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은 소련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는 점도 신경 써야 했다. 만주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였던 곳을 빼앗아 만든 일본 식민지였다. 이러한 식민지는 더 늘어날 기세였다. 중국은 소련과의 국경이 가장 긴 나라이자 정치가 불안한 국가였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 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 P135
스탈린의 정치적 재능 중 하나는 외세의 위협을 국내 정책 실패의전적인 원인인 것처럼 제시하고, 자기 자신은 어느 것에도 책임이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을 받지않았고, 자신이 선택한 내부의 적을 외세의 앞잡이로 규정할 수 있었다. 1930년에 집단화에 따른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트로츠키 지지자와 여러 외세 사이에 국제적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자들의 포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안에있는 협잡꾼, 간첩, 파괴 공작원과 살인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소련의 정책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역사의 정당한 흐름을 느리게 하려는 반동 국가들의 책임이었다. 5개년 계획의 결함처럼보이는 일은 외세 간섭의 결과였다. 따라서 가장 심한 죄업은 반역자들의 몫이었고, 비난의 대상은 언제나 바르샤바, 도쿄, 베를린, 런던또는 파리였다. - P137
스탈린은 스페인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즉시 예조프를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가 보기에 정치재판과 인민전선은 같은 궤를 타고 있었다. 인민 전선은 모스크바의 전선이 바뀔 때마다친구와 적을 다르게 정의했다. 비공산주의정치세력에 제공되는 모든 기회가 그렇듯이, 이것은 본국과 외국 모두에서 상당한 경계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스탈린에게 있어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의 무장 파시즘 세력과 이들을 지지하는 외세에 대한 전쟁이면서, 동시에 좌파및 내부의 적을 상대하는 투쟁이었다. 그는 간첩과 배신자를 충분히색출해 사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페인 정부를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국가인 동시에 미래상이고, 한 나라의 정치체제이자 국제주의자의 이데올로기였다. 소련의 대외 정책은 언제나 국내 정책이었고, 소련의 국내 정책은 언제나 대외 정책이었다. 이는 소련의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 P142
오웰의 생각처럼, 소련과 유럽 파시즘의 공개적인 충돌은 본국에서과거의 반대자와 잠재적 반대자를 피로 숙청하는 일과 함께 일어났다. 소련의 이 작전은 국내의 숙청 재판 시작과 동시에 바르셀로나와마드리드에서도 개시되었다. 스페인 파시즘과의 부딪침은 소련에서의경계 강화를 정당화했고, 소련에서의 숙청은 스페인에서의 경계 강화를 정당화했다. 스페인 내전은 인민 전선이 아무리 ‘우리는 다수의 연대 세력이다‘라고 선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사회주의 반대 세력이라고 믿는 이들을 스탈린이 막무가내로 숙청하기로 마음먹었음 - P142
을 드러냈다. 오웰은 공산주의자들이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고 모스크바에 신세를 진 스페인 정부가 트로츠키파 정당을 금지하는 모습을 봤다. 오웰은 바르셀로나에서의 충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머나먼 도시에서 벌어진 이 추잡한 싸움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스탈린은 바르셀로나가 제5열 파시스트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지리적 특성과 지역 정치 현실에 아랑곳없는 스탈린주의자의 융통성 없는 논리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또한 일부 서구 좌파와 민주주의자에게 파시즘 외에도 적이 있음을 가르쳐준, 오웰의 전쟁 회고록 카탈로니아 찬가』에 등장하는 감동적인 장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 P143
비슷한 시기인 1934~1937년, 히틀러 역시 폭력을 이용해 당, 경찰과 군대라는 권력 기관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그도 스탈린처럼권력 재창출 수단을 확보했고, 자신을 돕던 사람들을 죽였다. 죽인 사람 수는 훨씬 적었지만, 히틀러의 숙청은 독일 법률이 지도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를 자신의발아래 둔 스탈린과는 달리, 히틀러는 자신이 선호하는 준군사 조직인 친위대의 발전을 위해 테러를 명령하고, 다양한 독일 경찰 병력에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스탈린은 숙청을 이용해 소련 군대를 위협했지만,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한 나치 당원들을 사살함으로써 독일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숙청의 가장 중요한 표적은 나치 준군사 조직인 돌격대의지도자 에른스트 룀이었다. - P144
