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아직 내리지 않았다. 그는 다리미를 달구고 난로에 불을지폈다. 난로는 늘 세탁물을 수거하고 돌아온 그의 언 손을 녹여주었다. 주인은 골방을 내주며 혼자 지내기에는 아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세탁물 수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그에게 짬짬이세탁 기술을 가르쳤다. 치매를 앓다 가출한 아내를 찾으러 다니는 시간이 부쩍 많아져서였다. 지난해 주인은 다 접고 아내를 찾아 떠난다고 했다. 그가 성실해서 아쉽지만 헐값에 가게를 넘긴다고 했다. 다 털고 간다면서도 다리미만은 미련이 남는 모양이었다. 삼십 년이나 된 낡은 다리미를 자리를 떠날 때까지 만지작거렸다. 손잡이가 반질거리는 다리미는 흙과 기름이 묻지 않은최초의 연장이었다. 그에게 그렇게 행운이 찾아왔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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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소설쓰기가 깊은 애도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처리하지 못했던 슬픔을 다시 한번 깊이 느끼며 소화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이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속 기억을 끌어내 어떤 애도를 가능하게 할지도 모르리라 희망했다. <벌새>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붕괴된 성수대교의 모습을 찾아가 두눈으로 바라보는 은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은희와 동시대를살아갔던 그때의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애도할 수 있는 영화를 비로소 만났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은희에게 이 영화는 결코 잊힐 수 없는 애도의 기억이 될 것이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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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어느 나라를 가장 많이 방문할까요?


거리 조락 함수 distance decay function라는 개념이 있어요. 중심지에서 멀어질수록 어떤 경제 현상의 밀도나 크기가 감소하는 경향을 말해요. 거리가 멀수록 비용과 시간이 증가하여 현상이 적게 발생하고, 거리가 가까울수록 정보를 쉽게 취득하기 때문에 현상이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에요.
2001~2018년 한국인 관광객은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과 중국을 가장많이 방문했어요. 베트남, 미국, 필리핀, 홍콩이 그 뒤를 이었어요. 가장 많이방문한 유럽 소재 국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었는데, 각각 14위와 15위에그쳤어요. 10위권에서 미국을 제외하면 모두 아시아 국가로, 한국인은 한반도에서 가까운 아시아 국가를 많이 방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2019년에는 한국인이 많이 방문한 해외 여행지로 일본과 중국 대신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타이완의 인기가 급상승했어요. 한국과 일본, 한국과중국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한반도와 비교적 가까운 다른 아시아 국가가 거리조락 함수에 따라 반사 효과를 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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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지게


물지게를 지고 지나가는 남자, 남방초길 십자성길 지나는 시간 없는 시간 속의 남자 지고 가는 물동이에 빛있다 물이 우려내는 빛, 섬세한 빛 근육, 야자잎 드문드문 빛의 존재를 지우는데도 빛은 있다. 저 빛을 마신 남자의 아이들은 물이 되리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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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내가 아는 밑바닥이 있다. 물이 가득하지. 나는 한 번씩 떨어진다. 물에 젖어 못 쓰게 되는 노트. 집에는 빈 노트가 너무 많다. 버릴 수가 없네. 밑바닥이 들어 있다. 자꾸만 가라앉지. 어디도 내 집은 아니지만. 첨벙거리며 잔다. 베개가 둥둥 떠내려간다. 괜찮아. 어차피 바닥이라 다시 돌아와 그가 이마를 쓰다듬어준다. 그는 손이 없고 나는 머리가 없지만 침대는 둘이 누우면 꽉 찬다. 투명해질수록 무거워지는 침대. 빈 노트, 빽빽하게 무엇이든 쓰자.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무너지는 창문 밑에서 나는 썼다. 늘 물에 젖었다. 알아볼 수 없어서 너무 행복하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한 번씩 떨어져서 내부로 들어가본다. 여럿이 함께 잠들면 더 고요하고 적막해서 무서웠지. 그 사이로 물결 소리가 난다. 죽은 그가 아직도 책상에 엎드려 있다. 너는 모든 것을 쓰기로 했어. 나에게 보낸 편지처럼. 모든 것을 낱낱이 쓰기로 했지. 하지만 아무리 써도 채워지지 않는 물속. 아무리 쌓아도 그것은 언제나 사라진다. 한심한 놈. 죽은 그가 중얼거리며 나를 본다. 물이 뚝뚝 떨어진다. 떠날 수가 없구나. 나는 너의 신발을 썼다. 무거워서 다시 신을 수가 없는데, 나는 자꾸만 - P20

