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立秋)


신새벽에 요사채 방문 열고 밖에 섰다
승복 한 벌 가을비에 젖고 있다
두 철째 묵언중인 젊은 납자(衲子)
가슴에 다 마르지 못한 것들 저리 많았는가
속살 베이도록 단단히 풀기 먹였는데
잠시 고개 돌리면
이 산중에서도 젖고 또 젖었다
두어라, 서둘러 걷을 일 없다
빳빳이 세웠던 풀기 다 빠져야
곧추선 허리 풀린다
그리운 이름 한 사발쯤 가슴으로 젖어야
이 겨울, 다시 눈 푸르게 넘기지 않으련
비 들이친다 문 닫아라! - P10

새벽별


외로움도 오래되면 온몸 따스히 데워주는 것인지, 홀로 뽑아낸 거미줄 같은 길이 달빛에 하얗게 내려앉는 밤이면, 가슴에 그토록 사무쳤던 사람 아니 죽어도 용서할수 없을 것만 같던 사람…… 사람들, 하나씩 쓸쓸한 길을 따라 내게 찾아와, 벚나무 아래 삐걱이는 평상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목젖을 적시는 묵은 이야기 두런두런 나누기도 하다가, 붉은 홍시 위로 가을비 번져오는 신새벽,오줌누러 뛰어가면 오돌오돌 떠는 어깨 뒤를, 어느결엔가 당신은 다가와 꿈결인 듯 나를 감싸안기도 합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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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믿음보다는 배반에 기댄다는 걸 너무
오래 믿어왔다. 문학은 확신보다는 불안에 기댄다는 걸 너무 오래 확신해왔다. 문학은 내 이야기를 말하려는 욕망보다는 너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욕망에 기댄다는 걸 너무 오래 말해왔다. 믿음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닌가. 확신이 아닌 것을 확신하는 것은 확신이 아닌가. 너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말하기가 아닌가. 모순 속에 갇혀 고착돼 있는 문학에게 어떤 생명력이 깃들 수 있을까. - P89

문학이 한 시대의 명민한 증인으로 존재한다고 하자. 누구의 증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누구의 손끝에서 가장 예민한 증언이 태어나고 있을까. 그자는 문학장의 이너서클에 있을까. 아닐 것같다. 아무래도 문학인의 세계는 성 같다. 내부가있고 외부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내부에 있는 사람이 맞는 것 같다. 내부에 있는 사람이 문학에 대해하는 이야기는 누가 듣게 될까. 나는 누가 읽기를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내부는 아닌 것 같다. 이 성 바깥을 상상한다. 우선, 성벽 바깥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아무나 이성 안에 들여놓지 않기 위해서 문지기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 성안으로 들어오려면 출입증을 보여주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 바깥에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쓰기 위해 모이는 사람과 읽기 위해 모이는 사람. 어디선가 누군가가 무언가를…… - P90

문학장은 완고하고 폐쇄적이다. 문학 하는 우리의 환경을 둘러볼 때의 내 감회는 폐소공포증과 흡사했다. 내가 선택한 나의 환경이 언젠가는 내게 이런 유의 공포를 주는 공간으로 체감될 거라는 걸 설마 나는 몰랐을까.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걸 견딜 힘과 새로운 방법에 골몰할 줄 아는 힘을 얻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


문학적이라 여겨왔던 것들과 매혹되어 수용해왔던 문학적 공기를 모두 해독解毒하고 난 이후의 진공 상태를 상상하며 살아가다 보니, 시 쓰는 힘에 의해서보다는 시 쓰는 부력에 의해서 부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런 상태라면, 출구라든가, 개방감이라든가, 숨구멍 따위는 필요하지가 - P91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꿈꿔본 적 없었던 문학적 자아와 맞닿은 채로.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오랜 이 폐소공포증을 나는 벗어나는 중이다. - P92

"나는 어째서 이 시집이 별로인가?"에 봉착해서 무척이나 답답해하던 그 시절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항상 머릿속에 맴돌았고 암담한 느낌마저들었다. 누구의 안목도 믿지 않은 채로, 아무도 좋다고 말해준 적 없는 시집을 찾아 헤맸다. 쉽게 찾아지지 않았지만 그런 시집을 가까스로 만났다.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다. 너무 좋아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너무 기뻐서 시집을 꼭 껴안고 어디 잠시 숨어 있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시집은 그때 이후 줄곧 유일한 ‘나만의 시집‘이다. 1991년에초판이 발행되었고, 지금은 구하기 쉽지 않은 시집이다. 시인은 이후로 시집을 더 이상 출간하지않은 것 같고, 이 시인을 만난 적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다. 이 시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수십 년 동안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 P104

