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시, 두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는 김수열은 거기에 따라 서로다른 미의식을 보여준다. 민족예술상을 수상한 작품 「목마른 신들」이 보여주듯이, 그가 연출한 연극들이 군사 파시즘의 혹독한 억압 속에서 민중의 역사적삶을 풍자·해학. 요설로 용기있게 형상화해낸 작품들이라면, 그의 시들은 그러한 집단의식의 치열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외되기 마련인 개인의식 · 감정의 애틋한 내면 풍경을 잘 보듬어 안아주고 있다. ‘공동체와 나‘ 라는 어려운 명제를 조화롭게 실천하는 그의 예술에 축복이 있기를.
-현기영(소설가)

내가 한때 시인의 꿈에 부풀어 애타고 있을 때였다. 1982년 실천문학에 실린 그의 등단작 「어머니」라는 시를 보고 무릎을 치던 일이 있었다. 문득문득 그의 안부가 궁금했었다. 십여 년이 훨씬 넘어서야 그를 만났고 그와 함께 제주 바다를, 크고 작은 오름을, 마라도와 우도 섬을 걸었다. 흰빛이 일렁이는 산호의 사장에 누워 우리는 쪽빛 제주 바다와 그 하늘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때 그 오름의 길에서 만났던 보랏빛 갯쑥부쟁이 꽃밭의 눈부심이라니.
김수열의 시를 들여다보면 그때 그 오름의 길에서 만났던 갯쑥부쟁이가 떠오른다. 쪽빛 그 싱싱한 바닷물에서 갓 건져올려 피우는 그의 해맑은 웃음이떠오른다. 왜 그리운 것들은 이처럼 멀리 있는 것이냐. 더디고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냐.
-박남준(시인)

후기


어중간하다
살아온 나날이 그렇고 가늠하기 힘든 내일이 그렇다

흩어졌던 글들을 한 코에 꿰면서
문득 시에도 피가 있고 살이 있다는 걸 생각한다
허나 묶어놓고 보니
이건 피도 아니고 살도 아니다
내 삶이 그러했던 탓이리라

지나친 욕심이겠지만
한때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벗들
그러나 너무 멀리 떠나왔다는 생각에
돌아오기를 주저하는 그런 벗들에게
부끄러움의 시편들을 고백처럼 바치고 싶다
나 또한 너무 멀리 왔다고
그래서 이렇게 망설이고 있다고

경진년 초겨울 화북에서
김수열

나는 왜 몰랐을까


책을 정리하는 일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고
아이들은 호호 불면서 유리창을 닦고
나는 책장 앞에서 책을 정리하는데
한나절을 꼬박 매달려도
위칸의 책이 아래칸으로 내려오고
아래칸에 있던 책이 옆칸으로 자리이동을 했을 뿐
너저분하고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진데
책을 정리하는 일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
나에게는 소중한 것부터
버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부터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는 걸
미련이 남아 있을 때 - P11

미련 없이 버려야만
마음의 빈칸 하나 가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왜 여태껏 몰랐을까
그 빈칸 있어야 누군가 찾아와
잠시나마 머물다 갈 수 있다는 걸
나는 왜 바보같이 몰랐을까 - P12

바람까마귀


하늘이 낮게 가라앉은 날
바람까마귀도 새벽바람을 이기지는 못한다

마음이 깊게 내려앉은 날
사람 사는 일도 사랑을 이기지는 못한다 - P17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지상에 나와 있는 모든 것들을 
밤새도록 흔들어놓은 바람이
잠깐 숨 고르고 있을 즈음 나는
바람을 만나러 바람 속으로 간다
바람의 잔해들은
허리 잘린 나무 그 찢겨진 몸통 위에
뿌리째 뽑혀나간 아름드리 가로수 그늘 아래
하얀 이 드러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신호대기선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고
신호등을 쳐다보는데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신호등이 없다
꼬라박아 자세로 엎드려 아무 말이 없다
문득 길이 없어지고
나는 가야 할 곳을 잃었다
갑자기 나는 아무 데도 없다 - P20