부농이란 스탈린 혁명에서, 집단화와 기근에서,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굴라크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농민들이었다. 사회 계층으로서의 부농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이 용어는 그 자체에 정치적 함의가 담긴 분류의 산물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에서 ‘부농을 청산‘하려는 시도는 대량학살로 이어졌지만, 계급이 파괴되기는커녕 오명과 억압을극복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로운 계급을 이루었다. 집단화 기간에 추방당하거나 도망친 수백만 명은 부농으로 간주된 후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고, 이러한 계급 분류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소련 지도부는 혁명 그 자체가 새로운 적을 만든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1937년 2월과 3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 총회에서는 다수의 연사가다음과 같은 논리적 결론을 도출했다. "외국 분자들이 도시의 순수한 프롤레타리아를 더럽히고 있다. 부농은 소련 체제의 "중대한 적"이다. - P148
집단화 과정에서 ‘부농의 저항이 많았던 우크라이나는 살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레플렙스키는 명령 00447호를 확대해, 기근 이후 소련의 영토 보전에 위협적인 존재로 비치던 소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도 대상에 포함시켰다. 우크라이나에서 약 4만530명이 민족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1933년 독일에 식량 원조를 요청했던 우크라이나인들도 체포되었다. 1937년 12월 (이미 두 배로 늘어나 있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할당량이 달성되자, 레플렙스키는 ‘더 많은 할당량을 바랍니다‘라고 보고했다. 1938년 2월, 예조는 이공화국의 총살 할당량에 2만3650명을 추가했다. 종합해보면, 1937년과 1938년 내무인민위원회 위원들은 부농 박멸 작전에서 소련령 우크라이나 주민 7만868명을 총살했다. 수용소행 대비 총살의 비율은 1938년 우크라이나에서 특히 높았다. 1~8월까지 약 3만5563명이 사살되었고, 단 830명만이 수용소로 갔다. - P156
스탈린은 자신의 정책을 대안이 없는 유일한 해답인 듯 내비쳤지만, 그는 지도자들이 향후 계획을 논의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체할 수있게 했던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있었다(그리고 다른 어떤 대체 이념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관한 과학인 만큼, 마르크스주의의 자연은 경제였고 연구 대상은 사회 계급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가장 레닌주의적인 해석에서조차, 인간은 자신의 계급 배경 때문에 혁명에 저항한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에서는 뭔가가달라지고 있었다. 평범한 국가 안보 문제가 마르크스주의자의 언어와 융합해서, 영영 다른 언어로 바뀌어버렸다. 정치재판에서 고발당한 사람들은 외세 때문에 소련을 배신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무리간접적이고 약하게 표현해도, 고발문에 따르면 그들의 죄목에는 계급투쟁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본국을 에워싼 대표적인 제국주의국가들을 돕는 자들로 간주되었다. - P158
1936~1938년의 나치 테러는 어느 정도 이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는데, 개인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처벌하는 대신 정치적으로규정된 사회 집단을 ‘그 존재 자체‘ 때문에 처벌하는 식이었다. 나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집단은 ‘반사회적 집단‘이었다. 그 뜻은 나치의 세계관에 저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때로는 정말로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실체는? 동성애자,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중독자로 의심되는 사람, 또는 일할 의지가 없는 이들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독일 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나치 세계관의 기본 전제들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도 여기에 속했다. - P159
이 시기 소련의 테러는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비할 데 없이 치명적이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는 소련에서 명령 00447호 때문에발생한, 18개월 동안 약 40만 명이 처형당하는 일에 비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1937년과 1938년, 나치 독일에서는 267명이 처형되었지만, 소련에서는 부농 박멸 작전에서만 37만8326명이 처형당했다. 마찬가지로, 인구 규모 차이를 고려하면, 소련 국민이 부농 박멸 작전에 - P160
서 처형당할 확률은 나치 독일에서 독일 국민이 범죄자로 몰려 사형당할 확률의 700배에 달했다.
