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넷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는 (1981년까지 발표되지 않았던) 자신의 기념비적인 1959년 연설 <흑인작가와 그의 뿌리>(강조는 우리가 한 것이다)를 두고 자신이 이연설 제목을 잘못 달게 만든 영향이 과연 무엇인지 분석했다. 우리가 『노턴 여성문학 앤솔러지』 초판에 포함시키기 전까지출간된 적이 없던 1961년의 글 「남성 평등 옹호」에서는 여성을 "이류의 지위"에 효과적으로 묶어놓으면서도 "남성에게 가장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우월성‘과 ‘권위‘라는 짐을 강요하는 일에대해서는 비판을 덜 가하는" 사회 질서를 혹평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우월성‘이나 ‘권위‘는 남성의 인간다움을 모욕하고, 그들이 문명화된 상태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데만 효과가 있다."
핸스베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수전 B. 앤서니, 엘리자베스케이디 스탠턴, 해리엇 터브먼을 인용하면서 가정주부의 신화를 거듭 벗겨내기도 했다. "자기 운명에 대한 여성의 불만은 페미니스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페미니스트는 그들이 등장할 수 있는유일한 장소에서 생겨난 존재다 - 이 세상 주부들의 자리 말이다!" (강조는 헨스베리가 한 것이다.)  베티 프리단 이전에, 로레인 핸스베리가 있었다. - P92

지금의 독자들은 시대를 앞서 살았던 한 여성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위트를 포착한 이매니 페리의 로레인을 찾아서』를 읽으며 핸스베리의 일부 글이 여성들과의 에로틱한 관계를 다루었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면의 자기 검열과외부의 검열 때문에 생겨난 피해를 지적했던 에이드리언 리치가 옳았다. 핸스베리가 제안했던 프로젝트 <제니 리드의 창문에 걸린 간판>은 <시드니 브루스테인의 창문에 걸린 간판>으로 변형되었다. (이 쇼는 그녀가 죽기 전날 밤 막을 내렸다.) 원래 여성 인물들이 주역으로 나왔던 그녀의 차기작 극본 <백인들>도 최종 버전에서 돋보였던 인물들은 남자 주인공들이었다.
그녀는 "무수히 깨부수어진" 여성의 강력한 대변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 관한 장편 드라마도 계획했었지만 집필할 시간이 없었다. 한편 핸스베리는 (레즈비언 인권단체 ‘빌리티스의딸들‘이 1955년에 창간한) 레즈비언 간행물 <래더>에 익명으로 기고하기도 했다. 이 글들은 레즈비언에게 가해지는 결혼 압박, 동성애자 핍박, 안티 페미니스트 도그마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 P93

<매콜스>가 그녀의 글 게재를 거부했던 것은 아마 그 내용이 너무 격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홈 저널>이나 <마드무아젤><레드북> 같은 잡지도 거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을 거부했고, 기사 형태의 그 글을 개작해 단행본으로출간하자는 제안을 하며 출판권을 W. W. 노턴 출판사에 팔았다. 1963년 『여성성의 신화』 초판 3000부가 출간되자 곧바로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놀랍게도 서점에서 날개 돋친듯 팔렸다. 그러나 프리단은 불만 사항들을 억지로 만들어내기록한 사람도, 그런 사실을 최초로 탐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밝혔듯이, "덫에 갇힌 가정주부"라는 주제는 <라이프>와 <뉴스위크> 같은 잡지들이나 <뉴욕 타임스>에 거듭 등장하는 주제였다. 당시 한 평론가는 이런 공표까지 했다. "프로이트에서 냉장고까지, 소포클레스에서 소아과 의사 스폭까지 이 - P184

르는 길은 울퉁불퉁한 험로였음이 밝혀졌다."
정말로 그랬다. 프리단의 주장처럼 "1960년,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가 미국의 행복한 가정주부라는 이미지를 뚫고 부글부글 끓어넘치고 있었다. " - P105

1960년대로 들어설 때 1950년대는 그 시대의 성격을 계속해서 잘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한 가지 극적인 공적 변화가 있기는 했다. 젊은 존 F. 케네디와 그의 우아한 아내가 백악관의 아버지 같은 아이젠하워와 다소 세련되지 못한 그의 아내 메이미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존 F. 케네디와 재키는 새로운시대의 대표자로서 1950년대가 욕망했던 모든 것의 아이콘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부유하고 지적인 남편과 매력적인 ‘사교계 인사‘ 아내로 말이다. 아이젠하워 부부는 말하자면 1940년대의 유물이었다. - P109

1963년 11월 22일에는 존 F. 케네디가 자동차를 타고 댈러스의 다운타운을 통과하는 도중 암살당했다. 마릴린 먼로 때와 마찬가지로 앤디 워홀은 거의 즉각적으로 재키를 미술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재키의 스무 가지 모습>(1964)에서 워홀은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한 정복 경호원 앞에 선 채 침울하게 눈을 내리뜨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포착했다. 
품위 있는 로맨스를 꿈꾸었던 1950년대는 끝났다. 먼로와 존F. 케네디, 실비아 플라스 휴스가 세상을 떠났듯이. 개인사에묻혀 있던 플라스가 남긴 초기 페미니즘적 시들은 그녀의 동시대인이었던 에이드리언 리치가 가부장제에 반대하며 표현한 항의와 니나 시몬이 노래했던 항변을 예고한다. 두 사람은 민권운동의 에너지를 여성 문제 쪽으로 튼 이들이었다. - P113

등을 촉속 제냈다.
친한 음악처럼 들려오기도 전인 이른 시간이제 그 시들은 잘 다듬어진 새로운 자아, 지면 위에서 구축뢴 차이를 자랑하는 작품들이었다. 그렇게 새로 창조된 지면위의 자하는 의미심장하게도 페미니스트였다. 저자가 시몬 드•보부아르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마침내 그녀는「화씨 103도의 고열」부터 「에어리얼」, 「레이디 라자로」, 「벌침」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시들에서 해묵은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던졌다. 특히 휴스가 짐을 꾸리기 위해 코트그린에 들렀던1962년 10월 6일에 쓴 마지막 작품에서, 그녀는 앞으로 양봉에열중하겠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꾸준히 일만 하는 일벌이 아니야 / 여러 해 동안 먼지만 먹고 살아왔어 / 내 빽빽한털들로 접시를 닦아왔고""
이것이 바로 그녀를 거의 "질식시켰던 가정생활이었다. 코트그린의 실제 먼지 속에서뿐만 아니라 그 집의 오랜 과거라는 비유적인 먼지 속에서, 남편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 그의 시를 대신 타이핑하고 그의 식사를 준비하고 그의 식기를 설거지하면서 들이마신 실제 먼지와 비유적인 먼지 속에서 그녀는 질식해갔다. 마침내 이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내게는되찾아야 할 자아가 있어, 여왕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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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2020년 4월 11일이다.
미국 인문 기행을 쓰기로 한 이상, 아무래도 불가피하게 다뤄야만 하는 주제가 있다. 현재진행형으로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19라는 재난에 대해서. 뉴욕 거리는 지금 무시무시한재앙의 한복판에 있다. 불과 수개월, 아니 몇 주 전만 해도 상상할수 없던 일이다. 거리는 인적을 찾을 수 없이 텅 비었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을 비롯하여 영화관과 미술관도 모두 문을 닫았다. 너무나 적막해진 센트럴 파크에는 텐트로 만든 임시 병동이설치되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점점 늘어간다. 보도에 따르면 4월10일 현재, 미국의 누적 사망자수는 1만8586명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수를 기록하던 이탈리아의 1만8849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전 세계 감염자수는 150만 명을 넘었고, 사망자는 9만명을 웃돌았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재앙이다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는 수세기의 시간을 건너뛰어, 그 시대로 내던져진 듯한 느낌에 빠진다. - P125

인공호흡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살아날 가망이없다는 판정을 받은 환자에게서는 호흡기를 떼어내고 있다고 한다. 병원의 처리 능력을 벗어난 희생자의 시신은 냉장 트럭에 쌓이고,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땅에 묻힌다. 이러한 사태는 앞으로,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점점 악화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일상화된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14세기 이후, 페스트가 석권한 유럽에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경고가 말버릇처럼 사람들의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하지만 북방 르네상스 화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1569)이 그린 「죽음의 승리」는 그저 자연재해로서의 역병만을 묘사한 작품이 아니다. 이 그림은 다름 아닌 전쟁의 암유다. 재난과 역병은 저 홀로 사람들을 덮치지 않는다. 인간이 고통이나 비극을 배가한다. 인간은 재난과역병에 의해서만이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의해 살해당하는 존재다. - P127

시간이 지난 후 ‘아, 그런 일이 있었지.‘하며 되돌아볼 날이 올지, 아니면 ‘아, 그때가 대재앙의 서막이었어‘라고 되뇌게 될지 지금은 예측하기 힘들다. ‘대재앙‘은 비단 역병만을 가리키는 것이아니라, 이 혼란에서 시작되어 자기중심주의와 불관용의 정신이만연하고 파시즘이 대두하는 그런 시대를 일컫는다. 이미 일본을 포함한 세계 여기저기서 불길한 조짐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인문 기행‘을 써 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솔직히 - P127