한편 정도를 인용해볼까 싶어 시집을 펼쳐읽다가 꼬박 하루가 갔다. 시인의 숨결이 너무 부드럽고 너무 진지해서, 시집 속에서 한 편을 꺼내었다가는 이내 그 문장이 바스러질 것만 같다. 그런 시집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시집이냐고 누군가가 정말 궁금해한다면, 직접 만났을 때나 ㅡ여러 번 고민을 좀 해본 후에 귓속말로나ㅡ알려줄 생각이다. - P105

기억은 골똘하게 집중할 때만 가까스로 완성에 가까워진다. 향후 반복해서 상기하는 것으로써 어쩔 수 없이 변형된다. 변형된 기억은 종내 완고해진다. 섬세함은 유실되고 이데올로기가 덧입혀지기 십상이다. 좋은 소설은 기억하고 있던 것을 되새김질하듯 기록하지 않는다. 비어 있던 기억의 구멍들을 두터운 진실들로 채워나가기 위하여기억하지 못했던 기억들을 비로소 소환하거나 발명한다. 기억술이 뛰어나서라든가 소중히 기억해오던 것을 마침내 기록하기 위하여 집필을 시작한걸로 짐작되지 않는다. 기억을 기억의 상자 속에서꺼내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길목에서 기억을 불현듯 마주치는 일과 같아진다.
순일하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으로써 단 
하나의 이야기가 생겨난다. 마침내 시간이 낯설게 소 - P108

환될 때 우리가 우리 삶에 미묘한 애착을 장착할수 있다는 것을 조용조용 알려준다. 애착해보지못했던 애착, 애착이 될 수 있으리라 상상해본 적없는 애착, 애착해야 한다고 주장되어온 것들의뒤에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려온 애착.
다른 장소를 꿈꾸지만 다른 시간을 만나는여행처럼, 내 삶이 마치 거기에 있어온 것처럼 여겨질 때야 나는 여기에 온전히 있을 수가 있다.
익숙한 시간이란 건 내게 있어본 적 없다. 서툴렀고 어리석었으나 좋았다.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그 어떤 사건도 사소한 적이 없었고, 세세한 일들을 잊지 않고 싶은 일들로, 열심히 기록해두고는 했다. 세세함은 항상 내게 힘이 된다. 세세히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하던 대로 기억하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힘이 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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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고 나면 모든 책이 다 시시하다. 그러나 시집만 읽고 있자면 모든 시집들이 다 시시해진다. - P67

두려움과 고통에 대하여 흔쾌하기. 온전히
흔쾌해질 때 찾아오는 자유로움으로 더없이 고요하기. 너무나 고요한 나머지 서늘하다고 느끼기. 너무나 서늘한 나머지 을씨년스럽다고 느끼기. - P68

모든 것을 알려 하지 않음. 전부를 다 적으려하지 않음. 진실은 이런 방식으로만 겨우 소용스러우니까. 정작 하려던 말을 시인은 기꺼이 떠나보낸다. 진실의 텅 비어 있음과 마주할, 준비된 얼굴들을 기다리기 위해서. - P69

시는 인간이 언어로 그을 수 있는 가장 큰 포물선이다. 모르는 장소로, 모르는 사람에게로, 모르는 옛날에, 모르는 미래에 미리 가닿는다. 시는이럴 때 수신자인 동시에 발신자이다. 포물선을 그리며 어딘가에서 소식이 자꾸 도착한다. 어디에서 오는지 잘 아는 것들조차 알던 얼굴을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다. - P70

시에겐 공포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공포를 공포라고 호명하기를 멈추어보기. 공포의 뒤통수와 손아귀와 손가락 끝의 지문까지 샅샅이 탐구하기. 공포를 견디는 게 아니라 공포를 추적하기. 공포가 깃든 영혼이 종내에는 어떻게 아름다움이 되는지 그 편에 서서 상상하기. 시는 그리하여 유령이 된 채로 유령과 어깨동무를 하려는 마음으로 기꺼이 옮겨간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 P71

