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정申鉉正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대립對立」(1983), 「염소와 풀밭』(2003)이 있고, ‘서라벌문학상‘ (2003), ‘한국시문학상‘ (2004)을 수상했다. 20여 년 동안 시쓰기를 중단했다가 최근 다시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서라벌고등학교 등에서 국어선생을 지냈으며 한동안 카피라이터 일을 하다가 현재 광고 및 편집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 시인의 말


시가 무엇입니까.
초월, 우주적 자아, 아닐 것입니다.
눈물, 삶의 더러운 때, 아닐 것입니다.
위로, 화해, 더구나 아닐 것입니다.
희망, 절망 아닐 것입니다.
죽음 관념, 아닐 것입니다.
자유, 피의 전율, 그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이 지상에 초대합니다.
당신이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습니다.

세 번째 시집을 내며
신현정

신현정의 시는 극소지향적이다. 그의 시선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에 밀착돼 있다. 오리, 물고기, 염소, 복숭아, 참새, 소금쟁이, 풍뎅이, 달팽이집, 강아지풀, 애늙은이, 이슬 한 개, 그리고 하느님. 그는 이런 미시적인 사물에 대해 情意的인 거리를 유지하고 바라보지만 자신이 들어가 밀착될 수 있는 틈새를 찾아낸다. 그 틈새에서 그가 발견하게 되는 마음은 아름답다. 대상과 자신과의 거리를 소거하며 포개어지려는 이 밀착에의 욕구는 시를 극소화하는 질서를 낳는다. 극소화된 시의 질서와 공간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허무의 굽은 물결을 저어가기에는 너무나 선한 인성을 지닌 오리떼를 따라가는 마음 속에도 있고 모처럼 소풍을 나와 급행을 보내버리고 천천히 완행을 타려는 마음에도있다. 신현정의 시가 보여주는 시적 공간은 극소화한 일상의 소품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 속에 사회적 자아가 껴들어 있을 틈도 없다. 이것은 엄청난 고통이며 극기의 정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이 결백주의자의 ‘강아지풀에 대한 명상‘에서 시인 스스로가 삭제하고 삭제해버린 사회적 자아를 애써찾을 필요가 없다. 시인 자신이 시를 꿈꾸는 걸인이요, 하느님 앞에서 생각을구걸하는 걸인으로 시적 자아가 변형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정권(시인)

이름을 가려놓고도 누구의 시인지 알 수 있다면, 그런 시를 쓴 시인을 일컬어 흔히 一家를 이룬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현정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일가를 이룬 시인이다. 시에 조금만 관심을 지닌 사람이면 신현정의 시는 신현정의 시인지 알 수가 있으니 말이다. 예술가란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는사람이다. 오래 전부터 자신의 시적 스타일을 만들어나간 신현정, 그렇다면 신현정은 참으로 이 시대 몇 안 되는 예술가이며, 예술가의 길을 가는 시인이다. 왜 그런가? 신현정의 시가 다만 외적인 스타일만 유니크한 것이 아니라, 시예술로서의 언어의 싸움까지, 그러므로 시적 이미지까지 유니크하기 때문이다.
尹錫山(시인)

경계


나, 해태상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나는 모든 것의 경계에 섰노라 하고

외쳐보려고 한다

해태의 눈을 하고

이빨을 꽝꽝꽝 내보이며

뿔을 나부끼며

경계가 여기 있노라

연신 절을 하려고 한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 P13

오리 한 줄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 가고 싶은 것이다

한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 가면 된다

뒤뚱뒤뚱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줄 일제히 꽥 꽥 꽥. - P16

자전거 도둑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페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 P18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 P19

