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맥도가 아니라 산경도가 더 정확하다는데, 정말일까요?
산맥도와 산경도는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이 아니라, 산줄기를 무엇으로 보고 또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표시된지도일 뿐이에요. 산맥도가 동일한 지각운동을 통해 형성된 산줄기를 산맥으로 보고 그린 지도라면, 산경도는 분수계를 산맥으로 인식한 지도예요. 현대 지리학에서 산맥은 지각운동 또는 지질구조를 통해 일정한 방향으로 길게 늘어선 산지를 말해요. 즉 산맥도는 산맥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바탕을 두고 만들었으며, 지질시대에 만들어진 유용한 지하자원을 찾기에 용이해요. 조선시대에는 분수계, 즉 물길을 나누는 능선을 산맥으로 여겼어요. 18세기 실학자 신경준은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산경표를 만들고, 산맥을 대간·정간.정맥으로 구분했어요. 산경표의 산줄기 체계가 독특한 이유는 가장 큰 산줄기는 대간, 그다음 산줄기는 정간, 마지막은 정맥으로 산맥에 서열을 매겼다는 점이에요. 산경표를 지도로 표현한 것이 산경도예요. 산경도는 하천의 유역을 정확하게 표시하고 있어, 전통적인 문화권 구분에 유용해요. - P-1
영동과 영서는 어떻게 하나의 강원도가 되었나요?
통일신라시대에는 영동과 영서를 각각 명주와 삭주라는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어요. 그러다 995년 고려 성종 때 당나라 태종이 전국을 지리적 조건에 따라 10도로 나눈 것을 참고해서 우리도 전국을 10도로 나누었는데, 이때 명주와 삭주를 합쳐 삭방도로 이름 붙였어요. 삭방도란 이름은 삭주에서 따왔다고 해요. 그러다 고려 현종 때에 이르러 고려의 행정구역은 5도와 양계로 재편되는데요. 5도가 일반 행정구역이었다면, 북계와 동계를 뜻하는 양계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설치된 행정구역이었어요. 그중 태백산맥을 따라 길쭉한 모양을한 동계는 여진족의 침입을 대비해 설치했어요. 삭방도에서 군사적 이유로 동계가 분리되고 남은 지역은 교주도를 비롯해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가, 1389년 고려 공양왕 때 교주도와 동계 일부를 합쳐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로 합쳤어요. 강원도江原道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1395년 조선 태조 때였어요. 1392년 건국한 조선은 이전의 고려시대 행정구역을 새롭게 개편하는데요. 이때 영서의 교주도와 영동의 강릉도를 하나로 합쳐 강원도라 이름 붙인 것이에요. 조선시대 강원도 일대를 관동지방關東地方이라고도 불렀는데요. 대관령의 동쪽이라는 유래와 철령관의 동쪽이라는 유래가 있어요. - P-1
남북한 행정구역의 근간이 되는 조선 팔도는 하천과 하천 주변의 도시를 중심으로 구획된 행정구역 체계였다. 하천 주변에 도시가 형성되고 발전한 과정을 살피면, 왜 조선이 이런 체계를 세웠는지 이해할 수 있다. 비교적 친숙한 한반도 남부의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먼저 충청도 충주와 청주의 앞 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도시는 7세기 말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낸 신라가 오늘날 광역시에 해당하는 소경을 설치한 지역으로 각각 중원경과 서원경이 설치되었다. 충주는 남한강과 남한강의 지류큰 강으로 흐르거나 큰 강에서 갈려 나온 물줄기인 달천이 만나는 분지에서 발달했다.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면 한강 하류까지 곧바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죽령을 통해 영남으로 연결되어 예나 지금이나교통의 요충지로 통한다. 금강의 지류인 무심천 주변에 자리한 - P-1
