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이미 나


제11회 서울레코드페어에서 음반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산울림 3집 리마스터링 앨범을 보았다. 연두색 바탕에 거친 붓질로그린 사람의 얼굴이 있고 "내 마음 / 그대는 이미 나"라고 써 있었다. <그대는 이미 나>는 장장 18분 38초에 달하는 대곡으로1978년에 나왔다. 아는 노래였지만 그날따라 엘피판에 새겨진글자가 낯선 시구처럼 다가왔다.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화두가 아닌가. ‘내 마음‘을 알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찾아서 인간은 평생을 헤맨다. ‘그대는 이미 나‘라고 할 만한 존재만 있어도 삶이 이토록고되고 외롭지 않으리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 P7

음반을 뒤집어보니 뒷면에 있는 "아무 말 안 해도 그대는 이미 나"
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타인과의 합일에 도달한 긍지의 말.
어쩐지 순정 가득한 가사가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 언어의찬미자인 나는 잡은 순간 내려놓지 못한 그 음반을, 턴테이블도 없으면서 고이 집으로 모셔왔다.
언어는 무의식을 일깨운다. 그대는 이미 나. 이것의 결핍 혹은 추구가 나를 쓰게 한 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버지니아울프의 말대로 산다는 것은 힘든 사업이다. 고통과 상실은 우리를 피해가지 않고 혼자 남은 밤은 길다. 내 슬픔을 그대가 알 - P7

아주기를 바라다가 제풀에 지치고, 그걸 말 안 하면 모르나 하고 서러워하다가, 말해도 모르는데 말 안 하면 더 모른다는 깨우침을 얻고서,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내 마음 나부터 알아주자는 데 이른 어른스러운 해결책이 내겐 글쓰기다. 나는진격의 독학자처럼 책을 쌓아놓고 줄기차게 읽고 썼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 형태는 없고 압력만 있는 슬픔을 나의 언어로 번역하여 실체화하는 작업이 없었다면 크고작은 생의 파고를 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언어를 고르고 쓰는 동안 나는 이미 충분한 나의 그대가 되어주었으니까. - P8

이미 두 권이나 썼는데 글쓰기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을 터놓았을때 나의 친구는 ‘노 프라블럼‘을 외치며 다정을 다해 이렇게말했다.
"<글쓰기의 최전선》은 《수학의 정석》같이 기본 원리를 일러주는 책이고, 《쓰기의 말들》은 사전처럼 옆에 두고 필요할때마다 찾아보는 책이고,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는 자습서같은 책이에요. 그사이 은유도 달라졌죠. 다른 은유가 쓴 다른책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 P11

낙타의 언어에서 사자의 언어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정신의 성장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 세 단계로 구분했다. 낙타는 의심없이 주어진 짐을 지고 가는 수동의 정신을 사자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을 거부하고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선언하는 부정의 정신을, 어린아이는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기쁨, 긍정의 정신을 상징한다.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충격에 빠져 혼잣말을 했다. "낙타, 나네……" 모성 이데올로기를내면화한 채 온갖 역할의 짐을 떠안고 일상의 사막을 거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이때의 각성으로 글쓰기가 봇물 터졌다. 낙타에서 사자로 어서 변신하고픈 몸부림이 글을 낳았으니, 엄마가 된 사람도 자신을 위해 행동할 권리가 있는 자주적인 존재라는 외침이 나의 첫 산문집에 고스란히 담겼다. - P12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은 다른 측면이 보인다. 낙타같은 모성이 저도 모르게 해낸 것들이 있었다. 엄마로 사는 일은 나의 욕구를 접고 타인의 욕구를 우선에 두는 일이다. 아침에 눈뜨기 싫어도 아이를 밥 먹여서 등교시키려면 일어나야하는 식이다. 그건 나보다 남을 위하는 차원이라기보다 나와남이 분리되지 않는 기이한 상태에 가까웠다. ‘그것‘에 계속 매여 있다는 점에서 육아와 글쓰기는 비슷했다. 오랜 시간에 걸 - P12

