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도『타임머신』에서 음침한 몰록과 무기력한 엘로이라는 인류분화가 일부러 사회 계급 체계를 인간 유전자에 짜 넣은 것이라면, 그 역효과는 무시무시하다. 귀족들은 노동 계급의 고기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모로 박사의 섬』에 나오는 사고 실험의 결과도 나을 게 없다. 유전 법칙을 잘 모르던 시절 소설의 무대 속에서, 강박에 사로잡힌 과학자가 벌인 진화 조작은 오직 괴물들만 낳는 끔찍한 실패이다.
「달의 첫 방문자』에서는 실험 조건이 다르고 결과도 모호하다. 다양한 쓰임과 장점으로 스스로를 선택하고 개량하는 존재는인간이 아니라 외계인, 월인들이다. 월인(Selenites)들이 이성적이고실용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 곤충들은 오랜 시간의 무작위 선택에 의해 맡은 일에 완벽하게 맞도록 만들어졌기에, 월인들은 유전자 통제와 태아나 유아 조작을 통해 신중하게 자신들을 개량하여, 가난도 폭력도 없는 효율적이고 평화로우며 조화로운 사 - P304

회를 만들었다. 그들의 고도로 전문화한 개별 신체가 인간의 눈에기괴하고 무서워 보인다는 점은 그들의 도덕성이 아니라 우리의편견을 비춘다. 미학적으로는 우리에게 소름 끼치는 존재지만, 윤리적으로는 아마도 우리보다 우월하지 않을까?
웰스는 이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판단을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특히 부족한 서술자 두 명에게 맡김으로써, 결국 판단을 독자에게 맡긴다.
주요 서술자인 베드퍼드는 무엇에든 준비되어 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는 없는 부패하고 자아도취 심한 무능력자다. 잔인한면이 터져 나올 때면 역겹지만, 너무나 무능하지만 스스로의 무능함을 알지조차 못한다는 점에서 그는 악당이라기보다는 코믹 히어로로 받아들일 만하다. 홀로 귀환하는 여행에서 그는 한순간 우주적인 이해와 날카로운 자기 인식을 경험하지만ㅡ"머저리…………수많은 머저리들의 자손의 자손...….." - 하지만 그 순간은 곧 날아간다. 지구에 돌아온 베드퍼드는 다시 원래 모습 그대로다. - P305

소설 속에서처럼 삶에서도 웰스의 충동은 언제나 스스로의 해방이었던 것 같지만, 그는 부정하거나 배신하지 않으려고 힘들게 노력했다. 이렇게 정착하지 못하는, 혹은 정착을 거부하는 성향은 아마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질 것이다. 동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시대의 끝이자 다른 시대의 시작에살고 있다고 보았고, 그럴 만도 했다. 웰스의 소설들은 자신이 "두시대 사이"에 존재한다고 느끼고, 이쪽저쪽으로 당겨지며 어느 쪽에도 편히 머물지 못하는 남자의 강렬한 시간적 고통을 보여 준다.
두 개의 시대에 살고, 두 시대 사이를 오가며 산다는 아이디어는웰스의 긴 경력 내내 강박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주제다.
그리고 여기, 그의 첫 장편에 그 정수가 담겨 있다.
내가 일곱 개의 과학 로맨스 seven Scientific Romances』라는 뚱뚱한 진녹색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몇 살이었는지,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통틀어 타임머신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얀스핑크스 아래 철쭉 사이에 펼쳐진 잔디밭은 내가 성장한 집의 정원처럼 친숙하다. 그 직접적이고 명료하며 자신감 있는(모방자들이생각한 "빅토리아 산문과 너무나 다른) 운율은 아직도 본보기가 된다. - P313

멜로드라마 같은 폭력이 펼쳐지는 한두 단락을 제외하면 이야기는 모두 가볍고 빠르고 확실한 필치로 쓰인다. 여행자가 집에 가져온 물건의 전부인 "아주 커다란 하얀 당아욱을 닮은 듯도한 두 송이 꽃이라든가, 타임머신이 실험실에 다시 놓였을 때 정확히 어디에 있었으며 왜 딱 그곳이었는지 설명하는 문장처럼 우아하고 능숙한 부분이 많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세세한 부분이야말로 SF적인 상상의 가장 순수한 정수이다. 흠잡을 데 없이 단단하다.
정원 전체가 상상의 산물이지만, 그 속의 두꺼비들은 진짜다.
타임머신은 잘 지은 제목이었다. 지금까지 낡아 가는 징후도 없이 3세기를 보았다. 상아와 니켈로 만든 막대며 석영 막대기도 온전하고 놋쇠 난간 구부러지지 않았으며, 그 언어와 통찰은 107년 전에 출발했을 때와 똑같이 새롭다. 이것이 몇 번이고 몇번이고 거듭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뭔가를 발견할 수 있는 여행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이 기계를 처음 타려는 독자들 모두를 질투했을 것이다. - P316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어 잠시 페이비언 협회에도 들어갔으나, 그곳은 웰스에게 충분히 활동적이지 않았다. 그는 유토피아미래주의자이자 (어느 정도는 페미니스트였고, 사회와 불평등과 자본주의 상업주의의 비평가요, 당선되지 못한 노동당 후보였고, 대격변과 사회개조 양쪽에 대해 지치지 않는 선지자였다. 『막다른골목에 다다른 정신Mind at the End of Its Tether』을 쓰던 70대 후반, 모든다툼과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고 대공세 내내 런던에서 폭격을 겪고 나서도 그는 아직도 인류를 위해 희망을 찾고 있었지만, 그 희망을 새로운 인류, 개선하고 변화시킨 새로운 인간 종이라는 아이디어에서밖에 찾지 못했다. "적응하느냐 소멸하느냐는 자연에 주어진 불변의 과제입니다." - P319

대단히 뛰어난 스승 밑에서 생물학자로 훈련받은 웰스는다윈의 역동적인 생물관을 받아들이는 데 흔들린 적이 없었다. 생명을 사회적 다원주의자처럼 우세를 점하기 위한 투쟁으로 보지않았고, 기독교인 다윈주의자처럼 인간으로 올라가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고 보지도 않고 오직 진화로 이해했다. 멈추지 않는, 필요한 변화로 변하지 않고 머물면 죽는다. 적응하면 계속 살아간다.
유연하게 적응할수록 더 멀리 간다. 포용력이 전부다. 변화는 어리석고 잔인할 수도 있고, 지적이고 건설적일 수도 있다. 도덕성은 오직 생각하고 선택하는 정신이 있을 때만 체제에 들어간다. 웰스는어둡고도 밝은 미래 양쪽을 상상했는데, 그의 신념이 양쪽 다 약속하지 않으면서 양쪽 다 허용했기 때문이고 그의 80년 인생이 어마 - P319

살아생전에, 그리고 작가 자신의 눈에 웰스의 중요 저작은리얼리즘 소설들이었다. 「앤 베로니카Ann Veronica』와 『토노-번게이같이 개념 중심적이고, 사회 계층과 압박을 잘 관찰하며, 시사적이고 도발적이고 자주 풍자적인 데다가 때로는 열렬히 분개한 작품들은 버나드 쇼‘의 희곡에 비견할 만하다. 버나드 쇼는 그렇게 진부하지 않지만 말이다. 웰스는 별나고 때로는 서툰 소설가였으며,
그의 소설 대부분은 재미있고 번득이는 데가 있긴 해도 시대에 뒤떨어졌다. 스스로의 기대를 넘어서고, 우월 의식에 사로잡힌 모든평론가들의 저항을 넘어서서 남은 것은 그의 "과학 로맨스"들이었다. 판타지와 SF 소설들이었다. - P320

『타임머신』, 『달의 첫 방문자』, 『우주전쟁』, 『투명인간』, 모로 박사의 섬』…… 오늘날 우리에게 H. G. 웰스라는 이름은 이런 의미이고, 마땅히 그럴 만하다. 이 짧은 장편이나 중편 소설들은 장르 전체를 확립했다. 몇 세대 독자들의 마음속에 그리고영화 제작자, 그래픽 아티스트, 만화 애호가, TV 사이파이 팬, 팝 컬처 열광자, 포스트모던 전문가들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이미지와 표상, 원형을 남겼다.
웰스는 과학소설이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을 갖기 오래전에과학소설을 썼다. 그는 그것을 "과학 로맨스"라고 불렀다가 나중에는 "가능성의 판타지"라고 불렀는데, 지금 정착한 이름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웰스의 독창성과 창의력은 놀라웠다. 어떤 SF를 보든 웰스에게서 그 최초의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SF와 판타지를 구별하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아직 아무도 그 둘을 구별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수십년간 그랬기 때문이다.  - P321

