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마음이라는 거. 쇼팽에게 피아노는 어떤존재였을까. 시인에게 흰 종이가 백지이자 발이 푹푹 빠지는 설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초대장이듯이, 쇼팽에게도 피아노는 여러 의미였을 것 같다. 그는 흰 건반과 검은 건반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세계는 양면을 지니고 있구나. 흰 쪽은 밝고 따뜻하고 안정적이지만 검은 쪽은 어둡고 춥고 위태롭구나. 달의 앞뒷면과도 비슷한 점이 있군. 그런데 왜 인간은 달의 앞면만을 바라보도록 설계되었을까. 어디 한번 내가 신이 되어보아야겠다. 그렇게 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었던 것인데…. 딱 한 번, 딱 한 음 흰 건반을 누른 후엔 검은 건반 위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라고 만 것이다. - P108
수전 손택과 조너선 콧의 대담(《수전 손택의 말》, 마음산책, 2020)을 읽던 중에 인상적인 구절을 마주쳤다. "내악마들을 빼앗아가지 말라, 천사들도 함께 떠날 테니까." 릴케의 시구라 했다. 릴케의 시에 이런 구절이있었던가? 그 즉시 밑줄을 긋고 책을 덮었다. 더 이상 독서가 불가능할 만큼 풍부한 고민이 시작되었기때문이다. 악마를 단순한 악으로 치부하지 않으려는, 쉽게 배척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놀라웠고 악마와 천사를 한 몸 안에 깃든 두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도 좋았다. - P112
내게 가시손은 단순한 관용구가 아닌, 존재론적슬픔을 함의한 광막한 단어다. 문득 가시손의 반대말이 궁금해진다. 아마도 쓸어 담고 쓰다듬고 치료하는 손이겠지? 다행히 세상엔 가슴팍에 청진기를대고 숨소리를 듣거나 진맥을 짚어 영혼의 상태를살피는 손도 존재한다. 내가 무수한 나들의 총합이듯이 나의 손안에도 무수한 손들이 자리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시손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서 한평생 파괴지왕으로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닐 터. 연습하는 손은 게으른 손을 이길 것이고 호기심 가득한손은 나태한 손을 앞설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오늘당신은 어떤 손을 가졌습니까. 그 손안엔 무엇이 있습니까. 따뜻합니까. - P121
시간이 우리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는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 자신이 그럴듯하게 라벨링돼 진열대에 올려진 와인 같다는 생각이 오래되고희귀할수록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제아무리 고급 케이스에 담겨 기쁜 날 선한선물로 건네진다 하더라도 한 그루 포도나무였던 시절, 포도밭에서의 시간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지기 마련이다. 짓밟고 망가뜨릴 심산으로 포도나무를기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정성과 사랑으로, 기도로 길러진 존재들이다. 포도밭의 태양, 포도밭의 평화를 떠올리면 삶에 찢기고 벌려진 상처가 소독되는 기분이다. 슬픈 말이지만, 우리는 모두 그 시간으로부터 와 여기에 있다. - P125
한 존재의 기원이자 시작점, 최초의 우물일그곳. 다시 돌아갈 방법은 전무하지만 이따금 그곳을 떠올리면 영혼이 지친 몸을 누이는 것 같다. 언젠가 시에도 적은 것처럼 "눈을 감으면 오는 기차"(《소인국에서의 여름〉,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5)를 타고 나는 자주 그곳으로 간다. 달빛 환한 밤, 수만 평의 포도나무 사이를 천천히 거니는 상상만으로도 어깨가가벼워지고 발이 살짝 떠오른다. 눈을 뜨면 형체 없이 사라지겠지만 아쉬움만 남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다녀오면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절대로 추하게늙어가고 싶지 않다‘ 굳은 결심을 하게 되니까. 그곳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생각될 때에도 당신과 보이지 않는 실로 묶여 끝끝내 반짝이는 세계, 당신의 빈야드가. - P126
더 오랫동안, 더 멀리에서 담는다. 두눈물은 같은 눈물이지만 완전히 다른 눈물이다.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자의 눈물은 또 다른 의미로그토록 깊다. 그것이 장기든 감정이든 믿음이든 인간은 타인의로부터 무언가를 구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불완전하니까. 약하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득이 가슴을 칼로 그어 억지로 심장을 빼내려는 그악스러운 폭력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구한다고 다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세상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제자리를 찾는 것들이 있다. 마음이 펄펄 끓을 땐 너는 왜 내게 심장을꺼내 주지 않느냐고 따져 묻기 전에 이런 주문을 외워보는 건 어떨까. 일일시호일. 일일시생일. 날마다좋은 날, 날마다 생일이라는 마음으로. - P131