지도부 숙청과 주요 기관 장악이 끝나자,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1937년과 1938년에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숙청을 실시했다. 그러나부농 박멸 작전은 대공포 시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이것은 계급 전쟁으로 간주되거나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련은 계급으로서의 적을죽이면서, 동시에 민족으로서의 적도 죽이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이 되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인종차별과반유대주의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내부의 적에 대한사살작전을 시작한 곳은 스탈린의 소련이었다. - P161
소수 민족이라면 "무릎을 꿇리고 미친개처럼 쏴 죽여야 한다. 이것은 나치 친위대 장교가 아닌, 스탈린의 대공포 시대에 ‘민족 박멸 작전‘을 실행하던 공산당 지도자의 말이었다. 1937년과 1938년에는 소련인 25만 명이 민족 때문에 총살당했다. 5개년 계획은 소련이 사회주의하에서 민족 문화를 꽃피우게 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1930년대 후반 소련은 그 어느 곳보다 민족적 박해가 심한 곳이었다. 인민전선조차 소련을 관용의 고향으로 묘사했지만, 스탈린은 소련을 구성하는 민족 가운데 다수를 대량 살육하라고 지시했다. 1930년대 후반기에 가장 박해받은 유럽의 소수 민족은 주로 이민 때문에 수가 줄어든) 약 400만 명의 독일계 유대인이 아니라, (주로 처형 때문에 수가 줄어든) 600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계 소련인이었다.‘ 스탈린은 민족 대학살의 선구자였고, 폴란드계는 소련의 소수 민 - P165
족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피해자였다. 부농처럼, 폴란드계 소수 민족도 집단화 실패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그에 대한 근거는1933년 기금 기간에 창안되어, 1937년과 1938년 대공포 시대에 적용되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회 대표인 프세볼로트 발리츠키는 대규모 기아가 그가 "폴란드 군사 조직"이라 부른 간첩 도당의 도발이라고 설명했다. 발리츠키에 의하면 이 ‘폴란드 군사 조직‘은우크라이나 공산당에 침투한 다음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수확 과정을 훼방놓도록 후원했고, 굶어 죽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시체를 반소련 선전용으로 사용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를말하는 ‘우크라이나 군사 조직‘ 역시 똑같이 악랄한 행위를 한, 기근에 대한 책임을 함께 걸머질 도플갱어가 되었다. 이것은 역사에서 영감을 얻은 발명품이었다. 1930년대에는 소련령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그 어디에도 폴란드 군사 조직이란 없었다. - P166
1933년 여름, 발리츠키는 ‘폴란드 군사 조직‘이 소련에 무수한 간첩을 보냈고, 이들이 조국 폴란드에서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공산주의자 흉내를 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는 불법이었고,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당연한 피란처라 생각했다. 폴란드 군사 정보부가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을 활용하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으로 넘어갔던 대부분의 폴란드 좌파는 정치적 망명자일 뿐이었다. 소련 내 폴란드 정치 망명자 체포는 1933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 극작가인 비톨트 반두르스키는 1933년8월에 투옥당했고, 폴란드 군사 조직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강요당했다. 폴란드 공산주의와 폴란드 간첩 간의 이러한 연결 고리가 심문 절차에서 문서화되면서, 더 많은 소련 내 폴란드 공산주의자가 체포되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 예지 소하츠키는 1933년 모스크바 감옥에서 투신 자살하기 전에 자신의 피로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마지막까지 당에 충성하다" - P167
1937년 8월 11일, 예조프는 내무인민위원회가 "폴란드 군사 조직의 간첩 연결망 완전 청산"을 수행하도록 하는 ‘명령 00485호‘를 공표했다. 명령 00485호는 부농 박멸 작전 개시 직후에 공표되었지만, 훨씬 더 과격했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계급으로 정의할 수 있는 적을노린 명령 00447호와는 달리, 00485호는 특정 민족 집단을 국가의적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작전 효과를 위해부농 박멸 명령 또한 범죄자까지 타깃으로 지정했고, 다양한 유형의민족주의자와 정적들까지 포함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명령의 계급 분석은 불분명했다. 집단으로서의 부농은 최소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화 계획에 대한 소련 국가들의 적대감은 다른 문제였다. 이것은 인민에 대한 동지애라는 사회주의의 기본 전제를 폐기하는 행위처럼 보였다. - P171
어떻게 태어나 이제껏 살았느냐가 처형 사유였는데, 폴란드 문화나가톨릭교에 대한 호의는 국가 간 첩보활동에 동참했다는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가 봐도 기껏 경범죄 정도의 잘못 때문에 중형을 받아야 했다. 묵주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수용소 10년형을 받거나, 설탕을 충분히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당하거나! 일상적인 일을 근거로도 보고서를 작성하고, 앨범에 기록하고, 서명하고, 선고하고, 총살해 시체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 P175