사람으로서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다. 사람보다 좀 더 다른 무엇이 되어서 시인은 시를 쓴다.
좀 더 다른 그 무엇은 우리가 끔찍해하는 모습일수도 있고 우리가 얕잡아보는 형태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선망하는 얼굴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 얼굴을 시인은 시를 쓰며 계속 계속 좇는다. 그 얼굴을 지나칠 때까지. 지나쳐서 또 다른 얼굴을 만날 때까지. - P72

시는 세상을 너무 잘 반영하므로 오히려 왜소해져 간다. 그렇다고 세상만큼 시가 무기력하다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곧 도래할 세상에 미리 가 있기 때문에 이상한 적극성이 있다. 그래서 지독하게 슬프고 지독하게 읽기가 어려운 것이다. 시인이 가장 끔찍해하는 것은 시가 왜소해지는 일도 아니고 모서리에서 사는 일도 아니다. 다만, 진실의 두께가 왜소해지는 일, 피상적인 환상으로 미래에다 낙관을 덧칠하는 일을 가장 끔찍하게 여긴다. - P73

시는 어쨌거나 홀연한 것이다. ㅡ시가 원래홀연한 것이어서, ‘홀연히, 문득, 갑자기, 불현듯‘
같은 부사가 시 속에 등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ㅡ 시인은 시를 쓰면서 홀연히 자기 자신의 한계 바깥으로 이동한다. 그러기 위해 무언가 빤히 노려본다. 오래 응시한다. 너무 오래 쳐다봐서처음 발견한 것과 다른 것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한다. 시에게 행과 연이 있는 이유는 이 오랜 응시의 시간을 표시해두기 위해서다. 단숨에 쓰인 시일지라도, 이 오랜 응시와 사색이 있었고 그 끝에서 이루어진 단숨이다. 시인은 그렇게 잠시 자신의 처지 바깥에 놓임으로써 갱생을 도모하는지도 모른다. - P74

질문 앞에 서 있다. 누군가에겐 자명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겐 혹독한 질문이다. 누군가는 탐닉하듯 섭렵해온 세계관들을 전면 수정하지 않으면 질문에 동참할 자격조차 없을 질문. 그 질문에다 어깨를 걷고 그물코 하나만큼의 새로운 질문을 꺼낼때야 새로움을 향유할 자격이 생길 질문. 이 자격을 얻기 위한 선행 작업 없이 이 질문에 동참한다면, 질문을 둘러싸고 생성되고 있는, 미약하고 희미한 세계를 바스러뜨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차근차근 준비하고 가담하여 질문을 통과하기. 다른 시작 앞에 도착하는 기쁨-혹은 두려움을 획득하기. - P75

여리디 여린 감수성을 낱낱이 기억해 자주 세세히 돌보기. 추억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을 기억하는 기술로써 지난 경험들을 만끽하며지내기. 지난날의 좌절과 좌초의 고통들을 기억함으로써, 그것을 얇디얇게 저며놓음으로써, 흔들리는 현재의 기우뚱한 면에 괴어 균형을 잡기. 그렇게 하여 현재를 바로잡기. 나는 이것이 기억술이라고 믿고 있다. 시의 기술이라고도 여긴다. 그리하여 윤리에게 시를 적용해보는 방식이 아닌 시에서부터 새로운 곁가지의 윤리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한다. - P76

육체의 진짜 꿈을 알고 싶다. 육체가 사랑을통해서 세례받고 싶어 하며 언어를 통해서 세례의 꿈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더 잘 느껴보고 싶다. 혼자의 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착하거나 누군가로부터 도착된 몸. 육체에 깃든 모든사연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시의 언어를 상상한다. 재촉 없이 연하게. 세세하게. - P77

내가 쓰게 될 다음 시 앞에서 나는 늘 더 불안하다. 더 크게 불안하다. 더 크게 불안해하고 싶어한다. 더 크게 불안해질 때까지 시 쓰기를 지체하며 시의 첫 줄을 기다려본다. 온전히 이해되고 나면 불안이라는 것조차도 안온해지니까. 익숙했던 불안으로부터 졸업하여 더 거대하고 더 깊은 불안으로 옮겨가기 위한 서곡을 짓는 마음으로 시집을 묶는다. 식은땀을 영원히 흘린다 해도, 꾀죄죄하고 피로한 얼굴이어도, 세계의 가장자리를 두루 발로디딘 자의 땀자국이 나의 얼굴이기를. - P78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차갑게 구분할 때 태연스러운 어법이 탄생한다. 세상모든 생물체들을 풍경 혹은 은유로 배치하지 않을것. 내가 곧 다시 그로 탄생할 것에 대해서만 촉수가 정수리에서 뻗어 나올 때까지 가까워질 것. 이 연결감을 욕망하고, 이 연결의 담당 기관이 온통 육체여야 한다는 것을 긴박하게 느낄 것. 이럴 때 능청스러울 정도의 태연한 태도가 발생한다는 걸 잊지 말 것. - P79

