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목소리의 개성에 나는 놀랐다. 대화할 때는 특별한 점을느끼지 못했는데, 노래하는 인아의 목소리는 무척 맑았다. 더욱 특별한 것은, 맑기만 하던 그 목소리가 높은 음역대로 들어갈 때마다 미묘하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차가운 유리잔처럼 섬세한 그 목소리의 표면에, 기묘하게 처연한 슬픔 같은것이 자잘한 물방울들처럼 응결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 P69

인아의 말대로, 이런 날의 밤 산책은 나에게 환영의 숲이나 바다 아래를 걷는 것이다. 원피스를 입고 힐을 신고 진하게 화장을 하고, 내가 태어나 자란 도시의 번화가를 목적 없이 걷는다. 내가 아는 누구를 우연히 이 거리에서 마주친다 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눈부시게 휘황하고, 가슴 아프도록 절실해서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고 싶은 마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반보 앞에서 걷고 있는 인아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언저리의 뜨거움은 곧 식혀진다. 얼음이나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그 옆얼굴을 뒤따라 나는 계속 걷는다.
눈부시던 번화가의 불빛이 차츰 성글어지다 문득 황량한본모습을 드러낸 거리의 끝에서, 인아는 걸음을 멈추며 나에게 묻는다. - P79

이런 날의 밤 산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시선을 견디는 것이다. 편견과 혐오, 경멸과 공포의 시선들, 때로 노골적이고 더러 은근한 그것들을 감지하며 잠자코 앞으로 나아간다. 이따금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이 담긴 시선을 만날 때 인아는 나에게 말을 건다.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는다. 활짝 눈웃음치는 눈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럴 때 나는 오래전에 보았던 짧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한 쌍의 레즈비언이 햇빛 환한 거리를 팔짱을 끼고 걷고 있다. 서로의 뺨과 어깨와 팔을 애무하며, 웃음과 입맞춤을 나누며 건물들의 모퉁이를 돌고 또 돈다. 십 분 가까이 침묵 속에서 그들의 다정한 오후를 비추던 카메라는 그들이 사라진 모퉁이를 뒤따라 돌아가, 둔기에 머리를 맞고 피 흘리며 죽어 있는 그들을 마지막으로 위에서 비춘다. 핏속에 나란히 누워 있는 그들의 몸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 P80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분수대 앞의 벤치에서 우리가 그 고백들을 주고받았을 때 인아는 결혼 생활을 막 청산한 상태였다. 얼마간의 위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ㅡ 역시 정확히 묻지 못했지만, 인아가 경험한 어떤 폭력이 환산된 금액인 것 같았다 ㅡ당장 생계가 쫓기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인아는 그 후 첫일 년 동안 닥치는 대로 일했다. 대형 마트의 캐셔 일이 가장 먼저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급자의 눈에 들어 환불처리팀으로 옮겨갔는데, 한 번 더 부서를 옮기게 되었을 때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 후로는 수개월에 걸쳐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까맣고 독한 액체 같은 게 뒤통수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아. 그럴 땐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잠을 잘 수도 없어.), 거의 위 - P81

험하게 느껴졌던 마지막 순간에 대학 시절 밴드를 함께 했던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당시 인아의 상태가 너무 나빴기 때문에, ‘일어나서 움직여봐‘라고 꾸준히 격려하는 중에도 나는결국 인아가 회복될 수 없을 거라고 몰래 예상했었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화분에서 기이하게 선명한 꽃이피듯 인아는 되살아났다. - P82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어린 시절,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을 내다보며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저녁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우산이 없어 강당 처마 아래 서서 잦아들지 않는 빗발을 바라보던 오후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도 인아다. 그런 순간 막연히 만나고 싶었던, 모르는 누군가의 희끗한 얼굴과 무심코 겹쳐지는 사람도 인아다.
인아의 얼굴에서 곧 웃음이 걷힌다. 나도 더 이상 웃지 않는다. 10센티 굽의 에나멜 구두를 절름절름 끌며 더 걷는다. 물이 마른 우물 속처럼 비좁고 더러운 골목에 이르렀을 때, 그녀에게 그 노래를 불러달라고 말한다. - P87

(이제 난 늙어가고 있고, 앞으로 더 늙을 거야.)
인아가 입을 다물었다 뗄 때마다 가느다란 주름들이 입가에 패었다 지워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녀가 반년쯤 전 장기와 각막 기증 서약을 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기운이 날 때마다 헌혈 차량의 비닐 침대에 누워 두 팩씩 피를 뽑아왔다는 것을,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한 수십 장의 헌혈 증서를 보고 알았다. 시체까지 의학생들의 해부실습을 위해 내놓을 거라고 그녀가 무심하게 말했을 때 나는 못 들은 척 눈을돌렸었다. 살이 다 발라진 인아가 꿈틀거리며 수술용 침대 위에서 몸을 뒤트는 환상 때문이었다.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 - P91

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무언가에 항의하는 것처럼 단호해진 말씨에, 나는 숨을 죽인채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건 네가 방금 물었던, 왜 그런델 다니면서 그런 노래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이 아니야. 그 대답은 너에게 하고 싶지 않아.) - P92

주춤주춤 사과하듯 나는 말했다.
이젠 뭐 다 끝났는걸. 지금부터 사 년쯤 조심해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 언니 여행 이야기 해봐, 인도는 어땠어?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조금 웃었다.
글쎄, 이번엔 여행이 아니었어. 그냥 거기서 살았던 거지.
그러니까, 살았던 이야기를 해봐.
인도 여행기마다 나오는 구도적인 분위기 같은 건, 난 전혀 못 느꼈어. 굳이 특별한 게 있다면, 숨겨진 게 없다는 것? 예를 들면 죽음. 거기선 시체를 밖에서 태워.
그때 앳된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내가 메뉴판을 펼치고 막 마실 것을 고르려는데, 은희 언니는 주변의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 P109

