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환영했는데, 이는 그것이 미군의 무장 속도를 늦추고 또 미국이전투를 벌이더라도 유럽보다는 태평양에서 벌이게 만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과 태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후에도, 히틀러는 일본이 소련보다는 미국과 싸우기를 원했다. 그는1942년 초까지 소비에트 정복을 완수하고 그 뒤 태평양에서 그동안일본과의 전투로 약해진 미국을 상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 역시 줄곧 일본이 남쪽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쳐오고 있었다. 그가 품은 생각의 핵심은 히틀러와 똑같았다. 즉 ‘소련 땅은 내 것이니, 일본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뜨려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일본을 동아시아와 태평양에 묶어두길 원했고, 도쿄는 바로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 P381

당초 독일의 침공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소련의 주요 도시들을차례로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의 식량 및 캅카스 지역의 석유를 확보하는 전격적 승리를 거두었다면, 일본의 진주만 폭격 소식은 분명베를린에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상에서라면, 진주만공격은 독일이 새로 얻은 식민지에서 승자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동안 일본이 미국의 시선을 끌어준다는 것을 뜻했다. 독일은 자신을 식량 및 자원을 자급자족하면서 영국의 해상 봉쇄 및 미국의 수륙 양동 작전에 대응할 수 있는 거대한 대륙 제국으로 만들 ‘동유럽 종합계획, 혹은 그것을 다소간 수정한 버전을 실행에 옮길 것이었다. 물론이것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그림이지만, 독일 군대가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었던 순간만큼은 그래도 아주 약간의 현실성이있었다. - P382

1941년 12월, 히틀러는 자신이 처한 최악의 전략적 난국에 괴이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 스스로는 이미 장군들에게 1941년 말까지 "유럽 대륙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앞으로 다가올 영국 및 미국과의 세계적 수준의 분쟁에 대비하라고 이야기해둔 상태였다. 그러나그렇게 되기는커녕 독일은 두 개의 전선에서 그것도 3개의 패권국과맞서 싸워야 한다는 전략적으로 악몽과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히틀러는 특유의 뻔뻔함과 정치적 민첩성을 발휘하여 애초의 전쟁계획에서 심각하게 틀어져버린 상황을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서와 언어에 맞게 각색해냈다. 비현실적인 기획, 서투른 계산, 인종주의적 오만함, 어리석은 벼랑 끝 전술 말고 대체 무엇이 독일을 영국, 미국, 소련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도록 만들었는가? 히틀러는 이 질문에 대한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유대인들의 음모‘였다 - P383

만약 히틀러가 자신이 했던 예언을 실현시키고자 했다면, 학살은 이 시점에서 그가 가진 단 하나뿐인 선택지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해양 제국이 아닌 대륙 제국이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보내버릴 불모지를 결국 손에 넣지 못했다. 마지막 해결책은 이미 여러 차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해왔고, 힘의 방식, 곧 대량학살은 강제이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학살은 승리의 대체물조차 될 수 없었다. 전격적 승리가 애초 계획과 달리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유대인들은1941년 7월 말부터 이미 학살당해오던 터였다. 그러던 그들은 독일에맞서는 연합국들의 힘이 좀더 강력해진 1941년 12월부터는 모두 싹쓸어버려야 할 대상이 되었다. 히틀러는 여전히 좀더 깊은 감정적 요소들을 건드리고자 했고, 한층 더 악의에 찬 목표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던 독일 지도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길을 택했다. - P386

세르비아는 아마도 이를 특히나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독일이 유럽 동남부에서 벌인 전쟁은 소련 땅에서 벌인 전쟁보다 약간 앞선 시점에서부터 치러졌고, 이것은 아주 뚜렷한 선례들을 남겼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인 1941년 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침공했다. 그 주된 목적은 자신의 영양가 없는 동맹인 이탈리아를 지원해 그들이 발칸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비록 독일이 순식간에 유고슬라비아군을 제압하고 크로아티아에 꼭두각시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이 이탈리아와 함께 점령한 세르비아 지역의 저항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 중 일부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독일군 사령관은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로서 ‘유대인 및 집시들만을 학살할 것이며,
그 비율은 독일인 1명당 유대인 및 집시 100명이다‘라고 명령했다. 이같은 방식으로, 세르비아에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 남성은 힘러가 유대인들을 "빨치산으로서" 죽여 없애라는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줄곧 사살당하고 있었다.  - P389

마지막 해결책의 다섯 번째이자 최종판은 말 그대로 대량학살이었다. 나치의 언어에서 재정착이라는 말은 이제 다른 말의 완곡한 표현이 되었다. 수년 동안 독일의 지도부는 유대인들을 특정 지역에 재정착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옮겨간 어느 곳에서든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해야만 할 것이고, 어쩌면 완전히 씨가 말라 더는 종족 번식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앞서처럼 그들을 죽여 없앤다는 것은 없었다. 따라서 재정착은 비록 1940년 그리고 1941년에 들어선 유대인 정책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더라도 어찌됐든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후 이른바 재정착 혹은 동부로의 재정착은 곧 대량학살을 뜻하게 된다. 아마도 재정착이라는 완곡어법은 기존 나치 유대인 정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것을 통해 나치가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을 못 본 체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해준 듯 보인다. 그 사실은 바로 독일의 정책은 변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기에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는 독일인들로 하여금 군사적 재앙이 자신들의 유대인 정책을 좌우해버린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위안할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 P390

그런 점에서 독일과 루마니아의 정책이 정반대로 갈라선 1942년은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독일은 전쟁의 패색이 짙어졌기에 모든 유대인을 죽이려들 것이었고, 루마니아는 똑같은 이유에서 그해말부터 약간의 유대인들을 살려두고자 할 것이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는 이제 미국 및 영국과 협상의 여지를 열어둘 것인 반면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그들의 죄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완전히 닫아버렸다. - P393

감시하던 독일인들은 이들에게 앞으로 그곳에서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숨기려들기는커녕 구덩이를 잘 파라. 내일 네놈들 아내와 엄마가 묻힐 거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인 8월21일, 우츠크에 있던 여자와 아이들이 그곳으로 끌려왔다. 즐겁게 웃으면서 먹고 마시던 독일인들은 여인들에게 "나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라고 외도록 했다. 그러고는 한 번에 다섯명씩 옷을 벗고 구덩이 앞에 나체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다음차례인 여인들은 앞서 사망한 시체들 위에 나체로 누운 채 총을 맞았다. 같은 날, 유대인 남성들은 우츠크성 뜰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P399

한 여인은 아내로서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남겨남편이 자신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그들 아이의 운명을 알 수 있기를 바랐다. 두 소녀는 함께 "너무나 살고 싶어. 하지만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 복수해줘. 복수해줘"라며 삶에 대한 갈구를 남겼다. 또 다른젊은 여인은 조금 더 체념한 듯 "나는 내가 스무 살에 죽는다는 것을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상태다"라고 적었다.
누군가의 부모는 자신들을 위해 아이들이 카디시를 올려주기를, 또유대교의 관습을 잘 지키기를 부탁했다.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전한 어느 딸의 메시지는 이랬다. "사랑하는 엄마! 이제 난 더 못 살거예요. 저들은 우리를 게토 밖에서 이곳으로 끌고 왔고, 우리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 해요. 엄마가 우리와 이곳에 함께 있지 못하다는사실이 참 안타깝네요. 한편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지만요. 사랑해요, 엄마. 그동안 제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해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끝없는 입맞춤을 보내요." - P400

민스크는 나치의 파괴적 본성을 가장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었던곳이다. 독일 공군은 민스크가 항복을 선언한 1941년 6월 24일까지줄기차게 폭격을 퍼부었고, 심지어 독일 국방군은 그로 인한 불길이잦아들 때까지 도시 입성을 미뤄야 할 정도였다. 독일인들은 7월 말까지 교육 수준이 높은 현지인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유대인들을 도시 북쪽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민스크에는 이제 게토, 강제수용소, 포로수용소, 대량학살을 위한 구역들이 생길 것이었다. 그곳은 결국승리의 대체물로, 즉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을 시연하는 일종의 무시무시한 죽음의 극장으로 바뀐다. - P404

041941년 가을 민스크. 당시 그곳의 독일인들은 모스크바가 여전히굳게 버티고 있는 와중에도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기념일인 11월 7일, 독일인은 단순한 대규모 사살보다 뭔가 더 극적인 것을 내놓기로 했다. 그날 아침, 그들은먼저 게토에 있던 유대인 수천 명을 체포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이 마치 소비에트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런 것인 양,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오게끔 해둔 상태였다. 그러고는 체포한 이들을 길게 늘어서게 한 뒤, 그들 손에 소련 깃발을 쥐여주며 소련의 혁명가를 부르라고 강요했다. 유대인들은자신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을 수밖에없었다. 이들 6624명의 유대인은 트럭에 실려 민스크 너머 투친카 근 - P404

처에 있던 과거 소련 내무인민위원회가 창고로 쓰던 장소로 끌려갔다. 그날 저녁, 고된 강제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인 남성들은 자신들의 가족 모두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그곳에는 우리 가족 8명, 아내, 아이셋, 나이 드신 어머니, 내 형제들, 가운데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테러 그 자체는 생소하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과거, 1937년에서1938년에도 사람들은 내무인민위원회의 검은 차량에 실려 민스크에서 투카로 끌려갔다. 하지만 스탈린의 대숙청 작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그때도, 내무인민위원회는 언제나 사람들을 하나둘씩 어두운 밤을 틈타 끌고 가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 P405

이와 달리 독일은 많은 대중에게 알리고자, 여러 의미를 담아, 또 선전 영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대낮에 수많은 사람을 보란 듯이 끌고 갔다. 이렇게 연출된 가두 행진은 곧 ‘공산주의자는 유대인이며 유대인이 곧 공산주의자‘라는 나치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치의 사고방식,
‘유대인 제거는 중앙 집단군의 후방 지역 안정화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도 일종의 승리‘라는 생각에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공허한 승리의 표현은 좀더 명백한 자신들의 패배를 숨기기 위해 고안한거짓말로 보일 따름이었다. 중앙 집단군은 1941년 11월 7일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당연히 이를 달성하지못한 상태였다. - P405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처럼, 스탈린도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히틀러는 연합국이 유대인을 위해 싸우고있다고 말했고, 따라서 (국민이 이 주장에 동조할까 우려하던 연합국은자신들이 억압받는 국가들(하지만 특히 유대인은 아닌)을 해방시키고자 싸우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야 했다. 히틀러의 선전에 대한 스탈린의 답은 이후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의 소련 역사를 빚어냈는데, 그 대답은 바로 독일 학살 정책의 모든 희생자는 "소련 국민이지만 이 소련 국가 구성원의 최대 다수는 바로 러시아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선전 부장 중 한 명인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는 1942년 1월 "러시아인민, 모두 평등한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인민 대중 가운데 첫째, 이들야말로 독일 침략자들과의 투쟁에서 오는 짐의 대부분을 짊어지고 있다"는 선언을 통해 이를 명백히 밝혔다. 셰르바코프가저 말을 내뱉기까지 독일인들은 이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의동쪽에서 벨라루스 유대인 약 19만 명을 비롯해 100만 명에 이르는유대인을 학살하고 있었다. - P408

1942년 하반기, 독일의 대 빨치산 작전은 유대인 대량학살과 따로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히틀러는 1942년 8월 18일 벨라루스 내 빨치산들을 그해 말까지 "완전히 몰살시킬 것"을 명령했다. 물론 그 기한까지 유대인 역시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은 이미 잘알려진 사실이었다. 총살의 완곡한 표현인 ‘특별 조치"라는 말은 유대인과 벨라루스 시민들에 대한 보고서 양쪽 모두에서 등장한다. 둘 - P430

의 시행에 대한 기본 논리는 순환적이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눈에 들어오는 부분들이 있다. 이를 한번 살펴보자. 먼저 유대인들은1941년부터 애초에 "빨치산으로서 죽여야 할 대상이었는데, 이때만하더라도 아직 제대로 된 빨치산들의 위협은 없던 시점이었다. 그 뒤1942년 일단 그 같은 빨치산 활동이 시작되자, 이들과 관련된 민간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몰살시켜야 할 대상이 되었다. 빨치산과 유대인의 동일시는 오직 두 집단 모두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끝난다는 하향 궤적의 수사를 통해 끊임없이 강조되었다. - P431

