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맥과 강들이 물자와 사람의 이동을 어렵게 한 탓에 스페인은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가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이 때문에 각 지역의 정체성과 언어가 고스란히 보존될 수는 있었다. 스페인정부는 이러한 지리상의 장벽을 철도와 도로망으로 극복하려고 애써왔다. 1848년에 바르셀로나 항만 지역과 마타로를 잇는 길이 29킬로미터의 철도 구간이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이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노선이 속속 개통되면서 위와 비슷한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현대의 도로 시스템은 20세기 후반 들어서야 제대로 연결이 되었다. 1969년에는 다시 바르셀로나와 마타로를 연결하는 최초의 단거리 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그런데 중앙 정부가 <스페인적인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자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를 비롯한 지방 주민들은 자신들만의 유산을 지키겠노라 결심했다. 이번에도 지리가 그들을 분리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일례로 안달루시아와 메세타를 가르는 장장 485킬로미터의 시에라모레나 산맥을 관통하는 천연도로는 아찔하게 절벽이 펼쳐진 데스페페로스강의 협곡이 유일하다. - P384

1031년에 무너진 칼리프 왕국은 소규모 왕국들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스도교 수장들은 지금이야말로 한때 자신들의 것이었던 이곳을 이슬람의 통치로부터 해방시킬 기회라고 여겼다. 1060년대에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이 싸움에 가담하는 이들에게는 죄를 사해주겠노라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1085년, 그리스도교 군대는 메세타 중심부로 가는 요충지가 되는 톨레도를 탈환했다. 이는 군사적 결과로나 스페인과 유럽의 발전 측면에서나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었다.
1212년 그들의 군대는 데스페냐페로스강 고개도 뚫었다. 1250년무렵에는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그리스도교 세력 휘하로 들어갔다.
단 남쪽에 있는 그라나다 왕국만은 예외였다. 대세를 일찌감치 간파한 그라나다는 카스티야에 공물을 바치기로 결정하면서 이후 250년동안을 무사히 버텨냈다. 어쨌든 250년이라는 세월은 장엄한 알함브라를 비롯한 많은 궁전들을 건설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었다. - P387

사실 레콩키스타, 즉 재정 과정을 일종의 통일 프로젝트로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스페인의 지리 때문에라도 북부의 그리스도교왕국들은 각자 독자적으로 행동하곤 했다. 북동쪽에서는 아라곤이특정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고, 북서쪽에서는 갈리시아가 다시 힘을 모아서 차후의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재정 운동은 하나의 물결처럼 진행되었다기보다는 조각조각형태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현대 스페인이 처음부터 <조각난 상태〉로시작됐고 여전히 그 상태로 남아 있게 한 요인이 된다. - P388

이어지는 전투에서 스페인 함대는 심각한 손실을 입으면서 전열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그들은 재정비를 위해 북해 쪽으로 항해했다.
사실 그때 임무를 포기하고 귀향했어야 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라 지오그라피아 만다La geographia manda." 즉
"지리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라고. 그런데 그 지리는 그들 편이 아니었다.
스페인 해군은 남쪽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이번에는 바람이 엉뚱한방향으로 불었다. 게다가 영국 해군은 스페인 군대와 그들이 돌아가야 할 항로 사이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스페인 해군은 하는 수 없이 더 북쪽을 향해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북스코틀랜드 끝단을 돌무렵 흔치 않게 북대서양에서 부는 폭풍우에 함대가 휩쓸려 버린 것이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많은 배들이 아일랜드 해안의 바위들에 부딪혀 좌초되고 말았다. 남은 배들까지 모두 귀환한 10월에 항구에 댄배는 고작 60여 척에 불과했다. 이로써 거의 1만 5천여 명의 수군들과 함께 세계 최강의 해군력이라던 스페인의 명성 또한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고 힘의 균형 또한 이동하고 있었다. - P394

프랑코에게도 친구들은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라는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패망하자 프랑코의 스페인만 파시즘이라는 늪에 빠져 홀로 허우적대는 신세가 되었다. 서구 열강은 동부전선에서 나치와 함께 협력하도록 병력 5만 명을 보낸 이 사내를 무시했다. 종전 후 스페인은 따돌림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유엔은 물론마셜플랜, 나토에게까지도.
프랑코는 때를 기다렸다. 그는 영국이 지브롤터의 소유권 때문에라도 이베리아 반도의 안정을 희망하고 있으며 폭력적으로 정권이 전복되는 것을 지지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냉전으로 인해 서구 열강에게 강요된 현실 정치가 스페인에게유리하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유럽이 새롭게 마주한 위협은 파시즘이 아니었다. 바로 소련의 공사주의였다. - P404

은 파시즘이특히 미국은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때 스탈린의 부대 일부가 남서쪽인 스페인까지 진격할 수 있음을 우려했다. 미국은 자국의 전략적 깊이의 측면에서 스페인을 바라보았다. 즉 소련의 붉은 군대를 라인강에서 저지하지 못했을 때 방어선을 구축하고 뒤로 물러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말이다. 1947년에 미국합동전쟁계획위원회가 수행한연구에서는 소련이 서유럽 공격을 개시한다면 3개월 이내에 피레네산맥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20일이 걸려 산맥을넘고 대서양 연안을 따라 리스본으로, 지중해 연안을 따라 바르셀로나로 진격할 수 있다. 거기서부터 소련은 40일 내에 지브롤터에 도달해서 지중해와 대서양의 접근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열린 잠정 협상에서 스페인은 미군에게 전략적 기지 사용권을 부여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 P404

그 협상이 조인될 때까지 수년이 걸렸지만 1951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스페인에 대한 정책이 바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미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랑코를 좋아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지만,
내 개인적인 감정이 당신들 군인들의 신념을 무시하게 하지는 않을것이다."
2년 뒤 마드리드 조약이 맺어졌다. 스페인은 향후 20년간 20억 달러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받는 대신 미군에게 육군과 공군, 해군기지들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만에 하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군이 프랑스의 방위를 포기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시나리오에서 민주주의 유럽의 최후의보루는 파시스트의 나라 스페인이 되는 셈이었다. - P405

트루먼이 프랑코를 만날 일은 없었다. 이 명예 아닌 명예는 후임자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 주어졌다. 1959년, 그는 처음으로스페인을 방문한 현직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프랑코가 히틀러와 나란히 걸으면서 나치의장대에게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는 장면이 찍힌 지 채 20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이제 프랑코는 미국 대통령과 함께 스페인 군악대가 연주하는 텍사스의 노란 장미 The Yellow Rose ofTexas」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마드리드 거리를 행진했다. 민주적인스페인을 갈망하는 사회 각계각층에게는 쓰라린 일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생활은 조금 나아졌다. 미국과의 합의를 따르려면스페인은 무역 규제를 좀 더 느슨하게 풀고 외국인 투자도 허용해야했다. 자급 경제를 슬그머니 포기하자 인플레이션이 유발되긴 했지만 - P405

어쨌거나 1960년대의 스페인은 경기가 살아나서 국민들은 너도나도 세탁기와 텔레비전 같은 서유럽에서 표준이 된 상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이르자 스페인의 독재자는 자신의 사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흔여섯이 되던 1969년, 건강이 쇠락해진 상태에서 프랑코는 자신의 뒤를 이을 국가의 수장이자 국왕으로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지명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프랑코는 카를로스 왕자가 기존의 정치 구조를 따르리라 믿었다. 정권은 왕자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으며, 대중 또한 그가 자신들의 삶을 바꿀 의지나 능력이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잘못된 믿음이었다는 것을 그는 증명했다. - P406

스페인은 가만히 앉아서 카탈루냐를 잃을 생각이 없다. 이런 입장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국가의 위신과 경제 문제도 있지만 때로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바로 지리적 문제다. 스페인 역사를 돌이켜보면 북쪽의 침략자들은 대개 피레네 산맥 양측에 좁게 펼쳐진 나지막한 땅을 통해 이 나라로 진입했다. 그곳이 바로 북서부의 바스크 땅과북동부의 카탈루냐 땅이다. 북쪽에서 스페인이 펼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는 이 통로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카탈루냐나 바스크가 분리 독립해버린다면 스페인에게는끔찍한 저주가 될 것이다. 이 두 지역이 스페인 중앙 정부에 적대 세력이 된다면 악몽이나 다름없다. 현재는 피레네 산맥을 관통하는 터널이 뚫려 있지만 군사적으로 보면 이 터널도 쉽게 봉쇄될 수 있다.
이 통로는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스페인의 주요 지상 보급로로 연결되고, 카탈루냐와 바스크 두 지역은 바르셀로나와 빌바오를 포함한 스페인 주요 항구의 본거지가 되기도 한다. - P414

또 다른 주요 해군기지는 카나리아 제도에 있다. 이곳에는 육군과공군 시설도 있다. 기니만을 마주하고 있는 이곳은 스페인에게는 주요 교역로일 뿐 아니라 해저 통신선이 지나가는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곳이다.
교역로는 물론 화물선과 어선들의 방어를 위해 스페인 해군은 130여척의 함선과 2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유사시에는 11만 5천명의 해병대원도 동원할 수 있다. 이들은 스페인 육군과 공군은 물론미군과 나토의 지원도 받고 있다. 미군은 지브롤터에 인접한 로타 해군기지와 세비야 남쪽 50킬로미터에 위치한 모론 공군기지 등 기지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스페인은 또 EU가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벌이는 해적 퇴치 임무인 아탈란타 작전에도 참여하고 있다. 영국이EU에서 탈퇴하자 이 임무의 작전권이 스페인과 미국이 사용하고 있는 로타 해군기지로 이양됐기 때문이다.

