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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이따금씩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 무의미한 말을 하거나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때가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다른 때 같으면처음에는 망설였을지라도 결국에는 브루노의 유혹에 넘어갔을 것같다. 물론 그는 내가 좋아할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따지자면 안토니오도 특별히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남자들과는 천천히 정이 드는 법이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이상적인 남성상에그다지 부응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때 브루노는 정중하고 관대했다. 상황이 달랐다면 쉽게 내 애정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릴라의 행동을 막고릴라와 니노의 관계에 장애물이되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행동 때문에 나와 그녀가 처하게 된 상황을 똑바로 인식시키고 싶었다. - P375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고민했다. 릴리는 정신이 멀쩡했다. 그녀는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였다. 니노를 사랑하고 원한다고 내게 속삭였다. 그렇다. 릴라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썼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올 법한, 우리 동네에서는 아무도 사용하지않는 표현이었다. 나도 속으로 생각할 때만 쓰는 표현이었다. 우리동네에서는 ‘좋아한다‘는 말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릴라는 아니었다. 릴라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릴라는 니노를 사랑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송두리째 없애버려야 할 감정이었지만.
릴라는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스테파노가 돌아오는토요일 저녁부터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릴라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내게 자기를 믿어달라고 했다. 대신 이제 얼마 남지않은 시간은 오롯이 니노에게 바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 P381

영리한 거짓말을 생각해냈다는 만족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범으로서의 희열은 사라지고 분노가 되살아났다. 나는 왜 이렇게 릴라를 도와주고 그녀를 감싸고 있는 건지 자문해보았다. 남편을 배신하고 성스러운 결혼의 언약을 어기고 아내라는 짐을 던져버리려는릴라를 말이다. 스테파노가 알게 되는 날이면 릴라의 머리를 박살내려 할 것이다. 불현듯 릴라가 신부복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서 속이 뒤틀렸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이번에는 그 대상이 사진이 아니라카라치 부인 자신이었다. 이번에도 릴라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나를끌어들였고 니노는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 니노는 가위나 풀, 페인트같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망가뜨리는 데 필요한 도구였다. 릴라는내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걸까. 왜 나는 매번 그녀에게 휩쓸리고 마는 걸까. - P387

이에 비해 릴라가 침묵하는 이유는 그녀가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릴라가 무념무상의 백지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니노와 헤어지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남겨두고 온 것 같았다. 무슨 일을 겪었고 지금은 어떤 심정인지 설명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나는 우리 둘의 차이를 깨닫고 우울해졌다. 릴라는 고통과 행복이 뒤섞인 혼미한 상태였다. 지난밤 일을 되짚어볼수록 내 경험이 릴라의 경험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바라노 마론티 해변에 남겨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에서 눈을 뜬 내 새로운 자아마저도 그곳에 남겨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자신의 일부분을 남겨둔 채 이별한 이에게 당장이라도 되돌아가 재결합하고싶은 절박한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릴라는 달랐다. 나는 릴라의 시선과 반쯤 열린 입, 꼭 쥔 주먹에서 돌아가고자 하는 갈급한 심정을 읽어 내릴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더 당당하고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막상 릴라 곁에 서니 물을 잔뜩 먹은 흙처럼 질척이는 느낌이었다. - P412

릴라의 공책을 나중에 읽게 되어 다행이었다. 공책에는 그날 니노와 지냈던 일이 여러 장에 걸쳐서 묘사되어 있었다. 릴라가 쓴 내용은 내가 다룰 수 없는 영역의 글이었다. 릴라는 육체적 쾌락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 그녀의 경험을 나의 경험과 비교할만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대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묘사를 했 - P412

는데 그런 그녀의 글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릴라는 결혼식 이후 이스키아 섬에 오기 전까지 자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당시의 느낌을 세세히 묘사했다. 갑자기 기운이 빠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뇌와 두개골사이에 공기방울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고 했다.
모든 것이 다급히 움직이면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고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사물에 몸이 부딪쳐 상처받는 느낌이었다고했다. 배와 눈이 정말로 아팠다고 했다.
릴라는 언제나 감각이 둔한 상태였다고 했다. 온몸이 탈지면에 꽁꽁 싸여 있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현실세계가 아닌 자신의 육체와자기를 감싼 탈지면 틈새에서 상처가 빚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했다. 곧 죽게 될 거라는 상상은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아무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 P413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다고 했다. 아무것도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불현듯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고 했다. 멜리나처럼 미쳐버리기 전에, 대로변을 가로지르다 트럭에 치여 끌려가기 전에. 그런 릴라를 변화시킨 것이 바로 니노였던 것이다.
그는 릴라를 죽음에서 구해냈다. 처음 갈리아니 선생님 댁에서 함께 춤추자고 했을 때부터 그랬다. 그때 릴라는 그가 내민 구원의 손길이 두려워 춤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이스키아섬에서 함께 시간을보내면서 니노가 내민 구원의 힘은 강해졌다. 그는 릴라에게 감성을되돌려주었다. 무엇보다도 자존감을 부활시켰다. 그랬다. 말 그대로부활시켰다. - P413

릴라는 여러 장에 걸쳐 부활의 의미를 다루었다. 부활이란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이다. 기존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형용할수 없이 기쁜 새로운 구속에 얽매이는 것이다.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이자 기존 현실을 뒤집는 봉기이기도 한 것이다. 니노와 릴라, 릴라와 니노는 함께 인생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인생에서 독기를 제거하고 오직 사유와 삶의 즐거움만으로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릴라의 글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물론 릴라의 표현은 훨씬 더아름다웠고 나는 그녀의 글을 요약했을 뿐이다. 그때 차에서 내게이런 심정을 털어놓았다면 그녀의 충만함에 내 공허함이 비교되어나는 더 괴로웠을 것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 내가 니노에 대해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릴라가 경험했다는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실은 그런 감정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중에 그런 감정을 느끼더라도 결코 릴라처럼 강렬하지 않고 미약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 P414

니노와의 사랑이 그저 여름휴가 동안의 불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릴라의내면에서 그녀를 깊이 동요케 할 격렬한 감정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 금기를 깨뜨린 후 눈치아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언제나처럼 자격지심과 릴라가 쟁취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릴라에게 지고 싶지 않아 내가 밤하늘 아래 바닷가에서, 마론티의모래사장에서 처녀성을 잃었다는 말을 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찾아들었다. 상대가 니노 아버지였다는 사실만 감추면 된다고생각했다. 선원이나 미제 담배를 파는 밀수꾼이었다고 하면 된다.
그러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마나 멋진 경험이었는지 이야 - P414

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내게 일어난일과 내가 느낀 쾌락을 릴라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나는 이내 깨달았다.
나는 그저 릴라에게서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내 이야기를하려는 것이었다. 그녀가 니노에게 얻은 쾌락에 대해서 듣고 나의쾌락과 비교해서 우월성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다행히 나는 릴라가 내게 자기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챘다. 말해봤자 멍청이처럼 나만 모든 일을 떠벌리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릴라처럼 침묵을 지켰다. - P415

나는 그런 상념을 떨쳐버리고 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니노와 릴라가 없는 미래를 계획하고 그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모든 일에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법을 익히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는 법을 습득했다. 서점 주인이 내 몸에 손을 대도 분개하지 않고 조용히 밀쳐냈고 진상 손님들에게도 선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나는 매일같이 되뇌었다.
‘이렇게 생겨먹은 이상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사투리를 쓰고 돈은땡전 한 푼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가질 수 있는 만큼만 가지자. 참아야 할 때는 끝까지 참자. - P427

실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는 체하기 싫어하는 나의 또 다른자아는 릴라가 어디로 튈 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그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 대체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끔찍한 이야기와 마르첼로의 소심한 복수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돈, 자동차, 좋은 집, 가구와 장식품을 잃고 돈이 없어서 휴가를 못 가게 될까봐 안절부절못하면서 서로 다투는 것이 나와는 무슨상관이란 말인가. 이스키아 섬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니노와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릴라는 또다시 카모라 집단과 거래를 벌일생각을 했단 말인가.
나는 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 시험이나 봐서 합격해야겠.
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이 지저분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최대한 멀리 떠날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마리아 아주머니가 팔에아이를 안고 내 앞으로 다가오자 마음이 풀어져서 나도 모르게 말했다. - P440

니노가 이성을 되찾았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와 소설과 예술이라고? 사람이 변하는것은 정말이지 한순간인가보다. 관심을 보였던 분야도 감정도 쉽게변하는가보다. 번지르르한 말을 또 다른 번지르르한 말로 대체하면그만이다. 시간은 겉으로 보기에만 연계성이 있는 단어들의 흐름일뿐이고 결국에는 말이 많은 사람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는 니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좋아하는 것을 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래. 현실을 받아들이고이제 각자의 길을 걷도록 하자. 마리사가 니노에게 나를 만났고 내가 그에 대해서 물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 후부터 알폰소와 이야기할 때도 니노와 릴라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 P442

이렇게 해서 나는 처음으로 나폴리를, 캄파니아 주를 벗어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두려웠다. 기차를 잘못 탈까봐,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화장실을 찾지 못할까봐, 날은 저물었는데 생면부지의 도시에서길을 잃을까봐, 강도를 만날까봐 두려웠다. 수중의 돈을 어머니처럼모두 브래지어 안에 넣었다. 몇 시간을 불안한 경계심과 시간이 갈수록 커져가는 해방감이 공존하는 미묘한 상태로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기분은 좋아졌지만 시험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늘색에 가까운 은발의 선생님은 이 시험이 고등학 - P455

특히 라틴어가 정말 어려웠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시험은 전반적으로 난도가 높았다. 교수님들은 모든 과목에서 내 지식을꼼꼼하게 검증했다. 나는 더듬더듬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답은아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척했다. 이탈리아어 교수님은 내 목소리마저 거슬리는 듯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학생은 글을 쓸 때 논리적으로 주제를 전개하지 않고 논지가 흔들리는군요. 내가 보기에 학생은 비판적인 논리전개 방식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지식이 없는 분야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 같아요.
나는 절망했다. 내가 하는 말에 자신감을 잃었다. 교수님은 이런내 상태를 알아채고는 비웃듯이 바라보면서 최근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분명 이탈리아 작가들의 작품을 뜻하는 것이었을 텐데 순간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떠오른 생각 중에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주제를 골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 P456

