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에서는 광활한 요새인 이란과 그 숙적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페르시아만을 마주한 채 맞서고 있다. 태평양 남쪽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리 시대 최강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리매김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중해에서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와터키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당장 내일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인다.
서기 2020년대에 오신 걸 환영한다.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시대는 이제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우리는 새롭게 등장하는 열강들이 서로 대립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수많은 주연 배우들은 물론 단역 배우들까지도 서로 밀치며 중앙 무대로들어서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대기권 위의 달과 - P8

그 너머까지에 대해서도 권리를 주장하는 나라들이 등장하면서 지정학적 드라마는 지구 영역 바깥으로까지 튀어 나가고 있다.
몇 세대에 걸쳐 고착된 질서가 일시적인 것으로 변하면 불안을 유발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다극화된 세계를향해 달려 왔다.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극 체제로 재편됐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체제가 한편에 있었다면, 반대편에는 소련과 중국이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공산주의 체제가 있었다. 이 시대는 당신이 어디에 선을 긋느냐에 따라 50년에서 8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미국의 힘이 거의 요지부동이던, 분석가들이 이른바 단극의10년이라 이름 붙인 시기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양극시대에서 벗어나 인류 역사 대부분에서 규범과도 같았던, 여러 열강들이 경쟁하는 <다극화 시대>로 회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P9

10년간 러시아는 게임의 바깥에 있었다. 쇠약해진 데다 확신도 없는, 그저 희끄무레한 과거의 잔영 속에 갇힌 채 말이다. 러시아는 나토가 자기네 서쪽 국경지대 쪽으로 전진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또 한때 자신들이 지배했던 국가의 국민들이 몇 번이고 나토 또는 EU에 가입하는 문제를 두고 실시한 찬반투표에서 찬성 쪽에표를 던지는 것도 보아왔다. 게다가 라틴 아메리카와 중동에서도 그들의 영향력은 표류하고 있었다. 그러다 1999년에 모스크바는 서방세력과 맞설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도 여기까지였지만. 그기준선이 바로 코소보였다.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 군단에 개입을 명령했다. 비록 차후에 떠오르게 되는 강경 민족주의자인 블라디미르푸틴이 그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 한 역할을 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 P10

이른 아침에 러시아의 기갑 부대가 도심으로 밀고 들어와서 시내외곽에 있는 코소보 공항으로 진격해 갈 때 나는 프리슈티나에 있었다.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은 내가 작성한 기사를 통해 나토군에 앞서 러시아군이 코소보로 밀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러시아인들이 도심으로 밀고 들어옴으로써 세계무대에 복귀했다."라고 썼다. 물론 그 기사가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역사의 한 장면을 증언하는 초안으로서는제 몫을 했다고 본다. 러시아는 그해에 가장 중요한 사건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하겠다면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역사의 파고가 이제는바뀔 것이라고 천명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미국을 능가할패권은 없어 보였다. 서구는 국제 정세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반발의 기운이 야금야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 P10

우리 시대에 가장 경이로운 발전을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지정학상의 권력 투쟁이 지구라는 한계를 넘어 우주로 투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누가 우주를 소유할 것인가? 그 결정은 어떻게 내리는가?
사실상 진정한 최후의 개척지는 있을 수 없겠지만 그곳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개척지들은 거친 무법천지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일정 고도를 넘어가면 고유 영토라는 개념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네 나라 바로 위로 레이저로 무장한 위성을 쏘아 보내고 싶을 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여러 나라가 우주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각축을 벌이고 심지어 민간 기업들까지 그 경쟁에 뛰어든 마당에 우주라는 무대는 위험천만한 최첨단 무기들의 격전장으로 변해갈것이다. 과거 우리가 범한 실수에서 배우고 국제 협력을 통해 얻을 수있는 이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우선은 지구의 아래쪽부터 시작해 보겠다. 오래도록 고립된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그곳이 이제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상황을이끌어가는 힘을 갖고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자신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 이야기의 핵심 주역이 되는 그곳은 섬이자 대륙인 나라, 바로 오스트레일리아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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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마음이라는 거. 쇼팽에게 피아노는 어떤존재였을까. 시인에게 흰 종이가 백지이자 발이 푹푹 빠지는 설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초대장이듯이, 쇼팽에게도 피아노는 여러 의미였을 것 같다. 그는 흰 건반과 검은 건반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세계는 양면을 지니고 있구나. 흰 쪽은 밝고 따뜻하고 안정적이지만 검은 쪽은 어둡고 춥고 위태롭구나. 달의 앞뒷면과도 비슷한 점이 있군. 그런데 왜 인간은 달의 앞면만을 바라보도록 설계되었을까. 어디 한번 내가 신이 되어보아야겠다. 그렇게 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었던 것인데…. 딱 한 번, 딱 한 음 흰 건반을 누른 후엔 검은 건반 위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라고 만 것이다. - P108