낮달


와, 공짜달이다

어젯밤에 봤는데 오늘 또 본다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놈이면

오늘 공짜달을 다 보는가 말이다. - P25

기러기 울음


난 그렇게 듣는다

기러기들이 감나무 위를 날아가니까

기럭기럭 우는구나 하고 듣고

억새밭 위를 날아가니까 억새억새 우는구나 하고 듣고

또 달을 지나가니까 달빛달빛 우는구나 하고 듣는다

오늘 기러기들은 임진강에 떠 있는 임진각 위를 지나

북녘 하늘을 날아가니까 북녘북녘 우는구나

하고 나는 듣는다. - P26

일진日辰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나온 보라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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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이야기에서 가장 흔한 은유 중 하나는 아웃소싱(위탁)이다. 흰개미는 소화를 위한 작업을 곰팡이에게 위탁했다고말하거나, 곰팡이는 식량을 모으고 살기 편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을 흰개미에게 위탁해 해결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생물학적 과정을 현대 비즈니스 방식에 비유하는 것에는 사실상 너무 많은 오류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것에 한 가지 통찰이 존재할지도모르겠다. 자본주의적 공급사슬에서 이러한 방식의 사슬은 확장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 공급사슬의 구성 요소는 회사든 생물종이든 간에 자기복제를 하는 교환 가능한 사물로 축소될 수 없다. 대신에 그 사슬을 유지하는 마주침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있다. 경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학적 모델링보다는 자연사의 서술이 첫 번째 필수 단계다. 급진적인 호기심이 손짓한다. 아마도 관찰과 서술에 가치를 두는, 몇 개 남지 않은 과학적 학문 중 한 분야에서 훈련받은 인류학자가 한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 P265

풍경은 인간 너머의 드라마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인간의 자만심을 해체하는 급진적인 도구다. 풍경은 역사적 행위의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활동적이다. 풍경이 형성되는 것을 지켜보면 세계 형성에서 인간이 살아 있는 다른 존재에 합류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송이버섯과 소나무는 숲에서 그저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숲을 만든다. 송이버섯 숲은 풍경을 만들고 변형하는모임 gatherings 이다. 이 책의 3부는 교란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교란을 시작점, 즉 행동을 위한 첫 단추로 삼는다. 교란은 변형적인 마주침을 위한 가능성을 재배치한다. 풍경의 패치들은 교란에서 등장한다. 그리하여 불안정성 precarity은 인간을 넘어서는 사회성에서 일어난다. - P271

그러나 나는 비교를 넘어서서 인간, 송이버섯, 소나무가 숲을창조하는 역사를 찾고 있다. 나는 구분해 범주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연구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그 국면들을 연구한다. 나는 서로 다른 겉모습을 가진 똑같은 숲을 찾는다. 각각의 숲은 상대방의 그림자를 통해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하는 동시에 단일하고도 다면적인 형성을 탐구하면서 앞으로 펼쳐질네 개의 장에서는 소나무를 살펴볼 것이다. 각각의 장은 교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삶의 방식이 어떻게 조율되며 펼쳐지는지 설명한다. 삶의 방식이 하나로 모이면서 패치에 기반한 배치가 형성된다. 내가 보여주는 배치는 거주 적합성, 즉 인간이 교란한 지구에서 일반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지를 고려하기 위한 장면이다.
불안정한 생활은 항상 모험이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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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기 전


우리 아버지 운다, 땅에 엎드려
우리 아버지 운다, 저 바람의 힘줄을 쥐고
우리 아버지 운다, 늙은 잎사귀들을 훑어 뿌리며
우리 아버지 운다, 모래알같이 흩어지며
우리 아버지 운다, 개미들이 기어가는 걸 보며
우리 아버지 운다,
우리 아버지 운다.

누군가 이 세상을
등기 이전도 안하고 옮겨가나 봐.
죽은 자를 문상하고 돌아가나 봐.

발소리 섞여 멀어 가는 빗소리에 귀가 환하게 열린다.