1942년 가을에서 1943년 초까지, 독일은 게토 및 빨치산과 관련 있다고 판단된 모든 마을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1942년 11월에 있었던 늪지열 작전 당시 디를레방거 부대는 그때까지 바라나비치 게토에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 8350명을죽이고는 389명의 "노상강도"와 1274명의 "노상강도 용의자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러한 학살을 이끈 이는 바로 동방자치정부 나치 친위대 상급 장교 및 경찰 지휘부를 맡고 있던 프리드리히 예켈른으로, 앞서 우크라이나 카네츠포딜스키에서 있었던 대량 사실과 라트비아리가 게토에서의 이른바 정리 작업을 조직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1943년 2월의 이른바 2월 작전은 슬루츠크 게토에 대한 청소 작업, 다시 말해 유대인 약 3300명에 대한 사살과 함께 시작되었다. 슬루츠크 서남부 지역에서 독일인들은 9000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12E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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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점령한 땅에서 폴란드의 교육받은 계층을 이미 싹쓸이했다고 착각한 독일과 달리, 소련은 이를 실제로 상당 부분 달성하고 있었다. 독일 동방 총독부 관할 구역에서는 폴란드의 저항세력들이 점점 세를 불리고 있었지만, 소련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소련의치밀한 조직망에 의해 순식간에 분쇄되었으며 활동가들은 체포되거나, 추방, 경우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소련의 지배에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도전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다. 폴란드는 약 500만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터전이었고, 그들 대다수는 이제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들이 소련이라는 새로운 지배 체제에 만족해야 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양차 대전 사이 폴란드 내에서 불법 조직으로 낙인찍혀 활동하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방법에도가 튼 이들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불법이라고 낙인찍었던 폴란드는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목표는 자연스레 소련이라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 P268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조직들은 이제 소련이 설치한 각종 제도에 맞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주도적인 민족주의자 몇몇은 양차 대전 사이에 독일 군사정보부를 비롯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나치정보기관인 SS 보안방첩부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스탈린이 짐작했던 것처럼 그들 일부는 여전히 베를린을 위해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새롭게 병합된 폴란드 동부에서 이뤄진 네 번째 강제이주의 주요대상이 우크라이나인들이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들에 앞선 강제이주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주로 폴란드인들을 세 번째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뤄졌었다. 네 번째 강제이주는 1940년 5월에 이뤄졌고, 그 대부분이 우크라이나인이었던 1만1328명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특별 정착지로 보내졌다. 다음 달 19일의 마지막 강제이주는 2만2353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들 대다수는 폴란드인이었다. - P269

진지한 인물이었던 그는 이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폴란드는 이제 독일에 맞서 싸울 두 번째 기회를 얻을 것이고 참스키의 임무는 사람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설 장교들을 찾는 것이었다. 모스크바로의 여정 동안 그의 마음속은 먼저 신에게 그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십자가에 못 박힌 폴란드를 지켜달라는, 율리우시 스와바츠키의 자학적인 폴란드 낭만주의 시구들로 가득 찼다. 그러고는 너무나 순수한 동료 폴란드인들에게 말을 건네며, 그는 치프리안 노르비트가 망명길에 고국에 대한 바람을 담아적은 가장 유명한 시구를 떠올렸다. "나는 바라네. 옳은 것에는 예라고 그른 것에는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을 흔들림 없는 등불을." 민족과 국적이 뒤섞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자 점잖고 지적인 인물이었던 찹스키는 자신과 조국이 처한 상황을 낭만적 이상주의의 언어로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위안을 얻고 있었다. - P271

그 순간 두 사람이 느꼈던 슬픔, 즉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점령했던 시간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동맹국으로서 독일과 소련은1939년 9월에서 1941년 6월 사이 추정상 20만 명의 폴란드인을 살해했고, 약 100만 명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냈다. 폴란드인들은 앞으로 몇 달 또 몇 년 내에 수만 명이 죽음을 맞이할 소련 강제수용소와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 있던 폴란드 유대인들은 게토에 갇힌 채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를 운명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에 앞서 이미 수만 명의 유대인이 배고픔과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터였다. - P273

이것은 그야말로 근대성에 대한 공격이자, 특정 지역과 사회에 자리하던 이른바 계몽의 화신에 대한 공격에 다름 아니었다. 동유럽에서특정 사회가 갖고 있는 자부심은 바로 지식인 계급을 뜻하는 "인텔리겐차"에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특히 조국이 고난에 처했거나 타인의 손에 떨어졌을 때 그런 조국을 이끌어가는 자들로 여겼다. 아울러 저술, 연설,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모국의 문화를 잘 지키는 것 또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 여기던 자들이었다. 독일어에도 이와 똑같은 단어가 똑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기에 히틀러가명확하게 내린 명령이 "폴란드 인텔리겐차의 절멸"이었던 것이다. 앞서 소련 코젤스크 심문관들의 수장은 "서로 다른 두 철학을 이야기했고, AB 악치온이 펼쳐질 당시 어느 독일 심문관은 곧 사형당할 노인에게 "폴란드인들만의 사고방식을 보이라고 명령했다. 그 대상들은바로 폴란드 문명의 화신이자, 그것만의 특별한 사고방식을 나타낸다고 여겨진 지식인 계층이었다. "
두 점령국의 손에 자행된 대량학살, 그것은 바로 폴란드 인텔리겐차가 자신들의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비극의 증거였다. - P274

1941년 6월 22일은 유럽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날 중 하나다. 이날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개시된 독일의소련 침공은 단순한 기습 공격, 독소 동맹관계의 변화, 전쟁의 새로운국면 따위를 뛰어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재앙의 시작점이었다. 독일 국방군(그리고 그 동맹군)과붉은 군대의 교전은 1000만이 넘는 군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물론여기에 더해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 역시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비행 중에 폭격으로, 또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목숨을 잃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독일은 이 기간에 약 1000만명 이상을 계획적으로 살해했는데, 여기에는 500만 명을 웃도는 유대인과 300만 명이 넘는 전쟁포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 P277

1940년 말에서 1941년 초, 소련과 나치 독일은 유럽 대륙 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대 강대국이었지만, 좀더 넓은 차원에서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확실히 그때까지 두 국가는 유럽의 판을새롭게 싸오고 있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미 전 세계의 판을 짜오던 세력이었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양쪽 다 자신들의 동맹에 저항하던 대영제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단기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대영제국과 그들의 해군력이 만들어놓은 세계 체제는 나치든 소련이든 당장에 뒤엎을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길을 택하는 대신 다른 길, 즉 비록대영제국과 영국 해군이 위용을 떨치고 있지만 일단은 자신들 눈 - P282

앞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혁명 과업을 완수하며, 제국을 만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서로 동맹이든 아니면 적이든, 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나치 지도부 앞에는 강력한 영국의 존재라는 현실이 던지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바로 현대 세계에서 거대한 대륙 제국이 세계 시장으로의 안정된 연결 통로 없이,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 없이, 어떻게 번영을 누리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해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스탈린과 히틀러가 내놓은 기본 답안은똑같았다. 즉 그런 국가는 반드시 넓은 땅을 보유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일궈낼 수 있어야 하며, 체제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내부적 산업화 혹은 나치의 식민지 토지개혁과 같은 이른바 자신들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시민들을 보유해야만 한다.  - P283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풍부한 식량, 원자재, 광물자원으로뒷받침되는 거대 규모의 제국주의적 경제 자립국가를 지향했다. 아울러 스탈린의 이름이 철을 의미하는 스틸Steel에서 따온 것이라는점, 그리고 히틀러 또한 철 생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현대에 특정 자원이 갖는 중요한 의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 농업을 자신들의 혁명 완수를 위한 핵심 요소로 파악했다. 두 사람 눈에, 자신들의 체제는 식량 생산을 통해 나머지 세계로부터 좌우되지 않는 경제적 자립을 일궈낼 것이며,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것이었다. - P283

우크라이나의 식량은 소련의 완전무결성을 지키고자 했던 스탈린의 계획에서만큼이나 나치의 동부 제국 계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것이었다.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요새지대는 곧 히틀러의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였다. 독일군 작전 참모진은 일련의 연구를 통해1940년 8월, 우크라이나가 "농업적으로나 공업적으로 소련에서 가장가치 있는 지역"이라고 결론 내렸다. 1941년 1월 민간 계획을 책임지고 있던 헤르베르트 바케는 히틀러에게 "우크라이나 점령은 우리를모든 경제적 걱정거리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히틀러가 원한 것은 "이제 그 누구도 지난처럼 우리를 배고픔에 허덕이게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복은 독일을 영국의 해상 봉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고, 그곳에대한 식민화는 독일을 미국과 같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만들어줄것이었다. - P289

독일의 기획자들이 파악했듯이, 집단농장이란 수백만의 사람을굶겨 죽이는 것이었고, 따라서 다시금 써먹어야 할 방식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이번에는 수백만이 아닌 수천만 명을 굶겨 죽일 작정이었다. 과거 소련의 집단화는 초기에는 비효율성으로 인한 의도치 않은결과에 따라, 그리고 비현실적인 식량 생산 목표 때문에, 그다음에는1932년 말과 1933년 초의 의도된 악의적 착취의 결과로 우크라이나에 기아를 몰고 왔다. 이와 달리 히틀러의 집단화는 사전에 짜놓은아사 계획으로, 그 대상은 바로 달갑지 않은 소련 주민들이었다. 독일의 기획자들은 이미 독일의 수중에 떨어진 유럽 지역을 다룰 때 약2500만 명을 먹여 살릴 만큼의 식량 수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소련의 농촌 인구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약 2500만명 정도로 증가했다고 파악했다. 해결책은 너무나 단순한 것, 즉 전자가 살기 위해 후자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계산한 바에따르면,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식량은 독일인들을 먹여 살리기에 딱 - P290

적당한 수준이지만 그 외의 동쪽 인민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모자랐다. 그런 점에서 이들 동쪽 주민은 정치적 통제와 경제적 균형을 위한수단으로 치부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1941년 5월 23일까지 공들여 만들어낸 굶주림 계획, 소련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기간 및 그 후 정복지의 소련시민들을, 특히 대도시 지역의 시민들을 굶김으로써 독일군과 독일(및 서유럽) 민간인들을 먹여 살린다는 계획이었다. 이제 우크라이나지역의 식량은 러시아와 나머지 소련 지역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처럼 북쪽으로 운송되는 것이 아니라, 독일과 나머지 유럽 지역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서쪽으로 운송될 것이었다. 독일이 보기에, 우크라이나(그리고 러시아 남부 지역)는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이 생산되는 "식량 과잉 지역"이었고,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이와 반대로 "식량결핍 지역"이었다.  - P291

기아, 그리고 식민화는 토의되고, 합의되고, 고안되고, 할당되고, 양해된 독일의 정책이었다. 굶주림 계획의 기본 틀은 1941년 3월까지수립되었다. 이에 관한 일련의 "경제 정책 세부 지침들은 5월에 나왔다. 다음 달인 6월, 비문 등을 삭제한, 흔히 "녹색 서류철‘로 알려진지침서 1000부가 독일군 장교들 사이에 나돌았다. 침공 직전 힘러와괴링은 어땠을까? 힘러는 장기적 관점에서 동유럽 종합 계획의 인종 - P292

적 식민지 부분을, 괴링은 단기적 관점에서 굶주림 계획의 기아 및 파괴라는 전후 기획의 중요한 부분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독일의 의도는 동부 유럽을 토착 인구 말살을 전제로 하는 농업 식민지로 탈바꿈시킬 파괴적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스탈린이 했던 모든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셈이었다. 일국사회주의는 독일 인종을 위한 사회주의, 즉 국가사회주의로대체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계획이었다. - P293

잔혹하다는 것은 효율적이라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그리고 독일의 계획은 현실로 옮기기에는 너무나 악랄한 것이었다. 독일 국방군은 굶주림 계획을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윤리나 법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일군은 히틀러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전쟁 시 민간인들에 관련된 법이나 규칙 등을 따라야 할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였고,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단 한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침공 첫날부터 과거 폴란드에서 했던 것 이상을 보여주었다. 침공 이튿날, 독일군은 민간인들을 전장으로 끌고 와 인간 방패로 쓰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련군은 잡는 즉시 사살해야 할 빨치산으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항복을 시도하는 이들 역시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붉은 군대에서는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제복 입은 여군들은 단지 여성이라는이유로 먼저 살해당했다. 대규모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기아 유발 정책은 현실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독일이 처한 문제였다. 더 많은 땅을 공략하는 것이 오히려 식량 재분배문제 처리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 P298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일에 늦어도 석 달 안에 "전격적 승리"를 따내고자 빠르고 과감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가 연이어 후퇴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개시된 지 2주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독일은 이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동부 전역은 물론 대부분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부를 손에 넣은 상태였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1941년 7월3일의 일기에서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믿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8월 말까지 독일은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또 다른 지역일부, 남아 있던 벨라루스 지역을 추가로 병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전쟁의 속도는 애초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으며, 핵심 목표들은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소련 지도부는 여전히 모스크바에 남아있었다. 어느 독일 군단장이 1941년 9월 5일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적었듯이, "전격전의 승리도, 러시아 군대의 괴멸도, 소련의 붕괴도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 P301

1939년11월 스탈린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에 따라 자신의 영향권 아래 있는 핀란드를 공격함으로써 핀란드인에 대한 적개심을 만천하에드러냈다. ‘겨울 전쟁‘이라 불리는 이 기간에 핀란드인들은 붉은 군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그들의 명성을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1940년 3월, 핀란드 땅의 10분의 1에 해당되는 영토를 스탈린에게 넘겨주어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일종의 완충지대로 만드는 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핀란드인들은잃어버린 땅을 되찾고자 또 자신들이 ‘연속 전쟁‘이라 부르게 될 전쟁을 통해 소련에 복수하고자 했고, 1941년 6월 히틀러 곁에는 이 핀란드 동맹군이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손에 넣을 생각도, 그곳을 핀란드인들에게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 그가 바랐던 것은레닌그라드를 아예 지도상에서 통째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레닌그라드에 사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도시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 P308