"나는 단편소설의 어떤 변함 없는 확고한 형식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웰스가 그렇게 한 것은 확실히 옳았다. 그러나 단편에대한 그의 오만하기까지 한 설명, "이 간결하고 유쾌한 글쓰기 방식"
은 좀 더 못한 작품들에는 잘 맞는 말일지 모르나 헨리 제임스나키플링, 심지어는 본인의 최고 작품들은 포함시키지 못한다.
물론 그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1939년, 아마도 그의 가장 뛰어난 단편일 눈먼 자들의 나라 수정을 논하면서 웰스는 아이디어 중심에 비밀 장치, 교묘한 결말로 이루어진, 그러니까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해 써 보인 수많은 사례와 같은 작품들에 대한 인내심을 잃었다고 썼다. "웅웅거리는 발전기, 퍼덕이는 박쥐, 세균학자의 실험관, 뭐든 도움이 되는 것은 거의 손을 대어……… 그 장치를 둘러싼 인간의 반응을 살짝 첨가하고 오븐에 집어넣으면, 짜잔." 그는 언제까지라도 그럴 수 있었지만 "단편도 매력적이고 만족스러우며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느낌, - P323

그는 17세에 도제 생활을 그만두었을 때 천을 잘라 파는 일도 그만두었다. 단어를 길이당으로 판매하는 작업이 그를 작가로만들었으나,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런 형식 자체를 못 견디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890년대에 단편소설이 꽃을 피우고 그 후에 시시해졌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편이라는 형식은 20세기 내내 발전하고 번창했다. 나는 혹시 웰스가 단편을 쓰지않게 된 것이 편집자들이 뛰어난 작품을 알아보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비평가들이 갈수록 소설을 사회적 심리적 리얼리즘에 구속하고, 그렇지 않은 작품은 다 문학 이하의 오락으로 치부하던 경향탓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품이 아무리 좋다 해도 주제가 환상적이거나 소재가 과학이나 역사나 다른 지적 훈련에 쏠려 있으면 "장르소설" 분류로 일축당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상상 영역을 다루는 작가들은 모두 겪는 위험이다. 문학적인 존경을 갈망하는 작가들은 아직까지도 자기들이 쓴 SF가 SF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어한다. 적어도 웰스는 상상의 총을 지켜냈다.
그러나 그 총을 쏘는 일은 그만두었다.
그런 한편, 타임머신』은 이제 1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절 - P324

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웰스의 단편소설 중에서 진정 영원히 읽힐 문학에 다가간 작품은 몇 편뿐이지만, 최고작들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놀랍도록 적절하며, 때로는 불안할 정도로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악몽처럼 달라붙거나 기억할 수 없는 꿈처럼 빛을 발한다.
나는 존 해먼드의 귀하고 거대한 『H. G. 웰스의 단편소설전집에 수록된 여든네 작품 중에서 스물여섯 편을 골랐다. 물론여기에서는 별 쓸모도 의미도 없는 리얼리즘 기준에서의 탁월함이 아니라 포괄적인 탁월함을 기준으로 선택했다. 이야기가 지적인 긴박감이나 도덕적인 열정, 특별한 미덕이나 기이함이나 아름다움 면에서 그 자체로 두드러지는가? 이야기가 같은 종류 중에서뛰어나며, 그 종류는 흥미로운가? 유익하고 중요하며, 다른 작가들의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는가? 나는 오직 "위대함"만을 소중히 여기고 "위대한 예술은 흉내낼 수 없이 유일무이한 막다른 길로 정의하는 독자가 아니다. 나는 예술을 공간과 시간 양쪽에서 다 공동체 산업으로 보며, 홀로 뛰어난 불모의 작품보다는 더 많은 예술로이어지는 예술이 더 가치 있다 믿는다. - P325

그 이야기들을 다 합쳐서 한 세트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웰스는 포착하기 힘든 작가다. 확실히 책 전체에 걸쳐 웰스의 독특한스타일이 보이기는 한다. 많은 단편이 저널리스트 분위기로 쓰여, 쉽고 경쾌하며 극도로 자신감이 있지만 가식은 없고 명료하고 휙휙 나아간다. 하나같이 아주 단순하고 꾸밈없어 보이는데, 정확히저자가 원한 대로다. 웰스는 고도로 심미적인 태도를 불신했다.(헨리 제임스와 웰스의 우정에 따라붙는 매력적인 주석은, 두 작가 모두 서로의작품을 다시 쓰고 싶을 때가 많았다고 고백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주의 깊은 작가이자 지칠 줄 모르고 다시 쓰는 작가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자각했고 자신의 기술에 예민하고 능숙했다. 웰스의 글투를 바꾼다는 건 음악에서 조성을 바꿔 버리는정도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P326

여기 수록한 조각글 중 많은 수는 원래 발표했을 때와 세세한 차이가 있다. 이 책에 실을 준비를 하면서 조금씩 편집했기 때문이다. 많이 바꾼 글은(주로 업데이트하느라 그랬다.) 실비아 타운센드 워너의 「도싯 이야기 Dorset Stories 』 서평 딱 한 편이다.
이 서평들은 연대순으로 정리할지, 알파벳 순으로 정리할지망설이다가 독자들이 찾고 싶은 작가를 쉽게 찾을 수 있게 알파벳순에 만족했다. 대부분 서평의 원래 발표 버전은 내 웹사이트에서찾을 수 있으며, 처음 발표한 지면 목록은 뒤에 실어 둔다.
나는 서평을 좋아하고, 서평을 계속 하기 위해서 읽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많은 책을 읽어 보아야 했다. 폐부를 쥐어짜는서정성을 갖춘 최고의 걸작이라고 선언하는 광고문들의 구름을몰고 도착한 책을 미리 읽어 봤더니 완전히 실패였을 경우는 슬프다. 하지만 대개는 내가 이미 흥미를 품고 있는 저자의 책이나, 별기대 없이 잡았다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책에 대한 서평을 부탁받는 행운을 누렸다. - P330

여기 수록한 서평 대부분은 《맨체스터 가디언>에 실렸는데,
그곳 편집자들에게는 훌륭한 책을 서평할 기회를 많이 주셨다는점에서도, 놀랄 만큼 유연하고 지적인 편집에 대해서도, 1만300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고마울 따름이다. 뉴욕과미국 동부 해안 문학계는 언제나 내가 그 문학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뻐했을 정도로 외부에 관심이 없고 편협하다. 하지만런던에 살 때 나는 진지한 영국 문학 파벌들, 악랄한 경쟁, 허용되는 만행의 정도에 상당히 겁먹었다. 그런 심술도 이제는 어느 정도누그러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가디언》에 영국책 서평을 쓸 때마다 내가 오리건에 산다는 게 기뻤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늘 그렇기는 하다. 캘리포니아에 대한향수를 느낄 때만 빼고 언제나. - P331

단편 하나는 극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붕 떠 있다. 우리는 두 번째 단편을 시작으로 넬을 따라가며 여동생과 부모와 함께였던 어린 시절을 지나고, 반(半)결혼의 우여곡절과(티그가 정말로그 끔찍한 아내와 이혼하고 넬과 결혼하긴 할까?) 아마추어 농사일과 늦은 부모됨의 시련을 거쳐 마지막에는 죽음의 문턱에 이른 부모의중년 딸이 되기까지 지켜본다. 하지만 첫 번째 단편은 연대상 마지막에 해당한다. 그것은 노년이 되어, 스스로 죽음의 문턱에 이른 부모가 된 빌과 티그의 초상이다. 왜 이런 역배치가 그토록 성공적인지 모르겠다. 첫 단편 「나쁜 소식」이 재치와 에너지, 애트우드 특유의 공포와 고통에 대한 가슴 아리도록 날카로운 감각이 전기처럼흐르는 눈부신 1번 타자라서일까. 이 단편에서 애트우드는 이보다더 날카롭고, 건조하고, 웃기면서 슬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단편을 마지막에 놓지 않은 데에는 지혜로운 구석이 있는데, 마지막 단편의 두 사람은 곧 죽을 테고, 이 두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 P336

인류에게 그나마 좋은 얼마 안 되는 것들, 애정과 의리와 인내심과 용기가 우리의 오만한 어리석음과 원숭이 급의 영리함과 미친 혐오에 갈려 먼지가 되어 버린 데 대한 애도곡.
유전 실험이 인류를 대체할 휴머노이드들을 만들었다는사실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누가 섹스를 원할 때면 파랗게 변하는,
그래서 남자들의 거대한 생식기가 늘 파란색인 사람들에게 대체당하고 싶어 할까? (그리고 누가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야기가 SF가 아니라고믿고 싶어 할까??)책의 마지막 몇 문장은 뜻밖이었다. 언뜻 피할 수 없어 보였던 무자비한 결말이나 죽어 가는 내리막도 아니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해결법도 아니라니, 놀라움이자 수수께끼였다. 횃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물 없는 홍수의 해에는 오직 정원사들만이 노래를 했다. 정원사는 다 죽은 게 아닌가?
어쩌면 이번에도 내가 단서를 놓쳤을지 모른다. 여러분이 이 비범한 소설을 읽고 직접 판단해야 마땅하다. - P345