이제껏 저지른 여러 실수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오늘날 스페인은 성공 스토리를 쓰고 있다. 이 나라는 2008-2009년의 경제 위기에 - P420

서도 살아남아 유럽의 경제 강국 중 하나라는 지위를 되찾았다. 또 훌륭한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으며 유럽에서도 최고의 기대수명을 가진사람들이 활동하는 활기찬 도시들을 보유하고 있다.
다른 경쟁국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또한 기후변화나 인구 이동,
각종 경제적 문제, 그리고 분열된 정치와도 힘겹게 씨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스페인은 이를 감당할 만한 위치에 있다. 석탄은 고갈됐고 석유나 천연가스도 풍족한 적이 없었던 나라지만, 현재필요한 에너지의 6분의 1을 수력 발전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태양광발전량도 풍부한 편이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특히 태양광과 풍력이라는 재생 에너지를 선도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이 나라는 계속해서 외부의 압력에 직면하겠지만 가장 큰 도전은뭐니 뭐니 해도 내부, 즉 지리에 근거한 것이다. 1500년대에 하나로합쳐졌던 이 왕국은 가까운 미래를 위해 여러 지방 정부가 모인 하나의 민족국가와 거기서 야기되는 긴장감을 균형 있게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코 시대에 흔히 들었던 "스페인은 유럽이 아니고 유럽이었던 적도 없다."라는 정서가 이 나라에서덜 타당하게 여겨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421

우주,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이나이라크가 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달에 식민지를 세운다면 당신은 식민주의자일까? 러시아와 중국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실 그 말도 일리가 있긴하다.
우리가 지구의 대기권을 뚫고 나가서 무한대 속으로 1밀리미터쯤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된 뒤로 우주 공간은 정치적 각축장이 되었다.
이 이슈의 중심에는 달이나 화성 같은 물리적 영토를 주장하는 것만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앞선 세기에서 보아왔듯 그곳으로 가는 데필요한 연료 보급소와 병목지점들 또한 주요 이슈다. 만약 그것들의사용에 관한 규칙과 우리가 도달할 영토를 관리할 법적인 틀을 합의하지 못한다면 지구 위에서 인류의 역사 내내 벌였던 꼭 그대로의 싸움으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한데 어찌하랴, 우리가 그들을 위해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별에 적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우주 레이스>는 한층 가열되고 있다. - P426

우주 경쟁에는 늘 군사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 개척자 중 한 사람인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우주 비행에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1930년대에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까지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조인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했지만 로켓에 대한언급은 일절 없었다. 나치는 폰 브라운의 연구를 지원했고 그 결과물인 V-2 로켓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에 투하됐다. 1944년에 최초로 우주 공간에 쏜 발사체가 된 V-2는 수직 이륙 후 고도 176킬로미터까지 날아올랐다. 종전 후 폰 브라운과 120명의 과학자들은 문제의 V-2와 함께 미국으로 옮겨가서 미국의 우주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그로부터 24년 뒤, 그는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최초의 달 착륙선인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러시아인들 또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이 경주에서 앞서가기도 했다.  - P428

우주 탐사라는 사업은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든다. 결국 미국은 달 착륙 장비를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몇 개의 깃발과 발자국, 96개 정도의 쓰레기 상자를 남겨둔 채 말이다. 이제 그들은 돈이 덜 드는 것으로 눈높이를 낮추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실험을 수행할 우주 정거장과 그 건설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궤도에 위성을 안착시키는 스페이스 셔틀(우주왕복선) 사업이다. 닉슨 대통령은 마지막 아폴로 계획 3개를 폐지했고 NASA는 목표를 수정했다. 그들은 아폴로 계획 시절의 남은 조각들을 그러모아 만든 2층짜리 실험실을 궤도에 쏘아 올렸다. 이 스카이랩(Skylab, NASA의 유인 우주 실험실)은 세인의 관심을 끄는 데는 실패했지만 각종 실험을 수행하고 인간이 우주 공간에서 오랜 기간 머무를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인간의 지식을 향상시키는데에 기여했다. - P431

머스크가 상업적인 우주 기업을 이끌고 있다면, 아마존의 창업자제프 베조스는 자신의 블루 오리진 컴퍼니를 통해 머스크의 뒤를쫓고 있다. 이 회사가 내세우는 비전은 수백만 명이 우주에서 살고 일할 수 있는 미래다. "우리의 손자들과 그 손자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고향인 지구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무한한 자원과 에너지를 찾아우주로 떠나야 합니다." 여기서 핵심 용어는 <무한>이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우리는 달에서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광물, 이를테면 티타늄을 비롯한 값진 광물들을 발견할 기대를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지구에서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 더 많은 우주 정거장과 달기지들도 원 없이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 P435

저궤도는 우주선이 달 너머로 갈 때 연료를 재급유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화성까지는 달보다 수백만 마일이 더 먼데 지구중력의 경계를 벗어나려면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저궤도에서 화성으로 가는 것보다 지구 표면에서 달로 가는 것이 훨씬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 그런데 어떤 강대국이 이 통로를 전면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일종의 문지기가 되는 것이며, 이 안에서 경쟁국들이 연료를 재충전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더 멀리 나가는 능력도 방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유용한 비유를 제공하는 지구 위의 상황들이 있다. 현재 한 흑해 국가의 군함이 지중해를 통해 대서양으로 진출하려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고 싶다면 터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만약긴장감이 고조된다면 그 허가는 반려될 것이다. 따라서 저궤도의 통제 또한 동일한 권력이 될 수 있다. 의미 있는 조약들, 그러니까 소위우주 정글에 대한 법칙이 없다면 말이다.
게다가 상업적인 고려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엄청나게 커다란 패널로 태양광을 모아 발전을 위해 지구로 보낼 수 있을 만한 기술이 개발된다면 이 기술을 저궤도에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공간은 장거리 여행을 위한 주유소이기도 한 만큼 혹시 채굴 목적으로 운석에접근하고자 하는 측은 문지기 국가에 소정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할수도 있다. - P442

그래서 미국이 만든 것이 이른바 우주군이다. 우주군의 창설을 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주에서 미국의 우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주군은 공격을 단념시키고 궁극의 고지대를 통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비교적 힘이 약한 국가들이라고 해서 우주를 보는 시각이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우주 탐사와 그에 수반된 군사적 차원 양쪽에서 최첨단에 있는 것은 역시 이 빅3 국가(미국, 중국, 러시아)다.
이제 이들 세 나라는 전 영역에서 우세>라는 군사 개념에 우주를포함시키고 있다. 저궤도부터 달까지,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까지 말이다. 1980년대에 미국은 전략방위구상을 통해 이러한 이득을 얻기위한 초기의 제한적인 시도를 했다. 다시 말해 핵공격으로부터 미국을 방어하기 위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 개발을 시도한 것이다. 미국이검토했던 옵션들 가운데 하나가 우주를 기반으로 한 무기의 범주를다양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스타워즈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우주군사화의 전조였다.
이제는 음속보다 20배 이상 빨리 날아가는 극초음속미사일 개발이이 분야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존의 대륙간탄도미사일과는 달리 극초음속 미사일은 포물선을 그리며 비행하지 않고 방향과 고도도 변환할 수 있다.  - P445

각국의 인공우리가 공상과학 소설을 계속해서 현실화시키는 한 상황은 점점 더복잡해질 것이다. 그 한 예가 2020년 7월에 발생한 사건이다. 러시아의 코스모스 2542 군사 위성이 미국 위성인 USA 245를 스토킹하던중 상당히 가까운 거리라 할 수 있는 150킬로미터 이내까지 접근했다. 그러고 나서 그 안에 있던 미니 위성인 코스모스 2543을 발사했다. 미군은 이것을 러시아 인형이라 부르곤 한다. 이 아기 코스모스는러시아의 세 번째 위성을 향해 이동하기 전에 미국의 위성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미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시속 7백 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고속 발사체를 발사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크렘린궁은 이에 대해 단지 위성의 상태를 점검한 것뿐이라고 밝혔지만 영국과 미국 국방부 모두 이것이 무기 실험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믿고 있다. - P446

이제 인공위성은 더 이상 전화나 TV 방송을 중계하는 데만 필요한것이 아니다. 위성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현대전에서도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위성을 떨어뜨리거나 방해하면 자동차의 GPS 시스템이 먹통이 되고 신용카드가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려고 텔레비전을 켜도 깜깜한 화면만 나온다. 며칠 지나면 슈퍼마켓의 배달시스템까지 혼란에 빠지게 된다. GPS가 없다면 선박과 비행기들이 제 길을 찾는 데 고생하는 것은 차치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는 전력망이 다운되는 것이다. 일기예보를 듣는 것 같은일은 아예 포기하는 게 좋다.
군사적인 차원에서 모든 선진국은 정보와 감시 활동을 위성에 의지하고 있다. 어떤 나라의 군사위성이 타격을 입는다면 그 나라의 최고사령부는 그 즉시 그것을 지상 공격의 전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핵공격 조기 경보 시스템도 망가질 수 있어서 차라리 먼저 공격을 감행하자는 결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 비록 기존 방식의 싸움이남아 있더라도 상대편은 적을 정밀 타격하고 눈에 띄지 않게 군사력을 이동시키는 데 유리할 것이다. 암호화된 통신을 보내는 상대 국가의 능력이 제약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 P447

우주는 무한하다. 더불어 그 가능성 또한 무한하다. 공상과학 소설이 그토록 재미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현재의 지식에 구속돼 있으면서도 그 지식으로 인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비록 현재까지의 역사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지만, 그리고 구속돼 있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으로는 광대한 우주 전체를 아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연법의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이동하거나(어쩌면 영영 어려울지도) 적어도 그와 - P452

비슷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은 태양계를 넘어서려고애쓸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너무 먼 곳에 있기때문이다. 프록시마 켄타우리가 발사한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는 4.25년이 걸린다. 다시 말해 40조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밤하늘에서 보는 안드로메다 별자리는 적어도250만 년 전의 모습이다. 이 어마어마한 거리 때문에 광속의 10분의 1 속도로 추진력을 얻는 데도 적어도 수십 년은 걸릴 것이기 때문에 우주 깊은 곳으로 여행하는 문제는 공상과학 소설가나 선구적인이론가들 그리고 미래 세대의 몫으로 남겨질 것이다. - P453

우주 탐사가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있다 보니 우리로서는 어느 방향으로 발을 딛고 싶은지 결정할 필요가 있다. 각 국가들은 상호 인정한영토에 주권을 행사하는 시스템의 실패한 역사를 지겹도록 보여준우주판 베스트팔렌 개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보편적 인간성과 우주 여행에 도사린 도전을 인정하고 지구라는 집을 벗어나 저멀리 모험을 감행하는 하나의 국민처럼 행동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조금은 더 친숙한 패턴을 따랐다. 땅과 바다의 위대한 발견들은 대부분 비슷한 결말을 맞았다. 경쟁, 힘겨루기, 승자가규칙을 정하고 선을 긋는 것 말이다. 이 장면을 우주로 옮긴다면, 이제껏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는 현재는 쫓겨날 소유주가 없고 위험을부담하면서 모험을 감행하고 투자하는 측은 이익을 낼 수 있어야 한다.  - P456

아직 발견되지 않은 소행성들이나 다른 목표물을 발견하고 추적하는 데 협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관심사다. 특히 1908년에 시베리아숲의 수백 평방킬로미터를 초토화시켰던 퉁구스카 운석처럼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소행성이나 다른 물체들을 발견하고 추적하는데 협력이 필요하다. 동일한 궤도에 그보다 훨씬 더 큰 물체들이 있을수 있다. 공룡들은 그것들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겠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대해 무언가를 해볼 수 있다.
우주에서의 협력이 꼭 지구상에서 국가들 간의 적대감을 종식시키는 것은 아니다. 미국 우주비행사들이 러시아 우주선에 있는 국제 우주 정거장을 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양국 사이의 긴장이 부활하고고조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십 년 전 양국 사이에 전쟁의 위협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을 때 기술 협력은 긴장 완화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1975년의 소유스 아폴로의 도킹을 이뤄냈다. - P458

양 진영의 우주비행사들이 함께 그랬던 것처럼, 우주 공간에서 <창백한 푸른 점(pale-blue dot, 우리 지구)>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태초부터 우리를 감염시켜 <우리>와 <그들>로 갈라놓게 한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길이다. 우주는 그 무한대 속으로 우리 인간의 정신이 뻗어나갈기회를 주고 있다. 인간은 늘 위를 바라보았고 깜깜한 밤하늘의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면서 꿈을 꾸어왔다. 실제로 우리는 높은 곳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높이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서로 힘을 합친다면 훨씬 빨리 도달할 수 있다. 우주에는 한계가 없으니까. - P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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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곳, 저녁과 아침과
열두 번의 바람이 지나간 하늘을 넘어
나를 만들기 위한 생명의 원형질이
이곳으로 날아오고, 여기에 내가 있네.

