공윤에 비난을 쏟아부었다. 결국 공윤은 1996년 6월 사전심의제를 폐지했고 넉 달 후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의제도가 표현의자유를 규정한 헌법 제21조 위반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 P328

이어령, 현승종, 양주동, 구상, 박종홍 등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과문인들이 고전독서운동에 힘을 보탰다.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지원이 시작되면서 고전독서운동은 암기능력을 테스트하는 경연대회로 변해버렸다. 1968년 11월 제1회 대통령기쟁탈 전국자유교양대회가 열렸고 정일권 국무총리가 시상을 했다. 마치 고교야구대회나 전국체전을 할 때처럼 전국 학교와시도에서 선발한 대표선수들이 출전해 독후감을 쓰고 필기시험을 보았다. 이 대회 전성기였던 1974년에는 전국 학생의 90퍼센트가 지역예선에 참가했다. 육영수 여사는 해마다 입상자를 청와대로 초대해다과를 베풀었다. 1975년 마지막 대회를 할 때까지 연인원 1,900만명이 참가했고 협회는 132종 800만 부의 고전을 보급했다.  - P330

병영국가의 최대 피해자는 노동자였다. 국가가 특정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강제하면 국민이 아프고 불편하다. 원하는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면 삶에 대한 회의가 생긴다. 병영국가 대한민국의 적은 북한만이 아니었다. 소련, 중국,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같은 소위 ‘국외공산계열‘도적이었다. 그 나라들의 국가이데올로기가마르크스주의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단결을 호소하고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라고 선동했다. 그래서 병영국가 권력자들은 노동자를 북한과 ‘국외공산계열의 잠재적 협력자로 보았으며 그들이 계급적으로 각성하거나 단결하지 못하도록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여기서 특별한 관심이란 철저한 감시와 무자비한 억압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은 심리적고통뿐만 아니라 생존권과 인권을 박탈당하는 ‘물리적 고통‘도 겪어야 했다. - P331

자주적인 노동조합연합체는 광장의 시대가 열린 후에야 비로소탄생했다. 1995년 11월에 출범한 민주노총이 그것이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항의 총파업을 치르면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한 민주노총은 산하에 16개 산업별 노조가 있는데, 거대한 자동차회사 노동조합이 속한 금속노조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공공운수연맹 등이 핵심이다. 민주노총은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10여 년 동안 조직적·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만성적인 정파갈등과 대기업 노동조합의 자기중심적행태 등으로 대중의 신망이 크게 하락했으며 2008년 이후에는 정부의 노골적이고 일상적인 탄압에 직면했다.
권력자는 역사에 자신의 인격을 각인한다. 한국현대사에 가장 뚜렷한 인격의 각인을 남긴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 지위도 권력도 없는 사람이 역사에 자신의 인격을 각인하기도 한다. ‘영원한 청년 노동자 또는 ‘노동열사‘ 전태일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 P332

스님도 권력자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현대사에 인격을 각인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는 가톨릭과 불교라는 종교적 배경이 있었다. 전태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1970년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책자를 껴안은 채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온몸이 불타는 고통 속에서 그는 외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전신에 3도화상을 입은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타계할 때까지 40년 세월을 ‘노동자의 어머니‘ 로 살았다. - P334

전태일이 청원한 것은 하루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줄이고, 매주 일요일을 쉬게 하며, 건강진단을 제대로 하고, 시다의 급여를 50퍼센트 인상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 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와 사용자들은 이 요구를 냉정하게 외면하고 짓밟았다. 전태일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분신을 결심했다.
전태일 이전에도 전태일 이후에도 억압과 착취에 항거하면서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역사에 전태일만큼뚜렷한 각인을 남기지는 못했다. 전태일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어린여성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분신했다.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 가운데 급여수준이 가장 높은 재단사였다. 다른 유능한재단사들은 돈을 모아 양복점을 내고 사장이 되는 것을 꿈꾸었고 실제 그렇게 한 사람이 많았다. 타인의 생명과 건강과 복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다.  - P335