수전 손택과 조너선 콧의 대담(《수전 손택의 말》, 마음산책, 2020)을 읽던 중에 인상적인 구절을 마주쳤다. "내악마들을 빼앗아가지 말라, 천사들도 함께 떠날 테니까." 릴케의 시구라 했다. 릴케의 시에 이런 구절이있었던가? 그 즉시 밑줄을 긋고 책을 덮었다. 더 이상 독서가 불가능할 만큼 풍부한 고민이 시작되었기때문이다. 악마를 단순한 악으로 치부하지 않으려는, 쉽게 배척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놀라웠고 악마와 천사를 한 몸 안에 깃든 두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도 좋았다.  - P112

내게 가시손은 단순한 관용구가 아닌, 존재론적슬픔을 함의한 광막한 단어다. 문득 가시손의 반대말이 궁금해진다. 아마도 쓸어 담고 쓰다듬고 치료하는 손이겠지? 다행히 세상엔 가슴팍에 청진기를대고 숨소리를 듣거나 진맥을 짚어 영혼의 상태를살피는 손도 존재한다. 내가 무수한 나들의 총합이듯이 나의 손안에도 무수한 손들이 자리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시손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서 한평생 파괴지왕으로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닐 터. 연습하는 손은 게으른 손을 이길 것이고 호기심 가득한손은 나태한 손을 앞설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오늘당신은 어떤 손을 가졌습니까. 그 손안엔 무엇이 있습니까. 따뜻합니까. - P121

시간이 우리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는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 자신이 그럴듯하게 라벨링돼 진열대에 올려진 와인 같다는 생각이 오래되고희귀할수록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제아무리 고급 케이스에 담겨 기쁜 날 선한선물로 건네진다 하더라도 한 그루 포도나무였던 시절, 포도밭에서의 시간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지기 마련이다. 짓밟고 망가뜨릴 심산으로 포도나무를기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정성과 사랑으로, 기도로 길러진 존재들이다. 포도밭의 태양, 포도밭의 평화를 떠올리면 삶에 찢기고 벌려진 상처가 소독되는 기분이다. 슬픈 말이지만, 우리는 모두 그 시간으로부터 와 여기에 있다. - P125

한 존재의 기원이자 시작점, 최초의 우물일그곳. 다시 돌아갈 방법은 전무하지만 이따금 그곳을 떠올리면 영혼이 지친 몸을 누이는 것 같다. 언젠가 시에도 적은 것처럼 "눈을 감으면 오는 기차"(《소인국에서의 여름〉,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5)를 타고 나는 자주 그곳으로 간다. 달빛 환한 밤, 수만 평의 포도나무 사이를 천천히 거니는 상상만으로도 어깨가가벼워지고 발이 살짝 떠오른다. 눈을 뜨면 형체 없이 사라지겠지만 아쉬움만 남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다녀오면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절대로 추하게늙어가고 싶지 않다‘ 굳은 결심을 하게 되니까.
그곳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생각될 때에도 당신과 보이지 않는 실로 묶여 끝끝내 반짝이는 세계, 당신의 빈야드가. - P126

