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대한 어떤 확신도 없이 맞은 오늘의 마흔은 미혹이다. 내경험에 비쳐보자면, 마흔은 분명 어른이 아니다. 공자시대에 마흔은 어른이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마흔에 이른 사람들은 철이 나지 않은 그저 늙은 소년이다. 마흔의 소년 소녀들. 그들은 확신도, 삶의 목적도모호한 채 여전히 흔들린다. 마흔이 불안한 건 그 때문이다.
왜 그럴까? 삶을 통찰하는 지혜가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 대신에 실용을 따르고 익혔다. 한마디로 천박한 실용주의이다. 돈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고 배워온 것이다. 정말로 돈만 있다고잘 살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문제는 지혜이다. 지혜를 배우지못한 채 맞은 마흔은 미혹이고 재앙이다.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림도 흔들림 나름이다. 마흔, 그들은 방황한다.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 P29

공자는 낚시는 했지만 그물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지는 않았고, 새를 활로 쏘아 잡기는 했지만 둥지에서 잠자는 새를 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그물을 써서 고기를 잡으려고 한다. 둥지에서알을 품고 있는 새라도 잡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더 많은 물고기를잡고 더 많은 새를 잡는 것을 더 훌륭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공자는 왜 굳이 낚시대를 드리워 물고기를 낚고 둥지에 있는 새는 잡지 않았을까? 공자는 사람이 인애 없이 사는 것을 천하게 여겼다. 세상이 인애를 업신여기고 물질을 숭상하면서 날이 갈수록 살기가 팍팍해졌다. 탐욕은 세상을 삭막하고 황량한 사막으로 만든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인, 의, 예지, 신이 펼쳐지면 세상이라는 사막을 초원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것들은 다 개인의 도덕적 수양과 관련이 있다. 더나은 세상이 되기 위해 세상을 이루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 P30

행복은 거창한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사소함에서 온다. 햇빛 한 줄기, 메아리, 솔숲의 향기, 물의 반짝임, 불쑥 솟은 모란의 붉은 움, 아이들이 까르륵 웃는 소리, 이웃의 친절함, 안 먹고 안 쓰며 평생모은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 할머니들, 여름 새벽의 차가운 공기들, 연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들, 반딧불이들, 소나기 뒤 앞산 골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새벽 수련꽃, 새벽에 배달된 신문, 방금 구워낸 크로아상,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황금빛 맥주 첫 잔, 제주도의 비자나무 숲길, 앵두열매, 레몬향, 따뜻한 크림스파게티, 구운 양고기, 창가에 울리는 편종소리, 재즈의 다정하고 슬픈 선율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 함흥냉면, 베트남 쌀국수, 팥빙수, 다정한 키스의 순간들, 작은 선물, 풀밭 위를 날아가는 꼬리에 점박이무늬가 선명한 나비....... 이 모든 것들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대개는 돈 없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고, 이것들은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일상을 둘러보라. 그리고 그것들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어라. - P50

고독은 그 본질에서 혼자 있는 능력이다. 혼자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혼자 있는 능력은 귀중한 자원이다. 혼자 있을 때 사람들은 내면 가장 깊은 곳의 느낌과 접촉하고, 상실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바꾼다." (《고독의 위로》) 창의성의 발현과 개인 자아의 발달은 자기 내면을 돌아보는 혼자 있는 능력 속에서 길러진다.
고요는 혼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고요 속에서 사람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일들과 차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의 분별이 나타난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그런 분별이 있는 사람들이 줄어든 탓이다. 활달한 소통은 인생의 성공으로, 고립은 그 반대로 비치기 쉽지만, 실상을 따지고 보면, 세상에 잘 적응함은 심리적인 불완전함의 결과물이다. 반면에 자발적 고독은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에서벗어나 심리적 평형 속에서 안정된 인격을 갖춘 사람들의 태도이다.


고독은 개인화 과정에서 누구나 불가피하게 겪는 경험이라는 걸 받아들이자. 사람은 고독 속에서 자기를 깊이 돌아보고 마음의 평화를얻는다. 고독은 불완전한 것이며 부적응의 결과이지만, 그것은 완전과 적응으로 가는 도약대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 P85

혼자 있어보라. 혼자 그윽함에 머물면서 자기 내면을 돌아보는 일에 부지런해져 보라. 고독을 권하는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서만존재의 심연에 이를 수 있는 까닭이다. 고독에 처하지 않는다면, 고요도 있을 수 없다. 부지런함이란 무엇인가? "갠 날에 할 일을 미적거리다가 비를 만나게 하지 않는다. 비오는 날에 할 일을 꾸물대다가 날이개게 하지 않는다."(정약용) 갠 날에 할 일은 갠 날에, 비오는 날에 할 일은 비오는 날에 하는 것, 그것이 부지런함이다. 부지런하되 항심을 유지할 것. 새벽이 오면 새벽에 마음을 두고, 저녁이 되면 저녁에 마음을 둘 것. 이 모든 일이 마음이 고독 속에 있을 때 가능하다. 새벽 숲속을 채우는 청아한 새소리들, 아기 웃음소리, 실내에서 저 혼자 타는 촛불, 사랑하는 이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저물녘 만조에 이른 바다. 새해 처음으로 맞는 일출의 장엄함....... 이런 것들에 가슴이 뛰지않는다면, 이미 당신의 인생에서 봄과 아침은 지나가버렸음을 알아야한다. 봄과 아침을 헛되이 흘려보냈다면 살아 있는 게 곧 기적이라는 사실도 알 수가 없다. - P87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우리는 그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존재의 생물학적 인지적 형질이 미묘하게 바뀌어버려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책과 그것을 읽는 사람은 항상 역동적 상호작용을 한다. "텍스트와 인생의 경험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은 양방향적이다. 우리는 인생 경험을 실어 텍스트를 이해하고 텍스트는 삶의경험을 뒤바꿔놓는다." (《책 읽는 뇌>>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뇌의 역량이 커지고 생각과 감정은 성장한다. 존재의 내적 형질이 바뀔 뿐만 아니라 내적 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울러 책 읽기는 치유와 정화의 힘을 준다. D.H. 로렌스는 그의 시<치유>에서 이렇게 적는다. "오랜 기간의 혹독한 참회 / 삶의 과오에대한 각성, 그리고/ 오류의 끝없는 반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 우울한가? 따분한가? 자기가 무력하다고 느껴지는가? 그때마다 나는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기 위해 책으로 달려간다. 책 읽기는 인생의 슬픈 터널을 지나서 의식의 고양이라는 신세계로 가는 길이다. 이가을 아침에 가슴이 뛰는 것은 내가 책 속에서 사는 까닭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읽은 모든 책들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 P123