레닌그라드 주민과 폴란드계는 당시 이렇게 많은 이가 처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저 이른 아침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죄수호송차, ‘영혼 파괴자‘나 ‘검은 까마귀‘라 불리던 감옥 트럭을 생애 마지막으로) 보게 될까 두려워할 뿐이었다. 어느 폴란드계의 기억에따르면, 사람들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 검은 까마귀에게 물려갈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했다. 산업화와 집단화 때문에 폴란드계는 방대한 나라의 곳곳으로 흩어져야 했다. 이제 그들은 공장, 막사나 자신의 집에서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수많은 사례 중 하나를들어보자면, 모스크바 서쪽 근교에 있는 쿤체보의 소박한 목조 주택에서 숙련공 여럿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폴란드계 기계공과 금속공학자도 있었다. 두 사람은 1938년 1월 18일과 1938년 2월 2일에각각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군체보의 세 번째 희생자인 예브게니야바부시키나는 폴란드계도 아니었다. 그녀는 충성심 강하고 전도유망한 유기 화학자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폴란드 외교관의 세탁부였다는 이유로함께 처형당했다. - P178
폴란드 박멸 작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대규모로 일어났다. 그곳에는 폴란드계 소련인 60만 명 중 약 70퍼센트가 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폴란드 박멸 작전으로 5만5928명이 체포되고, 그중4만7327명이 사살되었다. 1937년과 1938년, 우크라이나에서 다른민족 대비 폴란드계의 체포 확률은 12배에 달했다. 우크라이나를 휩쓸었던 기근이 ‘폴란드 군사 조직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발리츠키는 수년 동안 폴란드인을 박해했고, 그의 옛 부관이자 후임자인 이즈라일 레플렙스키는 발리츠키가 제거된 뒤부터 늘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소용없었다. 그 역시 1938년 4월 체포되어 우크라이나에서의 폴란드 박멸 작전이 끝나기도 전에 처형당하고 말았으니까. (후임자인 A. I. 우스펜스키는 1938년9월 스스로 실종되는 기지를 발휘했지만, 결국 발각당해 처형되었다.) - P181
1937년 당시 일본은 당면한 위협 대상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벌인 일은 부농 박멸 작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의위협은 소련 내 중국계 소수 민족을, 그리고 만주에서 돌아온 소련철도 노동자를 탄압하는 구실도 되었다. 일본의 간첩 행위 역시 약17만 명에 달하는 한국계 소련인 전체를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일을 정당화했다. 이후 한국은 일본에 점령당했고, 따라서 한국계 소련인은 일본과 관련된 일종의 집단 이주 민족 - P189
이 되었다. 중국 서부 지역인 신장에서, 스탈린의 명령을 받는 성차이는 직접 테러를 감행해 수천 명이 죽게 만들었다. 중국 북쪽의 몽골인민공화국은 1924년 창설되었을 때부터 계속 소비에트의 위성 국가였다. 소련 군대는 1937년 동맹인 몽골에 진입했고, 몽골 당국은1937~1938년에 직접 테러를 저질러 2만474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모든 일은 일본을 겨냥한 행위였다. 이러한 살육 가운데 어떤 것도 전략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 지도부는 남부 진공 전략을 채택, 중국을 거쳐 태평양까지진출하기로 했다. 일본은 대공포 시대가 시작된 1937년 7월 중국을침략했고, 이후에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부농 박멸 작전과 이러한 동아시아 민족 박해 작전의 근거는 모두 잘못된 셈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을 두려워했던 것 같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의 국가 목표는 대단히 공격적이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밀고 들어갈 것인가뿐이었다. 일본정부는 불안정한 데다 정책을 너무 빨리 바꾸곤 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대량학살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던 공격에서 소련을 전혀 보호하지 못했다. - P190
대공포는 곧 3차 소비에트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이 1917년을기점으로 정치 체제에 변화를 불러왔고, 집단화가 193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경제 체제를 만들었다면, 1937~1938년의 대공포 시대는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켰다. 스탈린은 심문을 통해서만 적의 정체를밝힐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로 만들었다. 외국 간첩과 국내음모에 관한 그의 판타지는 고문실마다 들렸고, 심문 조서마다 적혔다. 소련 국민으로서 1930년대 후반의 상위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말하려면, 그의 판타지의 등장인물이 되어야 했다. 스탈린의 더 큰 ‘이야기‘를 위해, 소련 국민 개인의 ‘이야기(삶)‘는 종종 끝장나야 했다. - P193