나는 펑펑 울었다. 정신을 놓고 있다가 가장 전도유망했던 내일부분을 어딘가에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뛰어난 아이가 아니란 것은 이미 알고있지 않았던가. 그래, 진정 뛰어난 것은 릴라지. 진정 뛰어난 것은 니노야, 나는 그저 오만방자했을 뿐이야. 이번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거야.
그런데 의외로 나는 시험에 합격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 방과매일 폈다 접었다 할 필요 없는 침대와 책상과 필요한 모든 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수위의 딸인 나 엘레나 그레코는 태어나고 자란 우리 동네를, 나폴리를 19세의 나이에 혼자서 떠나게 되었다. - P457

노르말레 대학교에서 보낸 시기는 릴라와 나의 우정을 떠나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처음 대학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수줍음 많은 촌뜨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표준어를 쓸 때 내 말투가 자칫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문어체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애써서 생각해낸 문장을 말하다가 표준어로 적당한 단어가생각나지 않아 사투리를 표준어화해서 만들어낸 단어로 문장을 메울 때 가장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말투를 고치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일반적인 에티켓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고 음식을 씹을 때도 쩝쩝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민망해하는 것을 눈치채고서야 그러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대화를 끊기도 하고 잘 알지도못하면서 문외한인 분야에 끼어들기도하고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친밀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나중에야 문제를 깨닫고 친절하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노력했다. - P464

무엇보다도 나는 적을 만들지 않았다. 여학생 중에서 적의를 보이는 아이가 있으면 상냥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상대방을 공략했다. 친절하면서도 겸손한 자세로 대하면서 상대방의 태도가 누그러져 그쪽이 오히려 나를 찾게 될 때도 항상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교수님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교수님들을 대할 때는 더신중한 태도를 취했지만 목적은 같았다. 그들에게 인정받고 호감과애정을 얻고 싶었다. 엄격하고 다가가기 힘든 교수님은 헌신적인 자세와 평온한 미소로 대했다.
나는 시험에 성실하게 임했고 예의 그 혹독한 자제력으로 공부했다. 힘들기는 하지만 지상낙원같은 이곳에서 성적 때문에 쫓겨날까봐 두려웠다. 나만의 공간에 전용 침대,책상,의자, 수많은 책이있는 곳. 나폴리 촌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 주변은 언제나 공부를하고 공부한 것을 토론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 내가 어찌나 무섭게 공부했는지 어떤 교수님도 차마 내게 30점 이하의 점수를 주지 못했다. 1년 후 나는 학교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학생 가운대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 P465

시간은 평온하게 흘러갔고 중요한 사건들도 공항 컨베이어벨트 위에실린 여행 가방처럼 지나갔다. 하나씩 순서대로 들어 올려서 페이지위에 옮겨다놓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동안 릴라에게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는 일은 이렇게 쉽지 않다.
릴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컨베이어벨트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지거나 빨라진다. 급커브를 돌기도 하고 경로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러면 여행 가방이 떨어지고 가방이 열려 안에 든 것들이 여기저기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흐트러진 물건이 내 짐과도 섞여버려서 결국에는 릴라의 물건을 주워 담기 위해서 막힘없이 술술 써내려갔던 내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지금까지 너무 요약해서 썼던 이야기를 다시풀어써야 했다. - P470

만약 릴라가 나 대신에 노르말레 대학에 입학했다면 릴라도 나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했을까. 로마 출신 여학생의뺨을 때렸을 때, 나는 릴라의 영향을 얼마나 받은 것일까. 멀리 떨어져 있는 릴라가 어떻게 내 가식적인 온화함을 걷어내고 내게 필요한결단력을 주었으며 욕설까지 퍼붓게 만들었을까. 나는 어디까지 릴라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망설임과 두려움 속에서도 결국은 프랑코의 방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것도 릴라의 과감함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프랑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와 내말라붙은 감성에 대해 깨달았을 때의 불만도 릴라가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것인지 보여주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내삶에 투영된다.  - P47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내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릴라는 굳이 말하지 않고도 내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고릴라에 대해전혀 몰랐던 사실도 나중에 릴라의 공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을 서술하면서 어느 정도의 여과와 시간차, 부분적인 진실과 반쪽짜리 거짓말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언어라는 불확실한 도구를 기반으로 힘들게지난 시간을 측정한 결과물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릴라의 고통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고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기술로 스테파노가 아닌 니노의 아이를 가졌기에 나는 릴라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P471

릴라가 우리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짓을 하려고 했기에,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남편과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부유함을 버리고 애인과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에 빠뜨리려 했기에 나는 릴라가 그만큼이나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이나 영화, 만화에 나올법한 격정적인 행복감을 느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부부간의 행복은 내 관심 밖이었다. 내 관심은 열정에 의한 행복이었다. 내가 아닌 릴라를 찾아온 선과 악이 뒤섞인 극단의 혼동 상태와 같은 행복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내가 틀렸음을 안다. 스테파노가 우리를 데리고 이스키아 섬을 떠날 때를 돌이켜볼 때 배가 해안에서 멀어지는 순간릴라가 느꼈을 아픔을 이제는 실감한다. 릴라는 당장 다음 날부터매일 아침 해변에서 니노와 만나고,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 - P471

을 속삭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함께 수영도, 키스도, 포옹도, 사랑도 나누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닫고 격렬한 아픔을 느꼈을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카라치 부인으로서의 그녀의 인생은 사라져 진정성을 잃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전략을 짜고 전투를 벌이고 전쟁을 준비하거나 동맹을 맺는 삶. 짜증스런 공급업자들과 고객들, 무게를 속여 계산대 서랍에 돈을 쌓는 데 전념하는 삶은 의미를 잃었다. 그녀의 삶에서 구체적이고 진실한 존재는니노뿐이었다.
릴라는 그런 니노를 갈망하고 있었다. 단 한순간도 그를 원치 않은 적이 없었다. 밤이면 어둠에 잠긴 침실에서 잠깐이라도 그를 잊어보려고 남편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그 순간 니노에 대한 욕망이 오히려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껴져 스테파노를처음 본 사람처럼 밀어냈다. 릴라는 침대 한구석에서 울면서 욕설을퍼부으며 그를 거부하거나 욕실에 들어가 열쇠로 문을 잠가버렸다. - P472

평생 릴라는 ‘경계의 해체‘ 현상이 사물보다 사람에게 더 심각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허물어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가장 두려워했다. 지난날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오빠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기운을 잃었고 스테파노가 약혼자에서남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고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릴라의 공책을 보고서야 첫날밤 경험이 릴라에게 얼마나 큰상처로 남았는지 알게 되었다. 내면의 욕망과 분노 때문에 또는 음흉한 계획이나 비열함 때문에 남편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할까봐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게 되었다. 밤에 눈을 뜰 때마다 남편이 변형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을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남편이 물집같은 것으로 변할까봐 두려워했다. 체액으로 꽉 차서 물집이 터지면살이 흐물흐물해져 흘러내릴 것을 두려워했다. 가구와 아파트와 스 - P496

테파노의 아내인 릴라 자신까지도 주변의 모든 것과 함께 부서져서살아 숨쉬는 더러운 그 물질에 흡수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날릴라는 등 뒤로 집 문을 닫는 순간 하얀 구름에 둘러싸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릴라는 그 상태에서 지하철을 타고 캄피 플레그레이에 도착했다. 그제서야 형체가 없는 물체들이 점령하고 있는 물컹한 공간을 떠나서 드디어 자기가 온전한 상태 그대로 머무를 수 있는 곳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자신도 자기 주변에 있는 사물도 망가지지 않을 곳이라고 생각했다. - P497

그때 릴라는 또 한 번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는 행위에 대해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았다. 과거의 릴라와는 안녕이었다. 익숙한 큰길도구두도, 식료품점도, 남편도, 솔라라 형제도, 마르티리 광장과도 이제 끝이었다. 나와의 관계도, 신부이자 부인이라는 사회적 신분도 흩어져 사라졌다. 기존의 릴라에서 오직 니노의 연인이라는 모습만 남겨두었다. 니노는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니노는 매우 감동했다. 릴라를 껴안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누가 들이닥칠까봐 걱정이 되는지 문이란 문과 창문이란 창문을 꼭꼭 잠갔다. 포리오에서 보낸 밤 이후 처음으로 둘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 다음 니노는 일어나서 공부를 했다. 불빛이 너무 약하다고 불평을 하면서.
릴라도 침대에서 일어나 니노의 복습을 돕기 시작했다. 일 마티노지에 보낼 기사까지 함께 검토한 다음에야 새벽 3시에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밖에는 비가 내렸고 바람에 유리창이 흔들렸다. 새로운 환경이 아직 어색하기는 했지만 릴라의 마음은 평안했다. - P498

그랬던 그가 대학교에서 쫓겨나 그의 명성이 사라지자 나도 그 후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좋은 가문 출신의 학생들은 이제 일요일마다 나를 그들의 파티나 소풍에 초대하지 않았다. 몇몇은 다시 내나폴리 억양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프랑코가 내게 선물했던 모든 것은 이제 유행이 지난 한물간 물건이 되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내 삶에 들어온 프랑코의 존재가 내 현실을 잠시 가려 주었을 뿐 전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다른 이들과 완전히 동화된 것이 아니었다. 기를 쓰고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어내고 어느 정도의 호감과 존중을받기는 했지만 당당한 태도로 터득한 지식에 대한 최고의 결과를 보여주는 학생 축에는 속하지 못했다.
나는 평생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잘못 할까봐, 너무 과장된 어조로 말할까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까봐, 옹졸한마음을 들킬까봐, 흥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까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이다. - P563

"북대서양조약기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겠어요."
"우리 입장은 언제나 반전주의였다.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기독교민주당과 협력하면서 반미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식의 문장들이 빠르게 오갔다. 둘 다 이런 토론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익혀온 습관 같았다. 두 부녀를바라보면서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을 평생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회 문제를 아주 사적인 문제로 만드는 일종의 훈련이라고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회 문제를 그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정보로 과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나 실력을 인정받기위한 이용 수단으로 축소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이었다. - P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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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봄, 릴라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내게 금속으로 만든 상자를 하나 맡겼다. 상자에는 공책 여덟 권이 들어 있었다. 남편이 읽을까봐 집에 둘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상자를 받았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칭칭 묶어놓은 상자의 상태에 대해서 내가 놀리듯 두어 마디 던졌던 기억이 있다. 당시 우리 관계는 최악이었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끔 마주쳐도 릴라는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고 나를 여전히 다정하게 대했다. 예전처럼 모질게말하지도 않았다. - P15