어렵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정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마음은착해지고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간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무엇이라도 계속 쓰고자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쓴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스스로에게 거듭 물어가면서.
지금 내 머릿속을 스치는 이는 브뤼헐을 비롯하여 카라바조 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1~1610)나 미켈란젤로 MichelangeloBuonarroti (1475~1564),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1313~1375) 같은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부터, 18세기 작가 대니얼디포 Daniel Defoe (1660~1731)나 20세기의 카뮈Albert Camus (1913~1960)로 이어지는, 역병의 참상을 작품화한 사람들이다. 평소라면 그다지 쓰지 않는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굳이 이들에게 바치고싶다. - P129

그 위대함은, 먼저 참화 한가운데서 철저하게 이를 응시하며기록하고자 했던 정신에서 기인한다. 만약 인류 전체가 죽음으로절멸한다면 그 기록은 누가 보게 될까.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쓴다는 행위(그린다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이런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일단 용감하게 맞섰다. 이는 ‘인간‘의 가치를 주장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참혹한 역병 속에서 이를 묘사해낸 이들의 정신이 위대하다 - P129

면, 그 두 번째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죽음‘, 자기 자신의 ‘죽음‘마저도 똑바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죽음을 면할 수 없는존재라면 무엇을 위해 쓰고 그리는가? 인간을 둘러싼 물음이 ‘죽음‘과 깊이 결부된 이상, 이 시점에서 쓰고 그리는 일은 우리에게주어진 복잡하고 곤란한 상황 속에서 ‘인간‘을 다시 바라보게끔하는 정신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인문학‘의 기본이라고해야 할 정신이다. 휴머니즘(인문주의)의 발전과 심화가 페스트의 참화와 함께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새삼 이렇듯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면서 나는 내 나름의 ‘인문기행‘을 계속 써 내려갈 작정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번 장을 읽으면서 아마 세 단위의 시간대를 왕복할 것이다. 첫째는 말할 것도없이 얼마 전 미국을 찾았던 2016년이다. 또 하나는 그런 내가 때때로 회상에 빠지는 1980년대, 그리고 여기에 현재(2020년)라는시간이 추가된다.
그러면 다시 2016년으로 되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 P131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근대 이후, ‘문명화(유럽적보편주의)‘를 구실로 삼아 자기중심적 국가주의(초개별주의)에 입각한 침략을 거듭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적 보편주의, 즉 천황제를 최고 가치로 하는 세계 질서를 그들은 ‘팔굉일우온 천하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라고 칭했다. 중국과 조선 등아시아 민족은 이러한 보편주의에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피지배민족의 독립 요구를 ‘민족주의적 편견‘으로 취급하며 탄압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근본적으로부정당해야 마땅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천황제가 존속되었듯, ‘일본적 보편주의‘ 또한 살아남았던 것이다. 코스타리카 대학강연에서 나는 이 점을 지적했다.
코스타리카를 떠나기 전날, 우리 부부는 C교수의 안내로 수도산호세 근교의 이라razú 화산을 보러 나섰다. 화산국가 일본 - P139

에서 온 우리에게는 특별히 새로운 구경거리는 아니겠지만 코스타리카를 찾은 관광객에게는 반드시 안내하는 코스라고 했다.
눈이 부실 만큼 활짝 갠 열대다운 날씨였다. 표고 1200미터가 넘는 고산지대라서 그리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운전사가가이드를 겸해 도중에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었다. 일찌감치 지쳐 있던 우리는 설명을 흘려듣곤 했지만 어떤 한마디가 마음에걸려 귀를 기울였다. ‘죽음의 산‘이라는 말이 들려왔던 것이다. 차를 갓길에 세운 운전사가 계곡 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죽음의 산이에요."라고 말했다. 파나마로 통하는 도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가 많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 했다.  - P141

희생자는주로 자메이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였다. 카리브해 제도의 기후에 익숙해 있던 그들은 한랭한 고산기후와 중노동을 견디지 못하고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깊숙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서양건너로 끌려온 뒤 카리브해 지역에서 다시 이 깊은산속으로 연행되다시피하여 목숨을 빼앗긴 셈이다.
햇빛이 드는 아름다운 마을을품은분지 저편으로 첩첩이 이어지는 산맥이 보였다. 나는 그 산줄기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저멀리 일본 규슈나 홋카이도까지 이어지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도와 광산에서 힘겨운 강제 노동에 쓰러진 조선인의 유해가 - P139

묻힌 죽음의 산까지 말이다. 지구 도처에서 식민주의의 폭력으로희생된 사람들이 원통함과 분함 속에 묻혀간죽음의 산이 이어지고 있다.
코스타리카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가 진행되어 공화당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자리를 굳혔다.(2017년 1월, 트럼프는 미합중국 제4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트럼프는 이민에 대한 과격한 중상모략을 반복했고, 특히 멕시코 이민자 중에 마약 밀매자나 강간범이 섞여 있다고 비난했다.
"멕시코인 대부분은 범죄자이니까 벽을 세워 범죄자가 들어오지않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강간범과 다름없다." - P143

트럼프가 내뱉은 일련의 배외주의적 발언은 미국 내에서 비판받기는커녕 오히려 인기를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뉴욕 거리를걷고 있으면 여러 인종과 문화가 혼재하여 도시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다양성을 억지로 파괴하고 단일문화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불가능한 프로젝트를 굳이 실행한 것이 나치 독일이었다. 결과는 ‘홀로코스트‘라는 대재앙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역사로부터 배움을 얻지 못했다. 똑같은 일이 미국에서 재현되지 않으리라고 안심 - P143

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게다가 나치 독일의 잔학함과 냉혹함을그 증거로 내놓는다 해도 지금은 누구도 진심으로 충격을 받거나슬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치 패망 이후에도 이와 동등한 잔혹과 냉혹함이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 P145

‘선한 아메리카‘과 ‘악한 아메리카‘ 사이의 투쟁에는 긴 역사가 있으며, 이 투쟁은 앞으로도 길게 이어질 것이다. 예술에 전쟁을 억제하는 힘이 있는지, 나쁜 권력을 타도하는 힘이 있는지는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어떤 악몽의 시대에도 관용 연대, 공감을 추구하려는 인문정신이 살아 있음을 가르쳐준다. 예술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모마는 어떤 층도 항상 관객으로 가득하지만 「별이 빛나는밤」 앞은 더욱 많은 사람이 몰린다. 고흐의 작품은 네덜란드 고흐미술관이나 크뢸러밀러 미술관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볼 수있지만 「별이 빛나는 밤」을 실제로 보기 위해서는 모마를 찾아야만 한다. 30년 전, 내 예비지식은 빈약했지만 처음 대면한 「별이빛나는 밤」에게서 받은 감명은 각별하여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선명하다. 고흐라는 화가에게 깊이 끌리게 된 것도 그날의 만남이 하나의 계기였다. - P157

도판이나 영상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겠지만 「별이 빛나는밤」을 실물로 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체험이다. 예전에 화가 지인이 "고흐의 그림은 특별해요. 밤에 곤충이 등불에 홀리듯 보는사람을 끌어당기는 빛을 발하는 작품이에요."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고흐는 이 그림을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정신병원에서 그렸다. 밤하늘에 소용돌이치듯, 미친 듯 넘실거리는 붓 터치는 고흐 - P157

자신의 마음속을 그린 것이리라. 혹은 화가의 눈에는 정말 그렇게보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기 고흐는 사이프러스를 모티프로 한작품을 몇 점인가 그렸다. 사이프러스는 고흐에게 단순한 나무라기보다 지상에서 천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의미를가진다. 「별이 빛나는 밤」이나 「사이프러스」는 포스터, 그림엽서,
어린이 대상 그림책에도 자주 사용되어 나도 실물과 만나기 전까지는 어쩐지 가벼운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실제 작품에서는 깊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림 앞에 모여든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 중에는유명하고 무척 비싼 그림이라는 정도의 예비지식밖에 없는 사람도 많았겠지만, 조용히 이 불꽃을 응시하고 있으면 분명 인생과생명에 대한 미칠듯한 상념 속으로 이끌렸을 것이다. 어쩌면 불꽃으로 달려드는 벌레처럼 죽음에 끌어당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 P159

고흐의 동생 테오는 부유층사이에서 유럽 회화가 인기를 끌던 미국으로 이민을 갈까 고민했다. 사업 기회를 찾아 고객층을개척하고자 했던 것이다. 의욕 넘치고 능력 있는 화상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당시 가장 잘 팔리던 인기 화가 중 하나가 코린ean-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였다. 코로식 풍경화는 조상의 출신지인 유럽에 대한 콤플렉스가 뒤섞여 있던 미국 부유층의 노스탤 - P159