지난 세기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진지한 시인들은 오직 시만 쓰지, 소설은 쓰지 않는다고 배웠다. 그런 순수주의자들에게 괴테는 무의미했다. 그와 동시에, 모더니즘 소설 비평가들은 상상 문학을 쓰면 진지한 소설가로서 자격이 없어진다고 선언했다. 현실주의자들에게 메리 셸리는 무의미했다. 교수와 문학상 수여자들은순수주의를 더 좋아했기에, 타고난 재능 탓에 국경을 서성인 이단아 작가들은 계속 가시철조망에 부딪치고 말았다.
젊은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 울타리를 쉽게 뛰어넘어, 일찌감치 시와 소설은 물론이고 문학 비평에서도 캐나다 총독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오웰의 1984처럼 - P346

뛰어난 근미래 사회풍자 경고 SF의 본보기인 「시녀 이야기』로 높은 울타리와 맞섰다. 헉슬리와 오웰은 아무 문제 없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는 문학 영역에서 미래가 추방당해 있었다. 문학상을바라보는 출판인은 누구나 SF라는 딱지를 두려워했다. 회피의 귀재인 애트우드는 그 딱지를 피했고, 그때도 그 후로도 약간의 대가를 치렀지만 유연하고 적응력 높고 매우 지적이며 대단히 고집스러운 재능 탓에 계속 기존의 리얼리즘으로부터 멀리 배회했다. 최근에는 애트우드도 장르를 자유롭게 가지고 놀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보는 일은 변함없이 흥미롭다. - P347

포위전 이후, 폭력과 인종차별자들의 공격이 수그러들고,
텔레비전도 가족 정보와 독서클럽 토론으로 되돌아가자 피어슨은우리에게 말한다. "일단 사람들이 소설에 대해 열렬히 말하기 시작하자 자유에 대한 희망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한 페이지를 넘겨,
책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분별 있는 이들이 깨어나 연대하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 더욱 강력한 공화국이 문을 열고 낙원으로손짓해 부르는 회전문을 돌릴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라거나 분별공화국 같은 말들은 의미가 손상된 나머지 무의미해진다. 이 서술자에게는 아무것도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고, 아무것도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하지만 정보 조작의 달인에게 이야기를 시켰을 때 문제는 독자가 그에게 그 자신이 던졌던 질문을 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때서요?" - P355

침대에 누워서 크리스 앤드루스가 멋지게 새로 번역한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팽 선생」을 읽던 나는 갑작스러운 불안감과 더불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엄청난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연민의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눈에 띄지는 않지만 계속 깜박거리는 독서등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주 오래된 영화 속 길거리 장면의 회색빛과 구름 낀 12월의 화요일에 내리쬐는 평범한 빛 사이를 오묘하게 오가는 햇빛 자체가 문제였을까? 더 심란한 건, 구체적인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건만, 이전에 이 책은 아니라도 이 책과 무척 비슷한 책을 여러 곳에서 여러 번 읽었다는 기분, 그런데 그 어느 것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 P356

혹자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도 하는세자르 바예호는 활동적인 공산주의자로, 조국 페루의 정부에서박해를 받아 인생 후반을 망명지에서 살았고, 1938년에 진단 미상의 병으로 파리에서 죽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구하려고 "대체요법" 의사들을 불러들였다.
이제는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후계자로 불릴 때가 많은 로베르토 볼라뇨는 독재자 피노체트가 권력을 잡자 조국칠레를 떠났고, 여생의 대부분을 망명지에서 보냈다. 『팽 선생쓴 것은 1983년, 서른 살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죽었다.
사실이라는 씨앗에서 상상의 거대한 덩굴이 자라나 한데얽히고 감기며 그림자를 드리우니, 그 덩굴이 맺는 열매는 때로는달고 때로는 쓰도다. - P359

ㄹㄹㄹㄹㅁ이 책에는 안식도, 평화도 없다. 화창한 캘리포니아의 아침햇살 속에서 먹는 아침식사마다, 채널 아일랜드의 아름답고 호젓한 해안과 산비탈을 찾는 순간마다 곧 닥칠 재난의 위협에 대한 예감에 내리눌리고 부질없어진다. 어떤 행복이든 의미 있기에는 너무 짧은 환상이다. 그 에너지와 긴박감에도, 그 역사적인 정확성과범위에도, 그 뛰어난 사건 쓰기와 동시대의 말과 생활에 대한 흠 없는 재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심장이 식을 만큼 황량하다. 그점에서는 우리가 우리 세상에 한 짓을 바라보고 책임질 방법을 찾는 대부분 사람들의 기분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난파로 시작해서 어둠 속의 방울뱀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희망할 여지를 많이남겨 두지 않는다.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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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스의 글쓰기 스타일은 확실히 언어의 의미와 소리가 모두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스타일이다. 1958년의 SF에서는 드문일이었는데, 밴스는 실재적이며 개인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대화는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품위 있고 정중할 때가 많다. 사람들이 이런식으로 말한달까. "당신이 비난하는 그 신빙성이라는 게 단지 사실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매너리즘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인다면 꽤 사랑스러운 매너리즘이다. 밴스의 서술 리듬은 차분하고 조용하며 음악적이다. 설명하는 부분은 정확하고 직접적이다. 날씨가 어떤지, 사물의 색깔은 어떤지를 알려 주고 배경 속에 들어가게해 준다. "뒤쪽으로는 바위 경사가 회색 하늘 높이 치솟았고, 하늘에는 작고 사나운 하얀 태양이 바람에 흔들리는 깡통 원반처럼 비틀거렸다. 베란은 그의 자취를 되짚었다." - P296

이 짧은 대목이 전형적이다. 첫 문장은 생생한 묘사를 시적으로 정확하게 절제하여 담아냈고, 두 번째 문장은 살짝 구식 표현을 단순하게 담았다. 밴스는 단어를 낭비하지 않았다. 단도직입식의 행동형(action) 글쓰기와는 아주 거리가 멀면서도, 행동형 작가이기도 했다. 플롯은 빠르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전진하고, 독자들을 제대로 끌고 가는 추동력이 있다. 밴스는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했다. 등장인물들과 플롯, 장면, 묘사, 행동,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리고 어쩌면 통제야말로 밴스의 큰 주제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 P296

우리에게 달까지 갈 장치가 있다면(60년 안에 생기긴 했다. 카보라이트는 아니었지만.), 달에 대기가 있다면(웰스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달나라 주민들이 고도의 지능을 가진 종족인데 자기들의 차가운 손으로 직접 사회 진화를 이룬다면...… 그렇다면 어떨까?
마지막 질문은 크다. 웰스의 기획은 현재 기술에서 가능한미래 기술을 추정하는 쥘 베른의 주요 원칙보다 더 크고 위험하다.
베른은 미래의 기술 경이들을 행복하게 경탄하는 반면, 웰스는 도덕이 없는 진화력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의문하고, 더욱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의도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화를 통제한다면 그 사회적 도덕적 함의는 무엇일지를 생각한다. 100년 후의 우리가 기업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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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는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을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최승자의 시 <이제 가야만한다>

어찌 보면 돈의 만족보다 삶의 만족을 이루기가 더 쉽다. 이른 나이부터 안빈낙도하기는 어렵겠지만, 일찌감치 돈에 정신을 묶어 두는 것도 서글프다. 마흔일곱에 겨우 벼슬에 오른 두보는 어지러운 정국과 부패한 관료사회에 실망해 시를 짓고 숨을 마셔 가며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젊은 날 자유하고 성찰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삶을 짓누르는 나쁜 공기를 금세 알아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다. 두보를 봐도 그렇다. 부귀영화에 이 한 몸 던져 행복하려는 사람이 있고, 멋진 영화에 이 한몸 얽맬 필요가 있으랴 노래하는 이가 있다. 둘 다 자기 선택이 - P204

겠으나 젊은 날들 경험과 감각이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됨은분명해 보인다. 인생의 꽃 시절은 짧고, 삶은 예상보다 오래 지속된다.
- P205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김혜순의 시 <첫>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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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비평가는 애써 울프가 예외임을 보여 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았다고 밝혀진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컬트"의 대상이다.
그 작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가슴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 P164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의 반열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로』 쪽이 기념비적인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보다 후대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 - P164

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전주의자들은 결코 여자에게 중심을 부여하지않는다. 여자들은 반드시 주변에 남겨져야 한다.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 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 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화는 작가의 죽음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 P165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SF 쓰는 방법 배우기