릴라는 내게 절대로 상자를 열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차에 몸을 싣자마자 나는 공책을 꺼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기는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부터 릴라에게 일어난 일상적인 일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기는 했지만 일기라기보다는 혼자 고집스럽게 써온 작문 연습의 흔적 같았다.
릴라의 글은 묘사력이 뛰어났다. 한 줄기 나뭇가지, 저수지와 돌멩이, 하얀 잎맥이 도드라져 보이는 나뭇잎 한장, 집에서 사용하는냄비, 모카포트의 부품, 화로, 석탄 덩어리와 부스러기, 동네 뜰의 - P15

세밀한 지형도, 큰길과 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녹슨 철제 구조물, 동네 공원과 성당, 철길을 따라 잘려나간 나무와 새로 지은 건물과 친정집, 페르난도 아저씨와 리노가 구두를 수선할 때 사용하던 연장과 그들이 작업하는 모습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색채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색상을 잘표현하고 있었다.
릴라의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형은 아니었다. 이따금 사투리나 표준어로 한 단어만 툭 던져놓은 곳도 있었다. 어떤 단어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동그라미를 쳐놓기도 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번역을 연습한 흔적도 있었다. 동네 상점과 상점에서 파는 물품, 야채와과일을 가득 싣고 노새의 굴레를 잡아끌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이 길저 길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엔초의 수레를 영어로 묘사한 문장도있었다. 교구 성당에서 본 영화와 읽은 책에 대한 감상문도 많았다. - P16

교구 성당에서 본 영화와 읽은 책내파스콸레와 토론한 내용이나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펼쳤던 주장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물론 글의 전개방식이 일관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주제가 되었든 릴라가 다루면 중요하게 느껴졌다. 11, 12세 남짓 된 나이에 썼는데도 유치하게 느껴지는 문장은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문장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구두점도 세심하게 썼고 올리비에로 선생님이 가르쳐준 우아한 필체도 그대로였다. 그러다가어느 순간, 마약에라도 취한 것처럼 스스로 만들어낸 나름의 질서를무너뜨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문장이 열에 들뜬 듯 숨가쁘게 전개되면서 구두점마저 사라지곤 했다. 대개는 얼마 안 있어 본래의여유 있고 명확한 전개 방식을 되찾았지만 가끔 글을 갑작스럽게 중단하고 뒤틀린 나무며 연기가 자욱한 거친 산, 음침한 표정의 얼굴 - P16

그림으로 나머지 페이지를 채우기도 했다.
나는 릴라의 글에서 느껴지는 질서와 혼란에 매료되었다. 읽으면읽을수록 속았다는 기분도 들었다. 몇 년 전 이스키아 섬에 머물던내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었던가. 그렇기에 그때 릴라의 편지가 그토록 훌륭했던 것이다. 나는 공책을상자에 집어 넣고 다시는 들춰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 다짐을 저버리고 말았다. 릴라의 공책들은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했다. 어린 시절부터 릴라가 그랬던 것처럼. 고향 동네 전경과 자기 집 식구들, 솔라라 집안사람들, 스테파노에 대해서 쓴 글도 있었다. 사물과 사람에 대한 릴라의 묘사는 냉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확했다. - P17

혹하게물론 나에 대한 글도 있었다. 릴라는 내 말과 내 생각,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내 외모에 대해서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릴라는 자신의 삶에서 결정적이었던 순간들에 대해서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릴라의 공책에는 자신의 첫 작품 『푸른 요정』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과 담임인 올리비에로 선생님의 침묵과 무시로 인해서 맛보았던 그에 못지않은 고통도 적혀 있었다. 내가 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혼자만 중학교로 가게 되었을 때의 아픔과 분노, 구둣방에서 일을 배우면서 느꼈던 희열,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에 구두를 만들기로마음먹었을 때의 심정, 오빠와 함께 처음으로 구두를 완성했을 때의기쁨도 적혀 있었다. 아버지 페르난도 아저씨가 남매가 애써 만든구두가 완벽하지 않다고 했을 때의 고통도 기록되어 있었다.
공책에는 릴라가 겪은 일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의글을 읽고 있자니 솔라라 형제에 대한 증오심과 그 가문의 장남인마르첼로를 가차 없이 거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의 결연한 의지, 성 - P17

격이 온순한 스테파노와 약혼하기로 결심했을 때의 확고한 마음이느껴졌다. 릴라는 스테파노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처음으로 만든 구두를 구입하고 평생 간직하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했다.
열다섯의 나이에 처음으로 부유하고 우아한 숙녀가 된 기분을 만끽하면서 예비 신랑의 팔짱을 꼈을 때 그녀는 얼마나 큰 성취감을 느꼈던가!
스테파노는 오직 릴라에 대한 사랑으로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가 운영하는 구둣방에 거대 자금을 투자한 것이다. 그러고는 연달아 좋은 일만 일어났다. 릴라의 상상에서 시작된 구두 제작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신시가지에 신혼집을 마련한 데다 열여섯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호화롭기 그지없는 결혼식이었다. 그러던중 마르첼로가 그의 동생과 함께 피로연장에 나타난 것이다. 스테파노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그 구두를 신고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남편 스테파노가 말이다. - P18

릴라는 대체 어떤 인간과 결혼하게 된 걸까? 스테파노는 목적을이루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면을 벗고 흉측한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아닐까? 릴리는 비참한 상황에 대해서 꾸밈없이 써내려가면서 질문을 던졌다.
나는 몇 주에 걸쳐 릴라의 글을 매일 읽고 또 읽었다. 어찌나 꼼꼼히 읽었는지 특별히 마음에 드는 부분은 달달 외우게 되었다. 릴라의 글은 때로는 나를 흥분시켰고, 매혹시켰으며, 비참하게 했다. 릴라의 글은 자연스러웠지만 어딘가 인위적이었다. 그 인위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어느 11월 저녁, 나는 넌덜머리가 나서 상자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미 나폴리에서의 삶을 접은 지 오래였고 나름대로 많은 사 - P18

람의 존경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릴라가 내 몸과 마음을지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솔페리노 다리에 멈춰 서서 차가운 안개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다 다리 난간에 상자를 올려놓고 천천히, 아주천천히 상자를 밀었다. 마침내 상자가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릴라의 말과 생각, 자신에게 상처를 준 주변의 모든 이에게 아픔을 되갚고야마는 독한 근성, 사람, 물건, 사건, 지식 할 것 없이 나를 포함해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능력을 담은 상자는 그자체가 릴라인 양 강물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책과 구두, 달콤한 추억과 폭력으로 인한 상처, 결혼식과 신혼 첫날밤, 신혼여행 후 라파엘라 카라치 부인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 모든 일과함께. - P19

그제야 비로소 나는 책을 대하는 릴라의 태도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깨달았다. 릴라는 책을 약간 두려워하게 된 것 같았다. 예전처럼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나를 이끌어나가지 않았다. 전에는 몇 문장만읽어도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고 글을 완전히 장악하여 내게 "이부분이 가장 중요한 곳이니 여기서부터 읽으면 돼"라고 말해주곤했다. 그런데 이제는 책을 읽다가 내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릴라는 "내가 이해를 잘못한 것 같은데 네가 다시 한 번 살펴봐"라고 말하거나 다른 이런저런 변명을 들어가면서 내게 잘못된 부분을 조심스럽게 알려주려 했다.
아직까지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릴라 자신은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릴라에게여전히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 수 있었다. - P73

릴라는 철학책 반 페이지만 읽어도 아낙사고라스가 세상을 구성하는 혼돈에 부여한 질서와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간의 놀라운 연관관계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릴라 스스로 자신이 불필요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인상을받았다. 자신의 판단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의도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녀 자신이 너무몰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함정에라도 빠질 뻔한 것처럼 뒤로물러서면서 중얼거렸다. - P74

"지겨워 죽겠어. 매일 같은 소리잖아. 작은 것 안에 있는 더 작은것이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큰 것 밖에 있는 더 큰 것은 안에있는 것을 가둬두고 싶어 해. 나는 가서 음식이나 만들어야겠어."
내가 공부하던 내용은 큰 것이나 작은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릴라는 자신의 뛰어난 학습 능력에 짜증이 나서, 아니 두려워서어디론가 숨어버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숨을 곳이 어디란 말인가?
릴라는 저녁 준비를 하고 집 청소를 하고 내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볼륨을 낮추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역사를 바라보는 일상적인일에 자신을 감추었다. 오가는 기차와 베수비오 화산의 희미한 윤곽, 나무도 없고 상점도 아직 들어서지 않은 신시가지의 길, 간간이 - P74

지나다니는 자동차들과 장바구니를 들고 치마에 착 달라붙은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가는 여인네들을 바라보았다. 릴라는 가끔 스테파노가 시킬 때나 그가 함께 가달라고 부탁할 때만 개업 준비 중인 식료품점을 보러 갔다.
언젠가 나도 함께 가본 새 가게는 릴라네 집에서 불과 50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에 가면 릴라는 진열장과가구를 만들기 위해 목수들이 쓰는 줄자로 공간을 재곤 했다.
그게 다였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릴라가 처녀 때보다 더 외롭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가끔 카르멘, 아다. 질리올라와 어울려 다니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같은 반이나 다른반 여자아이들과 친해져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포리아 가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릴라가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시누이 피누차밖에 없었다. 릴라가 약혼했을 때만 해도 남자아이들은 그녀와 몇 마디 정도는 주고받았는데 막상 결혼식을 올리자 길에서 마주쳐도 가벼운 고개 인사만 할 뿐이었다. 릴라가 그렇게나 아름다운데도. - P75

그 후 몇 달에 걸쳐 일어난 소소한 일들은 내겐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그 일들을 순서대로 열거하려니 힘겹다. 나는 애써 자신감 있게 행동하고 자기 관리를 철저히 했지만 결국은 시도 때도없이 밀려오는 슬픔의 물결에 고통스럽게 승복하며 몸을 내맡겼다.
그때는 정말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다시 열심히 공부하기시작했지만 학교에서는 예전처럼 뛰어난 성적을 받지 못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생기 없이 보냈다. 학교에 가는 길도 릴라네 가는길도 안토니오와 밀회를 나누기 위해 저수지로 향하는 길도 흐릿한배경 같았다. 나는 언제나 긴장한 상태였고 의기소침했다. 나도 모르게 내 모든 문제를 안토니오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 P81