지어를 강하게 자극했으리라 생각된다. 미국 동해안의 주요 미술관이라면 ‘반드시‘ 코로의 작품을 소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시 철강이나 석유 등으로 급속하게 재산을 늘린 이들이 유럽 미술 작품을 사 모았고, 그 컬렉션을 기반으로 미술관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테오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형 빈센트는 테오의 미국행에 반대했다. 실제로는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아우와 유대가 끊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동생에게 버림을 받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형의 반대가직접적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테오는 미국행을 단념했다.
빈센트는 1890년 오베르쉬르우아즈마을 보리밭에서 피스톨로 자살했다. 주머니에는 다음과 같은 유서가 남아있었다. - P161

가능한 한 좋은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을 다잡고 꾸준히노력해온 결과, 전 생애의 무게를 걸고 다시 한번 얘기해두자.
너는 단순히 코로를 취급하는 화상과는 다르다. (ㆍㆍㆍㆍㆍㆍ) 너는내가 아는 한 그런 화상이 아니다. 나는 네가 현실에서 인간에대한 사랑을 지니고 행동하면서 그에 따라 방침을 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건만, 그런데 너는 어떻게 하겠다는것이냐? - P161

진심으로 재능을 인정하던 형이 이런 말, 이를테면 ‘평생토록짊어졌던 무거움‘에 짓눌린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면 그는 무엇을할 수 있었을까. 테오는 형의 유작전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형이 죽고나서 반년 후 신경쇠약으로 세상을 등졌다.
모마의 컬렉션 중 가장 유명하다고 말해도 좋을 「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저 아름답다기보다는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나는 두 형이 옥중에 있었을 때도,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너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라는 "가차 없는 고발" (사카자키오쓰로, 「고흐의 유서」, 『그림이란 무엇인가』, 가와데쇼보신샤, 2012년(초판 1976년))에 몸을 내던지는 심정으로 이 그림 앞에 서 있다. - P163

벤산은 보통 ‘사회적 리얼리즘‘ 작가로 불린다. 하지만 내가그의 작품에서 받은 인상은 소련, 동독, 혹은 중국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와는 많이 다르다. 따뜻한 색채가 특징이며,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라기보다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감촉과 조형감각을 보여준다. ‘어린아이의 그림‘이라고 말하면 오해하기 쉽겠지만, 감미롭고 아기자기하다는 뜻이 아니다. 얄팍한 치유의 의미를 담았다는 것도 아니다. 슬픔이나 노여움 같은 감정이 지닌 본질을 이렇게 따뜻하게 전할수 있다니……. 그것이 내가좋아하는 벤샨만의 독특함이다.
그 대표적 사례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제작된 작품「해방」을 꼽고 싶다. 기울어진 건물, 겹쳐 쌓인 기와와 자갈더미를통해 전쟁으로 황폐해진 모습을 그렸다. 화면 중앙에 회전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어린이다운 웃음 대신 공포와 불안이 서렸다.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우리 인간은 회전기구처럼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뜻일까. - P167

‘전통적인 아메리카‘를 수호하자고 주장하는 세력과 백인지상주의자가 대두했다.
트램프가 등장한 지금의 상황과 무척 비슷하다.
검사는 두피고의 징병 기피 이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이에 대해 사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큰 부자가 되기 위한 짓거리다. 우리에게 서로를 죽일 권리가 있는가? 나는 아일랜드인을 위해 일했다. 또한 독일인 친구들과도일했고, 프랑스인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일했다. 내 아내를 사랑하듯, 나는 이들이 좋다. 어째서 내가 이런 사람들을 죽이러 나서야하는가? 나는 전쟁을 신뢰하지 않는다." - P175

1921년 7월 사코와 반제티가 유죄 선고를 받자 미국과 유럽에서 항의 운동이 번져갔다. 벤샨은 여행지였던 파리에서 이 운동을 접하고 미국으로 귀국한 뒤, 이들에게 연대하는 의미로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을 비롯하여 이들을 주제로 한 연작 제작에힘을 쏟았다.
결국 사코와 반제티는 1927년 8월 전기의자에 앉아 처형당했다. 1977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두 사람의 무죄를 확인하는내용의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처형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후의 - P175

일이었다.
1972년에 나는 교토에서 사형대의 멜로디」를 봤다. 영화를통해 그때까지는 표면적인 이해에 그쳤던 벤샨이라는 화가를 재발견했다. 그 무렵 두 형이 서울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그중 한명에게 사형이 구형됐다.(나중에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전 세계에 공개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1960년대 일어난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과 공민권운동이 끼친문화적 영향을 들 수 있다. 나는 그러한 문화적 자산의 은혜를 입은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트럼프류의 자기중심주의에 대항해
‘선한 아메리카‘를 지켜내고자하는사람들도 같은 맥락을 이어받고 있다. - P177

일본은 새로운 ‘전쟁 이전‘ 시기로 접어들었다. 나는 종종언젠가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을 떠올린다. 거리의 벤치에 앉은 여성(자세히 보면 예전부터 친했던 사람이다.)이 잰걸음으로 지나가는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
"당신은 전쟁이 일어나기전을 기억하고 있어? (....) 이렇게 급하게,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줄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 모두 무관심하고 낙관적이었어. 아니, 낙관이라기보다현실로부터 눈을 돌렸던 거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그저 자기 생각만 한 채 뒤로 미루며 하루하루를 보내버리고서......."
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런 날까지 살아남는다면, 수많은아픔 속에서도 적어도 한 줌의 기쁨을 지닌 채 지난날을 회상할 수 있는, "사랑으로 가득 찬 기억을 갖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허무나 냉소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나가고 싶다, 싸워나가고 싶다. - P181

지금 봐도 「형제」는 너무나 의미 깊은 명작이지만, 벤샨이가장 만년에 흑백으로 제작한 판화 「사랑으로 가득 찼던 수많은 밤의 회상이 한층 가슴을 파고든다. 오른쪽에 그린 성별도 연령도불분명한 저 이는 무거운 병에 걸린 사람일까, 아니면 늙고 쇠약해진 노인일까. 머리카락이 다 빠진 모습에 유머가 담겨 있으면서도애절하다. 「형제」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포옹이라면, 이쪽은
‘이별‘을 예감케 한다. 사람은 사람을 이렇게 부둥켜안는 것이 가능한 존재다. 저두 사람이 나눈 따뜻함이 내 속으로도 스며드는듯하다. 정말 벤샨다운 표현이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노미야마 교지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은 쟁취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벤 샨은모든 이의 평안을 바랐기에 자신은 그렇게도 격렬하고 힘겨운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으리라. 항상 자신을 그런 위치에 두고자했기에 도리어 그가 그린 연인은 서로를 그렇게도 따뜻이 - P184

위로하고, 아이들은 기뻐하며, 노동자는 평온한 한때를 보낼수 있음이 틀림없다. 예술가는 항상 오만함에 맞서는 기개와 시퍼렇게 살아있는 권력을 향한 모멸의 태도를 갖춘 자라고 벤샨은 이야기했다. (동거인 볜산」 「현대미술제1권 벤 샨, 고단샤.1992) - P187

벤 샨은 러시아제국의 영토였던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유대계 미국인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많은 유대인이 ‘포그롬(반유대 폭동)‘을 피해 해외로 이민을 떠났다. 아버지는 목공 어머니는 도공이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던 아버지는 시베리아 유형을 가기도 했다. 시베리아에서 미국으로 탈출한 아버지를 쫓아 벤 샨은 1906년, 일곱 살의 나이로 어머니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만약 리투아니아에 남아 있었다면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화와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의 피해를 직접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벤 샨 가족은 뉴욕 브루클린에 살면서 아버지는 목수로, 벤은 석판화 장인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이후 벤 샨은 육체노동자나 실업자 같은 사회 밑바닥층 사람들에게 공감하며 전쟁, 빈곤,
차별 등의 주제를 지속해서 다뤘다. 대공황 시대에는 미국 서민을 - P187

모델로 훌륭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디에고 리베라가 RCA 빌딩 대벽화를 작업했을 때는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반나치 선전 포스터 제작에 솜씨를 발휘했고, 전쟁이 끝난후에도 평화운동에 헌신했다. 이민, 빈곤, 노동이 벤 샨이라는 인물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고,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그의 휴머니즘을 확고한 신념으로 담금질했다. 이러한 인생이 그려낸 궤적자체가 내 눈에는 정말이지 ‘미국적‘인 특성으로 보인다. 벤샨이었기에 유럽도 일본도 아니라 미국에서 예술을 꽃피울수 있었다. 그야말로 ‘선한 아메리카‘의 예술을.
1969년 3월 14일 벤 샨은 뉴욕에서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흔의 나이, 앞서 말한 도쿄 전시가 열리기 바로 한해 전이었다. - P189