보르헤스는 우주를 거대한 도서관으로 상상했지만, 나는 우주를 한권의 책으로 상상한다. 우주는 인류가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읽어왔고,
앞으로도 여전히 읽어갈 거대한 한 권의 책이다. 우리는 책이라는 낙타를 타고 우주라는 이름의 사막을 타박타박 횡단하는 중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싶다는 인간의 불가피한 욕망이야말로 문명의 진화를추동해온 힘이다. 책 읽기를 그친 세계에서는 문명의 역동적인 발전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세계는 아주 빠르게 쇠퇴하고 소멸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인류 문명의 발전이라는 거창한 소명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한 권이나 두 권의 책을읽는 것은 거기에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 P132

지금 붉은 병꽃이 한창이고 뜰에는 모란과 작약의 꽃도 만개했다. 뜰에 핀 갖가지 꽃들. 그 꽃들 위에서 잉잉대는 벌들. 꽃과 벌들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영원의 흐름 속에 있는 시간의 일부이다. 아침을 먹고 난 뒤 산책을 하고, 오후에는 시립도서관에서 대출해온 책들을 반납하러 간다. 밥을 먹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더러는 누군가를 만나고, 더러는 어딘가로 움직인다. 그게 바로 나다. 나는 나의 생각함이 아니다. 생각함이란 존재에 대한 머뭇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배고픔 앞에서 헐떡거리고 목마름 앞에서 물을 갈망하며 서 있는 나일 뿐이다. 순수의식 그 자체로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나이다. 책은 이 순간과 순간의 나를 아름답게 한다. 순간마다 책을 수유함으로써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삶이 쓰여진다. 휘리릭 넘기며사는 삶보다는 순간의 페이지를 음미하는 삶이고 싶다. - P190

벚꽃이 피고, 모란과 작약이 만개한 이 봄날, 나는 내가 살아온 과거도 아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도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순간에 있으며, 내 자신 속으로 깊이 빠져든 존재다. 나는 나 아닌 것의 모든 것이며, 지금 이 순간은 지금 이 순간 아닌 것의 모든 것이다. 나는 나로서 살 수 있는 솔직성 그 자체, 즉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지는 존재의 운동 그 자체이다. 이 우주에서 먹고 자고 욕망함으로써 유일한 가능성으로 출현할 수 있는 나! 나는 삶을 소유할 수 없다. 삶 그 자체가 바로 나이고 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 P191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마당 웅덩이에 술잔의 물을 부으면 겨자씨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 술잔을 띄우면 붙어버릴 것이니 물은 얕고배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기가 깊지 않으면 대붕도 큰 날개를 띄울힘이 없다. 그러므로 구만리의 바람이 발아래에 있어야만 바람을 탈 수 있다.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막힘이 없어야만 장차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다.
장자, <소요유>, <장자> - P279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이 커다란 날개를 가진 대붕은 제 날개의 힘만으로는 날지 못한다. 대붕이 구만리 상공으로 치솟아 날기 위해서는큰바람이 있어야 한다.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작은새는 작은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수 있지만 대붕은 큰바람이 일어야만날 수가 있다. 하물며 큰 인물은 어떠하랴. 대자유를 누리는 큰 인물은 타고난 바 현실 조건을 뛰어넘는 자이고, 그 현실 조건을 뛰어넘을 때 따르는 시련과 수난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대자유인도 있을 수없다. 장자의 자유, 유유자적한 삶을 이해하고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우리는 더욱 깊어져야 한다. - P279

부엌에서 노모는 간고등어를 굽고 그 비릿내와 함께 청국장을 한 상에 올린다. 청빈하지만 부족함이 없는 조촐한 식탁이다. 아, 흰밥과 김장김치와 함께 떠먹는 청국장이 혀끝에서 아득해진다. 늦가을의 모근들은 왜 헐렁해지고, 청국장엔 왜 ‘청‘이 들어가는가. 산림욕장을 다녀오던 오후 내내 병자호란 시절 청나라 군사들이 먹었다는 청국장이 지금 내가 먹는 그 청국장과 맛이 같은가에 대한 생각으로 골똘해진다. 들에 지천으로 널린 야생초 가운데 여가 어여쁘고, 입에 들어가는 것들 중에는 청국장이 혀에 달다. 그랬으니 이 나라 상고시대 조상들이 먹었던 청국장을 먹으며 가난해도 외롭지 않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백석) 어여쁘고 달고 쓸모 있는것들과 더불어 사니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그러니 나도 정녕 늦가을의 풍운아 아닌가! - P328

늦가을 저녁 부엌에서 흰밥과 청국장과 간고등어로 배를 채운 뒤홑이불 속에 몸을 뉘고 저 북쪽 마을에 언제 첫눈이 내리는가를 짚어본다. 무서리 내리고 울타리의 황국이 시든 뒤 물은 얼고 첫눈은 오는가. 머잖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어지는 산과 산을 성큼성큼 달려와미시령 천지간까지 눈보라는 자욱하게 덮게 될 것인가. 청국장은 청국장을 모르고 사랑은 사랑을 몰라본다. 눈보라치는 새벽에는 외로움에 진절머리를 치며 밀항한 남자가 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추위로 곱은 손을 녹이며 두고 온 처자에게 편지를 쓸 가슴이 아직도 나에겐 남아 있는가. - P329

나는 늦가을의 사람으로 너무 늦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게 늦가을에 안착한다. 영원이라는 잣대로 재면 하루는 찰나이고, 일생은열린 문 앞을 지나가는 빠른 말과 같다. 늦가을 해질녘의 고즈넉한 시간을 서성거리며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한 사람, 나와 태어난곳은 다르지만 태어난 해가 겹치는 한 사람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는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라고 물었다. 철학자같이 삶을 통찰한 그는 이런 핵심에 닿는다. "삶이라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사느라 낭비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도그마에 얽매이지 말라.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의 결과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1955~2011)의 말이다. - P332

삶은 갈망에서 타오르는 것이고, 우직한 도전에서 빛나는 도약을하는 것! 갈망이 다하면 풀들은 시들고, 갈망이 다하면 숲속의 가왕포으로 군림하던 매미나 능란한 사냥꾼인 늙은 사마귀도 죽어 풀밭에나뒹군다. 시인 쉼보르스카는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라고 적었다. 나 역시 늦은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하고, 새벽 다섯 시에는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뉘우치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늦가을이니까. - P334

동물의 세계를 살펴보아도 인간처럼 허둥거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부지런한 벌‘이나 ‘근면한 개미‘도 예외가 아니다. 그 곤충들이 일하는 모습은 부지런해보이지만, 사실은 전체의 78%의 시간을 쉬거나 빈둥거린다.
동물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긴장을 풀고 쉬는 데 사용한다. 그들이 활동하는 것은 꼭 먹이가 필요할 때뿐이다. 그밖에는 내키는 대로 게으름을 피우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제멋대로 상상하듯 권태에 빠지지는 않는다.

