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공부를 열심히 하며 계절을 따지지 않고 식물을 보러 다니던패 정월 거문도의 바닷가에서 만난 동백나무의 그 붉은 꽃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따뜻한 남쪽지방이 고향인 동백나무는 한겨울이 제 계절이라는 것을 우물 안 개구리였던 초보 식물학도가 처음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마침 남쪽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는데 불 붙듯 피어 난 붉은 동백꽃잎에 바다 소금이 변한 듯 흰 눈자락이 올라앉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었습니다. 동백나무의 아주 독특한 점은 조매화(島媒花)라는 것입니다. 꽃가루받이를 하는데 벌과 나비가 아닌 새의 힘을 빌리는 꽃을 말합니다. 크고 화려한 꽃이 많은 열대지방에서는 이러한 조매화를 간혹 볼 수 있습니다. 화질 좋은 전자제품을 선전할 때 등장하는, 꽃을 찾아가 날개를 팔락거리는 파란색 벌새가 그 경우입니다. - P139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조매화는 동백나무가 거의 유일할 듯합니다. 동백나무의 꿀을 먹고사는 이 새는 이름도 동박새입니다. 동백나무에는 꿀이 많이 나므로 벌과 나비가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꽃이 피는 한겨울은 곤충이 활동하기에 너무 이른 계절이므로 녹색, 황금색, 흰색 깃털이 아름다운 작은 동박새가 주로 그 임무를 맡습니다. 동백나무가 자라는 곳을 짚어 보면 해류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륙으로는 지리산 화엄사까지가 북한계인데해안 쪽으로 가면 서쪽으로는 충남 서산이라 하고 섬으로는 대청도까 - P139
지 올라가며 동쪽으로는 울릉도가 끝입니다. 간혹 추위에 내성이 강한 나무들이 더 올라와 자라기도 하지만 북으로 올라올수록 꽃 피는시기는 점점 늦어집니다. 동백나무 꽃 소식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봄이 오는 속도를 느낄수 있습니다. 지난 12월에 시작된 이 꽃 소식이, 꽃잎 하나 상하지 않은채 그대로 툭툭 떨어지는 장렬한 낙화를 두고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그 꽃 말이에요"라고 노래한 고창 선운사에 도달한 즈음이면 이미 봄이 와 있을 것입니다. - P140
연꽃은 불가의 꽃으로 유명합니다만 식물학자들에겐 씨앗의 신비를 보여준 식물입니다. 일반적인 풀씨는 씨앗이 맺힌 지 한 해가 지나며 싹트는 능력이 현저하게 줄어 야생식물을 잘 키우려면 씨앗을 얻자마자 계절에 관계없이 뿌려야 합니다. 물론 식물마다 다르고 조건에 따라 오래가기도 하지만 가장 놀라운생명력을 보여주었던 씨앗은 바로 연꽃입니다. 대부분의 수생식물들은 물을 벗어나면 씨앗의 껍질이 그 어떤 건조와 충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해집니다. 1951년 동경 부근의 한 늪에서 신석기 시대로 생각되는 카누 안에서 3개의 연꽃 종자가 발견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중에서 2개를 싹틔워 지금의 연꽃과 조금도 다름없는 분홍색 연꽃을 피워냈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2,000년을 살아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던 연꽃씨앗이 피워낸 그 놀라운 세상을. 식물이란 이렇게 따뜻함으로 때론 놀라움으로, 한겨울에서 다시 한여름으로 시공을 넘나드는 정말 특별한 존재입니다. - P143
그런데 이즈음엔 산불이 났던 자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도 큰 걱정이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탄 자리에 나무를 심는 일을 당연하게생각했는데, 그냥 두는 것이 좋겠다는 연구결과가 얼마 전 지상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후 강원도 동해 산불이 난 자리를 인공 조림할 것이냐, 자연복원할 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영험한 생체인 나무, 그리고 그들이 모여 이루어진 유기적인 복합체인 숲을 한 가지 논리와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어야만 숲이 만들어졌던 옛날과 달리 지금 우리의 산은 자연복구가 가능한 곳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토양의 유실을 줄이고 빨리 푸른 숲으로 돌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 P159