길 없이 길을 나설 수 없는 나는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

바람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가
바람 속에서 까마득히 길을 잃었다 - P21




깊은 산
붉은 노을이 진다

그윽한 섬
파란 물살이 인다

오름마다 물매화 핀다
거기 사람들이 산다

깊고그윽한 - P33

갯쑥부쟁이


마음으로야 골백번 넘게 떠났지만
정작 떠남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너는
외돌개 해안 절벽에
아스라히 매달린 너는
사람 없는 섬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에 매달려 한 뼘이나마
그대 곁으로 다가서려고
섬 끝에 발을 내린 채
이미 야위어진 몸으로
섬을 밀고 밀었던 것이다
꽃이 지기 전에
계절이 가기 전에
한순간이나마 함께하려고
파르르파르르 온몸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석 달 열흘 기나긴 날을 애태웠지만 결국
더는 다가설 수 없음을 안 너는
언제부터인가 머리 풀어 보랏빛 꽃향내를 - P70

그리운 그 사람에게
하염없이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꽃은 이미 지고
계절도 벌써 가버렸지만
외돌개 해안 절벽에
아스라히 흔들리는 너는
산산이 부서지는 살점들을
애타게 그리운 그 사람에게
오늘도 하늘하늘 날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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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열金秀烈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산문집으로 김수열의 책읽기』,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 등이 있다.

□ 시인의 말


얼마 전
가까운 벗들과 이덕구 산전을 찾았다
아직 복수초는 피어 있지 않았다.

동자석을 벗 삼은 무덤을 지나
길 아닌 길로 접어든다.

에둘러진 낮은 돌담
벌러진 솥단지

이름 없이 스러진,
아직 순을 틔우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큰절 올리고
상왜떡으로 음복을 한다.

이것들 죄다 마음에 품고 산을 내린다.

2006년 봄
제주에서 김수열

김수열의 시는 참 따뜻하다.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처럼 마음을 녹인다. 그는 아픈 이야기도 편하게 한다. 눈물 나는 이야기도 담담하게 한다. 웃으며 읽다가 눈가에 눈물 어리게 한다. 비극적인 이야기도 거창하게 말하지 않고 진솔하게 말한다. 목소리에 공연히 힘주지 않고 담백하게 말한다.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평범하고(只是常), 참맛은 담백한 데 있다."고 하는데 김수열의 시가 그렇다. 곰삭을 대로 곰삭은 삶에서 우러난 깊은 맛을 지닌 시들이다.
도종환(시인)

유도화油挑花


너를 보내고 돌아오는 공항로에
독성 강한 꽃 낱낱이 만개했다
그길 천천히 지나왔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저들이 서둘러 고개 숙인다

아,
내 안에
이렇게 지독한 사랑이 숨어 있다니! - P11

지삿개에서


그립다는 말도
때로는 사치일 때가 있다
노을구름이 산방산 머리 위에 머물고
가파른 바다
漁火 점점이 피어나고
바람 머금은 소나무
긴 한숨 토해내는 순간
바다끝이 하늘이고
하늘끝이 바다가 되는 지삿개에 서면
그립다, 라는 말도
그야말로 사치일 때가 있다

가냘픈 털뿌리로
검은 주검처럼 숭숭 구멍 뚫린
바윗돌 거머쥐고
휜 허리로 납작 버티고 선
갯쑥부쟁이 한 무더기! - P12

해장국


열불나면 걷잡을 수 없는 거라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쯤이면
날계란 하나로는 어림도 없는 거라
김칫국물 정도로는 턱도 없는 거라
그럴 때면 막걸리나 한 잔 하면서
가만 놔둬야 하는 거라
그러면

씩씩거리다가도
제 스스로 몸 낮추고
차분하게 마음 가라앉히는 거라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라

