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시시, 하다보니 "매우 짙고 선명하게"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시‘의 사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사방이 시퍼렇고 시뻘겋고 시커멓고 시허옜다. 팔방이었다면 시퍼렇고 시뻘겋고 시커멓고 시허옇고 시꺼멓고 싯누렇고 싯멀겋고 시뿌옜을 것이다. 온갖 시들이 모여 시뿌예진 곳, 다름 아닌 시의 한복판이었다. 한바탕 놀았는데 다시 미궁에 빠진 느낌이었다. 들어오기도 어렵지만 나가기는 더 힘든 거리가 바로 여기였다. 그제야 떠올랐다. 스무 개가 넘는 시의 뜻 중 첫번째는 "마음에 차지 않거나 못마땅할 때 내는 소리"라는 사실을 감탄사 시와 함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 시의 사거리에서는 헤매지 않을 도리가 없군."


오.발.단: 일기죽일기죽

오늘 발견한 단어는 ‘일기죽일기죽‘이다. 기억의 수면아래 잠자고 있다가 일기 때문에 급작스레 깨어난 단어이기도 하다. "입이나 허리 따위를 이리저리 자꾸 느 - P54

리게 움직이는 모양"을 가리키는 말인데, 말과 걸음이 빠른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동작이기도 하다. 연상은 나를 또다시 ‘이기죽이기죽‘으로 이끈다. "계속 밉살스럽게 지껄이며 짓궂게 빈정거리는 모양"을 뜻하는 말이다. 뜻을 읽는 동안 묘하게 기분 나빠지는 단어다. 일기에서 일기죽일기죽으로, 일기죽일기죽에서다시 이기죽이기죽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일이삼 같아서 정겹다. "일이는 알겠고 삼은 어디 있는데?" 누가 묻는다면 ‘실기죽샐기죽‘이라는 단어를 말해주어야겠다.
"물체가 자꾸 한쪽으로 천천히 조금 기울어지거나 쏠리는 모양"을 일컫는 단어다. 이번에는 내가 물을 차례다. "일기, 일기죽일기죽, 이기죽이기죽, 그리고 실기죽샐기죽의 공통점은?" 끊이지 않고 반복된다는 거. 날마다, 자꾸, 계속, 조금이라도! - P55

극중 남자 선배 D는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비중 있는 역할은 아닌 셈이다. 그가 던진 농담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비중을 낮춰주는 데 농담의 진짜 역할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비중의 비장함을 외면하는 농담이야말로 최고의 농담일 것이다. 중요성과 중요도에 사로잡힌 현대인에게 틈을 내주는 농담 말이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귀중하고 요긴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잠시나마 벗어날수 있다. 스스로 무너지는 농담은 상대에게 다가가겠다는적극적인 신호다. 그가 펼쳐 보이는 빈틈을 흔흔히 온기로채워주고 싶어진다. 뼈 있는 농담은 상대의 빈틈에 정확히명중한다. 농담을 듣는 사람은 웃으면서도 뜨끔해졌음을부인할 수 없다. 뼈 있는 농담을 듣고 "나는 치킨도 순살로만 먹는데!"라고 너스레를 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그 둘은 격의 없는 ‘농담 관계‘가 된다. 이처럼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농담도 있다.


농담으로 인해 삶의 농담도 변한다. 지루한 일상에 던져진 날카로운 농담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바쁜 삶에던져진 농담은 숨을 고르게 한다. 농담을 딛고 기지개를 켜 - P61

거나 농담에 기대 설핏 옷을 수도 있다. 농담을 징검돌 삼아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갈 수도 있다. 농담이었을 뿐인데, 돌아보니 농담이 농담으로 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실 있는농담으로 내 안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럴 때 농담은 꼭 진담같다. 확실히 나는 농담을 사랑한다.


오. 발. 단: 거시기

오늘 발견한 단어는 ‘거시기‘다. 거시기는 살아 계실 적 아빠가 즐겨 쓰던 단어이기도 하다.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라는 뜻에 걸맞게, 아빠는 해마다 더 자주 거시기를 찾았다. 눈치 게임을 하듯, 스무고개를 넘듯, 이심전심을 확인하듯, 간혹 어떤 거시기는 바로 알아맞힐 수 있었지만, 대다수 거시기는 내게 너무 멀었다. 아빠가 아는 사람을 내가 다 알지는 못했고 아빠가 가리키는 사물은 눈앞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독심술을 발휘하듯 미간을 찌푸린 채 ‘거시기‘를 찾는 데 골몰하고 있으면 아빠가 말했다. "이 상황이 참 거시기하 - P62

네?" 어쩌면 작년 이맘때 출간된 내 여섯번째 시집 없음의 대명사는 별별 거시기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P63