관절이 쑤시는 걸 보니
비가 많이 오려나 봐.
세상의 호수들이 다 넘치도록
비가 오려나봐 - P80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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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에 구워낸 단단한 소금 같은 그의 시편들은 천근 슬픔의 천일염을 녹이고도 남는다. 사라지는 것도 존재의 한 방식이라고 놀라운 말을 하는 그는 몸을 열어 시를 받은 타고난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생취가 있고 생의가 있어, 시의 솟는 힘으로 마음을 불끈 들어올려준다. 그의 시는 벼랑을 품은 자의 장엄이며심지 깊은 은자전(隱者傳)이다. 세상이 그를 까맣게 잊어 마침내 고요의 달인으로 등극하고 싶었다고 쓸 때 그의 시는 고요가 세운 한 채의 요사채며, 땅에서 주저앉은 자 땅에 뿌리를 내린다고 쓸 때 그의 시는 일획으로 직립(直立)하는 한그루 금강송이다. 고요가 그토록 공들여 뜸들이니⋯ 법향(法香)처럼 만리나 퍼질 그의 시여! 우주의 살에다 한 나라를 세우시라.
천양희(시인)

장석주 시가 도달한 이 처사풍(處士風)은 시인이 감당하고 있는 고독의 크기에 비례하여 그윽할 만큼 그윽하다. 그의 마음이 가는 길은 말벗 하나 없는 외로움의 길이면서 또한 무구한 유희와 도취의 길이다. 투명한 ‘혼자임‘ 속에서 단련된 그 마음은 가을 물고기처럼 슬프고도 자유롭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그모든 것이 또한 영혼의 슬픈 허영일 뿐임을 그는 모르지 않는다. 허나 어쩌랴, 그것이 모든 시인됨의 천형인 것을.
김사인(시인)

□시인의 말


내 고혈을 빨고 비명마저 싹싹 핥고
그래도 미진한지 두리번거리는 너,
고문기술자, 악덕 포주, 끔찍한 세리여!


졸렬하고 비루한 걸 오래 잘도 물고늘어졌다.
네가 아니었다면 영혼의 무게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으며, 꽃 피어나 괴롭고 황홀한 세월을 어찌 견딜 수 있었으랴!
봄 모란꽃 가슴에 품고 가을 매 눈에 담고 
더불어 예까지 왔으니,
그동안 네게 떼어준 약간의 피와 땀방울과 푼돈의 시간들은 후회하지 않겠다.
여명의 시각은 내 것이 아니다.
내겐 해질녘의 긴 그림자 밖에는 없다.
쥐어짜도 더는 나올 게 없으니, 이제 그만,
내 머리끄댕이를 놓아다오.


시여!

수졸재에서
이천오년 여름에 쓰다

단감


단감 마른 꼭지는
단감의 배꼽이다.
단감 꼭지 떨어진 자리는
수만 봄이 머물고
왈칵, 우주가 쏟아져 들어온 흔적,

배꼽은 돌아갈 길을 잠근다.
퇴로가 없다.
이 길은 금계랍 덧칠한 어매의 젖보다
쓰고
멀고 험하다.

상처가 본디 꽃이 진
자리인 것을, - P14

태양초


붉고 메마른 것이
우리에게 왔다.

금햇빛을 쪽쪽 빨아먹고
혈소판마저 투명해졌구나.
가난하고 천하면서 뻣뻣한 것,
너는 본향을 잊었구나.

비릿한 게 마르면 가슴 더 붉어지고
몸뚱이는 가벼워지는가! - P15

수그리다


바람 섞여 진눈깨비 치는 저녁,
흘러나온 불빛이
코뚜레 뚫은 송아지처럼 길게길게 운다.

길 나서지 못한 사람 살고 있다고,
가는 저녁 다시 못 온다고,
다정한 몸 속으로
울음이 뭉툭하게 밀려든다.

저녁마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들 속에서
무릎 아래 그림자 키우는
누군가의 재개봉영화 같은 생이 밀려간다.

누군가 어둠 쪽으로 몸 돌려
꽃피는 머리를 수그린다. - P22

오동나무


먹물 찍어 힘차게 세로로 내리 그었다.
오동나무는
일획으로 직립直立한다.

마른 풀에 서리 앉은 아침,
청어떼 잔구름을 끌며
오동나무는 개간지 위에 서 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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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河鍾五


1954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975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월에서 오월로』,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쥐똥나무 울타리』, 『사물의 운명』, 『무언가 찾아올 적에』, 『반대쪽 천국』 굿시집 『넋이야 넋이로다』, 님 연작시집 「님 시편」, 「님』을 출간했다.