이제, 숨결이 한 번 스치는 동안 나 기다리니아직 산산이 흩어지지 않은 지금
내 손을 얼른 잡고 말해주오,
당신 마음에 품고 있는 것들을.

지금 말해주오, 내가 대답하리니.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말해주오.
내가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끝없는 길을 나서기 전에.

<슈롭셔의 젊은이>, A. E. 하우스먼


이 단편집은 화가들이 일명 ‘회고전‘이라 칭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책은 내가 서른두 살이라는 늦었지만 겁이 없던 때 데뷔한 이래 10년 동안 발표한 단편들을 한 예술가가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충이나마 글 쓴 연대순으로 엮은 것이다. 나는 연대의 전후 관계에 엄격한 사람은 아니다(연대의 전후 관계에 엄격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글은 쓰는 데 1년이 걸리기도 하고, 그 이후 2, 3년이 지나도록 발표되지 않을 수 있으며, 퇴고를 거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글을 완성한 날을 언제로 보아야 하겠는가). 하지만 순서 변동은 그리 크지 않다.
내가 쓴 단편들이 모두 이 책에 수록된 것은 결코 아니다. 초기에 발표한 작품 중 하나는 내가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 뺐다. - P9

그리고 판타지소설이나 SF과학소설의 범주 안에 속하지 않는 작품 또한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최근 몇 년 새 발표한 단편들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 작품들이 맨 처음 수록된 단편집이아직도 출판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 있는 마지막 두작품은 1973년과 1974년에 발표된 것으로, 이 단편집에 수록된열일곱 편의 이야기는 지난 10년 내지 12년을 아우르고 있다.
소설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의 관계는흥미롭다. <샘레이의 목걸이>는 그 자체로 완벽한 이야기지만장편소설의 토대가 되었다. 나는 이 작품을 끝마쳤을 때 샘레이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다 썼다. 하지만 단편에서 단순히 방관자역할로 중요하지 않게 등장했던 인물이 이야기가 끝났음에도불구하고 고분고분히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자꾸 나를 괴롭혔다. 그자는 "내 이야기를 써. 난 로캐넌이라고 해. 난 내 세계를 탐험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난 그 사람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런 종류의 사람과는 논쟁해봤자 소용없는법이다. - P10

<겨울의 왕> <해제의 주문> <이름의 법칙> 모두 장편소설의 토대가 된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장편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무대 배경을 제공해주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마지막 작품은 토대가 아니라 열매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 나온 다음에 고맙게 얻은 궁극의 선물이다.
사실, 이 책에 실린, 시간순 서술 방식을 따르는 단편소설 대부분은 내가 쓴 모든 SF가 따르는 다소 아귀가 안 맞는) ‘미래 - P10

사‘의 개요에 그럭저럭 들어맞는다는 점에서 내 장편소설들과관련이 있다. 이런 개요에 맞지 않는 작품들은 초기에 쓴 판타지소설과 내가 ‘심리신화‘라 부르는, 이후의 다소 초현실주의적인작품들이다. 심리신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역사나 시간대가 아닌 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며, 그곳에서 사는 생명체는 불사라는 개념에 호소하지 않아도 시공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판타지소설과 공통점이 있다.
수집가라면, 이 책에 실려 있는 작품의 제목을 내가 직접 골랐으며 예전에 발표했을 때의 제목과 달라진 점을 알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 P11

<샘레이의 목걸이>는 처음에 <앤기어의 결혼 지참금>이라는제목으로 발표(‘앤‘ 발음을 제대로 할 줄 모르던 편집자의 실수였다).
<물건들>은 <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
<시야The Field of Vision>는 <시야Field of Vision>로 발표.
단어 하나 또는 문장 하나 정도 고치거나 지면관계상 삭제된부분을 복원하거나 출판 당시에 있었던 오류를 수정하는 정도가 아닌, 새로 고쳐 쓴 글들은 다음과 같다:<겨울의 왕> (해당 단편 앞머리의 짧은 글 참고)<아홉 생명>(해당 단편 앞머리의 짧은 글 참고)<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첫 문단에서 한군데 삭제) - P11

1963년에 쓴 이 글은 1964년에 <앤기어의 결혼 지참금>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으며, 1966년에 발표한 내 첫 번째 장편소설 《로캐넌의 세계》 도입부이기도 하다. 비록 출판된 순서로는 여덟 번째이지만 나는 이 글로 책을 시작할까 한다. 이이야기에 내가 쓴 초기 SF와 판타지소설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고 또한 이작품이 가장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로부터 단편집의 마지막인 1972년에 쓴 단편까지, 내 글의 문체는 공공연한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이었다. 나는 여전히 낭만주의자이고그 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며 또한 내가 낭만주의자인 게 기쁘다. 하지만 <샘레이의 목걸이>의 솔직 담백함과 단순함은 점차 단단하고 강력하고 복잡한 것으로변하게 되었다. - P14

그토록 먼 세월이 떨어진 세상들에 대한 전설과 사실을 당신은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름도 없이 그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과거는 신화의 영역이 되고 여행에서돌아온 탐험가들은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벌였던 행동이 신의몸짓이 되어버린 사실을 깨닫게 되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행성들에서 우리의 광속 우주선이 다리를 놓은 시간의 틈은 광기어린 어둠이 잠식하고, 그 어둠 속에서 불확실과 불균형이 잡초처럼 자라난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그러한 이름 없고 반미지의 세계로 떠났던 어떤 남자, 한 평범한 연맹 과학자의 이야기를 하려니, 마치 수천 년의 폐허 한복판에서 얽히고설킨 잎과 꽃 가지와 덩굴사이에서 돌연 모습을 드러내는 바퀴 모양 기하 도형의 배열이 - P15

나 마모된 머릿돌 따위를 찾아다니던 고고학자가 어느 평범한장소의 양지바른 현관으로 발을 디뎠는데, 그 안의 어둠 속에서상상치 못했던 불꽃의 깜빡거림을, 보석의 반짝임을, 여인의 팔이 슬쩍 움직이는 모습을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든다.
당신은 어떻게 전설에서 사실을, 진실에서 진실을 구분해낼수 있는가?
푸른색으로 반짝이며 슬쩍 모습을 보였던 보석이 로캐넌의이야기를 통해서 돌아온다. 그 보석과 함께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 P16

남편의 재산이라곤은거울과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그마한 수정 천 개로 장식한신부 드레스가 전부였다. 이들보다 지체가 낮은 친척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금실은실을 섞어 짠 비단옷으로 가득한 옷장, 금박을 입힌 목재 가구, 은제 마구, 은으로 장식한 칼과 갑옷, 보석과장신구들을 가지고 있었고, 갓 결혼한 두르할의 신부는 부러운눈으로 그 물건들을 바라보았으며, 심지어 그런 장신구들을 걸친 사람들이 여인의 혈통 그리고 두르할과의 결혼으로 인해 생긴 신분에 경의를 표하며 길을 양보할 때도 여인은 고개를 돌려보석 왕관이나 황금 브로치를 힐금거리곤 했다. - P19

두로사는 엄마와 고모 사이에서 모피 깔개에 앉아 자신의 갈색 발가락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아기에게 고개를 숙였다. "샘레이는 바보란다."두로사는 아기에게 중얼거렸다. "유성처럼빛나는 샘레이, 남편이 사랑하는 건 세상의 황금이 아니라 아내의 금빛 머리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샘레이……두로사의 말에 샘레이는 입을 다물고 먼 바다로 향한 여름의 푸른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추운해가 지나고, 별의 지배자들이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 다시 세금을 걷으러 왔다갔다. 별의 지배자들은 이번에 통역으로 진흙인 난쟁이 한쌍을 썼는데, 이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앤기어인은 거의 반란 직전까지갔다.  - P23

"그래." 관장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저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금발의 샘레이, 황금빛 샘레이, 목걸이를 한 샘레이. 진흙인은 샘레이의 의지에 따라 자신들의 의지를 굽혔고, 심지어 진흙인이 샘레이를 데려갔던 끔찍한 곳, 밤의 끝에 사는 별의 지배자들조차 샘레이의 뜻에 따라주었다. 별의 지배자들은 샘레이에게 절을 했고, 자신들의 물건 가운데 샘레이의 보물을 기꺼이 돌려주었다.
하지만 샘레이는 동굴에서 느꼈던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바위가 머리 위를 내리누르는 곳, 누가 말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곳,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고 회색 손이 뻗쳐오던 곳. 이제 충분했다. 샘레이는 목걸이 값을 치렀다. 아주후하게. 이제 목걸이는 샘레이 것이었다. 대가는 지불했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 P48

샘레이는 자기 목을 내리누르는 금사슬에 손을 댔다. "그이에게 제가 가져온 선물을 주겠어요."
"기다리거라, 샘레이! 두르할의 딸이자 네 딸을 보고 가렴. 아름다운 할드레를!"
샘레이가 처음에 말을 걸었던 여자아이, 두로사에게 자신이온 걸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바로 그 아이였다. 열아홉 살 정도로, 두르할의 짙푸른 눈동자를 그대로 닮은 아이였다. 할드레가두로사 옆에 서서 차분한 눈으로 자신의 어머니인 샘레이를, 자신과 동갑인 샘레이를 바라보았다. 둘은 나이가, 황금 머리털이, 아름다움이 같았다. 다만 샘레이가 키가 약간 더 컸고 가슴에 푸른 보석을 달고 있을 뿐이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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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뿔 또한 내전, 국경 분쟁, 극단주의, 해적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갈등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지역 중 하나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군사 및 경제 전략 못지않게 교역에서 잠재적인 이익을 바라보는 터키, 중국, 걸국가들을 비롯한 미국의 관심까지 불러들이고 있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급수탑으로서 에티오피아가 기술과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할수 있다면 그 개혁은 이 나라뿐 아니라 이 지역 모두에게 행운의 여신이 될 수 있다. - P342