인터뷰


수경 누나의 첫 메일을 받은 것은 2011년 11월 26일 금요일이었다. 새벽 네시오십오분에 온 메일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은아, 불면증이 나의 징글징글한 벗이라 이 시간에도 나는 깨어 있네." 메일을 다 읽고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독일 뮌스터의 새벽을 떠올렸다. 거기도 춥겠지, 스산하겠지, 중얼거리며 메일은 이렇게 끝났다. "말의 명증과 말의 허위를 우리, 보듬자."
이듬해인 2012년 5월 12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저녁 일곱시 사십분에 독일에서 메일이 도착했다. 메일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은아, 엘 그레코의 그림이 전시되는 뒤셀도르프에서 우리 은이가 이 무참한 색의 축제를 보면 무슨말을 할까 생각했다." 한 달쯤 전 내 첫 산문집인 『너랑 나랑 노랑이 나왔는데, 고맙게도 책의 추천사를 써준 누나였다. 메일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오래 사유하자." - P89

허수경‘이라고 쓴다. 조금 있다가 "허수경"이라고 발음해본다. 쓸 때는 그저 먹먹하던 것이 발음하니 목울대까지 가득차오른다. 액체에 가까운 마음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각각의 마음들이 돌고 돌아 미안함으로 모인다. 누나 생전에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이 많았다.
이제는 하고 싶었던 말, 꼭 해야 했을 말이 되었다.


지난 10월 3일, 허수경 시인이 운명했다. 소식을 접한 많은 이가 슬퍼했다. 공중으로 손을 뻗기도 했다. 뭐라도 잡을 것이 없을까 싶어서였다. 나는 밤새 허수경의 시집을 읽었다. 웃고 있는 시들도 슬펐다. 울고 있는 시들은 통곡으로 다가왔다. 혼자서 얼마나 아팠을까. 홀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엇보다 누나는 거기에 잘 있을까. - P90

2011년, 허수경은 한국을 두 번 찾았다. 연초에 다섯번째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들고 고국을 찾았던 그는 연말에 장편소설 「박하」 출간 시기에 발맞춰 다시 한국땅을 밟았다. 모르긴 몰라도 십 년 동안 어지간히 그리웠을것이다. 돌아와서 여전한 것과 사뭇 달라진 것, 완전히 변한것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전의 마지막 방문이 될 거라는 사실을 감히 예감할 수 있었을까.


그리움이란 것은 한없이 어렴풋하고 아슴아슴하다가도, 북받쳐오르면 쉽게 진정시키기 어렵다. 잊고 있던 어떤 기억이 퍼뜩 떠올라 심신을 단단히 옥죄는 것처럼, 그리움은 한번 고개를 들면 걷잡을 수 없이 우리를 삼키려든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그리움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물리적으로 뗄 수도 없다. 그리움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나는 지금 그리움을 계속하는 중이다.

처음 허수경을 만나던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부터 그의 두 눈에는 그리움이 그렁그렁 들어차 있었다. 그가 - P91

활짝 웃을 때 속으로는 꺼이꺼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보는 사람이 뭉글할 정도로 두 눈이 투명했으므로, 그에게 다가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숭늉처럼 푸근하고 따뜻했다. 그저 약간의 너스레면 충분했다. 마음에 담은 이들을 정성스레 보듬고 도닥이는 게 바로 허수경이었다. 그 앞에선 절로 "폐병쟁이 내 사내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나 "낯익은 당신"(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이 되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불가항력적으로 애틋해졌다. 불가능하게 애처로워졌다. 그때마다맵싸한 바람이 불어왔다. 2018년 가을, 그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코끝이 시큰하다. 아리다.

허수경이 머물던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여섯 번이나 그를만나는 호사를 누렸다. 첫 만남 때 ‘선생님‘이었던 허수경은다음에는 자연스레 ‘선배님‘이 되었고, 세번째 마주할 때 나는 그를 자연스럽게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왔던 것처럼, 그 호칭은 불쑥 튀어나왔다. - P92

낯설어지면서 갱신되는 어떤 것을 생각하니 근사하다.

"모국어뿐만 아니라 모국적인 모든 상황에서 낯설어지게 될 때, 어떻게든 새로운 형식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새로운 예술형식은 한인간의 형식이 변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거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형식이 낡아졌다고 느끼면, 의식적으로 그것을 갱신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때가 닥쳤을 때, 나는 가장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거고."

결국 누나만의 시를 발견하기 위해, 누나만의 시를 쓰기위해 떠난 셈이네.