사랑도 그런 거라
분노도 다 그런 거라 - P16

건강보조식품 판매원


칠순 훌쩍 넘긴 나이에도
당신은 어스름에 집을 나서
출근부에 도장 찍습니다
이 나이에 꼬박꼬박 도장만 찍어도
기본급을 주는 일자리가 어디 있냐며
약상자 바리바리 싸들고 회사문을 나섭니다

한때 계모임 했던 친구네 집
사돈에 팔촌까지 이미 한 순배 돌고 돌아
더는 갈 곳도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에 침발라 낡은 장부 뒤적입니다
고생 접고 편히 사시라 해도
성한 몸뚱어리 놨다 어디 쓰냐며
단호하게 손사래칩니다
몇 상자 팔아야 남는 이문으로는
글쓴답시고 술담배에 절어 사는
자식놈, 키토산도 먹이고 - P32

가진 것 없는 시부모 만나 맞벌이하는
며느리, 하이폴렌도 먹이고
손주녀석, 비타칼슘도 먹이고

마음만 종종걸음일 뿐
마땅히 갈 데 없고 오라는 데는 더욱 없습니다
온종일 발품에도 허탕치고
해거름 등지고 집에 들어
뜨는 둥 마는 둥 저녁상 물리고
집채만한 은행빚 무게에 겨워
애벌레처럼 오그라든 채 잠자리에 드는
당신 - P33

정뜨르 비행장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
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 짓누르며 내려앉는다
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
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시커먼 아스팔트 활주로 밑바닥
반백 년전
까닭도 모르게 생매장되면서 한 번 죽고
땅이 파헤쳐지면서 이래저래 헤갈라져 두 번 죽고
활주로가 뒤덮이면서 세 번 죽고
그 위를 공룡의 시조새가
발톱으로 할퀴고 지날 때마다 다시 죽고
육중한 몸뚱어리로 짓이길 때마다 다시 죽고
그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뼈소리 들린다 - P91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정뜨르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
‘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 라고
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
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
활주로 밑 어둠에 갇혀
몸 뒤척일 때마다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이따금 나를 태운 시조새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시 두 발 들어올리는 것
눈감고 창밖을 외면하는 것 - P92




고희 넘긴지 오래인 어머님은
텃밭에 시를 쓰신다
골갱이 들고 고랑을 파 이랑 만드신다
배추도 심고 무도 심고
주둥이 깨진 독에서 삭힌 오줌으로
잎 키우고 꽃 피우신다

노란배추꽃엔 노란 나비
하얀 무꽃엔 하얀 나비

오늘도 텃밭에 앉아
한땀 한땀 정성으로 시를 쓰신다
行間에서 字間까지 완벽하다
퇴고가 필요치 않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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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공부를 열심히 하며 계절을 따지지 않고 식물을 보러 다니던패 정월 거문도의 바닷가에서 만난 동백나무의 그 붉은 꽃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따뜻한 남쪽지방이 고향인 동백나무는 한겨울이 제 계절이라는 것을 우물 안 개구리였던 초보 식물학도가 처음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마침 남쪽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는데 불 붙듯 피어 난 붉은 동백꽃잎에 바다 소금이 변한 듯 흰 눈자락이 올라앉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었습니다.
동백나무의 아주 독특한 점은 조매화(島媒花)라는 것입니다. 꽃가루받이를 하는데 벌과 나비가 아닌 새의 힘을 빌리는 꽃을 말합니다. 크고 화려한 꽃이 많은 열대지방에서는 이러한 조매화를 간혹 볼 수 있습니다. 화질 좋은 전자제품을 선전할 때 등장하는, 꽃을 찾아가 날개를 팔락거리는 파란색 벌새가 그 경우입니다. - P139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조매화는 동백나무가 거의 유일할 듯합니다. 동백나무의 꿀을 먹고사는 이 새는 이름도 동박새입니다. 동백나무에는 꿀이 많이 나므로 벌과 나비가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꽃이 피는 한겨울은 곤충이 활동하기에 너무 이른 계절이므로 녹색, 황금색, 흰색 깃털이 아름다운 작은 동박새가 주로 그 임무를 맡습니다.
동백나무가 자라는 곳을 짚어 보면 해류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륙으로는 지리산 화엄사까지가 북한계인데해안 쪽으로 가면 서쪽으로는 충남 서산이라 하고 섬으로는 대청도까 - P139