하종오 시인의 시에는 ‘의금상경(衣錦尙絅)‘ 이있다. 속에는 비단옷을 입었으되 겉에는 수수한 옷을 걸쳐 그를 감싼다. 시경(詩經)에 있는 말이다. 반짝거리거나 목청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음악으로 치자면 통주저음(通奏低音)이다. 리얼리즘의 행간을 그렇게 통과한다. 그렇다고 엄숙한 포즈의 그것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그저 소박한 마을 이웃들과 ‘너나들이‘로 ‘시시닥거리는‘ 인인애(隣人愛)가 사뭇 정겹다. 거기 그의 ‘남‘은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하게 자리해 있다. 그는 쓰고 있다.
‘님께서 만드시는 영역과 그이가 만드는 영역 그 틈새에 신생이 있었습니다. 모두 그것이 있다고 꼭 믿었기에 두 분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래저래 살아갔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여러 번 무릎을 쳤다. 그의 詩가 지니는 시의 임계속도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우리로 하여금 ‘님‘을 상면케 한다. 그의 시 ‘님 연작‘ 처처에 ‘님‘께서 자리하고 계시다. 그의 시를 읽고 이미 개운해진우리 몸과 마음의 실상이 님의 정체를 증거하고 있다. 그게 신생(生)이다.
정진규(시인)

■ 시인의 말


이 시집에 나누어진 세 개의 부에 등장하는 3인의 님, 그이와 저이는 모두 내가 살던 강화도 마을의 주민들이다. 논과 밭을 갈아먹는다는 점에서 신분은 같지만, 그들은 출신과 형편과 지향이 다르고, 그리고 생의 방편이 달랐다. 그들 중 더러는 토박이로 늙고 병들어 죽었고, 더러는 물려받은 전답이 작아서 남의 땅을부쳐먹거나 막노동을 했고, 더러는 땅값이 올라 부자가 되었는데도 농사를 지었고, 더러는 땅을 팔아서 탕진하는 바람에 다 털고 외지로 떠났고, 그 자리에는 외지에서 들어온 새로운 주민이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은 너나 나의 같은 모습이면서도 다른 모습이었고, 너희나 우리의 다른 모습이면서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萬人이었다.
내게 운문정신이라는 화두를 세우게 했던 님 시리즈는 外篇(「님 시편』, 1994년, 민음사), 『님』, 1999년, 문학동네), 前篇, 本篇, 後으로 이루어진다. 이 님 시집』은 前에 해당하는데, 2000년 말과 2001년 초에 걸쳐 겨울 동안 써서 2004년 「현대시학」에 분재했던 것을 일부 고쳐서 묶었다.
운문정신이여, 여전히 내게는 님이 현실이고 현실이 님이다.
2005, 6, 1.
하종오

제1부 제1편


님께서 가시자, 그이는 날마다 버덩을 태웠습니다. 그이가 왜 태우는지 아는 것들은 알 슬어놓고 사라진 곤충들뿐이었으므로 사방으로 연기만 흩어졌습니다. 그게 그이가님 그리워하는 모습이라고 나무들이 껍질 속으로 알단단하게 품고 이파리들을 털어 버렸습니다. 무서리 내리던 어느 밤에도 그이는 버덩에 들불을 피워 올렸고, 두루미 떼 날아오던 어느 낮에도 그랬습니다. 그이에게 긴겨울을 넘겨주실 님께서 아니 계시니, 그이는 묵묵히 순응해야 했습니다. 그이는 밤낮없이 버덩을 태운 뒤, 농기계에 기름 치고 창고 속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님께서 원하지 않으셨어도 이 일로 그이는 긴 겨울을 잡아두려는 것이었습니다. 하 많은 날 그이가 마실 다니며 술을 마셔대다가 고래고래 소리질러서, 땅 속에 잠든 개구리들이 이따금 비몽사몽 울기도 하고, 땅 위에 떨어져 있던 풀씨들이 천방지축 풀썩거리기도 했습니다. 그건 님 그리워하는그이의 마음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님 계시지 않는 마을에서 주민들도 그이를 따라 버덩을 태웠습니다. - P10