레기네 슈나이터, <소박한 삶>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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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족국가든 개인 차원에서는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특정 민족 전체를 좋은 사람 또는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 3월의 지진 직후 일본에서 일어난 ‘일본은 강한 나라‘, ‘힘내라 일본‘ 따위의 캠페인이나 거기에 호응해 한국에서 고조된 지극히 정서적인 일본 동정론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발상의 산물이다. 그런 단순한 유형화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 어떤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국민‘이라는 지표로 일괄하고, 자기 자신도 거기에 포함시켜 유형화함으로써안심을 얻으려 하는 ‘국민주의‘ 심성이다. 이 심성은 ‘국민‘ 내부의 차이나 대립을 은폐하고, 동시에 내부의 타자를 항상 외부화해 배제하려는 기능을 지닌다.
국민주의에 뿌리박은 단순한 일본 이해는 
일본의 중간파나 리버럴파가 지닌 한계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둔감한데, 그것이야말로 위험하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올바로 아는 것은 ‘한국‘ - P276

이라는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 모두의평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제부터 내가 써 나갈 ‘일본통신‘은 타자를 위협하며 몰락해 가는 일본 사회에 사는 한 ‘내부의 타자‘가 쓰는 보고서가 될것이다. 일본에 사는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갖가지 문제를 구체적 에피소드와 함께 전할 요량이다. - P277

이번 제주도행은 바쁜 와중에도 우리 세 사람이 일정을 조정해 3박 4일간 머물 작정이었다. 그런데 하필 태풍 산바를 만났다. 비행기 결항으로 섬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우리는 일정을 하루 앞당겨 서울로 돌아왔다.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하는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에 달려갔더니 이미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난민‘이라는 말이 떠올랐으나 물론 4.3사건의난민과 비교할 수는 없다. 군경의 초토화작전에 쫓기던 그들은미군 함정에 엄중하게 포위된 섬에서 필사적 탈출을 감행했다.
많은 사람이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일본에 표착한 사람들은 밀입국자로 검속되어 한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당시 법적으로 일본 국적 보유자였던 조선인을 "외국인으 - P290

로 간주"해 검속할 수 있게 한 것은 쇼와 천황의 마지막 칙령인 외국인등록령이다. 그것은 1947년 5월 2일, 즉 4.3사건 발발 직후에 공포됐다. 일본은 4.3이라는 정치 폭력의 직접적인 가담자였던 것이다.
4.3평화공원의 행방불명자 묘역에는 유해가 없는 빈 무덤뿐이다. 하지만 그곳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지적한 "소름 끼치는 국민적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이런 위령과 추도를 통해 국가는 사람들을 국민으로 통합하려 한다. 하지만 다카하시 교수가 중요한 지적을 했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와 달리 이 자기분열적인 위령의 장소는 어쩌면 지금의 국가를 넘어서는 차후의 공동체, 바로 다음에 올 ‘상상의 공동체‘를 향한 어렴풋한 희망을 시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국가에 회수되고 말 것인지, 국가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지, 싸움은 계속된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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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묘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세계‘다. 19세기 영국에서 아프리카인 남성이 댄디라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매일이 표상을 마주했던 주류 영국인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어떤이는 불쾌하게 여기고 또 어떤 이는 공감했겠지만, 좋든 싫든 자국이 자행한 식민 지배의 사실, 그 상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죄책감은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설령 심기가 불편할지라도 마음속 깊이 헤치고 들어가 탈식민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이런 물음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파시즘 국가 중 전쟁 전과 같은군주의 가계를 줄곧 받들어 모시고, 같은 국가와 국기를 계속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영국과 같은 전승국조차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전쟁이 끝난 뒤로 옛 자국 식민지 민족들과의 ‘다문화 공생‘을 표방해 왔다. 그렇기에 쇼니바레와 같은 아티스트가활동할 공간이 생겼다. 이를 생각하면, 일본은 매우 특수한 나라 - P131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전반까지 인류 사회가 막대한희생을 대가로 손에 넣은 평화, 인권, 평등, 반차별 등의 지적·사상적 성취에 완고하게 등을 돌리고 국민 다수도 그 편협한 자기애自己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잉카 쇼니바레의 작품은 일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기껏해야 ‘포스트콜로니얼(식민지 이후) 아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지적으로 소비될 뿐, 그것을 자국의 입장에 옮겨 놓고 성찰하는 이는 얼마 안 될 게 분명하다. 지금 《잉카 쇼니바레 MBE: 찬란한 정원으로》전이 대구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의 관객은 그의 작품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 P132

니키는 팅겔리와 함께 1966년 스톡홀름근대미술관에서 〈혼Hon)이라는 작품을 제작해 전시했다. 그것은 길이 28미터, 너비6미터나 되는 거대한 ‘나나‘다. 관람객은 미술관 입구에서 다리를 벌린 채 그들을 맞이하는 이 여성상의 성기 안으로 들어가 몸속을 관람한다. 독일 하노버의 시립 공원에는 커다란 나나상이세워져 있는데, 이를 두고 시민 사이에 찬반양론이 벌어졌다고한다. 어느 다큐멘터리 영화에는 그곳의 노부인이 이 상을 가리키면서 "만일 총통이 건재했더라면……"이라고 몹시 불쾌한 듯투덜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히틀러라면 그걸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니키의 예술이 지닌 가치를 역설적으로 대변하는 장면이다.
니키는 198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부지를 얻어 ‘타 - P137

로 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타로 카드에서 구상을 얻은 <정의>, <악마> 등의 대형 조형물이 배치된 널따란 정원이다. 니키는 남성 원리가 전쟁과 환경 파괴의 원흉이라는 사상을 실천하면서 여성 원리와 ‘마술성‘의 가치를 강조했다. 타로 정원에는거대한 손 모양 조형물이 있다. 그 손은 그곳으로부터 20킬로미터쯤 떨어진 원자력발전소 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원전이여, 멈추어라."라며 염력을 쓰는 것이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뒤 이탈리아에서는 격렬한 논란 끝에 원전 가동을 중단했다. 그것은 타로 정원의 손이 발휘한 힘 덕분이었다고 니키는 말했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부터 불과 4년째인 올해, 많은반대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가고시마현 원전을 재가동했고, 나머지원전들도 잇따라 재가동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P138

니키가 ‘사격 회화‘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때로부터 이미 반세기가 지났으나 그의 작품은 아직 낡지 않았다. 이는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억압이 (겉으로는 어찌 됐든)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일본은 국회의원의 여성 비율(8.1퍼센트)이 세계 129위인 나라다(16.3퍼센트인 한국도 87위로 낮다. 국제의회연맹 조사, 2014년11월 현재), 남성 원리가 의기양양하게 지배하는 사회에서 니키는 결코 낡을 수 없는 것이다. - P138