그러나 농민과 노동자 집단을 단순한 숫자로 바꿔버리는 일은 스탈린의 기분을 돋워주었고, 대공포 시대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스탈린의 권력을 굳건히 했다(당연하게도), 1938년 11월, 대규모 작전의중단을 명령하면서, 스탈린은 내무인민위원회 대표를 또다시 교체했다. 라브렌티 베리야가 예조프의 후임자였는데, 예조프는 그 뒤 처형당하고 만다. 수많은 내무인민위원회 최고 간부들도 월권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같은 운명에 처했는데, 사실 이러한 숙청은 스탈린 정책의 핵심이었다. 야고다를 예조프로, 예조프를 베리야로 교체함으로써, 스탈린은 자신이 안보 기관의 정점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로 당을 견제하고 당으로 내무인민위원회를 견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소련의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폭군이 자신의 궁궐에서 정치를 쥐고 흔드는 것으로권력을 증명하는 폭군정치가 되었다. - P193
소련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억압 기구를 이용해 민족 살육 작전을수행한다민족 국가였다. 내무인민위원회가 소수 민족을 죽이고 있던당시, 내무인민위원회 핵심 장교 대부분은 소수 민족이었다. 1937년과 1938년 상당수가 유대계, 라트비아, 폴란드계이거나 독일계였던내무인민위원회 간부들은 히틀러와 나치 친위대가 (당시까지) 시도한모든 행위를 뛰어넘는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학살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위와 목숨을 지키려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들은 국제주의(초민족주의)라는 윤리를 만들었고이는 일부 간부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대공포 시대가계속되면서 그들도 속속 처형당했고, 대부분 러시아계로 교체되었다. 이즈라일 레플렙스키, 레프 라이흐만과 보리스 베르만처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폴란드 박멸 작전을 실행한 유대인 장교도 체포 후 처형당했다. 이것은 큰 흐름의 일부일 뿐이었다. 대공포 시대의대량 살인이 시작되었을 때, 고위 내무인민위원회 장교 약 3분의 1은 유대계였다. - P194
대공포 시대가끝날 무렵, 내무인민위원회에서 과다 비율을 차지한 소수 민족은 스탈린이 그 가운데 하나인 조지아계뿐이었다. 이 3차 혁명은 사실상 반혁명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패를 내포하고 있었다. 15년 남짓 동안 소련은 살아남은 시민들에게 많은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대공포 시대가 정점에 달했을 때 국가 연금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혁명 원칙의 근간을 이루던 일부 본질적 가정은 폐기되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계급투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 재판에서 내려진 혐의처럼 소련으로 이주한 민족이 소련의 배신자가 되었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과거의 경제 체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출신 민족에 따라 외국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 P195
대공포 시대에 소련 지도부는 독일에 살던 유대인의 2배에 달하는 소련 국민을 처형했다. 하지만 소련 지도부를 제외하면, 히틀러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러한 대량 처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전쟁 이전의 독일에서는 누구도 이런 일을 실행에 옮기지않았다. 제국 수정의 밤 이후에야, 유대인은 비로소 대규모로 독일의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나마도 학살이 목적은 아니었고, 당시 히틀러는 유대계 독일인들을 위협해 나라 밖으로 내쫓으려 했다. 이 시기 강제수용소에 들어간 유대인 2만6000명은 대부분 얼마 지나지않아 석방되었다. 1938년 후반에서 1939년까지 10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독일을 떠났다. - P199
또한 히틀러는 독일을 재무장하는 한편 전쟁 없이 최대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 병합은 시민 600만명과 막대한 경화를 제공했다. 뮌헨 회담은 히틀러에게 시민 300만명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을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수산업 대부분을 선사했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국가로서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없애버렸고, 그에 따라 히틀러의 목적이 독일 민족에만 국한된다는 환상은 모조리 사라졌다. 체코 영토는 ‘보호국‘으로 독일 제국에 추가되었고, 슬로바키아는 나치의 감독을 받는 허울뿐인 독립국이 되었다. 3월 21일 독일인들은 폴란드인에게 합의를 강요했지만이번에도 거부당했다. 3월 25일 히틀러는 독일 국방군에게 폴란드 침공 준비를 명했다. - P203
거의 곧바로, 두 체제는 폴란드 파괴에 대한 열망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끌어들여 소련과 싸우겠다는 희망을 포기하자, 폴란드에 대한 나치와 소련의 말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히틀러는 폴란드란 베르사유 조약이 낳은 ‘비현실적인 창조물‘이라 했고, 몰로토프도 그 조약의 ‘추악한 후손‘이라고 규정했다. 공식적으로는,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협약은 단순한 불가침 조약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는 동유럽내 나치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을 정하는 비밀 의정서에도 합의했는데, 이 영향권에는 아직 독립국이었던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 P205