진짜 바느질에는 영 재능이 없을지라도 영혼의수선공으로서는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내 삶이니까. 내 영혼이니까. 고쳐 쓰든 뒤집어 쓰든해봐야겠지. 뭐든 기본이 중요한 법이니 욕심부리지말고 홈질부터 천천히 배우기로 한다. 홈질은 손바느질의 기초입니다. 박음질과 헷갈려하시는 분도 많지만 엄연히 다른 기법이에요. 지금부터 옷감 두 장을 포개어놓고 바늘땀을 위아래로 움직여볼 건데요, 일직선이 되도록 반듯하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이번엔 졸지 않고 화면 속 선생님의 말을 경청한다. 잘 살고 싶다. 나는 정말이지 잘살고 싶다. - P136
그러니까 오늘의 결론은 ‘다시‘에 있다. 다시 볼때 수정되고 겹쳐지고 순해지거나 단단해지는 많은 것들이 인간의 삶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꺼내 든 오늘의 영화는 <오만과 편견〉이다. 아마 이 영화는 지금껏 내가 가장 많이 다시 본영화일 것이다. 오만이 오만을 극복하고, 편견이 편견을 극복할 때 비로소 열리는 사랑 이야기. 이 사랑의 선망선에는 언제고 갇혀도 좋을 것이다. - P143
말이 화살일 때가 있다. 얼마 전엔 10년 전쯤 알고지내던 지인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다. 반색하며안부를 나누던 중 지인이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며 "그런데 너…." 하고 운을 뗐다. 내 쪽에서 황급히말을 받았다. "왜요 왜! 저 늙었다는 소리 하시려고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데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굴었다. 상대도 부정하지 않았다. "어… 분위기도 그렇고 뭐가 좀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날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무슨 말씀이시냐, 그럼 세월이얼만데 변하지 안 변했겠냐 눙치듯 응수했는데 며칠 - P149
이 지나도 그 말이 아프게 나를 찔렀다. 박힌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화살이. 아픔의 이유는 명백하다.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있어서, 생기 있고 질문 많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이사라지고 거울 속엔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뭘 쳐다봐?‘ 묻는 사람만 있어서. 하필 그 즈음 세사르 바예호의 시를 읽고 있던 것도 문제(?)가 됐다. 시 <시간의 횡포〉(《태양의 돌》, 창비, 2013)의 모든 문장은 "죽었다"로 끝난다. 안또니아 아줌마도, 싼띠아고 신부도, 금발머리 아가씨 까를로따도, 외눈박이 노인과 라요도..… 남김없이 전부 죽은 것이다. 시간의 횡포 아래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한 줄 한줄 시를 읽어 내려갈 때마다 귓가에 들려오던 총성 소리. 다 읽고 나면 마른 우물 속에서 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 드는 시. 그렇다.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 던 저 슬픈 세사르 바예호의 시는 내 안의 무력 버튼을 꾹 누르고 만 것이다. 매일 진다. 지는 기분이 든다. 피곤해서도 지고 귀 - P150
찮아서도 지고 허무해서도 지고 우울해서도 진다. 그날따라 입고 나온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도 지고, 하필 우산을 두고 온 날 소나기가 내려서도 지고, 편의점에 들러 만 원이나 하는 우산을 샀는데 비가 홀랑 그쳐 씩씩거리며 또 진다. 텀블러 뚜껑이 제대로안 닫혀 가방 안이 홍수가 되어서도 지고, 눈앞에서버스를 놓쳐서도 지고, 주차장 구석에서 들려오는고양이 울음소리가 구슬퍼서도 진다. 변해서 슬픈이유는 다름 아닌 그것이다. 응전할 힘이, 무기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 - P151
그때도 부적을 붙이듯 탕종, 탕종, 입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같은 이응인데 탕종의 이응과는 너무나 다른 이용이 세상에는 너무 많구나, 하면서. 탕종의 힘은 나날이 커져갔다. 놀랍거나 두렵거나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슬픈 일이 닥칠 때마다 탕종, 탕종 하고 입 밖으로 되뇌는 것이다. 토붕 앞에서도 탕종, 자몽의 무지몽매함 앞에서도 탕종, 죽음 앞에서도 탕종이라고 말하면 종소리가 은은히 번져 나를 위한 안전한 막이 생겨나는 기분이다. 탕종이라는 말의 비밀스러운 느낌은 오래도록 내곁에 남아 있다. 비록 단호박크림치즈 탕종식빵은 하루도 못 가 사라져버렸을지라도. 탕종, 탕종. 나는 단어 하나로도 나를 지킬 수 있다. 단어가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려 한 사람의 집이자 우주가 된다는 것. 참 따뜻한 움막이다. 뜻밖의 신비다. - P163
일방통행인 길이었고 무조건 앞으로 가는 수밖엔 없었다. 그때, 맞은편 하늘에 상상으로 한 점을 찍었다. 시선을 점에 두고, 점만 뚫어져라쳐다보며 걸었다. 그곳의 나를 이곳으로 건너오게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꼭두의 한 점. 존재가 깃털 같아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럴 때 인간은 아주 작은 입김에도 날아갈 수 있다.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날아가버린다. 그럴 때 한 편의 시가 당신의 누름돌, 당신의 한 점이 되어줄 수는없을까. 한 점. 딱 한 점만 보고 걷는 것이다. 나도 이쪽에서 딱 한 점만 보며 걸을 것이다. 그쪽의 당신도 그렇게 와주었으면 한다. - P168