신발장에서 쓴다. 한 번씩 들어오는 내부라니. 비밀은 제대로 씌어지는 법이 없지. 쓸 수 없어서 조금씩 마모되는것. 죽은 그가 나를 통과해 걸어간다. 부식되어가는 발로걸어간다. 아무것도 쓰지 못해서 너는 이곳에 도달할 수가 없어. 진창에서 잠만 자는 너는 그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나는 그의 신발을 신고 있다. 둥둥 떠내려간다. 밑바닥에는 모든 것이 돌아올 텐데. - P21

유리 공장


너는 늙고 어려운 마음.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너는유럽식 모자를 쓰고 서 있다. 어두운 굴뚝 위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너는 먼 곳을 걷다가 얼음 속에 갇힌 적이 있다. 깨끗했고 추웠지. 너는 모자를 고쳐 쓰며 말한다. 그때 나이를잃었나. 부정否定을 잃었나. 끈끈한 어둠도 갇혔지. 죽지않는 소년이고 싶어서 말이지.

나는 유럽식 찬장에서 너를 보고 있다. 불에 구워졌다가 빠져나온 딱딱한 얼룩처럼. 무력한 곰팡이처럼.

유리 안에 갇힌 나를 보며 너는 웃는다.

뛰어난 유리 제조공이었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불투명한 유리를 끼워놓은 자. 먼 곳을 돌아와 그릇처럼 조용히 시간을 쌓아놓은 자. 유리 제조공은 말했지. 불순물은 닦아낼수록 깊어진다니 너무 깨끗하게 닦지 마시오. 더께가 쌓이면 유리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빚 - P32

는다고 한다.

너는 모자를 벗으며 유리 안을 본다. 얼음 속에서 죽지않는 소년을 제조하고 싶었지. 너는 사라지는 표정을 들여다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수건으로 유리 찬장을 닦는 어렵고 긴 마음. 매번 실패하는 것은 나이를 가둬서인가 부정을 버려서인가. 무늬로 뒤덮인 불멸의 강화 유리가 되고 싶었지.

너는 굴뚝을 향해 걸어간다. 얼음에 갇혀 무엇을 잃었나. 흰 구름, 흰 얼룩, 흰머리, 흰 이…… 너는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말고 굴뚝 사이로 빠져나간다.

나는 늙은이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흰 포자를 퍼뜨린다. 이제 소년은 살아나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흰 소년은 살아 있기만 할 것인데 이것은 유리의 마음이 될 것인데 - P33

여름의 애도


비 오는 밤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어머니는 부서진날개를 깁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옆구리일까요. 그때 나는 어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털 뭉치처럼 온몸이 가려웠었죠. 죽은 사람이 두고 간 것인데. 어머니는 중얼거리다 말고 빗물이 쏟아지는 마당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발자국이 지워졌습니다. 어두운 자리 하나만 남아서 점점 깊어지고 있었죠. 모든 게 빗길을 따라흘러가는 것인데, 너의 할머니는 이것을 두고 갔구나. 우산을 들고 어머니는 마당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머니의울음을 듣지 못하고 나는 털 빠진 개처럼 옆구리를 긁고있었죠. 개다 만 빨래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드는 시간. 떠내려가지 못한 날개를 건져 올린 것은 어머니입니다. 찢기고 바스러진 이것을 어떤 자리에서 다 완성할 수 있을까요. 물에 젖은 어머니의 발자국이 천천히 지워지고 있습니다. 슬레이트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 이 다정한 악몽의 시간에 잠깐 쉬었다 갈게. 죽은 사람의 날개가 모조리힘없이 부서집니다. 어머니의 등에서 흰빛이 흘러나오고있습니다. 나는 그제야 컹컹 웃기 시작합니다. 목이 아프도록.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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