제1부 제2편


그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이 눈썹 위로 낮은 능선이 와서 어른대다가 지나가고, 그이 가슴 위를 스친텃새 한 마리는 처마 끝에 앉아서 짖어댔습니다. 님께서 계셨다 해도 일어날 기미라고 그이가 알아챘다면 기뻐했을지 슬퍼했을지 정녕 알 수 없지만, 아마 님께서라면 손뼉치며 크게 웃으셨을 겁니다. 사지오체를 산야에두고 마음을 그 위에 띄워놓고 풀빛깔 꽃빛깔 품는 시간을 가장 원하셨던 님이시니, 만약 님께서 떠나지 않으셨으면 그이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했던 일을 금년에도그대로 했을 겁니다. 시장에 나가 곡식 값을 흥정하고 집에 돌아오면 개밥그릇에 식은 밥을 담아주던 그 일은 그이에겐 살림살이인 너무나 살림살이인 일과였드랬습니다. 그이가 손놓고 지내는 동안 바람은 성질부리다 온데간데 없이 달아나고 쌀가마니는 들썩거리다가 헛간에 주저앉고 마늘통은 부엌에서 싹 뾰족이 내었습니다. 님 사셨던 집만 가만히 있었습니다. - P11

제1부 제3편


하루는 그이가 님 사셨던 집 뒤란 백목련 가지에 얼굴을 얹었습니다. 겨울낮에 그이 몸이 푸른 잎 되려는지 흰꽃 되려는지 껍질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눈이 내렸습니다. 언젠가 님께서 논둑에 핀 들꽃 꺾어들어 그이에게 보여주셨을 때, 들일에 지친 그이가 외면하자, 님께서는 꽃잎 떨어져 눕듯이 쓰러지셨드랬습니다. 흙 묻은 맨발로 님을 업고 집으로 돌아온 그이가 다시 논둑으로 나가 들꽃 꺾어 님께 보여주자, 꽃잎 벙그듯이 님께서는 홀연히 일어나셨드랬습니다. 그이가 들꽃을 님으로 알기시작했던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님을 볼 수 없는 날에는들길에서 만난 들꽃에게 그이는, 꽃아 네 속으로 이 길 틀어다오, 내 가서 줄기가 되마, 꽃아 내 속으로 저 길 옮겨놓을게, 네 와서 몸이 되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눈이종일 내렸습니다. 그 하루 님 사셨던 집 뒤란 백목련은 어디론가 가고, 그이 몸만 눈에 싸여서 흰 꽃을 피우고 서있었습니다. 저물녘 껍질을 찢긴 백목련이 돌아와서는시린 눈망울 되고픈지 뜨거운 심장 되고픈지 그이 몸 속으로 비틀비틀 걸어 들어갔습니다. - P12

제2부 제4편


님의 비닐하우스 속에는 벌써 상추가 먹을 만큼 자랐습니다. 일찌감치 씨 뿌린 이유야 초봄 밥상 차리는 데는청청한 잎사귀가 가장 넉넉해서이겠지요. 저 역시 그러해서 님께 얻으러 왔지만 아니 계셔서 눈치 보며 상추잎을 땁니다. 제 손에 잡힐 때마다 파르르 떠는 한 잎 한잎이 님의 마음으로 느껴집니다. 아직도 님께서는 남한테바치고픈 여생이 있어서 재배에 정성 쏟으시는가요. 저는 햇볕에 뜨거워져서야 님께서 비닐하우스 세우신 의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무서운 건 사람의 한입 채우는 일이니까요. 겨우살이 끝낸 뒤 간맞추어 먹을 게 없는 삼시 세끼를 님께서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겠지요. 밭에 푸성귀가 돋아나지 않는 철에 끼니를 만들어야 하고, 삼사월 한나절 해 지도록 밭에 나가 있어야 하는 님을이해합니다. 님의 비닐하우스 속에 출렁이는 열기에 숨헐떡거리며 이제 저도 조숙해집니다. 인간은 먹을거리앞에 두고 깨달을 때 가장 순해져서 함부로 허리 펴지 않고 비로소 곡식에 육화되는 게 아닐는지요. 잎을 저에게 - P48

