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세트 - 전2권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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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첫 시선집, 독자들에게 새롭게 인사드린다
그동안 내 시집들을 읽어주신 분께
작은 의미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자신으로 말하자면 조현병이라는
절망스런 상황이 수십 년 이어졌었고
그러나 이제는 천주교에 귀의하여
환한 길을 걷고 있는 나로서도 이 시선집은
어떤 획을 긋는다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봄은 봄이지만 늘 맞던 봄이 아니라
처음으로 맞는 봄 같다

2026년 봄
최승자

일찍이 나는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개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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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농, 좀 걸어요, 지노가 제게 말해요. 우리는 그레차나 쪽으로 걸어가요. 지노는 아무도 모르는 길들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하죠. 그는 고속도로를 한 번도 건너지 않고도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갈 수 있거든요. 나중에 저는 그의 얼굴과 그 기다란 코 때문에산토끼라고 불렀는데, 제가 옳았어요. 그는, 다른 사람들은 찾기는커녕 보지도 못하는 길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날은 그가 저를 만지지 않았어요. 종종 둑을 내려가거나 나무 아래를 지날 때 손을 잡아주기는 했죠. 그는 이전에 남자들이 제게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행동들을 했어요. 그는 자제하고 있었어요. 원숭이들이 하는 짓과는 정반대죠. 원숭이들은 다 망치고 다니잖아요. 그는 자신의 악기를 꼭 쥔 채 온몸으로 그 악기를 감싸고 있는 색소폰 연주자 같았어요. 지노는 사이프러스가 자라는 베로나의 햇빛 아래에서, 아무런악기도 없이 그렇게 했던 거예요. 그런 모습 때문에 제가 그를 만지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 P53

평원은 초여름이다. 풀은 녹색이고 어리다. 도로가 포 강에 가까워질 때마다 강은 점점 더 넓어진다.
이곳 그리스에서 섬들 사이의 바다는 다른 모든 것보다 오래 남는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곳 평원의 담수는 다르다. 포 강은,
한데 모여서 점점 불어나는 동안(일정 시점이 지나면 모든 큰 강은더 많은 물을 끌어모은다), 그 무엇도 변화를 피해 갈 수 없음을 강요한다.
도로 가장자리에 양귀비가 자라고 있다. 늘어선 버드나무들이 강의 경계를 알려 주고, 부드러운 바람은 그 꽃들을 마치 베개 안의솜털처럼 도로 건너편으로 날려 준다.
그러는 내내 땅은 점점 더 평평해지고, 나이 든 여인의 손끝에서펴지는 테이블보처럼 주름도 사라진다. 여인은 다른 손으로 접시와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있다. 땅이 점점 더 평평해지면서 거리감도 늘어나고, 인간은 아주 작게 느껴진다. - P54

신호수는 오토바이를 빠르게 몬다. 발뒤꿈치를 들고, 팔꿈치를구부리고, 손목의 긴장을 풀고, 허리 부분을 연료 탱크에 밀착시킨다. 어쩌면 이른 아침의 햇빛 덕분에 모든 것이 또렷이 보이면서, 속도에 대한 욕심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그려보면, 바다에 이르는 것이 강의 본성이듯, 속도를 꿈꾸는 것은 남자의 본성임을 알 수 있다. 속도는 인간이 신의 것으로 여긴 최초의특성들 중 하나다. 그리고 여기, 아직 교통 정체가 시작되기 전의 화창한 아침에, 커다란 강 옆에서 장 페레로는 마치 신처럼 오토바이를 몰고 있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손가락을 움직이고 어깨를조금 틀기만 하면,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그 어떤 인간적인 지체도없이, 그 효과를 기계에 전달할 수 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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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 눈이면 훌륭하지
여름의 열기에 힘들어하는 남자의 입에는
봄바람이면 훌륭하지
항해에 나서려는 선원들에게는
홑겹 이불 하나면 그 무엇보다 훌륭하지
침대에 누운 두 연인에게는