쳐 체화된 이 자아의 이중 감각이 작가의 삶에 유효했다. 기본적으로 글쓰기는 협업이고 약속이다. 나에게 몰입하는 만큼나를 내려놓아야 독자가 있는 글이 된다. 또 내 입장과 동료의처지를 동시에 헤아려야 일이 돌아가고, 이번 글에서 다음 글로 넘어갈 수 있다. 오늘의 살림을 마무리해야 내일의 생활이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밥‘이라는 마감을 매일 해온 사람에겐 원고 마감을 지키는 일이 괴로워도 어렵지는 않았다. 퇴로없는 삶에 복종해온 탓이다. 인생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고, 엄마로 살면서 길러진 낙타의 근면함과 수동성이 나를 쓰는 자리에 데려다놓았고 나는 ‘그래도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 P13

글이 쓴 사람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을 보아왔다.
앞서 글쓰기 책을 쓸 때와는 달라진 나의 모습이 이 책에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가령, 예전엔 어떤 문장만 좋으면 무조건 열광하고 인용했다면 지금은 글쓴이의 사회적 좌표를 살펴본다.
백인인가, 남성인가, 비장애인인가, 이성애자인가, 서울 사람인가, 중년인가, 대졸자인가 등등. 철학서나 사회과학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손이 가는 대로 읽다보면 거의 백인 · 중년·이성애자. 남성 저자의 책이었고 그러한 사회문화적인 길들임에 별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내인생의 오빠들로 니체와 조지 오웰을꼽기도 했다. 그들의 말과 사고를 여전히 따르지만 이젠 그들의 - P13

저작에서 여성혐오적 맥락을 골라낼 수 있게 됐다.
내 인생에 만만찮게 멋진 언니들도 생겼다. 버지니아 울프와 리베카 솔닛과 오드리 로드와 박완서와 젊은 여성 작가들의 저작이 책꽂이의 명당을 차지하고 있다. 장애학과 동물권과 이주민에 관한 책을 꾸준히 들인다. 중심이 아닌 변방의 언어, 생명을 살게 하는 존엄의 언어, 이분법을 넘어선 사이의 언어가 내 삶에 들어오고 섞이면서 더욱 진중하게 말을 고르게되었으므로, 그렇지 못한 과거에 대한 반성문을 쓸 일도 늘어났다. 그래서 이번 책을 쓰면서는 혐오나 차별적 표현이 있지않은지, 인용구 원작자의 나이나 성별 등 균형을 고려했는지,
성급하고 편협하게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등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도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편견은 깨지기전까지 그것이 편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간 무비판적으로 써왔던 관습적 언어와 권력의 언어에 사자처럼 부정의 ‘아니오‘를 말할 힘과 나의 무지를 뉘우칠 용기가 조금은 생긴 것 같다. 페미니즘 연구자 베티 리어든이 표현한 대로 "가부장제가 여성에게서 빼앗을 수 없었던 하나의 힘, 즉 생명을 낳는 힘‘을 밑천 삼아 나는 낙타의 언어부터 출발해 사자의 언어 그리고 어린아이의 언어를 차근히 배워가는 중이다. - P14

타인의 구체적 삶과 닿아 있는 문장. 너무 날것이라서 아픈 문장. 아픔이 길이 되는 문장. 그가 글을 쓰면서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리고 묘사할 단어들을 찾느라 고심했을 시간을 상상해보았다. 글쓰기는 이런 일을 한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을 오래 들여다보도록 북돋운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을 만든다.
안 보이던 사람이 보이는 일은 일상의 작은 혁명이다. 배달노동자를 인터뷰한 책을 읽고 나면 건물 승강기에서 만난 배달 노동자를 이전과는 다른 눈길로 보게 된다. 어떤 대상을 표면적인 존재가 아닌 입체적인 인격으로 보는 감각이 시민의식이다. 너도 나도 쓰고 말하고 듣고 생의 경험을 교환하다보면 사적인 고민은 공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일상에 먼지처럼숨어 있는 억압의 기제와 해방의 잠재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혹자의 지적대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할 능력은 없지만 비난할 능력은 있는 사람만을 양산하는 척박한 현실에서, 책과글쓰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 이해의 심층에 도달할 수 있을까. - P16