그 이야기 때문에, 그날 은희 언니가 들려준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잊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그때 처음으로 은희 언니를 닮은 어떤 여자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 밝아지지 않은 새벽, 시체가재가 되고 덩이들만 하얗게 남은 자리에 여태 지글지글 끓는 심장. 그걸 내려다보다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는 어떤 여자. 그 여자가 고개를 들면, 무섭도록 낯익은 얼굴꺼진 눈, 두드러진 광대뼈, 검게 죽은 내 입술이 그을린 살갗 가운데새겨져 있을 것 같았다. - P110

의사의 진단을 들은 직후, 내 인간관계는 계속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애써 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졌다. 거의 직관적으로 빠르게 이뤄진 그 압축의 과정에서, 은희 언나는 내가 계속 만날 수 있다고 느낀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수술을 앞뒀던 늦은 봄, 이 길을 걸으며 은희 언니 생각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얼마 전 인도로 떠난 그녀를 다시 만날수 있다면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다. 발바닥을 지압하도록 산책로 끝에 깔려 있는 하얗고 뾰족한 돌들을 맨발로 밟아보게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윤이는 이 돌 모양이 새 같대, 언니 눈에도 그렇게 보여? 자주 연락하고 싶었는데, 언니 자신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게 어쩐지 겁이 나서 그러지 못했어. 주말에 불러내서 뭐든 먹이고 싶었는데, 찐새우를 고소한 찹쌀 전병에 말아주는 중국집에 데려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그러다 언니가 여행을 시작해서 좋았어,
움푹 마음의 짐이 덜어진 것 같았어. - P111

변명하고 싶다.

은희 언니를 닮은 어떤 여자에 대한 소설은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 문장만을 써두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열대 지방의 느낌을 머리로는 상상할 수없어 회복된 뒤 처음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내 계획을 메일로 받아본 은희 언니는 흔쾌히 답장을 보냈다. 설렌다, 정말 여기로 네가 오다니.
어젯밤 편집자에게 넘기려 했으나 이제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줄곧 그 어떤 여자에 대한 새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다. 적당한 여행사를 검색해 항공권을 예매하고, 자료를 모으고, 여정을 짜고, 저녁마다 조금씩 짐을 꾸렸던 지난 한 달은 나에게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단순한 문장만큼이나 조용하고 밝은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그 순간의 내가 써낼 수 있었던 가장 가볍고 고요하고 환한 문장이었을 뿐이다. - P112

부질없는 심문과 대답 사이, 체념과 환멸과 적의를 담아, 서늘하게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간.
눈이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시간.
내 죽음 속으로 그가 결코 들어올 수 없고, 내가 그의 생명속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시간.
오직 삶을, 삶만을 달라고,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기어가구걸하고 싶던 시간.

그 시간들이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다. 모래톱 저쪽의 바다처럼, 아직 지척에서 일렁이며 소리를 낸다. 짠물이 덜 마른흙 같은 몸이 아직 모든 걸 똑똑히 기억한다. - P120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 P123

변명할 수 있을까.

그 꿈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무엇인가를 이해했지만, 내가 이해한 것을 은희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꿈을 듣고 이해한 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 - P126

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 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그러나 그중 한마디 말도 나는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다. 오래전에 단 한 번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꽉 안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다. 다만 은희 언니가 제 힘으로 찾아가는 곳의 여름이 그녀를 구할 거라고 믿었다. 내가 할 수 있었을 어떤 말보다 강렬한 열기와 소낙비로, 물을 머금고 생생하게 솟아오르는 열대의 꽃과 나무로. - P127

저물 무렵에야 돌아와 제대로 씻지 못하고 잠들었다. 윤이가 부르는 소리, 깨우지 말라고 동생이 달래는 소리를 들은 것이 생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얼핏 잠이 엷어질 때마다 숲의 산책로가 어른거렸다. 하루에 두 번, 움직일 수 있는 한걸었던 그 길가에 흰 질경이꽃이 핀다. 여린 잎들이 버드나무에 돋아난다. 어지러운 햇빛이 돌아온다. 희거나 목이 길거나부리가 노란 새들이 온다. 생명이 온다. 조금 더 버티면, 후회와 고통을, 깊게 찌르는 자책을, 안 지워지는 얼굴을 등지고 조금 더. - P128

조금씩 무엇인가 몸속에서 깨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한 계절 한 계절의 시간들이 차츰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느낍니다.
지난해 여름 이곳으로 이사한 뒤 처음으로 운동장을 달렸을 때는 한 바퀴도 다 뛰지 못했습니다. 허파와 심장이 모두 터져버릴 것 같아서요. 아이가 있을 때는 아이와 함께, 아이 - P213

가 어린이집에 갔을 때는 혼자서 하루에 반 바퀴씩 늘려갔습니다. 다섯 바퀴를 쉬지 않고 뛰고 난 오후, 운동장을 빙 둘러 심어진 나무들을 세어보았습니다. 키 큰 자작나무들이 모두 스물두 그루였어요. 다 세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뭉클뭉클한 흰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림들에 제목이 있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당신은 하늘이라고 대답했지요. 두번째로 입원했던 열두 살 때, 너무 심심해 종일토록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곳이 얼마나 가슴 뛰는 공간인지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평생토록 여행다운 여행 한번 해본 적 없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꿈틀거리며 변하는 형상과 색채들이 경이롭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늘을 보던 어느 순간, 영원과 무한 같은 것을 생각이나 느낌이 아닌 몸으로 알게 되었다고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내가 말하자 당신은 심상하게 대답했지요.
그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그리고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가에 가득 잔주름을 만들며 웃었지요. - P214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 P214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랫벌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간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물어도 되겠지요.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는 꿈속의 당신, 부풀어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촉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껴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 P215