시적인 재능은 시 속의 문장으로 구현되는것이 아니라, 말해야 할 것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냉정하게 구분해내는 데에 있다. 말하기 시작한 것에 관하여는 거침이 없어야 한다. 거침없음은 부러 드러낼 필요가 없다. 고양을 드러내는도 조급한 면이 있다. 반드시 단호함에 의해서 작동되어야 한다. - P80

카프카를 만나러 가서, 카프카보다는 카프카를 기념하는 방식을 만나고 왔다.


등에 날개를 달고 모빌이 되어 있는 페소아인형, 디자인이 좋은 수첩의 표지가 되어 있는 폐소아. 페소아를 만나러 왔다가 페소아를 낭비하는도시를 만나고 왔다. - P81

멜랑콜리, 히스테릭, 광기. 이런 말들로 규정되어온 여성의 시는 광기 그 자체가 현실임을 항변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광기의 몸짓을 빌리지않으면 설득이 불가능한, 두텁고도 정교한 이 폭력적인 세계를 가리키고 드러내기 위한 입장이기도하다. - P82

하나의 단어는 이미 문장을 탑재한다. 하나의 단어에 이미 탑재된 문장의 가짓수야 많겠지만, 하나의 단어가 적히자마자 문장은 어느 정도는 갈 길이 정해진다. 그렇게 완성된 하나의 문장은 점잖고, 보드랍다. 단어는 저마다 들뜸 없이 안착해 있어 편안하게 읽는 이에게 소화된다. - P83

점잖고 편안한 단어들이 자신을 마중 나온문장을 배반하고 제멋대로 제자리가 아닌 것만 같은 자리로 옮겨가는 일. 이런 일을 밤낮으로 전담하는 이가 시인이다. 하나의 단어가 놓인 하나의문장이 우리가 생각해오던 관습적인 영역 바깥에놓이기를 희망하는 것. 그 의아함을 유발하는 것. 의아함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매끈하게 안착된 - P83

문장보다 더 미묘한 차이와 더 교묘한 은닉들을더 정확하게 가리킬 때가 있다. 이럴 때 시는 시다워진다.


단어의 뜻과 소릿값과 모양새 모두를, 난생처음 감각해본 듯한 생경함은 시인의 시선이 지닌힘이다. - P84

기체처럼 존재하는 것들을 가시화하고, 기체가 서서히 영글어 액체로 뭉쳐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고체처럼 가시화되는 순간에, 문장은 다시 기체로 돌아간다. 단일한 뜻이 아닌 또 다른 뜻과 겹쳐지고 연루되면서 고형화를 거절하면서.


시를 감각하는 일은 그래서 언어를 감각하는일이며, 언어를 감각하는 일은 언어가 태어나기이전 상태에다 더듬이를 담그는 일이다. 그 더듬이는 결국 이 세계의 뒷면을 감각하기 위한 투시력이기도 하다. 시로 인해서 세계는 투과된다. - P85

어떤 시가 몇 줄에 걸쳐 해놓은 말을 어떤 지루한 책은 겨우 두께로 감당하고 있다. 시집을 읽고 나면 모든 책이 강압적이다. 어떤 시가 몇 줄에걸쳐 사이사이 은닉해둔 말을 어떤 지루한 책은기어이 까발려 낱낱이 박제해 놓는다. 시인은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단지 못다 한 말을 신뢰한다. 시인은 이해력을 불신한다. 상상력을 우선시한다. 상상력이 부재하는 이해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상은 이해보다 더 오차 없는 이해의 방식이라는 것을, 시는 몇천 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조용히 외쳐왔다. - P86