산맥과 강들이 물자와 사람의 이동을 어렵게 한 탓에 스페인은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가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이 때문에 각 지역의 정체성과 언어가 고스란히 보존될 수는 있었다. 스페인정부는 이러한 지리상의 장벽을 철도와 도로망으로 극복하려고 애써왔다. 1848년에 바르셀로나 항만 지역과 마타로를 잇는 길이 29킬로미터의 철도 구간이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이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노선이 속속 개통되면서 위와 비슷한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현대의 도로 시스템은 20세기 후반 들어서야 제대로 연결이 되었다. 1969년에는 다시 바르셀로나와 마타로를 연결하는 최초의 단거리 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그런데 중앙 정부가 <스페인적인 것>을 만들어내려고 하자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를 비롯한 지방 주민들은 자신들만의 유산을 지키겠노라 결심했다. 이번에도 지리가 그들을 분리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일례로 안달루시아와 메세타를 가르는 장장 485킬로미터의 시에라모레나 산맥을 관통하는 천연도로는 아찔하게 절벽이 펼쳐진 데스페냐페로스강의 협곡이 유일하다. - P342

에티오피아는 드넓은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일찌감치 군사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억 1천만 명이 넘는 이 나라 인구는 2030년에는 1억 3천만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이 지역에서 가장 정착 인구가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케냐에는 거의 5천2백만 명, 우간다에는 4천5백만 명,
수단에는 4천3백만 명, 소말리아에는 1천5백만 명, 남수단에는 1천1백만 명, 에리트레아에는 3백만 명, 그리고 지부티에는 1백만 명이거주하고 있다. 이들 나라 인구를 모두 합치면 아프리카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한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패권을 잡는다면 아프리카 정치 테이블에서 상석에 앉을 수 있다. - P344

에티오피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지역 중 한 곳에, 그것도 그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금세기에 수단, 남수단,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는 모두 내전을 겪었다. 케냐는 대규모 민족 분쟁과 더불어 소말리아에 근거지를 둔 알샤바브(소말리아의 극단주의 테러 조직)가 자행하는 테러 공격에까지 시달리고 있다. 그나마 지부티정도가 이 끔찍한 공포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 P344

333448나라 모두가 그렇듯이, 이 나라 또한 분쟁 지역에서 탈출한 난민 유입 문제를 처리해야 할 입장에 처해 있다. 이 문제는 결과적으로 사실상 항만 도시국가인 지부티에서 부족 간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다른 국가들끼리의 관계도 껄끄럽긴 마찬가지다. 예컨대 소말리아와케냐는 참치 어족이 풍부한 데다 천연가스와 원유가 매장돼 있는 걸로 추정되는 10만 평방킬로미터를 두고 해양 분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뿔 지역과 중동 국가들 간에는 오래된 문화유산과 - P345

교역로가 연계된 장구한 역사가 있다. 홍해 양쪽을 지리적 전체로 조망해 보면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웃 나라들이 경제 계획을 세우고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데있어 에티오피아가 도울 수 있다면 지역 안정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강력한 국경과 국내의 안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2020년부터2021년에는 에티오피아 정부와 북부의 티그레이 지역 간에 본격적인분쟁이 벌어져서 금방이라도 전면적인 내전으로 격화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소말리아와의 국경지대에서 알샤바브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수백 명의 노련한 부대원들을 빼내 티그레이 쪽 전선에 증강 배치했다. 이 분쟁 또한 티그레이지역에서 탈출한 수만 명의 난민이 수단으로 몰려가게 하는 원인이되었다. - P346

한편 가장 놀라운 변화가 너무도 일찍 찾아와서 안팎에서 탄성이일었다. 총리는 집권한 지 몇 주 만에 그 자신도 싸웠던 에리트레아와의 2년에 걸친 전쟁을 종식시킨 2000년의 합의를 존중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에리트레아 수도로 날아간 총리는 아스마라 국제 공항 활주로에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에리트레아 대통령과 포옹했다. 이어 두 나라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20년에 걸친전시 상태가 공식적으로 종식되면서 무역과 외교에서 평화와 협력의새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 노력으로 그는 이 나라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두 나라 사이의 진정한 화해는 아직도 진행 중으로 남아 있다. - P358

당시 시위대가 지부티와 에티오피아 간 고속도로를 봉쇄해 버리자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사용할 연료가 아예 바닥날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취약성을 보강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는지부티 항구의 지분을 매입했으며 소말리아 베르베라의 지분 19퍼센트도 획득했고, 수단의 포트수단과 케냐의 라무항 지분도 확보하는 등 여러 방안을 강구해 오고 있다. 또 에리트레아의 항구로 가는도로들도 다시 개통시키고 있다.
그런데 지부티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뿔 연안 지역 전체가 지정학적싸움터가 되다 보니 이 때문에라도 에티오피아 정부는 강대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중국은 여기서도 주전 선수로 뛰고 있다. 에티오피아 수입의 대략33퍼센트와 수출의 8퍼센트가 중국과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또 에티오피아의 대규모 인프라 건설 사업에도 자금을 대고 있다. 게다가 백년도 넘어 황폐해진 지부티와 아디스아바바를 연결하는 철도를 대체하는 장장 725킬로미터에 달하는 전기철도도 일찌감치 깔아주었다. - P364

중국 정부가 지부티에 군사기지를 확보한 일이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는데 사실 중국은 홍해 연안이라는 격전지에 관여한 여러 나라중 한 곳일 뿐이다. 미국,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이곳에부대를 파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터키등 이곳에 진출하기 위해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들도 지분을 확보하면서 항구 쟁탈전에 가세하고 있다.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예멘 내전에 개입했을당시 아랍에미리트는 에리트레아의 아사브 항구 일부를 임차해서 홍해를 건너 공격을 개시할 공군기지로 탈바꿈시켰다. 또 아사브와 아디스아바바를 잇는 송유관 건설에도 관여했다. 이처럼 아랍에미리트는 아프리카의뿔 지역에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뿐 아니라 자국의 연료와 플라스틱, 그리고 축산물까지 판매하기 위해 아프리카라는 성장하는 소비 시장에 투자하고 그 시장을 활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동 지역 국가들에게 홍해와 아프리카의 뿔 지역은 분란을 일으키고 더 먼 곳의 경쟁자들까지 불러들이는 지역 분쟁지의 일부이기도 하다. - P365

그러나 에티오피아 입장은 다르다. 자신들이 서명하지도 않은 조약에 얽매일 이유가 없으며 상류 쪽 국가만의 지리적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수년 동안 에티오피아의 국민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어 왔으며 그 나라 미래의 중심에 있다. 이 댐에서는 엄청난 양의 전력이 생산될 것인데 에티오피아는 그 여분을 수단에 공급할 예정이다. 에티오피아 정부의 입장은 분명하다. 너무 많은 상류 지역들이 강우에만 의존하는 소위 하늘바라기 농사를 짓다 보니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가뭄에 수백만 명의 에티오피아인들이 걸핏하면 식량부족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집트의 입장을 들어보고 말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에티오피아는 이집트를 거대한 노예시장이자 노예 무역을 지원했던 식민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호시탐탐 침공하려고 했고, 이제는 빈곤에서 탈출해 보려는자신들의 발목을 잡으려는 세력으로 보고 있다. - P369

이집트를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나일강이 주는 것을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이 빼앗아가 버릴 수도 있다.
에티오피아에게 이 댐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빈곤과 부족 간 분쟁의 악순환을 끊게 할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기술 발전은 에티오피아로 하여금 지리라는 감옥의 철창을 구부려서 열어젖히게 한다.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이 나라도 비교적 짧은 강들에만배를 띄울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나라의 강들은 고지대에서 너무도급격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배를 띄울 수 없어 교역에 이용하기엔 한계가 있다. 물은 이제껏 에티오피아에게 일정 수준의 정치력을 가져다 주었지만 이제는 에너지 측면에서 권력이 되고 있다.
현명하게 사용된다면 공평하고, 싸고, 풍부한 전기는 수천만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 결과로 그들 사이에 드리워진 긴장도 걷어낼 수 있다. 효율적인 통치와 함께한다면 안정된 국가뿐 아니라 벌써부터 현실이 돼가고 있는 가능성 또한 에티오피아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역 패권이다. - P372

에티오피아의 앞길에는 여전히 많은 도전이 놓여 있다. 기후변화는저지대에 더욱 빈번하게 가뭄을 가져오고 삼림 벌채는 토양의 침식과 사막화를 유발한다. 또 여전히 남수단과 소말리아, 에리트레아로부터 수십만 명이나 되는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고 국내에서 거처를잃은 사람들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백만 명을 훌쩍 넘긴다. 아프리카의 뿔 지역은 극단주의 단체와 해적들의 본거지가 된 지 오래인데 가까운 미래에 이 상황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안정>이지만 이것이 - P372

야말로 모두에게 가장 큰 도전이자 과제가 될 것이다. 에티오피아에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 "거미가 함께 줄을 짜면 사자도 묶어버릴 수있다." 이 속담이 비단 정치적 맥락에서 나온 것은 아닐 테지만 정치에도 적용된다. 정계와 재계가 경제를 성공적으로 운용하고 정치인들이 나라를 하나로 묶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면 <아프리카의 성공 스토리>는 실현 가능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 줄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 P373

스페인,
지리의 방해가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좁고 먼지가 풀풀 이는 스페인 산악지대의 구불구불한 길을 운전하는 것은 꽤 즐겁다. 그 즐거움 가운데 하나를 꼽는다면 모퉁이를 도는순간 거대한 암석 위에 떡하니 서 있는 난공불락의 웅장한 요새와 마주치는 것이다. 그 중에는 다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된 것들도 있지만멋지게 보존된 것들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스페인의 지리와 역사를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중세 초기에는 이 위풍당당한 구조물들이 메세타(Meseta, 스페인 중부의 대규모 평원지대)라는 광대한 지역의 모습을 특징지었다. 이 지역이스페인어로 성을 뜻하는 카스티요 castillo에서 나온 카스티야Castile즉<성들의 땅〉이라 불리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스페인이라는 나라 전체를 두고 봐도 이는 적절한 이름이라 하겠다. 스페인은 한마디로 거대한 요새다.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시작하는 좁은 해안평야는 이내 거대한 산맥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중부지 - P378

역 전체는 높은 고지대와 깊은 골짜기들로 이뤄진 고원지대다. 이렇게 메세타는 스페인을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산지가 많은 곳으로만들고 있다.
메세타의 한복판에 마드리드가 있다. 16세기에 마드리드가 수도로 선택된 것도 스페인의 한복판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론적으로 보면 이것은 마드리드와 잠재적인 경쟁 세력 간의 거리를 좁히면서 나라 전체에 보다 더 중앙집권적인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산악지형과 면적(영국보다 2배나 큰!)은 늘 교역과 강력한 정치적 통치력을 행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각 지역마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및 언어적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이함이 낳은 복잡다단함과 열정은 아직도 스페인의 국가에 가사가 없다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무슨 내용을 넣어야 할지 서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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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헬,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에 시달리는갈등의 한복판에 있다