잔멸치 떼를 만난 적이 있다. 무수한 은빛의 점들이 일제히반짝이며 배 밑을 헤엄쳐 갔다. 빠른 속력으로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자, 헛것을 보았던 것 같았다.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마신 숨, 물의 정적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게 전부다. - P219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악운이나 과오 앞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통찰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그 습관 덕분이었다. 병원에서 눈을 떠, 목의 늘어난 인대나 금간 척추는 어떻게든 회복 가능하나 왼손만은 완전히 으스러져버린 것을, 신경까지 손상돼 재활이 불가능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버릇대로 나는 통찰했다. 점점 크게 요동치는자동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열린 차창 밖으로 왼손을 뻗어올려 차체를 붙잡았던 나의 과오를.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 - P224

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개를 피하지 않겠지만, 이를 악물고 치어버리겠지만...... 대체 그런 일이 언제 다시 생긴다는 말인가?
첫 불운은 조용히 다른 불운을 불러왔다. 피를 많이 흘려 쇠약해진 데다 매사에 오른손에만 무리한 힘을 준 탓에, 퇴원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오른손의 관절들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악화될 때는 냄비나 주전자, 심지어 머그컵조차 혼자 다룰 수없어 일일이 남편을 불러야 했다.
무의미한 반성들은 그 과정에도 뒤따라왔다. 재활치료에 지나치게 열심이었던 것, 빠른 회복에 집착했던 것, 그래서 마치 완전히 회복된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 개선되어야 할 내 습성은, 때로 균형을 잃을 만큼 맹목적인 의욕. 하나의 과제가 주어지면 세 개는 해내야 마음이 편해지는 모범생 기질. 폐 끼치는 것을 정도 이상으로 싫어하는 결벽성. - P225

일 년 가까운 통원 물리치료를 끝낸 늦은 겨울, 나는 두 손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왼손은 완전히 으스러졌고, 오른손으로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생활만을 억지로꾸려갈 수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일 년만 두고 봅시다‘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동안오른손을 쉬어주라는 것이었다. 최대한 가사를 쉬고, 그림은 말할 것도 없으며, 무거운 것을 들거나 힘을 주거나 손목을 뒤로 꺾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 - P225

고 스트레스를 피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인체의 자연 치유력을 믿어보자는 것이었다.
회복된 뒤에라도, 손에 무리가 가는 일은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의사가 당부한 일 년이 지났지만, 오른손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좋은 의사였다. 젊었고, 권위적이지 않았고, 환자들을 배려할 줄 알았다. 그런 의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말하자면, 지난 이 년간 내가 만난 유일한 행운이었던 셈이다. - P226

어떤 영원한 사람. 귀신처럼 어른거리는 사람. 흔적인사람. 그림자인 사람. 혹은, 오래된 집의 마룻바닥에 스민 누대의 일생들의 자취…… 그런데,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이 여자의 어딘가가 나와 닮았다는 것을. 과거 속의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이 년 전의 내 갈망이었다. 시간의 뒤편으로 들어가고싶어 했던 나, 낡은 마룻바닥 속으로 희미하게 스며들고 싶었던 나. 천천히 세월에 지워지고 싶었던, 눈비와 들쥐들과 바람 속에 폐가처럼 무너져 내려앉고 싶었던 나.
창문을 열었지만 실내는 몹시 덥다.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나는 일어선다. 벽 쪽으로 걸어간다. 더러는 비닐을 뒤집어쓰고, 더러는 먼지로 부예진 작품들을 둘러본다.  - P230

육송 널빤지를 일정한 폭으로 자르고, 못질을 해 붙이고, 사포질을 하고, 아교를 포수했었다. 벽돌을 곱게 가루내 분채와섞어 색을 내고, 늙은 세월의 느낌을 입혀줄 대두 기름과 잣기름을 직접 짜서 만들었다. 어깨를 결려가며, 손가락에 상처를 내가며 두 손, 두 팔로 이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며칠밤을 새워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다. 이 년 동안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환자. 한 남자의 골칫덩어리. 때로 오른손이 악화되면 자신이 쓴 물컵 하나 선반에 - P230

뒤집어놓을 수 없는, 철저히 쓸모없는 존재.
나는 그림들로부터 등을 돌려, 여자의 옆얼굴이 그려지다만 널빤지 앞으로 돌아와 앉는다. 이 얼굴의 이미지를 왜 그렇게 사랑했을까. 마치 종교에 몰입한 사람처럼 나는 진정으로 매달렸었다. 이렇게 고요하게, 나는 침잠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이런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오른손이 과연 아물 수 있을지, 작업을 다시 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지만, 다시 그린다면 나는 이런 고요 대신 울부짖고 싶다.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발을 구르고 싶다. 이를 악물고 동맥을 끊어, 솟구치는 피를 보고 싶다. 이 그림의 놀라운 고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느낌으로 고여 있는 평화가 나를 구역질나게 한다. 이 평화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죽음 같은 공허, 황무지의 참혹함-그편이 나에게는 진실로 느껴진다.
천천히, 그러나 단호히 오른손을 뻗어, 나는 그 낡은 널빤지를 뒤집어버린다. - P2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은 자꾸 잊어버린다. 방금 전까지 당신이 어디 있었는지,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 지금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건지 잊는다. 지하도 출구를 빠져나오자 당신은 걸음을 멈춘다. 활짝 문이 열린 전자 제품 매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악의 비트, 쉬지 않고 아스팔트를 뚫어대는 기계들의 먹먹한소음에 넋을 빼앗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처방받은 항생제가 노트북 가방 앞주머니에 잘 들어 있는지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한다.
당신은 이미 잊었다. 자신이 얼마나 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나름으로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는지 잊었다. 작은 키 때문에 늘 굽이 있는 단화를 신고, 자유스러운 밝은색 옷을 걸치고, 흰색과 노랑색 계열의 스카프를 두르고, 눈꼬리가 살짝 처진 눈엔 언제나 어렴풋한 장난기가 어려 있었던 것을.
목을 덮는 검은 스웨터에 검은 모직 재킷, 검은 면바지에 검은 단화를 신은 당신의 키는 초등학교 고학년생처럼 왜소해 보인다. 화장은커녕 입술에 립글로스도 바르지 않아,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 P12