『경계의 음악』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1982년부터 시작하여죽음 직전까지 20년에 걸쳐 써나갔던 음악 평론을 정리한 책이다. 무서울 정도로 바빴고 난치병인 백혈병까지 앓았던 사이드가이렇게 부지런히 연주회장을 찾고 진심으로 즐기며 이 역시 타협 없는 지적 즐거움이다.) 음악을 접했다는 사실에 놀랄 따름이다.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이자 기독교인, 미합중국 국민이었던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문화와 제국주의』의 저자로서 문화연구 분야에서 전 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 대학교수로 만족스러운 인생을 보내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불공정속에 고통받으며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시당하는 팔레스타인민중 편에 서서 항상 싸웠다.  - P199

그에게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과 클래식 음악이 주는 즐거움은 별개가 아니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음악 비평에서도 항상 자신이 지닌 복합적인 아이덴티티에 기초해 ‘내부 타자‘의 시선으로 ‘중심부‘의 독선을 선명하게 비판했다.
좋은 음악을 듣고 마음이 움직일 때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 - P199

누며 그 감명이 어디서 왔는지 파고들고 싶어진다. 하지만 좋은 대화상대를 만나기란 좋은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무척 어렵다.
사이드 스스로가 이야기했듯 음악이라는 예술이 "가장 말이 없으며" "가장 닫힌" "가장 논하기 힘든 분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대화의 상대는 풍부한 감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해야 할뿐 아니라 음악 이론에도 정통하여 음악을 문학이나 정치 같은 다른 분야와 관련하여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이드야말로 그런 인물이었다. - P201

"오른손이 왼손에 호응하듯, 한 손가락은 다른 아홉개 손가락에 호응함으로써 전체가 그 깊숙한 곳에 자리한 하나의 혼에부응한다."라는,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두고 했던 묘사. "모차르트는 (오페라의) 등장인물의 심정이나 의지가 초래하는 합의와는 관계없이, 사람들을 농락하는 어떤 추상적 힘을 구현하고자시도했다고 생각한다. 도덕적으로는 거의 불모나 다름없는 대본을 사용했다는 점이 그 증거다."라는 지적. "오늘날 바그너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 서양문화의 거의 모든 국면에 걸터앉거나 아무렇게나 벌러덩 누운 거인과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음악은 음악에 대한 음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은 음악의 웅변성이 지닌 고유의 비극이다." 이런 문장을 - P201

보며 내 생각과 똑같다고 무릎을 치거나, 또는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새로운 발견을 얻기도 했다. 나는 사이드를 읽으며 함께 음악을 논할 수 있는 기쁜 대화 상대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기회가 생기면 꼭 컬럼비아 대학의 에드워드 사이드 기념실에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천재, 혹은 기인 피아니스트라고 글렌 굴드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연주 녹음을 들어본 것은 꽤 뒤였다. 1980년대의 어느 날, 나는 고베시의 번화가인 산노미야에있었다. 왜 그곳에 갔는지 이제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그 무렵나는 점점 끓어 올라오는 어두운 상념을 주체 못하고 딱히 어디라는 목적지 없이 밤거리를 배회하곤 했다.  - P203

기억도 희미하지만 산노미야역 번화가 곁길의 건물 한편에 ‘모차르트‘라는 간판을 단 찻집을 발견하고 몸을 들이밀었다. 카운터 좌석만 있는좁은 가게였다. 선반에는 고상한 취향이 드러난 커피 잔을 늘어놓았고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흘렀다. 손님은 나 혼자였다. 과묵한 주인이심각한 표정으로 끓여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지금 걸어놓은 레코드는 뭐지요?"라고 물었더니 "골드베르크예요. 굴드가 연주한... "이라고 대답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면 그때까지 몇 번인가 들어 알고 있었고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지만 졸 - P203

음을 부르는 잔잔한 곡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찻집에 흐르던 음악은 인상이 전혀 달랐다. 다음 날 바로 레코드를 샀다. 그 레코드판은 지금도 내 곁에 남아 있으니 분명 꿈이 아니라 현실일 것이다.
글렌 굴드는 1955년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처음 녹음했지만, 1981년에 새롭게 녹음한 레코드가 ‘불후의 걸작‘이라는 높은평가를 받으며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고베의 수수께끼 같은 찻집에서 듣고 내 기억에 새겨진 연주는 분명 ‘81년 버전‘
이다.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했고 찬반양론 간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지만 그때 나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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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영영 숨어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를 불처럼 태우려고 하십니까? 내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얼마나 허무하게 창조하여 주셨는지를 기억해주소서.(「시편」89편 46~47절) - P49

30여 년 전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보자.
미국의 여러 도시를 돌았던 나는 워싱턴 DC에 비교적 오랜시간 머물렀다. 수도인 만큼 미국 정부나 각 정당을 향한 로비 활동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인권단체가 워싱턴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던 초교파적 기독교계 단체에 신세를지게 되었다. 그곳을 거점 삼아 미국 국무부 인권국의 담당관을만나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사회안전법의 비인도성과 반인권성을 알려서 국무부가 간행하는 연차보고서에 반영시키는일이 목표였다. 나의 형 서준식이 바로 사회안전법의 희생자이자,
옥중에서 그 부당함을 고발한 자였다. 서준식은 징역 7년의 형기를 이미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재범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형 - P49

기가 연장되었다. 2년마다 5월이 되면 연장된 형기의 갱신 시기가다가왔다. 그날을 앞에 두고 우리 가족이나 관계자들은 그가 석방될 가능성에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무자비하게도 형기는 언제나 ‘갱신‘되었다. 어머니가 일본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랬다.
나를 지원해주던 인권단체 사무실은 미합중국 국회의사당 근처에 있었다. 암트랙 Amtrak (전미여객철도공사) 철도 유니언역에서도 멀지 않았다. 찾아가보니 예상외로 좁고 작은 방이었다. 거기서 국무부를 포함한 각기관이나 저널리스트와 인터뷰를 소개해주었다. 국무부 같은 경우는 특히 그랬지만, 그쪽에서 시간이 빈다고 연락을 주기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며칠 동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만 했다. - P51

작은 사무실에는 스태프 몇 명이 소식지 발송 작업을 하고있었다. 주된 내용은 한국에서 전해오는 인권 관련 소식이었다.
일본에서도 이 단체의 뉴스레터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멀리 미국 워싱턴에서 보내오는 통신을 보면서 나는 어째선지 젊은 활동가들이 바쁘게 일하는 활기찬 모습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직접목격한 작업 풍경은 내 상상과는 크게 달랐다. 더딘 수작업이었다. 무엇보다 활동 자금이 부족해 쪼들리는 모습이 한눈에도 들 - P51

어왔다.
스태프 중에는 여성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당시 40대 중반쯤이었을까. 젊어서 한국을 떠나 세계 각지의 현장에서 노동을하면서 전도 활동을 펼쳐왔다는 수녀였다. 일본의 가와사키시에서도 활동한 적이 있다고 했다. 경험이 풍부하고 쾌활하고 명랑한이였다. 나는 그를 ‘누나‘라고 부르며 서툰 조선어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또 한 사람은 재미한국인 여자 대학생 사회학인지 정치학인지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당시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그러듯 이런 민간단체에서 인턴으로 활동하며 현장 경험을 쌓는 중이었다. 그녀는 명석했지만 꽤 차분한 성격이라 ‘누나‘와는 대조적으로 말수가 적었다. 두 사람 모두 가난했다. 대학생은 늘 해진 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터진 구멍 사이로 하얀 발가락이 보였다. - P53

WASHINGTON, D.C.
1964년 8월, 한국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반국가단체 인민혁명당 관계자 4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제1차 인혁당사건). 그렇지만 실제로 검찰이 기소할 수 있었던 사람은 13명뿐이었고, 최종적으로는 3명에게 징역 6년, 다른 10명에게는 징역1년 집행유예 3년이라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빈 껍데기일 뿐인 날조 사건이었다. 1970년대 전반 한국 사회는, 1972년 박정희유신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반정부 민주화운동이 고양되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관계자를 적발하고(민청학련 사건), 1974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총23명을 체포했다. 그들의 죄상은 "인혁당을 재건하여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한 점"이었다. 다음 해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피고인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판결로부터 불과 18시간 후인 9일 아침에형을 집행했다. 오글 목사 부부는 국가에 의한 무자비한 살육 행위에 당당히 항의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 그 까닭으로 한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했다. 인민혁명당 피고의 사형 집행은 박정희 시대의 한국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 P55

주어, 언제까지입니까......"
이 문구는 말 그대로 끝이 없을 어두운 밤과 같았던 그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공유했던 말버릇과도 같았다. 나도 그들 중하나였다. 다만 나는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마다 당황해서 삼켜버리기 일쑤였다. 신을 믿지 않는 스스로를 자각했기 때문이었고, 한편으로는 ‘언제까지‘라고 물어봤자 희망적인 대답따위는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앞에 인용한 구약성서 시편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읽은 한국 민주화운동 정보를 전해주던 소책자에 윌리엄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의 회화 작품 「느부갓네살」과 함께 게재되어 있던 이 글귀를 생생히 기억한다. 이 작품은 구약성서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의 이야기를제재로 삼았다.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 2세는 교만의 죄악에 빠졌고, 그 벌로 풀을 먹는수소처럼 살아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 P57