그런데 전태일을 분신하게 한 것은 어떤 이념이 아니라 어리고 약한 이옷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가 남긴 일기는 그 자신도 어리고 약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어리고 약한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가 더 어리고더 약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 행위가 수많은 국민의 영혼을 울렸다. 그는 한국 사회가 빈곤과 억압, 착취와 인권유린에 고통받는 거대한 노동자 집단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드러내 보였으며, 대한민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주었다.
분신 소식을 들은 대학생들이 평화시장으로 달려왔다. 조영래, 장기표 같은 사람들이었다. 반독재 · 민주화 투쟁에 몰두하던 대학생과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70년대이후 노동운동, 노학연대와 청년지식인들의 노동현장 투신,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 민주노총의 탄생은 모두 전태일의 분신에서 시작되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곧바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했다. - P336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88년 7월, 문송면이라는 열다섯 살 소년이 사망했다. 그는 집이 가난해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서울에는야간학교에 다니게 해주는 공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고향인 충남 서산을 떠나 혼자 서울에 왔다. 그런데 영등포구 양평동 공장에 취직해온도계에 수은 넣는 일을 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손발이 마비되는 증상이 나타나 집으로 돌아갔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원인을 알 수없었다. 결국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중독 진단을 받았고 넉 달 뒤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은 당시 우리나라 산업보건 현실과 노동행정의후진성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때는 직업병 전문병원이 없었다. 회사는 문송면 군의 병이 회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산재신청서 날인을 거부했다. 노동부는 서울대병원이 산재보험 지정 의료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요양신청서를 반려해버렸다. - P337

문송면군 사망 직후였던 1988년 7월 원조가족협의회‘가 발족했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비롯한 환경단체와보건의료 전문가들이 여기에 결합했다. 박영숙, 노무현 등 야당의원들이 진상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부는 정부의 무관심에 격분한 원진 피해자들이 88올림픽 성화 봉송로를 막으려고 하자 비로소협상에 응했다. 원진레이온은 몇 년 후 폐업했지만 이 투쟁은 그 후10여 년 더 지속되었다. 문제의 설비를 중국 기업에 팔아치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3년 설립된 비영리 공익법인 원진재단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치료와 재활을 돕기 위해 구리시에 원진녹색병원 원진복지관을 지었다. - P338

다시 19년이 지난 2007년 11월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했다. 스물세 살 여성 노동자 황유미 씨가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3년부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한 황유미 씨는 2년 만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07년에 숨졌다. 1년 전에는 같은 공정에투입되었던 동료 한 사람이 림프구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두 달 만에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는 2000년 이후최소한 여섯 명의 백혈병 환자가 생겼다. 화성공장과 온양공장에서도 백혈병 환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삼성반도체는 백혈병의 업무연관성을 부인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은 극히 형식적인 역학조사를 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보고서를 냈다. 2009년 5월 근로복지공단은 백혈병에 걸린 삼성반도체 노동자 다섯 명의 산재신청 승인을 거부했다. 백혈병이 직업병이라는 의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 거부 사유였다.  - P339