더 오랫동안, 더 멀리에서 담는다. 두눈물은 같은 눈물이지만 완전히 다른 눈물이다.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자의 눈물은 또 다른 의미로그토록 깊다.
그것이 장기든 감정이든 믿음이든 인간은 타인의로부터 무언가를 구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불완전하니까. 약하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득이 가슴을 칼로 그어 억지로 심장을 빼내려는 그악스러운 폭력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구한다고 다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세상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제자리를 찾는 것들이 있다. 마음이 펄펄 끓을 땐 너는 왜 내게 심장을꺼내 주지 않느냐고 따져 묻기 전에 이런 주문을 외워보는 건 어떨까. 일일시호일. 일일시생일. 날마다좋은 날, 날마다 생일이라는 마음으로. - P131

진짜 바느질에는 영 재능이 없을지라도 영혼의수선공으로서는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내 삶이니까. 내 영혼이니까. 고쳐 쓰든 뒤집어 쓰든해봐야겠지. 뭐든 기본이 중요한 법이니 욕심부리지말고 홈질부터 천천히 배우기로 한다. 홈질은 손바느질의 기초입니다. 박음질과 헷갈려하시는 분도 많지만 엄연히 다른 기법이에요. 지금부터 옷감 두 장을 포개어놓고 바늘땀을 위아래로 움직여볼 건데요,
일직선이 되도록 반듯하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이번엔 졸지 않고 화면 속 선생님의 말을 경청한다. 잘 살고 싶다. 나는 정말이지 잘살고 싶다. - P136

그러니까 오늘의 결론은 ‘다시‘에 있다. 다시 볼때 수정되고 겹쳐지고 순해지거나 단단해지는 많은 것들이 인간의 삶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꺼내 든 오늘의 영화는 <오만과 편견〉이다. 아마 이 영화는 지금껏 내가 가장 많이 다시 본영화일 것이다. 오만이 오만을 극복하고, 편견이 편견을 극복할 때 비로소 열리는 사랑 이야기. 이 사랑의 선망선에는 언제고 갇혀도 좋을 것이다. - P143

말이 화살일 때가 있다. 얼마 전엔 10년 전쯤 알고지내던 지인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다. 반색하며안부를 나누던 중 지인이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며 "그런데 너…." 하고 운을 뗐다. 내 쪽에서 황급히말을 받았다. "왜요 왜! 저 늙었다는 소리 하시려고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데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굴었다. 상대도 부정하지 않았다. "어… 분위기도 그렇고 뭐가 좀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날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무슨 말씀이시냐, 그럼 세월이얼만데 변하지 안 변했겠냐 눙치듯 응수했는데 며칠 - P149

이 지나도 그 말이 아프게 나를 찔렀다. 박힌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화살이.
아픔의 이유는 명백하다.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있어서, 생기 있고 질문 많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이사라지고 거울 속엔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뭘 쳐다봐?‘ 묻는 사람만 있어서. 하필 그 즈음 세사르 바예호의 시를 읽고 있던 것도 문제(?)가 됐다. 시 <시간의 횡포〉(《태양의 돌》, 창비, 2013)의 모든 문장은 "죽었다"로 끝난다. 안또니아 아줌마도, 싼띠아고 신부도, 금발머리 아가씨 까를로따도, 외눈박이 노인과 라요도..… 남김없이 전부 죽은 것이다. 시간의 횡포 아래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한 줄 한줄 시를 읽어 내려갈 때마다 귓가에 들려오던 총성 소리. 다 읽고 나면 마른 우물 속에서 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 드는 시. 그렇다.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 던 저 슬픈 세사르 바예호의 시는 내 안의 무력 버튼을 꾹 누르고 만 것이다.
매일 진다. 지는 기분이 든다. 피곤해서도 지고 귀 - P150

찮아서도 지고 허무해서도 지고 우울해서도 진다.
그날따라 입고 나온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도 지고, 하필 우산을 두고 온 날 소나기가 내려서도 지고, 편의점에 들러 만 원이나 하는 우산을 샀는데 비가 홀랑 그쳐 씩씩거리며 또 진다. 텀블러 뚜껑이 제대로안 닫혀 가방 안이 홍수가 되어서도 지고, 눈앞에서버스를 놓쳐서도 지고, 주차장 구석에서 들려오는고양이 울음소리가 구슬퍼서도 진다. 변해서 슬픈이유는 다름 아닌 그것이다. 응전할 힘이, 무기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 - P151