워싱턴 체류가 제법 길어질 무렵, 재미동포 유지 한사람이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한국 식당에서 포토맥강의 명물인 게요리를 먹었다. 값비싸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차안에서 몸에 이상이 느껴졌다. 온몸의 피부가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운전해주던 동포 청년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영어로도 우리말로도 ‘가렵다‘라는 말을 알지 - P61

WASHINGTON안전보장법‘이라든지, ‘기본적 인권‘이라든지, ‘천장에 매본 매질을 당하는 고문‘과 같은 말은 영어로도 한국어로도가했다. 찾아갔던 곳곳에서 그런 이야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가렵다."라는 간단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어 이외에는 일상생활을 위한 어휘를 알지 못했던탓이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신경과민 상태였다. 호들갑스러운 말이겠지만 그때 차 안에서 "몸이 가려워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만으로도 망명자라도 된 듯 마음속 저 밑바닥에서 고독감과 비애가 솟아올랐다.
차창 밖을 보니 언뜻 People‘s Drug라는 간판이 보였다. ‘번역하면 인민 약국쯤 되려나...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나갔을 따름이다. 아주 잠깐지나 퍼뜩 깨달았다. ‘알레르기‘라는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운전하는 청년에게 차를 좀 세워달라고 부탁하여 그 가게에서 항히스타민제를 사 먹고 위기에서벗어날 수 있었다. - P63

내셔널 갤러리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렘브란트 Rembrandt van Rijn (1606~1669), 페르메이르Jan Vermeer(1632-1675), 고흐,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피카소 Pablo Picasso(1881~1973), 고갱 Paul Gauguin (1848~1903)의 작품을 비롯한 걸작이널려 있었다. 실로 ‘보물창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수틴의 초상」과 같은 예외는 있었지만, 놀랄만한 발견이라 할 작품은 그다지 없기도 했다. 그렇다고 기대 이하였던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은 ‘망명자‘가 잠시 팽팽해진 신경을 누그러트리며 쉬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다만 이런 유럽 회화의 ‘명품‘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대부호가 응접실에서 뽐내던 컬렉션을 구경하는듯해서 피렌체와 파리, 런던에서 보았을 때 같은 감흥이 생겨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신흥국 미국의 큰 부자가 자기의문화적 뿌리를 향한 동경과 콤플렉스 때문에 아낌없이 돈을 들여사모은 작품들...... 그런 나의 선입견이 방해한 것이었을까. 그선입견이 반쯤은 맞다고 해도, 그때는 공부가 부족했던 탓에 그리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긴 했지만 - P65

화가 벨로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건축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1901년부터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우고, 농구와 야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아마추어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다가 대학 졸업을 기다리지않고 화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좋은 의미에서 아마추어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말하자면 바닥에서부터 실력을 쌓아나간 화가다. 1911년부터 아트 스튜던츠 리그 오브 뉴욕 The Art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 수학했고, 마흔두 살에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벨로스는 이른바 ‘애시캔파Ashcan School‘ 화가에 속하며,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에드워드 호퍼도 그중 하나이다. 이들은 20세기 초반 뉴욕의 변두리와 노동자 계급 사람들의 생활을사실적으로 그렸다. 드디어 미국을 그린 미국인 화가와 만났다는생각이 들었다. - P69

일본에서 열리는 서양회화 전시는 아주 예전부터 인상파를중심으로 한 19세기 후반 이후의 프랑스 회화에 편중되어왔다. 이런 전시 구성이 흥행으로 이어지므로 관람객을 동원하는 데 유리했다는 까닭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는 에른스트루트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의 「달빛 아래겨울 풍경」이 출품되어 반가웠다. 일본에서는 키르히너의 작품을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처럼 나 역시 독일이나 스위스의 미술관에서 비로소 독일 표현주의의 매력에 눈떴다. 하지만 전시를 보러 간 첫 번째 목적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였다. 복제화였지만 예전에 본 괴물 같던 벽화의 잔상이 되살아나기억을 재구성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 P77

U군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며 시민운동에 힘을 기울이는타입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성이 부족한사람이었고, 양실수 지원 활동에서도 중심 멤버가 되지는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일찌감치 중공업계열 기업에 취직하여 공장이 있는 규슈지방어느 도시로 부임했다. 그 뒤에 아프리카 자이르(콩고)에 파견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콩고 남부에 위치한 카탕가주는 구리와코발트 같은 지하자원이 풍부해서 U군의 회사도 광산개발과 운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U 군은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기에 프랑스 식민지였던 콩고에 발령이 날 수 있었다. 나도 대학에서 불문학과를 졸업했지만 내 프랑스어는 ‘카르티에 라탱QuartierLatin (라탱지구: 학문의 중심지, 1968년 학생운동이 발발한 현장의 의미로도 쓰인다.)‘의 말이었다면, U군이 쓰는 프랑스어는 광산 현장에서쓰는 말이었던 셈이다. 자이르에서 돌아와서 몇년인가 지나 그는디트로이트 지사로 떠났다. - P83

인권단체 방문만으로 말할 수 없이 지쳤지만, 미술관이라는특별한 장소가 피로를 배가시켰다. 좋은 작품과 만나기라도 하면, 흥분 지수가 올라서 내 쪽에서 기가 빨리는 듯한 피곤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어디를 가도 미술관에 들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일종의 병적인 심리 상태이다. 디트로이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U 군의 집에서는 오랜만에 넓은 침대에서푹 잘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하루 휴양하듯 쉴 수도 있었지만, 무언가에 내쫓기듯 미술관으로 향했던 것이다. 디트로이트미술관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다거나 꼭 가야만 하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 P99

DETROIT그런 리베라가 1929년에 세 번째로 결혼한 상대가 스물한 살어렸던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였다. 리베라는 프리다를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길었고, 검고진한눈썹은 코 위로 이어졌다. 마치 검은 새의 날개와도 같은 새카만아치가 근사한 갈색 빛깔 눈을 두르고 있었다. ‘개구리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거한이 검은 새의 날개를 가진 여성과 사랑에빠진 것이다. 나와 파트너 F는 2016년 모마를 찾았을 때, 박물관상점에서 두 개 한 세트짜리 머그컵을 샀다. 하나에는 커다란 눈알과 함께 Diego라는 이름이, 다른 컵에는 날개를 펼친 듯한 검은눈썹과 Frida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두사람사이는 늘 위태로웠다. 앞서 말했지만 멕시코에 망명중이던 트로츠키와 프리다가 짧은 연인 관계에 빠진 적이 있다.
벽화 제작에 조수로 참가하기 위해 멕시코를 찾은 일본계 미국인조각가이사무노구치 Isamu Noguchi (1904~1988)와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고용인의 임기응변 덕분에 노구치는 도망칠 수 있었지만 리베라가 권총을 들고 뒤를 쫓았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프리다가오른쪽 다리가 악화되어 입원했을 때 문병을 왔던 노구치와 리베라가 맞닥뜨린 적도 있다. 리베라는 권총을 빼 들고 경고했다. "다음에 만나면 진짜로 한방먹여줄 테다!" - P119

사상가, 정치가로서 리베라는 패배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리헤라를 우습게 여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저 벽화 앞에서 나는마치 고대 유적 앞에 섰을 때 느낄 법한 깊은 흥미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외경심을 품게 된다. 리베라의 벽화는 인류의 정신사에 있어 중요한 사료다. 리베라가 아즈텍의 지모신母神 코아틀리에에게 영감을 얻었듯, 미래의 인류가 폐허 속에서 이 벽화를 발굴하여 인간해방의 새로운 꿈과 활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비웃는 것은 인간 정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천박함에 몸을맡겨버리는 일은 아닐까.
세계 각지에서 해방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리베라의 작품은지금도 말을 건네고 있다. 이를 받아들여 계승하려는자 역시 끊이지 않는다. 한국의 민중미술 운동이 좋은 예다. 사상가, 정치가로서는 패배자인지 모르지만, 예술가로서 디에고 리베라는 다른평가를 받아야만 한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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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도쿄케이자이 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2006년부터 2년간 성공회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머물며 한국의 다양한 지식인,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95년「소년의 눈물로 일본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2000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민주주의 실현과 소수자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제6회후광 김대중학술상을 받았다. 1970년대 ‘재일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조작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형들(리쓰메이칸대학 교수인 서승과 인권운동가인 서준식)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의 사색과 문필 활동, 강연으로 연결되었다.
일본에서 1991년 출간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로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 밖에 『청춘의 사신』,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고뇌의 원근법, 언어의 감옥에서』, 『나의 서양음악 순례』,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나의 조선미술 순례』, 『시의힘 내 서재 속 고전」,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나의 이탈리아인문 기행』,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나의 일본미술 순례』, 『서경식 다시 읽기 2: 회상과 대화, 최종 강의』 등의 책이 소개되어 있다.
2023년 12월 18일,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릿터>는 한 번만 더 미국 기행 마지막 마무리로 쓰고싶고, 그 후는 조금 쉬고 나서 독일, 불란서로 갈 작정입니다.