우리가 부러워하는 유럽의 숲, 100년 이상을 키운 나무 한 그루의 가치가 벤츠 한 대 가격과 맞먹는다는 그나무는 인공림입니다. 자연복구된 나무들은 숲을 금방 푸르게 할 수 있지만, 만일 흠 없는 좋은 목재를 얻으려면 그로부터 2~3대를 거쳐 씨앗이 자란 나무가 곧게 자라야 하니 나무를 심는 편이 옳습니다. 암반이 드러나는 등 조건이 좋지않는 곳은 그냥 놔두는 편이 더 나을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굴참나무와 같은 활엽수가 주인인 숲은 여러 가지를 고려해봐야 합니다. 자연복원력이 좋은 여건의 숲이어도 만일 그 산의 주인이 "몇 년 아니 몇 십 년을 기다리더라도 소나무숲에서 자라는 송이버섯을 보겠다."고 한다면 역시 소나무를 심어야하겠지요. 3월 중 산불근무 일정표를 받아보다가, 불타버린 산을 푸른 숲으로 만드는 방법을 놓고 흑백논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걱정돼 말이 조금 길었습니다. - P160
세상엔 정말 많은 종류의 꽃이 있습니다. 화려한 꽃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은행나무나 소나무 꽃에서부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튤립이나 장미, 새를 닮은 극락조화.... 이렇게 많은 식물의 꽃 중에서 난초과에 속하는 식물이 가장 진화했다고 합니다. 진화의 방향이야 복잡해질 수도 단순해질 수도 있지만, 난초과 식물이 진화된 식물이라는 것에는 학자들 사이에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난초과 식물이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춘란이라고 부르는 보춘화와 품격이 고고한 한란이 있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서양의 난초(양란이라고 부릅니다)도 있습니다. 우리 땅에 자라는 난초과 식물 중에도 알고보면 자줏빛 도는 갈색 꽃이 아름다운 새우난초, 노란색이 화려한 금새우난, 한 마리의 흰 새가 날아가는 듯한 해오라비난초 등 특별한 모습의 식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난초과 식물의 꽃은 모두 상하는 다르지만 좌우 모양은 똑같습니다. 또가운데에 순판이라는 꽃잎이, 뒷면에는 길쭉한 꽃주머니가 있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기본 구성은 이처럼 비슷해도 실제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 P177
대부분 식물은 달콤한꿀과 꽃가루를 만들어내 곤충을 부르는데 난초는 절반 정도만 이 방식을 채택합니다. 어떤 난초는 특별한 향기로 곤충을 유인하고, 심지어 어떤 난초는 꿀이 많은 다른 난초와 똑같은 모양으로 꾸미고 순진한 곤충들이 날아와 꿀을 찾는 과정에서 꽃가루받이를 이루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욱 지능적인 속임수도 있습니다. 꽃잎 모양을 암벌의 모습과 아주 비슷하게 만들어서 어수룩한 수벌이 찾아오도록 하는 종류도 있습니다. 더욱 교활한것은 꽃잎의 생김은 물론 촉감, 심지어 향기까지도 암벌의 체취를 모방한다고 합니다. 난초과 식물들은 꽃가루를 미세한 가루 대신 끈끈한 덩어리로 만들어 곤충에 들러붙게 합니다. 꽃가루가 바람에 흩날려 중간에 손실되는일 없이 다른 꽃의 암술머리에 안전하게 얹혀지도록 하기 위해서죠. 이렇게 되면 한 씨방에서 씨앗이 될 수 있는 밑씨가 대부분 꽃가루를만나 씨앗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난초는 한 개의 씨방에 300만개 정도의 씨앗이 담겨 있습니다. 이 정도면 욕심도 지나치지요. 아주 영리하고 약삭빠른 난초를 바라보니 요즘처럼 어려운 세상에영합해 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참 닮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교를 부리지 않고 미련하게 온 지상에 꽃가루를 잔뜩 날려 보내어 암술과 만날 우연을 기다리는 참나무 꽃들의 단순함과 우직함이 마음에남습니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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