의 눈에 어느나고 초라하게 느껴져 먼저 자리를 떠나고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에 릴라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내가릴라에게도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릴라에게 스테파노와 함께 사진을 찾으러 갔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왜 그랬던 걸까. 스테파노가 제안한 중재자 역할에 도취돼서? 레티필로로 가는 길에 들은 이야기를 숨겨야만 의뢰받은 임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스테파노의 신뢰를 배반하지 않으려다 나도 모르게 릴라를 배신하게 된건가?
나는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사실 꼭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가 애써 별일아니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는 시간이 너무많이 지나서 말해봤자 상황만 복잡해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수하기란 정말 쉽다. 신빙성 있는 변명거리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내 자신에게도 빈약하게 느껴졌다. 애당초 내 의도가 순수하지못했다는 생각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120

그리고 같은 반 친구들 같은 내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막상 멜리나나 주세피나 아주머니, 눈치아 아주머니나 마리아아주머니의 몸을 제대로 바라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오랜 시간을 두고 날이 갈수록 커지는 불안감과 함께 지켜봐온 것은 오직내 어머니의 육신밖에 없다. 절뚝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를 옥죄어왔고 끊임없이 나를 위협해왔다. 내 모습에서 갑자기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날까봐 언제나 두려웠다.
그날은 우리 동네 모든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들은 신경질적이고 남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존재들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구부정한 자세로 있거나 아니면 성가시기 짝이 없는 자식들에게 끔찍한 욕설을 퍼부었다. 눈과 볼이 움푹들어가고 너무 삐쩍 말랐거나 거대한 엉덩이와 부어오른 발목에 가슴이 축 처져 뚱뚱했다.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었고 안아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들을 치마에 달고 다녔다. - P137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그때 당시 이들의 나이는 기껏해야 나보다 열 살에서 스무 살 정도 많은 정도였다. 그런데도 여성스러운매력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소녀 시절에 옷이며 화장으로 그토록 뽐내고 싶어 했던 여성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머니들은 남편과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의 육신에 잠식되어 날이 갈수록외모까지도 그들을 닮아갔다. 그렇지 않더라도 육체적 노동으로 노쇠하거나 병을 얻어 여성성을 잃어갔다.
그런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가사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인가? 아니면 임신을 하면서 남편에게 얻어맞기 시작하면서 릴라도 눈치아 아주머니처럼 흉측해질까?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결국은 페르난도 아저씨의 모습이 튀어나오게 될까? 그 우아한 걸음걸 - P137

이가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양반걸음으로 걷는 리노의 걸음걸이처럼변하게 될까? 그렇다면 내 몸도 망가져서 언젠가는 내게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까지 나타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되면 학교에서 배운 것은 모두 사라지고 우리 동네 사람들의 거친억양과 태도가 다시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유물론 철학자인 아낙시만드로스와 내 아버지, 시인 폴고레와 돈 아킬레, 화학 원소가와 저수지, 그리스어 문법의 부정과거법, 헤시오도스와 솔라라 형제의 무례하고 저속한 언어가 모두 시꺼먼 진흙탕에 뒤섞이게 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지난 수천 년 동안 혼란스럽고 천박한 도시에서 으레 일어났던 일이 아닌가. - P138

문득 나도 모르게 내가 릴라의 감정을 이해하고 여기에 내 감정을 덧씌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릴라가 그다지도 낙담한표정이었던 걸까? 작별인사라도 하듯이 다리와 엉덩이를 쓰다듬었던 것일까? 멜리나나 주세피나 아주머니의 육체에 잠식당한 자신의육체를 느끼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신의 몸을 만졌던걸까? 육체가 잠식당했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역겨워하면서? 어떻게든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에 옛 친구들을 찾았던 걸까?
어린 시절 교단에서 넘어진 올리비에 선생님을 망가진 인형처럼 바라보던 릴라의 눈빛이 떠올랐다. 큰길을 걸어오며 가게에서 산부드러운 비누를 입에 넣던 멜리나의 모습을 바라보던 릴라의 눈빛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구리로 된 냄비를 타고 피가 흘러내리는 돈아킬레 살인 현장을 우리들에게 묘사하던 릴라의 모습도 떠올랐다.
릴라는 돈 아킬레의 살인자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주장했다.  - P138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정이 복받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릴라가 그런 아이였던가. 원래부터 나처럼 고집스러울 정도로 성실했던 게 아니었던가. 이때껏 오직 내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그토록 많은 생각을 하고, 구두를 만들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고, 복잡한 계획을 짜고, 분노하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창작해낸 것이었단 말인가. 그녀가 이토록 방황하는 이유는 그런 목적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인가 신부복 차림의 사진에 한 작업도 다시는 재현할수 없는 건가. 릴라가 이루어낸 모든 일이 실은 매번 자신이 처했던혼란스러운 상황의 결과물이었단 말인가.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전부터 간직해온 고통스러운 긴장감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촉촉이 젖은 릴라의 눈과 섬약해 보이는미소에 나는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릴라는 버릇대로 손을 이마에 갖다 대고 후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 P195

나중에 릴라가 공책에 쓴 내용을 읽고 나서야 그녀에게 그날 저녁 파티가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릴라는 자기가 먼저 나서서 나와 같이 가겠다고 한 것은 인정했다. 단 하루라도 가게일을 잊어버리고 나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순간을 함께하고 갈리아니 선생님을 만나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했다. 언제나처럼 청년들이 자신을 좋아할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입도 벙끗할 수 없었다고 했다. 자신이 볼품도 없고 특별하지도 아름답지도않게 느껴졌다고 했다.
릴라는 모든 일을 상세히 기록했다. 둘이 나란히 서 있는데도 모두들 내게만 말을 걸어왔다고 했다. 내게만 과자를 권하고 음료를가져다주었고 아무도 자신에게는 신경써주지 않았다고 했다.  - P219

그날 저녁 이후 우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별을 했고오랜 기간의 결별로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도무지 마음을 추스릴 수 없었다. 물론 그때까지 서로 신경전을 벌인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릴라의 불행과 그녀의 지배 본능 때문에 속상했던 적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내게 그토록 노골적으로 수치심을 준 적은 없었다.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당장 식료품점에 발걸음을 끊었다. 릴라가 교과서를 사준 데다 학교 성적을 걸고 함께 내기까지 한 상태에서 학년 말 전 과목 평균 8점에 두 과목에서는 9점을 받았을 때도 릴라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 P223

몹시 무더운 날이어서 우리는 오랜 시간을 물속에서 보냈다. 릴라는 물에 떠 있는 연습에 몰두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대비해내게 자기 옆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게 계속해서 심술궂게 굴었다. 종종 나에게 투정을 부리면서 내 수영 실력을 믿은 자기가 잘못이라고 했다. 사실 나도 수영은 잘 못했다. 그런 내가 어떻게릴라를 가르쳐줄 수 있었겠는가. 도나토 사라토레의뛰어난 강습 능력을 그리워하며 다음 날 당장마론티로 돌아가자고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습을 하다 보니 수영 실력이 좋아졌다.
릴라에게는 모든 행동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구두 만드는 법도 배웠고 햄과 프로볼로네 치즈 등을 썰어 능수능란하게 무게를 속이는 법도 익혔다. 릴라는 그렇게 타고났다. 릴라라면금 세공사의 손놀림을 옆에서 지켜만 봐도 세공법을 익혀서 기술자보다 더 뛰어나게 금 세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P276

집 안은 고요했다. 눈치아 아주머니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고 스테파노와 릴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침실에 들어갔다. 옷이며 신발, 가방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의자 위에 『히로시마그 이후』라는 제목의 책이 놓여 있었다. 내게 묻지도 않고 가져간것이다. 마치 내 것이 다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내가 이 정도 위치에오른 것이 자기 덕택이라도 되는 것처럼. 갈리아니 선생님이 내게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은 자기가 무심한 태도로 생각나는 대로 한 말에 내가 영감을 받아 쓴 글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내가 선생님께 특별 대우를 받게 됐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순간 책을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창피한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고쳐먹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 P302

릴라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서 책을 읽은 것을 과시할때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그때 릴라와 니노는 꽤나 열띤 논쟁을벌였다. 니노는 전반적으로 미국을 비판하는 쪽이었다. 특히 나폴리에 미군 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싫어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미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매료되었고 더 알고 싶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행위는 전쟁범죄라는투로 말하자 언짢아했다. 릴라는 더 나아가 사실 이 경우 전쟁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미국인들의 행위는 전쟁범죄를 넘어선 교만에 의한 범죄행위였다고 했다. - P311

나는 진주만 공습이 뭔지 몰랐는데 릴라는 알고 있었다. 릴라는 진주만공습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진주만은 사악한 전쟁범죄였지만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경솔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끔찍한 보복 행위로 나치의 대량학살보다 저질스러운 행위라고 말했다.
"미국인들은 싸잡아서 범죄자 중에서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죄인처럼 처벌받아야 해.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해서 복종하게 하려고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처럼 말이야."
릴라가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어찌나 격렬하게 말을 쏟아부었는지 니노는 반론에 나서는 대신 침묵을 지키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니노는 릴라는 아예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제의 본질은 원자폭탄 투하의 잔혹성이나 그 행위가가지는 보복성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 미국이 직면했던 가장 시급한과제는 인류 역사상 제일 잔인했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에 있을 모든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위해서 그 끔찍하기 짝이 없는 신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 P312

너무 멀리 나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만 해도 흥분하여 머릿속에 그려둔 가상의 안전선을 이미 넘어선 상태였다. 평상시에는몇 번의 팔동작만으로도 다시 해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만 나갔었다. 사실 릴라도 평소에는 그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지금 릴라는 니노와 경쟁을 벌이면서 평소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니노에 비해서는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뒤처지고 싶지않은 마음에 무리해서 점점 더 멀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릴라가 힘이 빠지면 어떻게 하지. 갑자기 몸에 무리가 가면? 수영 실력이 뛰어난 니노가 있으니 도와주겠지. 그렇지만 니노마저 발에 쥐가 나거나 지치면 어떻게 하지?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조류에 몸이 왼편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 P319