시도하는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은 아니지만, SF를 읽은 적이 없다면 SF를 쓸 수가 없다. 하지만 다른 것을 읽은 적이 없어도SF를 잘 쓸 수 없기도 하다. 장르는 윤택한 방언과 같아, 그 언어를쓰면 어떤 것들을 특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보편 문학 언어와의 연결을 포기해 버린다면 내집단에게만의미가 있는 은어가 되어 버린다. 장르를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유용한 본보기들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전복적이었던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올랜도Orlando』를 읽었을 때 나는 열일곱살이었다. 그 나이에는 그 책이 반은 계시 같고 반은 혼란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 - P171

다. 작가가 우리와 많이 다른 사회를, 아주 색다른 세상을 상상하고극적으로 살려 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엘리자베스 시대 장면들을, 템스 강이 얼어붙은 겨울을 생각하고 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나는 그곳에 있었고, 얼음 속에 타오르는 모닥불들을 보고 500년전 그 순간의 경이로운 기이함을 느꼈다. ‘완전히 다른 어딘가‘로 실려 가는 진짜 설렘이 있었다.
울프는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마구 쌓이지도 않고 설명이붙지도 않는 정확하고 구체적이며 자세한 묘사가 비결이었다. 독자가 상상력으로 그림을 채워 넣어 선명하고 완전하게 보도록 북돋는, 고도로 선별한 선연하고 효과적인 심상이었다. - P172

소설 『플러시 Flush』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개의 마음속으로들어가는데, 말하자면 비인간의 뇌이자 외계의 정신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대단히 SF적이다. 다시 한 번, 그 책에서 내가 배운 것은정확하고 선명하고 고도로 선별된 세부 사항이 가진 힘이었다. 울프가 글을 쓰느라 앉은 추레한 안락의자 옆에서 자고 있는 개를 내려다보며 ‘무슨 꿈을 꾸고 있니?‘라고 생각하고 귀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바람 냄새를 맡으며……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개의 세상에서, 산에 나가서 토끼를 쫓고 있는 개……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 P172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그 경험을공유하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그 공유가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어떻게 해서든 책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도록만들고야 말 것이다.
기술 세대가 아니라 인간 세대 말이다. 지금 기술의 한 세대는 생쥐 수명만큼 짧아질 판이고, 이러다가는 초파리 수명만큼 짧아질지도 모른다.
책의 수명은 그보다는 말이나 인간의 수명, 때로는 참나무, 심지어는 레드우드의 수명과 비슷하다. - P183

문학 소설을 장르소설과 대립시킬 때의 문제점은, 소설 종류의 합리적인 차이를 말하는 척하면서 비합리적인 가치 판단을숨긴다는 겁니다. 문학이 우월하고, 장르가 열등하다고 말이죠. 이건 편견에 불과해요. 우리는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지적인 토론을 해야 합니다. 많은 영문학과가 다가오는 우주선을 다 쏘아 떨어뜨려서 담쟁이 우거진 상아탑을 지키려는 시도를 그만뒀습니다.
많은 비평가가 많은 문학이 근대 리얼리즘의 성스러운 숲 바깥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문학과 장르의 대립은 남았고, 그게 남아 있는 한 잘못된 단정적 가치 판단도들러붙어 있을 겁니다.
이 지겨운 곤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한 가지 가설을 제안하죠.
문학은 문자 예술의 현존체이다.
모든 소설은 문학에 속한다. - P186

우리, 미국인들은 첫 번째 종류를 더 편안해하는 편이에요.
우리는 뭔가를 지어내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과 "실제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편안해하죠. 우리는 "리얼리티"에 대해 말해주는 이야기들을 원해요. 어쩌나 원하는지, 심지어는 완전히 가짜상황을 꾸며 놓고 찍으면서 그걸 리얼리티 TV"라고 부를 정도죠.
이 모든 것들의 문제는, 당신의 진짜는 나의 진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현실(리얼리티)을 같은 방식으로 인지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현실을 아예 인지하지 못하죠. 폭스 뉴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리얼리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이런 차이가아마 우리에게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일 거예요.
‘사실(fact)‘이 우리의 공통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상식같지요. 하지만 사실, ‘사실‘은 너무나 구하기 어렵고, 너무나 관점에 달려 있으며, 너무나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차라리 소설에서나 - P190

서로 공유하는 현실을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답니다. 실제로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도 있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읽어 줌으로써 우리는 상상의 문을 열어요. 그리고 상상은 우리가 서로의 머리와 마음에 대해 알 가장 좋은 방법,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지요.
글쓰기 워크숍에서 저는 오직 회고록만 다루고 싶어하고,
자기들의 경험과 자기들의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하는 작가들을 많이 만나 봤어요. 그런 분들은 이렇게 말할 때가 많지요. "전 뭘 지어낼 수가 없어요. 그건 너무 힘들어요. 하지만 일어난 일은 말할수 있죠." 그분들에게는 경험을 재료로 써서 이야기를 짓는 것보다,
경험을 바로 가져다 쓰는 게 더 쉬운 모양이에요. 그분들은 일어난일을 그냥 쓸 수 있다고 여기죠. - P191

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걸 조작하기 시작한다면, 그러니까 일이 멋지고 깔끔한 이야기가 되는 방향으로 일어난 척하려다간 상상을악용하는 거예요. 지어낸 걸 사실인 척하는 거고, 그건 적어도 아이들이라면 거짓말이라고 할 일이죠.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소설은 사실 파악이나 거짓말이 아닌 다른 층위의 현실로 넘어가죠.
상상과 소망 충족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둘 다글쓰기에서나 삶에서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충족은 현실에서 잘라 낸 생각이고, 어린아이 같을 때가 많지만 위험할 수 있는방종이에요. 상상은 아무리 마구잡이일 때라 해도 현실과 떨어져있죠.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풍성하게 만들어요. 돈키호테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푹 빠진 나머지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죠. 그게 소망 충족이에요.  - P192

미겔 세르반테스는 기사이고 싶어 하는 한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전함으로써 우리의 웃음과 인간이해를 크게 증대시켰어요. 그게 상상입니다. 소망 충족은 히틀러의 천년왕국이고, 상상은 미합중국 헌법이에요.
이 차이를 알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위험해요. 우리가 상상을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는 한갓 현실도피라 여기고, 그래서 믿지않고 억누른다면, 상상은 손상되고 왜곡되어 침묵에 빠지거나 거짓말을 하게 될 거예요. 모든 기본적인 인간 능력이 다 그렇듯, 상상력도 어려서부터 평생 연습하고 단련하고 훈련해야 해요. - P192

상상력을 연습하는 좋은 방법 하나는, 어쩌면 제일 좋은 방법은 지어낸 이야기들을 듣고 읽고 말하거나 쓰는 거예요. 훌륭한창작이라면, 아무리 기발하다 해도 현실과 일치하는 지점과 내적일관성이 있어요. 그냥 소망 충족의 헛소리이거나, 서사인 척하는설교에는 지적인 일관성과 진실성이 없어요. 온전하지 않고, 유효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않아요.
스스로에게 충실한 이야기를 읽거나 말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건 정신이 받을 수 있는 거의 최고의 교육입니다. 여기 미국에서조차도, 많은 이들이 아이들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샬럿의 거미줄>같이 상상력 풍부한 책을 읽히죠. 고등학교에서는SF와 판타지가 드디어 영문학 커리큘럼으로 인정이 됐어요.  - P193

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말해야만 하는 내용을 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말하며, 그것이 이야기 자체의 정확한 말(words)입니다. 그래서 말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말을 제대로 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그토록 오래 걸리는 거예요. 침묵과어둠, 시간과 인내심, 그리고 어휘와 문법에 대한 탄탄한 진짜 지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경험에서 길어낸 진실한 상상은 알아볼 수 있으며, 독자들도 공유한답니다. 위대한 상상 이야기들에는 어떤 메시지든 넘어서는 의미가 있고, 수백 년이 넘도록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의미를 갖습니다. 『오디세이』, 『돈키호테」, 「오만과 편견, 크리스마스캐럴』, 『반지의 제왕』, 『뿔 속의 꿀』, 『점프오프 크리크』. 이 중에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어요. 다 순수한 허구죠. 그리고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더 큰이야기에, 인간의 역사에, 인간 존재의 리얼리티에 포함시키는 작품들이죠. - P195

바로 그래서 저는 소설을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지어 보라 격려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말을 제대로 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하죠. 말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자면 시간이 좀 걸려요. 연습이 필요하죠. 노력이, 그것도 몇 년의 노력이 필요하고요.
그러고 나서도 여러분이 쓴 글이 영영 출간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출간된다 해도 여러분이 생계를 꾸릴 정도로 팔리지 않을 게 거의확실해요. 하지만 그게 여러분이 원하는 거라면 그 무엇도, 세상그 무엇도 여러분에게 글쓰기보다 더 달콤한 보상을 줄 순 없어요.
글을 쓰는 일 자체도, 그리고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말을 제대로 하고 있으며 이야기를 만들고 진실하게 말했다는사실을 아는 것도 엄청난 보상이죠. 진실을 말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고, 희귀한 일이에요. 즐기세요! - P196

