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정신을 단속하는 일이라면 조금 자신 있었다. 나이들어도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주변에 크게 폐 끼치는 존재는 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실제로 기태의 젊은 시절 꿈은 훌륭한 어른은 못 돼도 산뜻한 중년을 되는 거였다. 청결한 옷을 입고, 타인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젊은 세대를 지지하고, 주변에 해가 되지 않는 존재가되는 것. 긴 시간이 지나 기태가 진심으로 놀란 건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태는 자신을 둘러싼 좌표는 그대로 ‘나‘라는 점만 이동하리라 착각했었다. 점과 더불어 좌표도 같이 움직이는데다 다른 그래프와 충돌하며 곡선과 직선이 찌그러지고 휠 거라 예상 못한 까닭이었다. 물론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여기저기 빵가루처럼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닌 말과 마음들, 담백하지 못한 처신들,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낸 뒤 엄습한 부끄러움같은 건 이제 많이 줄었으니까. 경험이 많다는 건 ‘경험을 해석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냄새는, 헛구역질이나 트림은 ‘해석‘이나 ‘의지‘로 잘 막아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거였다.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 - P175
게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희주도 그랬을까? 요즘 내가 느끼는 걸 희주도 체감할까?‘ 부하 직원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거나 몸이 쇠해질 때마다 기태는 희주 생각이 났다. 이제 와 뭔가 의지하고 싶다거나 자기연민이 들어 그런 건 아니었다. 어쩐지 희주라면 이런 자신을판단하거나 혐오하기 이전에 이해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연애 시절 대화가 가장 잘 통했던 사람도 희주였고 살면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사람도 희주였다. 그런데 우리는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희주의 안부가 궁금할 때 기태는 종종 차대표의 SNS 계정에 들어갔다. 게시물을 잘 올리지 않는희주에 비해 차대표는 자기 매체를 부지런히 운영하고 활용했다. 가끔은 차대표의 계정에서 희주의 소식을 더 자주 확인할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단둘일 때보다 여럿이 함께일 때가 많았지만 기태는 둘 사이에 오가는 묘한 기운이랄까 성적 긴장이 신경쓰였다. 특히 희주 쪽에서 좀더 적극적이었는데, 아는사람은 알아차릴 수 있는 암시와 암호를 볼 때 그랬다. - P176
나를 향해 활짝 열린 로버트의 동공을 보자 내 눈동자도 거기호응하듯 크게 벌어졌다. 실은 며칠 전 나는 화면 속 로버트의 얼굴을 보고 작게 동요했다. ‘저 남자, 날 감상하고 있어‘란 자각이 들어서였다. 로버트는 욕망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는편에 속했는데도 그런 감정이 전해졌다. 동시에 ‘오랜만이다‘ 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눈동자에 담긴 호감과 호기심 그리고 성적 긴장을 마주하는 것은. 그런데 그게 전혀 느끼하거나부담스럽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외로워서 그런가? 스스로를 의심했다. 헌수와 헤어진 뒤 누군가와 정신적으로도또 육체적으로도 진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나는 내 감정이 인간적인 호감인지, 성적 주체가 되는 기쁨인지, 성적 대상이 되는 설렘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그 모든 게 섞인 총체적인 무엇일지 몰랐다. 감정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사실 대상과무관하게 외국어 수업에는 어느 정도 성애적인 측면이 있었 - P233
다. 일말의 더듬거림과 망설임, 지연과 기쁨, 찰나의 교감, 수치심과 답답함, 긴장과 해소, 갑자기 터져나오는 웃음, 실수와용서 등이 그랬다.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응. 나 잘 지냈어. 당신은? -나도.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뒤 우리는 몇 마디 대화를 더 이어나갔다. 이를테면 "그런데 한국어로 ‘안녕‘은 뭐라 그래?" 같은 말과 몇몇 감상을. 얼마 뒤 로버트는 그 큰 눈으로 화면 속 슬라이드 교재를 훑다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 P234
별생각 없이 대꾸해놓고 방금 전 문장이 후 어떤 유혹처힘 들리면 어쩌나 걱정했다. 내가 로버트의 시선을 의식해 생긴 긴장이었다. 에코스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신뢰와 유대가 쌓이는 경우는 흔했다. 나 또한 샌드라나 로즈와 겪은 일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로버트로 바뀌자 그 공기가 좀 달라졌다. 어쩌면 온갖 풍부한 감정이 담긴 인간의 눈을 너무 오랜만에봐서 그런지 몰랐다. 뇌를 다쳐 일상적인 의사 표현이 어려웠던 내 어머니도 얼마간 나와 눈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그 안에는 어떤 미안함이나 고마움보다 의심과 비난이 자주아른거렸다. 음식. 그래. 엄마는 자기 음식을 제일 좋아했지. 다른 사람 칭찬은 잘 안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엄마는 누굴 만나든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는 데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더불어 그걸 위해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배역을 떠넘기는 데 능숙했다. 심지어 그게 딸이라 해도, 언젠가 헌수와의 식사 자리에서도 엄마는 거의 재난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냈다. 자기 딴에는 조실부모한 사람을 위로하려 한 말이었겠지만, 늘 그렇듯진짜 의도는 따로 있었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는 감각에 몰두하는 거였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두 눈으로 내게 가장 많이 보낸 메시지는 ‘미안해‘도 ‘고마워‘도 아닌 ‘두려워......‘였지. - P235