일곱 살 즈음이었을 때다. 서랍장을 열어 엄마가 가지런히 개어둔 옷들을 낱낱이 뒤져댔다.
아무리 뒤져도 내가 찾는 옷은 없었다. 엄마는 얼른 옷을 챙겨 입으라고 등 뒤에서 재촉을 했고, 나는 내가 찾는 옷의 이미지를 엄마에게 설명하며도움을 청했다. 엄마는 이상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옷은 내가 네 살 때 입던 옷이었다고 말했다. 이젠 옷이 작아져서 입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내가커져서 그 옷을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옷이 작아져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 서랍장에 고이 있던 옷이 어떻게 스스로 작아질 수 있는지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엄마의 인내 어린 설명과 설득에 의해 나는 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이해했다. - P87

그때 내 등 뒤에 서 있던 엄마의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시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다.
시가 너무 작다는 이야기를.
혹은 작아졌다는 이야기를.


시가 작아진 것은


우리가 커다래졌기 때문이라는 걸
당신이 자라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럭무럭 크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찾던 그 시는 아직 이 세계에 없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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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일을 정말 잘하고 싶어서 걷기를 감행하는 것 중에 가장 나쁜 경우는 건강해지기 위해서 걷는 것이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집에만 있다가는 점점 더 늪에 빠져드는 느낌에서 헤어 나올길이 없다 싶을 때 무릎에 용기를 불어넣고 기립하여 외투를 꺼내 입고 현관으로 걸어간다.

신발을 신고 걷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성큼성큼 보폭을 크게 하고서 걷는다.

얼마를 걸었을까 하고 핸드폰 속 앱을 클릭하고 확인해본다. 그리고 믿을 수 없어 한다. 좀 더걷기로 한다. 그래도 또 금세 지루해진다. 신발을잘못 신고 나왔나 싶을 만큼 발바닥이 아려올 때까지, 지난번보다 더 먼 곳까지 가보아야지 하면서 또 걸어본다. 체내 에너지가 부족해서 이런가하면서 편의점에 들러 이온 음료를 사서 벤치에 - P21

잠시 앉아본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거리의 상점들을 무관한 마음으로 흘낏대어본다.

너무 걸으면
집으로 돌아가 오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수 있으므로 기운을 남겨놓아야 한다며 집으로돌아가기로 결정을 한다.

같은 길은 지루하니까 다른 길을 선택해서골목골목을 걷는다. 폐업한 가게와 신규 오픈한가게를 지나치고 세탁소에 들러 세탁물을 찾고 반찬가게에 들러 반찬들을 사서 양손 가득 들고 집으로 들어온다.

이 정도면 오늘은 정말 훌륭했어.
뿌듯해하지만 그래 봐야 언제나 칠천 보에서팔천 보 정도를 기록할 뿐이다. 이 정도가 나의 체력으론 최대치겠구나 싶어진다.
그럴 땐 피곤하지만 곯아떨어지지는 않는, - P22

얕은 잠과 쪽잠으로 이어지는질 나쁜 수면을 취한다.

다음 날 아침, 수상한 꿈을 온몸에 잔뜩 묻힌채로 찡그리며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찌뿌둥한 몸을 강제해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걷는 일을 정말 잘하고 싶어서 걷기를 감행할 때 정말 좋은 방법은쇼핑을 하러 나가는 것이다.

오늘은 돈을 왕창 써볼까 하면서 바깥으로나갈 때는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충전이 된다. 에너지가 올라가고 설렘까지 끼어든다. 즐거워서 저절로 걸음도 빨라진다. 가게가 즐비한 거리로 찾아간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텅 빈 가방 속에 장바구니를 하나 더 넣는다. 초콜릿을 사고 감자칩을 사고 핸드크림을 사고, 감기에 효과가 좋다는 티백을사고 양말을 산다. 무거운 걸 들고 돌아다닐 수는 - P23