지 올라가며 동쪽으로는 울릉도가 끝입니다. 간혹 추위에 내성이 강한 나무들이 더 올라와 자라기도 하지만 북으로 올라올수록 꽃 피는시기는 점점 늦어집니다.
동백나무 꽃 소식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봄이 오는 속도를 느낄수 있습니다. 지난 12월에 시작된 이 꽃 소식이, 꽃잎 하나 상하지 않은채 그대로 툭툭 떨어지는 장렬한 낙화를 두고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그 꽃 말이에요"라고 노래한 고창 선운사에 도달한 즈음이면 이미 봄이 와 있을 것입니다. - P140

연꽃은 불가의 꽃으로 유명합니다만 식물학자들에겐 씨앗의 신비를 보여준 식물입니다. 일반적인 풀씨는 씨앗이 맺힌 지 한 해가 지나며 싹트는 능력이 현저하게 줄어 야생식물을 잘 키우려면 씨앗을 얻자마자 계절에 관계없이 뿌려야 합니다.
물론 식물마다 다르고 조건에 따라 오래가기도 하지만 가장 놀라운생명력을 보여주었던 씨앗은 바로 연꽃입니다. 대부분의 수생식물들은 물을 벗어나면 씨앗의 껍질이 그 어떤 건조와 충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해집니다.
1951년 동경 부근의 한 늪에서 신석기 시대로 생각되는 카누 안에서 3개의 연꽃 종자가 발견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중에서 2개를 싹틔워 지금의 연꽃과 조금도 다름없는 분홍색 연꽃을 피워냈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2,000년을 살아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던 연꽃씨앗이 피워낸 그 놀라운 세상을.
식물이란 이렇게 따뜻함으로 때론 놀라움으로, 한겨울에서 다시 한여름으로 시공을 넘나드는 정말 특별한 존재입니다. - P143

그런데 이즈음엔 산불이 났던 자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도 큰 걱정이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탄 자리에 나무를 심는 일을 당연하게생각했는데, 그냥 두는 것이 좋겠다는 연구결과가 얼마 전 지상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후 강원도 동해 산불이 난 자리를 인공 조림할 것이냐, 자연복원할 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영험한 생체인 나무, 그리고 그들이 모여 이루어진 유기적인 복합체인 숲을 한 가지 논리와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어야만 숲이 만들어졌던 옛날과 달리 지금 우리의 산은 자연복구가 가능한 곳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토양의 유실을 줄이고 빨리 푸른 숲으로 돌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 P159

우리가 부러워하는 유럽의 숲, 100년 이상을 키운 나무 한 그루의 가치가 벤츠 한 대 가격과 맞먹는다는 그나무는 인공림입니다. 자연복구된 나무들은 숲을 금방 푸르게 할 수 있지만, 만일 흠 없는 좋은 목재를 얻으려면 그로부터 2~3대를 거쳐 씨앗이 자란 나무가 곧게 자라야 하니 나무를 심는 편이 옳습니다.
암반이 드러나는 등 조건이 좋지않는 곳은 그냥 놔두는 편이 더 나을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굴참나무와 같은 활엽수가 주인인 숲은 여러 가지를 고려해봐야 합니다. 자연복원력이 좋은 여건의 숲이어도 만일 그 산의 주인이 "몇 년 아니 몇 십 년을 기다리더라도 소나무숲에서 자라는 송이버섯을 보겠다."고 한다면 역시 소나무를 심어야하겠지요.
3월 중 산불근무 일정표를 받아보다가, 불타버린 산을 푸른 숲으로 만드는 방법을 놓고 흑백논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걱정돼 말이 조금 길었습니다. - P160