상황이 맞을 때면 오래된 시구를 인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들은 것은 거의 기억하고, 온종일 귀를 기울이지만, 가끔은 그 모든것을 조리있게 하나로 맞춰낼 방법을 알 수 없다. 그럴 때면 나는 진실한 울림이 있는 듯한 단어나 구절에 매달린다.
한 세기 전에는 습지였지만 지금은 시장이 열리는 플라카 주변구역에서, 사람들은 나를 초바나코스라고 부른다. 양치기라는 뜻이다. 산에서 온 사람. 내가 그런 별명을 얻은 것은 노래 한 곡 때문이 - P5

었다.
매일 아침 시장에 나가기 전에 나는 검은색 구두에 광을 내고 카우보이 모자에 묻은 먼지를 떨어낸다. 도시에는 먼지와 오염물질이 많고, 햇빛 때문에 그것들은 더 나빠 보인다. 나는 넥타이도 맨다.
제일 좋아하는 넥타이는 화려한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것이다. 맹인은 절대 외모에 무심하면 안 된다.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보석상처럼 옷을 입고, 시장에서 타마타(tamata, 그리스 정교에서 누군가에게 기적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
기도와 함께 교회에 바치는 편액(扁額)-옮긴이)를 판다.
타마타는 손으로 만져서 그 위의 형상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맹인이 팔기에 적합한 물건이다. 양철로 만든 것도 있고, 은이나, 아주 가끔은 금으로 만든 것도 있다. 리넨처럼 얇고 크기는 신용카드만 하다. ‘타마(tama, 타마타의 단수형-옮긴이)‘는 ‘맹세를 하다‘라는 뜻의 동사 ‘타조(tázo)‘에서 유래했다. 맹세의 대가로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이나 구원을 기대한다.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은 칼이 찍힌 타마를 사는데, 이는 ‘제대할 때까지 다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바람을 표현하는 것이다. - P6

몇 주가 지났다.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프랑스어를 말하는 게 들릴때, 심장이 새겨진 타마를 팔 때, 신호등에서 멀어지는 오토바이의바퀴 소리를 들을 때, 가끔씩 그럴 때마다 철도원과 그의 딸 니농이생각났다. 두 사람은 스쳐 갔고, 절대 머무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유월이 시작될 무렵, 무언가 달라졌다.
저녁이면 나는 플라카에서 집까지 걸어서 돌아온다. 맹인이 되고 나서 생긴 효과라면, 시간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지니게 된다는것이다. 시계는 쓸모없어진다(나도 가끔은 시계를 팔기도 하지만).
시계가 없어도 나는 시간을 분 단위까지 알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열 명의 사람을 정기적으로 지나치며 그들과 몇 마디 나눈다. 그들에게 나는 시간을 알려 주는 사람이다. 일 년 전부터 그열 명 중에는 코스타스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와 나의 관계는또 다른 이야기이고, 아직은 말할 수 없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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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노트 

서성이는 사람
위수정


최근(이라고 말하지만 꽤 오래전부터)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채 거실 소파에 앉거나 누워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영화 보는것을 좋아하지만 요즘엔 영화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책을 펼쳐도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 같은 드라마를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딴짓을한다. 성인 ADHD인가? 정신과의사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건 아닐 거라고 한다. 나는 친구의 말을 믿을 수 없지만 굳이 병원에 찾아가 검사를 할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 ADHD라면?
SNS에서 본 적이 있는데, ADHD 환자가 약을 먹으면 평소에 산만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길 수 있고 집중력도 놀라울 정도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약은 나를 - P221