없으므로 생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야지 한다. 편집숍에 들어가서 향수 냄새를 맡아보고, 털모자를 써보고, 가방을 메보고, 마음에 드는 색깔코너에서 패딩점퍼나 코트 같은 것을 꺼내어 거울앞으로 가져가 몸에 대본다. 매대에 전시된 잡지들을 펼쳐보다 다시 향수 코너에서 다른 향수 냄새를 맡아보고 다른 털모자 써보고∙∙∙∙∙∙. 편집숍이 좁은 공간은 아니라 해도 그곳에서만 천 보를 넘게걸을 수 있다는 게, 천보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다는 게 즐거워서 문구점에도 들른다. 대형 문구점일수록 좋다. 펜들이 많이 구비된 곳일수록 좋다. 하나씩 그립감을 체험하고 하나씩 필기감을 체험하며 조금씩 조금씩 매장을 맴돈다. 크리스마스관련된 전시 코너에서 카드에 그려진 천사들과 아기 예수를 음미하다가 데스크 용품 코너에서는 더 오래 머문다. 스테이플러를, 테이프 디스펜서를, 수동 연필깎이와 자동 연필깎이를 직접 만져보고 집에 있는 것들과 사용감을 과학적으로 비교해본다. 세상에 이렇게나 다양한 자와 이렇게나 다 - P24

양한 클립과 이렇게나 다양한 종이와 이렇게나 다양한 붓이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구경한다. 최종적으로 백화점 지하의 음식 코너로 진입을 한다. 음식을 직접 만들어 파는 코너보다는 세계 각국의 온갖 소스와 치즈, 그리고 와인과 맥주, 그리고 잼과 향신료 등을 파는 코너로 간다. 무화과잼이나 작은 병에 든 후무스 같은 것을골라서 장바구니에 넣는다. 이제 빵을 사고 생수를사서 숙소로 돌아가면 된다. 그 정도의 동선이면이만 보 정도는 충분히 넘긴다. 이만 보를 걸으면서 한 번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언제나 새삼스럽게 감동적이다.

걷는 일을 가장 잘할 수밖에 없는 때는
마음이 괴로운 경우이다. 마음의 응어리들이, 괴로움들이, 번잡한 걱정들이, 끝없이 불길하게 이어지는 번뇌들이,
먼데로부터 차곡차곡 도착해 온
울분들이 - P25

온몸에 꽉 차 있을 때마다
나는 오래 걸었다.

응어리들이 풀어지고 괴로움들이 사그라들고 걱정들이 잦아들고 번뇌들이 가시고 설움들을물리칠 때까지,
하던 생각을 또 하고 고개를 젓고 주먹을 꽉쥐고 한숨을 푹푹 쉬고 괜히 이마의 머리칼을 쓸어올리고
이 모든 동작들을 나도 모르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나는 모르는 동네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은 만 오천보 정도를 걸었다.
견딜 만했다는 뜻이다.

길모퉁이에서 정수리에서 신발 뒤축에서,
불균형했던 것들이 안정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건물들의 기둥과 간판들이 겨우 수직 - P26

과 수평을 되찾는 것처럼.

집에 돌아와
욕조에 물을 받고 목욕용 소금을 풀고 들어가 누웠다.
물방울이 피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성스럽게 바디로션을 바르고
새로 빨아놓은 잠옷을 입고서
수면제의 도움 없이 깊은 단잠을 잤다.


지난 2022년 10월 30일은 삼만 보를 넘게 걸었다. 숙소에 돌아와 어지간히 걸었겠다 싶어 앱을켜니 ‘움직이기 신기록 배지‘가 화면 가득 뱅글거리며 나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 앱을 사용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삼만 보를 넘긴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뉴스 - P27

를 보고, 우리에게 또다시 일어난 참사를 목격하고, 너무 멀리서 접한 소식이라 실감이 덜한 것인지 너무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라 실감이 덜한 것인지, 실감이 당도하기도 전에 비참과 참혹과 비탄이 익숙하다는 듯 엄습해 왔다. 무언가를 할 수도, 무언가를 안 할 수도 없는 이른 아침에 핸드폰을 손에 들고 뉴스들을 클릭해 읽으면서 숙소 앞 드넓은 공원을 몇 바퀴를 돌다가 어딘지 모를 동네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핼러윈 장식을 해놓은 상점들,
핼러윈 행사를 안내하는 포스터들을 
지나치며
열심히 걸어갔다.