세상엔 정말 많은 종류의 꽃이 있습니다. 화려한 꽃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은행나무나 소나무 꽃에서부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튤립이나 장미, 새를 닮은 극락조화.... 이렇게 많은 식물의 꽃 중에서 난초과에 속하는 식물이 가장 진화했다고 합니다. 진화의 방향이야 복잡해질 수도 단순해질 수도 있지만,
난초과 식물이 진화된 식물이라는 것에는 학자들 사이에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난초과 식물이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춘란이라고 부르는 보춘화와 품격이 고고한 한란이 있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서양의 난초(양란이라고 부릅니다)도 있습니다. 우리 땅에 자라는 난초과 식물 중에도 알고보면 자줏빛 도는 갈색 꽃이 아름다운 새우난초, 노란색이 화려한 금새우난, 한 마리의 흰 새가 날아가는 듯한 해오라비난초 등 특별한 모습의 식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난초과 식물의 꽃은 모두 상하는 다르지만 좌우 모양은 똑같습니다. 또가운데에 순판이라는 꽃잎이, 뒷면에는 길쭉한 꽃주머니가 있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기본 구성은 이처럼 비슷해도 실제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 P177

 대부분 식물은 달콤한꿀과 꽃가루를 만들어내 곤충을 부르는데 난초는 절반 정도만 이 방식을 채택합니다. 어떤 난초는 특별한 향기로 곤충을 유인하고, 심지어 어떤 난초는 꿀이 많은 다른 난초와 똑같은 모양으로 꾸미고 순진한 곤충들이 날아와 꿀을 찾는 과정에서 꽃가루받이를 이루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욱 지능적인 속임수도 있습니다. 꽃잎 모양을 암벌의 모습과 아주 비슷하게 만들어서 어수룩한 수벌이 찾아오도록 하는 종류도 있습니다. 더욱 교활한것은 꽃잎의 생김은 물론 촉감, 심지어 향기까지도 암벌의 체취를 모방한다고 합니다.
난초과 식물들은 꽃가루를 미세한 가루 대신 끈끈한 덩어리로 만들어 곤충에 들러붙게 합니다. 꽃가루가 바람에 흩날려 중간에 손실되는일 없이 다른 꽃의 암술머리에 안전하게 얹혀지도록 하기 위해서죠. 이렇게 되면 한 씨방에서 씨앗이 될 수 있는 밑씨가 대부분 꽃가루를만나 씨앗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난초는 한 개의 씨방에 300만개 정도의 씨앗이 담겨 있습니다. 이 정도면 욕심도 지나치지요.
아주 영리하고 약삭빠른 난초를 바라보니 요즘처럼 어려운 세상에영합해 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참 닮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교를 부리지 않고 미련하게 온 지상에 꽃가루를 잔뜩 날려 보내어 암술과 만날 우연을 기다리는 참나무 꽃들의 단순함과 우직함이 마음에남습니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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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땅에 뿌리를 박은 식물보다 수분의 공급이 편치 않을 테니까요. 가지는 자라면서 탄력이 생겨 늘어집니다. 바람 잘 날 없는나뭇가지에서 세고 단단한 가지로 바람에 저항해 부러지는 것보다는순응하는 전략을 택했겠지요.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생존을 위해 땀 흘리는 나무 위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올라 앉아 양분을 가로채는 얄미운 겨우살이.
실제로 겨우살이가 기생하는 나무는 생장속도가 무척이나 느려지고, 수명이 짧아지며, 줄기에 박힌 겨우살이의 쐐기형 뿌리 때문에
목재로서의 가치를 잃고 맙니다. 또 겨우살이가 뚫고 들어간 틈 사이로 해충이나 병균 등이 침입해 병을 일으키기도 하니 이래저래 밉상입니다.
한 식물학자가 겨우살이도 부분적으로 광합성을 하니까 양분을 역류시켜 숙주를 먹여살리는 일은 없을까 하고 실험을 했습니다. 겨우살이가 기생한 줄기와 잎을 잘라 양분을 차단해 보았더니 결국 둘 다 말라죽어 버렸답니다. 결국 겨우살이는 받을 줄만 알고 줄 줄 모르는철저한 이기주의 식물이었던 것이지요.
더불어 사는 지혜와 그 삶의 즐거움을 익히지 못하는 헛똑똑이는 인간세계뿐 아니라 자연의 세계에도 있는 모양입니다. - P119

