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단어가 사냥매처럼 마음속에 내리꽂히거나 저녁 강물처럼 흘러 들어올 때가 있다. '적정기술'이란 단어가 그랬다. 이런 사람 살리는 개념이라니. 심플하고 아름다웠다. 매혹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 식수가 부족해 아이들은 아침 일찍 물동이를 지고 물을 길어 나선다. 몇 시간을 걸어가서 물을 길어 이고 지고 되돌아오는데, 아이들의 불완전한 걸음과 부실한 물동이 때문에 절반은 돌아오는 동안 흘러서 사라진다. 그 딱한 사정을 접한 디자이너가 사람들과 힘을 합쳐 큰 공(드럼통) 모양의 물통을 만들었다.
그 후 아이들의 삶은 달라졌다. 아이들은 물을 꽉 채운 물동이를 놀이하듯 굴리며 돌아온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양의 물을 운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저장도 가능하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삶도 달라졌다. 아이들은 물 긷느라 갈 수 없었던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주 간단한 물통 디자인 하나가 바꿔놓은 일상의 기적이다.
흔하디흔한 적정기술의 한 사례다. - P11~12
활자 중독자이기는 하지만 '자기를 계발하라' 라든가 하는 류의 책을 거의 접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책은 읽고 있노라면 스스로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 계속 평가하게 만들어서 자괴감의 늪에 허우적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거기에 더해 끝없는 각성을 요구한다. 그렇게 삼일쯤 지나면 읽을 때의 다짐과 각성과 반성들은 읽기 이전으로 사라지고 만다. 옳은 줄은 알지만 실행해지지 않는 그 무엇을 요구하는 도돌이표다. 그런 끈기가 없기에 '니가 요 모양 요 꼴'인 거라고 누군가 지적질을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또한 무슨 저명한 박사란 타이틀이 눈에 띄는 책도 주저한다.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압박에 스스로 눈에 불을 껴고 읽지만 어김없이 한 사나흘 지나면 까맣게 잊힌다. '그래서 니가 무식한 거야'란 힐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릴 때, (그 시절 유행했던) 안병욱 박사나 김형석 박사, 또 이시형 박사 (이분의 책 중에는 '내성적인 너무나 내성적인'(제목이 이거 맞나, 갸웃~!)은 꽤 재밌게 읽었던 기억은 난다.) 크리슈나무르트, 칼릴 지브란 등등의 책을 접한 적 있다. 읽을 때도 도통 모르겠더니 읽고 난 후는 기억이 1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조금씩 기피해 온 독서 대상들이 되었다.
내게 책은, 읽는 동안 마구마구 호기심이 동하게 즐겁거나, 주변 상황에서 책 속으로 순간 이동이 가능할 만큼의 몰입이거나, 정신의 쉼이거나, 지친 마음에 위로이자 세상으로 나아가는 배다. 책 속에 빠져있는 시간은 언제나 모자라고 간절하지만 사람들과의 시간도 나에게는 소중하다. 꽤나 누군가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 능력도 뛰어난 편에 속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피 대상이던 저명한 분이지만 "당신이 옳다"는 선택된 책이다. 마침 탁월한 공감 능력이 필요한 일도 시작한 지 일 년 차다. 그런데 '적정 심리학'은 뭘까. 책 표지에 강조점까지 표시된 '적정'이란 단어의 뜻은 저 페이지에서 고스란히 나온다. 그런 쓰임새라면, '적정'은 참 좋은 뜻을 가진 단어가 된다. 맨 발의 아이들이 커다란 공을 굴리면서 돌아오는 행복한 표정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저 아이들은 뭐가 저리 행복할까' 그런 의문 없이 주름살이 쫘악 펴지게 만드는 그런 영상이었는데 그 커다란 통들이 '물통'이었다는 것은 저 글을 읽고 알게 되었다. 그런 표정이 가능케했던 이유도.
"사냥매처럼 마음속에 내리꽂히거나 저녁 강물처럼 흘러 들어올 때가 있다. '적정기술'이란 단어가 그랬다. 이런 사람 살리는 개념이라니. 심플하고 아름다웠다. 매혹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책에서 그 무엇보다 이 문장에 매혹당했다. 처음 만나는 저명한 이 분께 단박에 사로잡혔다. 나도 ' 매혹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결코 금사빠가 아닌데!!) 그렇게 쭉죽 읽어나간다. 밑줄 그을 부분이 늘어난다.