그때도 부적을 붙이듯 탕종, 탕종, 입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같은 이응인데 탕종의 이응과는 너무나 다른 이용이 세상에는 너무 많구나, 하면서.
탕종의 힘은 나날이 커져갔다. 놀랍거나 두렵거나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슬픈 일이 닥칠 때마다 탕종, 탕종 하고 입 밖으로 되뇌는 것이다. 토붕 앞에서도 탕종, 자몽의 무지몽매함 앞에서도 탕종, 죽음 앞에서도 탕종이라고 말하면 종소리가 은은히 번져 나를 위한 안전한 막이 생겨나는 기분이다.
탕종이라는 말의 비밀스러운 느낌은 오래도록 내곁에 남아 있다. 비록 단호박크림치즈 탕종식빵은 하루도 못 가 사라져버렸을지라도. 탕종, 탕종. 나는 단어 하나로도 나를 지킬 수 있다. 단어가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려 한 사람의 집이자 우주가 된다는 것.
참 따뜻한 움막이다. 뜻밖의 신비다. - P163

일방통행인 길이었고 무조건 앞으로 가는 수밖엔 없었다. 그때, 맞은편 하늘에 상상으로 한 점을 찍었다. 시선을 점에 두고, 점만 뚫어져라쳐다보며 걸었다. 그곳의 나를 이곳으로 건너오게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꼭두의 한 점.
존재가 깃털 같아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럴 때 인간은 아주 작은 입김에도 날아갈 수 있다.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날아가버린다. 그럴 때 한 편의 시가 당신의 누름돌, 당신의 한 점이 되어줄 수는없을까.
한 점. 딱 한 점만 보고 걷는 것이다. 나도 이쪽에서 딱 한 점만 보며 걸을 것이다. 그쪽의 당신도 그렇게 와주었으면 한다. - P168

문학이라는 모닥불 앞에 모여앉은 우리가 공유해야 할 것은 사는 곳, 나이, 학벌 따위가아닌 ‘문학적 영혼‘일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합니까. 가장 깊이 찔린 기억과 가장 높이뛰어올랐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어떨 때 흩어지거나맺힙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온도, 색깔, 질감, 경도는어떠합니까.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당신이 거기 있다.
사각거리는 연필소리. 손등에 돋아나는 힘줄. 집중하는 입.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고 있다. 문학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단단한 결속력을느낄 때가 많다. 왜 하필 문학인가요. 세상에 재미난게 얼마나 많은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삶의 다른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건 어떤가요.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들은 안으로 삼키고 나도 나의 백지를 채워보기로 한다. - P172

어는점: 손발이 차갑고 눈앞은 캄캄하고 머리가꽝꽝 얼어버린 것 같은 상태. 주로 마감 직전, 백지를 마주한 나의 모습이다.
끓는점 : 나는 화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랑할 때만 찾아오는 온도.
녹는점 : 시를 쓰며 가장 자주 도달하는 상태. 내게 녹는다는 건 부드러움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들; 물속에서 녹고 있는 물고기. 한낮의 태양 아래, 아이스크림보다 먼저 손이 녹아버린다면? 눈사람에게 허락된 마지막 밤. 흰 사슴의눈동자가 호수로 변하는 순간. - P173

저 문장들은 시를 예비하는 ‘안료‘와 같다. 안로는 염료와 다르다. 안료와 염료는 물질에 색을 발현시키는 색소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염료는 물에 녹아스며드는 반면 안료는 물이나 기름에 녹지 않는 성질을 지녔다. 안료는 다른 무엇과 섞이더라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분명하게 자신임을 증명한다. 그런 안료를 재료 삼아 빚는 시는 빛에도 열에도 추위에도 강할 것이다.
그러니 어떤 문장이라도 좋다. 백지 안으로 걸어들어가 자신만의 은밀한 다락, 혹은 지하실을 열어볼 수만 있다면.
내가 쓴 문장이 나를 보여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존재들이고, 살아 있다는건 얼고 녹고 끓고 흩어지는 모든 순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 P174

