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연못
얼음 위에 누가 저렇게 돌을 던졌을까 구멍 난 가슴을 덮으려 연못은 더 많은 바람과 그늘을 불러 모았겠다 나이테처럼 얼음을 덧입고 얼음의 근육들이 자란다 더러 뚫고 지나가지 못한 돌들이 얼음에 박혀 있다 거미줄 같은 균열들이 돌을 붙들고 있다 뿌리처럼 퍼져 나가 스크럼을 짜고 상처가 상처끼리 연대한다 한 번 부러졌던 뼈처럼 돌은 얼음의 뼈가 되어 연못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 돌 몇 개로 무너진다면 얼음은 얼음도 아니다 돌 몇 개로 메워질 연못이라면 연못도 아니다 큰 돌이 넉넉하게 박힌 얼음이라면 맘 놓고 들어가도 좋겠다 돌 몇 개는 제 가슴에 안고 있는 사람도 그럴 것이다 - P11
성(聖) 물고기
기어이 가야 할 그 어딘가가 있어 여울목을 차고 오르는 눈부신 행렬 좀 보아 잠시만 멈추어도 물살에 밀려 흘러가버릴 것이므로 아픈 지느러미를 파닥여야 하네 푸른 버드나무 그늘에서조차 눈 감지 못하네 오롯이 지켜야 할 무엇이 있어 눈 뜨고 꾸는 꿈은 얼마나 환할 것인가 그 아득한 향수가 아니고서는 비늘이 온통 은빛일 리가없지 뉘우침이 많은 동물이어서 평생을 물에 제 몸을 씻으며 물고기는 한사코 길을 간다네 온몸으로 물을 뚫고 길을 내지만 이내 제 꼬리지느러미로 손사래를 쳐 지워버리네 지나온 길은 길이 아니라네 제 몸 길이만큼만이 길이어서 발자국도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네 - P12
화살촉 같은 몸짓으로 말하네 살아 있는 물고기만이 비린내가 없다고 그러나 그것만이 살아야 할 이유는 아니라는 듯 묻고 있네 네 가슴에도 천국의 지도 하나쯤 품고 있느냐고 낚시 바늘에 얹힌 한끼 식사에 눈길 주지 않은 몇 마리 물고기 거친 물살에 제 살을 깎으며 강을 거슬러 오르네 - P13
덮어준다는 것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 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은 아닐까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 P14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 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 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 P15
꽃잎
국물이 뜨거워지자 입을 쩍 벌린 바지락 속살에 새끼손톱만 한 어린 게가 묻혀 있다 제집으로 알고 기어든 어린 게의 행방을 고자질하지 않으려 바지락은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었겠지 뜨거운 국물이 제 입을 열어젖히려 하자 속살 더 깊이 어린 게를 품었을 거야 비릿한 양수 냄새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어린 게를 다독이며 꼭 다문 복화술로 자장가라도 불렀을라나 이쯤이면 좋겠어 한소끔 꿈이라도 꿀래 어린 게의 잠투정이 잦아들자 지난밤 바다의 사연을 읽어보라는 듯 바지락은 책 표지를 활짝 펼쳐 보인다 책갈피에 끼워놓은 꽃잎같이 - P16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어린 게의 홍조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 같은 것으로 한 대접 바다가 짜다 - P17
소쩍새 시 창작 강의
달빛 백지장으로 펼쳐놓고 시 창작법 가르치고 있다
말은 안 하고 춤으로 춤을 가르치는 춤 선생처럼 시는 안 가르치고 온통 울음만 울어댄다
애 주먹만 한 가슴을 공명통 삼아 잘못 산 것을, 잘못 살 것까지를 뉘우쳐 통성기도하듯
운다
그 울음의 깊이로 말하면 바닥까지 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달빛의 칠흑 우물거울이다 - P24
2음보 혹은 3음보 수사가 화려하지 않다 울음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 이윽고 몇 소절에는 핏자욱이 묻어나기도 해서 다는 아니더라도 사랑이 더러는 죽고 싶을 만큼 죽어도 좋을 만큼 아팠음을 그렇잖으면 시도 울음도 아니라는 듯 운다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그 핏빛 울음뿐이라고 무슨 시창작 강의가 붉은 달빛으로 흥건하다 - P25
거울
고요한 수면 위로 수련 한 송이 핀다 가만 보니 수면 아래로도 한 송이 뻗어 서로가 서로에게서 피어나고 있다 혹은 꽃 피는 스스로의 노고를 네 덕으로 돌려 꽃 꺾어 바치는 듯하다 허(虛)와 실(實)이 그렇듯 서로에게 거울이었구나
소금쟁이 몇 마리 수면을 팽팽히 붙잡고 있다 - P40
따뜻한 외면
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 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나비 쪽을 외면하는 늦은 오후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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