위한 것이 아닌가? 내가 병원에 가겠다고 한다면 친구는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어찌되었든 가능한 한 약은 먹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 친구는 약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의사니까. 나는 내가 집중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약을 먹는 쪽을 택할 텐데, 하고 생각하며 공상의 나래를 펼친다. 일찍 잔다. 일찍 일어난다. 공복에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신 뒤 책상 앞에 앉는다. 글을 쓴다. 약 두 시간 정도 천자에서 이천 자 분량을 쓴다. 그렇게 글쓰기를 마친 뒤 기분좋게 스트레칭을 한다. 건강한 아침식사를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한다. 잔잔한 클래식이나 감성적인 인디밴드의 음악을 틀어놓은 뒤 강아지와 함께 각자의 식사를…… 평온하고 이상적인 루틴. 불가능할 것도 없는 일상.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잘 안 되는 일들이다. 역시, 오늘도 글렀어. 자기 전에 거의 매일하는 생각이다.
여행을 다니 - P222

여행을 다니면서 유독 눈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여성복(이라는 말도 언젠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저 스커트라든가 드레스 같은 말로만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을 잘차려 입은 남성들. 나는 왠지 그들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슈트 차림의 여성을 볼 때와는 또다른 감정이었던 것 같다. 사회적 편견에 맞서려는 좀더 깊은 의지와 용기가 전해진달까. 그리고 그중 어떤 이들은 외부의 시선 따위 개의치 않는 듯 수염을 기르고 가슴의 털을 그대로 노출한 채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자연스럽게 걷고 있기도 했다. 국내에서 - P222

도 크로스드레서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기이함과 존경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응원의 마음이 든 것은 내 안에 학습된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의 작용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마음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학습된 작용이든 뭐든 그것이 내 진심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입고 싶은 옷을 입고도 그 누구의 어떤 종류의 폭력에도 노출되지 않은 채 행복하고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비단 옷차림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거리낌없이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혹시 내게 배우자나 아이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까, 가정이 있는 이들이 사회적 규율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역시 소수의 말에 좀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까. 써야하니까. 아니, 그 이전에 국가나 사회가 ‘잘‘ 작동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을 본능적으로 의심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내안에 다양한 형태의 보수성이 있음을 종종 느낀다. 그런 것들은 의식적으로 떨쳐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노력하고 싶다. 잘 안 되더라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사람은 먼지만큼, 또는 우주만큼 다르다고 믿는다.
- P223

「귀신이 없는 집에 나오는 코요와 관련된 설화를 들었을 때 나는 머리에 작은 등이 깜빡 켜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 경험은 잘 찾아오지 않는, 작가로서 언제나 고대하는 순간이다. 기나사 설화는 「귀신이 없는 집」보다 한 계절 앞서 발표한 단편소설 「눈과 돌멩이」의 초고를 먼저 읽어주신 허병식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내 소설을 읽고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하셨는데 그 순간 그동안 쓰고 싶었던 이야기의 구름들이 손에 닿았다. 쓸 수 있겠다는 기분. 작가로서 가장 설레는 순간.
한 작품으로는 그리고 싶은 인물들을 다 그리지 못해 두 편의 소설에 코요의 이야기를 담게 되었다. 하지만 두 편으로도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2부작보다는 3부작이 익숙해서인가? 코요에게서 뻗어나간 작품 하나를 더 쓰고 싶다. 연결되는듯 전혀 다른 독립된 작품으로, 언젠가는 쓸 수 있기를. - P224

사실 나는 시간을 낭비해도 좋다는 입장이다. 성실함이라는 것 역시 사회에서 요구하는 덕목 아닌가. 과거의 양반이나 귀족들의 행태를 보면, 성실함의 미덕은 피지배층을 부려먹으려는 지배층의 계략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함에도, 역시 나태하다는 생각이 들면 불안하다. 반면, 유용하게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면 안정감이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행인 점은 내게 유용한 시간은 문학을 할 때가 거의 유일하다는 것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나는 어쩌다. 이 시대에 글을 읽고 쓰는 시간을 유용하다고 느끼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전시회에 가거나 영화를 보는 일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당을 주는 일을 하는 것보다 유용하게 느껴진다. 나는 비경제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가진 유 - P224