12월 1일 전시 개막식 행사에서 약 250명의 비교적 젊은 청중을 앞에 두고 나는 켄트리지와 공개 대담을 했다. "계몽의 프로젝트는 좌절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자, 그는 곧바로 "그렇게생각하지 않는다."라며 분명히 말했다. "자유, 인권, 평등, 민주주의, 이런 계몽의 프로젝트는 미완이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라고.
그에게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타도된 순간은 "축제와 같았다." 뒤돌아보면 우리 민족에게도 ‘축제‘와 같은 순간은 있었다.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순간, 군사정권이 타도된 민주화 실현의순간, 새해 첫날을 맞아 나는 이런 순간의 환희와 그 순간을위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을 다시금 기억하고자 한다.
‘9.11‘ 이후 에드워드 사이드는 "중요한 목표"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문화와 저항』). "중요한 목표"란 "자유와 해방과 계몽을 요구하는 모든 민족이 모이는 승리의 회합이다. 눈앞의 어둠은 짙지만, 식민 지배를 경험한 우리 민족 역시 "승리의 회합에 참가한다는 꿈을 잃어서는 안 된다. - P146

딕스의 동판화 <전쟁> 연작은 1924년에 간행됐다. 그해는 ‘반전의 해‘라고도 불리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고작 6년, 사람들은 전쟁의 기억을 빨리도 과거로 흘려보내고 다음 전쟁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굴러가기 시작했다.
올미 감독의 영화 끝부분에서 설원에 높다랗게 선 나무가 포화 속에 불탄다. 나무는 숯이 되고, 무참한 파괴의 상흔이 펼쳐진다. 엔딩으로 양치기의 말이 흐른다. "언젠가 이 땅에 숲이 되살아나고, 여기서 벌어진 일은 믿어지지 않게 [잊히게] 되리니."
영화관을 나서니 초여름 햇빛이 넘실대는 간다의 거리를 남녀노소가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곧 치러질 참의원 선거도 개헌을 획책하는 집권 여당에 유리한 상황이라고 한다. 결국 일본국민은 헌법 9조(전쟁 포기 조항)를 스스로 내버리는 것일까.
숲은 되살아날 것이다...... 이것은 재생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말일까? 불탄 자리에 잡초의 신록이 싹을 틔우듯 인간들은계속 나고 자란다. 비참한 일은 잊히고 참화는 거듭된다. 시간의흐름은 망각의 편이다. 시간의 여신과 전쟁의 신은 사이가 좋다. 레마르크, 딕스, 올미..... 예술가들은 이 무자비한 적과 승산이 희박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다. - P162

하지만 네루다의 매력은 그 ‘정치적 올바름‘에만 있는게 아니다. 이 영화는 그것을 잘 전해 준다.

풍만한 여인이여 살[肉]의 사과여 달의 
불이여
짙은 해초 내음이여 빛에 단련된 진흙이여
어떤 어스름한 빛이 그 원주 사이로 열리는가
어떤 고대의 밤이 남자의 오감을 홀리는가

ㅡ「풍만한 여인이여」(『100편의 사랑 소네트』)에서 - P174

얼마나 거리낌 없고 관능적인 노래인가. 이는 지금도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군부 쿠데타 후 멕시코로 망명한 칠레의 영화감독 미겔 리틴Miguel Littin은 1985년 계엄하의 칠레에 잠입해 네루다가 오랫동안 산 이슬라네그라Isla Negra의 집터를 찾았다. 그곳에서 리틴이 마주한 것은 시인이 사망하고 방치된 집에 새로운 세대가 끊임없이 찾아오는 광경이었다. 그곳을 찾은 젊은 연인들은 집 울타리에 낙서를 남기고 간다. 그중 하나는 말한다. "사랑은 결코 죽지 않는다. 장군이여, 아옌데와 네루다는 살아 있다. 1분의 어둠이 우리를 눈멀게 할 수는 없다." (<엄하의 칠레 잠입기 Acta General de Chile>, 1986)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네루다>는 보여 준다. 네루다의 시가 칠레 민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시의 위대한 힘을. - P174

칠레에서 이런 격렬한 투쟁과 비극이 진행되던 시기에 지구반대편의 한국에서도 유사한 현실이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정권이 1972년 10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 체제‘를 확립한것이다. 나도 1980년대 중반 한국 정치범의 석방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간 캐나다의 지방 도시에서 칠레 망명자 가족이라는 소녀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는 쿠데타로부터 10년 이상이 흐른 뒤로, 여전히 피노체트 정권이 버티고 있어 망명자들은 귀국할 수없는 상황이었다. 나와 소녀는 말이 통하지 않아 이야기다운 이야기도 나눌 수 없었으나 금세 서로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했다.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칠레의 역사는 우리 것이기도 하다.
네루다라는 존재는 우리 것이기도 하다. - P176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 가도다
잊음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겨 가도다
진흙을 밥으로, 해채를 마셔도
마구나 가졌드면, 단잠은 얽맬 것을
사람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주린 목숨, 뺏어 가거라!

ㅡ이상화, 「가장 비통한 기욕析慾」(1925)에서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푸르른 대해大海. 하늘 높이 바닷새 한 마리, 자연의 광대함과 아름다움을 구가하는 듯하다. 그 해면에 하나의 점 같은 배가 떠 있다. 카메라가 다가가니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로 빽빽하다. 지중해를 건너려는 난민들을 가득 실은 배다. 메마른 사막. 줄곧 차가운 비가 퍼붓는 변경의 철도역. - P177

군사용 철조망으로 무자비하게 나뉜 경계. 찬비에 젖은 채 멍하니 선 사람들, 주린 배로 추위에 떨며 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실로 "진흙을 밥으로, 해채[시궁창에 고인물]를 마"시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화의 시구가 뇌리에 떠올랐다. 1920년대 한반도에서 만주로 흘러든 숱한 난민, 2017년 중동에서 유럽으로 향한 숱한 난민, 두 행렬은 100년의 시차를 두고 한줄기로이어져 있다. 긴 행렬은 전 세계에 걸쳐 있으며, 언제 끊일지도알 수 없다. 아아, "사람을 만든 검 [神]아 (...) 차라리 주린 목숨,
뺏어 가거라!" - P178

그 영화는 아이웨이웨이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유랑하는 사람들)이다.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가자지구에서 여러 유럽 국가, 튀르키예,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이르기까지세계 23개국 40곳의 난민 캠프를 돌며 제작되었다. ‘난민 문제‘
의 최전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대한 투시도. 그 영상은 아름답고 처절하다. 화면에는 때때로 감독 자신이 효과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예컨대 난민 캠프의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는 모습,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서 오토바이를 탄 국경순찰대원에게 느긋한 말투로 말을 거는 모습. 고대 중국의 신선 같기도 하고, 시골 농부 같기도 하다. 그 모습이 이 영화의 주제가 가진 장대한 서사시적 척도를 실감하게 한다. - P178