"한 사람의 재능은, 슬프게도 그것을 가진 사람이 다 알수 있는 건 아니야. 그걸 잘 모르니 우리는 참, 우릴 쉽게쓰는 것 같아. 나는 시라는 문명의 한 장르에 목숨을 건대목이 있어. 그래서 떠났지. 정처 없어졌지. 그래서인지 인생의 어떤 순간을 시에 거는 사람을 보면 좋으면서도 쓸쓸하다." - P97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 일부를 읽으며 약력 보고를 갈음하고자 합니다.


개나리 노란 한숨,
저 바람이 스치며 간다.

노란 한숨이 아직은 작게 내려오는
봄빛 아래에서

바람이 스친, 아린 자리를 쓰다듬으며
허공에 머물러 있다.

사랑한다, 라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 P114

오. 발. 단: 새봄

오늘 발견한 단어는 ‘새봄‘이다. 수경 누나는 봄이라고말한 뒤, 꼭 새봄임을 덧붙이곤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새봄은 있지만 새여름, 새가을, 새겨울은 없다는 사실을. 새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번째는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첫봄", 두번째는 "새로운 힘이 생기거나 희망이 가득 찬 시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가 처음 봄이라고 말할 때는 새봄의 첫번째 뜻으로, 다음에 힘주어 말할 때는 새봄의 두번째 뜻으로 얘기했던것 같다. 겨울을 보내고 첫봄을 맞이할 때, 새로운 힘과 희망을 양손에 하나씩 사이좋게 쥐고 시작하라고, 오늘은 국제 간호사의 날, 보살피고 돌보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힘과 희망을 심어주는 일일 것이다. - P115

오. 발. 단: 비거스렁이

오늘 발견한 단어는 ‘비거스렁이‘다.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가 오기 전의 날씨와 비가 온 후의 날씨 사이에 "거스르다"가 있는 셈이다. ‘비거스렁이하다‘라는 동사로활용되기도 한다. 문제는 일상에서 "한바탕 쏟아붓더니 비거스렁이하네"처럼 이 단어를 구사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상대는 십중팔구 "비거 뭐?"라고 되물을것이다. 몰라서 쓰는 시처럼, 알아도 쓰지 못하는 단어가 있다. - P122

봄과 어울리는 동사를 떠올린다. 열다, 싹트다, 자라다, 시작하다. 피어나다..... 앞 문장에서 사용한 ‘떠올리다‘ 또한 봄과 어울리는 동사다. 봄의 생장력 앞에서 청춘을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으니까. 결심이 비로소 움직임으로 ㅇ어지는 시기가 어쩌면 봄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봄꽃을 선물한다는 것은 시작을 응원하겠다는 각별한 마음을 건네는것이기도 하다. 봄이 오면 으레 새기는 문장이 있다. 꽃이든 사람이든, 지기 전에 먼저 피어야 한다는 것. 봄에 선물하기 좋은 꽃을 살피는 일은 피자고, 함께 피어나자고 미리속삭이는 일이기도 하다. - P130

오. 발. 단: 발밤발밤

오늘 발견한 단어는 ‘발밤발밤‘이다. 상자를 든 아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떠오른 단어다. 발밤발밤은 "한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 모양"을 가리키는 부사다.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 ‘발맘발맘‘도 있다. 발밤발밤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유가 필요하다. 바람을 일으키는 동작보다는 바람 쐬는 자세와 더 어울리고, 도착을 목적으로 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움직임 그 자체에 집중하는 몸가짐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밤‘이 두 번들어가 있어서일까. 가로등을 벗 삼아 발밤발밤 산책을 나설 때 해묵은 감정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만큼 밤이 더 어두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 P254

그런데 감각적‘이라는 말이 늘 긍정적으로만 사용될까? 그것은 세련되고 말끔한 무언가를 가리킬 때만 사용되는것일까. 저 단어가 자극성이나 도발성을, 나아가 ‘생각 없음‘ 이나 사려 깊지 않음‘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게 수용되는 어떤 단어가,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혼란과 공포를 야기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맞닥뜨리는 온갖 감각들을 떠올려보라. 그때의 감각은 의도치 않게 열리는 것이다. 개중에는 기분 좋은 감각도 있지만 나를 당황시키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감각은 종종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감각적인 감각, 감각을 자극하는 감각. 별수 없이 나는 감각으로 되돌아간다.

감각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오감과 맞닿아 있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만지는 데서 찾아오는 느낌. 찾아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종의 느낌이 감각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감각의 세계 - P258

에 ‘그냥‘은 없다. 감각은 주저하는 법이 없다. 받아들이는데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말이든, 글이든, 생각이든 그것을 나만의 어휘로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언어화되지 않은 감각은 아직반쯤은 눈을 감고 있는 셈이다.