7장 원고를 탈고한 후, 서경식 선생은 2020년 11월 16일 메일에서 이렇게 전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은 바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좀처럼 마감을 어기지 않던 그가 유독 힘겨워했던 연재였다.
잠정 휴재가 결정되었고 또 훌쩍 시간이 흘러 저 맺음말‘ 글의 개고와 퇴고를 거듭한) 최종판이 도착한 날이 2023년 12월 17일이다.
다음 날 영면하셨으니, 이 책의 맺음말 「‘선한 아메리카‘를 기억하기 위하여」는 그렇게 선생의 마지막 원고로 남았다.
예기치 않게 인문 기행의 종착지가 되고 만 ‘미국‘을 뒤돌아보는 서경식 선생의 시선은 무척 어둡다. 생각해보면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30년이라는 문구 아래 기획된 그의 ‘인문 기행‘은 줄곧 쓸쓸하고 암울했다. ‘슈트케이스가 또 망가졌다. (......) - P4

슈트케이스처럼 나 역시 슬슬 사용기한이 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시작한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이 그랬고, 벤저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1913~1976)의 가곡 가사 "How long, howlong? (앞으로 얼마나, 얼마나 오래 걸릴까?"을 들으며 "아, 여전히 세계는 피투성이다. 대체 언제까지? (......)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할까?"라며 탄식했던 영국기행의 나날도 다를 바 없었다. 어느 대담에서 반고흐와 모차르트, 윤이상, 존 케이지의 이름을 들며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입니다. 끝없이 끝없이 계속하고 싶어요."(서경식 · 김상봉, 만남서경식 김상봉 대담』, 돌베개, 2007년)라고 웃으며 말했던 그가 조금은 편안해져 그림과 음악을 만끽하는 여행자였어도 좋았으련만.
하지만 그저 바람이었을 뿐, 나는 서경식 선생이 쉽게 마무리 짓지 못했던 미국기행을 ‘인문 기행‘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느낌으로 읽고, 옮겼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세계사적 위기, 정년퇴임에 뒤따른 어수선함과 건강악화같은 변화를 우선 들수 있겠지만, 그 탓만은 아닐 것이다. 서경식 선생이 직접 언급한 것처럼 ‘독자 여러분이 왕복할 세 단위의 시간대‘(131쪽) 때문이다. 그건 최근(이자 마지막으로) 미국 땅을 밟았던2016년, 두 형의 석방과 지원 활동을 위해 미국의 인권단체와 국 - P5

무부를 방문했던 1980년대 중·후반, 그리고 이 책에 담긴 글을쓰던 2019~2020년이라는 시점이다.
첫 시간대는 차별주의자 도널드 트럼프가 유력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던 무렵이다. 서경식 선생은 "우리는 앞으로 긴 악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155쪽)라고 되뇌며 휘트니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을 우울한 심정으로 거닐었지만, 그 반대편에서 ‘선한 아메리카‘를 지켜내고자 하는 이들을 향한 희망의 마음을 접지 않았다. 두 번째 시간대는 우리에게 처음 각인된 그의 청년 시절이다. "해 저무는 하늘이 늘 피고름 색으로 보였고", "탁한 청록색의 수면 위로 허연 익사체가 두둥실 떠오르는 환상에 사로잡혔다."(「길 위에서」, 『서경식 다시 읽기』, 최재혁옮김, 연립서가, 2022년)고도 했던 시절과도 겹친다. 안전보장법, 기본적 인권, 고문 같은 단어는 알지만 "가려워요."라고 제 몸 상태하나 표현할 일상어조차 영어로도 우리말로도 꺼내지 못한 재일조선인 청년은 광활한 미국 땅에서 ‘망명자‘라도 된 듯한 고독과 비애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도 곁에는 헤어질 때 달걀을 삶아 건네준 재일조선인 여성 B씨, 어머니를 챙기며 두 형의 판결을보러 대신 한국까지 건너가 준 소꿉친구 U군이 있었다. 인권단체의 수녀와 여자 대학생 인턴이 서경식 선생이 선물한 새 구두를 - P6

신고 햇살이 내리쬐는 워싱턴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이야기하자 환해지던 선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세 번째 시간대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책의 본문을 써 내려간 시기다. 그는 참혹한 역병이 몰고 온 먹구름과 자기중심주의, 불관용이 횡행하는 "복잡하고 곤란한 상황 속에서 ‘인간‘을 다시 바라보게끔 하는 정신적 행위", "요컨대 ‘인문학‘의 기본이라고 해야할정신(131쪽)을 지키고자 악전고투하며 인문 기행을 계속했던 셈이다.


비유컨대 나의 저술은 질식해가는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책을 펴내며: 탄광 속 카나리아의 노래」, 『난민과 국민사이 임성모·이규수옮김, 돌베개, 2006년)


이 책을 읽기 위해 왕복해야 할 세 단위 시간대에 하나 더 추가해야한다면 7장과 유고(맺음말) 사이에 가로놓인 3년 남짓한 기간이겠다. 그때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2년 7월 미얀마군부의 민주화운동가 네 명 사형 집행, 그리고 2023년 10월부터는 가자지구에서 끔찍한 유혈이 이어졌다. 그런 사태가 서경식 선생에게 미친 타격은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던 것 같다. - P7

미국 기행은 미완으로 남겨두었지만 이 시기에 선생은 ‘더 나빠지는 세계. 이상은 사라지고 ‘진화‘되는 세계를 향한 우려를 일간•지 칼럼을 통해 쉬지 않고 발신했다. 그의 번역자이자 편집자라는자부심과 책임감으로 놓치지 않고 찾아 읽긴 했지만, 고백하자면나는 서경식다운(서정식이니 쓸 수 있는) 글이구나.‘라고 생각하며어느 곁에 조금씩 둔감해졌던 것 같다. 또는 내 수준에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서경식의 감각‘이라고 변명하면서 부질없지만 그가 떠난 자리에서 광부가 갱도안으로들고 들어간다는 카나리아의 이야기를 뼈아프게 기억한다. 사람보다 먼저 일산화탄소의 농도에 반응하기에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서 위험을 알리는 카나리아 선생은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재일조선인과 자신의 글을 카나리아에 빗댔다. 홍콩이, 벨라루스가, 미얀마가, 우크라이나가 시간이 지날수록 진부해지듯 그의 글과 마음까지 내 속에서 그렇게 진부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카나리아의 비명을 흘려들은 건 아니었을까. 마음이 저려온다.


허락된 지면을 빌려 2023년 12월 21일, 평온히 잠든 듯 누운 서경식 선생 곁에서 파트너 F. 후나하시 유코裕子 선생이 조문객에 - P8

게 건넨 인사를 독자에게도 전하고 싶다.


그가 조금 더 살았다면 분명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더 많이 했으리라 생각하니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한편, 그는 ‘인간으로서의 죄‘를 두고 내내 괴로워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일이 그것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싸움에서 벗어났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통해 그 무거움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수고했어요. 간신히 편해졌지요? 많이 애썼어요.‘라고말해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그가) 힘을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타자의 고통을 향한 상상력에 유달리 민감했던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인문 기행은 독일로, 불란서로 이어지지 못하고 끝을 맺었다. 여행과 관련해 서경식 선생이 남긴 글 가운데 좋아하는 몇 문장을 옮겨본다.
저는 지금도 툭하면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만,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거주‘를 찾아 헤매는 방랑과도 같은 것이죠. 나이를 먹으며 여행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 - P9

워져 갑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다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저에게는 일상의 ‘거주‘ 또한 여행 같은 것이니까요. 그럼 봉 보야주 Bon Voyage ! (즐거운 여행을!)(서경식·다와다요코, 「경계에서 춤추다』, 서은혜 옮김, 창비, 2010년)


서경식 선생은 세상에 없지만, 거주와 여행이 다르지 않았던 그의 삶과 여정이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해야 할 책무가 남았다.