‘민적‘은 일제가 통감부 시대에 조선 민족에게 강요한 제도다. 그것에 저항한 사람들에게는 ‘인권‘이 없었다. 현재도 난민이나 이민은 각종 증명서를 소지할 의무가 있어, 번잡한 절차와 굴욕을 강요받는다. 증명서가 없는 자(프랑스어로 ‘상 파피에sans-papiers‘, 즉 ‘종이가 없는 자)에게는 "인권이 없는" 것이다.
한용운의 시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난민들의 고통을 예견했다. 참으로 천재적인 통찰! 한용운과 제거스는 이어져 있다. 시인들에게 그런 통찰을 요구하는 상황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니더욱 정치精緻하고 가혹하게 이어지고 있다.
한용운은 8·15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제비 떼 까맣게날아오길 기다리나니"라고 노래했던 이육사는 중국 대륙에서항일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일본 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베이징 - P182

에서 옥사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노래한 윤동주는 일본 도시샤대학에 유학하던 중
‘독립 기도‘ 혐의로 검거되어 해방을 반년 앞두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 시인들은 그나마 시를 통해 가까스로우리에게 메시지를 남겼으나, 다른 많은 이들은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무참하게 목숨을 앗겼다.
3·1독립운동으로부터 100년 ㅡ나는 이른 봄 도쿄에서 두 편의 영화를 보고 생각한다. 아, 참으로 긴 난민들의 행렬. 참으로많은 눈물과 피. 그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 세계에서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역사수정주의자가 권력을쥐고 있고, 다수 국민 사이에 식민주의의 심성이 오히려 증식하고 있다.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 P183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 「아사히 저널」(1984년 9월 21일 호)이라는 잡지에 선생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거기에는 음악 이야기뿐 아니라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내 형들을 비롯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는 이야기도 담겨있었다. 해방 직후 ‘보도연맹‘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힌 희생자들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정치범의 석방이 실현될 때까지 한국 정부가 요청하는 귀국은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나는다시금 크게 감동했다. 선생이 내 형들을 비롯한 정치범들에게마음을 썼다는 데 대해서만이 아니다. 그 인터뷰는 몹시도 지친몸으로, 제한된 시간의 1분 1초까지 작곡을 위해 쓰고 싶다는 심경일 때 이루어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 정부의 비위를 거슬러 귀향의 꿈이 더욱 멀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선생은한국 사회 (그리고 인류 사회)의 개선이라는 목적에 자신이 할 수있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 P209

김영삼 문민정부 탄생을 전후해 한국 내에서 오래 계속되어온 윤이상 음악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완화되면서 1994년 9월
‘윤이상 음악제‘ 기획이 추진됐다. 그러나 선생은 한국 정부가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범민련‘의 해외본부장이라는 지위에 있었기에 귀국은 정치적 의미를 띨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행동에 반성할 만한 점도 있다." "앞으로 북과는 일절 관계를 끊겠다."라는 뜻을 표명하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선생은 또다시 귀국을 단념했다. 그 뒤 선생은 미국에서 남북의 음악가를 모아 음악제를 여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북측 음악가의 참가가 취소되어 실현되지 못했다.
윤 선생의 마지막 작품은 교향시 <불길에 휩싸인 천사들>(1994)이다. 노태우 정권의 부정과 탄압에 항의해 잇따라 분신자살한 젊은이들을 추념하는 음악이다. 1995년 12월 20일, 선생의유해는 베를린의 묘지에 안장됐다. 해방을 갈망했으나 차마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상처 입은 용의 생애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선생의 후두부에는 (머리카락에 덮여 보이지 않지만) 큰 거미나 게가 달라붙어 있는 듯한 흉터가 있었다. 1967년 7월 동베 - P210

틀린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옥중에서 자살을 기도하면서 고문실에 있던 무거운 금속제 재떨이로 제 머리를 내려친 상흔이다. 고문실에서의 굴욕, 고통, 절망이 얼마나 혹독했겠는가.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자민족의 국가권력에 의해 말살될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에 새삼 섬뜩해졌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그의 작품은 대부분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말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그 심연에서 생활했을 뿐 아니라 참으로 놀랍게도 더욱 거대한 존재로 되살아났다. 지금 한국에서 그의 탄생100주년이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이런 경위를 깊은 아픔과 부끄러움과 함께 기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최근 알게 된 바로는, 박근혜 정권 시절의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윤이상평화재단‘도 올라 있었다고 한다. 이를 등재한 자들은 윤이상의 음악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들어 본 적이 있을까? 도대체 어느 세월에 이런 수치스러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 P211

숨을 삼킨다는 게 이런 걸까. 국도에서샛길로 빠져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자 돌연 눈앞에 작은 분지가 펼쳐졌다. 주위를 에워싼 산들은 화사한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는 그쳤으나 하늘에는 구름이 겹겹이흘러가고 있었다. 낮은 쪽 구름은 엷은 먹빛, 높은 쪽 구름은 솔로 싹 쓸어 낸 듯 희다. 강풍에 날려 가던 구름의 갈라진 틈새로화살 같은 햇빛이 대지에 내리꽂힌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요란하게 흔들자 붉고 노랗게 물든 잎이 어지럽게 춤춘다. 신화 세계의 광경이다. - P220

도쿄에 사는 나의 상상력은 피해지 주민들이 경험하는 불안에 닿지 못한다. 오사카나규슈 사람들의 상상력은 훨씬 더 닿기 어렵다. 한국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즉 방사선량뿐 아니라 상상력 역시 동심원적으로 멀어진다는 역설이 나타나는 것이다. 동심원 중심에 가까운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대한 실감이 그만큼 강하다. 그렇기에 "편리한 진실"(프리모 레비)을 찾아내서 거기에 매달리는 심리가 작동한다.
재난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중심을 향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중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눈을 돌리면 사태의 본질을 냉철하게 인식해 재발을 방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사태이다. 우리는 이 ‘동심원의 패러독스‘를 의식해서 중심과 먼 사람들일수록 중심을 향한 상상력을 갈고닦고, 중심에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엄혹한 현실을 더욱 직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태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상상력이 시험받는 것이다. - P228