연결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럴수만 있다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그걸 또 성실하게 세상에 전달하는 사람, 더 많은 고통과 기쁨에 연루된사람으로 살고 싶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싶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사랑받는 사람의 얼굴을 갖고 싶다(나만사랑하면 쓸쓸하므로 쌍방향을 원한다). 서로 바라보고 경청하는 일은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흐트러짐 없는 사랑의 행위지만 글을 쓸 때는 그런 포즈를 흉내라도 내게 된다. 사람을, 고통을,
말들을 오래 생각해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 듣는 사람, 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즉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 P17

"글을 못 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쓴 글이 잘 쓴 글입니다."

나 또한 글쓰기 책을 섭렵하듯 읽었지만 글은 아는 대로 써지지 않았다. 여기서 얻은 교훈은 유용한 팁이 아니라 서두르지않고 제 몸으로 써나갈 때 자기만의 언어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잘 쓸 수도 없다. 목적에 갇히지 않아야 이것저것 시도하는 놀이가 되고 재밌어야 계속 쓴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집어 든 독자들이 ‘글쓰기의 유년기‘를 편안하고 충분하게 누렸으면 좋겠다. 유년기도 없이너무 일찍부터 수험생 모드로 진입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목표가 없으면 심심하니까 이런 정도를 권해드린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가족(없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되기 같은 것들. 인권활동가 미류의 표현대로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너무 큰 용기를 요구하지 않는 세상이어서 오길 바라며 세 번째 글쓰기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2023년 새해
은유 - P19

다만 혼자 글을 쓸 때 문제점도 있죠. 강제성이 없다보니 쓰다만 미완성 글이 쌓인다는 것과 독자의 검증이 없어서 자기만 이해하는 자족적인 글을 쓸 수도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같아요. 저는 혼자 쓰고 혼자 보는 글이라도 블로그에는 꼭 완성했다고 할 만한 글을 올렸어요. 그렇게 했을 때, 복잡한 생각을활자로 가지런히 정돈한 글을 보는 쾌감이 컸어요.


여러분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독자를 위해 쓴다는 마음으로 글을 완성해보세요. 여기서 ‘완성‘이란 나를 전혀 모르 - P29

는 다른 사람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남뿐만아니라 미래의 내가 봐도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 수 있도록 표현하려는 바를 촘촘하게 객관화해서 쓰는 겁니다. 그렇게 한 편씩 쓰다보면 마음이 흡족해지고자신감이 생겨서 또 쓰고 싶어져요.


그렇습니다. 혼자 글을 쓴다는 것은 독자 없이 쓰는 것이며 독자의 반응을 초월해서 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캐나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책 《글쓰기에 대하여》에 독자와 작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독자는 거대한 미지의 존재라고 말하면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소개하죠. - P30

나는 무명인이에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도 무명인인가요?
그러면 우리는 잘 어울리는군요!
말하지 마요! 그들이 떠들고 다닐 거예요, 알잖아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되는 건!
얼마나 눈에 띌까요, 개구리처럼
6월 내내, 흠모하는 늪지를 향해
자기 이름을 불러대는 것은! - P30

시구를 언급한 뒤 이렇게 부연합니다.


그러다 책이 성공하면 작가는 "유명인이 되고, 독자 집단은 그를흠모하는 "늪지"가 됩니다. 하지만 무명인에서 유명인으로 바뀌는데는 트라우마가 동반돼요. 무명인 작가가 투명성이란 망토를 벗어던지고 가시성이라는 망토를 걸치는 과정에서요. 매릴린 먼로가말했지요. "다른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무명인은 유명인이 될 수없다."


혼자 글쓰기를 다르게 말하면 세속적인 성공의 뒤안길에서쓴다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그 시간을 소외의 시간이 아니라내면을 다지는 풍요의 시기로 생각할 수 있어야 오래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빠른 성공이 아니라 건강한 성장이니까요. 혼자 쓰는 시간 동안 자기 탐색의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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