그렇게나 열심히 걸었지만 어딘가에 당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돌고 돌고 돌았다. 돌고 돌고 돌고
또 돌아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 P28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답답함에 휩싸였던 것은, 내가 멀리에서 그 소식을 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가 애도 기간이 재빠르게 선포된 이후부터……. 나는 렉에 걸린 듯한 상태로 먼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애마저 국가가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국가 애도 기간은 짧게 종료됐다.
나의 애도는 시작도 못 했다. 우리의 애도는 시작도 안 했다. 애도는 많은 경우 종료되지 않는 세계이다. 영원히 현재에 있다. 해가 바뀌고 또 해가 바뀌고 다른 참사와 재난이 닥쳐도, 오히려 새로운 재난 앞에서 되살아난다.
우리는 올바른 애도를 하고 싶다. 그릇된 삶 속에서도 올바른 애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도. - P45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하 1층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 나는 커다란 거울 앞에 일부러 가서섰다.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은 내가 분명했지만, 내가 모르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도 오랫동안 되고 싶지 않아 해온 엄마의 모습 같기도 했고, 내가 십수 년 동안 외면해온 진짜 내 모습 같기도 했다. 그 사람은 거울 속에서 오래 나를 기다려온 것 같았다. 아니, 늘 거기서 나를 지켜보다가 오늘 불현듯 나에게 자기 존재를 들켜버린 듯 보였다. 내가 그런 모습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없게 된 날, 나는 4층으로 올라가 바쁜 사람처럼씩씩한 동작으로 엄마의 사물함에 기저귀를 넣어두고, 보호자용 간이 침대에 걸터앉아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습관처럼 시를 썼다. - P62

그때 나는 거울 앞에 서야 하고 거리감을 확보해야만 한다. 거리감을 확보한다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잔인하고 매정하고 이기적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잔인하고 매정하고 이기적인 것이 잔인하지 않고 매정하지 않으며 이기적이지 않은 상태를 어떤 방식으로 핍박하는지를 나는 안다. ‘엄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의식적으로 삼가기로 한 나의 결정을 나는 현명했다고 여긴다. 어떤 점에서? 도의적인 딸로서? 엄마로부터 가장 강력한 억압을 받아온 한 여성으로서? 아니면 미학적으로 좀 더 나은 시를 쓰고 싶은 욕망을 가진 시인으로서? 아니다. ‘엄마‘라는 단어에 내가 이미 포함되어 있어서다. ‘나‘ 라는 주어가 ‘엄마‘라는 자격을 이미 획득하고 있어서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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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에는 이미 장비가 들어와 있었으며 나무들은 뽑혀졌고 흙더미에 ‘조수 보호구역‘ 이라는 팻말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분명관에서 설치한 것일 터인데, 수상골프장으로 허가는 났다니까 보호구역도 그럼 취소가 되었는지 영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뒹굴어진 팻말이 내 눈에는 아무래도 관의 무기력, 무질서로 보였고 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는 장비만 있을 뿐 일하는 사람이 없었고 넓은 학교도 아주 아주 고요했습니다.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에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할 수도 있겠으나 원체 그곳에서도 소리는 없는 것으로 내 마음에 전해져왔습니다.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풍경도 사람도 다 같이 무감동, 무관심으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울먹이며 아뢰는 것은 다만 흙더미와 쓰러진 나무와 내동댕이쳐진 팻말뿐인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에는 이력이 나 있을 환경부 기자도 내 설명을 귀담아듣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마음 밑바닥에서 스며나오는 비애, 과연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인가 그 자문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하였습니다.  - P265

해악을 끼치려고 온 것은 아닌데 내심섭섭했으나 새들이 놀라서 떠나지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서둘러 모이를 뿌려주고 황망히 그곳을 떠났지요. 다음 날도 갔습니다. 이번에는 몇 마리의 새만 날아올랐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정찰하듯 빙빙 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지도자가있고 각기 분담하여 임무를 맡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이를 놔둔 곳을살펴보았습니다. 콩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보리는 없더군요. 마치 실험에 성공한 기분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갔습니다. 이번에는 한 마리의 새도 날아오르지 않았습니다. Q씨는 그때 내 마음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을 거예요. 철새들은 우리를 신뢰하고 환영했던 것입니다. 조용한 몸짓으로, 짐승은 은혜를 알아도 사람은 은혜를 모른다는, 흔히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은혜보다 신의라는 말이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누가 머리 나쁜 사람을 새대가리라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P270