막 눈발이 쏟아질 것 같던 하늘은 아직 한 점의 눈송이도 뱉어 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거리는 붐볐다. 끝없이 붉은 미등을 켠 차들이 숨죽인 채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있었다. 당신은 앞좌석에서 여전히 두 주먹을 쥐고 있었고,
이따금 뒷좌석에 웅크려 누운 언니를 돌아보았고,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목구멍이 따가웠다.
당신의 언니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당부할 필요가 없었다. 당신이 그 비밀을 언제까지나, 부모는 물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끝까지 짊어질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언니는 그날 이후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당신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눈조차 제대로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 후 수년간 당신은 그녀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애썼지만, 어떤 노력도 부질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순간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 P19

그해가 지나가기 전에, 당신은 늦은 밤 그녀의 방에서 물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 P20

얼핏 어두워졌다. 거울을 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그때 당신은 그녀를 이해한다고 느꼈다. 여러 겹 얇고 흰 커튼 속의 형상을 짐작하듯 어렴풋하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가 아니었다. 다만 가장 안전한 곳, 거북과 달팽이들의 고요한 껍데기 집, 사과 속의 깊고 단단한 씨방 같은 장소를 원하는 것뿐이었다. - P21

그녀가 아이를 갖기 위해 십 년 가까이 쏟아부은 노력들을당신은 어머니로부터 낱낱이 들어 알고 있었다. 한방병원에서 지은 고가의 탕약들, 배꼽 아래에 흉이 생길 때까지 받았다는 쑥뜸 치료, 불임 시술을 위한 검사들. 초조하게 시술 날짜를 기다리던 시간. 잔혹하게 반복된 계류유산, 가족 모임에 당신이 나타나면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었다. 활짝 미소를 지은 채로, 당신은 당신의 언니를 사랑하지 않으려 애썼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보려 애썼다. 그녀가 웃을 때면 장난꾸러기처럼 찡그려지는 콧잔등을 다정하게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 P21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혈육을 향해서만 느낄 수 있는, 이루말할 수 없는 친숙한 감정을 당신의 내부에서 깨우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당신의 마음을 최대한 차갑게, 더 단단하게 얼리기 위해 애썼다. - P22

그녀는 삼십칠 킬로그램까지 몸무게가 줄었고,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고통을 호소했다. 아파, 아파, 라고 아이처럼 가느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아빠, 나 좀 살려줘, 라고 그녀가 애원하자 무뚝뚝한 아버지의 턱이 덜덜 떨렸다. 덩치 큰 형부는 뒤돌아서서 울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아가, 아가, 라고 속삭였다. 당신은 자책을 멈추지 못했다. 당신의 존재가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멈추지못했다. 언니, 라고 마침내 떨리는 입술을 열고 말하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 P23

그러니까, 이제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이틀 뒤 두번째로, 이틀이 더 지나 세번째로 다시 당신이 의사에게 그 상처들을 보여주리라는 것을 당신은 지금 모른다. 하루만 더 지켜보죠, 라고 의사가 말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인대, 근육, 신경이 다 모여 있는 곳이라서,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당신이 다시 구두를 앞코로만 끌고 걷는 묘기를 해 수납을 하리라는 것을, 오후 여섯 시가 지나 야간 진료비가 추가되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붉은 거미줄 같은 레이저 광선이 훑고 지나가는 왼쪽 발목의 구멍을 다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죽어 있는 회백색의 피부 조직을 보며, 드레싱을할 때 왼쪽은 아팠지만 오른쪽은 오히려 아프지 않았던 걸 기억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아마 신경이 죽어버린 모양이지, 생각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수술을 하면 이 죽은 부분을 도려내는 거겠지. 가장자리 생살에서 피가 흐르겠지.
그따위, 라고 생각하며 당신이 마른 눈을 깜박이리라는 것을 모른다. - P26

급하게 비탈진 진입로에 이르자 페달을 놓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잎이 다 떨어진 버드나무들이 걷고 섬세한 뼈대를 드러낸 채 물가에 무리 지어서있다. 퇴색된 잎들이 아직 붙어 있는 활엽수들 아래를 당신은 빠르게 달린다.
속력을 낼수록 바람이 강해진다. 이 바람을 맞으려고 당신은 여름 한낮에도 이 길을 자전거로 달리곤 했다. 뙤약볕이 이글거리는 팔월의 정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흐르는 시간을 골라 이 길을 달렸다. 습기 차고 무더운 바람의 덩어리 속을 자전거로 뚫고 지나갔다. 당신은 살아 있었다. 생생하게 살아서 그 무더운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별안간 소나기가 쏟아지면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가장 가까운 콘크리트 다리를 향해 달렸다. 미친 듯이, 아무 까닭도 없이 소리를 지르고싶은 기쁨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난 팔월, 당신의 언니가 친정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형부의 차에 실려 병원을 오가고 있었을 때 당신은 그렇게 미칠 듯한 기쁨을 느꼈다. - P28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아 무릎 관절염이 악화된 어머니를 활달하게 설득하고 돌아온 일요일 저녁, 날개를 편 것처럼 천천히 골목에 내리는 눈을 더 보지 않기 위해 당신이 커튼으로 창을 가리리라는 것을 모른다. 칠흑같이 어두워진 방 가운데 당신이 웅크리고 앉아 맞을 밤을 모른다. 어디만큼 왔나, 당당 멀었다. 눈을 감은 채 언니의 손을 잡고 외갓집에 가던 캄캄한 골목을, 그 목소리를 기억하지 않기 위해 밤새 헤드폰을쓴 채 토막잠을 청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오래전 당신이 첫 월급을 타서 선물했던 스카프를 그녀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말없이 돌려주었던 순간을, 당신이 끈덕지게 되돌려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른다. 당신이 그녀에게서 영원히 돌아서리라 결심했던 순간. 그녀의 표정 없는 눈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결코 읽을 수 없었던 그 순간. 그때 당신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당신 역시 무섭도록 차가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놀라며 발견하는 대신 무엇을, 어떤 다른 방법을 찾아냈어야 했을까. 끈덕지고 뜨거운 그 질문들을 악물고 새벽까지 뒤척이리라는 것을 모른다. - P33