어떻게 하면 전자출판과 인터넷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용해서 쓰고 싶은 걸 쓰고 그 대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전 좋은 생각을 해내기엔 너무 늙었어요. 여기 온 여러분들은 답을 생각해 내야 할 거예요. 그리고 생각해 낼 겁니다.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가끔은 모든 사람이 쓰고만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제 말 믿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그리고 자본주의 기술이 만든거대 기계의 뒷구멍과 틈 속 어딘가에서 작가들과 독자들은 언제나 그랬듯 서로를 찾아낼 거예요. 그렇게 되게 만드는 게 여러분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방법은 여러분이 찾아낼 겁니다. 여러분에게 용기를, 그리고 세상 모든 행운을 빕니다.
- P198

이 소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이 굉장한 비중을 차지하던대공황기에 쓰였다. 이 소설이 그리는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이다. 기술 변화의 속도를 감안하면, 그 한 세기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긴 100년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데이비스가 그리는 그림이 무의미할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매혹적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인간이 문화를 시작하고부터 지금의 한두 세대 이전까지는 모두가 데이비스가 그리는 일의 세계 속에 살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가치는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주 쉽게 그 세계로 돌아갈수 있다는 사실도. - P210

선연하고 박력 있는 언어, 건조하고 장난스러운 유머 슥슥휘두르는 붓질로 표현하는 광활한 풍경, 스스로와 두 산맥에 걸쳐있는 다른 모두에게 요란한 말썽을 일으키는 괴팍한 인물들 떼거리를 보면서도 이 책이 나에게 남긴 본질적인 느낌은 외로움이다.
아니면 미국식으로, 고독함이라고 할까. 고독한 사람들 거부감이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고독한 히어로를 찬양할지 모르나, 그런영웅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고독이란 우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TV와 휴대전화와 소셜미디어 덕분에 벗어난 무엇이다. 그렇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서부에 그 고독을 찾으러 갔다. 공간을, 빈자리를, 정적을 말이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지만, 영혼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고독을 갈망한다.  - P210

어떤 목표도 이루지 못하고, 심지어 어지간히 이해가 가는일조차 해내지 못했다 해도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격렬한 생명력을 지녔다. 터무니없이 비극적이고, 고통스럽게 웃기고, 모든 도피처가 그렇듯이 저속하다. 광대하고 무관심한 오리건 풍경 전체에데이비스는 이단아와 외톨이들의 대열을 반대하는 목소리들로 이루어진 미친 교향곡을, 고집스러운 영혼들의 순례를 보낸다. 나는그 속에서 조금은 마지못해, 또 조금은 안도하고 어쩌면 기쁘기까지 한 마음으로, 내가 아는 시골 사람들을 본다. 인간으로 사는 방법을 찾는 비범한 미국의 실험에서도 가장 끝자락, 머나먼 서부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 P213

개연성이야 관심 없다는 듯 무작위적인 일이 거듭 일어나고, 현실처럼 보이는 것과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점점 서로를침투하면서 우리는 딕의 심연 가장자리로 끌려간다. 가능과 불가능, 진짜와 가짜, 역사와 창작의 괴리…… 일어난 일과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 일어나지 않은 일,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대치하는 영역, 단단한 바닥도 없고 믿을 수 있는 것도 없는 장소 아닌 장소……이 정신적 소용돌이에서 보는 딕의 상상은 지독히도 친숙하며, 딕은 이 소용돌이를 독자들에게 직설적이고 그럴듯한 방식으로, 아주 평범한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소설가들이 산책이나 디너파티를 묘사할 때처럼차분하게 우리가 아는 세상을 해체한다. 무섭도록 전복적이다. - P223

자신의 계급과 문화에 맞게 침착하면서도 극도로 절박하게 쓰였고, 불꽃놀이 같은 창의력 뒤에 난해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동기들을 숨겼으며, 쾌락을 혐오스럽고 모멸적인 것으로 그리고 자유를 무분별의 자격증으로 그리면서 쾌락과 자유 말고는 추악한 세계로부터 탈출할 다른 선택지를 내밀지 않는 『멋진 신세계는 심란하고 골치 아픈 책이며, 불안의 시대가 낳은 걸작이고,
20세기의 고통을 담아낸 선명한 기록이다. 그리고 또 아마 올더스헉슬리가 80년도 더 전에 그 태동을 보았던 길로 문명을 계속 끌고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아주 이른, 그리고 유효한 경고일것이다. - P235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것이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제일수도 있다. 이 책이 대놓고 제기하는 역설적인 질문들, 그 밀도 높고경이로운 이미지로 우리를 괴롭히며 모든 정보를 불신하도록 자극하고, 우리가 환각을 뚫고 어쩌면 이 또한 착각일 수 있는 통찰에 이르게 하는 질문들보다 더 말이다. 반드시 물어야 하지만 답은 없는질문들을 묻는 것, 잊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것…… 이거야말로 가장 대담한 예술가들의 특권이다. - P242

침묵당한 이들을 위해 말하는 일과,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들여 화자의 목소리로 묻어 버리는 일은 다르다. 후자와 같은 잘못을 너무나 오랜 기간 저질렀기에, 어쩌면 정직한 선의 선행을 아무리 쌓는다 해도 인디언에 대해 쓰는 백인 소설가(또는 회고록 저자,
또는 인류학자)가 또 강탈하겠구나 하는 의심을 완전히 씻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인디언과 백인이 관계를 맺은 역사 전체에서 죄의식은 피할 수가 없다.
죄의식이란, 죄의식을 인정함으로써 더 나은 곳으로 갈 수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주로 인디언 작가와 활동가들이 쉼 없이 의식화해 준 덕분에 우리는 서서히 더 나은 곳으로 향했다. 백인 작가들은 열렬한 동일시가 역겨운 침해일 수 있고,
이상화는 악마화 못지않은 모욕일 수 있음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이제 순진하게도 "인디언의 관점에서 소설 쓰기에 나서는 사람은별로 없다. - P253

50년 전의 9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가 영어로, 여기 미국에서 출간됐다. 작가는 자기 나라에서 이책을 출간하지 못했다. 10.
이 책은 그해 10월 내 스물여덟 살 생일선물이었다. 나에게 충격을 안긴 책이었다. 1950년대에는 냉전이 우리의 생각을 흐렸고, 이 책에 담긴 복잡한 정치적 입장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감정으로 이해되는 책이었다. 맹렬하게 지적인 책이지만, 반드시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파스테르나크는 우리에게 인간 역사의 기묘한 한 시기에대해 이야기할 능력을 갖춘 신비주의 리얼리즘 작가였다. 위대한 - P261

1917년 혁명기에 평범한 러시아인들이 보내는 매일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이다. 모든 것이 바뀌고, 친숙한 것들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거칠게 세워지더니 또 갑자기 무너져 내리고, 분파간 전쟁과 파괴가 끝없이 이어지던 신념과 이상의 거대한 혼돈 - 그리고 어떻게인가 그 혼란을 매일매일 헤쳐 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정신적인 회복력을다른 피난민들로 미어터지는 화물차에 아내와 아이와 함께 올라 모스크바에서 우랄까지 가는 유리 지바고의 긴 기차 여행과도 같은 이 엄청난 여정에 돌아가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책에는 시베리아의 눈밭 속 선로에 시커멓게 죽은 채로 서 있는텅 빈 기차처럼 잊을 수 없는 심상이 가득하다. 그리고 유리가 우랄에서 모스크바까지의 먼 길을 홀로 걸어서 돌아가는 동안 바람이 아니라 쥐 떼로 일렁이고 바스락대는 무르익은 곡물 밭을 말하는(마을 사람들은 죽어서 작물을 베지 못했고, 쥐들은 수백만으로 불어났기에) 그 조용하고 무시무시한 문장들이란. - P262

이 책은 모두 여행과 헤어짐과 만남이다. 등장인물 수십 명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그들은 열렬한 사랑으로 이어지지만 서로를 붙들고 있지 못하고, 열렬한 미움은 사랑만큼이나 끈끈하게 그들을 묶는다. 그들은 만났다가 헤어지고울고 다시 만나고도 만났음을 알지 못한다. 무질서가 아니라, 거대한 기차역의 선로들처럼 다루기 힘들고 복잡한 상호연결이다. 이 모든 교차하는 운명들, 진지하게 애쓰는 이 모든 영혼들, 모두가 혁명이라는 거대한 - P262