만들어버려야 한다. 그 뒤에야 비로소 그 지역을 핀란드인에게 넘겨줄수 있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1941년 9월, 북부 집단군이 레닌그라드 남부의 도시들을 포위·포격하는 군사 작전에 돌입함에 따라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를 북쪽에서부터 봉쇄해 들어갔다. 비록 독일군 지휘관들이 소련 도시들에 대한 히틀러의 극단적인 계획들을 낱낱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레닌그라드를 말려 죽여야 한다는 데는 동감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군 병참감 에두아르트 바그너가 아내에게 적은 편지를 살펴보자. 그는 이 군사 행동으로 인해 총 350만 명에 달하는 레닌그라드 주민은이제 스스로의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 P309

동쪽 땅에 설치된 수용소의 구조는 슬라브족이든 아시아인이든아니면 유대인이든 독일이 이들의 생명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를그대로 드러냈고, 바로 그것이 그 같은 대규모 기아를 감히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전쟁 기간에 붉은 군대 포로들이 갇혀 있었던 독일 포로수용소의 사망률은 575퍼센트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직후 8개월 동안의 사망률은 그보다 훨씬 더 높았던 게 틀림없다. 반면 독일이 서방 연합군 포로들을 가둬두었던 포로수용소의 사망률은 5퍼센트에 못 미쳤다. 1941년 가을 어느 하루 동안 사망한 소련군포로들의 숫자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목숨을 잃은 영국군과미군 전쟁포로 전체 숫자와 맞먹었다. - P325

그러나 이 같은 잔혹함은 소련의 사기를 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소련의 의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정치 장교,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가려내는 작업은 무의미했다. 이미 붙잡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소련을 그다지 약화시키지 못했다.
실제로 대규모 기아 정책과 신원 선별 및 조사 작업은 붉은 군대가더욱 맹렬히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배고픔에몸부림치다 죽을 것이 빤하다면, 군인들은 싸우는 길을 택할 게 틀림없다. 붙잡히면 그 즉시 총살임을 잘 알고 있던 공산주의자와 유대인 그리고 정치 장교들이 항복을 선택할 리 만무했다. 독일이 점령한지역에서 어떤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지가 알려짐에 따라, 소련 시민들은 기존 소련의 통치에 대해 ‘구관이 명관‘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P330

독일이 애초에 계획했던 것에 비춰보면, 소련 침공은 말 그대로 완벽한 실패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전격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어야했건만, 1941년 늦가을까지도 승리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독일이 처한 모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던 소련 침공은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점령한 (예컨대) 벨기에가 나치 독일에게 있어 좀더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였다. 소련의 인구는 초기 계획상쓸어버려야 할 대상이었지만, 정작 소련에서 들여올 수 있었던 가장중요한 경제적 자원은 바로 이들의 노동력이었다. 여기에 더해 정복한소련 땅은 나치가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있어 대안적 장소가 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우랄산맥 너머로 혹은 수용소로 추방될 것이었다. 그러나1941년 여름 소련이 보여준 방어력은 이 같은 마지막 해결책을 다시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 P331

독일인들은 굶주림과 공포로 가득 찬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중 최소 100만 명을 따로 뽑아 자신들의 군대 및 경찰력을 보조하는 인원으로 썼다. 애초에는, 소련이 무너지면 이들의 도움을 통해 소련 영토를 좀더 손쉽게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소련을무너뜨리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이 길어지자, 이 소련인들에게는 히틀러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점령지역에서 시행하고자했던 대량학살을 보조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앞서 수용소의 포로였던 이들 보조자에게는 삽이 쥐어졌고,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쏴 죽일장소에 도랑을 파라는 명령이 뒤따랐다. 다른 이들은 유대인을 쫓던경찰 조직에 편성되었다. 몇몇 포로는 트라브니키에 있는 훈련소로 보내져 경비병 훈련 과정을 밟기도 했다. 나치에 봉사하도록 재훈련 받은 이 소련 시민 및 참전 군인들은 1942년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베우제츠의 학살 시설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은앞으로 100만 명이 넘는 폴란드 유대인이 독가스를 마시고 숨져갈장소였다. - P333

히틀러가 꿈꾸던 것들은 소련과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완전히박살나버렸다. 하지만 그의 유토피아는 불합격이라는 판정보다는 다시금 고쳐 만들어지는 길을 밟게 된다. 히틀러는 그야말로 위대한 지도자였고, 그의 뜻을 짐작하고 실현시키는 능력이야말로 그 주변의심복들이 각자 한 자리씩 꿰차고 있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1941년의절반이 지난 시점이자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로 히틀러의 뜻을 실행에 옮기기 어려워진 바로 그 시점에,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같은 이들의 과업은 바로 히틀러의 천재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치 정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그의이상을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1941년 여름까지의 유토피아는 다음의네 가지였다. 바로 소련을 몇 주 만에 무너뜨릴 전격적 승리가 그 첫번째였고, 두 번째 유토피아는 3000만 명을 몇 달 내로 굶겨 죽일 굶 - P337

주림 계획이었으며, 전쟁 뒤 유럽의 유대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릴 마지막 해결책이 그 세 번째, 소련의 서쪽 땅들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들이른바 동유럽 종합 계획이 그 네 번째 유토피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 되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에우선순위를 배정하는 쪽으로 전쟁 목표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 그의 심복들은 그러한 바람들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행정적 책임과 재량권을 지니고 있었다전격적 승리는 끝내 없었다. 비록 수백만 명의 소련 시민이 기아에목숨을 빼앗겼지만, 굶주림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다는 게 명백해졌다. 동유럽 종합 계획 또는 전후 식민화 계획은 무엇이 됐든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P338

유토피아가 시들해지자, 정치적 미래는이러한 환상들에서 그나마 실제로 뽑아낼 수 있는 것들에 달려 있게되었다. 괴링, 힘, 하이드리히 세 사람은 엉망이 돼버린 폐허 속에서그나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차지하고자 앞다투어 움직였다. 나치 정권의 경제 전반 및 굶주림 계획을 맡았던 괴링은 최악의 상황에놓였다. "제국의 2인자이자 히틀러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그는 독일내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동쪽에서는 거의 아무런역할도 맡지 못했다. 전후의 거대한 기획에 있어 경제 문제 처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동시에 눈앞의 전쟁을 어떻게든 계속할 자원 마련이 좀더 시급한 일이 됨에 따라 괴링은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했던 괴링과 달리 하이드리히와 힘러는 마지막 해결책의 재공식화, 즉 애초 계획과 달리 전쟁 중에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식의 수정을 통해 좋지 못한 전선 상황 - P338

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해먹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히틀러가 1941년 8월부터 말하기 시작했듯이 이 전쟁이 유대인과의 전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말살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1941년 7월 31일 하이드리히는 괴링으로부터 마지막 해결책수립에 관한 공식 권한을 받아냈다. 이 기획에는 여전히 앞서의 강제이주 계획에 대한 조정 및 유대인들을 정복한 소련의 동쪽 땅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을 시키겠다는 하이드리히의 계획이 들어 있었다. 그가 마지막 해결책의 조율을 위해 반제에서 회의를 열고자 했던 1941년 11월까지도, 하이드리히는 분명 그러한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일할 수 없는 유대인들을 없애야 할 것이다. 육체노동을 감당할수 있는 유대인들은 점령한 소련 땅 어딘가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하이드리히의 생각은 당시 독일 정부 내에서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사고 있었다.  - P339

스탈린 덕분에 영토를 넓힌 지 딱 반년 뒤, 리투아니아는 자신들의후원자로 보였던 이들 소련에게 정복당했다. 1940년 6월 스탈린은리투아니아와 그 외 발트 국가들, 즉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장악하고는 서둘러 이들 지역을 소련에 병합시켜버렸다. 이 합병 작업 후소련은 리투아니아에서 수많은 리투아니아 엘리트를 비롯한 약 2만1000명에 달하는 사람에게 강제이주 명령을 내렸다. 리투아니아 수상과 외무장관 역시 추방된 수천 명 중 하나였다. 리투아니아 정치및 군사 지도자들 중 몇몇은 수용소를 탈출해 독일로 도망치기도 했는데 - P344

흔히 사전에 베를린에 선이 닿아 있던 이들이거나 아니면 침략군인 소련에 줄곧 적의를 품고 있던 이들이었다. 독일은 리투아니아에서 온 정치적 망명자들 중 우익 민족주의자들을 선호했으며, 이들중 몇몇을 훈련시켜 자신들의 소련 침공에 함께하도록 했다.
따라서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쳤을 때 리투아니아는 매우 독특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맨 처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으로 이익을 봤고, 그 뒤 소련에게 정복당했으며, 이제는 독일의 손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소련의 무자비한 점령을 겪은 리투아니아인들은 이 같은 변화를 반기는 분위기였고, 이들 중에는 극소수의 리투아니아 유대인도 있었다.  - P345

정치적 계산과 그간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받았던 고통들이 이들의그 같은 집단학살에의 참여를 온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독일인들과 해당 지역 비유대인들을 한데뭉치게 만들었다. 분노는 독일이 바랐던 대로 소련에 협력한 자들보다는 유대인들을 향하게 되었다. 독일의 주장에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겪은 아픔의 원흉이 유대인들이라 믿었건 믿지않았건 이제 스스로가 새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을 통해 나치의 세계관을 좀더 분명히 해주고있었다. 내무인민위원회의 처형에 대한 앙갚음으로서의 유대인 학살은 소련이 유대인 국가라는 나치의 시각을 뚜렷하게 해주었다. 또한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앞서 스스로 소련에 협력했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얻은 변절자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기회였다. 유대인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점령한 자뿐만 아니라 몇몇 점령당한 이들에게도 요긴한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 P353

하지만 이 같은 심리적 나치화는 너무나 명백했던 소련의 잔혹 행위들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집단학살은 소비에트가 갓 들어와 그들의 시스템을 최근까지 안착시켰던 곳, 지난 몇달 동안 소련의 강압적 기관들이 체포와 처형 및 강제이주를 집행했던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소비에트와 나치의 공동작품, 즉 소비에트 텍스트의 나치 버전이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 소비에트가 남긴 폭력의 흔적들은 나치 친위대와 그 지도부에게 있어 아주 유용했다.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이전부터 ‘삶은 이데올로기들 간의 충돌이며, 법의 지배에관한 전통적인 유럽식 이해는 동쪽의 인종적·이데올로기적 적들을무찌르는 데 필요한 가차 없는 폭력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내내 고수해왔었다.  - P354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는 소비에트 폭력의 기록들로 말미암아 독일은 심지어 자신들만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스스로를 과거소비에트가 벌인 범죄의 상처들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고 있다는 식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그들이 귀가 따갑도록 표방한 것들에 비춰보면, 두 번의 점령을 받은 이들 지역에서 독일이 찾아낸 것들은 그들로하여금 어떤 특정한 느낌을 받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과거 이들이 훈련받고 또 목격할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지던 것들, 즉 추정상으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 조종한‘ 소비에트의 범죄에 대한 일종의 확인이었다. 소비에트가 벌인 잔혹 행위들은 독일의 나치 친위대원, 경찰, 군인들이 이내 벌이게 될 유대인 여성 및 아동 학살 정책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는 아주 좋은 구실이될 것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범죄 행위들을 겪은 지역 주민들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녔던 교도소 수감자들에 대한 소련의 학살은,  - P355