사헬이 해안이라면, 사하라는 바다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해안에서 모래바다를 건너 또 다른 해안, 즉 유럽으로 가려고 한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을 떠나고싶어 한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약 380만 명이나 되는 이곳 사람들이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을 향해 삶의 터전을 뜨고 있다.
이 지역의 무력 분쟁과 급속한 기후변화가 초래한 이 같은 상황은한층 더 악화되고 있다. 알카에다와 ISIS라는 맹금들이 자신들의 보다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다른 집단의 고통과 희생을 먹잇감으로 삼고 있다면,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한 집단들은 세력을 더 키우기 위해 그들의 브랜드를 빌려오고 있다. 수십 년 전부터 이 지역 여러 나라에서 맹위를 떨쳐온 갈등의 불꽃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 이제 그 갈등은 해안가를 넘어 훨씬 멀리 퍼져나갈 기세다. 유엔 사무총장인 안토니우 구테흐스는 이런 경고를 한 바 있다. "우리는 폭력 앞 - P294

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2020년에 사헬 지역은 세계에서가장 빠른 속도로 폭력이 증가하는 곳이었다. 유엔은 그 테러 공격의수위가 "유례없이 파괴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헬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헬에 머물지 않는다.
대다수 유럽인은 이 지역과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이 문제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고 있는지잘 모르고 있다. 유럽은 이미 이주민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유럽의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이주민과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이른바 <유럽 요새>를 구축하자는 호소도 나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물결이 밀려들어 오고있다. 하지만 양쪽 지역을 모두 안정화시키려면 북쪽이 아니라 지중해 남쪽을 봐야 한다. - P295

사헬Sahel이라는 단어는 해안 또는 해변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나왔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건조한 사하라 사막을 건너려던 초창기여행자들이 이 지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말이다. 이 해안은 바위가 많은 관목지, 덤불로 덮인 모래벌판, 낮게 자라는 풀과 나무들로 이뤄져 있다. 여기에는 사막을 향해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에날려버릴 위험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더 최근에는 자칫 미궁으로 휩쓸려 들어갈지 모를 맹렬하고 뜨거운 <분쟁의 바람까지 불고 있다. 이곳은 그만큼 안락한 생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만드는험난한 지역이다.
그런데 이런 사헬에도 상대적인 이점이 있다. 사하라 사막의 무자비한 모래와 궁핍함으로 점철된 1천6백 킬로미터를 넘어 이곳 남쪽으로 내려오면 우물과 강, 음식이 기다리고 있다. 우기에는 노랗고 하 - P295

얀 꽃을 피우는 초록색 아카시아 나무들이 자라고 분홍, 보라, 자주색의 부겐빌레아꽃도 핀다. 게다가 서로 소통하고 교역하는 다양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이곳 사헬은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가로질러홍해와 대서양까지 연결되는 장장 6천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경로를형성하고 있다. 여기서는 낭만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팀북투(말리의중부에 위치한 도시)나 카르툼(수단의 수도) 같은 큰 도시도 볼 수 있지만, 세계 시장으로 팔려가는 광물에 생계를 의지하는 작고 지저분하고후미지고 파리가 들끓는 동네도 만날 수 있다. 아프리카에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길을 이용하는 투아레그족과 풀라니족 같은 유목민족을 지나치고 최근에 국경선이 그려진 나라들을 건너면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이념과 폭력성으로 무장한 수많은 무장단체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 P296

사헬은 북쪽의 모래사막과 남쪽의 열대우림 지대 사이에 있다. 만약 모래사막을 지나다가 너무 오랫동안 멈춘다면 머지않아 갈증과열사병으로 사망할 수 있다. 그리고 열대우림 지대는 체체파리들의왕국이다. 이곳에서는 말, 낙타, 당나귀들은 살아남기 어려울 뿐 아니라 현재도 해마다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사헬이라는 광활한 지역 안에는 이슬람, 아랍, 기독교, 유목 문화와여러 정착 문화들 사이에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교류가 이뤄지는 곳들도 있다. 또 지역이 워낙 넓다 보니 그들 가운데 다수가 정부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것도 당연하다. 수도권을 넘어가면 국가서비스의 제공에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곳들도 있다.
여기에 종족 갈등, 빈곤, 허술한 국경, 그리고 폭력성을 띠는 정치 및종교적 이념의 영향들까지 더해져서 이 험한 땅은 그 어느 때보다 힘 - P296

든 시기를 겪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기후변화까지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작물 재배도 망한다. 호수가 말라 줄어들면 식량 공급도 줄어든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동한다. 사람들은 몰려가는데 그들이 가는 곳은 정작 그들의 도착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사헬에서 현 사태와 갈등을 증폭시키는 주요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지리, 역사, 그리고 민족국가의 탄생이 충돌하는 고유한 방식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나긴 길을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 P297

극도로 메마르거나 습한 기후는 수천 년 동안 사하라라는 드넓은 공간을 넓히기도 줄어들게도 했다. 그리고 사헬과 그곳의 사람들을 형성해 왔다. 그들이 살아가는 곳과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삶의 방식까지 말이다.
대략 1만 5백 년 전 갑자기 기나긴 우기가 시작되자 사하라 사막이푸르른 사바나 지역으로 변하면서 현재의 사헬 지역까지 내려왔다.
사막 지역이 줄어들자 사냥과 채집을 할 수 있는 지역이 대폭 늘었다.
대략 20세대에 걸쳐 이뤄졌을 법한 이 변화로 북쪽에서 남쪽까지 점진적으로 정착지가 늘어났다. 목축이 시작됐고 초보적인 농법도 전수되었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약 5천 년 전쯤 비가 뚝 그치더니 사막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 P297

나는 사하라와 네게브 사막에서 이 짐승을 몇 번 타본 적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붉은 사막에서도 여러 차례 마주친 적이 있다. 일단그 위에 올라타면 지면에서 너무 높이 올라와서 불안해진다. 또 위에서 뒤뚱댈 때마다 아래쪽에서 규칙적으로 그르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나 같은 초심자에게는 그다지 안락한 경험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사실 교통 수단을 고르라고 한다면 3리터 엔진이 장착된 4×4 GMC가좋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도 1천6백 킬로미터의 사하라 사막을 실패 없이 건널 확률로만 따진다면 자동차보다는 낙타등에 의지하는 것이 훨씬 낫다. 고대 유목민들과 대상들에게 몇 주나 걸리는 험난한 여정에서 말과 낙타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어떨까? 두말하면 잔소리다. - P299

현상 유지든 재협상이든 위험은 수반된다. 일례로 1960년대에 나이지리아 정권은 나라를 단결시키겠다는 의지가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이보족이 지배하던 석유 자원이 풍부한 비아프라 지역 (1967년 나이지리아로부터 분리, 독립했지만 1970년에 다시 나이지리아로 편입됐다)과 전쟁을일으켰다. 이 시도는 성공을 거뒀지만 대신 1백만 명의 목숨을 대가로 치렀다. 지금까지도 많은 이보족은 그들만의 나라를 꿈꾸고 있다.
대륙 전체를 보면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한둘이 아니다.
오늘날의 사헬에서도 이런 사례가 존재한다. 국경을 지도 위에 표시할 때는 잘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기후변화, 지하디스트, 지역 내 식민지 이전의 분열주의 등이 결합하여 <갈등의 시대>를 만들면서 이 지역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 P303

그 가장 적절한 예가 말리일 것이다. 말리의 국경은 1960년에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떨어져 나와 훗날 부르키나파소가 되는 오트볼타국경과 거의 동시에 형성되었다. 그런데 말리 사람들은 특히 광물이대규모로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 동부 지역의 경계를 인정하지않았다. 그리하여 1974년에 전쟁이 벌어졌고 1982년에도 다시 벌어졌다. 그러자 국제사법재판소가 중재에 나서서 그 지역을 둘로 나눴다. 양측 모두 이미 떠나버린 식민 세력이 남긴 구조적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국호도, 국기도, 정부 같은 조직도 있지만 현대화된 기반시설이 없었다. 또한 숙련된 기술자들과 의사, 경제전문가들이 태부족했고, 정부 내 많은 정치인들은 현존하는 부족 구조로 다시 후퇴해서 자신들이 속한 집단에만 유리한 정책을 펼쳤다. - P304

말리에는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지역이 있는데대체로 나이저강을 중심으로 나뉜 남쪽 지역과 북쪽 지역이 그에 해당한다. 개략적으로 말하면, 북쪽이 훨씬 건조한데 특히 사하라 사막이 시작되는 지점과 근접한 지역이 그렇다. 그곳은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인 투아레그족과 전통적으로 알제리, 니제르, 모리타니와 연계된 유목민들이 지배하는 땅이다. 가장 큰 도시는 가오와팀북투인데 두 곳 모두 나이저 강가에 있다. 유럽으로 가는 물자들이점점 더 해상 항로로 갈아타면서 지난 2백 년 동안 두 도시 모두 경제사정이나 삶의 질이 하락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또 여기에는 정치적인 영향력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 지역은 말리의 수도인 바마코와남쪽에 있는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 기니와 연관 있는 밤바라 - P304

족 여러 분파의 거주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독립을 이룬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말리의 많은 엘리트들은 여전히 타인 other 을 우리 us로 받아들이길 꺼린다. 일례로 말리의 바마코에 새 정권이 들어서면 우선적으로 하는 일 중 하나가 식민지라는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보다는 호전적이며 인종차별적이고 퇴보적이라여겨지는 훨씬 흰 피부를 가진 북쪽의 투아레그족 분파들을 탄압하기 위해 오히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분열 정책과 규범을 계승하는것이었다. 그런데 유목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투아레그족은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는 나라로 일거에 내던져진 것에 분개하고 있다. 북쪽에서 오는 전사들을 두려워했던 남쪽의 정착민들에게 이제는 오히려지배당하는 신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말리가 독립을 이룬 지 2년이 지난 1960년에 투아레그족은 처음으로 봉기했다. 이후 주기적으로 폭력사태가 벌어졌고 어떤 면에서 현재 상황은 그 연장이라 할 수있다. 이제 투아레그족 운동은 아자드라 부르는 독립국가를 창설하자는 데까지 이르렀다. - P305

프랑스는 사헬 지역 국가들이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위협을 스스로 물리칠 능력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맡겨두면 말리와 부르키나파소는 이내 무너질 것이고, 그 지역은 거대한 무정부 진공상태가 돼서 알카에다가 그 자리를 차지해 세를 키워나갈 가능성이 높다. 사헬 지역 국가들에만 해도 수천 명에 달하는 프랑스 국적자들이 있다. 이 중에는 니제르라는 나라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나라는 프랑스 원자력 산업에 연료를 제공해서 프랑스 가정에전기를 밝혀주는 우라늄 광산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의 공습이 시작되자 지하디스트들은 북쪽으로 퇴각했고 프랑스 특수부대가 그들을 추격했다. 뒤이어 말리 정부의 요청으로 작전명서발Serval이 개시됐다. 이 작전명은 사바나 지역에 사는 아프리카 살쾡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국제적 승인과 말리군의 지원을받는 2천5백 명의 프랑스 부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단시간 내에 반군을 진압했지만 반군 병사들은 죽거나 흩어져 버린 것이지 괴멸된 것은 아니었다. - P309