내준 상추는 또다시 먹을 만큼 자라날 것이고, 저는 이제건방진 자세를 버릴 것입니다. 님이시여, 비닐하우스 밖으로 나오자, 저는 먹지 않고도 포만하여 그만 신록에 겸손해집니다. - P49

제2부 제7편


제가 님을 볼 적마다 님께서는 물 아니시고 불이시고님께서는 불 아니시고 기름이시고 님께서는 기름 아니시고 나무이시고 님께서는 나무 아니시고 풀이시고 님께서는 풀 아니시고 익충이시고 님께서는 익충 아니시고 농약이시고 님께서는 농약 아니시고 비료이시고 님께서는비료 아니시고 똥이시고 님께서는 똥 아니시고 곡식이시고 님께서는 곡식 아니시고 소이시고 님께서는 소 아니시고 트랙터이시고 님께서는 트랙터 아니시고 농부이시니, 님께서 저를 볼 적마다 저는 농부 아니고 백수이고 저는 백수 아니고 흙바람이고 저는 흙바람 아니고 먹구름이고 저는 먹구름 아니고 장대비이고 저는 장대비 아니고 흙탕물이고 저는 흙탕물 아니고 찌꺼기이고 저는 찌꺼기 아니고 개밥그릇이고 저는 개밥그릇 아니고 사료이고 저는 사료 아니고 밥이고 저는 밥 아니고 푸성귀이고저는 푸성귀 아니고 상품이고 저는 상품 아니고 소비자이니, 님께서는 저 아니고 님이시고 저는 님 아니고 저였습니까. - P54

제2부 제10편


달빛이 지상으로 내리고 벌레울음이 천상으로 오르는 밤길입니다. 저는 아직도 님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낮 동안 님께서는 무얼 보셨는지요? 흙 속에 뿌리 퉁퉁하게 키워야 값을 하는 고구마의 분투를 보셨나요? 흙바닥에 넝쿨로 기어야 성질을 찾는 호박의 비애를 보셨나요? 태어나서 울기만 하다가 죽어 가는 참매미의 기막힌 생사를 보셨나요. 저에게 보이던 님의 옷가지에는 님의 육신이 없었습니다. 님께 보이던 저의 허우대에는 저의 존재가 없었겠지요? 땅에게 주고받을 대가로는 이제 죽어 편히 누울 무덤만 남아 있지만, 님의 본모습을 보려는 저에게는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을지모릅니다. 저의 본모습은 정지된 공간에 차는 입체도 아니었고 흐르는 시간에 편승하는 허상도 아니었기에 저는님께서 하시는 밭갈이 김매기를 따라함으로써 일체의 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오늘밤 님께선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 깊이 잠들어 코고는 소리가 들녘에 울려 퍼집니다. 제가밤 새워서 님의 무엇을 볼 수 있을는지요? 그만 저는 - P59

달빛에 가득 차서 천상으로 오르거나 벌레울음에 덮이어지상에 엎어지고 싶습니다. 홀연히 제 발길을 낚아채고는 밤길이 까마득하게 사라집니다. - P60

제3부 제3편


가을 밖으로 저이가 걸어 나갔을 때 감나무에서 투툭홍시가 떨어졌고, 까치가 놀라 날아올랐습니다. 감나무가 낙과를 즐거워한 적 없지만 이제 저이를 보면 가지가 절로 흔들렸습니다. 깊드리 논둑에 저이가 옮겨 심어주었던 묘목 시절에는 저이도 어렸는데, 해마다 모내고 나락 베는 사이에 함께 늙어 버렸습니다. 감나무는 더 많은감을 맺어 왔지만, 저이는 살림이 줄어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감나무가 저이에게서 달아나고 싶어할 때 님께서나타나 높드리에서 내려다봐 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님께서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시니, 해거리를 하려던 감나무는 갑자기 감을 많이 달고 싶어졌습니다. 저이가 본체만 체하든 말든 감나무는 감꽃을 희디희게 피워내고 감을 주렁주렁 달고서 님을 향하여 이파리 흔들어댔고, 날이면 날마다 까치가 찾아와 짖어대면 감을 붉혔습니다. 그런데 저이가 가을 밖으로 나가고 나자, 일시에 가지에서 홍시가 투툭 떨어졌습니다. 감나무는 저이가 가을밖에서 돌아오지 않으니 공연히 불안하였습니다. - P78