스탈린의 정보원들이 내린 판단은 정확했다. 결정적으로 일본은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일 참이었고, 이는 곧 시베리아에 대한 공격 옵션이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뜻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남쪽으로 뻗어갈계획은 1937년까지 이미 구상이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는 1940년9월, 그들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략함으로써 확실해졌다. 앞서히틀러는 동맹 일본을 자신의 소련 침공에 끼지 못하도록 했다. 이제그 침략이 실패에 이르자, 일본 역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붉은 군대가 서쪽으로 진격하던 1941년 12월 6일, 일본의항공모함대는 미국 태평양 함대가 주둔하고 있던 진주만을 향하고있었다. 어느 독일 장군은 12월 7일 당시 모스크바를 둘러싼 전투 상황을 담은 편지를 집으로 보냈는데, 그는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에 대해 "우리는 시시각각 각자의 헐벗고 굶주린 몸뚱어리를 지키기 위해, - P379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인 적들과 싸우고 있소"라고 적었다. 바로 그날,
일본 전투기들의 물결은 미군 함대를 습격, 정박 중이던 전함 몇 대를파괴하고 미군 2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튿날 미국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12월 11일, 나치 독일 역시 미국과의 전쟁을 선언했는데, 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로 하여금 독일과의 전쟁을 거리낌 없이 선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스탈린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꽤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만약 일본이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겨룰 생각이라면, 그들이 시베리아에서 소련과 대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은 더 이상 전선이 양쪽으로 분산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의 미국 공격은 미국을 소련의동맹으로서 전쟁에 참여하도록 만들어버렸다. 일본이 독소전에 중립을 취했던 관계로, 머지않아 미국의 보급선들은 일본 잠수함들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소련의 태평양 항구에 들어갈 것이었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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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당시 일본은 당면한 위협 대상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벌인 일은 부농 박멸 작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의위협은 소련 내 중국계 소수 민족을, 그리고 만주에서 돌아온 소련철도 노동자를 탄압하는 구실도 되었다. 일본의 간첩 행위 역시 약17만 명에 달하는 한국계 소련인 전체를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일을 정당화했다. 이후 한국은 일본에 점령당했고, 따라서 한국계 소련인은 일본과 관련된 일종의 집단 이주 민족이 되었다. 중국 서부 지역인 신장에서, 스탈린의 명령을 받는 성차이는 직접 테러를 감행해 수천 명이 죽게 만들었다. 중국 북쪽의 몽골인민공화국은 1924년 창설되었을 때부터 계속 소비에트의 위성 국가였다. 소련 군대는 1937년 동맹인 몽골에 진입했고, 몽골 당국은1937~1938년에 직접 테러를 저질러 2만474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모든 일은 일본을 겨냥한 행위였다.
이러한 살육 가운데 어떤 것도 전략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 지도부는 남부 진공 전략을 채택, 중국을 거쳐 태평양까지진출하기로 했다. 일본은 대공포 시대가 시작된 1937년 7월 중국을침략했고, 이후에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부농 박멸 작전과 이러한 동아시아 민족 박해 작전의 근거는 모두 잘못된 셈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을 두려워했던 것 같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의 국가 목표는 대단히 공격적이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밀고 들어갈 것인가뿐이었다. 일본정부는 불안정한 데다 정책을 너무 빨리 바꾸곤 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대량학살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던 공격에서 소련을 전혀 보호하지 못했다. P 189, 190




스탈린은 소련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는 점도 신경 써야 했다. 만주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였던 곳을 빼앗아 만든 일본 식민지였다. 이러한 식민지는 더 늘어날 기세였다. 중국은 소련과의 국경이 가장 긴 나라이자 정치가 불안한 국가였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 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 P135

스탈린의 정치적 재능 중 하나는 외세의 위협을 국내 정책 실패의전적인 원인인 것처럼 제시하고, 자기 자신은 어느 것에도 책임이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을 받지않았고, 자신이 선택한 내부의 적을 외세의 앞잡이로 규정할 수 있었다. 1930년에 집단화에 따른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트로츠키 지지자와 여러 외세 사이에 국제적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자들의 포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안에있는 협잡꾼, 간첩, 파괴 공작원과 살인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소련의 정책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역사의 정당한 흐름을 느리게 하려는 반동 국가들의 책임이었다. 5개년 계획의 결함처럼보이는 일은 외세 간섭의 결과였다. 따라서 가장 심한 죄업은 반역자들의 몫이었고, 비난의 대상은 언제나 바르샤바, 도쿄, 베를린, 런던또는 파리였다. - P137

스탈린은 스페인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즉시 예조프를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가 보기에 정치재판과 인민전선은 같은 궤를 타고 있었다. 인민 전선은 모스크바의 전선이 바뀔 때마다친구와 적을 다르게 정의했다. 비공산주의정치세력에 제공되는 모든 기회가 그렇듯이, 이것은 본국과 외국 모두에서 상당한 경계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스탈린에게 있어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의 무장 파시즘 세력과 이들을 지지하는 외세에 대한 전쟁이면서, 동시에 좌파및 내부의 적을 상대하는 투쟁이었다. 그는 간첩과 배신자를 충분히색출해 사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페인 정부를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국가인 동시에 미래상이고, 한 나라의 정치체제이자 국제주의자의 이데올로기였다. 소련의 대외 정책은 언제나 국내 정책이었고, 소련의 국내 정책은 언제나 대외 정책이었다. 이는 소련의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 P142

오웰의 생각처럼, 소련과 유럽 파시즘의 공개적인 충돌은 본국에서과거의 반대자와 잠재적 반대자를 피로 숙청하는 일과 함께 일어났다. 소련의 이 작전은 국내의 숙청 재판 시작과 동시에 바르셀로나와마드리드에서도 개시되었다. 스페인 파시즘과의 부딪침은 소련에서의경계 강화를 정당화했고, 소련에서의 숙청은 스페인에서의 경계 강화를 정당화했다. 스페인 내전은 인민 전선이 아무리 ‘우리는 다수의 연대 세력이다‘라고 선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사회주의 반대 세력이라고 믿는 이들을 스탈린이 막무가내로 숙청하기로 마음먹었음 - P142

을 드러냈다. 오웰은 공산주의자들이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고 모스크바에 신세를 진 스페인 정부가 트로츠키파 정당을 금지하는 모습을 봤다. 오웰은 바르셀로나에서의 충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머나먼 도시에서 벌어진 이 추잡한 싸움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스탈린은 바르셀로나가 제5열 파시스트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지리적 특성과 지역 정치 현실에 아랑곳없는 스탈린주의자의 융통성 없는 논리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또한 일부 서구 좌파와 민주주의자에게 파시즘 외에도 적이 있음을 가르쳐준, 오웰의 전쟁 회고록 카탈로니아 찬가』에 등장하는 감동적인 장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 P143

비슷한 시기인 1934~1937년, 히틀러 역시 폭력을 이용해 당, 경찰과 군대라는 권력 기관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그도 스탈린처럼권력 재창출 수단을 확보했고, 자신을 돕던 사람들을 죽였다. 죽인 사람 수는 훨씬 적었지만, 히틀러의 숙청은 독일 법률이 지도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를 자신의발아래 둔 스탈린과는 달리, 히틀러는 자신이 선호하는 준군사 조직인 친위대의 발전을 위해 테러를 명령하고, 다양한 독일 경찰 병력에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스탈린은 숙청을 이용해 소련 군대를 위협했지만,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한 나치 당원들을 사살함으로써 독일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숙청의 가장 중요한 표적은 나치 준군사 조직인 돌격대의지도자 에른스트 룀이었다.  - P144

부농이란 스탈린 혁명에서, 집단화와 기근에서,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굴라크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농민들이었다. 사회 계층으로서의 부농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이 용어는 그 자체에 정치적 함의가 담긴 분류의 산물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에서 ‘부농을 청산‘하려는 시도는 대량학살로 이어졌지만, 계급이 파괴되기는커녕 오명과 억압을극복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로운 계급을 이루었다. 집단화 기간에 추방당하거나 도망친 수백만 명은 부농으로 간주된 후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고, 이러한 계급 분류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소련 지도부는 혁명 그 자체가 새로운 적을 만든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1937년 2월과 3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 총회에서는 다수의 연사가다음과 같은 논리적 결론을 도출했다. "외국 분자들이 도시의 순수한 프롤레타리아를 더럽히고 있다. 부농은 소련 체제의 "중대한 적"이다.  - P148

집단화 과정에서 ‘부농의 저항이 많았던 우크라이나는 살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레플렙스키는 명령 00447호를 확대해, 기근 이후 소련의 영토 보전에 위협적인 존재로 비치던 소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도 대상에 포함시켰다. 우크라이나에서 약 4만530명이 민족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1933년 독일에 식량 원조를 요청했던 우크라이나인들도 체포되었다. 1937년 12월 (이미 두 배로 늘어나 있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할당량이 달성되자, 레플렙스키는 ‘더 많은 할당량을 바랍니다‘라고 보고했다. 1938년 2월, 예조는 이공화국의 총살 할당량에 2만3650명을 추가했다. 종합해보면, 1937년과 1938년 내무인민위원회 위원들은 부농 박멸 작전에서 소련령 우크라이나 주민 7만868명을 총살했다. 수용소행 대비 총살의 비율은 1938년 우크라이나에서 특히 높았다. 1~8월까지 약 3만5563명이 사살되었고, 단 830명만이 수용소로 갔다.  - P156

스탈린은 자신의 정책을 대안이 없는 유일한 해답인 듯 내비쳤지만, 그는 지도자들이 향후 계획을 논의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체할 수있게 했던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있었다(그리고 다른 어떤 대체 이념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관한 과학인 만큼, 마르크스주의의 자연은 경제였고 연구 대상은 사회 계급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가장 레닌주의적인 해석에서조차, 인간은 자신의 계급 배경 때문에 혁명에 저항한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에서는 뭔가가달라지고 있었다. 평범한 국가 안보 문제가 마르크스주의자의 언어와 융합해서, 영영 다른 언어로 바뀌어버렸다. 정치재판에서 고발당한 사람들은 외세 때문에 소련을 배신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무리간접적이고 약하게 표현해도, 고발문에 따르면 그들의 죄목에는 계급투쟁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본국을 에워싼 대표적인 제국주의국가들을 돕는 자들로 간주되었다. - P158

1936~1938년의 나치 테러는 어느 정도 이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는데, 개인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처벌하는 대신 정치적으로규정된 사회 집단을 ‘그 존재 자체‘ 때문에 처벌하는 식이었다. 나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집단은 ‘반사회적 집단‘이었다. 그 뜻은 나치의 세계관에 저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때로는 정말로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실체는? 동성애자,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중독자로 의심되는 사람, 또는 일할 의지가 없는 이들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독일 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나치 세계관의 기본 전제들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도 여기에 속했다. - P159

이 시기 소련의 테러는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비할 데 없이 치명적이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는 소련에서 명령 00447호 때문에발생한, 18개월 동안 약 40만 명이 처형당하는 일에 비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1937년과 1938년, 나치 독일에서는 267명이 처형되었지만, 소련에서는 부농 박멸 작전에서만 37만8326명이 처형당했다. 마찬가지로, 인구 규모 차이를 고려하면, 소련 국민이 부농 박멸 작전에 - P160

서 처형당할 확률은 나치 독일에서 독일 국민이 범죄자로 몰려 사형당할 확률의 700배에 달했다.

지도부 숙청과 주요 기관 장악이 끝나자,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1937년과 1938년에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숙청을 실시했다. 그러나부농 박멸 작전은 대공포 시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이것은 계급 전쟁으로 간주되거나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련은 계급으로서의 적을죽이면서, 동시에 민족으로서의 적도 죽이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이 되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인종차별과반유대주의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내부의 적에 대한사살작전을 시작한 곳은 스탈린의 소련이었다. - P161

소수 민족이라면 "무릎을 꿇리고 미친개처럼 쏴 죽여야 한다. 이것은 나치 친위대 장교가 아닌, 스탈린의 대공포 시대에 ‘민족 박멸 작전‘을 실행하던 공산당 지도자의 말이었다. 1937년과 1938년에는 소련인 25만 명이 민족 때문에 총살당했다. 5개년 계획은 소련이 사회주의하에서 민족 문화를 꽃피우게 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1930년대 후반 소련은 그 어느 곳보다 민족적 박해가 심한 곳이었다. 인민전선조차 소련을 관용의 고향으로 묘사했지만, 스탈린은 소련을 구성하는 민족 가운데 다수를 대량 살육하라고 지시했다. 1930년대 후반기에 가장 박해받은 유럽의 소수 민족은 주로 이민 때문에 수가 줄어든) 약 400만 명의 독일계 유대인이 아니라, (주로 처형 때문에 수가 줄어든) 600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계 소련인이었다.‘
스탈린은 민족 대학살의 선구자였고, 폴란드계는 소련의 소수 민 - P165

족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피해자였다. 부농처럼, 폴란드계 소수 민족도 집단화 실패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그에 대한 근거는1933년 기금 기간에 창안되어, 1937년과 1938년 대공포 시대에 적용되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회 대표인 프세볼로트 발리츠키는 대규모 기아가 그가 "폴란드 군사 조직"이라 부른 간첩 도당의 도발이라고 설명했다. 발리츠키에 의하면 이 ‘폴란드 군사 조직‘은우크라이나 공산당에 침투한 다음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수확 과정을 훼방놓도록 후원했고, 굶어 죽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시체를 반소련 선전용으로 사용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를말하는 ‘우크라이나 군사 조직‘ 역시 똑같이 악랄한 행위를 한, 기근에 대한 책임을 함께 걸머질 도플갱어가 되었다.
이것은 역사에서 영감을 얻은 발명품이었다. 1930년대에는 소련령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그 어디에도 폴란드 군사 조직이란 없었다.  - P166

1933년 여름, 발리츠키는 ‘폴란드 군사 조직‘이 소련에 무수한 간첩을 보냈고, 이들이 조국 폴란드에서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공산주의자 흉내를 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는 불법이었고,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당연한 피란처라 생각했다.
폴란드 군사 정보부가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을 활용하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으로 넘어갔던 대부분의 폴란드 좌파는 정치적 망명자일 뿐이었다. 소련 내 폴란드 정치 망명자 체포는 1933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 극작가인 비톨트 반두르스키는 1933년8월에 투옥당했고, 폴란드 군사 조직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강요당했다. 폴란드 공산주의와 폴란드 간첩 간의 이러한 연결 고리가 심문 절차에서 문서화되면서, 더 많은 소련 내 폴란드 공산주의자가 체포되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 예지 소하츠키는 1933년 모스크바 감옥에서 투신 자살하기 전에 자신의 피로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마지막까지 당에 충성하다" - P167