그 모든 것을 아직 알지 못한 채 지금 당신은 갈대밭 가장자리에 누워 있다. 자전거는 천변의 바위 위로 나동그라져 세차게 헛바퀴가 돌고 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순간 당신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손과 팔꿈치의 피부가 벗겨진게 분명하다. 땅에 부딪친 어깨와 골반이 뻐근하게 아파온다.
이따위, 라고 중얼거리며 당신은 축축한 흙 위에 누워 있다. 회백색 구멍 속의 상처 따위는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흙이 들어간 오른쪽 눈이 쓰라리다. 이 모든 통각들이 너무 허약하다고, 당신은 수차례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한다.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 P34

죽은 들고양이를 피하기 위해 그 여자는 무리하게 차선을바꾼다. 오늘로 나흘째다. 노르스름한 털, 부드러운 살의 윤곽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던 고양이는 이제 거의 부패했다.
며칠 더 지나면 부피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문드러질 것이다.
그 여자는 속력을 낸다. 시속 백이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차들의 굉음 속에서, 십년 된 소형 승용차는 끔찍한 소음을 낸다. 액셀을 밟을 때마다 수십 마리 곤충이 날개를 떠는 것 같은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 여자는 라디오를 켰다가 끈다. 테이프를 꽂았다가 뺀다. 터널의 어둠 속으로 삼켜진다. 빛 속으로 다시 내뱉어진다. 외마디 비명처럼 짧고 빠르게. - P37

그 봄이 지나갈 때까지, 어지러운 햇빛 속을 승용차로 달려 출근할 때마다 서른두 살의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했다. 두눈을 시큰하게 하는 빛, 생리적인 눈물이 고이게 하는 빛, 어른어른 마성이 피어오르는 빛 속에서 커브를 꺾으며 훈자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첫번째 육로가 마음에 들었다. 인부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며 건설했다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절벽 길을 달리다 날이 저물면 교통빈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한다. 다음날 새벽 다시 버스에 올라 하루를 더 꼬박 달려야 한다. 어디로 눈을 들어도 해발 육천 미터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 탄식처럼 갑자기 훈자는 - P42

나타날 것이다. 지대가 높아, 늦은 봄이 되어서야 살구꽃이 지천으로 피는 곳. 가을이면 말린 살구가 가게마다 그득한곳. 한번 들어가면 떠나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에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곳. - P43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그 여자의 훈자는 더 이상 영문판 『론리 플래닛 파키스탄편에 있지 않았고, 그 여자가 암호를 걸어놓은 파일에 담긴신장 지방과 파키스탄 지도에 있지 않았다. 검색창에 훈자,
라고 써넣으면 떠오르는 블로그들, 카페들에 있지 않았다. 길고 복잡한 화장품의 이름, 깎은 듯 아름다운 여배우의 옆얼굴에 있지 않았다. - P48

수없는 어두운 환상 속에서 그 여자는 낡은 차를 몰고 공항으로 달렸고, 과열된 엔진이 폭발하는 열기를 견뎠다. 비행기 화물칸에서 어리석게,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훈자의 날카로운 빙하에 내던져져 머리가 산산조각 났다.

그 여자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맨발로 걸었고, 동이 터왔고, 시퍼런 그믐달이 어둠 속에 면도날처럼 돋아나는 것을 보았다. 소리 없이 다가온 산짐승에게 목덜미가 찢겼고, 목구멍으로 비명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 P49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더 이상 악몽에시달리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날인가부터, 수면 부족 때문에 실제보다 표면이 건조하고 거칠어 보이는 사물들 위로, 결코 훈자일 수 없는 것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이 훈자라는 것을 오직 그 여자만 알 수 있는 것들, 그것이 왜 훈자인지 누구에게도,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 P52