목소리는 정말 신비롭다. 시간의 공격을 피할 수없는 인간에게서 가장 마지막까지 함락되지 않는성. 어릴 때 즐겨 보던 만화 주인공의 목소리와 성우의 얼굴이 겹쳐질 때 저분의 목소리는 늙지 않는구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목소리는 한결같구나 놀라울 때가 많았다. 한 사람이 생래적으로 지닌목소리는 지문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고유(固有)‘ 카테고리에 담길 인간의 조각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고유한 목소리가 있기에 다른 목소리, 또 다른 목소리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는 사실 또한. - P176

그땐 정말이지 시가 너무 아프고 무거웠다. 울면서 쓰거나 쓰고서 울었다. 이렇게 망가져 있는 세상도 싫고, 세상의 미래가 내 펜에 달린 것마냥 심각했던 마음도 싫었다. 그래서 쉽게 가려고, 손쉬운 위로를 구했던 것인데…. K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그건 잘하는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하던 걸 하세요.
하던 걸 하라는 말. 아마도 그 말에 깊이 찔렸던탓일까.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으냐는 질문에 나는 (또 무슨 용기에선지) 이런 거창한 대답을 내어놓고야 말았다. "사람들 들어간 뒤에 신발을 다 정리해놓고 들어가는 시를 쓰게 되지 않을까요." 그때로부터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한다. 하던 거라도 잘하는 일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여전한 신발들, 정리되지 못한 미숙하고 어려운 마음들, 너무 많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목소리를 꿈꾸지 않는다. 세 번째 시집을 펴내며 적었던 말을 기억한다. "나는 평생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 P178

살다 보면 ‘조금‘은 슬퍼지는 순간이 왜 없겠는가. 그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쓴 문장들이 징검다리가 될 때가 있다. 과거의 문장을 딛고 현재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현재의문장을 딛고 미래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간신히 한 걸음씩 나아간다. 망망대해 같은 바다를. 말과 사람이 함께, 느리더라도 함께.
그러니 하던 걸 하자. 이런 노래는 이런 노래고, 탁성은 탁성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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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알라에게는 코알라의 잔이 있고, 나무늘보에게는 나무늘보의 잔이 있고, 나에게는 나에게 어울리는 잔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운명의 한계로 오인되지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잔의 외형이나 크기로 인해 차별당하거나 파괴당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의 규모를 존중하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 P25

그제야 나는 눈금자를 0에 맞추고 나에게 ‘저금‘ 되어 있던 말들을 하나둘 떠올려보았다. 희연아, 환히 지내라. 희연아, 너는 너를 좀 더 사랑해야 하겠다. 겨울 창문에 붙어 있는 마른 나뭇잎 같은 말. 성냥갑에 딱 하나 남은 성냥 같은 말.
공중으로 날아오른 풍선은 터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날아오른 풍선은, 날아가는 시간만큼 다른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대기권에서 바라본 지상의 모습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는 오직 풍선만이알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지나온 시간을 부정하지 않게 된다. 다행히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다.
그러니 성냥 같은 말들을 쥐고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내 안에서 내가 피어나는 날 초에 불을 붙일 수있게. 축하 케이크를 잘라 먹으며 무구한 웃음을 지을 수 있게. - P29

전시의 마지막 작품은 벽에 새겨진 작가의 한 문장이었다. ‘가장 간단한 것이 가장 힘 있다고 생각한(I think that the simplest thing is the most powerful thing),
작품에 대한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설명을 얼마든덧붙일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겨우 한 줄이지만, 강력한 한 줄이었다. 그의 주악 앞에서 나의 거울이 와장창 깨지는 경험을 했다. 내 안의 너무 많은 나들, 칭얼거리며 튀어 오르고 무한 증식하는 나를 두더지 잡듯 몽둥이로 내려치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끝은 고요와 적막. 새하얀 벽.
이제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선 기분으로 나의 주악을 찾고자 한다. ‘간단하면서도 짜임새가 있다‘는 뜻의 간결. 당분간 내 삶의 모토는 그것이다. 분별과 선택, 집중의 시간이 성큼 다가와 있다. - P34