1937년 8월 11일, 예조프는 내무인민위원회가 "폴란드 군사 조직의 간첩 연결망 완전 청산"을 수행하도록 하는 ‘명령 00485호‘를 공표했다. 명령 00485호는 부농 박멸 작전 개시 직후에 공표되었지만, 훨씬 더 과격했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계급으로 정의할 수 있는 적을노린 명령 00447호와는 달리, 00485호는 특정 민족 집단을 국가의적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작전 효과를 위해부농 박멸 명령 또한 범죄자까지 타깃으로 지정했고, 다양한 유형의민족주의자와 정적들까지 포함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명령의 계급 분석은 불분명했다. 집단으로서의 부농은 최소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화 계획에 대한 소련 국가들의 적대감은 다른 문제였다. 이것은 인민에 대한 동지애라는 사회주의의 기본 전제를 폐기하는 행위처럼 보였다. - P171

어떻게 태어나 이제껏 살았느냐가 처형 사유였는데, 폴란드 문화나가톨릭교에 대한 호의는 국가 간 첩보활동에 동참했다는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가 봐도 기껏 경범죄 정도의 잘못 때문에 중형을 받아야 했다. 묵주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수용소 10년형을 받거나, 설탕을 충분히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당하거나! 일상적인 일을 근거로도 보고서를 작성하고, 앨범에 기록하고, 서명하고, 선고하고, 총살해 시체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 P175

레닌그라드 주민과 폴란드계는 당시 이렇게 많은 이가 처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저 이른 아침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죄수호송차, ‘영혼 파괴자‘나 ‘검은 까마귀‘라 불리던 감옥 트럭을 생애 마지막으로) 보게 될까 두려워할 뿐이었다. 어느 폴란드계의 기억에따르면, 사람들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 검은 까마귀에게 물려갈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했다. 산업화와 집단화 때문에 폴란드계는 방대한 나라의 곳곳으로 흩어져야 했다. 이제 그들은 공장, 막사나 자신의 집에서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수많은 사례 중 하나를들어보자면, 모스크바 서쪽 근교에 있는 쿤체보의 소박한 목조 주택에서 숙련공 여럿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폴란드계 기계공과 금속공학자도 있었다. 두 사람은 1938년 1월 18일과 1938년 2월 2일에각각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군체보의 세 번째 희생자인 예브게니야바부시키나는 폴란드계도 아니었다. 그녀는 충성심 강하고 전도유망한 유기 화학자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폴란드 외교관의 세탁부였다는 이유로함께 처형당했다. - P178

폴란드 박멸 작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대규모로 일어났다. 그곳에는 폴란드계 소련인 60만 명 중 약 70퍼센트가 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폴란드 박멸 작전으로 5만5928명이 체포되고, 그중4만7327명이 사살되었다. 1937년과 1938년, 우크라이나에서 다른민족 대비 폴란드계의 체포 확률은 12배에 달했다. 우크라이나를 휩쓸었던 기근이 ‘폴란드 군사 조직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발리츠키는 수년 동안 폴란드인을 박해했고, 그의 옛 부관이자 후임자인 이즈라일 레플렙스키는 발리츠키가 제거된 뒤부터 늘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소용없었다. 그 역시 1938년 4월 체포되어 우크라이나에서의 폴란드 박멸 작전이 끝나기도 전에 처형당하고 말았으니까. (후임자인 A. I. 우스펜스키는 1938년9월 스스로 실종되는 기지를 발휘했지만, 결국 발각당해 처형되었다.) - P181

1937년 당시 일본은 당면한 위협 대상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벌인 일은 부농 박멸 작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의위협은 소련 내 중국계 소수 민족을, 그리고 만주에서 돌아온 소련철도 노동자를 탄압하는 구실도 되었다. 일본의 간첩 행위 역시 약17만 명에 달하는 한국계 소련인 전체를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일을 정당화했다. 이후 한국은 일본에 점령당했고, 따라서 한국계 소련인은 일본과 관련된 일종의 집단 이주 민족 - P189

이 되었다. 중국 서부 지역인 신장에서, 스탈린의 명령을 받는 성차이는 직접 테러를 감행해 수천 명이 죽게 만들었다. 중국 북쪽의 몽골인민공화국은 1924년 창설되었을 때부터 계속 소비에트의 위성 국가였다. 소련 군대는 1937년 동맹인 몽골에 진입했고, 몽골 당국은1937~1938년에 직접 테러를 저질러 2만474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모든 일은 일본을 겨냥한 행위였다.
이러한 살육 가운데 어떤 것도 전략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 지도부는 남부 진공 전략을 채택, 중국을 거쳐 태평양까지진출하기로 했다. 일본은 대공포 시대가 시작된 1937년 7월 중국을침략했고, 이후에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부농 박멸 작전과 이러한 동아시아 민족 박해 작전의 근거는 모두 잘못된 셈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을 두려워했던 것 같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의 국가 목표는 대단히 공격적이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밀고 들어갈 것인가뿐이었다. 일본정부는 불안정한 데다 정책을 너무 빨리 바꾸곤 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대량학살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던 공격에서 소련을 전혀 보호하지 못했다. - P190

대공포는 곧 3차 소비에트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이 1917년을기점으로 정치 체제에 변화를 불러왔고, 집단화가 193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경제 체제를 만들었다면, 1937~1938년의 대공포 시대는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켰다. 스탈린은 심문을 통해서만 적의 정체를밝힐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로 만들었다. 외국 간첩과 국내음모에 관한 그의 판타지는 고문실마다 들렸고, 심문 조서마다 적혔다. 소련 국민으로서 1930년대 후반의 상위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말하려면, 그의 판타지의 등장인물이 되어야 했다. 스탈린의 더 큰
‘이야기‘를 위해, 소련 국민 개인의 ‘이야기(삶)‘는 종종 끝장나야 했다. - P193

그러나 농민과 노동자 집단을 단순한 숫자로 바꿔버리는 일은 스탈린의 기분을 돋워주었고, 대공포 시대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스탈린의 권력을 굳건히 했다(당연하게도), 1938년 11월, 대규모 작전의중단을 명령하면서, 스탈린은 내무인민위원회 대표를 또다시 교체했다. 라브렌티 베리야가 예조프의 후임자였는데, 예조프는 그 뒤 처형당하고 만다. 수많은 내무인민위원회 최고 간부들도 월권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같은 운명에 처했는데, 사실 이러한 숙청은 스탈린 정책의 핵심이었다. 야고다를 예조프로, 예조프를 베리야로 교체함으로써, 스탈린은 자신이 안보 기관의 정점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로 당을 견제하고 당으로 내무인민위원회를 견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소련의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폭군이 자신의 궁궐에서 정치를 쥐고 흔드는 것으로권력을 증명하는 폭군정치가 되었다. - P193

소련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억압 기구를 이용해 민족 살육 작전을수행한다민족 국가였다. 내무인민위원회가 소수 민족을 죽이고 있던당시, 내무인민위원회 핵심 장교 대부분은 소수 민족이었다. 1937년과 1938년 상당수가 유대계, 라트비아, 폴란드계이거나 독일계였던내무인민위원회 간부들은 히틀러와 나치 친위대가 (당시까지) 시도한모든 행위를 뛰어넘는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학살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위와 목숨을 지키려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들은 국제주의(초민족주의)라는 윤리를 만들었고이는 일부 간부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대공포 시대가계속되면서 그들도 속속 처형당했고, 대부분 러시아계로 교체되었다.
이즈라일 레플렙스키, 레프 라이흐만과 보리스 베르만처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폴란드 박멸 작전을 실행한 유대인 장교도 체포 후 처형당했다. 이것은 큰 흐름의 일부일 뿐이었다. 대공포 시대의대량 살인이 시작되었을 때, 고위 내무인민위원회 장교 약 3분의 1은 유대계였다.  - P194

대공포 시대가끝날 무렵, 내무인민위원회에서 과다 비율을 차지한 소수 민족은 스탈린이 그 가운데 하나인 조지아계뿐이었다.
이 3차 혁명은 사실상 반혁명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패를 내포하고 있었다. 15년 남짓 동안 소련은 살아남은 시민들에게 많은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대공포 시대가 정점에 달했을 때 국가 연금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혁명 원칙의 근간을 이루던 일부 본질적 가정은 폐기되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계급투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 재판에서 내려진 혐의처럼 소련으로 이주한 민족이 소련의 배신자가 되었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과거의 경제 체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출신 민족에 따라 외국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 P195

대공포 시대에 소련 지도부는 독일에 살던 유대인의 2배에 달하는 소련 국민을 처형했다. 하지만 소련 지도부를 제외하면, 히틀러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러한 대량 처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전쟁 이전의 독일에서는 누구도 이런 일을 실행에 옮기지않았다. 제국 수정의 밤 이후에야, 유대인은 비로소 대규모로 독일의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나마도 학살이 목적은 아니었고, 당시 히틀러는 유대계 독일인들을 위협해 나라 밖으로 내쫓으려 했다. 이 시기 강제수용소에 들어간 유대인 2만6000명은 대부분 얼마 지나지않아 석방되었다. 1938년 후반에서 1939년까지 10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독일을 떠났다. - P199

또한 히틀러는 독일을 재무장하는 한편 전쟁 없이 최대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 병합은 시민 600만명과 막대한 경화를 제공했다. 뮌헨 회담은 히틀러에게 시민 300만명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을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수산업 대부분을 선사했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국가로서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없애버렸고, 그에 따라 히틀러의 목적이 독일 민족에만 국한된다는 환상은 모조리 사라졌다. 체코 영토는 ‘보호국‘으로 독일 제국에 추가되었고, 슬로바키아는 나치의 감독을 받는 허울뿐인 독립국이 되었다. 3월 21일 독일인들은 폴란드인에게 합의를 강요했지만이번에도 거부당했다. 3월 25일 히틀러는 독일 국방군에게 폴란드 침공 준비를 명했다. - P203

거의 곧바로, 두 체제는 폴란드 파괴에 대한 열망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끌어들여 소련과 싸우겠다는 희망을 포기하자, 폴란드에 대한 나치와 소련의 말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히틀러는 폴란드란 베르사유 조약이 낳은 ‘비현실적인 창조물‘이라 했고, 몰로토프도 그 조약의 ‘추악한 후손‘이라고 규정했다. 공식적으로는,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협약은 단순한 불가침 조약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는 동유럽내 나치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을 정하는 비밀 의정서에도 합의했는데, 이 영향권에는 아직 독립국이었던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 P205

리투아니아, 폴란드와 루마니아가 들어가 있었다. 역설적인 사실은 폴란드가 불가침 조약이라는 명목 아래 독일과 비밀 계약을 맺었다는거짓 주장을 바탕으로, 소련 시민 10만 명 이상을 죽인 사건을 스탈린이 바로 얼마 전에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폴란드 박멸 작전은 독일-폴란드 공격의 대응책으로 설명되었다. 그러고는 이제 소련은 독일과함께 폴란드를 공격한다는 데 합의한 것이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합병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얻은 병력 및 무기를 이용해 폴란드 북쪽,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히틀러가 마침내 자신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 P206

1939년 8월과 9월, 스탈린은 동유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지도까지 보고 있었다. 그는 극동 지역에서 소련의 입지를 개선할 기회를찾아냈다. 이제 스탈린은 서쪽에서는 독일이 폴란드와 함께 자국을침공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련이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경우, 제2전선을 염려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소련은 동맹국 몽골과 함께) 1939년 8월 20일 (몽골과 만주국 사이에 있는 분쟁 국경 지대 내의 (괴뢰 만주국 병력을 포함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1939년 8월 23일, 베를린과의 관계를 회복한 스탈린의 정책은 도쿄를 노린 정책이기도 했다. 소련의 공격이 있고 사흘 뒤에 체결된 독일과 소련 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독일과 일본 간의 방공협정을 무효로 만들었다. 전장에서의 패배 이상으로, 나치-소비에트동맹은 도쿄에 정치적 격변을 일으켰다. 당시의 일본 정권은 붕괴했고, 다음 몇 달 동안 다른 여러 정부도 같은 길을 걸었다. - P206

독일이 일본 대신 소련을 동맹으로 선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 정부는 예상치 못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지도부는 이미 북쪽 대신 남쪽으로, 소비에트 시베리아 대신중국과 태평양 쪽으로 확장한다는 데 동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베를린 간의 연합이 결성되면, 붉은 군대는 병력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최정예 부대를 단순한 자체 방어를 위해 북쪽 만주국에 배치해야 하고, 남쪽으로의 진격은 훨씬 더 어려워진다.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동아시아에 대한 재량권을 주었고, 일본은 히틀러가 새 친구를 빨리 배신하기만 바라게 되었다. 일본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 준비 상황을 감시할 목적으로 리투아니아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영사에는 러시아어에 능통한 첩자, 스기하라 지우네가 임명되었다. - P207