바람에 날려가는 먼지처럼 무력하다.
지금 나는 내가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소설 쓰는 방법을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올바른곳에 착륙하는 방법, 감정을 구현하는 정확한 상세 기술(記述), 더많이 생략해서 더 많이 얻는 방법…….
이건 거대한 책이다. 500페이지 분량은 러시아 전역과 40년의 역사, 한사람의 일생과 꿈을 담아낼 만큼 길지는 않다. 그러나 이책은 한 인간의 영혼처럼 방대하다. 여기에는 막대한 고통과 배신과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이거니와, 이건 위대한러시아 소설의 마지막 작품일지 모른다. 끔찍한 시기에 나온 이 아름답고 숭고한 증언은. - P263

그런데 그 덤불 속을 계속 나아가다 보니 곧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돌려 말해도 악몽이었다. 이전에 읽었던 현실적인 스릴러들도 이 책에 비하면 커스터드 크림이나 다름없었다. 한도시의 모든 사람이 갑자기 눈이 먼다는 아이디어, 그것도 한꺼번에도 아니고 며칠에 걸쳐 무작위로 눈이 먼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끔찍하다. 평범한 한 사람 한사람의 눈을 통해(문자 그대로) 상황을 묘사하는 사라마구의 단조롭고 고요한 이야기 투는 그공포를 더 뼈저리게 전한다. 통제해 보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그 노력 때문에 도시는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눈먼 운전자들이 자동차를 몰고, 집집에 불이 나고, 공황에 빠진 군인들이 공황에 빠진 시민들과 마주한다. 초반에 눈이 먼 사람들을가둔 폐쇄된 정신 병원은 곧 두렵고 약해진 상태가 사람들에게 불러낼 수 있는 최악이 농축된 지옥으로 변한다. 괴롭힘, 노예화, 까닭 없는 잔인함, 강간……. 이 시점에서 나는 독서를 멈췄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 P265

정확히 말하면, 영어로 구할 수 있는 모든 작품을 다 읽었다. 사라마구는 모어인 포르투갈어로 글을 쓴다. 그의 소설들을탐색하면서 나는 작가 본인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그는 훌륭하고 솔직하며 설득력 있고 신중한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우리가 알아야 한다 싶은 내용을 다 말해 줬다. 1922년에 어느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열네 살이 될 때까지 맨발로 다녔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돼지 여섯 마리로 생계를 꾸렸고, 추운 밤이면 약한 새끼돼지들을 침대에 데리고 들어가 재웠다. 그는 가난 때문에 대학으로 이어지는 학교로 가지 못하고 직업 학교에 갔으며, 몇 년간 정비사로 일하다가 문학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노벨상 연설에서 쓰기를 "(이들이) 제가 알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국가와 대농장 지주들의 공범이자 수혜자였던 카톨릭 교회에 속은 사람들, 끊임없이 경찰의 감시를 받는 사람들, 제멋대로 휘두르는 거짓 정의에 수없이 당한 무고한 피해자들.....… 그래도 저는 광활한 알렌테주 평원에서 제게 주어졌던 존엄의 예시와 같은 위대함을 조금 더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잃지 않았어요." - P266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지금도 공산주의자다. 44세가되었을 때 첫 시집을 냈다. 여러 신문에 글을 쓰고 사설과 에세이를 냈으며, 몇 년간은 번역가로 일하면서 콜레트와 톨스토이 같은작가들을 포르투갈어로 옮겼다. 1980년대, 60대가 되어서야 모든에너지를 소설 쓰기로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소설수도원의 비망록Memorial do convento』은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그때부터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는이스라엘의 정책들에 대해 공공연히 비판한 대가를 몇몇 비평으로 치르기는 했지만, 비평가들은 그의 정치 견해를 무시할 때가 많아 보인다. 지금 누군가가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고수할 수 있다는생각 자체를 무시한달까. 실제로 그러려면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소설가는 아니고, 설교하려 드는 소설가는 전혀 아니다. 그의 소설 주제는 복잡하고, 솔직하면서도 교묘하다. - P267

그에게는, 젊었을 때 우리가 모두에게 말하던 내용을 또 말하려 드는 젊거나 젊어지고 싶어 하는 작가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 질린 나이 든 독자들까지 포함해서, 모두에게 들려줄 소식이 있다. 사라마구는 힘겹게 헐떡이는 수십 년 세월 모두를 뒤로했다. 그는 성장했다. 젊음을 광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에게는 이단의 말이겠지만, 사라마구는 남자로서나 사람으로서나 예술가로서나 젊은 시절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가되어 보았고 더 배웠다. 20세기 대부분을 보았고 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며,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하고 그 중요한 것을 어떻게 말할지 익혔다. 사라마구가 이야기할 때 쓰는 에너지와 장악력은 경이롭다. 그는 나와 같은 세대의 소설가 중에서 내가 몰랐던것,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 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 주는 유일한 소설가다. 내가 아직도 배우게 되는 유일한 소설가다. 그에게는 우리가 부족하나마 지혜라고 부르는 예리하고도 꾸밈없는 이해력을 얻어 낼 시간과 용기가 있었다. 지혜라고는 부르지만 흔히 지혜라고딱지 붙이는 번지르르한 다독임이 아니다. 그는 전혀 사람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체념하라는 조언을 읊어 대진 않지만, 친절한 트릭스터인 희망에 대해서도 별로 확신하지 않는다. - P271

모국에 대한 그의 사랑이 전자책 앤솔러지로 나온 유일한 논픽션 작품인 포르투갈로 가는 여행 Viagem a Portugal』의 원동력이다. 이 책은북쪽부터 남쪽까지 포르투갈을 훑는 자세한 여행 안내서이면서또한 발견과 재발견의 항해요, 정부의 종교적인 편협 행위에 대한저항으로 몇 년 동안이나 스스로 떠나 있었던 나라로 (돌아)가는여행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이 보수적이었는데, 이 말은사라마구가 경멸하는 네오콘들의 반동적인 헛소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무신론자이자 사회주의자로서 그는 그냥 믿음이나 견해가 아니라 합리적인 신념에 따라 발언하고 그 발언으로 고통받았다. 그 신념이란 거의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는 또렷한 윤리 체계에 기반하는데, 한 문장이기는 해도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영적 함의를 담고 있다. 그건 바로 ‘너보다 약한 사람들을해치는 건 잘못이다‘라는 문장이다 - P272

사라마구는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은 우주의침묵이고, 인간은 그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침이다." 그가 그렇게 극적인 경구를 내놓을 때는 자주 없다. 나라면 신에 대한 사라마구의 평소 태도를 꼬치꼬치 따지고, 회의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끈기 있다고 표현하겠다. 흔히 보는 절규하는 전문 무신론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자이고 교권 반대론자이며 종교를 믿지 않고, 신실한 지도자들도 당연히 그를 싫어하거니와 그역시 진심으로 그들을 싫어한다. 매혹적인 책 노트북 The Notebook』(2008년과 2009년에 쓴 블로그 모음)에서 그는 10세 소녀의 결혼을 합법화함으로써 소년애 행위를 합법화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프티(율법학자)를, 또 사제들이 벌이는 소년애를 저주하기를 너무나 꺼리는 로마 교황을 혹평하는데, 이 또한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을 심하게 해치는 문제다. 사라마구의 무신론은 페미니즘의 한 조각이고 그의 페미니즘은 여자들에 대한 학대와 저임금 지불과 평가 절하에 대한 격분, 모든 사회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권력을 오용하는 방식에 대한 격노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그에게는 사회주의의한 부분이다. 그는 약자 편에 서 있다. - P273

노벨상 연설에서 사라마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사는 작은 경작지 너머로 모험을 떠날 수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기때문에, 남은 가능성이라곤 뿌리를 향해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제 뿌리일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야심을 부려도 된다면 세상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 힘겹고 끈기 있는 파내려가기가 이토록 가볍고 기분 좋은 책에 깊이와 무게를 더한다. 16세기 유럽의 어리석음과 미신 속을 여행하는 코끼리 이야기라면 우화가될 수도 있었겠으나, 이건 그냥 우화가 아니다. 여기엔 교훈이 없다.
행복한 결말도 없다. 그렇다, 솔로몬은 비엔나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발자국은 독자의 마음속에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흙 속에 찍힌 깊고 둥근 그 발자국은 오스트리아 궁정이나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어디도 아니고, 어 - P286