가해의 책임까지 분명하게 언급하며 일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사죄의 뜻을 표명한 점이다. 언제나 그렇듯 피해를 당한 사람들,
고통받고 있는 미약한 존재가 타자와의 진정한 연대를 추구하는지혜와 용기를 보여 준다. 타자를 해친 자들,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로 일관한다.
합천 대회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가니 거리는 비상경계 상태였다. 거리에서 지하철역까지 곳곳에 경찰 부대가 깔려 있었다.
‘핵안보정상회의‘ 때문이었다.
‘핵안보정상회의‘는 핵에 더해 부와 권력까지 쥔 자들이 앞으로도 핵을 ‘안전‘하게 독점하기 위한 모임이다. 그에 비해 합천은 핵 따위는 갖지 않은 미약한 사람들, 소수자들의 모임이었다. 어느 쪽에 ‘희망‘이 있는지는 명백하지 않은가. 이 글이 신문에 실릴 즈음이면 한국은 총선 직전일 것이다. 탈핵이라는 화두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고 한국 국민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수 있기를 기원한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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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하루 일을 끝낸 뒤 한잔의 흑맥주
괭이 세워 놓고 바구니를 내려놓고
남자도 여자도 큰 맥주잔 기울이는

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을까
과일 달린 가로수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노을 짙은 석양
젊은이들 다감한 속삭임으로 차고 넘치는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힘은 없을까
같은 시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이 되어 불현듯 나타나는

ㅡ이바라기 노리코, 6월」 - P47

현대 일본의 여성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6월」. 내가 이시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반세기도 더 지난 옛날이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이 시에 그려진 ‘유토피아‘(그것도 노동하는 남녀의 유토피아)의 이미지에 매료당했다. "과일 달린 가로수들이 늘어선 거리는 바로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조선 민중이 그리던 꿈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나 모국 유학 중 군사정권에 의해 투옥당한 형(서준식)에게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을 넣어 주었더니, 형은 이 시에 각별한 애착을 느낀 듯 직접 이 시를 번역해 옥중에서 쓴 편지에 적어 보냈다. 가장 험악했던 군사독재 시절에 이 ‘유토피아‘의 이미지가 한국 옥중의 젊은이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 소식을 당시 일면식도 없던 시인에게 전했더니, 그는 굳이 내가 사는 교토까지 찾아와 주었다. 처음 만난 그 사람은 산뜻했다. - P48

이바라기 노리코는 1926년생이다. 초기 작품에 「내가 가장예뻤을 때」라는 게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고, 거리는 파괴되어 쓰레기로 뒤덮였다. 나는 멋쟁이가 될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노래하는 시다. 그러나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힌 한탄의 노래는 아니다. 봉건제와 군국주의의 멍에에서 해방되어 홀로 서려는 여성의 눈부심, ‘폐허에 내리비치는 빛‘이 - P48

라 할 만한 광휘로 가득하다.
그 뒤 세상은 바뀌어 많은 동료 시인(특히 남자들)이 무기력한 현실 긍정 쪽으로 돌아선 상황에서도 이바라기는 한평생 그 광휘를 잃지 않았다. 1975년 10월 31일 쇼와 ‘천황‘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전쟁 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런 "언어의 기교에 대해서는, 나는 문학 방면은 별로 연구한 바가 없어 (...) 대답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답했다. 제국의 절대권력자이자 전쟁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천황이 타국과 자국의 무수한 사람을 죽음으로몰고 간 전쟁에 대해 "언어의 기교"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책임을 교묘하게 얼버무린 것이다. 게다가 더욱 놀랍게도 일본의 거의 모든 일본 지식인, 언론은 이 발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바라기 노리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 P49

전쟁 책임에 대해 묻자
그 사람은 말했다
그런 언어의 기교에 대해
문학 방면은 별로 연구한 바가 없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와
거무칙칙한 웃음 피토하듯
내뿜다, 멈추고, 또 내뿜었다

ㅡ「사해파정四海波靜」에서 - P49

만년의 이바라기는 한국어를 독학해 윤동주 같은 조선의 시인을 일본 독자에게 소개하는 한편으로 일본 사회의 급속한 우경화를 개탄했다. 1999년 73세에 낸 시집 『기대지 않고는 ‘히노마루(국기)·기미가요(국가)‘의 법제화가 강행되던 중 출판된 것이다.


더 이상 어떤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아
속속들이 배운 것은 그것뿐
(...)
기댄다면
그것은
의자 등받이뿐

ㅡ「기대지 않고」에서 - P50

2006년 2월, 시인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나는(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되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써 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사망 통지서까지 준비해 놓고 홀로 떠나간 것이다. 지금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6월」이 노래한 유토피아의 이미지는 오히려 냉소의 대상이 되어 있다.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힘은 없을까"....... 지금은 저 유토피아의 빛과 시인의 산뜻했던 뒷모습을 상기해야 할 때다. - P50

그때로부터 거의 1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세계는 조금도나아지지 않았음을 통감한다. 지금 우리는 핵전쟁의 늪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으며 이를 저지할 어떤 방법도 없다. 세계사의시계가 한 세기 정도 되돌아가 버린 듯하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글을 쓰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그럴 때내가 떠올리는 것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
파울 첼란Paul Celan(1920~70), 장 아메리Jean Amery (1912~78),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87) 같은 ‘디아스포라 지식인 선배‘들이다. 그 ‘선배‘들은 하나같이 인간성이 지닌 외면하고 싶은 추악함과, 그럼에도 희미하게 빛나는 숭고함에 관한 깊은 고찰을 남기고는 스스로 삶을 저버렸다. 나는 ‘디아스포라‘라는 존재를 정의할 때 이런 의미를 넣어도 좋겠다고 몰래 생각해 본다.
디아스포라는 일부 지식인은 ‘인간성이라는 심연까지 도달하는 말들을 남기고 자살하는 존재이다. - P56