1939년 9월 15일에 붉은 군대가 일본 군대를 물리쳤을 때, 스탈린은 자신이 바라던 결과를 온전히 달성할 수 있었다. 대공포 시대의민족 박멸 작전은 일본, 폴란드, 독일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목적은 이들이 연합해 소련을 포위하는 일을 막는 것이었다. 대공포 시대에 살해된 68만1692명은 이러한 포위 작전의 가능성을 줄이진 못했지만, 외교와 군대는 그 가능성에 영향을 주었다. 9월 15일이 되자 독일은 폴란드군의 전투 능력을 사실상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폴란드 연합의 소련 공격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독일-일본 연합의 소련 공격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스탈린은 독일-폴란드-일본의 소련포위라는 공상을 독일-소련 연합의 폴란드 포위와 그에 따른 일본 고립이라는 현실로 바꿔버렸다. 소련 군대가 일본에 승리한 후 이틀이 - P207

지난 1939년 9월 17일, 붉은 군대는 동쪽에서 폴란드를 습격했다. 붉은 군대와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 중간지대에서 조우해 공동 승리 퍼레이드를 준비했다. 9월 28일,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폴란드에 관한두 번째 협약을 맺었는데, 이번에는 국경과 친선 관계를 다룬 조약이었다.
이렇게 블러드랜드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폴란드의절반을 소련에 내줌으로써, 히틀러는 폴란드 박멸 작전에서 몹시 잔혹하게 자행된 스탈린의 테러가 폴란드 본토에서 재현되게 했다. 스탈린 덕분에 히틀러는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자신의 첫번째 대량 살상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공동 침공이후 21개월 동안, 독일인과 소련인들은 각각 폴란드의 절반을 지배하면서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숫자의 폴란드 민간인들을 죽였다.
두 국가의 살육 담당 기관은 제3의 영토에 집중했다. 스탈린처럼,
히틀러도 자신의 첫 번째 주요 민족 사살 작전의 대상으로 폴란드인을 선택했다. - P208

독일의 공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20분,
폴란드 비엘룬시 한복판에 돌연 폭탄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어떤 사전 경고도 없이 이뤄진 공습이었다. 독일인들은 아무런 군사전략적 의미도 갖고 있지 않았던 그곳을 끔찍한 실험의 장소로 택했다. 현대식 공군력이 정밀 폭격으로 민간인 대부분을 공포에 몸서리치도록 만드는 것,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 물론 가능했다. 교회, 시너고그, 병원, 이 모든 것이 불 속으로 사라졌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탄약과 총 70톤가량의 폭탄이 거의 모든 건물을 파괴했고,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숨진 이들 대다수는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버린 채 피란길에 올랐고, 도시를관리할 독일 행정관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의시체가 더 많았다. 서부 폴란드의 수많은 마을과 도시도 같은 운명을 - P211

맞았다. 무려 158개나 되는 삶의 근거지가 폭격에 희생되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던 사람들은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들을 보며 "에이, 설마 우리 편 비행기겠지"라는 말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1939년 9월 10일은 유럽의주요 도시 중 하나가 처음으로 적국 공군에게 아주 체계적이고 정밀한 폭격을 당한 날로 기록되었다. 이날 바르샤바 습격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는 17세밖에 안 된 독일 소년도 있었다. 그달 중순까지 폴란드 정규군은 대부분 무릎을 꿇었고, 수도만 겨우 버티고 있을 따름이었다. 9월 25일, 히틀러는 바르샤바가 항복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그날 약 560톤의 폭탄과 72톤의 소이탄이 퍼부어졌다. 정식 전쟁으로 인정받을 수 없던 이 전쟁의 초반,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이자 유럽의 역사적 수도 하나가 폭격에 무너져 내렸고 도합 2만5000명의시민(그리고 6000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9월 내내 독일 국방군을 피해 달아나던 피란민들의 긴 행렬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독일전투기 조종사들은 이들 위로 유유히 저공비행을 하면서 기관총을 쏴대는 일에 재미가 들려 있었다. - P212

10월 4일,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은 새로운 공동 국경지대를 정한 추가 협약에 합의했다. 폴란드라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며칠 후 독일은 남은 폴란드 지역을 무력으로 합병하고, 나머지 지역은 동방 총독부를 세워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았다. 이곳은 폴란드인과 유대인이라는 불청객들을 집어넣는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이 될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동부 어딘가에 있는 "자연보호구역" 같은 곳에따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총독부의 수장이된 히틀러의 전 변호사 한스 프랑크가 분명하게 밝혔듯 식민지 주민들은 1939년 10월 말에 공표된 두 가지 질서에 따라야 했는데, 하나는 앞으로 모든 치안은 독일 경찰이 책임진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떤 행동이든 독일과 독일인의 이해에 반하는 행동을 한 폴란드인은 독일 경찰이 그를 즉결처분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프랑크는 폴란드인들이 이내 "폴란드에 미래 따윈 없음"을 깨닫고 독일인들의 지도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 P227

보여주로기의 관점에서도 골칫덩어리였다"
폴란드의 모든 것은 그 땅에서 사라지고, "게르만족의 지배"로 대체되어야 했다. 히틀러가 쓴 대로, 독일은 "반드시 이 용납할 수 없는인종적 성분들을 봉쇄해 다시는 그들의 피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거나 아니면 지체 없이 이를 없애 깨끗한 땅을 그 동지들에게 넘겨줘야 한다." 1938년 10월 초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새로운 책무를 맡겼다. 이미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의 수장이었던 힘러는 이제 "게르만족의 지배를 확고히 할 제국 정치위원"으로서 인종 문제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가 맡은 임무는 바로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지역의 토착민들을 쓸어버린 뒤 그 자리를 독일인으로 채워넣는 것이었다.
힘러는 이 기획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만만치않은 일이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인의 땅이었고, 폴란드에는 소수민족이라고 부를 만큼의 독일인도 없었다.  - P233

이런 식으로 스타로빌스크의 폴란드인 수감자 3739 명이 살해당했다. 유제프 찹스키의 지인과 친구들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찹스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을 보였던 식물학자, 임신한 아내에게 자신의 두려운기색을 숨기려 애쓰던 경제학자, 자신이 드나드는 카페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일로 이름난 바르샤바의 어떤 의사, 희곡과 소설을 외워사람들에게 암송해주던 한 중위, 유럽연합의 가능성에 눈을 반짝이며 열변을 토하던 변호사, 이외에도 모든 기술자, 교사, 시인, 사회복지 - P245

사, 기자, 의사, 군인들이 있었다. 전부 이곳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오직 찹스키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그는 다른 수용소에 있던 몇몇 사람과 함께 또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마침내 살아남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1939년에서 1940년에 소련이 폴란드인 수용소를 설치하는 코젤스크의 옵틴수도원을 무대로 하는 장면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꼽히는 이 결정적 장면은 젊은 성자와 수도원의 대심문관이 신이라는 존재 없이 도덕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를 두고 나눈 이야기다.
만약 신이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1940년, 소설 속의 이대화가 실제로 바로 그 장소에서 이뤄졌다. 수도원을 책임지던 수도승 몇몇은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심문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이들은 바로 저 질문에 대한 소련의 대답을 몸소 보여주는 자들이었다. 소련의 대답은 간단했다. ‘신이 사라진 이곳에서만이 인간의 진짜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 반대로 여러 폴란드 장교는 비록 의식하진않았지만 이와 다른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어떤 짓도 허용되는 이곳에서는 신이야말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안식처다. 그들은 수용소를예배당으로 여겼으며, 또 그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 P246

말로 앞으로 있을 스탈린주의의 엄청난 문명적 탈바꿈의 징조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수도원 대심문관의 자리를 현실에서 이어받은 코셀스크 심문관들의 우두머리는 이를 아주 섬세하게 포착했는데, 그의 표현처럼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철학의 문제였다. 결국 소련은 자신들의 것을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동부 폴란드에 소련이 쏟아부은 비용과 자행한 행동들에 대한 비난 역시 아주 간단한 대꾸로무마시킬 수 있었다. ‘지금 그 지역이 어느 나라 땅이지?‘ 수용소에 있던 폴란드인들은 소련 문명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수십 년 뒤 당시 그들의 말쑥하고 깔끔한 모습과 자부심을 떠올렸던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농부들의 기억에서처럼, 그들은 여느소련인들처럼 살지 않았다. 폴란드인들은 적어도 이토록 갑작스레 또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소련인들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그들이 다른소련인들과 마찬가지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죽음뿐이었다. 여러 폴란드 장교는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군인들보다 더 강하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이미 무기를 빼앗긴 터였으며, 보통 두 사람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다른 한 사람에게 사살당해 누구도 그 시신을찾을 수 없을 법한 장소에 묻혀 있었다. 이로써 그들은 비로소 소련역사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소련인과 함께할 수 있는 듯 보였다. 영원한 침묵으로 말이다.  - P248

수감자들은 학살 장소로 끌려가면서 트럭 밖으로 노트나 일기장을 던졌는데,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주워 가족들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이것은 일종의 폴란드식풍습이었던 터라 그들이 지나간 길에서는 쉽사리 수많은 노트를 찾아볼 수 있었다. 소련의 세 수용소에 있던 죄수들과 달리 이 노트의주인들은 자신들이 곧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코젤스크, 오스타시코프, 스타로빌스크에 갇혀 있던 이들도 수용소를 떠날 때 버스 밖으로 노트를 던지기도 했으나 그곳에는 소련이 우리를어느 장소로 보내는지 모르겠다" 등의 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련과 독일의 차이였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동쪽의 소련은 몇몇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전체적으로 비밀스러운일 처리를 바랐다. 이와 달리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의 독일은 신중한 일 처리를 원한 적도 없었을뿐더러, 심지어 그러려던 때조차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했다. - P264

AB 악치온의 희생자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을 스스로, 혹은 가족들이 담담히 받아들이도록 하고자 애썼다. 죽음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저마다 죽음을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에치스와 하브로프스키는 "폴란드땅을 적신 피는 폴란드를 더 강하게 하리라. 자유롭고 위대한 폴란드의 복수를 키워내리라"라고 적었다. 자신을 심문하던 자들을 비난했던 리샤르트 슈미트는 이와 달리 어떤 앙갚음도 없기를 바랐다. "아이들에게 복수하라 말하지 마시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를 뿐이니 마리안 무신스키는 그저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모두 사랑해." - P265

AB 악치온으로 죽어간 이들 중 몇몇은 앞서 소련에 포로로 끌려간가족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소련과 독일이 대 폴란드 엘리트 정책을 서로 비슷하게 맞추거나 조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상이된 이들은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소련은 계급투쟁 혹은 계급전쟁이라는 구실을 대 자신들의 체제에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했고, 독일 역시 열등한 인종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긴 했으나 어찌됐든 새로 얻은땅을 안정적으로 지키고자 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양국의 정책은매우 유사한 모습을 띠었다. 차이라면 그에 동반되는 강제이주 그리고 대량학살이 더 많고 적은의 정도 차이뿐이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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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의 두 ‘혁명‘, 집단화와 기근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 가려져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독일의 나치화를 보고 실망한 많은 유럽인은 모스크바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개러스 존스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권력을 강화하던 1933년 초반, 두 체제를 모두 목격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1933년 2월 25일, 그는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날아감으로써 신임 독일 수상과 함께 비행기를 탄 최초의 언론인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유럽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존스는 ‘나의 투쟁』을 읽었고, 독일 정복, 동유럽 식민화, 유대인 말살이라는 히틀러의 야망에 대해 감을 잡고 있었다. 이미 수상이었던 히틀러는 제국 의회Reichstag의 해산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다음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자신의 재임 기 - P119

간을 늘리고 독일 의회에서 나치당이 차지하는 자리도 더 넓히려 했다. 존스는 신임 수상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응을 처음에는 베를린에서, 나중에는 프랑크푸르트 집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느낀 것은 "순수한 원시적 숭배‘였다.‘
그 뒤 모스크바로 떠남으로써, 존스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독재 정권이 막 시작된 땅에서 "노동 계급이 독재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존스는 두 체제 간의 중요한 차이점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서는 새로운 체제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반면 스탈린은 조직적인 거대한 폭력을 구사하는 강력한 경찰 기구를 바탕으로,
일당 독재국가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존스가 목격하고보고했듯이,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은 시민 수만 명을 총살하고, 수십만 명을 추방하며, 수백만 명을 아사 직전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스탈린은 사회 계급과 민족을 기준으로 소련 시민 수만 명을 추가로 사살할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은 1930년대 히틀러의 역량을 훨씬 넘어서 있었고, 어쩌면 당시의 히틀러로서는 그렇게 할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 P120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기근을 자신의 선거운동에 활용해, 이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되기에 앞서 분노를 유발하는 이데올로기 정치 문제가 되게끔 만들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상대로 분노를 터뜨리며, 우크라이나 기근을 마르크스주의의 폐단을 증명하는 증거로사용했다. 1933년 3월 2일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 집회에서 히틀러는 "전 세계의 곡창지대가 될 수 있는 나라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외쳤다. 단 한 단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만으로 히틀러는 소련에서의 떼죽음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호자인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결부시켜버렸다. 히틀러의 평가를 전적으로 거부 또는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거짓과 진실의 묘한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소련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은 기근에 대한 히틀러의 평가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와 뒤섞여 있던, 좌파 정치에 대한 그의 비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 P122