일년 뒤 어머니마저 폐암 진단을 받는 바람에 오 년간 또 어머니를 간호해야 했다. 대학 시절을 포함해 거의 십 년가량을가족 간호로 보냈지만, 대학 졸업 즈음 어머니가 떠나고 졸지에 고아가 돼 병역을 면제받았다. 언젠가 침대에서 헌수는 "그십년 중 이 년 정도는 엄마가 나 빼준 거라 생각해"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헌수가 그런 농담을 하기까지 혼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현수와 헤어지고, 육 인용 병실 보호자용 침대에 혼자덩그러니 누워 있을 때면 더러 헌수와 함께 <러브 허츠>를 듣던 아침 풍경이 떠오르곤 했다. 휴대전화 화면에 뜬 이모 이름을 보고 불길한 표정을 짓던 내 모습과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눈으로 지켜보던 현수 얼굴도. 그때만 해도 그게 우리 관계의파열음이 될 줄 몰랐는데. 이제 와 헌수 말을 빌리자면, 그런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사람들처럼. - P250
병실에서 혹은 쇠락한 고향 골목에서 홀로 어둠과 마주하며나는 종종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미 많은 걸 잃었다 여겼는데 여전히 잃을 게 남은 삶 속에서, 자꾸자꾸 잃는 과정에서, 물수건으로 엄마 뒤를 닦고 엄마 눈을 본 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던 때,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때, 그러지 못했으나 거의 그럴 뻔했던 때를 떠올렸다. 어려서부터 가족 간병을 경험한 헌수는 어쩌면 그게 뭔지 너무 잘 알아서, 그걸 다시 겪을엄두가 안 나서 나를 떠난 걸까?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 쪽에서 먼저 정중하게 도망친 거였지. 물론 칼같은 이별은 아니었고 그뒤 몇 번의 재회, 몇 번의 잠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먼저 안녕이란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우리가 이제 다시는못 볼 사이가 됐다는 걸 알았다. - P251
ㅡ..... ㅡ나는 늘 부러웠거든 자기 부모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ㅡ...... 현수는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땐 미처 몰랐지만 아마 헌수 마음속에서는 하고 싶은 말과 해선 안 되는말, 할 수 없는 말 등이 뒤엉키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건 ‘좋은부모‘나 ‘그렇지 않은 부모‘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지몰랐다. 마치 내가 나의 삶에 계속 놀라게 되면서부터 다른 사람 삶도 잘 판단 않게 된 것처럼. 당연한 얘기지만 긴 시간 엄마 옆에 머물며 내가 가장 그리워한 사람은 헌수였다. 나와 결혼할 뻔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고독을 겪은 사람이라 그랬다. 헌수와 헤어지고 이 년 뒤 엄마 병실에서 쪽잠을자는데 만취한 헌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보호자용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들고 슬며시 병원 복도로 나갔다. 그러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조용히 동화에 집중했다. 헌수는내게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다 엉뚱하게도 우리가 <러브 허츠>를 들은 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만약 지금 너를다시 만난다면 네가 틀렸다고, 이건 ‘안녕‘이 아니라 ‘암 영‘이라고 고쳐주는 대신 그래, 가만 들어보니 그렇게도 들리는것 같다고, 콘크리트 보도에 핀 민들레마냥 팝송 안에 작게 박 - P252
힌 한국어, 단순하고 오래된 ‘안녕‘이란 말이 참 예쁘고 서글프다 해줄 텐데"라며 작게 훌쩍였다. 그러곤 그런 스스로가 창피했는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날, 통화가 끝난 뒤에도 병실 복도에 한참 서 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제 나는 헌수도 없고, 엄마도 없고,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도 없는이 방에서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란 가사의 노래를 듣는다. 보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너의 부재로부터 무언가 배웠다고. 그런데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지금은 그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쪽에서 먼저 원곡 위에 ‘안녕‘이란 한국어를 덧씌워 부른다고. 우리 삶에는 그렇게 틀린 방식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고 아마 나는 그걸 네게서 배운 것 같다고. - P253
나는 로버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실력도 안 될뿐더러 지금 내 마음을 어색하게 번역했을 때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누락과 손실이, 하찮은 세부하나하나가 내 감정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부분으로 느껴질것 같아서였다. 기쁨이라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슬픔은 달랐다. 고통만큼은 내 슬픔의 언어, 감정의 뿌리, 모국어로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모국어로 말한들 과연 그게 온전히 전해질까?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고작 이렇게 말했다. - P253
로버트의 순수하게 활짝 벌어진 동공을 보자 내가 생각보다 이 이별을 무척 아쉬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 시절 누군가와 정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해서, 긴장과 웃음, 안부를 나눴다 해서 헤어짐이 이렇게 서운할 줄은 몰랐다. 이상하지. 직장에서는 그 모든 게 지겨웠는데. 사회적 감각의 스위치를 꺼두고만 싶었는데, 고향에서 엄마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의 관계로세계가 쪼그라들자 그 많은 언어가 그리워졌다. 실수하고, 변명하고, 거짓말하고, 반문하고, 더러 표 안 나게 유혹하고, 티나게 매혹하고, 긍정하고, 의심하고, 호응하는 사회적 몸짓이. 그래서 그 일부를 한동안 내준 로버트가 필요 이상으로 소중하고 친밀하게 다가왔는지 몰랐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번쯤 캐나다에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로.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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