리투아니아, 폴란드와 루마니아가 들어가 있었다. 역설적인 사실은 폴란드가 불가침 조약이라는 명목 아래 독일과 비밀 계약을 맺었다는거짓 주장을 바탕으로, 소련 시민 10만 명 이상을 죽인 사건을 스탈린이 바로 얼마 전에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폴란드 박멸 작전은 독일-폴란드 공격의 대응책으로 설명되었다. 그러고는 이제 소련은 독일과함께 폴란드를 공격한다는 데 합의한 것이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합병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얻은 병력 및 무기를 이용해 폴란드 북쪽,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히틀러가 마침내 자신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 P206
1939년 8월과 9월, 스탈린은 동유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지도까지 보고 있었다. 그는 극동 지역에서 소련의 입지를 개선할 기회를찾아냈다. 이제 스탈린은 서쪽에서는 독일이 폴란드와 함께 자국을침공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련이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경우, 제2전선을 염려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소련은 동맹국 몽골과 함께) 1939년 8월 20일 (몽골과 만주국 사이에 있는 분쟁 국경 지대 내의 (괴뢰 만주국 병력을 포함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1939년 8월 23일, 베를린과의 관계를 회복한 스탈린의 정책은 도쿄를 노린 정책이기도 했다. 소련의 공격이 있고 사흘 뒤에 체결된 독일과 소련 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독일과 일본 간의 방공협정을 무효로 만들었다. 전장에서의 패배 이상으로, 나치-소비에트동맹은 도쿄에 정치적 격변을 일으켰다. 당시의 일본 정권은 붕괴했고, 다음 몇 달 동안 다른 여러 정부도 같은 길을 걸었다. - P206
독일이 일본 대신 소련을 동맹으로 선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 정부는 예상치 못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지도부는 이미 북쪽 대신 남쪽으로, 소비에트 시베리아 대신중국과 태평양 쪽으로 확장한다는 데 동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베를린 간의 연합이 결성되면, 붉은 군대는 병력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최정예 부대를 단순한 자체 방어를 위해 북쪽 만주국에 배치해야 하고, 남쪽으로의 진격은 훨씬 더 어려워진다.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동아시아에 대한 재량권을 주었고, 일본은 히틀러가 새 친구를 빨리 배신하기만 바라게 되었다. 일본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 준비 상황을 감시할 목적으로 리투아니아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영사에는 러시아어에 능통한 첩자, 스기하라 지우네가 임명되었다. - P207
1939년 9월 15일에 붉은 군대가 일본 군대를 물리쳤을 때, 스탈린은 자신이 바라던 결과를 온전히 달성할 수 있었다. 대공포 시대의민족 박멸 작전은 일본, 폴란드, 독일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목적은 이들이 연합해 소련을 포위하는 일을 막는 것이었다. 대공포 시대에 살해된 68만1692명은 이러한 포위 작전의 가능성을 줄이진 못했지만, 외교와 군대는 그 가능성에 영향을 주었다. 9월 15일이 되자 독일은 폴란드군의 전투 능력을 사실상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폴란드 연합의 소련 공격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독일-일본 연합의 소련 공격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스탈린은 독일-폴란드-일본의 소련포위라는 공상을 독일-소련 연합의 폴란드 포위와 그에 따른 일본 고립이라는 현실로 바꿔버렸다. 소련 군대가 일본에 승리한 후 이틀이 - P207
지난 1939년 9월 17일, 붉은 군대는 동쪽에서 폴란드를 습격했다. 붉은 군대와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 중간지대에서 조우해 공동 승리 퍼레이드를 준비했다. 9월 28일,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폴란드에 관한두 번째 협약을 맺었는데, 이번에는 국경과 친선 관계를 다룬 조약이었다. 이렇게 블러드랜드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폴란드의절반을 소련에 내줌으로써, 히틀러는 폴란드 박멸 작전에서 몹시 잔혹하게 자행된 스탈린의 테러가 폴란드 본토에서 재현되게 했다. 스탈린 덕분에 히틀러는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자신의 첫번째 대량 살상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공동 침공이후 21개월 동안, 독일인과 소련인들은 각각 폴란드의 절반을 지배하면서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숫자의 폴란드 민간인들을 죽였다. 두 국가의 살육 담당 기관은 제3의 영토에 집중했다. 스탈린처럼, 히틀러도 자신의 첫 번째 주요 민족 사살 작전의 대상으로 폴란드인을 선택했다. - P208
독일의 공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20분, 폴란드 비엘룬시 한복판에 돌연 폭탄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어떤 사전 경고도 없이 이뤄진 공습이었다. 독일인들은 아무런 군사전략적 의미도 갖고 있지 않았던 그곳을 끔찍한 실험의 장소로 택했다. 현대식 공군력이 정밀 폭격으로 민간인 대부분을 공포에 몸서리치도록 만드는 것,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 물론 가능했다. 교회, 시너고그, 병원, 이 모든 것이 불 속으로 사라졌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탄약과 총 70톤가량의 폭탄이 거의 모든 건물을 파괴했고,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숨진 이들 대다수는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버린 채 피란길에 올랐고, 도시를관리할 독일 행정관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의시체가 더 많았다. 서부 폴란드의 수많은 마을과 도시도 같은 운명을 - P211