검은 아스팔트가 새로 깔린 구간으로 그 여자의 차가 들어선다. 차선이 지워진 캄캄한 자리에 드문드문 희뜩한 표지들이 꽂혀 있다. 불안하게 큰 커브를 돌며 그 여자는 눈을 부릅뜬다. 앞차가 뱉어 내는 브레이크 등의 불빛이, 끈덕지게 술렁이는 도로의 어둠이 핏물처럼 그 여자의 눈에 비쳐 어른댄다. - P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하여 결국, 잃은 뒤에야 그것의 소중함을알게 된다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진리를 나는 이 쾌적한 아파트에서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처음 약수를 길러 한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그 동네에 갔을 때, 집이 있던 골목 어귀에 들어선 순간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눈시울이뜨거워졌다. 숱하게 오르내렸던 비탈진 언덕을 지나 약수터에 이르자내 마음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온기로 덥혀졌다.
그, 평화,
햇살이 좋은 봄이면 책 한 권을 들고 나와 나무 그늘 아래서 읽었던 곳이 그곳이고, 저녁이면 계곡물에 떨어졌을 흰 산벚꽃잎을 보려고 산책 나왔던 곳이 그곳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충일과 평화가 거기 고스란히 떠돌고 있었다. - P221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소설가 한강이 1988년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느라고 3개월 머무는 동안 사귄 여러 나라 시인, 소설가들과의 우정어린 사귐을 회상하는 애틋한 기록이다.
자기가 태어나서 오래 산 곳을 떠나 낯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느끼는 저 생생한 자유로움-잠정적이나마 과거로부터 멀어지면서 활짝 피는 듯한 그 자유로움 속에 겪는 일들과 사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모두 파릇파릇할 것이다. 마음 안팎의 사물을파릇파릇하게 만드는 것이 시인의 영원한 임무라면, 이 책의 작가가 겪고 기록한 그시간들은 필경 시적인 순간들이며, 세계가 시작되기 전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준 마음의 가벼움과 원초성에 인화된 순간들이다.
작가가 말하듯이 그 사귐에 깃들어 있었던 평화, 우정, 따뜻함도 물론 그러한 상황의 소산이며, 글 속에 깃들어 다함이 없는 촉촉한(여성적) 애틋함이 읽는 사람을 감동에 젖게 한다.
-정현종(시인)

작가 한강, 자신의 이름 그대로, 그는 강을 똑 닮았다. 투명하고 유려한 그의 문장은먼 길 향하는 강물소리처럼 나직하면서도 깊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차다. 이 아름다운 산문집은 그의 고요한 영혼의 수면 위에 별처럼 잠시 머물렀다 떠난 사람들, 그리고 그 만남에 대한 애틋한 추억록이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마주친 그 특별한 만남들은 삶, 자유, 고독, 사랑, 그리움, 조국, 노래 그리고 눈물이 되어 우리들 앞에 감동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더 조용히 앉아있었다.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고향을 잃고 세상을 떠도는 어느 망명 작가의 쓸쓸한 음성이 오래도록 가슴을 울렸다.
-임철우(소설가,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ㅂ한동안 망설였다. 4년여의 시간이 흘러, 아무래도 이 글들을 나의 것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고쳐 쓸 수도 없었다. 생각과 감정의 틀 자체가 변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쓰거나 쓰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렇게 여러 날의 여러 마음 끝에, 결국 이렇게 책을 묶게 되었다. 최종 원고를 보내기 위해 오래 전의 나와 조우한 며칠 동안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이런 나도 있었구나. 꽤 밝았구나. 마음이 가볍고 담담했구나. 단순하고 낙관적이었구나. 심오할 것도 무거울 것도 없이. 고통스럽게 파고들어간 자기 응시의 흔적 없이.
1998년 여름의 일이다. 첫 장편소설을 낸 지 열흘 만에, 나는 혼자서 여행가방 두 개를 끌고 미국의 소도시 아이오와시티로 날아갔 - P6

다. 그곳에서 3개월간 체류하며 아이오와 대학 주최의 국제창작 프로그램(IWP)에 참가했다. 세계의 열여덟 나라-주로 제3세계에서 온시인, 소설가들과 기숙사 8층에 함께 묵으며, 빠듯하지 않은 일정 속에서 자유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동료 작가들이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간 뒤에도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한 달쯤 이곳저곳을 여행한 뒤 돌아왔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때의 경험들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국제창작 프로그램이나 미국 여행에 대한 보고서는 아니다. 실상 문학에대한 얘기조차 별로 없다. 그저 내가 만난 사람들짧게 스쳐가며 내면을 열어 보여준 이들에 대한 스케치, 혹은 크로키라고 하면 될까. - P7

그 거친 연필 자국 아래 서른 전의 젊은 내가 숨어 ㅡ생략되어 ㅡ 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생각하고, 이해하려 애쓰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생생히.
잡지에 이 글들을 연재하던 때부터, 오랫동안 재촉하고 원고를 기다려준 이영희 주간께 마음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책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다감하게 애써주신 편집부의 여러분께도 감사한다.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한 모든 이들에게 그립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때 이렇게 써놓고서, 그 뒤로 시간이 6년 더 홀렀다. 그러니까 벌써 그 무렵으로부터 성큼성큼 10년을 떨어져나온 - P8

셈이다. 그래도 아직 가끔 그곳, 그 사람들의 꿈을 꿀 때가 있다.
책을 되살려 펴내주신 열림원의 민병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감히 생각지도 못했는데 표지의 글을 써주신 정현종 선생님, 임철우 선생님께 부끄럽게 머리 숙여 인사 드린다. 오래도록, 애틋하게 감사드리게 될 것 같다.
새로 태어난 이 책으로 만나게 될 독자들께 반가운 안부인사 드린다.
2009. 겨울, 韓江 - P9

그녀는 네바다의 죽음계곡 안에 있는 아파치 보호구역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했다. 나는 좀놀랐다. 백인 중류층 일색인 중서부의 아이오와에서만 석 달을 보낸나에게 그녀는 내가 직접 대면한 첫 인디언이었다. "버스에 오르면내 옆에 앉을 건가?" 그녀는 물었다. "왜요?" "네가 마음에 들어서. 인상 쓰고 정면만 바라보고 말 한마디 건네려 하지 않는 인간들은 질색이야, 인생을 미워하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우리는 버스의 중간쯤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한국어에대해 물었고 영어를 중고등학교에서 배운다고 내가 설명하자 미소를지으며 말했다.
"나한테도 영어는 모국어가 아냐. 보호구역의 미션 스쿨에서 배 - P16