문학이라는 모닥불 앞에 모여앉은 우리가 공유해야 할 것은 사는 곳, 나이, 학벌 따위가아닌 ‘문학적 영혼‘일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합니까. 가장 깊이 찔린 기억과 가장 높이뛰어올랐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어떨 때 흩어지거나맺힙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온도, 색깔, 질감, 경도는어떠합니까.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당신이 거기 있다. 사각거리는 연필소리. 손등에 돋아나는 힘줄. 집중하는 입.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고 있다. 문학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단단한 결속력을느낄 때가 많다. 왜 하필 문학인가요. 세상에 재미난게 얼마나 많은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삶의 다른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건 어떤가요.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들은 안으로 삼키고 나도 나의 백지를 채워보기로 한다. - P172
어는점: 손발이 차갑고 눈앞은 캄캄하고 머리가꽝꽝 얼어버린 것 같은 상태. 주로 마감 직전, 백지를 마주한 나의 모습이다. 끓는점 : 나는 화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랑할 때만 찾아오는 온도. 녹는점 : 시를 쓰며 가장 자주 도달하는 상태. 내게 녹는다는 건 부드러움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들; 물속에서 녹고 있는 물고기. 한낮의 태양 아래, 아이스크림보다 먼저 손이 녹아버린다면? 눈사람에게 허락된 마지막 밤. 흰 사슴의눈동자가 호수로 변하는 순간. - P173
저 문장들은 시를 예비하는 ‘안료‘와 같다. 안로는 염료와 다르다. 안료와 염료는 물질에 색을 발현시키는 색소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염료는 물에 녹아스며드는 반면 안료는 물이나 기름에 녹지 않는 성질을 지녔다. 안료는 다른 무엇과 섞이더라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분명하게 자신임을 증명한다. 그런 안료를 재료 삼아 빚는 시는 빛에도 열에도 추위에도 강할 것이다. 그러니 어떤 문장이라도 좋다. 백지 안으로 걸어들어가 자신만의 은밀한 다락, 혹은 지하실을 열어볼 수만 있다면. 내가 쓴 문장이 나를 보여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존재들이고, 살아 있다는건 얼고 녹고 끓고 흩어지는 모든 순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 P174
목소리는 정말 신비롭다. 시간의 공격을 피할 수없는 인간에게서 가장 마지막까지 함락되지 않는성. 어릴 때 즐겨 보던 만화 주인공의 목소리와 성우의 얼굴이 겹쳐질 때 저분의 목소리는 늙지 않는구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목소리는 한결같구나 놀라울 때가 많았다. 한 사람이 생래적으로 지닌목소리는 지문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고유(固有)‘ 카테고리에 담길 인간의 조각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고유한 목소리가 있기에 다른 목소리, 또 다른 목소리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는 사실 또한. - P176
그땐 정말이지 시가 너무 아프고 무거웠다. 울면서 쓰거나 쓰고서 울었다. 이렇게 망가져 있는 세상도 싫고, 세상의 미래가 내 펜에 달린 것마냥 심각했던 마음도 싫었다. 그래서 쉽게 가려고, 손쉬운 위로를 구했던 것인데…. K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그건 잘하는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하던 걸 하세요. 하던 걸 하라는 말. 아마도 그 말에 깊이 찔렸던탓일까.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으냐는 질문에 나는 (또 무슨 용기에선지) 이런 거창한 대답을 내어놓고야 말았다. "사람들 들어간 뒤에 신발을 다 정리해놓고 들어가는 시를 쓰게 되지 않을까요." 그때로부터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한다. 하던 거라도 잘하는 일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여전한 신발들, 정리되지 못한 미숙하고 어려운 마음들, 너무 많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목소리를 꿈꾸지 않는다. 세 번째 시집을 펴내며 적었던 말을 기억한다. "나는 평생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 P178
살다 보면 ‘조금‘은 슬퍼지는 순간이 왜 없겠는가. 그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쓴 문장들이 징검다리가 될 때가 있다. 과거의 문장을 딛고 현재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현재의문장을 딛고 미래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간신히 한 걸음씩 나아간다. 망망대해 같은 바다를. 말과 사람이 함께, 느리더라도 함께. 그러니 하던 걸 하자. 이런 노래는 이런 노래고, 탁성은 탁성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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