청주는 비옥한 미호평야를 발판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충청북도 도청 소재지로서 충청북도의 정치·경제·행정·문화 중심지이며, 청주 인근의 오송역은 경부고속철도와 호남고속철도가 갈라지고 중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사통팔달의 길목이다. 조선시대 경상도慶尙道의 중심은 경주와 상주尙州였다. 형산강 분지에 자리한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는 고려시대부터 한반도 동남부 행정의 중심지로 역사가 유구하다. 낙동강 지류인 북천과 병성천 유역의 커다란 분지에 위치한 상주는 고대국가 진한의 여러 소국 중 사벌국의 중심지였으며, 조선시대에도 경상도 내륙의 중심이었다. 오늘날 도청에 해당하는 경상감영이 경주에 설치되었다가 상주를 거쳐 대구로 이전했는데, 감영이 옮겨진 이후에도 상주는 경상도의 중심 도시로 계속 기능했다. 낙동나루에서 출발하는 뱃길이 낙동강 하류까지 이어졌고, 북으로는 죽령을 통해 한강 유역과 연결되는 교통의 길목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 P-1
전주와 나주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 바로 전라도全羅道이다. 전주천 주변 분지에 형성된 전주는 견훤이 후백제의수도로 삼은 도시다. 전주 이씨의 본관이라 조선시대에는 태조의어진을 봉안한 경기전을 전주에 설치했으며, 전라감영도 이곳에 배치했다. 나주는 영산강 옆에 자리한 도시로 배를 이용해 서해로 뻗어나갈 수 있는 교두보였다. 조차가 큰 서해의 영향으로 배가 오가기 편리하고, 영산강 하류에 비옥한 나주평야가 자리해 도시의 성장 동력이 되었다. 나주는 고려시대 성종이 전국에 설치 - P-1
한 행정구역 12목 중 하나로서 호남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으며, 조선시대에도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큰 도시로 발달했다.
하천이 도시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강경의 흥망성쇠다. 금강변에 자리한 강경포구 주변에서 열리는 강경시장은 대한제국 당시 평양시장, 대구시장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으로 꼽힐 만큼 번영을 누렸다. 강경에 포구가 설치되고 시장이 발달한 원동력은 강경과 뱃길로 이어진 서해의 커다란 조차에 있었다. 밀물과 썰물 때 바닷물 높이의 차이를 조차라고 하는데, 조차가 큰 바다와 하천이 만나면 바닷물이 하천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흐른다. 조차가 큰 서해의 바닷물은 금강을 타고 강경을 지나 부여까지 이동했다. 이렇게 내륙까지 바닷물이 흐르면 배를 움직이기 무척 편리하므로, 강경에 포구를 설치하고 뱃길을 이용한 것이다. 강경은 금강의 지류인 강경천과 충청남도 제일의 식량창고었던 논산평야를 배후에 두고 성장했다. 금강의 뱃길을 이용해 논산평야와 내륙에서 온 농산물과 서해에서 들어오는 수산물이 강경시장에서 거래되었다. 경기도 남부의 안성, 충청남북도, 전라북도와 전주의 상인들까지 강경시장을 이용했다. 강경 황산대교 - P-1
인근에는 강경포구로 들어오는 배를 안내했던 등대가 남아 있다. 얼마나 많은 배가 강경포구를 오갔으면 바다도 아닌 금강변에 등대까지 만들었을까. 일본이 한반도를 수탈하려고 군산항을 개항하면서 강경은 전성기를 맞았다. 군산항을 통해 내륙으로 거래되는 상품의 80퍼센트가 강경을 지났다. 덕분에 강경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제일의 상업 도시로 발돋움했다. 충청남도에서 가장 먼저 상하수도와 전기가 설치된 지역이 강경이었다. 전기 공급을 위해 100평 규모 - P-1
의 화력발전소가 세워졌고, 1911년에는 처음으로 극장도 생겼다. 관공서와 은행도 자리를 잡았는데, 강경우편취급소는 충청남도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우체국이다. 금강의 편리한 뱃길 덕분에 크게 성장했던 강경은 경부선과 호남선 같은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급격하게 쇠퇴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논산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내는 거점으로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며 더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오늘날 강경은 인구 1만 명을 유지하기도 어려워 읍에서 면으로 격하될 위기에 처해 있다. 도로교통의 발달과 1990년에 건설된 금강 하굿둑의 건설로 포구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결과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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