웠지. 내가 아파치말을 쓸 때마다 수녀들이 날 때렸어……. ‘노 아팟치!‘ ‘노 아팟치!‘ 하면서 한 수녀는 내 새끼손가락을 세 번 분질렀어"
그녀는 관절이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여줬다. 아연한 나에게 그녀는 이어 말했다.
"내가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아버지 어머니가 
백인들에게 살해됐어. 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붙여줬지. 태양의 딸이라고, 태양의 딸, 살리달,"
그 할아버지도 그녀가 여섯 살 때 죽었고, 그 ‘나쁜‘ 미션스쿨에서 8학년을 마친 뒤 살리달은 켄터키의 목장에 갔다. 거기서 말을 돌 - P17

보며 밥과 숙소를 빌어 고등학교를 마쳤다. 인디언 남자와 결혼을 한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남편과 네바다에서 버지니아까지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리던 중 그가 철길 사고로 죽었다. 그때, 남편의 시신에서 물건들을 빼앗아 가는 백인들의 팔을 그녀는 부러뜨려버렸다고했다.
"나는 미쳤었어! 알겠어? 나는 미쳤었어."
달려온 경찰이 그녀의 허벅지와 허리 사이를 쐈고, 당시 임신 4개월이었던 그녀의 아기는 그 자리에서 사산됐다.
"그 뒤로 결혼을 안 하셨나요?" 내가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결코!" 결혼을 안 한 것은 물론 그녀는 누구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 P18

하지 않았다. 안아주며 "네가 좋다"라는 말까지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건 상처를 주니까,
아프니까"라고 그녀는 이유를 설명했다.
몸을 회복한 뒤 그녀는 여러 주의 보호구역을 전전하며 방황했다. 처음으로 바다를 본 것은 플로리다에서였다. 그 위에 떠 있는 요트들을 봤을 때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저거다!" "난 저걸 몰 거다!"
그녀는 항해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전문대에 들어갔다. 졸업한뒤, 스페인의 선박회사에서 만든 대형 요트를 직접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운반해 오는 일을 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만한 고래가 - P20

지나가는 것을 보기도 했고, 태풍을 만나 배가 가라앉은 적도 있었다고했다.
"배가 가라앉다니, 그럼 어떻게 살아남은 거죠?"
"아니, 나는 그때 죽었어."
짐짓 유령처럼 무서운 얼굴로 나를 겁주더니, 살리달은 구명보트를 타고 구조를 기다리던 긴박한 순간들을 묘사하다 말고 갑자기 침묵했다. 창밖 밤하늘의 무수한 흰 별들이 우리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침묵을 깨고 그녀는 말했다.
"......여기가 세도나야, 붉고 아름다운 암석들이 있는데...... 낮에 왔으면 네가 보고 좋아했을 텐데. 하지만 별이 좋지? 난 한 번도 - P21

별을 바라보는 데 질려본 적이 없어."
그녀는 느닷없이 고개를 쳐들더니 조그만 소리로 코요테 울음을 흉내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난 별을 좋아해."
그녀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여행을 좋아해∙∙∙∙∙∙. 1년 이상은 한 곳에 있을 수 없어. 유목민 체질이라 그래."
여행하는 동안 외롭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자신의 왼쪽 어깨에는 죽은 어머니가, 오른쪽 어깨에는 죽은 아버지가, 가슴에는 죽은 남편이 함께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고 했다.
- P22

"나는 삶을 사랑해. 난 자유로워 이렇게 여행하다 보면 사람들을만날 수 있잖아? 오늘 너를 만난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느껴. 인디언 바구니 짜는 법을 백인들에게 강습한 적이 있지. 그때마다 난 말했어.
당신들이 만든 바구니에 기쁨을 담으라고."
"백인들을 증오하지 않나요?"
"다 지난 일이야."
그녀의 얼굴은 어두웠고, 조금 외로워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시 별을 향해 코요테 울음소리를 냈다. 질주하는차창 밖의 어둠이 별빛에 실려 어지럽게 흔들리던 밤이었다. -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지가 전화보다 좋은 것은 오래오래 생각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편지로 하는 버릇이 있다. 영원히 증거로 남아도 좋을 얘기만 써보자, 하는 마음가짐이 오히려 이야기를 잘 풀어준다. 글쎄요......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거나, 먼산만 바라보거나,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리거나 할 수 없는백지 앞에서 상대방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가끔 그렇게 옛날의 감각으로, 아주 오래 모니터 앞에 앉아 이메일을 쓴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도 이렇게 쓸까, 아니면 저렇게 쓸까,
고민하며 몇 분을 보내버릴 때가 있다. 글쓰는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오랫동안 편지를 쓰던 습관 탓이지 싶다.
오래된 노래가 좋은 까닭은, 혹시 오래된 마음이 좋아서일까? - P119

어떤 슬픔이나 고통은 곧이곧대로 말하려 하다가는 말하는 사람의 몸뚱이를 으스러뜨려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가슴에 눌러두면 시름시름 앓게 될 테니, 방법은 하나다. 리듬에 맞춰 노래하는 것. 세자리아 에보라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 이렇게 인생을 넘어가는구나. 이토록 깊은 슬픔과 리듬 사이의 서늘한 낙차 속에서, 그저 흔들리며 넘어가는구나.
케이프 베르데의 민델로 항구에서 태어난 세자리아 에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를 아홉 살 때 잃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 속에선술집들에서 노래하며 성장했다고 한다.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끊기지 않는 가난 후에 프랑스에서 음반을 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근원을 달래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맨발로 노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발벗은 마음의 자유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뻐근해진다.
가사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전달되는 이 노래. 리듬 속에 몸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는 동안, 우리의 삶이라는 게 워낙에 흔들리는 것임을, 그러니 너무 슬퍼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 - P124

음을 어느 틈에 서늘히 알게 되는 노래.