서늘한 가르침을 주던 스승이었고 다정한 친구였던,
그리운 서경식 선생님의 안식을 빈다.
2024년 1월 7일옮긴이 최재혁 - P10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동네로 피하라.(「마태복음」 10장 21절~23절) - P13

이번 글을 준비하며 당시 여행에서 쓴 일기를 찾아보았다. 일본을 떠나 1986년 10월 2일 무렵 쓴 글에는 앞서 인용한 마태복음 구절 옆에 "근심으로 마음이 꽉 막힌 순렛길이다."라고 휘갈겨쓴 내 글씨가 있다.
나는 말 그대로 근심을 가득 안고서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인권운동단체와 시민단체, 종교단체, 국무부 인권국 등을 찾아다녔다. 뉴욕의 단체 사무소를 찾아가 보니, 고급스러운 정장을차려입은 금발의 여성 스태프가 나와 쌀쌀맞은 표정에 알아듣기힘들 만큼 빠른 영어로 "좋아요, OK, 당신에게 15분 드리죠."라고말했다. 15분! 열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내게 주어진 시간, 그것도더듬거리는 영어로 겨우 15분. 속이 상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기운을 내서 열심히 이야기했다. - P17

그 와중에도 나는 머무르던 도시에서 짬이 나면 혼자서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사적인 반독재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시기였다. 형들은 옥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걸맞은 바른 처신이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사람에 따라서는그런 나를 괴이하다보았을 것이다. 나는 스물네 시간을 투쟁에 바치는 모범적인 활동가상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다만 목마른사람이 우물을 찾듯, 좋은 미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바라며떠돌아다니는 일이 내 자신의 생존에 필요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여행 도중에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작품 「수틴의 초상과 만났다. 러시아의 유대인 마을에서 무일푼으로 파리로 건너온 섕 수틴ChaimSoutine (1894~1943), 그 거칠고 불온하지만 섬세했던 인물의 초상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수틴의 초상」은 그 후로 내 인생을 통틀어서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고 나중에 졸저의 표지에도 사용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박이엽 옮김, 창비,
2002년 개정판) - P19

1990년에는 출소했던 형 서승을 안내하기 위해 미국을 찾았다. 석방 지원 운동에 힘써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면서 대학 부속 포그 미술관에서 반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의 「머리를 민 자화상을볼 수 있었다. 나치가 퇴폐예술로 낙인찍어 루체른에서 경매에 부친 탓에 파괴를 면해 이 대학에 소장되었던 것이다. 나에게 이초상은 마치 긴 복역을 끝내고 막 출소한사람처럼 보였다.
미국에는 친구나 지인도 있고, 좋은 미술관도 있으며 훌륭한오페라나 콘서트 공연도 많다. 그런데도 그 이후 30년 정도 미국에는 그다지 발길을 두지 않았다. 트럼프(이 여행 당시는 아직 대통령후보자였다.)와 같은 존재, 단적으로 말해 반지성적이고 오만한 자기중심주의가 대두하면 할수록 미국을 향한 나의 기피감도 점점심해졌다. 하지만 2016년이 되어 오랜만에 뉴욕에 가볼 기회가생겼다. 코스타리카 대학 교수로, 신뢰하던 친구 C 교수가 초청 - P21

강연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C교수는 한국인 여성이지만 수년 전에 과감히 한국에서 코스타리카 대학으로 떠났다. 거기서 살아보며 한국에서 매일 느꼈던 스트레스가 줄었다고, 좋지 않았던 몸상태가 금세 회복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교수가 권유한다면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니 코스타리카는 너무 멀었다. 일본에서 출발하는 직항편은 없고, 텍사스주 댈러스나 뉴욕을 경유하는 환승편을 이용해야만했다. 고민 끝에, 어차피 간다면 이참에 오고갈 때 뉴욕에 들러 시간을 내서 예전에 방문했던 장소를 다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않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내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미국을 여행할 기회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먼 옛날 기억의 단편도 되살아났다. 좋은 기억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라는 인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그런 절실한 기억이다. 그 기억들은 내 속에 있는 ‘선한 아메리카‘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이런 까닭으로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시작한다. 출발하면서부터 아끼던 모자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 P23

나는 미숙하고 완고한 젊은이였다.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먼저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있었다. 상의를 하고 있을때도 그것이 영어이건 한국어이건 당시의 나는 자세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가 사사로운 일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을 때, 뭐가 우스운 걸까 알 수 없어서 상처받기도 했다. 누군가의 집에서 회의가 있던 어느 날, 내가 앉아 있던 의자가 갑자기 망가져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재미있어하며 웃었지만 나는 웃을수 없었다. 누군가가 돌아가기 전까지는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한가롭게 담소를 나눴고 나는 한시라도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 말조차 꺼낼 수 없었기에 그저 잠자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30년 후에 찾아온 데자뷔의 감각이 그때의 긴장감과 불안을 또렷이 되살려냈다. - P33

음악이나 미술과 관련된 취향은 나와는 전혀 맞지 않았지만, 재일조선인으로서 가졌던 근심과 울분은 공감할 수 있었다. 풋내 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정작내 자신의 상황은 모른 체하고, 한국인인데도 일본어를 쓴다거나 일본가요를 부른다며 꽤 비판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돌아보면 집회나 회의에서 익숙지 않은 영어나 한국어로, 그것도내 형제가 지금 어떤 고문을 받고 있는가 같은 무거운 내용을 말하는 것은 마음이 뒤틀리는 일이었다. 그랬던 나는 B 씨와 모어(간사이 사투리의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며 나도 모르게 위로받고있었던 셈이다. 당시의 나는 아직 그런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라도. - P37

그런 B 씨는 나를 지원하는 사람들중에서도 이질적인 소수자였다. 다만 당찬 성격이고 죽는소리 같은건 하지 않아서, 타인의 동정은 ‘노상큐‘였다.
얼마나 힘겨운 삶이었을까, 얼마나 불운했을까. 심약한 나는바로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미국 한구석에서 만난 이 불운한 여성,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 같은 인간에게도 살아가는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면 도리어 상처를 주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이어떨지 알 수 없다. 나같은 사람의 쓸데없는 참견은 ‘노상큐‘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나는 직업도 없는 젊은이였고 병든자였다. 정치범의 가족이며 매일같이 옥중에 있는 형들의 석방을 호소하며 다니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들이 살아서 출옥하리라는 희망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나자신의 내일이 어떨지조차 전혀 내다볼 수 없었다. 그녀를 동정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위로받고 싶었던 것뿐이지는 않았을까. - P39

나와 B 씨는 호퍼의 그림처럼 한산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던 카페에서, 서로의 고독을 강하게 느끼면서 말없이 한참을 앉아있었다. 입을 열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해버리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 B 씨는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비행기에서 먹어."라며 오늘 아침 삶았다는 달걀을 대여섯 개 건네줬다. 언젠가 내가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게다.
그때의 감각이 30년 후에 되살아났다. 거꾸로 말하면 60대중반을 지난 내 자신이 뜻하지 않게 30대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젊다‘고 해서 반드시 즐겁고 기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어쩐지 어색하고 미숙하며, 가시가 돋혀 있으며, 더할 나위 없이 고독하기도 하다. 그런 감각까지 맨해튼에서 되살아났다. 30년전의 나는 광기와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갈림길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지인들도 적지 않다. 그때 나는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B 씨는 지금도 건강할까. 그때의 일을 생각해낸 것도 호퍼의 작품이 가진 힘 때문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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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 행진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글을 쓴다. 우리의 많은 친구들이 2017년 1월 21일에 열릴 여성 행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신체 장애 때문에 직접적인 시위 참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물었다. 그리고 대규모 항의 시위가 워싱턴 DC와 전 세계 도시에서 열리기 일주일 전에 답을 찾았다. 우리는이 책을 함께 집필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분위기에 깃든 열정은 치열했던 1970년대의 페미니즘 운동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성인 여성들과 소녀들, 때로는 그 주변의 성인 남성들과 소년들의 변혁적이고 정치적인 자각이 일으킨 강력한 사회적 봉기를 영화 평론가 몰리 해스컬은 - P11

당시의 흥분을 이렇게 포착했다. "우리는 과거를 거부했고 속박을 거부했고 우리의 어머니들이 살아온 방식을 거부했다. 마치 그동안 육지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던 종족이 절벽을 기어 올•라가 난생처음 광활한 바다를 본 것 같았다. (...) 모든 일이 가능했다. 
물론 2017년 1월 상황은 달랐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출중한자격을 갖추고 출마한 여성 대통령 후보자가 상스러운 데다 철저히 부적격자인 남성에게 패배하는 일)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 각지의 수많은 시위가 확실히 페미니즘에 힘입어 일어났었다. 1970년대의 여성해방운동이 그토록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선거 결과가 그토록 기막히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며, 항의 시위가 그토록 다급하게 필요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거대한 항의의 물결이 1970년대의 격앙된 시위 운동처럼 보이긴 했지만, 이 반대 운동이 다름 아닌 절망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곧바로 명백해졌다. 1970년대의 시위 행진자들이 멋진 신세계를 향해 나아간다고 느꼈다면, 2017년의 고소인들은 타락한 세계, 유아적이면서 악마적이고 타락한 인물이 지배하는 세계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 P12

하지만 정말 문화가 변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우리와 우리의 많은 친구들은 여전히 미쳐 있을까? 격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미쳤다는 것이다. 미친 듯 화가 나고 혼란스럽고반발감이 치솟는다는 의미에서 미쳤다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영역에서 성공했다면 그 영역에서 백래시에 부딪칠 것이다.
당신이 유리 천장을 깨부수었다면 깨진 유리들을 밟고 가야 할것이다. 당신이 한껏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비틀거리며 넘어질지도 모른다.
"펜은 페니스의 은유일까?"라고 질문하며 우리가 함께한 첫책 다락방의 미친 여자』 집필을 시작한 지 벌써 40년이 흘렀다. 우리는 여성문학의 전통을 발굴하고자 수 세기에 걸쳐 진행되어온 권위와 남성성의 동일시 문제를 검토했다. 이제 우리는미국 정치와 젠더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면서, 이 문제와관련된 질문을 숙고하게 되었다. 몇몇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대통령 후보자로 나선 만큼 아마 좀 더 해방된 상황일지도 모르는지금 이 시점에도, 우리는 "대통령은 반드시 페니스가 달린 사람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 P15