여기에서나는 나도 모르게 아래쪽을 쳐다보았는데 실수였다. 바다 위로는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에 수면이 반짝이고 하얀 구름이 하늘을 실처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수면 아래로는 파란 물이 갑작스럽게짙푸른 빛을 띠었다가 이내 칠흑 같은 밤처럼 캄캄해졌다. 깊은 바다의 어두운 심연이 느껴졌다. 몸을 기댈 수 있는 곳 하나 없이 오로지 액체로만 구성된 그 심연이 망자의 시체가 쌓인 구덩이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 갑자기 뭔가가 튀어나와 피부를 스쳐 지나가다 내몸을 잡아 그 날카로운 이빨을 내 몸에 박아 넣고는 바닥으로 잡아끌 것만 같았다. - P319

나 자신도 되돌아봤다. 나는 잘못된 판단을 했고 착각에 빠졌다.
나같이 작고 통통하고 성실하기만 할 뿐 똑똑하지도 않은 데다 교양이 있는 척, 아는 것이 많은 척만 하는 안경잡이를 니노가 좋아할없지 않은가. 비록 짧은 여름휴가 동안이지만. 그러고보니 니노가나를 정말로 좋아해주기를 바라긴 한 걸까. 내 행동을 세밀히 되짚어 보았다. 아니다. 나는 내 욕망을 정확히 몰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내 감정을 애써 숨겨왔을 뿐 아니라 나 자신조차도 내 감정에 회의적이고 확신이 없었다.
왜 릴라에게 한 번도 니노에 대한 내 감정을 고백하지 못했을까.
지금도 그렇다. 한밤중에 나를 찾아와 털어놓은 릴라의 고백이 내게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느냐고 왜 소리치지 못한 것일까. 왜 그녀에게입 맞추기 전에 니노가 내게도 입 맞춘 적이 있다고 말하지 못한것일까. 나는 대체 왜 항상 이모양일까. 너무나 간절하게 부와 명예와 칭찬과 성공을 갈망하는 본심이 두려워서 오히려 내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그 간절함이 마음속에서 폭발하여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될까봐 두려운 것일까.  - P330

그 입맞춤은 니노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게다가 릴라는 나와는 다르게 사건을 일으키는 데 탁월한재능이 있지 않은가.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니노와 한 약속에나가서 함께 에포메오 산을 올라야 하나 아니면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스테파노, 리노 일행과 떠나야 하나. 어머니가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릴라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키스했다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어떻게 그와 함께 태연히산에 오르겠는가. 매일 어떻게 둘이 함께 해변에서 점점 더 멀리 헤엄쳐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나는 진이 빠져서 깜빡 잠이 들었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떴는데 하도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고통이 조금 덜하기에 약속장소로 뛰쳐나갔다. - P332

나는 그날 밤 릴라의 방에서 문을 닫고 불은 끈 채 꽤 오랫동안 릴라의 말을 들어주었다. 릴라는 침대 안쪽에 누워 있었다. 목덜미까지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과 허리에서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곡선이 달빛 아래 빛났다. 나는 평소 스테파노가 눕는 침대 바깥쪽에누워 생각에 잠겼다.
스테파노는 주말마다 바로 이 자리에 누워서 잠을 자고 밤낮으로릴라의 몸을 끌어안는다. 릴라는 그런 침대에 누워서 지금 내게 니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니노 생각에 릴라는 모든 것을 잊고 남편과 나눈 사랑의 흔적을 침대 시트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니노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릴라는 니노를 이곳으로 소환했다.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있는 상상 속에 빠져 이미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렸기에 부부간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생각도, 죄책감도 들지 않는것이다. - P356

릴라는 나를 너무나 믿은 나머지 차라리 혼자 비밀로 간직했으면좋았을 법한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내가 평생 원해온 바로 그 사람을 자신이 얼마나 갈망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릴라는 내가 무디고 눈치가 없어서, 자기가 알아챈 것을 나는 알아채지 못해서 이때까지 니노의 뛰어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진정한 모습을보지 못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릴라가 나를 속이는 건지 아니면 본심을 감추려는 내 성향 때문에정말로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눈 먼 봉사이자 귀머거리처럼 니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제야 자기가 도나토 사라토레아들의 매력을 발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추측이 가증스러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릴라에게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가 한밤의 고요속에서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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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리스어야."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새 리노는 나를 버려두고 동생과 춤을 추러 갔다. 릴라는 가녀린 탄성을 터뜨리며 내게 춤 설명서를 건넨 다음 오빠와 함께 날아다니듯 춤을 췄다. 나는그녀가 책을 꽂아놓은 곳에 춤 설명서를 놓아두었다. 지금 릴라가뭐라고 한 거지? 전축은 이탈리아어지 그리스어가 아니다. 순간 전쟁과 평화』 아래 페라로 선생님의 도서관 분류번호가 붙은 너덜너덜한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그리스어 문법』이었다. 문법책이라니. 그리스어라니. 릴라는 헐떡거리며 내게 말했다.
"나중에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전축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줄게."
나는 할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 P182

릴라는 내가 고등학교에 가기도 전에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한건가? 나는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도 여름 방학동안에 혼자서 공부했단 말인가? 릴라는 왜 항상 내가 해야 할 일을나보다 빨리, 나보다 더 잘하는 걸까. 내가 따라가면 도망가면서 정작 자신은 언제나 내 뒤를 쫓아와 나보다 앞서나가려 하는 걸까. - P182

나는 한동안 릴라를 피했다. 그만큼 화가 났다. 나도 그리스어 문법책을 빌리려고 도서관에 갔지만 우리 도서관에 비치된 유일한 그리스어책은 체룰로네 온 식구가 번갈아가며 빌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칠판에 그려진 그림을 지우듯이 나에게서 릴라를 지워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 자신이 연약하게 느껴졌고 모든 것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것처럼 느껴졌다. 평생 그녀를 뒤쫓아 다니거나 반대로 그녀가 나를뒤쫓아온다고 생각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어느 경우건그녀보다 못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릴라를 찾았다. 나는 그녀가내게 넷이서 함께 추는 춤의 일종인 카드리유 춤을 가르쳐주게 내버려두었다. 내게 이탈리아어 단어를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쓰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내버려두었다. 릴라는 학기 시작 전에 나도 그리스어알파벳을 익히기를 원했고 결국 내게 그리스어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내 얼굴의 뾰루지는 늘어만 갔다. 나는 영원히지속될 것 같은 자신감 부족과 수치심에 시달리며 질리올라네로 춤추러 갔다. - P183

한사코 벗어나길 바랐지만 내 느낌은 강해져만 갔다. 언젠가 릴라가 그녀의 오빠와 함께 왈츠를 춘 적이 있다. 얼마나 멋들어지게 춤을 추던지 모든 사람이 그들의 독무대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줄 정도였다. 나도 매혹되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둘 다 아름답고 호흡이 잘맞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릴라가 애늙은이같은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뛰어나게 편곡을 하면 원곡의 익숙한 멜로디가 잊히는 것처럼 말이다.
릴라의 얼굴은 균형이 잡혀가고 있었다.  - P183

정작 내가 릴라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는데 릴라는 계속해서 그리스어 어미변화를 물어보았다. 보아하니 나는 아직도 1학년 과정에 머물러 있는데 릴라는 벌써 3학년 과정까지 진도를 나간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푹 빠진 아이네이스』에 대해서도 물었다.
릴라는 책을 며칠 만에 몽땅 읽어치웠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도 학교진도에 따라 2권 중간 정도까지밖에 읽지 않았다. 특히 디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학교에서 배우기도 전에 릴라에게서 디도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다. 어느 날 오후 릴라는 내 가슴에 깊이 각인된 화두를 던졌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들의 인생만 황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삶도 황폐해지는 거야."
릴라가 정확하게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개념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이 개념을 우리 동네의 더러운 길, 먼지가 이는 공원, 새로 들어선 건물들로 망가진 들판, 가정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연관시켰다. - P207

그 시절 나는 자신감에 넘쳤다. 학교에서는 완벽한 모범생이었다.
이 이야기를 올리비에로 선생님께 전하자 선생님도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노와의 만남도 이어나갔다. 우리는 매일같이 솔라라네 주점까지 산책을 했다. 지노가 내게 빵을 하나 사주면 우리는 그것을 함께나눠먹고 집까지 다시 걸어 돌아오곤 했다. 이따금 나보다도 릴라가내게 더 의존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나는 동네의 경계를 넘어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릴라처럼 벽돌공,
자동차 정비공, 야채장수, 식료품점 주인, 구두수선공과 어울리는 대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이제 릴라가 디도나 영어 단어 암기법이나 3인칭 어미변화나 파스콸레와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 말할 때면 약간 불안해하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수 있었다. 드디어 릴라가 자신도 나만큼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게 증명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았다. - P212

1958년 12월 31일 저녁에 펼쳐진 대결의 이런저런 이유 가운데는 빈곤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보상받고 싶은 리노의 심리도 있었을것이다. 그는 폭죽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집착해봤자 솔라라 형제와 맞붙을 사람은 아무도없다는 사실을 리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그해에도 솔라라 형제는 며칠에 걸쳐서 밀레첸토 트렁크에 폭죽을 잔뜩실어 날랐다. 그들은 연말 밤 폭죽으로 날아가는 새를 죽이고 개고양이, 쥐를 놀라게 하고, 온 동네 건물을 지하창고에서부터 지붕까지 휘청이게 할 셈이었다. 리노는 그들의 움직임을 증오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체면을 세울 정도의 폭죽이라도 마련하기 위해서 파스콸레와 안토니오, 특히 그나마 수중에 약간의 돈이 있는 엔초와 흥정을 벌였다. - P218

릴라는 할 말을 잃었다. 처음에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수차례에 걸쳐서 파스콸레가 너를 좋아한다고 했지만릴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어느 찬란한 봄날,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표정으로 그녀 앞에 서서 사랑을 애원하며 거절하면 자신의 삶은 의미를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의 감정을 해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릴라는 아주 조심스럽게 직접적으로 안 된다고 하지 않고 거절할 표현을 생각해냈다. 그녀는 자신도 파스콸레를 좋아하지만 그 감정은 연인에 대한감정과는 다르다고 했다. 파시즘이며 레지스탕스, 왕정, 공화당, 암시장, 라우로 장군, 네오파시즘, 기독교 민주당, 공산주의 등 자신에게 해준 수많은 이야기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라고했다. 하지만 사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자신은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P240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릴라와 공부하고릴라와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이었는지를 의미한다. 동네의 범주를 벗어난 외부세계의 사물과 사람, 풍경과 책에 쓰인 사상을 대하면서도 릴라를일종의 정신적인 지지대이자 자극제로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의미한다.
그렇다. 디도를 주제로 한 작문의 논리전개는 순전히 내가 생각해낸 것이고 유연한 문장을 구축하는 능력도 내 것이었다. 그러니 디도에 대해서 쓴 글은 나의 글이다. 하지만 주제를 발전시킨 것은 릴라와 함께한 게 아니었는가. 우리는 건설적인 자극을 주고받지 않았는가. 내 정열은 릴라의 열정 덕분에 커진 것이 아닌가. 선생님들이그토록 좋아했던 ‘사랑이 없는 도시‘라는 주제를 발전시킨 것은 나지만 아이디어는 결국 릴라의 것이 아니었던가.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P246