대학에 다닐 때 잠깐 풍물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북을 둘러메고 지쳐서 간신히 행군을 따라가고 있는 나에게 선배가 다가와 말했던 기억이 난다.
힘들면 무릎을 더 꺾어서 흥을 내봐. 춤을 춘다고 생각해. 가락을 타봐. 그러면 오히려 안 힘들어.
그 말대로 해보자 정말 힘이 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유난히 지치고 마음 둘 데 없을 때 이 노래를 듣게 되는 것도 아마 비슷한 까닭일 게다. 막막하던 마음으로 흥겨운 기타 소리, 타악기의소리, 코러스들의 목소리, 깊고도 낮은 그녀의 목소리가 스며들어오면, 잠들어 있던 생명이 서서히 요동치며 꿈틀거린다. 살 거야. 살아야지. 살고 싶어. 춤추고 싶어. 더 무릎을 꺾어야지. 더 리듬을 타야지. 더 부딪혀야지. 더 껴안아야지. 더 담대하게 무너져야지. - P125

12월의 이야기


눈물도 얼어붙네
너의 뺨에 살얼음이

내 손으로 녹여서 따스하게 해줄게
내 손으로 녹여서 강물 되게 해줄게

눈물도 얼어붙는
12월의 사랑노래



가족과 함께 내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80년 1월이었다 (26일이라는 날짜도 기억한다). 서울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넓고 춥다‘는 것이었다.
유리창의 성에 얼어붙은 길. 딱딱 소리치며 이가 부딪히는 추위. 그것들은 아마 나에게 서울의 인상이자 삶의 인상이 되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겨울만 되면 필요 없는 새 스웨터를 사고 싶어지는 건, 추위에 대한 두려움이자 따뜻함에 대한 갈망 탓인지도 모르겠다. - P130

나무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
하늘과 나를 이어주며 거기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나약할 때도

내가 바라보기 전에
나를 바라보고
내 실핏줄 검게 다 마르기 전에
그 푸른 입술 열어

언제나 나무는 내 곁에 있어
우듬지 잔가지 잎사귀 거기
내가 가장 외로울 때도
내가 가장 나약할 때도
음ㅡ 음ㅡ - P138

저기 자작나무가 심어져 있었구나. 한 그루, 두 그루, 세 그루.... 숨을 골라가며, 하나씩 세며 걸으니 모두 스물두 그루였다. 흰 우듬지,
흰 줄기, 흰 가지, 반짝이는 잎잎의 푸른 잎사귀들. 살아 있다는 것이 벅차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너무 벅차 오히려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죽는다는 것이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듣지 못하는 거라고했다던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더 이상 나무를 보지 못하는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겨울날 뼈대를 드러내고 하늘을 향한 활엽수들, 봄날 연푸른 잎을 돋워내는 나무들. 그 줄기와 가지의 아름다움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그 잎사귀의 빛과 소리를 그 꽃과 냄새를 열매의 빛과 맛을.
우리가 가장 나약할 때, 가장 지쳤을 때, 때로 억울하거나, 서럽거나 후회할 때, 가장 황폐할 때,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나무는 그자리에 있다. 땅속 캄캄한 곳에서부터 잔뿌리들로 물줄기를 끌어올려 잎사귀 끝까지 밀어올리며,
그러니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때로 이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고요한 몸, 더욱 고요한 눈길로 이들을 떠올리기 위해서라도. 어느날 거울을 보았을 때, 내 그을린 얼굴 대신 한 그루 낮고 푸른 나무가비칠 때까지. - P142

더 읽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픈 것은, 그의 운명을 미리 알기 때문입니다. 그가 동경에 가고자 하나 관의 허락을 못 받으면 마음이놓이고, 기어이 동경에 오고 말았소‘라고 하는 편지에서는 숨을 멈추게 됩니다. 하루하루 말라가며 저녁의 발열과 각혈, 가솔린 냄새로인한 구토를 견디는 대목은 그가 곧 죽을 것임을 내가 알기에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는 아직 모르나 나는 날짜까지 알고 있는 그의 미래말입니다. 한 달쯤만 있다 돌아가야겠소, 라는 다짐도, 돌아갈 수 없소 ㅡ 이대로는 결코, 라는 다짐도 부질없이 안타깝습니다.
밖으로 나오면 마음이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도처에서 그의 독백이 들리는 듯합니다. 짐짓 괜찮은 척 김기림의 안부를 묻고, 얼마 전시작했다는 배구가 재미있느냐며 너스레를 하고, 저녁에 듣고 온바이올린 연주에 대해 평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처절하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와주오. 제발 이리 와주오. - P176

카페 왈츠에서 곡들을 추리며 빼게 된 노래의 가사들은 더러 어두웠습니다. 차라리 우물 속처럼 아주 어두우면 그 어둠에 빛이 어리기도 할 텐데, 어떻게 보면 설어두운 노래들이었습니다. 빼면서는 조금아쉬웠지만 이제는 잘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의 글들도, 같은 마음으로 많이 덜어내며 썼습니다.
저는 제 운명을 미리 알지 못하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빛을 던지는 것뿐일까요. 아주 찬란한 빛이 아니라 해도 어슴푸레한, 빛의 어린아이 같은 무엇이라 해도…… 오직 생의 가운데에만 있는 무한한기쁨이, 어렴풋한 따스함으로라도 제 서툰 노래들에 배어 있기를 빌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의미 없는 바람이라는 걸. 하지만 바로 그 의미 없음으로써만 가까스로 살아남는 바람이라는 걸..... 이젠 조금은 알 것 같아서요. - P1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