현재도 현지 및 외국을 망라해서 군대를 비롯한 각종 조직들이 이지역의 안정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일련의 세력들이 이 지역 안정을 위한 절박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2017년에 프랑스, 독일, EU, 유엔개발계획, 세계은행, 아프리카개발은행이 주축이 돼 사헬연맹이 결성됐는데 이후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도 가세했다. 2018년에 사헬연맹은 일자리 창출과 인프라 개발프로젝트에 60억 유로 이상을 투입하기로 결의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도 지역 개발 계획에 자금을 투입했다. 여기에는 이지역에서 교역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라이벌이란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얼마간 있을 것이다. 또 미국도 온전히지켜지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국방 예산의 지원을 늘리겠다는약속을 했다. - P314

사실 사헬 국가들의 입장도 난처하다. 책임을 지는 자세뿐 아니라강대국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모습도 자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족들 간 해묵은 긴장도 다뤄야 한다. 한 예로 말리에서자체 방어를 위한 민병대 조직이 밤바라와 도곤 공동체에서 결성됐다. 그들은 정부가 반군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능력도, 의사도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오히려 그들은 다른 집단을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일부 나라들에서는 정부 보안군이 특정 부족의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다는 비난이 일었다. 말리와 니제르 같은나라들에서 대개 군대는 북쪽의 사막 지역이 아니라 남쪽의 사바나지역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다.
대테러 작전의 대부분은 프랑스와 미국이 담당하고 있다. 프랑스는주로 말리와 사헬 서부 지역을, 미국은 차드 호수 연안에 힘을 집중하고 있지만 합동 작전을 수행하거나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 P315

니제르는 미국은 물론 프랑스에게도 핵심적인 전략적 가치가 된다.
사헬 중심부에 떡하니 들어앉아 있는 이 나라는 문제 많고 탈 많은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뿐 아니라 접경한 7개 나라에 흩어져 있는 여러 이슬람 무장단체들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제공하고 있다. 이웃들로 인해 고통받을 정도의 폭력에서는 벗어난상태인 니제르는 모든 사헬 국가들 가운데서 그 위험을 가장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니제르는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에 시달리고 있는 나이지리아, 부르키나파소, 말리, 알제리, 리비아,
차드에 에워싸여 있다. 이들 나라는 앞서 언급했던 수세기 전부터 이용하던 교역로가 통과하는 지역인데 그중 하나가 아가데즈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니제르-알제리 국경을 따라 난 길이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수십만 명이 절박한 심정으로 건넜을 이 길이 현재는 밀수꾼들의 통로가 되고 있다. - P317

이들의 목표는 말리 중부를 광범위하게 장악해서 마시나이슬람공화국을 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2018년말, 말리 당국은 프랑스군 공습으로 아마두 쿠파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2019년 3월, 쿠파는 한 영상에 등장해서 자신이 죽었다는 보도는 극히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약해빠진 국가와 불의에 대한 인식이 풀라니족 주민들을 무장단체에 가담케 했다. 2012년 반군 무장세력은 팀북투와 다른 지역을 점령했던 짧은 기간에 많은 주민들을 험하게 다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관리들이 복귀했다고 해서 법치가 제대로 자리 잡은 건 아니었다.
공무원들의 갈취가 다시 시작됐고 군대가 돌아오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집단적 징벌이 자행됐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가 - P320

난한 나라의, 그것도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쿠파와 휘하의 상급지휘관들이 추진하려는 일은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보인다. 마시나해방전선은 그들 식의 정의인 종교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뇌물 수수를 근절하며, 자살 폭탄 테러범이 되겠다는 지원자들에게는 1천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최근 들어 갈등 양상은 풀라니족 거주 국경지대를 넘어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나이지리아 일부 등 사헬의 다른 지역에까지 퍼져나가는추세다. 폭력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따라다니는 주제들이 있다. 일단가뭄으로 땅이 말라서 소나 양을 치기 어려워지면 유목민들은 새로운도시나 시골을 찾아 들어온다. 여기서 그들은 <외부인>으로 취급받고그 지역 농민들과 이해가 충돌하면서 여기저기서 폭력사태가 발생한다. 이러한 사태를 유발하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가 기후변화다. 테러와 마찬가지로 기후변화 또한 국경을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 P321

시간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인구 통계학적 변화가 진행되는 곳이다. 지금부터 2050년까지 이 대륙의 인구는 12억 명에서 24억 명으로 곱절이 늘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헬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헬 일부 지역에서 이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일례로 니제르의 경우 그 기간에 2,330만 명인 인구가6,550만 명까지 늘 것으로 예상된다.
교육은 출산율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겠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남아선호사상이 여전히 굳게 자리 잡고 있는 곳들이 많다. 많은여성들은 피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거나 아예 접근조차 어렵고 여전히 대다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할례가 행해지고 있다. 보건과 성교육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한정된 정부 예산으로는 그수요를 감당키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변에 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선진국들만큼 대규모는 아니겠지만 보다 공평하고 투명하게분배될 수는 있다. - P324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 알고 보면 천연자원 측면에서는 엄청난 부자다. 니제르에는 우라늄과 원유와 인산염이, 모리타니에는철광석과 구리가, 차드에는 석유와 우라늄이, 부르키나파소와 말리 - P324

에는 금광이 있다. 하지만 그 나라 모두에는 통치 구조와 부정부패,
불투명한 자금 운용, 산업의 경제적 모델에 대한 우려 또한 있다. 대다수 사헬 국가들은 원자재를 스스로 가공하지 않기 때문에 나라의수입은 주로 자국에 들어와 있는 다국적 광산 기업들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충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흔히 다국적 기업들을 유치하는 것은 세금 우대조치 때문일 텐데 결과적으로 이 조치는 정부 곳간에 큰 수입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 - P325

이 지역에는 불법 금광들도 많이 있다. 정부는 불법이라며 금지하고 있지만 부르키나파소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이 황금의 유혹은 외면하기엔 너무 강하다. 허가받지 못한 불법 광산들이 코끼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지역 안에서 운영되고 있다. 중앙 정부가 무능한 데다단속할 지역이 너무 넓다 보니 이 지역에만 2천 개가 넘는 불법 광산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광산 노동자들 또한 범죄와 지하디스트의 표적이 되고 있다. 강도와 납치도 다반사로 행해진다. 아예 지하디스트들이 광산 운영권을빼앗아 버린 경우도 있다. 이 사건은 2018년 파마에서 발생했다. 사륜구동 픽업트럭을 탄 지하디스트 무리가 느닷없이 광산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광산을 접수할 것이며 채굴은 지속될 것이지만여기에 세금을 매길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선 딱히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 오래된 속담처럼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게 두 가지 있다. 바로 죽음과 세금이라는. - P327

상황을 더 꼬이게 하는 또 다른 자원은 희토류다. 희토류는 지표면 밑에 있는 17개의 원소를 총칭하는데, 탁월한 내열성과 자성 및 인광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이 광물을 찾아내서 채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광물은 네오디뮴이나 이테르븀 등 우리 대다수에게는 낯선 이름들을 갖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이것들이 들어간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노트북 하드 드라이브나 레이저뿐 아니라 휴대전화, 평면TV 스크린, 야간투시경, 미사일 등 세계 모든 강국의 기술과 방위 산업의 핵심 부품에서 이것들이 사용되지 않은 예가 없다. - P329

아직은 사헬에 이 광물들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고 알려져 있지는않지만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니제르와 차드는 희토류를 추출할 수 있는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으며, 말리에 풍부한 리튬은희토류는 아니지만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 그리고 무선 전동기구 등의 배터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현대 기술에서 없어선 안 될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말리는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망간과 보크사이트의 보고이기도 하다. 아프리카는 대체로 전 세계 카보나타이트 암석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희토류를 찾는 이라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암석층이기 때문에 확실히 이 지역에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될 수 있다. - P329

로운 부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이 어디서 발견되든지 간에 그곳은 자원을 둘러싼 지리상의싸움에서 최전선이 될 것이다. 중국은 희토류 매장량 대부분을 자신들이 통제하려 할 것이며 다른 측은 그 통제력을 차단할 궁리를 할 것이다.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매장량의 30퍼센트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해외에서 계속 희토류를 사들이는 중이다. 중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은 희토류 가공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에 희토류를 이용한 생산품을 팔고 있다. 반면 가공시설이 충분치 않은 미국은 중국의 공급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도 그러고 싶지는 않다. 특히 2019년에 무역전쟁으로 양국이 으르렁거릴 때 중국이 미국에 공급할 희토류를 줄일 수 있다고 협박한 뒤로는 더욱 그렇다. 만약예측대로 중국 내 희토류 수요를 국내 공급만으로는 감당해내지 못하게 된다면 중국은 희토류를 더 많이 사들이고 더 적게 팔려고 할 것이다. 중국의 희토류를 수입하는 나라 가운데에는 첨단무기 제조를 이것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이 있다. - P330

효율적인 통치 구조와 안보, 외부 세계의 도움이 없다면 사헬은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식민주의에 이은 탈식민지 경제와 정부 기관의 부패는 국내외 극단주의자들로 하여금 이 지역에 만연한 실정, 빈곤, 사회적 균열의 틈을 파고들게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은 자신들과 대결하는 외국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들은 외국인들이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기다렸고 결국 대다수 외국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외부 세력은 사헬에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피를, 재원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일단 미국은 발을 빼고 싶어 한다.  - P332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이 무엇이든, 갈등을 격화시키는 기본적인 문제들과 씨름할 의사가 없는 측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분쟁에는 군사적 해결 방안이 없다."라는 말은 대개는 상투적인 문구에불과하다. 분쟁에 군사적 방안이 먹히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이 베를린 코앞에 다가왔을 때 스탈린이 히틀러에게 전화를걸어서 "아돌프, 이 분쟁에는 군사적 해결 방안이란 건 없다네."라고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헬에서는 이 말이 사실이다. 여기서는 이른바 미국의 두더지 잡기 개념이 적용된다. 만약 한 나라에서 어떤 반정부 단체를 누르면 또 다른 나라에서 튀어나온다. 비록 안정적인 나라라도 이웃 국경이 허술하면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 - P335

지금까지 사헬 지역의 정부들은 능력이 안 되었거나 또는 자비심부족으로 부족들 간에 전면적이고 공평한 협상을 통해서 국민들의불만을 잠재우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형편에서는 정부내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감안해 보면 외국 군대가 아무리 많이 들어와도 주변 상황을 바꿔서 안정적인 국가를 세울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정부의 엘리트와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권과 권력에만 신경을쓰고 자신들이 속한 부족이 이득을 취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민족성이라는 지리가 국경선보다 훨씬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말리에서 이따금 중첩되기도 하는 지하디스트들과 투아레그족 반군은 그들의 정부가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하면서 진정한 독립이나 이슬람 국가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P335