우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 흥미를 끌지 못하는 존재였다. 행여 우리와 시선이라도 마주칠 때면 성가신 듯 즉시 다른 쪽으로 시선을돌렸다. 그들은 철저히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리노와 파스콸레는 이미 알고 있던사실을 재확인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우울해했고 험상궂게 굴었던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가야한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났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나를 비롯한 여자아이들은 처음으로 이런 경험을 하고 야릇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매혹되고 있었으며 우리 모습이 못나게 느껴지면서도 우리가 제대로 교육받고 좋은 옷을 입고 화장을하고 장신구를 달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우선은 그날 저녁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웃으며 비아냥대기시작했다. - P252

나는 말 그대로 다시 피어났다. 넬라인카르도라는 올리비에로 선생님의 사촌은 바라노에 살고 있었다. 일단 버스로 바라노에 도착한다음에는 손쉽게 넬라 아주머니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거대한 몸집의 친절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명랑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노처녀였다. 휴가차 섬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에게 방을 모두내주고 자신은 조그만 방 한칸과 부엌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부엌에서 지내기로 했다. - P274

밤마다 식탁을 꺼내고, 받침판을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아내 침대를 만들었다가 아침이면 깨끗이 정리해야 했다. 몇 가지 꼭지켜야 할 임무도 주어졌다.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나서 넬라 아주머나와 손님들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영국에서 온 부부 한쌍과 그들의 두 아이가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컵과 그릇을 닦고, 저녁 식사 상을 차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설거지를 하는 것이었다.
이 일들만 마치면 나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었다. 나는 테라스에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책을 읽었다. 가파르게 뻗은 순백의 길을따라 넓고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해변까지 걸어 내려가기도 했다.
그 해변은 마론티 해변이었다. - P275

모든 일이 만족스러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도,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상을 치우는 일도, 동네에서 산책하는 일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가며 마론티 해변까지걸어가는 일도, 햇볕 아래 누워 책을 읽는 일도 좋았다. 수영하다가다시 해변으로 나와 책을 읽는 일도 좋았다. 아버지도, 동생들도, 어머니도, 매일같이 걷던 고향의 길도, 정원도 그립지 않았다.
유일한 그리움의 대상은 릴라였다. 내 편지에 답장한 통 없는 릴라. 내가 없는 동안 릴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나는 두려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것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어온, 살면서단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릴라의 삶의 일부분을 놓침으로써 내 삶의 밀도와 중요성까지도 희석될 것 같아 두려웠다.
릴라의 침묵에 내 걱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섬에서 보내는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편지에다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물처럼 넘치는 내 글과 이에 대비되는 그녀의 침묵은, 빛나는 듯 보이는 - P277

나의 삶은 실은 무미건조해서 남아도는 시간에 매일같이 그녀에게편지를 쓰고 있는 데 비해 암울한 듯 보이는 그녀의 삶이야말로 실은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빌라 아주머니는 영국인 가족이 7월 말에 떠나고, 8월 초에는 나폴리에서 섬으로 휴가를 보내려는 가족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전해주었다. 교양 있고 친절하고 우아한 사람들로 작년에 이어 올해두 번째로 아주머니 집에서 휴가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훌륭한 신사로 아주머니에게 언제나 멋진 말을 해준다고 했다. 장남은훤칠한 키에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건장하며 잘생긴 17세 소년이라고 했다. - P278

나는 이미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자갈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래사장은 차가웠고 달빛에 거무스름한 잿빛을 띠었다. 바다는 잔잔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외로움에 사무쳐 울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 걸까. 여드름도 깨끗이 사라졌고 다시 예뻐졌다고생각했었다. 햇볕과 바다 덕분에 몸매도 날씬해졌는데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내게 전혀 관심이 없다. 내 몸에 낙인이라도 찍힌 것일까. 내 운명은 무엇일까. 빠져나오기 힘든소용돌이처럼 내 생각은 어느새 우리 동네를 향하고 있었다. - P290

어둠으로 밀쳐낸 그의 아들에 대한 믿음직스러운 대안이자 내 편지침묵으로 일관하는 릴라의 대안이 되었다. 나는 나중에야 이러한사실을 깨닫고 놀랍다고 생각했다. 릴라와 니노는 서로를 잘 알지못하고 친하게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비슷한 점이 아주 많은 것같았다. 둘 다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으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언제나 명확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틀렸다면? 마르첼로를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도나토 아저씨를 그렇게 끔찍하게 여길 이유는 또 무엇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릴라와 니노 둘 다 좋아했고 각각 다른 의미에서 이들이 그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니노가 증오해 마지않는 그의 아버지는 나를 비롯한 모든 아이를 존중해주었다. 그날 밤마론티 해변에서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평안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그런 도나토 아저씨가 고마웠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니노와릴라가 섬에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쁘게 느껴졌다. - P295

나는 다시 책 읽기를 시작했다. 릴라에게 답장이 없으니 이제부터는 편지를 보내지 않겠다는 내용의 마지막 편지를 썼다. 대신 사라토레 집안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마리사와 피노, 막내인 치로와 친남매가 된 것 같았다. 특히 치로는 나를 아주 좋아했다. 나와 있을 때만 투정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놀았다.
우리는 함께 소라를 찾곤 했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나를 경계심없이 애정과 호감을 갖고 대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식탁 정리를 할때도, 방 정리를 할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아이들을 돌볼 때도, 책을 읽을 때나 공부를 할 때도 무엇을 하든지 꼼꼼하게 한다고 칭찬해주곤 했다. - P295

릴라가 보낸 편지였다. 나는 편지 봉투를 급히 찢었다. 글씨가 빽특히 채워진 다섯 장의 편지지가 봉투에서 나왔다. 나는 단숨에 편지를 읽어 내려갔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정말 그랬다. 우선 편지 내용보다 먼저 내게 충격을 준것은 글에서 릴라의 목소리가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편지의 첫 문장에서부터 나는 『푸른 요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학교 과제물을 제외하고 내가 읽은 릴라의 유일한 글이다.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 왜 『푸른 요정이 그토록 마음에들었는지 깨달았다. 지금 내가 릴라의 글을 읽으며 놀랍게 여긴 특징들이 『푸른 요정』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릴라는 글로써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내 글이나 도나토 아저씨가 쓴 기사나 시와는 달랐다. 과거에 읽었거나 그 당시에 즐겨 읽던 작가들의 글과도 달랐다.  - P299

릴라의 글은 섬세했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문법이완벽했다.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었고 문어체의 어색함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글을 읽는 동안 그녀의 모습이 보이고, 그녀의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글씨에 실린 릴라의 목소리에 흔들렸고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할 때보다 더 강하게 빨려들었다. 글에서는 구어체에 남아 있을법한 쓸데없는 잔가지와 혼란스러움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레코나 체룰로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제우스 신의 머리에서 태어난 사람쯤 되어야 사용할 수 있을 법한 논리 전개였다.
그녀에게 보낸 내 유치한 편지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그 과장된 어조 경박스러움, 거짓된 명랑함과 고통이 부끄러웠다. 릴리는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내 작문에 9점을 주어 헛된 희망을 갖게 한제라체 선생님에게 경멸과 원망을 느꼈다. 그 편지는 열다섯 살이 되 - P299

는 내 생일날, 내가 사기꾼인 것을 깨닫게 했다. 학교에 간 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내 앞에 놓인 릴라의 편지가 그 증거였다.
그러고 나서야 편지 내용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릴라는 내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다. 그때까지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은 것은 내가 햇살 아래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기뻤기때문이고, 사라토레 가족과 잘 지내기를 바라서였다고 했다. 니노와사랑에 빠지고, 이스키아 섬과 마론티 해변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자신의 불행 때문에 내 휴가까지 망치고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침묵을 깬 다급한 필요성을 느꼈다고 했다. - P300

난 릴라의 편지를 읽고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언제나처럼 릴라의세계는 빠르게 내 세계를 잠식했다. 7. 8월에 내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초조해졌다. 그날은 해변에 나가지 않고 릴라에게 진지하게 답장을 쓰려 했다. 릴라의 편지처럼 본질적이고 깔끔하면서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 같은편지 말이다. 평소에는 편지를 쓰는 일이 그토록 쉬웠고 특별히 고칠 필요도 없이 앉아서 단숨에 여러 장의 편지지를 채워내곤 했는데 이번에는 쓰고 고치고 또다시 써보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니노의증오와 그 증오의 원인이 된 도나토 아저씨와 멜리나의 정사, 사라토레 가족과의 관계, 심지어는 릴라가 처한 상황에 대한 걱정조차도 - P303

릴라의 글은 얼마나 매혹적이었던가. 냄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불안감이 커져 갔다. 릴라는 냄비의 광채를 좋아했다. 냄비를 닦을때면 반짝거리게 하려고 특별히 정성을 들였다. 4년 전 릴라가 돈 아킬레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핏방울이 구리 냄비 위로 흘러내렸다고이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자신의 앞에놓인 힘든 선택에서 비롯된 불안감과 고통을 구리 냄비에 묻어두었다가 일종의 계시인 양 터뜨린 것이다. 마치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갑작스럽게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말이다. 릴라가 없었다면 내가 이런 상상을 할 수나 있었을까.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 모든 것을 내 삶에 녹여낼 수 있을까.
나는 불을 껐다. 옷을 벗고릴라의 편지와 니노의 파란 책갈피를가지고 침대에 누웠다. 내게 가장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 P305