엔지니어였던 프리모 레비의 아버지는 푸줏간 진열장 앞에 서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유대교 계율에 반하는 햄이나 소시지 같은 돼지고기 가공육을 사곤 했다. 그럴 때면 셈이 맞는지 눈금이 새겨진 로그자로 검산했기 때문에 동네 푸줏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말리아 할머니"는 레비의 할머니다. 한창때 뭇 남성을 "애끓게 하던" 그녀는 젊어서 혼자가 되었지만 나이를 더 먹은 뒤 늙은 기독교도 의사와 재혼했다. 하루건너 유대교예배당인 시나고그와 기독교 교구 교회에 번갈아 다니며 80세가 넘어 세상을 떠났다. "바르바파르틴‘은 ‘보나파르트 아저씨‘
라는 뜻으로, 나폴레옹이 잠깐 가져다준 유대인 해방을 기리기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아저씨‘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아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개종을 하고 기독교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떠난다. 이렇듯 다채롭게 펼쳐지는 매우 기괴하면서도 사랑스럽기도 한 초상화들... 유대인들이 계율을 어기고 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하고 기독교도와 결혼한다.  - P57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결과,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유대인의 신분 해방이 실현되지만, 불과 수십 년이지나 그들은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대홍수에 휩쓸리게 된다.
레비가 생생하게 그려 낸 모습은 그 대홍수 이전의 이야기다. 유머가 넘치는 추억담인 동시에, 비통한 묘비명이기도 하다.
‘후배‘인 나도 쓸 수 있을까. 재일조선인 사이에서 늘 주고받는 농담 중에 ‘모든 재일조선인은 소설 한 권 쓸 만큼의 사연을가졌다."라는 말이 있다. 어디까지나 농담이지만 가혹한 역사에 떠밀려 온 재일 디아스포라 개개인에게는 그만큼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살아 있다는 뜻이리라. 물론 실제로 글을 쓰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점은 잘 알고 있지만 내게도 인생을 마무리하기전 내 가족과 친척, 지인들의 ‘초상‘을 글로 그려 내 남기고 싶은욕구가 있다. 디아스포라는 고향, 국가, 가족, 혈통 같은 허구의관념에 믿음을 두지 않기에, 적어도 작품으로 자기의 흔적을 새겨서 남기고자 하는 어려운 희망을 품는 것이다. - P58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불법체류‘란 국가가 마음대로 단정해 놓은 정의다. 예를 들어 지금 우크라이나의 경우를 보자. 그땅에서 태어나 그 땅의 말을 쓰며 살아온 사람들은 한때 오스만제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었고, 그 후로는 ‘소련인‘이었다. 그러고는 우크라이나인이 되었다가
지금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찢겨 있다. 본인은 ‘이동‘하지 않았지만 위로부터 국가가 차례차례 자의적으로 선을 긋고 나누어서로 싸우게 만든 것이다. 우리 민족의 경우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다. 내 이모부는 남한의 탈영병, 고모부는 북에서 온 인민군 소년병이었다. 두 사람이 어디선가 총탄을 주고받았다고 해도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 일이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있으며, 이는 ‘조선‘ 민족의 역사에서도 오히려 흔하디흔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모부는 누구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다. 그 과정을 겪으며 허무하다고 할 만큼 현실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처세술을 몸에익혀야 했다. 전 세계의 많은 디아스포라가 그러했다. - P63

‘근대적‘인 사상의 소유자인 아버지가 부르주아적 입신 출세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데 비해 ‘봉건적‘인 어머니는 자신과 자식의 인간성을 외부와 아버지의 권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또 저항했다. 이런 ‘민중과 여성‘의 관점에서 깊은 사색을 통해 자국의 역사를 반성하며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시모다는 생각한 것이다.
이 서술은 나에게 내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감개를 품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일본, 한국, 독일, 아니 세계 어디에서든 어머니들은 그렇듯 필사적으로 아이를 감싸 안아 왔다.
콜비츠의 <희생>은 그런 어머니들에 대한 찬가다. 단, 나에게는그처럼 어머니를 칭송하는 것에 대한 주저와 고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식이자 남자인 내가 어머니를 두 번 이용하고 착취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콜비츠를 그저 ‘감동적‘으로 소비하기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 이시모다 쇼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억은커녕 호전적인 야만의 목소리가 전 사회에 넘쳐흐른다. "일본을 되찾자."라고 외치는 아베 신조 정권은 지금 불법적인 - P119

‘헌법 해석‘을 통해 자위대가 미군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군사행동을 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그런 법 개정이 필요한 이유로서 정권이 항상 거론하는 것 중 하나가 ‘한반도(조선반도) 유사‘ 사태라는 상정이다. 즉 일장기를 내건 일본군이 또다시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고 조선 민족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일을 상정하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기지가 몰려 있는 오키나와의 사람들도 막대한 희생을 치를 것이다. 일본 본토에서는 관심이 저조하지만, 오키나와에서는 헤노코 기지 건설 반대 운동이 경탄할 만한 집념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오키나와인들 자신은 물론 한국인, 나아가 동아시아 민중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투쟁이다. - P120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74세의 콜비츠는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그림 8)를 제작했다. 그 자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여자(늙은 여인)는 자식들을 제 외투 속에 품고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넓게 팔을 벌려 소년들을감싸고 있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ㅡ이 요구는 <두 번 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와 마찬가지로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율법이다. 명령이다."
케테 콜비츠의 이 ‘명령‘을 오늘날에 전하는 사키마미술관. 기지에 머리를 들이밀듯 들어선 그 모습은 평화를 위한 투쟁의선두에 내걸린 깃발처럼 보였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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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그림‘ 시리즈 중에는 색다른 그림 한 점이 있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개>라든가 <모래에 묻히는 개>라고불린다. 보기에 따라서 있는 힘껏 급류를 헤엄쳐 건너는 것같기도 하고, 개미지옥의 흘러내리는 모래에 삼켜져 어찌할도리가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 개는 나야, 라고 
생각했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는 때로 힘찬 물살처럼 빠르게 흐르지만 대개 기운이 빠질 정도로 느리다. 그리고 갔다가 되돌아왔다가 하는그 과정의 국면마다 희생은 차곡차곡 쌓여 가야만 한다. 게다가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번번이 낯 두꺼운 구세력이 가로채 간다.
하지만 그 헛수고처럼 보이는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떤 열매도 맺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모래에 묻히는 개」,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프란시스코 데 고야, <개(모래에 묻히는 개)>,
1819-23년, 석고 벽에 유채(현재 캔버스에 유채), 131.5×79.3cm,
프라도미술관 소장.

‘체감 시간‘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다.
이런 말이 실제로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체감온도‘는 온도계가 표시하는 온도와는 별개로 사람이 느끼는 온도를 가리킨다.
‘체감 시간‘은 거기서 나온 연상으로, 시계나 달력상으로는 같은시간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것이 빠르다거나 느리다며 다르게 느끼는 걸 말한다.
나는 요즘 ‘체감 시간‘이 무척 빠르다. 모든 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느낌이다. 그것은 인생의 끝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있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두렵다거나 슬프다는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원래 신슈信州 (나가노현)의 고원에 자그마한 산장을갖고 있었는데, 이번 봄에 고도가 조금 낮은 곳으로 옮겼다. 그래도 해발 1,200미터 정도는 된다. 숲속의 작은 집이다. 이제부터는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 P13

순식간에 지나가리라.
이 계절이 되도록 집 주변에는 눈이 수십 센티미터나 쌓여 자동차를 주차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도로가 꽁꽁 얼어 스노타이어를 장착해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운전할 수밖에없었다. 그랬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나무들이 일제히 새싹을 틔우고 매화, 복숭아, 벚꽃,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등색색의 꽃들도 피었다. 순백이던 야쓰가타케 연봉(해발2,899미터의 최고봉을 비롯한 8개의 고봉이 늘어선 산)은 산꼭대기 부근에만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다. 저 추웠던 겨울은 한바탕꿈이었던가. 아니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꿈인가. 흡사 여우에 홀린 것 같다. - P14