1932년 하반기와 1933년 초반, 자신이 일으킨 대재앙이 지속되는와중에 스탈린이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국제 노선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소련 인민의 끔찍한 고통과 떼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이었다. 독일 국내정치에서 이 노선은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더 열심히 지지토록 하는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련 기근의 중대한 몇 달은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시기이기도 했다. 즉각적인 계급 혁명을 주장하던 독일공산주의자들 덕분에 나치는 중산층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사무직과 자영업자도 사회민주당보다는 나치에 표를 던졌다. 그래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을 합산하면 나치당의 지지율보다 더 컸다.
그러나 두 정당은 스탈린의 노선 때문에 서로 협력할 수가 없었다.  - P123

스탈린 경제 정책의 진정한 결과를 당시 해외의 보도인들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히틀러는 독재자로서 시행한 최초의 정책 중에서 재분배에 관심이 쏠리도록 치밀하게 의도했다. 소련의 기아가 절정으로치닫던 순간, 독일은 유대계 시민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1933년3월 5일 선거에서 승리한 후,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유대계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집단화와 마찬가지로, 불매운동은 다가오는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가장 손해를 보게 될 사회 계층이 어디인지보여주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농민이었지만, 독일에서는 유대인이었던것이다. 실제로는 나치 지도자와 나치 준군사 조직들의 엄격한 관리의 산물이었으나, 불매운동은 유대인 착취에 대한 사람들의 ‘자발적분노‘에 따른 산물인 양 묘사되었다.
이 점에서 히틀러의 정책은 스탈린의 정책과 비슷했다. 소련 지도자는 소련 변방에서의 혼란이, 그리고 부농의 제거가 진정한 계급 전쟁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 모두 같은 정치적 결론을 내렸다. 필요한 재분배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려면 국가가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124

1934년 6월,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스탈린은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선포된 인터내셔널의 새노선에 따르면 이제 정치는 더 이상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 문제가아니었다. 대신 소련과 세계 공산당은 ‘반파시스트‘ 캠프에서 널리 좌파 세력을 결집하기로 했다. 계급투쟁을 엄격히 수행하는 대신, 공산주의자들은 부상하는 파시즘으로부터 문명을 구해야 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때문에 유명해진 단어인 파시즘을 소련은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부패의 결과물로 제시했다. 파시즘의 확산은 기존 자본주의 질서의 종식을 의미했던 한편, 소련에 대한 파시즘의 극심한증오(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는 소련과 여타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소련 수호를 위해) 다른 자본주의 세력과 타협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 P130

인민 전선은 소련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인프랑스와 스페인에서 가장 큰 성공을 누렸다. 최고의 승리는 파리에서 거뒀는데, 이곳에서 인민 전선 정부는 1936년 5월 실제로 집권에성공한다. (에리오의 급진당을 포함한) 좌익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했고, 사회주의자 레옹 블룸이 총리가 되었다. 승리를 거둔 선거 연합의 일원인 프랑스 공산당은 공식적으로는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의회 다수당이 되었고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투표 결과는 개혁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프랑스 외교정책을 소련에 우호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파리에서 인민전선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좌파가 거둔 승리로 간주되었다.  - P131

스페인에서는 정당 연합이 인민 전선을 형성했고, 1936년 2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건이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다.
7월에는 극우 집단의 지지를 받는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정부는 저항했고, 그 결과 스페인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인에게는 본질적으로 국내 문제였지만, 인민 전선에 대한 이념적 적들이 참전했다. 소련은 1936년 10월 궁지에몰린 스페인 공화국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우익 세력을 지원했다. 스페인 내전은 베를린과 로마의 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고, 스페인은 유럽 내 소련 정책의 관심이 집중되는 격전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몇 달 동안 주요 소련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 P132

‘스페인을 돕자!‘는 위험에 빠진 공화국 편에서 싸운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구호가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소련이 민주주의 편에 선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통찰력이 뛰어난 유럽 사회주의자의 한 명이었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 좌파를 제압하려는 스페인 내 스탈린주의자들의 행동에 경악했다. 그의 통찰처럼, 소련은 무기와 함께 정치 행위까지 수출했다. 스탈린의 스페인 공화국 지원에는 대가가 따랐다. 스페인 영토에서 파벌 싸움을 벌일 권리를 준 것이다. 스
"탈린의 숙적인 트로츠키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멀리 떨어진 멕시코로추방당하긴 했지만), 공화국을 지키던 수많은 스페인 사람은 스탈린의 - P132

소련보다는 트로츠키라는 개인에게 더 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주의 선전물은 스페인의 트로츠키파를 파시스트로 낙인찍었고,
그들을 ‘반역죄‘로 사살하고자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장교들이 스페인으로 파견되었다. - P133

스탈린은 소련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는 점도 신경 써야 했다. 만주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였던 곳을 빼앗아 만든 일본 식민지였다. 이러한 식민지는 더 늘어날 기세였다. 중국은 소련과의 국경이 가장 긴 나라이자 정치가 불안한 국가였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 "
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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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12년 집권과 소련의 74년 집권은 분명 우리가 세계를 평가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은 나치의 범죄가 역사적으로도 보기드물 정도로 심각했다고 여긴다. 이는 히틀러 스스로가 실제 이상으로 성과를 신봉한 것과 묘한 대응을 이룬다. 또 다른 사람들은 스탈린의 범죄가 비록 그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이는 역사가 오직 한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따라서 어떤 정책을 쓰든 그 방향과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모두 정당하다는 스탈린의 믿음을 일깨워준다. - P21

전혀 다른 기초 위에 세우고 다져진 역사 없이는, 우리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아직도 우리를 그들의 올가미에 쥐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기초란 뭐가 될까? 이 연구는 군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지성사를 포괄하고 있지만, 사용하는 기본 연구 방법은 단순하다. 1) 과거의 어떤 사건도 역사적 이해를 초월할 수 없다. 또는 역사 탐구의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점을 고수할 것. 2) 당시 사람들이 선택할수 있는 대안이 확실히 있었는지에 대해 숙고할 것. 3) 다수의 민간인및 전쟁포로를 학살한 스탈린과 나치의 정책을 시기순으로 정연히 따져볼 것. 이는 제국의 지정학에서가 아니라, 희생자의 지리학에서 구성되는 문제다. 실제로는 허구로든 블러드랜드는 정치적 지역이 아니다. 유럽의 가장 살인적인 체제들이 가장 막대한 살육을 저지른 곳. 그저 그뿐일 따름이다. - P21

역사는 유럽의 과거사를 국민 단위에서 나누고, 그 단위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면서 종종 이지적이고도 용감하게 지켜져왔다. 하지만 어느 한 집단의 학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무리 잘 하더라도1933년에서 1945년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일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의 과거사를 완벽하게 안다고 해도, 그들이 겪은 굶주림의 원인을 알아낼 수는 없다. 폴란드 역사를 착실하게 익혀도 왜대숙청 시기에 그토록 많은 폴란드인이 죽어가야 했는지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벨라루스의 과거사를 연구한다 해도 그토록 많은 벨라루스인이 포로수용소와 대빨치산 전역에서 숨져가야 했던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유대인들의 삶을 연구하면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알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원인은 설명할 수 없다. 한 집단에 벌어진일은 종종 다른 집단에 벌어진 일과 비교했을 때 이해된다. 그러나 그런 비교는 시작일 뿐이다. 나치와 소련 체제 역시 그 지도자들이 이땅들을 어떻게 장악하려 애썼는지, 그리고 이들 집단을 어떤 관계에놓고 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 P23

오늘날 20세기의 대량학살이야말로 21세기에도 가장 중대한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는 데는 널리 합의가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블러드랜드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게 없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집단학살은 유대인의 역사를 유럽사에서 떨어뜨려놓고, 동유럽의 역사도 서유럽의 역사와 구분 짓게끔 한다. 살육이 국가 민족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론적인 구분에 영향을 준다.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가 사라진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말이다. 이 연구는 나치와 소련 체제를 하나로, 유대인사와 유럽사를 하나 - P22

로, 각 국민의 역사를 하나로 묶는다. 희생자와 집행자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그만행에 개입된 이데올로기와 실행 계획을 따지고, 그런 만행이 벌어지게 만든 체제와 사회를 분석한다. 이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지도자들이 내린 명령으로 살육당한 사람들의 역사다.
희생자들의 고향 땅은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 있었고, 그 땅은 히틀러와 스탈린이 집권한 다음 온통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 P23

나치와 소련 체제의 기원, 그리고 그들이 왜블러드랜드에서 만나게되었는지의 기원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 있다. 이 전쟁은 유럽의 옛 대륙 제국들을 무너뜨리는 한편, 새로운 제국에 대한 꿈을 일으켰다. 황제들의 왕조 통치 방식을 국민 주권에 의한 통치라는 약하디약한 개념으로 바꿔놓았다. 수백만 명의 사람이 명령에 따라 싸우고 죽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목적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 ‘조국을 위하여‘였다. 그 조국이란 이미 수명을 다했거나, 이제 막 태어나려 하는 것이었건만. 새 국가들은 거의 무에서부터 만들어졌으며, 수많은 민간인 집단이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옮겨지거나 말살되었다. 10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 정권에 의해 학살되었다. 독일계 주민과 유대인들이 러시아 제국에 의해 거주지에서 멀리 이동했다.  - P27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이 전쟁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세계 경제를 조각내버렸다는 사실이다. 1914년에 살아 있던 유럽의 성인은 생전에 두번 다시 그만큼의 자유무역이 복구되는 일을 보지 못했다. 또 그런 유럽인의 대부분은 그 전 시대 수준의 번영을 다시는 누려보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간단히 말해서 두 진영의 무력 충돌이었다. 한쪽 진영에는 독일 제국, 합스부르크 왕실,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동맹 제국")가, 반대 진영에는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미국("협상 제국")이 있었다. 1918년 협상 제국의 승리는 3대 유럽 대륙 제국인 합스부르크, 독일, 오스만의 종말을 가져왔다.  - P28

레닌은 평화를 얻은 대신 러시아 제국의 서쪽 변방이던 곳들을 독일의 식민 지배 아래 내주었다. 그러나 물론, 독일 제국도 폭압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나머지와 함께 곧 쓰러져버릴 테니 별문제는 아니라고 볼셰비키는 믿었다. 그때가 되면 러시아와 다른 혁명 세력은 그들의 새 질서를 서쪽으로, 지금 빼앗긴 땅의 훨씬 너머까지 퍼뜨릴 수있으리라. 레닌과 트로츠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서부 전선에서의 독일의 패배를 그리고 독일 내에서의 노동자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주장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중부와 서부 유럽의 좀더 산업화된 땅에서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으로 그들과 다른마르크스주의자들의 러시아 혁명을 정당화한 것이다. 1918년 말과1919년에는 레닌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다. 1918년 가을,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 영국, 미국에게 확실히 패배했다. 그리고 패배하지는 않았으되 그들의 새로운 동쪽 땅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독일 혁명가들은 집권을 위해 산발적인 시도를 벌이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거저먹었다. - P31

나중에 히틀러는 독일 수상으로서 소련과 더불어 폴란드를 분할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단계를 밟으며, 그는 많은 독일인이 가졌던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폴란드의 국경선은 부당하며, 그 국민은 국민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히틀러가 여느 독일 민족주의자와 달랐던 점은 그다음에 품었던 그의 생각에 있었다. 모든 독일인을하나로 모은 독일을 세우고, 폴란드를 정복한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 P38

쓸어버리고, 소련을 무너뜨린다! 그 과정에서 히틀러는 폴란드와 소련 모두에 우호적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여느 독일인보다 더 극단적인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감추었다. 하지만 국가사회주의에는 처음부터 이 파멸적인 비전이 나타나 있었다. - P39

소련의 민족들은 새로운 공산주의적 이미지로 재탄생해야 했다. 농민은 정복당할 때까지 살살 달래졌다. 볼셰비키는 지방의 농민들과 일시적으로 타협했지만 이는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의 잠시 동안만이었다. 새 소련 체제는 농민들이 지주들에게서 빼앗은) 토지를 보유하고 시장에 상품을 내다 파는 일을 허용했다. 전쟁과 혁명의 결과 초래된 파괴로 심각한 식량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볼셰비키는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위해 곡물을 요구했다. 1921년에서 1922년까지 수백만 명이 굶주림이나 그와 관련된 질병으로 죽었다. 볼셰비키는 이 경험으로 식량이 무기가 될 수 있음을깨달았다. 그러나 일단 이 갈등기가 끝나고, 볼셰비키가 승리했을 때, 그들은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인민에게 평화와빵을 약속했으며,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그 두 가지를 헐값으로 제공해야만 했다. - P41