쩌면 좀 더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방향을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그 발자취는 이제 흙이나 책장, 머릿속만이 아니라 전자 위에도 찍혔다. 이제는 우리 컴퓨터의 진동 속에도 있고, 우리 화면의상징으로도 빛 자체만큼 무형이면서도 실제로서 존재하여, 앞으로 볼 모든 사람이 보고 읽고 따라가게 될 것이다. 사라마구는 심금을 울리는 품위와 재치를 담아, 그리고 자기 작품을 완전히 제어하는 위대한 예술가답게 단순하게 글을 쓴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원로이며 눈물이 있는 남자, 지혜로운 남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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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환경에서 자라기만 해도 아이의 정신이 잘 형성된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요인이 자연보다 명백히 더중요하다. 아마 오클랜드 슬럼가에서 가난하게 성장한 아이의 발전에는 베이 지역의 비범한 자연 경관이 썩큰 요인이 아닐 테지만, 그 아이들에게 쇠퇴와 무질서로부터의 위안을 조금은 제공할 수도 있다. 사회적인 오염과 산업적인 추악함에서 멀리 떨어져 멋지고 다양한 풍경 속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평생 칙칙한 관목지밖에 보지 못하고 산 사람들보다 여유로운 영혼이나 고귀한목적을 품는 것 같지는 않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정신을 밝고 넓게만들려면, 아이가 남다른 관찰의 재능을 가졌거나, 성숙도와 함께점차 깊어지는 관찰과 심미안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칸방이나 좁은 아파트에서 자란 어린아이들은 지적, 공간적, 사회적 기술이 덜 발달한 채 학교에 입학한다는 증거가 있다. 성장한 공간의 물리적, 시각적 한계가 정신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슬럼가와 빈민 구역의 비좁고 흉하고 더럽고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환경이 그곳에 사는 아이들에게 우울과 분노를 키우며, 세상을 온전히 인지하는 능력에 한계를 짓고 희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독립성과 상호 책임에 대한 그 아이들의 인식은 혼자만의 방에서 성장한 중산층 아이의 인식보다 훨씬 강렬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든, 일부러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든 도덕적인 통찰력과 판단력을 육성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나는어릴 때부터 계속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함으로써 질서와 조화를 기대하게 자랄 수 있고, 그 마음은 도덕적인 명료성에 대한 적극적인 욕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윤리와 미학을구별하기가 어렵다. 내 윤리 반응과 미학 반응은 둘 다 갑작스러울 정도로 즉각적인 경향이 있다. 진짜 새롭거나 복잡할 경우에만머뭇거리고, 교육을 받고 개선할 수는 있지만 고집스럽다. 두 반응이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내가 윤리적으로 반응하는지 미학적으로 반응하는지 확실치 않을 때가 많다. ˝그건 맞아. 그건 틀려.˝ 그런 자연스러운 확신은 얕아 보이지만 얕지가 않다. 오히려 내 깊은곳까지 뻗어 내려간 오래되고 얽혀 있는 무수한 뿌리들로부터 올라오는 깊고 무척이나 비합리적인 반응이다. 나는 그 반응을 정당화하고 이유를 찾으려 하자마자 수렁에 빠진다.  P115, 116

우리 주최 측에서 논의를 어떤 주제로 시작할지에 대해 몇가지 아이디어를 주더군요. 작가는 이 세상의 어디에서 힘과 희망을 찾을까? 지금 여기에서 작가의 소명은 무엇일까? 어떤 작업이변화를 가져올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목적 공동체를 만들 수있을까? 이런 것들이었어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같은 대답만 내놓으려니 민망하군요.
제가 이 세상 어디에서 힘과 희망을 찾느냐고요? 제 작업에서, 잘쓰려고 하면서 찾습니다. 지금이든 다른 어느 때든 작가의 소명이뭐냐고요? 쓰고, 잘 쓰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어떤 작업이 변화를가져오느냐고요? 잘 만든 작품, 정직한 작품, 잘 쓴 작품입니다.  - P92

그리고 어떻게 목적 공동체를 만들 수 있냐고요? 글쎄요. 작가로서우리의 목적 공동체가 서로 관심을 공유하고 글을 최대한 잘 쓰려고 하면서 성립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 일 말고 다른 뭔가에 의존해야 할 텐데요. 그게 목표든 의도든 메시지든 영향이든 간에, 글쓰기를 그 작업 바깥의 어떤 목표에 대한 수단에 불과하게, 메시지의 매개체로 만들어 버리잖아요. 그 목표가 아무리 가치 있다 해도요. 제게 글쓰기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저를 작가로 만드는 것도 그게 아니에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목표에 대한 수단으로 글 쓰는 방법을배웁니다. 대부분의 글쓰기는 실제로 목표를 위한 수단이죠. 연애편지, 온갖 종류의 정보글, 사업상의 소통, 지시, 트위터 등 많은 글에는 메시지가 담겨요. - P93

그래서 아이들은 제게 묻지요. "이야기를 쓸 때, 메시지를먼저 정하시나요, 아니면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서 메시지를 담으시나요?"
저는 아니라고, 저는 메시지를 쓰지 않는다고 하겠어요. 전이야기와 시를 써요. 그게 다예요. 그 이야기나 시가 여러분에게어떤 의미인지 그 "메시지"는 제게 그 글이 갖는 의미와는 전혀 다를 수 있어요.
이 대답을 들으면 아이들은 실망할 때가 많고, 충격받기까지 하지요. 제게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교사들이그렇게 생각하는 건 분명하고요. - P93

그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문학이라 해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 작업의 진정하고도 핵심적인 가치가 작품이전하는 메시지에 있다거나, 정보나 위안을 제공하거나 지혜를 제시하거나, 희망을 주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면 전 이야기나 시를 쓸수없었을 겁니다. 그런 목적이 아무리 크고 고귀하다 해도, 그건 작품의 지평을 확실히 제한해 버려요. 작품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방해하고, 예술에 활력을 제공하는 가장 깊은 원천인 신비로부터 차단하고 말지요. - P94

의식적으로 어떤 문제를 다루거나 어떤 특정한 결과를 끌어내려고 쓴 시나 소설은, 그 작품이 아무리 강력하거나 유익하다해도 첫째가는 의무과 특권을 포기한 겁니다. 작품 스스로에 대한책임을요. 글의 제일 중요한 임무는 단순히 올바르고 진실한 형태를 주는 말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 형태가 곧 글의 아름다움이자글의 진실입니다.
잘 만든 토분은 그게 쓰고 버리는 테라코타든 고대 그리스항아리든 상관없이 토분일 뿐, 토분 이상도 토분 이하도 아닙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잘 만든 글도 그저 말들의 행렬이에요.
제 말들의 행렬을 쓸 때 저는 제가 생각할 때 진실하고 중요한 것들을 표현하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에세이를 쓰면서도 그러고 있죠.
하지만 표현은 계시가 아니고, 이 에세이는 쓸 때 예술성이 - P94

들어간다고 해도 예술 작품이기보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술은 메시지 이상의 뭔가를 드러내죠. 소설이나 시는 쓰고 있는 저에게 진실을 드러낼 수 있어요. 제가 진실을 집어넣는 게아니라요. 이야기를 만들면서 그 속에 든 진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독자들은 그 속에서 다른 진실을 찾을 수 있지요. 저자가 전혀 의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그 작품을 이용할 수도있어요. 우리가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를 어떻게 읽나 생각해보세요. 우린 3000년 동안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그 속에 혼을고, 그 속에서 인간의 열정에 대한 교훈, 정의에 대한 호소, 무궁무진한 의미들을 발견했어요. 저자가 원래 의도했던 종교적이거나도덕적인 교훈, 경고나 위로나 공동체의 기념으로 줄 수 있었던 의미를 훌쩍 넘어섰지요. 그 작품들은 예술의 원천이라는 신비와 심연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 P95

이 부분에서는 존 키츠도 제 편에 서 있고(키츠의 ‘마음을 비우는 능력‘ 원칙을 제가 맞게 이해했다면요.), 그릇은 비어 있음으로써그릇의 쓰임이 있게 된다 말한 노자도 그러합니다. 제대로 빚어낸시는 천 가지 진실을 담지요. 그렇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말하지는‘
않아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 유감스러운슬로건은 예술은 유아독존적이며, 향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 P95

중요하지 않다고 암시하거든요. 그건 오해죠. 예술은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바꿔 놓습니다.
그리고 예술가는 공동체의 일원이에요. 예술가의 작품을보고 듣고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요. 저는 제 작품에 제일책임이 있지만, 제가 쓰는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있다면 당연히 그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제 소설의 의미가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하고, 쓰면서나 언뜻 볼 뿐이라 해도…… 그렇다 해도 그 의미가 없는 척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반짝이는 눈으로 질책하는 아이들이 제게 묻듯이이런 질문이 남지요. "뭔가를 안다면, 그냥 말씀하실 순 없나요?"
진실은 함축적일 수밖에 없느냐? 당신이 만드는 그릇이 왜비어 있어야 하느냐, 왜 그릇에 우리를 위한 물건들을 채울 수 없느냐? - P96