맞았다. 무려 158개나 되는 삶의 근거지가 폭격에 희생되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던 사람들은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들을 보며 "에이, 설마 우리 편 비행기겠지"라는 말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1939년 9월 10일은 유럽의주요 도시 중 하나가 처음으로 적국 공군에게 아주 체계적이고 정밀한 폭격을 당한 날로 기록되었다. 이날 바르샤바 습격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는 17세밖에 안 된 독일 소년도 있었다. 그달 중순까지 폴란드 정규군은 대부분 무릎을 꿇었고, 수도만 겨우 버티고 있을 따름이었다. 9월 25일, 히틀러는 바르샤바가 항복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그날 약 560톤의 폭탄과 72톤의 소이탄이 퍼부어졌다. 정식 전쟁으로 인정받을 수 없던 이 전쟁의 초반,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이자 유럽의 역사적 수도 하나가 폭격에 무너져 내렸고 도합 2만5000명의시민(그리고 6000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9월 내내 독일 국방군을 피해 달아나던 피란민들의 긴 행렬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독일전투기 조종사들은 이들 위로 유유히 저공비행을 하면서 기관총을 쏴대는 일에 재미가 들려 있었다. - P212
10월 4일,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은 새로운 공동 국경지대를 정한 추가 협약에 합의했다. 폴란드라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며칠 후 독일은 남은 폴란드 지역을 무력으로 합병하고, 나머지 지역은 동방 총독부를 세워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았다. 이곳은 폴란드인과 유대인이라는 불청객들을 집어넣는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이 될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동부 어딘가에 있는 "자연보호구역" 같은 곳에따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총독부의 수장이된 히틀러의 전 변호사 한스 프랑크가 분명하게 밝혔듯 식민지 주민들은 1939년 10월 말에 공표된 두 가지 질서에 따라야 했는데, 하나는 앞으로 모든 치안은 독일 경찰이 책임진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떤 행동이든 독일과 독일인의 이해에 반하는 행동을 한 폴란드인은 독일 경찰이 그를 즉결처분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프랑크는 폴란드인들이 이내 "폴란드에 미래 따윈 없음"을 깨닫고 독일인들의 지도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 P227
보여주로기의 관점에서도 골칫덩어리였다" 폴란드의 모든 것은 그 땅에서 사라지고, "게르만족의 지배"로 대체되어야 했다. 히틀러가 쓴 대로, 독일은 "반드시 이 용납할 수 없는인종적 성분들을 봉쇄해 다시는 그들의 피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거나 아니면 지체 없이 이를 없애 깨끗한 땅을 그 동지들에게 넘겨줘야 한다." 1938년 10월 초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새로운 책무를 맡겼다. 이미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의 수장이었던 힘러는 이제 "게르만족의 지배를 확고히 할 제국 정치위원"으로서 인종 문제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가 맡은 임무는 바로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지역의 토착민들을 쓸어버린 뒤 그 자리를 독일인으로 채워넣는 것이었다. 힘러는 이 기획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만만치않은 일이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인의 땅이었고, 폴란드에는 소수민족이라고 부를 만큼의 독일인도 없었다. - P233
이런 식으로 스타로빌스크의 폴란드인 수감자 3739 명이 살해당했다. 유제프 찹스키의 지인과 친구들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찹스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을 보였던 식물학자, 임신한 아내에게 자신의 두려운기색을 숨기려 애쓰던 경제학자, 자신이 드나드는 카페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일로 이름난 바르샤바의 어떤 의사, 희곡과 소설을 외워사람들에게 암송해주던 한 중위, 유럽연합의 가능성에 눈을 반짝이며 열변을 토하던 변호사, 이외에도 모든 기술자, 교사, 시인, 사회복지 - P245
사, 기자, 의사, 군인들이 있었다. 전부 이곳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오직 찹스키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그는 다른 수용소에 있던 몇몇 사람과 함께 또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마침내 살아남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1939년에서 1940년에 소련이 폴란드인 수용소를 설치하는 코젤스크의 옵틴수도원을 무대로 하는 장면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꼽히는 이 결정적 장면은 젊은 성자와 수도원의 대심문관이 신이라는 존재 없이 도덕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를 두고 나눈 이야기다. 만약 신이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1940년, 소설 속의 이대화가 실제로 바로 그 장소에서 이뤄졌다. 수도원을 책임지던 수도승 몇몇은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심문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이들은 바로 저 질문에 대한 소련의 대답을 몸소 보여주는 자들이었다. 소련의 대답은 간단했다. ‘신이 사라진 이곳에서만이 인간의 진짜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 반대로 여러 폴란드 장교는 비록 의식하진않았지만 이와 다른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어떤 짓도 허용되는 이곳에서는 신이야말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안식처다. 그들은 수용소를예배당으로 여겼으며, 또 그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 P246