황유미 씨 사건으로 출발했던 대책위원회는 2008년부터 다른 반도체 회사의 직업병 피해자 문제를 함께 다루기 위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있다. 반올림에 직업병으로 제보를 해온 사람은 2013년까지 모두171명이었고 그중 70여 명이 세상을 떠났다. 백혈병, 뇌종양, 유방암, 루게릭, 다발성경화증 등 병명은 다양했지만, 모두 암이 아니면희귀질병이었고 환자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39명이 산재보험보상을 신청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단 세 사람만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질병 원인을 입증하기 어렵다"라며 모두 기각했다. 반올림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까지 진행과정은 1988년 문송면 군과 원진레이온 사건 때와 거의 비슷해 보인다. 가장 큰 차이는투쟁의 대상이 글로벌 기업집단인 삼성그룹 소속 최첨단 기업이라는사실, 그리고 민주노총과 여러 시민단체, 자발적 후원자가 되어준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5월,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이 심장마비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황에서 뒤늦게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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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시어머니가 고관절이 부러져 입원하셨다. 연락을받고 황급히 달려가서 병실 문을 여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의 생리적 반응에 나조차 당황스러웠다. 늘 세로로 서 계시던 분이 가로로 누워 있으니 낯이 설고 며칠 사이 확 쪼그라든 모습에 안쓰러움이 치밀기도 하였지만, 실은 울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심장계 질환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긴병에 효자 없다지만, 엄마가 다만 일주일이라도 앓다가 돌아가셨으면이별을 예비했을 텐데 싶어 두고두고 한스러웠다. 입원실에 누워 계신 시어머니를 보는 순간 느닷없이 엄마의 얼굴이 개입한거다. 효심 아니라 통한, 이 눈물의 사회학은, 엄마 장례식장에서 배운 것이기도 하다. 엄마 친구분이 하도 넓게 울어 이제 고만 우시라고 했더니 그러셨다. "니 엄마 가엾어 우는 게 아니다. 내 설움에 우는 거지." - P134

그 후로 종종 목도했다.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시청분향소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들려왔다.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자기 설움 토해 내는 갖가지 궁상과 청승의 사연들소방 호스보다 긴 눈물의 행렬들. 고역의 시절을 살아 내느라지친 민초들은 광장에 마련된 공식 초상집에 와서 꺼이꺼이 울다가 가곤 했던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친절한 복희씨》에서눈물에 담긴 미묘한 복합 감정을 멋진 문장으로 정리했다. 첫사랑이었던 그에게 청첩장을 건네니 그 남자가 울더라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건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우는 건 아니다."
- P135

투명한 눈물의 속사정은 이리도 복잡하다. 2011년 9월 31일 향년 여든한 살로 영면에 드신 이소선 여사의 생애 마지막두 해를 그림자처럼 붙어서 기록한 태준식 감독의 제작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더 놀다 가지‘라는 말을 하는 그녀에게
‘자주 찾아뵐게요‘를 수없이 반복하며 나오던 창신동 골목에서전체의 그림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조직과 효율이라는 몸에밴 그동안의 작업 관성을 버리고 작업했다." 따뜻하고 사려 깊은 감독의 눈길이 고맙고도 궁금했다. 그의 가슴에는 어떤 큰 - P135

트 비애의 강물이 있어 한 삶을 이리도 고요히 받아 낸 걸까. 덕분에 나는 이소선 여사의 삶에 나의 삶을 비춰 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는 게 힘든데 그 힘듦에서 어떻게 재밌고 값지게 살아야할까, 삶의 기본값으로 주어진 설움과 청승을 어떻게 품고 갈까,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아주 구체적으로는 어디에 돈과 시간을 써야할까를 생각했다.
이소선 여사는 생전에 집회 현장에서 연행이나 구류로 끌려간 횟수만도 250회가 넘는다는데, 어째서 영화에는 억척스러운 투사가 아닌 다정한 선녀가 노니는가. 마음이 너르고 곧고성정이 귀엽기까지 한 어머니의 영혼을 빌리고 싶다. 남의 입에 밥 들어갈 끼니를 걱정하느라 입술이 부르트고 주름이 늘고검버섯 피어난 어머니의 생은 얼마나 시적인가. - P136

낮을 가져다 내 허리를 찍어라
찍힌 허리로 이만큼 왔다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또 찍어라
또 찍힌 허리로 밥상을 챙긴다
비린 생피처럼 노을이 오는데
밥을 먹고
하늘을 보고
또 물도 먹고
드러눕고

_허수경의 시 <시>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양푼의 식은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에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는 더운 목숨이여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황지우의 시 거룩한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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