제3부 제16편


님께서는 님대로 사시고 저이는 저이대로 사는 동안에 가을은 들길 몇 리 산길 몇 리를 갔습니다. 저는 님과 마주치지 않는 날, 저이대로 뒤쫓아가서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가을을 보았습니다만, 쭉정이를 이끌고 가는그 모습에서 저이는 남루한 자신을 보았습니다만, 님께서는 저이와 마주치지 않는 날, 님대로 뒤쫓아가서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가을을 보셨습니다만, 단풍을 이끌고가는 그 모습에서 님께서는 유유자적하던 자신을 보셨습니다만, 적막한 산야에서 님께서는 다른 님을 기다리지도 않으시고 저이는 다른 저이를 기다리지도 않으니, 가을이 왔다가 가는 속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가을에는 높드리 깊드리에서 거둬들인 양식이 얼만지, 셈이 가장 중요하였으므로 님께 다른 님이 올 리도 없고 저이에게 다른 저이가 올 리도 없었습니다. 가을이 가고 난 뒤로 더욱님께서는 님대로 사시고 저이는 저이대로 살았습니다.
저마다 차지하고 앉은 터가 다르니, 님께서는 자신에게만 님이시고 저이는 자신에게만 저이였습니다. - P96

제3부 제17편


님께서도 모르셨고, 저이도 몰랐습니다.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져, 차갑게 식은 산야에 잎턴 나무와 씨 턴 잡초만 가만히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 위 허공이 팽팽해져서 날아갈 수 없는 새들은 울음을 접고 내려앉았습니다. 가을이 다 갔습니다. 지상에 모여드는 무리들은 햇살한 줄기에도 인색해져서 양지를 차지하면서부터 님과 저이 틈이 더 벌어짐을 알았습니다. 님과 저이만 모르고 있었지, 그 관계를 아는 무리들은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준비하였습니다. 님과 저이 틈에 끼어 들었다가는 명년 봄에 붙어살 땅 한 귀퉁이마저 얻지 못할 것입니다. 가을은 가면서 님과 저이 사이의 하늘 수십 리 마음수십리 지상 수십 리를 허허벌판으로 만들어놓고 갔습니다. 님께 저이는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었고, 저이에게 님께서는 논일을 모르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을이 가는 동안에 두 분이 외면하여서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놀빛이 떠돌았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가득 채울 이는 님께서도 아니셨고 저이도 아니었습니다. - P97

제3부 제20편


첫눈이 내렸습니다. 저이의 깊드리에도 님의 높드리에도 내려 쌓였습니다. 눈보라는 허공에 지어진 새의 집을 무너뜨리고 지하에 지어진 네발짐승의 집을 뭉개었습니다. 동네를 떠나지 않은 님께서는 침묵하셨고, 동네를 떠난 저이는 소식 없었습니다. 님께서 첫눈 마중 아니 나오셨고, 첫눈 배웅 나갈 저이가 없었으므로 밤새 내렸습니다. 저이의 깊드리든 님의 높드리든 명년에는 가뭄이 들지 않을 테지요. 한동안 님께서는 저이를 못 만나시고 저이도 님을 못만나겠습니다만, 첫눈이 그치면 님의 높드리나 저이의 깊드리에 굶주린 새들의 부리짓이나 네발짐승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힐 것입니다. 그걸 보게 된다면 님께서는 집안에서 나와 땅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논일을 찾아서 해야 하고, 저이는 동네로 돌아와 땅을 덜 가지겠다는 생각을 하며 곡식을 잘 키워서 아껴 먹어야 한다는것을 알게 될는지요. 첫눈을 님께서도 보지 못하셨고 저이도 보지 못하였으니, 어느 날에는 님과 저이는 가깝지 않을것이고 어느 날에는 님과 저이는 멀지 않을 것입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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