세월호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 많은 (심리치유) 전문가들이 현장에 왔지만 이내 거의 사라졌다. 대신 "집에 앉아만 있을 수없어서 무작정 왔다"는 자원활동가들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울면서 무슨 일이든 했다. 피해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했으며 한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슬픔과 분노, 무력감을 호소하면서도 유가족들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그들의 이런 마음과 태도는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들의 행동과 눈빛은 트라우마를 받은 이후 세상과 사람을 통째로 불신하게 된 피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결정적인 위로다.
아무 자격증 없는 자원활동가들은 현장에서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찾고 역할은 해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와 정치권력은 상처 입은 피해자들을 길바닥에 패대기치고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하지만 자원활동가들의 한결같은 일상적 활동과 그들의 공통 정서인 슬픔과 무기력이 만들어낸 '슬픔과 무기력의 거대한 연대'는 피해자들을 구하는 동아줄이 되었다. - P14
'세월호' 벌써 팔 년째다. 여전히 '세월'이란 단어만 보아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세월호'를 위해서 뭔가를 하지도 않았다. 단지 마음이 먹먹하고 죄스러울 뿐,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입으로만 '세월호'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어른인 스스로를 인정하고 묵인하는 장치로 '세월호'는 작동한다. 그날의 바다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비겁함으로 말이다. 그런 비겁함을 보란 듯이 몸으로 뭔가를 행한 자원봉사자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언제나 몸을 움직여 행동하면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평온한 일상을 포기하고 뭔가라도 도움이 되려고 찾아 나서는 언제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그분들의 발걸음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어쩌다 우연히 '세월호'이야기가 나오면 '이제 그만하라고, 지겹다고' 말하는 이들도 꼭 있다. '그 당사자가 당신이어도, 희생자가 당신이 아는 누구였다면?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느냐'라고 묻는다. 그 느닷없고 공격적인 질문에 뜨악하고도 억울한 눈으로 흘겨보며 입을 다문다. 한결같이 재수 없다는 반응이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일 때 얼마나 함부로 말을 하게 되는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특별히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언론이 그렇게 말하면 그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학습된 시각을 가져서다. 실제로 그런 분들은 주변에도 비일비재한데 대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다. 남의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언론에서 회자되는 사안들에 대해서만은 무척 신랄하다.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든, 사회 문제이든, 100분 토론 속 참가자만큼 분석적이고 뼈 때리는 말들과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정치적인 전문가'의 시선과 논조를 가졌다. 스스로 신념이라 생각한 것들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것이 틀린 건지 맞는 건지에 대한 생각은 없다. 그런 '재수 없는' 일이 내 것일 리는 없다고, 그런 물음을 듣는 것도 못마땅하고 '재수 없는'일이 되어버렸다. 그저 '나'만 비껴가면 되는 걸까?
여전히 '세월호'에 준하는 참사는 곳곳에서 진행 중이고 원인 제공자는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인구감소는 걱정하면서 어처구니없는 사고들로 생명을 잃는 악순환이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단지 '재수가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묵인하고 방관한 국가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아니 현재 진행형이다. 타인의 아픔에 무감한 채로 먹고살 만해서 목소리도, 소유권도 분명한 이들에게만 정치권력의 구애도 집중되는 이 현실이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대한민국의 오늘이긴 할까?
모두 전문가가 되기를 원하고 그리 살려 하지만 저런 현장에서 쓸모없는 전문가만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지금 하는 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자주 생각한다. 어떤 돌발적인 상황 앞에도 흔들리지 않게 대처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전문가. 내가 생각하는 전문가란 그런 것인데, 머리만 있고 가슴은 없는 직업적인 전문가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도 있다. '자원봉사자'에서 시작한 생각이 삼천포로 빠져서 다시 허우적대고 말았다.
'슬픔과 무기력의 거대한 연대'는 피해자들을 구하는 공감의 시작이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앓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P109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근사한 수식이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
‘나‘ 이야기,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의 불씨가 지펴지면 희미하던 생명의 박동이 쿵쾅쿵쾅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 이야기에 정확하게 두 손을 대고 있는 한 사람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심리적 CPR을 하는 사람이다. 사람 목숨을 구하는 사람이다. 두 손을 그의 나‘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한 존재와 이어진 것이다. 존재와 존재의 연결이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 P110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이문재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어떤 경우] 전문
고통에 찬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저 담담하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얼마나 오만한 판단이었던 건지 지금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생각들은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가위에 눌리게 만든다.