나무들은 더러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터전을 확대하는데 겨울 추위를 이용하기도 한답니다. 절벽의 바위틈에 살고 있는 나무들은 워낙물이 부족하므로 실뿌리를 많이 만들어 주변의 습기를 가능한 한 최대로 모아 놓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물이 얼어 부피가 늘면서 바위가 벌어지고, 그 틈새로 뿌리는 깊이깊이 들어가는 것이지요.
나무뿌리가 바위를 자르는 힘의 원천은 뿌리가 모아놓은 작은 물방울들과 자연을 끌어들인 나무의 지혜였습니다.
사실 나무가 추위로 피해를 입는 계절은 대부분 겨울이 아닙니다. 겨울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완벽하게 준비했으므로 걱정이 없지요.
오히려 봄이 온 줄 알고 방심하여 연한 조직을 내어놓은 이른봄에 동해를 입는 경우가 많답니다.
겨울이나 삶의 어려움도 미리 준비하면 견뎌내기 수월치 않을까 싶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겨울을 지낸 나무들이 더욱 강인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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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역사적 힘에 감화되기를 원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소나무에서부터 시작하기를 권하고 싶다. 소나무는 지구상에서 가장활동적인 나무 중 하나다. 불도저로 숲을 관통해 길을 냈다면 소나무가 베인 부분에서는 새싹이 자라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이경작지를 버리고 떠났다면 소나무가 첫 번째로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화산이 분출하거나 빙하가 움직일 때 또는 바람과 바다가 모래 퇴적을 일으킬 때, 소나무는 처음으로 그곳에 뿌리를 내릴 곳을 찾는 식물 중 하나일 것이다. 소나무는 사람들이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기기 전까지는 북반구에서만 자랐다. 이들은 소나무를 남반구로 옮겨 왔고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들어 자라게 했다. 그러나소나무는 플랜테이션 농장의 울타리를 넘고 풍경을 가로질러 뻗어나갔다.‘ 호주에서는 소나무가 화재 위험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희귀한 풍토병으로 핀보스를 위협한다.  - P297

그러나 자연의 과정이 그렇듯이 식물과 동물의 성장과 죽음이되풀이되면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기질 토양은 쌓이게 된다. 죽은 유기체는 썩고 유기질 토양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위한 토대가된다. 유기질 토양이 없는 곳에서는 그러한 생사의 순환이 어떤 우연한 활동으로 인해 깨진다. 이 활동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즉 역사를 가리킨다. 송이버섯과 소나무는 교란된 풍경을 차지하면서함께 역사를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역사 만들기가 인간이행하는 것을 넘어서 확장되는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동시에 인간은숲을 엄청나게 교란한다. 송이버섯과 소나무와 인간은 함께 그러한 풍경의 궤적을 만들어낸다. - P302

숲의 가장 신비로운 특성 가운데 하나는 파괴된 후에 이따끔씩 재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회복 탄력성sesilience이나 생태 복원으로 여길 수 있으며, 나는 그러한 개념이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을 부활로생각해보면 어떨까? 부활은 숲이 지닌 생명의 힘이고, 벌채된 장소를 수복하기 위해 씨앗을 퍼뜨리고 뿌리와 줄기를 뻗어가게 하는숲의 능력이다. 숲은 빙하와 화산과 산불이라는 도전에 부활로 응했다. 인간의 모욕에도 부활로 대응했다. 인간은 지금까지 수천 년간 벌채하고, 숲은 부활하면서 서로에게 응대해왔다. 현대 사회에살고 있는 우리는 부활을 저지시키는 방법을 안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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