말로 앞으로 있을 스탈린주의의 엄청난 문명적 탈바꿈의 징조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수도원 대심문관의 자리를 현실에서 이어받은 코셀스크 심문관들의 우두머리는 이를 아주 섬세하게 포착했는데, 그의 표현처럼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철학의 문제였다. 결국 소련은 자신들의 것을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동부 폴란드에 소련이 쏟아부은 비용과 자행한 행동들에 대한 비난 역시 아주 간단한 대꾸로무마시킬 수 있었다. ‘지금 그 지역이 어느 나라 땅이지?‘ 수용소에 있던 폴란드인들은 소련 문명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수십 년 뒤 당시 그들의 말쑥하고 깔끔한 모습과 자부심을 떠올렸던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농부들의 기억에서처럼, 그들은 여느소련인들처럼 살지 않았다. 폴란드인들은 적어도 이토록 갑작스레 또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소련인들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그들이 다른소련인들과 마찬가지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죽음뿐이었다. 여러 폴란드 장교는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군인들보다 더 강하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이미 무기를 빼앗긴 터였으며, 보통 두 사람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다른 한 사람에게 사살당해 누구도 그 시신을찾을 수 없을 법한 장소에 묻혀 있었다. 이로써 그들은 비로소 소련역사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소련인과 함께할 수 있는 듯 보였다. 영원한 침묵으로 말이다. - P248
수감자들은 학살 장소로 끌려가면서 트럭 밖으로 노트나 일기장을 던졌는데,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주워 가족들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이것은 일종의 폴란드식풍습이었던 터라 그들이 지나간 길에서는 쉽사리 수많은 노트를 찾아볼 수 있었다. 소련의 세 수용소에 있던 죄수들과 달리 이 노트의주인들은 자신들이 곧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코젤스크, 오스타시코프, 스타로빌스크에 갇혀 있던 이들도 수용소를 떠날 때 버스 밖으로 노트를 던지기도 했으나 그곳에는 소련이 우리를어느 장소로 보내는지 모르겠다" 등의 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련과 독일의 차이였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동쪽의 소련은 몇몇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전체적으로 비밀스러운일 처리를 바랐다. 이와 달리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의 독일은 신중한 일 처리를 원한 적도 없었을뿐더러, 심지어 그러려던 때조차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했다. - P264
AB 악치온의 희생자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을 스스로, 혹은 가족들이 담담히 받아들이도록 하고자 애썼다. 죽음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저마다 죽음을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에치스와 하브로프스키는 "폴란드땅을 적신 피는 폴란드를 더 강하게 하리라. 자유롭고 위대한 폴란드의 복수를 키워내리라"라고 적었다. 자신을 심문하던 자들을 비난했던 리샤르트 슈미트는 이와 달리 어떤 앙갚음도 없기를 바랐다. "아이들에게 복수하라 말하지 마시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를 뿐이니 마리안 무신스키는 그저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모두 사랑해." - P265
AB 악치온으로 죽어간 이들 중 몇몇은 앞서 소련에 포로로 끌려간가족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소련과 독일이 대 폴란드 엘리트 정책을 서로 비슷하게 맞추거나 조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상이된 이들은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소련은 계급투쟁 혹은 계급전쟁이라는 구실을 대 자신들의 체제에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했고, 독일 역시 열등한 인종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긴 했으나 어찌됐든 새로 얻은땅을 안정적으로 지키고자 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양국의 정책은매우 유사한 모습을 띠었다. 차이라면 그에 동반되는 강제이주 그리고 대량학살이 더 많고 적은의 정도 차이뿐이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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