나는 같은 관심사를 공유한 사람들과의 대화와 토론도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같이 고민을 해결하기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1인이지만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소극적인 사람이다. 온라인 글쓰기 동아리방에서 만난 그 사람은 그곳의 중심에서 언제나 빛나는 사람이었다.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주변이 언제나 반짝반짝하던 그 사람이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조언을 구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에게 조언을 할 수도 없었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밖에 다른 방법도 없었다. 그런 시절을 삼 년여, '존재와 존재의 연결이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일인 줄 알았으나 일방적인 듣기는 한계가 왔다. 많이 지치기도 했다. 힘든 일과의 끝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통화를 하고 있다 보면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고 제대로 성의를 다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타인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한 사람이 나에게는 자신에게만 그런 사람이기를 바라는 모순을 지켜보는 심정은 복잡했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본인의 일상은 평화롭게 유지하면서 내 일상은 엉망으로 만드는 나보다 훨씬 어른인 사람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기도 했다. 그런 감정의 줄다리기 끝에 절교를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결정하기까지가 어렵지 선택한 후에는 돌아보지 않는 나의 성품상 잊고 지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다 되어갈 때,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다던 아이를 둘 남겨두고 홀연히 떠나버린 것이다. 나는 그 서늘한 결기를 마주하기가 두렵다. 한때는 사는 일이 너무 막막하고 고단해서 죽음의 유혹이 강하던 어느 시절을 지나왔다. 그때마다 내 발목을 잡은 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남길 상처였다. '내가 뭐라고 그들에게 평생 그런 트라우마를 안긴단 말인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택을 하는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그 결연함이 무섭다.
아직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 아니 풀려고 했던 적도 없이 밀어두고 숨겨두고 감추고 있다. 솔직히 어째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는 척한 순간, 그 상처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서 새로운 관계 맺기가 안 된다. 정말 나는 '재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잊을만하면 슬금슬금 덮쳐온다.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 낼 수 없다. 둘 다 늪에 빠진다.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너를 공감하다 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도 공감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 P121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는 일이다. 정확하게라는 말은 대화의 과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공감에는 과녁이 있다. 과녁에서 멀어지는 대화는 지리멸렬해진다. - P132
공감은 상처를 더 드러낼 수 있게 만들고 제대로 드러난 상처 위에서 녹아드는 연고다. 상처 위에 바로 스민다. 상처 부위를 덮고 있는 겉옷 위에 뿌리는 분무제가 아니라 옷을 젖히고 상처 난 바로 그 부위 맨살에 바르는 약이다. 정확하고 집중력 있는 공감은 문제 해결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책임진다. 공감은 치유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관장하는 강력한 치유제다. - P158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음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비로소 분노의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 P167
공감자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많이 있지만 나도 마음이 있다는 점, 너와 나는 동시에 존중받고 공감받아야 마땅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힘도 공감적 관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너와 나를 동시에 보호하는 불가피한 선택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울며 겨자 먹기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나에게는 파괴적인 행위고 상대에게는 자기 행동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양쪽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결국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에게 공감적인 사람도 불가능하다. - P170
어떤 기간 동안, 어떤 특정 맥락과 상황 속에서는 내가 참고 견딜 수도 있지만 나는 항상 그래야 하는 존재,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자기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어야 공감자가 될 수 있다. 나와 너를 동시에 공감하는 일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 공감이다.- P194
공감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공감은 둘 다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지는 황금분할 지점을 찾는 과정이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공감이다. - P266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란 말이 좋았다. 어쩐지 언니한테 위로받는 듯한 말이다. 내 손해를 감수하면서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는 없이 상대방만 보이는 게 '공감'이 아니란 사실이 새롭다. 그동안 '공감'에 대한 공공연한 오해였다. '공감'은 언제나 옳다. 그러나 '나' 다음에 상대방이 있고 비로소 공감은 시작된다는 맥락으로 이해되어 홀가분한 기분이다.
책을 읽는 동안 아직은 두렵고 서툴지만 관계 맺기의 단절을 가져온 내 안의 상처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것이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미 안다. 시작이 어렵지 '첫'을 시작하면 그다음은 성큼성큼 나아간다는 것을. 내 안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어야 타인의 상처도 들여다볼 줄을 알게 된다. 지금 이 직업을 끌고 가기 위해서도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당신은 옳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