연구실의 책을 버린다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아 학생들에게 가져가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막상 책을 처분하려니 쉽지않다. 오래된 책을 정리할 작정이었지만 1970~80년대에 손에넣은 책들은 귀중하다. 학생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쓸데없이 그런 느낌이 든다. 내게는 현실의 기억과 얽힌 일들이 그들에게는먼 과거의 일이다. 예컨대 베트남 전쟁이나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그렇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당시 읽었던 책을 책장에서 꺼내 한 구절 읽어주기도 한다. 읽은 뒤 문득 깨닫고 보면 그 책은30~40년 전에 입수한 것이다. 학생 시절의 나에게 누군가 해방(일본에서는 종전終戰이라 한다) 전의 책을 읽어 주는 격이다. 학생 시절의 나는 내 앞에 놓인 시간에 끝이 있다는 걸 개념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게 현실이라는 건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언제까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인생을 상상하고는 조바심을 쳤다. 젊은이와 노인의 ‘체감 시간‘에는 그만큼 차이가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 P15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그래서 젊은이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식의 낙관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 그 반대다. 노인이 된 내 경험과 감각이, 시간은 얼마든 넘쳐 난다고 생각(착각)하는 젊은이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 P16

나는 1951년생이다. 그해 조국에서는 한국(조선)전쟁이 한창이었다. 사춘기 때는 베트남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한국은 군사독재의 절정기였고, 두 형은 투옥되어 있었다. 서른 살 이후의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사가 ‘임시적인 삶‘이었다. 중장기적인계획을 세우고 인생을 설계하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쉰 살 가까이 되어 우연히 대학에 취직했을 때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주변 동료들이 정년 때까지의 수입과 지출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모습이었다. 사회조직 속에 편입된 머조리티(다수자, 주류)의 ‘안정‘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죽을지도 예측할 수없는데 노후를 대비한 양치질이라니, 무리였다. 이 나이 되도록 어떻게든 살아온 것은 수많은 우연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일본 사회밖에 알지 못하면서도, 일본에서 인생 마지막까지 보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당초 일본이라는 나라는 재일조선인을 배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1960년대 말까지 ‘국민 건강 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1년 뒤면 나는 만 70세다. 정년퇴직이다. 말 그대로 노인이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오래 - P19

살기를 바란 적도 없다. 애당초 장수를 인생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가치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인생의 자기목적화라 할 수 있다. 인생의 가치는 그런 차원의 것과는 달라야 한다. 사람은 진실, 아름다움, 정의, 공정, 평화 등 개개인의 삶을 넘어선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게 아닐까. 젊은 시절부터 그런 생각이었다.
물론 그 ‘가치‘가 가짜이거나 왜곡된 것인 경우도 많다. 거짓 ‘가치‘가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데에 이용되어 온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을 비판하고 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보편적 가치라는 ‘기준‘을 공유해야 한다는 원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 원칙조차 내팽개쳐진 세계,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식조차 잃어 가는 세계다. - P20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악의 평범함‘이라는 탁월한 고찰을 제시했다. 그것은 막대한 희생의 대가로 얻은 평화를 위한 고찰이다. 하지만 이 역시 크고 작은 아이히만들의 끊임없는 출현을 막을 힘이 되지는 못했다. 국회에서 태연히 거짓말을 지껄이는 정치인, 자료를 은폐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관료, 그것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언론,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멍하니 사고 정지 상태에 빠져 있는 다수의 국민. 일본사회의 이런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일본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정년을 연장하려 하는 한편으로 의료비나 사회보장비는 억제하려 하고 있다. 켄 로치 KenLoach (1936~) 감독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묘사한 것처럼, 노인과 사회적 약자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 P22

이 나이까지 살아남았기에 ‘악몽의 시대‘를 목격하게 됐다. 형들이 옥중에 있던 군사정권 시절에 "나는 그저 두 눈 부릅뜨고이 운명이 어디로 향하는지 속속들이 지켜보라고 스스로에게 명했다."(「나의 서양미술 순례』) 지금은 이 빠진 무력한 노인이 됐지만, 30년 전에 한 그 말을 다시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는 그렇다 치고, 눈만큼은 부릅뜨고 지켜볼 작정이다. - P22

지금 세계를 뒤덮은 불안은 ‘코로나 사태‘만이 아니다. 나는 얼마 전 뉴스에서 미얀마군이 자국 시민들을 폭행하는 장면을보고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광주다.‘ 다친 시위대를 구조하려던 구급대원 세 명을 군인들이 구급차에서 끌어 내려 곤봉과 총대로 마구 두들겨 패는 장면이었다. 그 구급대원들은 어떻게 됐을까. 목숨은 건졌을까. 그 뒤의 일은 모른다. 이런 무도한 폭력이 미얀마뿐 아니라 홍콩, 태국, 벨라루스, 러시아 등지에서 일상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정치 폭력이 ‘역병처럼‘ 세계에 만연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시대인가.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 앞으로 1년. 한국이 저 암흑시대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정년 뒤 조용한 은퇴 생활을 바라는 마음이 절실하지만, 세계는 그것을 허락해 줄 것 같지 않다. - P28

화를 잘 낸다. 특히 컴퓨터나 휴대폰을 쓸 때 잘 다룰 줄 모르는 건 물론이고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 자체에 어두운 탓에 마음이 몹시 상한다. 내 패스워드를 잊어버리고, 신용카드 결제도 뜻대로 안 된다. 그런 자신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한다. 하얀천에 뚝뚝 떨어진 ‘늙음‘이라는 검은 얼룩이 서서히 번져 나가는느낌이라고 할까.
20년쯤 전에 독일의 뮌스터라는 도시에 갔을 때 공영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할 때마다 차체를 비스듬히 아래로 기울이는 모습을 봤다. 승객, 특히 고령자가 부담 없이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한 장치였다. 나와 아내는 거기에 감동해서 우리가 사는 일본의 도시에도 이런 장치가 어서 보급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했을 때는 우리가 그런 혜택을 입을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없이 고령자나 약자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 뒤 어느새 일본에도 그런 버스가 꽤 보급되었다. 지금은 그 버스를 반기며 감사히 노약자석에 앉게 됐다. 50대 무렵의 나는 고령자의 ‘타자‘로서 ‘타자‘인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내 몸에 ‘늙음‘이라는 낯선 타자가 비집고 들어와 나의 내부를 침식하고 있다고 느낀다. - P37

이 이야기는 ‘해방된 노인‘들이 떨치고 일어나 작금의 상황에 파문을 일으킨다는 꿈, 일종의 우화다. 현실의 많은 청년들은 자진해서 ‘회사 인간‘이 되어 안정을 얻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다. 가토의 ‘노학공투‘는 흥미진진한 꿈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런 우화를 나도 이야기하고 싶다. 젊은 사람들이 말하려 하지 않는 꿈, 다른 인생의 꿈을 제시하는 것, 그 역시 노인이 할 수 있는 사회 공헌이다.
내 안에서 자라나는 ‘늙음이라는 타자‘와 끈기 있게 사귀고 대화해 나갈 작정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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