흠, 우선은 철저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죠. 공공연한 훈계보다는 "넌지시 말하기"가 훨씬 잘 먹히기 때문이에요. 더 효율적이죠.
하지만 도덕적인 이유도 있어요. 제 독자가 제 그릇에서 꺼내는 건 그 독자에게 필요한 뭔가이고, 본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저보다 본인이 잘 알죠. 저는 그릇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 뿐이에요. 제가 누구에게 설교를 하겠어요?
아무리 겸손한 정신으로 한다 해도 설교는 공격적인 행위인걸요. - P96

"큰 도(道)는 매우 단순하다. 아집을 버려라. 도가(道家)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전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제 안에도 제가 만든 아름다운 그릇에 제 사견과 제 믿음, ‘진실‘을 채워 넣고 싶어 하는 설교자가 있어요. 그리고 제 주제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같이 도덕적인 색이 짙으면 그 내면의 설교자가 사람들을 바로잡고 어떻게 생각할지 뭘 할지 지시하고 싶어서 근질거리죠. 그렇지요, 주님, 아멘! - P97

전 제 내면의 교사에게 더 믿음을 갖고 있어요. 이 교사는이해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기에 섬세하고 겸손하답니다.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고도 모순된 의견들을 담아내지요. "너희가 날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어"라고 중얼대는 오만한 예술가의 자아와 "이걸 들으라고!"라며 외쳐 대는 설교자 자아 사이를 중재할 수 있어요. 진실을 선언하지 않고, 제시만 하지요. 고대 그리스 항아리를 가져다가는 이렇게 말해요. "이걸 자세히 봐요. 연구해 봐요. 연구하면 보상이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그릇에서 찾아낸 것들을 어느 정도 말해 줄 수 있어요. 당신도 이 그릇에서 그런 걸 몇가지 찾을지 모르지요."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렇듯 저도 제 예술이 제게 가르쳐 준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기 때문에, 내면의 교사가 필요해요. 하지만 그 교사조차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요. 결국 교사는아이들에게 메시지를 기대하라고 가르친 존재니까요. 교사의 본능은 "명확하고 명백해지는 거예요. 제 본능은 해설 없이 더욱 명쾌 - P97

하게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이고요. 제 일은 의미를 완전히 작품 자체에 포함시켜서, 살아 있고 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예술가가 도덕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발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선명하게 말하되, 그 말들 주변에 침묵의 영역을, 빈공간을 남겨 두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다른 진실, 더 나아간 진실과 통찰들이 생길 수 있게 하는 거죠. 그 공간이야말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대는 여전히 순결을 지킨 정숙한 신부그대는 정적과 더딘 시간이 키운 수양자식………그대 말없는 모습, 우리를 생각에서 몰아내는구나"
영원이 그러하듯이…… - P98

그 집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자꾸만 그집의 편안함, 실용성과 비실용성, 계단, 냄새 같은 것들에 대해 말하게 된다. 아름다움 자체는 이야기할 방법을 모르겠다. 마치 아름다움이란 다른 뭔가를 설명할 때만 전할 수 있는 것 같다. 해가 저물고 제일 먼저 뜨는 별은 똑바로 보지 않아야만 볼 수 있듯이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한집에서 살면 확실히 그집과 정신적으로 얽혀 있게 된다. 어느 정도는 성별에 달린 문제일수도 있다. 여자들은 대부분의 남자들보다 더 자신들을 집과 동일시하거나, 집을 자신들과 동일시한다는 말을 듣는다. 나파 밸리의오래된 랜치하우스는 나에게 대단히 소중했고 지금도 소중하며, - P112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산 포틀랜드 집도 그렇다. 하지만 버클리 집은 나의 근본이다. 내 유년기를 떠올리면 그 집이 떠오른다. 그곳이모든 일이 일어난 곳, 내가 생겨난 곳이다.
그리고 내가 성장할 수 있었던 공간은 정말로 특별했다. 내가 말하려는 것도 그것이다. 그 집은 드물게 아름다웠다. 그냥 예쁘고 쾌적한 게 아니라, 그걸 훨씬 넘어서는 아름다움이었다. 메이벡의 예술적 기준은 아주 높았다. 실내에서 우리를 에워싼 모든 것이, 마구 어질러진 어린이 물건들과 일상의 혼란을 걷어 낸 모든 표면과 면적이 고상하게 균형 잡혀 있었고, 재질도 솜씨도 훌륭하고아낌없었으며 위엄 있고 상냥하고 널찍했다. - P113

그 집엔 기이한 데가 있었다. 그게 진실이다.
아름다움이란 퍽 까다로운 말이다. 아름다움에 곧바로 접근할 수가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불평했다.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말을 예전처럼 자유롭게 쓰지 않고, 많은 예술가들(화가, 조각가, 사진가, 건축가, 시인은 그 말을 아예 거부한다. 아름다움을 판단할 공통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아름다움을 그냥 예쁘다는 뜻으로 축소시키고는 고결하게 경멸한다. 아니면 진실이나 자기표현, 날카로움, 그 외에 자기들이 더 귀하게 여기는 다른 가치를위해 일부러 아름다움을 버린다. - P120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두루 받아들일 만한 정의를 내놓지도 못하면서,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거부를 두고 토론할 능력이 있는 척하진 않겠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움이란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에 상관없이 예술가들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미학적인 요소를, 그 중요성을, 그 무게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 미학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그들의 작업을 예술이라고 부르게 만들어주는 건 무엇인지? 뭔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겠다는 추구를 빼면무엇이 예술가를 만드는지? 지금 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예술가의 숫자만큼 많을 것이고, 나에게 다른 사람들의 답을 물을 권리는 없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저 질문들을 던지고, 최대한 정 - P120

직하게 답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다.
소설가들은 아마 다른 어떤 예술가들보다 아름다움에 대해 덜 이야기할 것이다. 소설가의 작업을 묘사할 때 아름답다는말은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가로서 나에게는 언제나 ‘아름다움‘이 내 작업을 생각할 때나, 다른 소설가들의 작품을 설명할 때나 중요한 말이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오만과 편견』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다. 절묘하게 정확한 언어, 완벽한 균형과 보조와 리듬이 강력한 지성과 통찰과 강한 도덕 감정에 복무하여 완전하고 활력 넘치는 전체를 만들어 낸다면…… 그게 아름답지 않다면, 무엇이 아름답단 말인가? 이 말이 이해가 간다면 여러분도 기꺼이 내가 리틀 도릿』이나 전쟁과 평화』, 『등대로」, 「반지의 제왕」 같은 온갖 다른 종류의 소설을 설명할 때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쓰게 해 줄 수 있으리라. 아니면 여러분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소설들을 아름답다고 말하리라. - P121

행위이고, 변화이고, 여행이다. "자거라." 우리는 품에 안은아기에게 말한다. 잠의 나라로 가거라. 모든 게 다르고 네가 울 필요가 없는 그곳으로 가거라…………어린 아기들에게 물론 잠은 자연스러운 상태다. 아기들은천사처럼 지조 있게 그리로 돌아가며, 배고픔이나 불편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면 우리에게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를 알린다. 아기가깨어 있는 시간은 드넓고 잔잔한 바다에 흩어진 작은 섬들이다. 그섬들이 하필 부모에게 수면 욕구가 가장 절실한 곳에 끊임없이 시끄럽게 모인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성장한다는 건 점점 더 자주 깨어 있는다는 뜻이다. 아기가깨어 있는 시간을 나타내는 섬들은 점점 늘어나다가 이어 붙어 낮의 대륙이 되고, 우리 어른들은 목적을 가지고 그 대륙을 돌아다니고 일을 하면서 우리는 깨어 (awake) 있으니 곧 자각하고(aware)있다고 확신한다. - P142

이끼는 남성우월주의 사회가 여자들에게 듣고 싶어 하는말을 하고 있어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남겨 둔 유일한 영역을 자랑스럽게 자기 것으로 주장하죠. 원시와 신비, 어둠의 영역을요. 그리고 테나는 거기 한정되기를 거부해요. 테나는 이성과 지식과 사상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고, 어둠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햇빛까지차지하려 하죠.
저 대목에서 테나가 제 대신 말하고 있어요. 우린 어둠 속에 충분히 오래 살았어요. 우린 햇빛에 똑같은 권리가 있고, 이성과 과학과 예술과 나머지 모든 것을 배우고 가르칠 권리가 똑같이있어요. 여자들이여, 지하실과 부엌과 아이 방에서 나와요. 이 집전체가 우리 집이에요. 그리고 남자들이여, 그렇게나 무서워하는어두운 지하실에서나 부엌과 아이 방에서 사는 방법을 익힐 때가됐어요. 그러고 나면 우리 모두가 불가에 모여서, 우리가 공유하는 집의 거실에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우린 서로에게 할 말도 많고,
배울 것도 많아요.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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