를 다시 읽었다. 냄비들은 반짝이고, 테이블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천장은 숨 막히게 무겁게 느껴졌다. 밤공기와 바다가 사면에서 벽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나는 릴라의 글솜씨에 또다시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는 형상화할수 있고 나는 그럴 수 없는 것 때문에 눈물이 앞을 흐렸다. 물론 학교에 다니지도 않고, 이제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도 않는데 릴라가그토록 뛰어나다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했다. 동시에 그 기쁨은 나를 불행하게 했고 나는 이런 감정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다. - P306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서는 잘 자라고 속삭이고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꽤 오랜 시간동안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혀의 감촉과 내 몸을 어루만지던 그의손길, 내 몸을 누르던 손의 압력을 떨쳐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니노는 내게 경고했었다.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도나토 아저씨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내 육체에남은 그 기분 좋은 느낌 때문에 내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기억하는 한 그때까지 한번도 육체적 쾌락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느낌을 알지 못했기에 막상 경험하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새벽 동이 터올 무렵 나는 정신을차리고 짐을 챙겼다. 침대를 정리한 다음 빌라 아주머니에게 짧은감사의 편지를 남기고는 그곳을 떠났다. - P307

향이 뒤섞인 냄새만이 짙게 퍼져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한 달 전에 준 현금을 챙겨서 섬에서 떠나는 첫 배를 탔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른 아침 햇살 아래 파스텔 빛의 섬 모습이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릴라에게 이야기를 해줄 만한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번만은 그녀도 이보다 더 강렬한 체험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도나토 아저씨에 대한 혐오감과 자신에 대한 경멸감이 너무나 커서 릴라에게 차마 이야기를 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예기치 않게 끝난 그해의 여름 휴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 P308

틈이 나자마자 나는 릴라를 찾아갔다. 뜰에서 릴라를 부르자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고는 현관으로 달려 나왔다. 릴라는 나를 포옹하고입을 맞추며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내게 칭찬을 퍼부었다. 나는 그녀의 넘치는 애정 표현에 잠시 넋이 나갔다. 한 달이 조금 넘는기간이었는데 릴라야말로 많이 변해 있었다. 그새 소녀가 아닌 어엿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나이도 열여덟 정도는 되어보였는데 내게는어른처럼 느껴졌다. 예전에 입던 옷들이 깡동하고 꽉 끼어보였다.
마치 몇 분 만에 갑자기 성장한 것처럼 그녀의 몸을 필요 이상으로조이고 있었다. 키도 더 컸다. 등이 꼿꼿해졌다. 전반적으로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가녀린 목과 창백한 얼굴에서 섬세하고 비범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나는 릴라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길을걸으면서도 계속 주변을 둘러보고 뒤를 돌아봤지만 내게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 P309

걱정하는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수컷들 간의 규칙을 어겼고 나는 릴라와 스테파노의 가까운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 갑자기 이일에 말려든 것이다. 내 존재는 우정일 수도 있는 릴라와 스테파노의관계를 감추기 위해 필요했다. 물론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 같지는 않았지만, 그날 드라이브를 하면서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있었는데 릴라는 일부러인지 아니면 자신도 잘 몰라서인지 내가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 옛날 잉크를적신 종잇조각을 던져댔을 때보다 훨씬 강도가 센 지진이 다가오고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릴라에게 정말로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릴라는 그런 아이니까. 그녀는 단지 균형을 되찾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모든 균형을 깰 수 있는 아이였다. - P315

그해 9월 릴라의 삶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었다. 나는 이스키아 섬에서 니노와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버지의 입술과 손에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왔다. 내면에 남아 있는 달콤함과 끔찍함이 뒤섞인 감정 때문에 밤낮으로 울며 시간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미처 내 감정에 뚜렷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전에,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니노의 목소리와 그의 아버지의 콧수염이 남긴 불쾌한느낌을 옆에 제쳐두었다. 이스키아 섬은 희미해져서 내 머릿속 한구석에 있는 은밀한 곳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릴라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내 모든 마음을 내주었다. - P322

릴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다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논의의 최종 목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릴라의인생에서 마르첼로를 내쫓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일들은 우리의 계획을 중심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정도였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도록 놓아두거나 필요할 때 약간 조율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나와 릴라는 우리가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실제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언제나 스테파노였다.
정확하게 사흘 후, 그는 약속대로 구둣방에 가서 치수도 맞지 않는 신발을 샀다. 체룰로 부자는 만 리라까지 흥정할 심산으로 자신없는 태도로 2만 5천 리라를 요구했다. 스테파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기에 릴라의 그림에 대한 가격으로 2만 리라를 더 지불했다. 그는 그림이 마음에 들어 액자에 넣고 싶다고 했다. - P324

이 모든 일이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났고 결국 릴라는 결과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신발 제작 계획의 돌파구를 마련해 리노를 비롯한 가족 모두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마르첼로를 깨끗이 처리했다. 동네에서 가장 촉망받고 부유한 젊은이의 예비 신부가되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아무것도 없을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학교가 평소보다 더 암울하게 느껴졌다.
나는 선생님들을 흡족하게 못할까봐 다시 공부에 파묻혔다. 밤 11시까지 악착같이 공부하다가 시계를 새벽 5시 30분으로 맞춰놓고서야 잠이 들었다. 릴라를 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대신 스테파노의동생인 알폰소와의 관계가 돈독해졌다. 여름 내내 식료품점에서 일했는데도 알폰소는 재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낙제점을 받은 모든 과목,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를 7점으로 통과했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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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1








˝광주 수산시장의 대어들.˝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거즈 덮어놓았습니다.˝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된 여러 시신들 사진과 함께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글이다.



˝우리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글알도 꽉 차 있답니다~˝



요리 전의 통통한 꽃게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글이다.

이 포스팅에 ‘좋아요‘는 500여 개이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은 무려 1500개가 넘었다.

‘좋아요‘보다 댓글이 더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문득 영화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범인을 찾은 듯 관객들을 꿰뚫어보는 송강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오른다.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









악의 평범성 2







˝불교 승려들이 숲을 지날 때 혹 밟을지도 모르는 풀벌레들에게

미리 피할 기회를 주기 위해 방울을 달고 천천히 걷는다는 말에

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얼마나 많은 생물들을 밟아버렸던가.˝



득음의 경지에 이른 어느 고승이나 성자의 얘기가 아니다.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한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의 말이다.

전 친위대원을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만들고

가난하고 소박한 생을 최고의 삶으로 꿈꾼 사람이기도 했다.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악의 평범성 3





몇년 전 경주와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때 포항의 한 마트에서 정규직은 모두 퇴근하고

비정규직 직원들만 남아 헝클어진 매장을 수습했다.

밤늦게까지 여진의 공포 속에 떨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아기 엄마들이었다.

목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세상이다.

지진은 무너진 건물의 속살과 잔해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간의 부서진 양심과 잔인한 본성까지도 보여준다.

정말 인간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불쑥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이산하시인의 시집 [악의 평범성]중에서











이월, ‘한나 아렌트‘와 함께했다.

어느 책을 읽어도 이산하시인의 ‘악의 평범성‘이 내내 따라다닌다.

‘아히히만‘은 과거의 독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곁에 있다.

내 안에도 있다.



바람이 차다.

골목을 휘돌아치는 익명성의 바람은 더욱 ‘매섭다.‘

그래도



삼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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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릴라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믿었다. 내 머릿속에는한 손에는 누의 머리를, 다른 한손에는 티나의 머리를 들고 긴 팔을흔들거리며 지하터널을 뛰어다니는 돈 아킬레의 기형적인 형상이자리 잡았다. 나는 너무나 괴로웠고 그 때문에 성장통이 왔다. 조금나아졌나 싶다가 다시 앓아눕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일종의 촉각장애를 앓고 있었다. 내 주변의 생명체들이 각자의 생활 리듬에 맞춰 바삐 움직이는 동안, 손가락 아래 딱딱한 표면이 말랑말랑하게 변하거나 안에 있는 내용물과 표충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며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몸도 만져보면 부은 듯했다. - P68

이 사실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공처럼 부풀어 오른 뺨과 톱밥으로 채운 손과 너무 익은 마가목 열매 같은 귓불과 커다란 빵 덩어리 모양의 발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몸이 나은 후 다시밖으로 나갔을 때 학교며 거리며 나를 둘러싼 공간 자체가 변한 것같았다.
주변 세상이 어두운 두 극 사이에 낀 것처럼 느껴졌다. 양극의 한쪽에는 지면 밑에서 건물의 지반과 인형이 떨어진 어두운 동굴을 압박하는 거대한 공기방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위에서 우리들의 인형을 훔쳐가버린 돈 아킬레가 살고 있는 건물 5층을 짓누르는 거대 - P68

한 구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두 개의 거대한 구체가 철로 만든 봉 끝에 고정되어 건물, 길, 들판, 터널, 선로를 지나며 이 모든 것을 납작하게 해버리는 상상을 했다.
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과 사물과 함께 그 사이에 끼어서 짓눌린느낌이었다. 입에서는 기분 나쁜 맛이 났고 계속되는 구역질에 기진맥진해 있었다. 모든 것이 나를 짓누르며 옥죄어 들어와 결국에는내 몸이 역겨운 크림처럼 짓뭉개질 것만 같았다.
그런 불편한 상태는 상당히 오래갔다. 사춘기 중반으로 들어설 때까지 몇 년 동안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느낌이 막 시작되었을 때 즈음, 나는 예기치 않게 처음으로 남자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다. - P69

터널 맨 오른쪽 입구는 암흑에 싸여 있었다. 그때까지 그렇게 어두운 곳으로 들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터널은 한없이 길었고 반대편 끝에 보이는 빛나는 둥근 출구는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발소리와 함께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은빛 물줄기와 물웅덩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잔뜩 긴장한 상태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릴라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크게 울려 퍼지는 자신의 소리를듣고 웃었다. 우리는 함께 또는 각각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 P93

아직 남은 시간은 많았고 가족 중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을 것이다. 자유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나는 항상 그날 여행의 전반부를 생각한다. 터널에서 나온 순간과 끝없이 펼쳐진 곧은 길을 마주했을 때의 그 느낌. 리노는 그 길의 끝에 바다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미지에 노출된 듯한 그 느낌을 즐겼다. 그때의 느낌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나 돈 아킬레의 집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를때의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 태양은 잔뜩 낀 구름 위에 떠올랐고 어디선가 강한 탄내가났다. 우리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무너져내린 담벼락을 따라서사투리로 이야기하는 소리와 뭔가가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간간이흘러나오는 낮은 건물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P94