일한 자부심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이 유용하다고 믿는 마음을 억지로 가지려 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그렇게 향한다는 것. 이런 마음은 타고난 것은 아닐 것이다. 문학의 가치를 높게 여기는 환경에서 자란 것(부유하게 자랐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경제적 이득보다 다른 가치를 더 중요하며 살아가는 동료와 선생님들이 내 주위에 있어서 나는 불안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문학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예술의 가치를 외면하지 않(못하)는 사회에도 빚을 졌다면 졌을 것이다.
작가는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서 서성이는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위치인 동시에 시대가 부여한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경계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의 내면에 감추어진 각자의 소수성을 찾아내고 관찰하는 것이 나의 임무. 그들이 오십대 남성이건, 십대 소녀이건, 나는 꾸준히 그들을 찾아나설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나는 성실한 작가가 되고 싶다. 힘을 주세요. 내일은 좀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기를. 오늘도 잠들기 전에 기도해본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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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일이 어떤 일인지 잘 몰랐다. 잘 몰라서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이라는 열린 방에 들어가 며칠이고 앉아있는 날이 많았다. 궁금해서, 잘 몰라서, 이해해보고 싶어서. 소설은 나를 내쫓거나 몰아세우지 않고 그렇다고 말을 걸지도 않고 계속 앉아 있게 내버려두었다. 가끔은 방안으로 환한 빛이 들어와 나와 함께 머물렀다. 그 빛이 내 손목에 올라타거나 발등을 덮으면 제법 어색하고 무겁고 따뜻했다. 나는 이것이 소설이라고, 단지 그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앉아 있어야지 다짐하고서 정말로 매일매일. - P36

「추도」를 쓰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법과 아름다움이다(그래서 다음에 쓴 소설의 제목이 ‘법의 아름다움‘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처음엔 의문이었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더라도 혈중알코올농도가 0.03% 미만이라면 음주운전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음주운전을 한 게 아니게 되는 걸까?
‘행위가 실재했는지‘와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행위가 적법한지 위법인지‘ 이 세 가지는 한몸을 이루지를 않고 각기 다르게 움직이며 겹치기도 하고 비껴가기도 하는 것 같다. 지난 몇 년 동안,
특히 2025년에 저 세 가지가 서로 충돌하는 사건들을 많이 목격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 P74

아름다움이 옳은 것이라는 말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치장교의 군복, 금빛 머리, 사랑하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얼마나 잔혹한가.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서 가져온 이미지들이다.
옳은 것이 아름다울 것이라는 말 또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오물과 소음, 구질구질한 것들이 표백된 아름다운 세계는 과연얼마나 정의로울까.
근 몇 년 사이에 아름다운 것, 옳은 것만 남기고 그렇지 못한것은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존재가 옳지 못하다. 아름답지 못하다는이유로 사라지고 있을지.
쓸모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것도 존재하는 세상이야말로 아름다운 세상이지 않을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의미와 아름다움을 좇게 된다. 천성이 그러한 것 같다. 내가 좇는 아름다움이 뭔가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도 모르는 채로 세상을 나쁘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언제나 두렵다. - P75

어쩌면 이런 생각들은 전부 위선인지도 모르겠다. 「추도」 속 해주는 백부의 공장에서 죽은 청년에 대해서는 마음으로만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를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해주가 실제로하는 일은 백부와 백모를 위한 일들이다. 그런 해주가 죽은 청년을 위해 기도를 한다면 그야말로 위선일 것이다. 그건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기도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래서 해주는 누구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못한 것 같다. - P76

「추도」를 쓰기 시작할 때, 해주가 주기도문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문장을 ‘우리의 죄를 사하지 마시옵고‘라고바꿔 말하는 것을 결말로 정했었다. 소설을 완성하고 나니 그대목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나는 여전히 해주가 우리의 죄를 사하지말아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다.
사실 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기도를 한다면 이렇게하려 한다.
그 밖에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죄까지도 모두 벌하여주소서.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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