‘세상엔 경제적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정도가 아니라 세상 만물에는 영혼이 스며 있고 그것들이 삶의 목격자이자 때론 신의 역할을 대리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무릇 시인이란 ‘보는 자여야하고, 그냥 보기만 해서는 안 되고 ‘똑바로‘ 보고 ‘현상 너머까지도‘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들어왔다(내가 교수자의 입장이 되어도 늘 그것을 강조하게 된다). 그것이 습관이 된 탓인지 때로는 너머의 너머를보느라 몸이 아예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가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비유적으로 말했지만 현실감각이희박해질 때가 종종 있다는 뜻이다(이 나이에도 관공서와 은행이 치과보다 무섭다). 그러니 식물로부터 재테크를 연상할 줄은 모르고 신화적이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방향으로만 연상을 이어가는 것일 테다. - P37

그런데 사실 최고의 수확은 다른 데 있다. 우리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심판에게 진격의 거인처럼 달려가 따지던 김연경 선수의 포스 말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 절대 못 하는 소심의 왕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저 당당함. 부당하다고, 재고하라고, 할 말 끝까지 하는 (심지어는 영어로) 저 똑 부러짐. 자기 과실일 땐 미안해서 입을 꾹 다물고, 다른 선수 과실일 땐 "괜찮아!" "할 수 있어!" 어깨든 팔뚝이든 꼭한번 두드려 독려하며 공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저너른 품. 그러니까 김연경 선수가 짱이라는 결론.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시의 시작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매 순간 버저 비터를 던지는 심정으로쓰는 사람. 깊고 넓고 높고 알록달록하고 날카롭고 - P57

따뜻한 거 다 하지만 그럼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시.
단전에서부터 에너지를 끌어올려 외쳐본다. 우리 존재 파이팅! 나의 시도 파이팅! - P58

"당사의 눈동자에게 건배"라는 저 유명한
 <카사블랑카>의 대사가 세기의 고백일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본다. 이 문장은 조도가아니라 휘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여기 있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먼저 거기있기에 이렇게 나도 당신 눈 속에 담길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빛나는 사람은 없다. 탄생부터 죽음까지우리는 모두 타인의 보살핌 속에서, 관계망 속에서살아간다. 영악하다는 말은 욕이어도 영리하다는 말은 칭찬이다. 너 때문이라는 말은 힐난이지만 너 덕분이라는 말은 상찬이다. 그러니 어떻게 말할 것인가. "비올라에 있어 위대한 날이에요"라는 문장이 반사하는 겸손하고도 따뜻한 빛을 오래도록 기억하려한다. 네, 나도 당신을 통해 나를 보고자 합니다. 내모든 당신들의 눈동자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살고싶어요. - P62

이 세계가 광산이라면 신은 성실하게 인간 광물을 캐낼 것이다. 그것이 신의 일이니까. 어떤 원소를포함하고 있는지에 따라 광물은 제각기 다른 책을띤다. 금인지 은인지, 흑연인지 석탄인지, 그도 아니라면 그냥 버려지고 말 버력인지 일단은 캐봐야 한다. 시작해봐야 알고, 끝나봐야 안다.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의 최후를 미리부터 결론 내지 말고 일단은나를 잘 다듬어가는 게 맞다. 적어도 내 삶을 버력의자리에는 두지 않기 위해서. - P73

씨앗에 독이 있다? 순간 그 말이 벼락처럼 나를가르고 지나갔다. 내가 상상하는 씨앗은 한없이 맑고 여린 존재였기 때문이다. 엄마 배 속에 막 자리 잡은 생명 같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충분한 보살핌이 없다면 영원히 캄캄한 땅속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혜적으로 바라보기 쉬운 생명 말이다. 그런데 씨앗에 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게다가 그 독이라는 게 식물로 하여금 외부 물질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할 목적으로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세상 모든 씨앗을 달리 보게됐다.  - P76

그 즈음 읽었던 책의 한 대목도 겹쳐졌다. 세계적인 작가 존 버거와 그의 아들 이브 버거가 주고받은편지 모음집 《어떤 그림》(열화당, 2021)에서, 부자는회화 작품을 사이에 두고 예술과 삶 전반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다. 모든 페이지, 모든 사유가 아름다웠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나의 시선을 붙잡았던건 ‘흰 물감‘이 등장하는 대목이었다. 화가인이브버거는 종종 흰 물감을 만들어 사용한다고 했다. 물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안료에 기름을 섞어 부드럽게 개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자신의 창틀에는 몇 년째사용 중인 "린시드유 병들이 놓여 있고, 그 기름 "표면에 형성된 주름진 피막 아래" "벌집에서 딴 벌꿀" 같은 "황금빛 기름"이 담겨 있다는 설명이었다.  - P77