그러면서 외국 세력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또 AQIM은 프랑스가그 어떤 목표도 이루지 못하게 자신들이 훼방을 놓고 있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프랑스로서는 이길 수도 없고 빠져나올 수조차 없는 갈등의 덫에발목을 잡힌 게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여차하면 끝나지 않는 전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과 다른 국가들도 좀 더 많이 관여해야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다. 그동안 대서양에서 홍해에 이르는 수천 킬로미터에 걸친 국가의 주민들은 폭력의 파도가 밀어닥치는 것을 지켜보거나 실제로 겪고 있다.
그 갈등이 국경 지역을 넘어 유혈사태로 번지면 그들 자신도 피를흘리고 모두가 그 안에 매몰돼 버린다. 외국 세력이든 지역 세력이든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한 그 충돌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지하디스트들은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무력을 행사할것이다. 대화 또한 큰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 수년간 사헬에서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럼에도 이곳은 여전히 타협이 어려운 곳으로 남아 있다. - P336

에티오피아,
그래도 지리는 에티오피아 편이다

많은 것들이 에티오피아에서 왔다. 일례로 우리 인간들도 그곳에서왔다. 아주 먼 옛날 에티오피아의 아와시 계곡에는 인간과 비슷한 유인원인 호미닌(hominin, 분류학상 인간의 조상으로 분류되는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두 다리로 걸을 수도 있었고 나무도 탈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로 대략 320만 년이 지난 1974년에 그녀의 후손 가운데 하나일 인류학자 도널드 요한슨이 우연히 그녀의 뼈를 발견한다. 그리고 후속 연구를 통해 이 장소가 바로 우리 모두가 시작된 곳일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우리의 조상인 그녀는 <루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날밤 요한슨의 야영지에서 비틀스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즈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라는 노래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AI 288-1이라는 학술적인 명칭보다는 루시가 훨씬 상상력을자극하는 이름인 것은 분명하다. - P340

에티오피아 국립 박물관의 포스터에는 "루시는 여러분이 고향에온걸 환영합니다 Lucy Welcomes You Hom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기원의 땅 Land of Origins>을 국가의 관광 슬로건으로 내건 나라에게 어울리는 영리한 마케팅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지도 위에 여러 가지로 자리매김하는 이 나라가 많은 방문객을 불러모으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나라의 GDP에서 관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10퍼센트에 이른다. 환상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고산지대, 열대 밀림, 불타는 듯 뜨거운 사막, 단단한 암석을 깎아 만든 1천 년 된 교회를 포함한 9곳의 세계 문화유산, 그리고 숨을 멎게 하는 웅장한 폭포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위해 해마다 1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나라를 찾아온다.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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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는 인구 밀집 지역을 방어하고 농경지대와 유럽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북마케도니아로 이어지는 바르다르강을 가능한 한 수성하는 것이 우선사항이 된다. 21세기에 그리스는 터키와의 분쟁까지 포함한 여러 분규에 말려들고 있다. 그리스는 자국에 있는 마케도니아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할까봐 이웃에 있는 동명의 마케도니아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뒤 독립하여 탄생한 이 신생 국가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이 문제는2018년에 이르러서야 해결이 났다. 양측이 마케도니아라는 국명 대신 북마케도니아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 합의를 보았는데 그리스 내에서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도용했다는 이유로 민족주의자들이격렬하게 들고 일어났다. 어쨌거나 이 조치는 그대로 이행되었고 결국 북마케도니아가 나토에 가입하는 길을 터주었다. - P238

그리스가 여전히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는 사이프러스는 전략적 지정학이라는 고속도로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 항로인데 최근에는 천연 가스전까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3세기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통치가 종식되자 1878년부터 영국은이 섬을 행정적으로 책임지다가 1914년에는 아예 통합해 버렸다. 전시대의 모든 패권국가와 마찬가지로 영국도 에게해와 레반트 지역에서 군사적, 상업적 움직임을 감시하는 데 사이프러스가 갖는 전략적가치에 주목하고 있었다. 냉전시기에 사이프러스는 지중해를 지속적으로 감시할 뿐 아니라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실시한 소련의 핵실험도 모니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레이더로서 일종의 청음초(listeningpost, 소리로 적의 행동을 탐지하려고 전방에 둔 초소) 구실을 톡톡히 했다. 현재도 영국은 이곳에 비행기지를 두고 수천 명의 자국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 P239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터키의 움직임에는 자국을 위한 자원 확보 못지않게 그리스의 안정을 해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다. 이러한고수위의 위험한 게임까지는 아니더라도 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다름없다. 다음 10년은 양측 누구도 전면적인 충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숱한 화약고들이 만들어질 것 같다.
구제 금융을 받는 그리스에게는 군사적으로 대응할 자금이 없다는것을 잘 알고 있는 터키는 그 기간 동안 해군력을 증강했지만 나토의두 회원국인 이들의 힘은 아직은 막상막하다. 그리스 해군은 잠수함전력에서는 확실히 우세하지만 터키도 대잠수함전에 꽤 많은 투자를해오고 있다. 게다가 터키는 가용인력이 훨씬 많다. 그리스가 여전히징병제를 폐지하지 않고 있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있다. - P242

그리스는 갖고 있지만 터키는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웃 친구들이다. 2019년 그리스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이프러스 요르단, 이탈리아와 함께 카이로에 본부를 둔 동지중해가스포럼을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 기구는 에너지 수급에 초점을 맞추고있으면서도 흥미롭게도 해군 합동 작전과 합동 훈련이라는 결과로이어진 안보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와 터키가 분쟁에 돌입했을 때 포럼의 다른 멤버들이 곧장 동참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누구에게 도움을 줄지는 분명하다. 이집트와 터키는 일찍이 리비아 같은 다른 지역적 이슈들로갈등을 빚은 바 있다.
갈등이 증폭될 상황은 여러 차례 있었는데 가끔은 뜻밖의 곳에서벌어지기도 했다. 2020년 2월 터키의 소형 구축함들이 사이프러스가스전에 근접해 오자 프랑스는 항공모함인 샤를 드골호를 급파해서나토 동맹국인 터키 해군의 뒤를 미행했다. 1974년에 터키가 사이프러스를 침공했을 때 지스카르 데스탱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이를 맹비난한 이래 프랑스와 터키의 관계는 잘 봐줘야 냉랭하다 할 수 있었다.  - P243

고이 항구의 위치는 수세기 동안 변치 않았던 영국의 전략은 물론 지난 70여 년간 러시아를 그리스로부터 떼어놓으려는 미국의 전략에도기여해 왔다.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러시아 해군기지는 흑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연결돼서 마르마라해를 통해 에게해로 가서 지중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영국이든 미국이든, 러시아가 남쪽에서 발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세력 기반을 갖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러시아가 수세기 동안 시도해 오고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는 곧 사이프러스가 어째서그토록 전략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섬이며 영국이 왜 그곳에 군사기지를 계속 두고 있는지를 얼마간 설명해 준다. 모스크바는 사이프러스가 외세로부터 벗어나도록 지속적인 로비를 펼치고 있다. 그렇게하면 동부 지중해에서 중동의 서부와 북부 해안까지 잇는 나토의 세력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 P245

그리스는 이 지역에서 미국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동맹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미국은 다음과 같은 대책을 세워두고 있다. 미군이 이지역에 확실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이 점을 이용해서 터키가 믿을만한 나토의 파트너로 다시 서도록 압박하고, 시리아 국경 가까이 있는 터키의 인시르리크 공군기지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재정 붕괴로 인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지리와 역사 때문에라도그리스는 비슷한 규모의 경제를 가진 다른 나라들보다 더 많은 국방비를 계속 지출해야 한다. 이러한 사정은 워싱턴에서 잘 먹힌다. 동맹의 군사 및 재정 부담을 줄이려면 나토의 강국들이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터키와 서구의 관계가 너무 악화돼 터키 정부가 나토를 떠나게 된다면그리스는 동맹의 최남단을 담당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 P246

여기서 러시아는 양쪽을 왔다갔다하면서 게임을 펼치려고 애쓰고 있다. 때로는터키랑 손을 잡다가도 그리스 지도자들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식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것이 큰 모험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겠지만, 시리아에 있는 작은 기지를 보완하기 위해 지중해에서 쓸 만한 해군기지를 얻을 수 있다면 러시아의 전략적 야심에서 이보다 더 경사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는 더 이상 영국, 러시아 또는 미국의 것일 필요가 없다. 그리스는 그리스다. 그런데도 또다시 외부 세력에게 이 나라는 중요한부동산이 되었다. 위기 상황에 처한 러시아 해군이 흑해에서 탈출해야 할 때 그리스는 2차 방어진지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는 유럽의난민 위기 최전선에 있는 데다 동부 지중해에서 나오는 가스 파이프 - P246

라인의 핵심 경로가 될 운명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 이슈 모두 가까운 장래에 전략적 사고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가 나토와 화해하려는 징후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그리스는 수많은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앞으로도 몇 년씩이나 수용해야 할 것이며, 터키와의 해묵은 적대 관계가 개선될 여지는 보이지 않으니 잠재적인 군사행동 가능성도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는형편이다.
국내로 눈을 돌려봐도 해묵은 지리상의 분열은 여전하다. 아직도아테네를 마뜩잖게 바라보는 여러 지역들이 있고 현대 국가의 평범한 일상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곳들도 남아 있다. 모든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바다에서 100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고 그들의 정신 속에, 산업에, 그리고 교역에서도 바다는 늘 가까이 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그리스인들이 염려하는 것은 제우스, 아폴론, 아프로디테가살고 있는 올림포스산을 올려다보던 그 시절과 딱히 달라진 것이 없다. 그 사이 신들은 떠났고, 제국들은 왔다 갔고, 동맹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리스를 만들었던 그 상수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산과 바다 말이다. - P247

터키,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았지만친구는 별로 없다

당신은 아마 터키인들이 원래부터 터키에서 살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안그런가? 어쨌거나 튀르키예Türkiye‘라는 말은 <터키 사람들의땅이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원래 터키인들은 아주아주 먼 곳, 그러니까 몽골에 있는 알타이 산맥 동쪽에서 왔다. 그리고 현재 모국이 되는 곳으로 와서 확실하게 터키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대단한 여정이었다.
먼저 그들은 드넓은 아나톨리아 고원을 건너야 했다. 터키의 서쪽끝단에 있지만 현재는 이 나라의 핵심이 된 지역이다. 북서쪽으로는마르마라해와 접해 있고 동쪽과 서쪽 해안지대에는 저지대가 펼쳐져있다. 터키에는 광대한 평야나 물자를 옮길 만한 길고 평탄한 강들은없을지 모르지만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비옥한 땅과  - P252

깨끗한 물이 있다. 그리고 호수나 다름없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교역을하기에도 수월하다. 이런 조건은 이스탄불이라는 핵심 도시가 해상에서 공격을 받더라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마르마라해를 중심으로 서쪽 끝단에는 다르다넬스 해협이 있는데 이곳을 통해 에게해로 진입할 수 있다. 반대로 동쪽 끝단에는 가장 좁은 곳의 폭이 1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있다. 터키가 이 두 관문을지배하는 것은 방어의 측면에서 엄청난 이점이 된다.
이것들이 합쳐져 결과적으로 한 민족국가를 존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나라를 마르마리아Marmaria 라고 부르겠다. 문제는 이 마르마리아가 아주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곳처럼 목 좋은 곳은 늘 외부 세력들이 호시탐탐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눈독을 들이기마련이다. 특히 동, 서, 남, 북, 사방팔방으로 향하는 무역선들이 최종목적지로 가려면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으니 그들로부터 꽤 많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가 이곳을 지배했을 때가졌던 입장이며 로마, 비잔티움, 그리고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형태로 있던 투르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 P253