대공황의 도래는 스탈린이 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해 한 말을 입증해주는 듯 보였다. 1929년 10월 7일의 ‘검은 목요일‘에 미국의 주식시장은 붕괴되었다. 1929년 11월 7일, 이날은 볼셰비키 혁명 12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스탈린은 스스로의 정책으로 소련을 빠르게 바꾸고 있는 ‘시장에 대한 사회주의 경제의 대안을 강조했다. 그는 1930년이면 "위대한 전환이 이뤄지는 해가 될 것이라고, 집단화가 안정과 번영을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때쯤이면 옛 농촌 지역은 자취를 감추게 되리라. 그리고 혁명은 여러 도시에서 완성되리라. 프롤레타리아는순화된 농업노동자들이 생산한 식량을 기반으로 부쩍 성장해 있으리라. 그들 노동자는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사회를 창출할 것이며, 강력한 국가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리라. 스탈린은 근대화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듯이, 스스로의 권력욕 역시실현되게끔 했다. - P45

1933년, 민주주의에 대한 소련과 나치식 대안은 단순한 토지개혁따위는 하지 않겠다(실패한 민주 국가들은 그마저 이뤄내지 못했지만)는그들의 입장이 어떤 성과를 내놓느냐에 달려 있었다. 서로 그토록 다른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스탈린은 문제의 핵심 중 하나가 농업 부문에 있으며 그 해결책은 과감한 국가 개입에 있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했다. 국가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새로운 유형의 정치체제를 뒷받침하게 될 것이었다. 1928년스탈린의 5개년 경제계획이 시작된 이래 공공연해진 스탈린식 접근법은 집단화였다. 소련 지도자들은 1920년대에 농민들이 번영하도록놔두었으나, 1930년대 초부터 농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농민이국가를 위해 일해야 하는 집단농장을 만들어냈다. - P51

히틀러와 스탈린은 베를린과 모스크바에서 권좌에 올랐으나, 그들의 혁신 비전은 그 둘 사이에 놓인 모든 땅에 걸쳐 있었다. 그들이 통제하려는 유토피아는 우크라이나에서 겹쳤다. 히틀러는 1918년에 독일이 잠시 지배했던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의 식민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직후에 자신의 혁명을 우크라이나에서 실행한 스탈린은 그 땅을 히틀러와 거의 같은 시각에서 바라봤다. 그 농토와 농민은 현대산업국가를 만들기 위해 최대한 쥐어짜야할 대상이었다. 히틀러는집단화가 형편없는 실패로 끝날 거라고 보며, 이는 또한 소련 공산주의의 실패의 증거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스스로는 독일인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야 함을 추호도 의심치않았다 - P53

그곳은 그들이 기존 경제학의 법칙을 깨뜨릴 수 있게 해주는 땅이자, 그들의 나라를 궁핍과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줄 땅, 그리고 그들의 이미지대로 유럽 대륙을 바꿔나가게 해줄 땅이었다. 그들의 프로그림과 그들 권력의 성패는 온통 우크라이나의 기름진 땅과 그곳의수백만 명의 농업노동자에 기대고 있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인들은사상 최대의 인위적 기근 때문에 수백만 명씩 굶어 죽었다. 그것은우크라이나의 특별했던 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1941년에는 히틀러가 우크라이나를 스탈린의 손에서 빼앗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식민지 건설을 위해, 먼저 유대인들을 총살하고 소련군 포로들을 굶겨 죽이기 시작했다. 스탈린 일파는 그들 스스로의 국가를 식민지화했으며, 나치는 점령한 소련의 우크라이나를 식민지화했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권좌에 있었던 세월 동안, 블러드랜드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또한 다른 유럽 지역, 나아가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우크라이나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 P54

1933년의 대규모 기아는 1928~1932년 실시한 스탈린의 첫 번째 5개년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스탈린은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했고,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강행했으며, 패배한 국민을 이끌 무서운아버지로 부상했다. 그는 시장을 계획경제로, 농민을 노예로, 시베리 - P62

아와 카자흐스탄의 불모지를 강제수용소 단지로 바꿔버렸다. 그의 정책은 수만 명을 처형으로, 수십만 명을 탈진으로 죽게 했고, 수백만명을 굶주림의 위험에 빠뜨렸다. 물론 공산당 내부의 반발을 우려하긴 했지만, 스탈린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재능과 총독들의 자발적인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를 예견하며 미래를 만든다고 주장하는관료 체제가 있었다. 그 미래는 공산주의였다. 중공업이 필요하며, 따라서 집단농장이 필요하고, 결과적으로 소련 사회의 최대 집단인 농민을 통제해야 하는 공산주의 말이다. - P63

강제추방은 계속되었고, 집단화도 진행되었다. 1930년 후반과1931년 초반에는 약 3만2127가구가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 추가로추방당했는데, 1년 전 첫 번째 추방 물결에서 쫓겨난 사람과 비슷한숫자였다. 농민은 굴라크에서 탈진해 죽거나 집과 가까운 곳에서 굶어 죽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후자가 낫다고 여겼다. 추방당한친구와 가족의 편지가 간혹 검열을 피해 도착하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이런 조언을 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든, 여기 오지 마 우린 여기서 죽어가고 있어. 숨거나 차라리 거기서 죽어.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긴 오지 마." 어느 공산당원의 생각처럼, 집단화에 굴복한 우크라이나 농민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사라지느니 집에서 굶주리는 쪽을 선택했다. 1931년 집단화가 마을 전체 차원이 아닌 가구별로 세세히 진행되면서, 저항은 더 어려워졌다. 필사적인 방어를 유발하는기습도 없었다. 연말이 되자 새로운 접근법이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농지의 약 70퍼센트가 집단화되었다. 이로써 1930년3월 수준에 다시 도달했으며, 이번에는 그 수준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 P75

1932년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외부의 안보 위협도 없고 내부의 도전 세력도 없으며, 자신의 통치가 불가피함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아도 된 상태에서, 스탈린은 소련령 우크라이나주민 수백만 명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는 우크라이나 농민이 가해 - P89

자이며, 자신은 피해자라는 순전한 적대적 태도를 택했다. 굶주림은카가노비치에 대한 계급투쟁이었고, 스탈린에 대한 민족주의 투쟁이었다. 오로지 굶주림만이 방어 수단이 되는 투쟁,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농민에 대한 지배를 과시하고 싶었고, 심지어 그런 태도가 요구하는 극심한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르티아 센의 말처럼 굶주림이란 "부여되는 것이며, 식량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주민 수백만 명을 죽인 것은 식량 부족이 아닌 식량 배급이었고,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스탈린이 결정했다. - P90

이 최후의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마는데, 살인을 실행하는 이들은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한 활동가의 기억에 따르면, 그해 봄 그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봤다. 여자와 아이들은 배가 부풀어 오르고, 얼굴이 창백하며, 숨은 쉬지만 눈빛은 공허하고생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광경을 봤음에도 정신이나가거나 자살하진 않았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여전히 나는 - P95

믿고 싶기에 믿었을 뿐이다." 다른 활동가들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두려움이 많았던 게 분명했다. 그 전해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모든서열에서 숙청자가 나왔다. 1933년 1월, 스탈린은 당 지도부를 장악하고자 심복을 보냈다. 더 이상 당에 대한 믿음을 내보일 수 없던 공산주의자들은 안에 있는 모든 이를 파멸로 몰아넣는 ‘침묵의 벽‘을 이루었다. 그들은 저항하는 자는 숙청당하며, 숙청당한다는 것은 곧 그들 자신이 처형하는 사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임을 알고있었다. - P96

굶주림은 반란 대신 도덕의 부재, 범죄, 무관심, 광기, 무기력, 그리고 종국에는 죽음을 불러왔다. 농민들은 수개월 동안 형언할 수 없는고통을 겪었는데, 워낙 길고 악랄한 고통인 탓도 있었지만 사람들이너무 약하고, 가난하며, 대체로 문맹이라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하지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생존자들 가운데는 그 일을 기록한 사람들도 있다. 한 생존자는 농민이 무슨 일을 하든, "그들은 죽고, 죽고, 또죽었다"고 회상했다. 죽음은 느리고, 굴욕적이며, 넘쳐흐르고, 흔해빠진 일이었다. 품위 있게 굶어 죽는다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페트로 벨디는 죽음을 예감한 날 안간힘을 써서 고향마을을 기어다녔다. 다른 마을 주민들이 어디 가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자신을 매장하러 묘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낯선 이들이자신의 몸을 구덩이까지 끌고 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기 무덤을미리 파두었지만, 묘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른 시체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 그는 다른 무덤을 팠고, 몸을 누인 다음, 죽기를 기다렸다. - P97

1933년에는 소비에트 시민 약 14만2000명이 추가로 굴라크로 이송당했는데, 대부분은 굶주리거나 티푸스에 걸린 상태였고, 다수는 소련령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수용소에서 그들은 식량을 찾아 헤맸다. 굴라크에는 건강 상태가 나은 자에게는 음식을 주고 약자에게는 음식을 주지 않는다는 방침이 있었고, 추방자들은 이미 배고픔 때문에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 일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굶주린 포로들이 야생 식물과 쓰레기를먹어 스스로 중독 상태가 되자, 수용소 관료들은 태죄를 걸어 그들을 처벌했다. 1933년 굶주림 및 관련 질병으로 수용소에서는 최소한6만7297명이 죽었고 특별 정착지에서는 24만1355명이 사망했는데,
대다수는 소련령 우크라이나 태생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흐스탄이나 최북단으로 가는 오랜 여정에서 수천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시체는 기차에서 꺼내 바로 매장했고, 이름과 숫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 P99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들은 주인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빵 한 조각만 달라고 구걸했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 위에, 목욕탕과 헛간 안에 수많은 시체가 있었다. 배고프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길에서 기어다니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경찰이 그들을 일으켜주었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두고말았다. 4월 말, 나는 수사관과 함께 헛간을 지나다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시체 수거를 위해 경찰과 의사를 불렀는데, 그들은 헛간 안에서 다른 시체를 찾아냈다. 두 시체 모두 굶어 죽어 있었고, 폭력의 흔적은 없었다. 우크라이나 교외 지역은 식량을 다른 소련 지역으로 공출한 상태였으며, 이제는 그에 따른 결과, 즉 굶주림을 굴라크로 공출하고 있었다. - P100

살아남으려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버텨내야 했다. 1933년 6월, 한 여의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그녀가 아직 식인종이 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이 편지를 네가 볼 때쯤이면 어떨지 모르겠어"라고 밝히고 있었다. 착한 사람부터 먼저 죽어갔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몸을 파는 일을 끝내 하지 않은 사람들 말이다. 시체 뜯어먹기를 못내 거부한 사람들도 죽어야 했다. 식인을 하지 않음으로써, 부모들은자식들이 보는 가운데 죽어갔다. 1933년의 우크라이나에는 고아가넘쳐났고, 때로는 사람들이 그들을 거두었다. 그러나 먹을거리가 없는 판에는 낯선 이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해줄 게 별로 없었다. 사방에 거적때기나 담요를 덮어쓴 소년 소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들은 자기 배설물을 먹으며 죽음을 가다리고 있었다. - P103

식인은 생명과 맞먹는 무게의 터부다. 그래서 지역사회는 그런 처절한 생존 방식에 대한 기록을 없애서 자신들의 명예를 잃지 않으려 했다. 우크라이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식인 이야기를 쉬쉬하려 안달이다. 그러나 1933년 우크라이나의 식인 행위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시 소련 체제의 성격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굶주림은 식인 행위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목구멍으로 넘길 곡식 낟알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어지자, 우크라이나에도 식인 행위가 찾아왔다. 입에 댈 수 있는 게 사람의 살코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P104

어느 소련공무원이 이탈리아 외교관에게 귀띔하기로는 "우크라이나의 인종적구성은 그때 이후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찍이 카자흐스탄에서 좀더극적으로 이뤄졌던 인종 구성의 변화가 우크라이나에서도 일어났다.
어느 쪽이든 대러시아계 사람들에게 유리한 변화였다"
1930년대 초, 소련과 그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숨졌을까? 결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믿을 만한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기록은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보여준다. 예를 들어 키예프의 공공보건기구 기록에는 그 지역에서1933년 4월에만 49만3644명이 굶어 죽었다고 적혀 있다. 한편 지역행정 단위들은 기아 사망자 기록을 내기 두려워했고, 결국 아무것도남기지 않았다. 국가에서 사망자를 파악하려 할 때 접촉할 수 있는대상은 매장 팀원들일 뿐일 때가 많았으며, 그들도 자신들의 일을 일일이 기록해놓고 있진 않았다. - P107

우크라이나의 농업사회 구조는 검사, 압박, 착취의 과정을다 거쳤다.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소련 전역의 캠프들 사이에서 죽거나 능욕당하거나 흐트러뜨려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죄의식과 무력감에, 때로는 변절과 식인 행위의 기억에 시달려야 했다. 수십만 명의고아가 소련의 시민으로 자라났지만 그들은 우크라이나계라고 할 수없었다. 적어도 그들을 탄생시킨 우크라이나 가족과의 끈이나 우크라이나 농촌의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참극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은 마음의 의지가지를 잃어버렸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와 정치운동가는 모두 자살했다. 한사람은 1933년 5월에, 다른 사람은 같은 해 7월에 소련 국가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얼마간이라도 자치권을 지켜주려는 시도를 분쇄했으며,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말살해버렸다.
당시 소련에 있으면서 그 기근 사태를 목격한 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국가적 비극이 아니라 인도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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