병 안에 담긴 기름에 피막이 생기기까지의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하루아침의 일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몇 년에 걸쳐, 병 속의 기름이 이곳에 ‘고인‘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빚어진 결과 아닐까. 그 피막이라는 거, 사랑하고 미워하기를 반복하며 어렵게 어렵게 건너온 시간의 주름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틀린 설명이라 해도 상관없다. 모든현상을 과학적, 논리적으로만 설명하려 들면 세상모든 신비는 몸을 틀어 삶의 반대편으로 떠나버릴테니까. 신비가 아니라면 씨앗이 품고 있는 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안의 가장 여린 마음에까지 독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독은 악이 아니다. 안간힘이고 사랑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약하다 해도 인간은 저절로 강한 면이 있다. 씨앗이 품은독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리라. - P78

우리는 모두 찢기기 쉬운 피막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피막에 함부로 막대기를 꽂아휘저을 수 없다. 대단한 무엇이 파괴되어서가 아니다. 한 인간을 둘러싼 피막이 손상될때인간은 죽는다. 아주 작은 찢김으로도 상한다. 그러니 겪고 뒤척이면서 두터워지는 수밖엔 없다. 이 여름, 이 겨울을지나면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겠지. 이 사랑, 이터널을 빠져나가도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 있을것이다. 그 시간을 믿으며 가야겠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 P79

독일에는 ‘블라이기센(Bleigießen)‘이라는 풍습이있다고 한다. 12월 31일 밤이 되면, 납을 녹여 그림자의 형태나 굳은 모양을 보고 한 해의 운을 점치는 것이다. 마트에 가면 블라이기센 키트(kit)를 팔기도 하는데 1~2유로면 구입이 가능하단다. 내가 녹인납이 권총, 칼, 토끼, 그 밖에 어떤 모양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해석하기 나름일 것이다. 다만 그 작은 의식을 통해 각자가 살아낼 일 년의 모양을 예감해보는 것이겠다. 그 순간 무형의 삶은 깜빡, 하고 빛난다. 얘야, 삶이란 흘러가버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손에잡히기도 한단다. 지금 여기 네 손안에 분명하게 들려 있잖니, 하고. - P83

‘모루‘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 건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의 책 《슬픔의 위안》(현암사, 2012)을 통해서였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우리가 쓰고자 한 것은 ‘grief‘, 즉 ‘슬픔‘이었다고 고백한다. 슬픔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 그들은 사별을 경험한 이들과 수많은인터뷰를 진행해왔고, 그 고유한 슬픔이 어떻게 한사람을 통과해가는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살폈다. 그리고 이 책을 썼다. 요약하자면, 슬픔과 위안이라는 두 단어 사이의 거대한 협곡을 끝끝내 건너가는 이야기였다. - P87

모든 글이 투명하고 아름다웠지만 그중에서도 1부〈슬픔의 무게>에 수록된 ‘모루‘ 꼭지는 몇 번을 읽어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마음이 유리처럼 깨진다. 모루는 대장간에서 재료를 올려 두드릴 때 쓰는 판이다. 현실에선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주로 만화영화에서 주인공(혹은 악당)의 머리 위로 떨어져 눈을튀어나오게 만드는 역할로 출연한다고 책은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도 그를 ‘후려치는‘ 모루가 있다고 했다. 괜찮다고, 이미 지나간일이라고, 방금 전까지 씩씩하게 웃어 보이던 이가뒤돌아서서 홀로 짓는 표정을 상상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 P88

그런 혼잣말들로, 눈물로, 한밤의 달리기와 그네타기로, 시와 음악으로 우리는 모루에 대항한다. 연필 한 자루가 산책의 근사한 핑계일 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연필은 이미 충분하니까. 애초에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신발 끈을 고쳐묶고 문을 열었다면 슬픔에서 위안으로 가는 협곡을뛰어넘는 중이라고 여겨주기를. 썩고 난 뒤에야 묻을 수 있다. 땅이 아닌 가슴에 묻는 것이더라도. 너는여전히 대답이 없구나. 그는 그다음 말을 향해 온 마음으로 가는 중일 것이다. - P90