산이란 산에는 무시무시한 덫이 깔려 짐승들의 울음이 하늘에 사무치고 터전을 빼앗긴 동식물은 굶주려 죽고 있습니다.
수만 마리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여 강가에 밀려와 썩어가는 것도 흔한 일이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고 이미 다반사가 되어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것 같지도 않더군요. 이와 같이 황폐한 영혼의 터전에서 시인은 무엇을 어떻게노래하는 걸까요. 소생의 계절이 아직도 시인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요.
도대체 문학은 무엇이냐, 맨정신으로 묻는 것도 쑥스러운 노릇이나 문학은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는 것도 상투적인 정의겠습니다만. 인생은 꾸미는 것이 아니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며 보다고통스럽게 무량한 우주의 비밀을 헤치고 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진실에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생명에 대한 자비, 혹은 연민이 핵이 되는 선성의 추구 없는 아름다움이란 종이꽃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유미주의또는 탐미주의는 쾌락주의와 상통하는 일종의 허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 P273

선배든 선생이든 부정과 부패에 보조를 맞추어야 관문을 통과하고 남먼저 사회에 나오게 되는, 참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거대한 물살이 되어 모든 것을 휩쓸고 가는 시대 흐름에 과연 자유가 있고 개성이 있겠습니까? 방향도 알지 못한 채 모두 한곳으로 뒤엉켜서 흘러갑니다. 경쟁이라는 채찍에 쫓겨 노예같이, 자동차의 부품같이. 이상이라는 말이 빈껍데기가된 지도 오래입니다. 흥분이나 투쟁도 얼빠진 말이 되었습니다. 네, 비켜서야지요. 다 군더더기 같은 얘기였어요.
노쇠한 봄이 지팡이를 짚고 흐느적거리듯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나 소생의계절이 한낱 수식어로서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분노 어린 마음이 망상이라면 내눈에 비치는 세태 풍경도 망상인지 모르지요. 내 머릿속이 뒤죽박죽인지 세상이뒤죽박죽인지 분간키 어렵습니다. 생각이 나갈 길이 없어요. 하루에도 몇 번 망상에 시달리고 절망에 사로잡히고 생각이 꽉 막혀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이 혼돈을 바로 세워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부딪치면 방향을 돌리는 것이 생존의 본능이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생명들은 삶의 방식을익혀가면서 전진하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했던 것이 역사 아니었던가. 자위해보 - P278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정 능력이 있을 때의 얘기지요. 뭔가가 있어서도와줄 것이다, 방향을 잡아줄 것이다. 그런 바람은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의 속성이지요,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우주의 질서는 가차가 없고 냉혹한 것입니다.
저만치서 서성거리고 있는 봄도 생명들의 아우성, 흐느낌을 뒤로하고 떠날 것입니다. 시인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습니다. 4월이 잔인했는지 존재의 처지가잔인했는지 혼란스럽군요. 인간들의 지칠 줄 모르는 파괴와 약탈로 아시다시피지구는 지금 만신창이가 돼 있습니다. 설령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자업자득. 어디 봄의 죄이겠습니까. 소생시켜놓은 생명들이 참살을 당하고 멸종이 된들 봄에게는 임무 밖의 일이지요. 다만 길손일 뿐, 노쇠해가는 길손일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그도 인간이 저질러서 맞이하게 될 재난에 희생되는 처지일 수도있고 지구와 생명들과 운명을 같이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노쇠한 봄이라는 말은물론 합당하지 않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세월의 조화인데 계절 자체가 세월이니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늙고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오도 가도 못하게 합니다.  - P279

삶은 준열하고 나날의 노동 없이는 내 자신이 분해되고 말 것만 같았고긴장을 푸는 순간 눈을 감은 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포기했으며 오로지 목숨을 부지한 것은 가엾은 내 딸, 손자의 눈빛때문입니다. 그때 머리가 다 빠지고 철색으로 변한 딸아이의 얼굴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내 마음속의 짙은 피멍입니다. 그리고 언어가 지닌 피상적인 속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절감하고 있습니다.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언어에 대한 몸부림,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언어에서 떠나질 못합니다. 그게 문학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시절, 거부하고 포기한, 극한적 고독의 산물이 《토지》였을 겁니다.
삭막하고 을씨년스럽고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만 같았던 낯선 고장 원주는 20년 동안 많이 변했습니다. 화려하고 풍성해 보이고 세련된 도시로 바뀌었으며 감나무가 자라고 백일홍의 꽃도 피게 되었습니다. 매지리로 이사한 내 집에도 감나무 세 그루, 백일홍 한 그루가 살고 있습니다. 20년 세월에 세상이 바뀌고 기후도 달라졌습니다. 아열대 기후가 북상해 온 거지요. 그 속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지만 가속이 붙게 되면 시베리아까지 그리 먼 일도 아닐 것입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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