릴라가 있어서 내가 길을 잘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갔지만 느낌으로는 릴라가 나보다 열 걸음은 더 앞서 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항상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만년2등이었던 나는언제나 1등인 릴라라면 가는 법과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 바다까지가는 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릴라라면 온 세상이 머릿속에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그 때문에라도 우리 주위를 둘러싼 세상이 엉망이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느낌에 나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나는 하늘이 아닌 땅속 깊은 곳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줄기를본 것을 기억한다. 땅의 표면에서 보는 그 빛은 어딘가 빈곤하고 불결해보였다. - P95

얼마 후 우리는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릴리는 걷는 속도를 늦췄고 나 역시그녀를 따라 속도를 늦췄다. 내게 못된 장난을 치려다가 후회하는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릴라의 시선과 두세 번 마주쳤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릴라가 너무 자주 뒤쪽을 바라보고 있다는사실을 깨닫고 나도 덩달아 뒤를 돌아보았다.
릴라의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우리 동네와의 경계선인 터널의 모습이 자취를 감춘 것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다.
우리는 이미 익숙하지 않은 길에 들어섰고 우리 앞에 펼쳐진 길도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 P95

1958년 12월 31일 릴라는 처음으로 경계의 해체를 경험한다. 경계의 해체는 내 표현이 아니다. 단어가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를 극대화해서 릴라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릴라는 사람이나 사물을 구성하는 윤곽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1959년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옥상에 모인 그날 밤, 릴라는 생전 처음 경계의 해체를 강렬하게 체험한다. 그때만 해도 그 느낌이 무엇인지정확히 규정짓지 못했기에 혼자서만 간직했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1980년 11월 어느 날 밤에 이르러서야, 옥상에서 경험했던 현상에대해 내게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결혼도 하고 자식도둔 36세의 여자가 되어서도 때때로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고백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 P113

그 사건은 내 기억 속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사내들을 끌어당기는자석 같은 내 몸의 힘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그보다 더 그 사건이 뇌리에 남은 이유는 릴라라는 존재가 카르멜라뿐 아니라 요구 사항 많은 유령처럼 내 주위를 맴돌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단순히 혼란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혀 결정을 내렸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도 바로 도망쳤을 것이다. 릴라와 함께있을 때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나는 분명 릴라의 팔을 잡아끌면서 어서 가자고 속삭였을 것이다. 그러다 릴라가 남기로 결정을 내리면그녀 옆에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옆에 없으니,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나는 릴라가 했을 법한 결정을 내렸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마음을 그녀에게 내준 것이다.
지노가 그런 제안을 했을 때 내 안의 자아를 뒤로 밀어내고 싸움할 태세를 갖출 때 릴라가 취하는 건방진 눈빛, 억양, 몸짓을 모방하고는 흡족해했다. 순간 약간 걱정이 되었다.  - P124

릴라는 열정적으로 나를 그 언어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래서인지사람들의 발을 편안하고 튼튼하게 감싸는 신발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리노와 페르난도 아저씨야말로 동네에서 가장 뛰어난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릴라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가면 구둣방에서 일도 할 수 없고 아버지는 한낱 시청 수위에 지나지 않는나는 릴라가 누리는 특별한 혜택에서 제외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학급에서도 의미 없이 자리만 채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개월이 지나도록 나는 교과서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거나 힘을 얻지 못했다. 불행함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로 집으로 돌아갈 때면작업장 구석에 있는 릴라만의 작업 공간인 작은 탁자 앞에서 일하고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구둣방을 지나가곤 했다. - P126

그렇다. 게다가 이 말을 할 때의 릴라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퉁명스러웠지만 이제까지 그녀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힘없는 목소리였다. 릴라는 어떤 소설인지 영화에서 살인자의 딸이 피해자의 아들을사랑하게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카르멜라에게 이야기해줬다고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구일 뿐 현실이 되려면 진실한 사랑이 생겨나야 한다고 했다.
카르멜라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 날부터 알폰소와 사랑에 빠졌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녀의 말은 다른 소녀들에게 멋있게보이려고 만들어낸 거짓말일 뿐이고 이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알 수 없었다. - P136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이가 기껏해야 열두살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지나가는 트럭 뒤로 일어나는 먼지와 파리사이로 타는 듯이 뜨겁게 달아오른 길을 따라 걷는 우리의 모습은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던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서로의 몸에의지하며 걸어가는 두 노인네 같았다.
나는 그 누구도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둘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돈 아킬레의 목에 칼을 꽂은 것이 전직 목수인 알프레도 아저씨가 아니라 하수구의 생명체이고, 살인자의 딸이 희생자의 아들과 결혼한다면 기억하는 한 언제나 존재했던온 동네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장막이 조금이나마 걷힐 것이라는 사 - P136

실을 아는 사람도 우리밖에 없었다.
사물, 사람들, 건물, 거리가 참아내기 힘든 무엇인가를 내포하고있어서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게임을 하듯이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내야만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인데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그녀, 나와 릴라뿐이었다.
라는 뜬금없이 하지만 우리가 나눴던 모든 대화가 결국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우린 아직 친구지?"
"그럼. - P137

"그럼 내 부탁좀 들어줄래?"
릴라와 다시 가까워진 그날 아침, 나는 릴라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줬을 것이다. 집에서 도망칠 수도 있고, 동네를 떠나 농장에서 잘 수도 있고, 나무 뿌리로 연명할 수도 있었다. 수챗구멍을 지나하수구로 내려갈수도 있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워지더라도 집에되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내게 부탁한 건별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 순간에는 약간 실망했다. 릴라는 하루에한 번씩, 한 시간이라도 괜찮으니 라틴어 책을 가지고 저녁 시간 전에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성가시게 굴지 않을게."
릴라가 말했다.
릴라는 내가 낙제한 것을 이미 알고 나와 함께 공부하고 싶어했다. - P137

하지만 나는 경외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같은날 파스콸레같은 어두운 매력이 있는 청년의 관심을 받았고, 새로운 학문을 향한 문이 눈앞에 열린 데다, 얼마 전까지 같은 동네 더군다나 우리 집맞은편 건물에 살던 사람이 책을 출판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마지막 사실은 우리도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릴라가 옳았음을증명했다. 물론 릴라는 책 쓰기를 포기했지만 나라면, 파스콸레의사랑에 힘을 얻고 그 어렵다는 고등학교라는 곳에서 공부를 해낸다면 도나토 아저씨처럼 혼자서 책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면 릴라가 구두그림과 구두공장으로 돈을 벌기 전에 내가 먼저 부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63

나는 다음 날 몰래 파스콸레와 약속한 장소에 나갔다. 그는 작업복 차림으로 헐떡거리며 나타났다.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고 여기저기 하얀 석회 자국이 튀어 있었다. 함께 걸어가면서 나는 그에게 도나토 아저씨와 멜리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최근 일어난 일을종합해볼 때 멜리나가 미친 것이 아니고 도나토 아저씨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으며 아직까지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파스콸레가 내 이야기에 민감하게반응하면서 맞장구칠 때도, 이 모든 일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도나토 아저씨가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철도청 직원이 페라로 선생님이 도서관에 비치해뒀다가 빌려줄 수도 있는 그런 책의 저자가 된 것이다. - P163

그래. 그녀도 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겉모습뿐 아니라 표현하는 방식까지도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이야기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익히 알고 있던 그녀만의 재능이 한층더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그때보다 훨씬 뛰어나게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연스러운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현실을 단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어떠한 기운을 불어넣어 똑같은 현상이라도 더 강렬하게 느껴지게 했다. 릴라가 그런식으로 말할 때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시도했을 때의 결과가 꽤 좋다는 사실에 흐뭇해했다.
나는 카르멜라나 다른 아이들과는 이런 면에서 다르다고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 애들과는 달리 나는 릴라가 내게 이야기를 하는그 순간, 그곳에서 함께 불타오를 수 있었다. 열중해서 이야기할 때릴라의 손놀림, 몸짓, 눈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릴라와 함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불현듯기쁨은 사라지고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내가 잘못 짚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벽돌공이자 공산당이며 살인자의 아들인 파스콸레는 내가 좋아서 구둣방까지 나를 데려다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릴라였던 것이다. - P167

아! 그때 그 바다의 모습이란・・・ 그날 바다는 심하게 요동쳤고 파도소리가 요란했다. 세찬 바람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옷은 몸에착 달라붙었으며 머리카락이 흩날려 이마가 드러났다. 아버지와 나는 그 진경을 바라보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바다 반대편 길에자리를 잡았다. 파도가 하얀 계란 거품을 이고 있는 시퍼런 금속관처럼 맹렬히 굴러 들어와서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감탄사를 연발하며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이 있는 길까지 밀려와서 수천 개의 빛나는 파편으로 부서졌다. 릴라가 없는 것이 어찌나 안타까웠던지.
거센 돌풍과 굉음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 그 엄청난 광경을 온몸으로 흡수하면서도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이, 너무나 많은 부분이 미처손에 쥘 새도 없이 흩어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P178

아버지는 마치 내가 떠내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내 손을 꼭 잡았다. 실제로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달려 나가서 길을 건너 바다의빛나는 파편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무시무시하면서도 빛과 소리가 충만했던 그 순간, 나는 새로운 도시에 홀로 남게 되는 상상을 했다. 새로운 인생을 앞두고 나 자신도 새로워져서 말이다.
나는 거칠게 변화하는 모든 것에 완전히 노출되겠지만 분명 승리할 터였다. 나는, 나와 릴라는 오직 함께 있을 때만 발휘할 수 있는그 능력으로 색채와 소리와 사물과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취합해 이야기를 만들고 힘을 부여했을 터였다.
동네에 돌아오니 긴 여행을 마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는친숙한 길과 스테파노와 피누차의 식료품점 모습, 과일을 파는 엔초 - P178

의 모습, 주점 앞에 서 있는 솔라라 형제의 밀레첸토 모습이 펼쳐졌다. 솔라라 형제에 대해 말하자면 이제 그들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어머니는팔찌에 얽힌 일을 알지 못했고, 아무도 리노에게 그날 일어난 일을전하지 않았다.
나는 릴라에게 그날 내가 지나간 길의 전경과 이름, 요란스러운소음과 찬란한 빛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만약에 내가 아닌 릴라가 그날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면 나는 호응하며 때때로 맞장구를 쳐줬을 것이다. 내가 직접 그 광경들을 보지 않았더라도 생기를 띠며 흥분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질문도하고 의문도 제기하며 언젠가는 꼭 그 길을 같이 걷자고 그녀를 설득했을 것이다. 나와 함께할 때 그 경험은 더욱 풍성해지고 나야말로 릴라의 아버지보다는 훨씬 좋은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니 말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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