그렇게 적갈색 얼굴로 집에 왔다. 그때 내겐 삼촌 차를 타고 병원에 갔던 기억밖엔 없는데. 환자복을 입은 엄마를 간병인용 간이침대로 밀어내고 병실 침대를 떡하니 차지한 채 쿨쿨 잔 기억밖엔 없는데.
이 글은 그 시간을 통과해 온 엄마를 위해 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하루가 있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눈물이 있을지라도 우리 삶의 구체성으로 말미암아이 페이지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될 거라고 귀퉁이를 접어 두고두고 펼쳐보며 엄마의 아팠던 시간, 그림자의 그림자까지 끌어안겠다고.
사과의 갈변은 사과가 운 흔적일까? 유루증은 생각할수록 슬픈 병이다. 적갈색이 생각할수록 슬픈색인 것처럼. - P95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해보면 내력벽이라는 건 모든 걸 부숴도 부서지지 않는 최후의 보루, 영혼의 핵심인 셈이니 그 자체로의미 있고 아름다운 것이겠다.
팔을 들어 슬픔을 받치고 선 모양. 나란한 두 개의기둥.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친구의 정의다. 그러니팔이 아프면 조금 꾀를 부려도 좋아. 오늘은 나의 친구들에게 그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써야겠다. 당분간은 내가 받치고 있을게. 손으로 안 되면 발로라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그러니까 다녀와. 커피도한 잔 마시고 숲길도 걷다 와, 기다릴게.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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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있었다

그는 날이 제법 차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외롭다고도

오늘은 불을 피워야지
그는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피웠다

불아 피어나라 불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다

삼키는 불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이런 곳에도 집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면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손금이 뒤섞이는 줄도 모르고

해와 달이 애틋하게 서로를 배웅하고
울타리 너머 잡풀이 자라고
떠돌이 개가 제 영혼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내 안에서 죽은 나를 도닥이다 잠드는

불은 꺼진 지 오래이건만
끝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불은 조금도 꺼지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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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따뜻한 허밍

안희연은 누군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귀를 먼저 내미는 사람이다. 그는 잘 듣는 사람, 열린 사람, 그리하여 ‘다르게‘보는 사람이다. 그게 시에 관한 거라면,
이것인지 저것인지 헷갈린다면, 산뜻한 대답이 필요하다면, 나는 항상 안희연을 찾는다(그도 잘 알것이다). 그의 눈과 귀, 입과 ‘쓰는 손‘을 믿기 때문이다. 이 책엔 ˝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일상과 길음,
자신과 사유, 다정한 태도가 담겨 있다. 이야기는 단어에서 시작해 생활의 복판에서 끝난다. 문장은 쉽고 따뜻하며 빛난다. 언어를 오래 살피는 사람이 종국에 어디에 도착하는지, 그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잘 살고 싶다는 의욕이 솟아난다. 읽는 내내귀가 활짝 펼쳐져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가 내는 소리라면 허밍이라도, 단 한 박자도 놓치고 싶지 않다.
- 박연준(시인 《쓰는 기분》 저자)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과 산문집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를 썼다.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촛불을 들고 단어의 집으로 향한다.

저는 이 놀이터를 떠나고 싶지가 않아요. 저에게세상은 양초로 쓰인 글자 같습니다. 이 세상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촛불을 들고 단어의 집으로 들어서면 감춰져 있던 장면이 서서히나타나기도 해요. 그곳엔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무언가가 있어요. 파닥임과 반짝임이 있어요.
그 마주침의 순간이 좋아서 저는 계속 글을 씁니다.
우리가 가진 촛불은 만능이어서 이따금 돋보기나핀셋으로 변신하기도 해요. 이 세계를 다른 각도로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나, 많고 많은 것 중 ‘내 것‘ 을 골라내는 데에도 꽤 큰 도움이 된답니다.
단어의 집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단어의 집은 문턱도 없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여기 이곳 놀이터에서 저와 함께 단어를 골라보시겠어요?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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