비엔나에서 당한 패배를 만회할 능력도 없었던 오스만은 결국 철문쪽으로 퇴각했다가 아예 그 아래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이 지역은 제국에서 가장 쓸모가 많은 곳인 데다 머나먼 북아프리카의 전초기지에 비하면 수도에 훨씬 가깝기도 했다. 하지만 팽창하는서구 제국주의가 그들을 따라잡고 있었다. 점점 산업화를 이뤄가는서유럽 국가들이 부상하는 데 반해 오스만 제국은 기술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그들과 겨룰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서유럽 강대국가운데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을 중동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이어진 발칸 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이 불가리아에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 <유럽의 병자>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가 자명해졌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잘못된편을 선택했을 때 그들 자신의 사망 확인서에 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15년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을 패배시킨 것은 터키 검구 역 - P260

사에 기록될 만한 전공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을 잃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18년의 휴전 협정에 따라 제국의 수도는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고, 결국 1922년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술탄 체제는 폐지됐다. 이 와중에 터키어를 쓰는 일부 주민들은 새로운 국경 바깥에, 즉 그리스와 사이프러스에 남겨졌다. 마찬가지로 백만 명이 넘는 그리스인들은 터키 안에 남겨지게 되었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무스타파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이 이끄는 터키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 - P261

다. 이후 양국의 주민들이 교환됐지만 두 나라에는 여전히 그리스계또는 터키계 소수 주민들이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이 상황은 지난 세기에 양국 간에 긴장을 높인 요인이 되었다. 일부 조항에 대해 두고두고 억울해 하는 터키는 그리스가 터키 연안의 섬들 대다수를 지배하게 된 것과 시리아에 있는 쿠르드족 땅과 아랍 영토를 잃게 된 조약을그때도 인정하지 못했고 현재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 P262

에르도안이나 시시 모두 자신들 조국의 역사는 낭만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지역 내 역할에 관해서는 대립적인 시각을 가진 민족주의자들이다. 두 나라 사이의 이념과 전략적 상이함은 결국 리비아에서 부딪히면서 동부 지중해에서 경쟁에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시시에게리비아는 자기네 뒷마당이나 다름없는데 터키가 무슬림형제단과 연계된 정부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이전의 오스만 제국 영토에서 활개치는 꼴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P273

2020년 터키는 시리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이스라엘, 이란, 아르메니아, 그리스, 사이프러스, 그리고 프랑스와도 사이가 틀어진다. 바로 S-400 신형 지대공 미사일을 나토의강력한 라이벌인 러시아로부터 들여오기로 하면서 모든 나토 동맹국들의 원성을 산 것이다. 미국 또한 신뢰를 저버린 행위라고 분노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미국은 터키 방위 산업에 제재를 가하면서 문제의 S-400은 미국의 F-35 스텔스 전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에르도안의 수석 고문은 앞으로 터키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부대는 그리스가 1922년에 받은 것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터키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에게해에서 헤엄치는 법을 가르칠 것이라는 신랄한 논평을 내놓았다. 그리고2021년 초 터키 정부는 두 번째 S-400 구매를 위해 러시아 정부와 협상을 개시했다. - P279

터키 내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대략 1천5백만 명으로 추산되는데이는 이 나라 총인구의 18퍼센트를 차지하는 숫자다. 이들 대다수는이란 이라크, 시리아와 마주보는 동부아나톨리아 산악지대에 살고있다. 그리고 이들 나라의 접경지대에도 또 다른 1천5백만 명 정도의쿠르드족이 살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로 들어오면서 터키 내 쿠르드족이 도시로 이주해 오기 시작하면서 현재 이스탄불에만 2백만 명이 살고 있다. 이제 쿠르드족은 이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소수 민족이 되었다.
흔히 쿠르드족을 <나라가 없는 가장 큰 민족>이라고들 한다. 7천5백만 명쯤 되는 인도와 스리랑카의 타밀족을 고려한다면 그 전제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2백 년 가까이 독립 쿠르드 국가를세우기 위한 운동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나톨리아의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의 통치자들과 충돌했고 현재도 터키공화국에 지속적으로 저항해 오고 있다. - P282

그런데 에르도안은 이 건축물에서 다른 이득을 기대했다. 그는 터키어와 영어로 된 공식 소셜 미디어 계정에서 일종의 포용력을 찬양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외국인이든 지역 주민이든, 무슬림이든 아니든....… 인류애라는 유산을 공유한 하지아 소피아는 보다 진실하고독창적인 방식으로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다." 하지만 대통령 집무실에서 관리하는 아랍어 웹사이트의 어조는 사뭇 다르다. 하지아 소피아의 이슬람 사원으로의 조치는 예루살렘 통곡의 벽 위쪽에 위치한알 아크사 모스크(아랍어로 <가장 먼 모스크>라는 뜻으로 이슬람교 성지 중 하나)의 해방을 예고하는 전조라는 것이다. 에르도안의 결단은 누가 봐도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는 모든 이슬람 땅에서 우리의 가치와 상징을 대상으로 한 혐오스러운 공격에 대한 대답이다……. 전지전능하신 알라의 도움으로우리는 이러한 축복받은 길을 내 한몸 희생하여 담대하고 꿋꿋하게지치지 않고 쉼 없이 걸을 것이다.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말이다" - P286

현재 에르도안과 그가 이끄는 AKP 당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음은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온건파 쿠르드족의 지지를 잃었다. 도시에서는 잠식당하는 자유와 이슬람화되어 가는 공화국에 대한 불안감이 이는 가운데 새로운 도전자들이 출현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이 나라의 정치 및 사회는 마르마라 지역의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층과 상인 계층이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신앙심이 깊고 문화적으로보수적인 사람들이 도시로 대거 유입되었다. 그들은 AKP 당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세대가 흐를수록 이 새로운 도심지 주민들의다수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가슴과 정신, 세계 안에서 자신들의 국가 역할을 둘러싼 양측의 힘겨루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P287

외교 전선에서 터키는 점점 더 고립으로 치닫고 있으며 신뢰 또한 잃어가고 있다. 터키 정부는 스스로 유리한 패를 쥐고 있다고 믿고 있다. 물론 나토의 남측 지역의 주요 수호자이며 인시르리크에는 미 공군기지를 유치했고, 이즈미르에는 나토의 지상 기지가 있으며, 이 나라 한복판인 쿠레시크에는 조기 경보 레이더 시스템까지 설치해 두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이 정말로 그렇게강력한 패라면, 터키가 그 패를 쓰지 않게 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생각이 들 때 나토가 꺼내들 수 있는 다른 패들도 있다. 꼭 그래야 할상황이 온다면 나토는 그리스와 루마니아에 있는 시설들을 증강해서지중해와 흑해에서 터키에게 잃었던 부분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 P288

또 아랍에미리트를 회유해 미 공군기지를 유치하게 해서 인시르리크를 잃은 타격을 만회할 수도 있다. 터키는 홀로 갈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수도 있겠지만 상황은 바뀔 수 있고 살벌한 동네에 살고 있음 또한잘 알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터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시리아 등 4개 나라에서 분쟁이 발발했다. 물론 이란은 늘 반대 세력이었다. 에르도안과 푸틴이 서로 배짱이잘 맞는다고 해서 러시아가 꼭 우호적이라는 법도 없다. 어쩌면 프레너미(frenemy, friend와 enemy가 합쳐진 조어로, 한쪽에서는 서로 협력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경쟁하는 관계)라는 말이 이들 사이의 관계를 훨씬 잘 설명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터키는 시리아와 리비아에서 실리를 챙기기는 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터키가 푸른 조국 전략으로 그리스와총격전이라도 벌인다면 이내 사이프러스, 프랑스, 이집트,  - P288

아랍에미리트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상황에서 터키가 지중해에서 맞닥뜨려야할 반발에 비견될 만한 것은 별로 없다.
오늘날의 터키는 탈냉전과 9ㆍ11 이후의 세계를 경쟁자들이 바글거리는 정글>로 보고 있다. 그 세계의 맹수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터키는 무기의 국산화를 모색해 왔고 세계 최고의 무기 수출국이 되고픈 희망을 품을 만큼 성공적으로 방위 산업을 구축해 왔다. 터키군의 장비와 설비 가운데 70퍼센트가 자국 내에서 생산되고 있으니 나토 동맹국들의 주문량이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이 나라를 세계 14위의 무기 수출국으로 만들어 주기에는 충분하다. 터키의 야심 찬 계획은 2030년까지 F-16을 대체할 최첨단 전투기인 TF-X 이다 TF-X는 좀 더 일찍 날았어야 했다.  - P289

터키가 러시아의 S-400 신형 지대공 미사일을 들여오자 미국은 롤스로이스와BAE 시스템스(영국의 군수 산업체)를 설득해서 터키와 협력을 끊도록했다. 하지만 터키는 자국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서 현재는 탱크와 장갑차, 상륙용 주정(병력, 보급 물자, 장비 따위를 육지로 나르는 날쌔고 작은 배), 드론, 저격용 소총, 잠수함, 소형 구축함까지 생산한다. 그리고 2020년에는 공격용 헬리콥터와 무장한 드론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경항공모함을 처음으로 진수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터키는 카타르와 소말리아에 군기지를 설치했고 외부 세계에 덜 의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리아와 리비아에 자체 부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점에 있어서 에르도안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꼭 푸틴이 관심을 요구하면서 얻었던 것과 비슷하다. 에르도안도 이주민부터 에너지, 무역,
그 외 많은 쟁점이 부각될 때 터키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미국 행정부는 가치에 기반을 둘 - P289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는 나토 동맹국들과 이 가치를 공유하고 싶다는 의중을 밝힌 것이기도 하다. 현실 정치에서는 터키가 갖는 가치 때문에 나토가 지난 시절 터키의 군사 독재를 눈감아 주었는데, 만약에르도안의 권위주의 통치가 더욱 강화된다면 미국 대통령의 수사학적표현도 도전받게 될지 모르겠다.


오스만제국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았던 아타튀르크 초대 터키 대통령은 서구화에 중심을 맞추면서 터키를 20세기로 끌어들였다. 반면 에르도안의 터키는 지난 10년간 수평선을 360도 골고루 둘러본 뒤보다 남쪽과 동쪽을 향해 천천히 초점을 움직여 가고 있다. 현재도 이여정은 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변화할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다시 말해 현실 정치는 아직 작동하고 있어서 터키정부가 뜻하지 않은 장애물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터키가 아무리 멀리 가려 해도 늘 그 여정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나라의 지리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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