물론 시민 한 명 한 명이 각자 한 표를 행사하고 다수의 의사가 선거인단 선거의 방해를 받지 않는 전통적인 민주주의 체제였다면, 주요 정당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최초의 여성인 힐러리 클린턴이 그 2016년 선거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학식 있고 경험 많은 그녀였다면 분명 트위터로 통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중대한 의학적 위협을 부정하지도 회피하지도 않고 자기 나라 시민들에게 반란을 부추기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리졸 살균제를 주입하라는 조언을 하지도 않고, 민권 시위자들을 진압하겠다고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휘말리게 된 무정부주의적 서사 구조에 상응하는 대항 역사 속에서라면 힐러리 클린턴 대통령은 질서 정연하게 정부를운영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흠결이나 반대자들은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정부, 이를테면 앙겔라 메르켈의 정부와 매우 비슷한 정부를 운영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될 뻔했던 이 여성은 우리처럼 1970년대가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주요 정당의 지지를 받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자라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1970년대의 페미니즘이었다.
- P18

그녀는 또한 1970년대의 전형적 인물, 즉 여성해방운동의 원대한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준 본보기인 동시에 그 운동이 끊임없이 맞닥뜨려야 했던 백래시의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1970년대에 클린턴은 법학전문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로댐이라는 결혼전성을 계속 사용하려 애썼으며 자신은 "내 남자 옆에 있는 그저 그런 작은 여자"가 아니라고, 그러니 "집 안에만 머무르면서쿠키를 굽는" 삶은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인권은 여성의 권리이며,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
라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남편이 대통령직을 떠난 뒤에는 퍼스트레이디 최초이자 여성 최초로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에는 국무장관으로 재임하며 좋은 평가를 받는 등 주목할 만한 기록을 세웠다.
클린턴을 국가 정치 현장으로 쏘아올린 특별한 역사적 변화는 우리 세대를 전문 직종으로 나아가게 했던 변화와 정확히 같은 것이었다. 이런 대변동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많은동시대인들의 삶과 일을 변화시킨 지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 P19

우리는 제2물결 페미니즘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정점에이르렀으며 세기말 전환기에 쇠퇴했다가 2016년 대선을 전후로 부활했다는 생각에 대해, 비록 그 역사가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하더라도 복잡하게 따져볼 것이다. 다만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회운동에서도 일어나는 법이다. 조용히 정지해 있거나 심지어 퇴행하고 있는 것만 같은 시기도 사실은 도전 의식을 북돋우며 미래에 필요한 전술을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다음에 나올 장호들에서 페미니즘은 하나의 욕망이고 비전이고 갈망이고 환상이며, 가끔은 현실과 불화하지만 가끔은 불가능해 보이는 대안적 현실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꿈이다. 우리는 지난 70년에 걸친 진화 과정 내내 페미니즘이 다양한 상상을 아우르는 심오한 상상적 노력으로 스스로를지탱해왔다고 주장할 것이다. - P45

여자로 태어났다는 게 끔찍한 비극이다. 수태된 순간부터 나는 가슴이 솟아오르고 페니스나 음낭 대신 난소를 갖게 될 운명이었다. 내 모든 행동과 생각과 감정의 범위가 피할 길 없는 여성성에 의해 엄격하게 제약당할 운명이었다. 그래, 길거리의 패거리들, 선원들, 군인들, 술집 단골들 사이에 섞이고 싶다는 내절실한 욕망, (...) 그 모든 욕망이 내가 소녀라는 사실, 늘 공격당하거나 두들겨 맞을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망쳐진다. 남자와 남자의 삶에 대한 내 절실한 호기심이, 빈번히도 그들을 유혹하려는 욕망이나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유인책으로 오해받는다. 오, 맙소사,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깊게,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건데, 확 트인 벌판에 나가 잠을 자고, 서부를 마음대로 여행하고, 밤에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 P56

『벨 자 를 써나갈 때, 플라스는 위와 같은 상황을 한층 더 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녀의 서술자/주인공 에스더 그린우드는 남자 친구가 그녀에게 아기를 갖게 된다면 그녀가 시를 쓰고 싶지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고백한다. "나는 결혼해서 아기를갖는 일이 세뇌를 당하는 일이나 같을 것이라는 주장, 그래서나중에는 사적 노예나 전체주의적 국가의 노예처럼 무력하게살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온실 같은 패션 잡지의 세계에 구현된 1950년대의 문화를 점검한, 현존하는 플라스의 이 유일한 소설은 미국 소녀를인형으로 묘사하는 한편 사회가 그들에게 경쟁하라고 명령하며물려준 온갖 병폐를 탐구한다. - P57

분명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페이턴 플레이스>의 끈적한 에로티시즘, 프랭크 시나트라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노래, 엘비스 프레슬리의 섹시한 몸 흔들기,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 제인맨스필드의 도발적인 연기 등에 매료되어 있던 당시의 문화에 호소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에로틱함을 향한 이런 집착은 프로이트의 성 심리 이론(성행위의 성공을 적절한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일과 동일시한 이론)만큼이나 골치 아픈 결과를 빚어냈을까? 휴 헤프너와 그가 이끈 플레이보이 클럽들이 킨제이의 연구의 오랜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프로이트 지지파와 킨제이 지지파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머리와 가슴이 아니라 "여성 성기"
와 남성 성기였다. 이렇게 섹시한 "연인"에게 점점 더 많은 찬사를 보내던 사회에서도 1950년대 말 무렵이 되면 아이가 있는여성 중 25퍼센트가 가정 바깥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가장부지런히 일하던 젊은 여성에게도 이 시기의 문화는 해결 곤란한 문제가 되었다. - P73

플라스와 리치가 스미스대학교와 래드클리프대학교에서 착실하게 공부하고 아이들을 낳고 한동안 자신들의 반항심을 억누르거나 비밀 일기에 몰래 드러내는 동안, 보헤미안족과 비트족과 흑인들은 세기 중반의 미국의 경건성에 항의하고 있었다.
1955년에 그들의 불만은 앨런 긴즈버그의 시 제목처럼 ‘포효‘ 상태에 이르렀다. 동성애자, 유대인, 좌파, 불만분자였던 앨런긴즈버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미국의 끔찍한 상황에대해 들려주었다.


몰록! 고독! 배설물! 추악함! 재떨이와 손에 넣을 수 없는 달러들! 계단 밑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아이들! 군대에 들어가 흐 - P75

느끼는 소년들! 공원에서 울고 있는 노인들!
......
몰록! 몰록! 로봇 같은 아파트! 보이지 않는 교외! 해골 같은보물들! 눈먼 자본들! 악마 같은 산업들! 유령 같은 나라들! 천하무적 정신병원들! 화강암처럼 딱딱한 음경들! 괴물 같은 폭탄들!‘


하지만 긴즈버그의 포효가 점차 늘어가던 불만분자 집단을매료하기 전에 이미, 자신들을 영혼 없는 존재로 규정한 문화의마수에서 벗어나려고 분투하던 여성들이 있었다. - P76

음악계만 해도 찰리 파커, 텔로니어스 멍크,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같은 인물들이 지배했던 비밥과 재즈라는 새 장르와 함께 어느 때보다도 풍성해졌다. 루이 암스트롱도 트럼펫을 불며 계속 활동 중이었고, 해리 벨라폰테는 카리브 억양으로 <영리한 남자, 더 영리한 여자>를 불렀다. 여자 가수들도 뒤쳐지지 않았다. 빌리 홀리데이는 여전히 아이돌이었고, 엘라 피츠제럴드는 그녀 최고의 앨범 녹음을 막 시작한상태였다. 1958년에는 실비아 플라스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니나 시몬이 <리틀 걸 블루> 앨범을 내며 화려하면서도 저항적인 가수 이력을 시작했다. - P83

이런 노래들의 당김음 패턴 속에서 꾸준히 울려대는 드럼 소리처럼, 민권운동도 서서히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궨덜린 브룩스가 1950년 『애니 앨런』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후, 랠프엘리슨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미국도서상을 수상했고, 제임스 볼드윈은 『미국의 아들의 기록』을 출간했다. 1955년 마틴루서 킹 주니어는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했고, 같은 해에 로자 파크스는 남부의 버스에 올라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기라는명령을 거부했다. 흑인 극작가 로레인 핸스베리가 강렬한 극작품 <태양 아래 건포도>를 집필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였다. 이 작품은 1959년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하여 공전의 히트를치게 되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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