알아차리기 위해 준비하는 것,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것, 알아차린 것을 내 말로 붙잡아두는 것. 이것이 감각 작용이다. 감각은 흩뿌려져 있다가 어느 순간 발각된다. 발각된것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것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 이 순간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
‘잊다‘와 ‘잃다‘가 흔히 ‘버리다‘와 결합해 ‘잊어버리다‘와 ‘잃어버리다‘로 쓰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잊지 않고잃지 않는 마음은, 실은 ‘버리지 않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버리지 않는 사람만이 모은다. 모은 것을 가지고 유용하거나 무용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 P259

봄이 ‘해맑아지는‘ 계절이라면 여름은 ‘흐드러지는 계절이다. 가을이 ‘흐무러지는 계절이라면 겨울은 ‘허물어지는계절이다. ‘넘쳐흐르는‘ 게 기백이라면 ‘흘러넘치는 것은 기운이다. 넘칠락 말락, 흐를락 말락 하는 것, ‘희망‘이다.

‘하염없음‘과 ‘하릴없음‘은 없을 때만 발화하는 단어다. 없음을 ‘후회‘하는 것은 ‘한탄‘이다. 없음을 다시 있게 하는 것, ‘함께‘다. - P284

오. 발.단: 햇덧

오늘 발견한 단어는 ‘햇덧‘이다. 햇덧은 "해가 지는 짧은동안" 혹은 "일하는 데에 해가 주는 혜택"을 뜻하는 단어다. 햇덧에 마음이 조급해질 때가 있었다. 해가 지고나면 하루도 저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밤과 친해지면서 더이상 햇덧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으나 글쓰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햇덧을 보고 있다. 글이 안 풀리면 밖에 나가 햇덧에 의지해 걷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때 햇덧은 꼭 덧신 같다. 햇덧 아래서 걷다보면 어느덧 다시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햇덧은 덧나지 않는다. 해가 가도 해는 뜨니까. - P285

오.발.단: 잠비

오늘 발견한 단어는 ‘잠비‘다. 잠비란 "여름에 일을 쉬고 낮잠을 잘 수 있게 하는 비라는 뜻으로, 여름비를 이르는 말이다. 여름일을 하던 도중 소낙비가 내려 잠을 청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단잠이고 꿀잠일 것이다. 그때내리는 비가 단비고 잠비일 것이다. 봄비가 가고 잠비가 온다. 5월이 가고 6월이 온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온다. 시절이 가고 시절이 온다. 시의적절하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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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2002년 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있었다」 「없음의 대명사, 청소년 시집 「마음의 일.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 「다독임」을 썼다. 박인환문학상, 구상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대산문학상을수상했다. 작란 동인이다. - P-1

5월의 첫날, 오늘은 노동절이다. ‘근로자의 날‘보다는 ‘노동절‘이라는 말이 좋다.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이란 뜻이다.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다.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말을 들었을 때, 벌레는 늦게 일어나야겠네!‘라고 생각했던나다. 근로에 담겨 있는 부지런함이 사용자의 강요 같아서 어느 순간 거리감이 생겨버린 것이다. 부지런함의 미덕을 저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 순간 부지런해야 한다는 노동자의 강박은 필연적으로 삶의 여유를 앗아갈 수밖에 없다.


글쓰기 노동자로 산 지 오래됐지만, 어떤 이는 아직도 ‘쓰는 노동‘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듯하다. 몸을 써야 노동 - P12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전상의 노동은 "몸을 옮직여 일을 함"이란 뜻이다. 가만히 앉아서 글을 쓰는 모습은 얼핏 노동과 거리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아도 머리는 얼마나 바삐 움직이고 있는지 모른다. 뾰족하게 말하면 머리도 몸의 한 부분이고, 머릿속이라고 일컬어지는 뇌는 우리 몸의 사령탑이다. 한바탕 글을 쓰고 난뒤 어김없이 허기지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일은, 머리를 쓰는 일이다.

내처 한자리에 앉아 시를 쓴 적이 있다. 장장 세 시간 반동안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크게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를노동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100킬로바이트가 채 되지않는 문서의 크기가 노동의 양과 질을 낮잡는 기준이 될 수있을까? 누군가가 보기에 이 결과물은 성과처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맑은 눈으로 다시 볼 때 형편없는 시일 수도있고, 어쩌면 몇 차례 대대적인 수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직 책으로 묶여 나오지도 않은 상태다. 파일 형태로 USB에 담겨 있는 것이니까. 아직은 나만 알고있는 것이니까. 그때마다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해 생각한 - P13

다. 노동 전후의 변화가 분명한 일도 있으나 일의 성과를자기 자신만 알아차릴 수 있는 때도 있다. 글쓰기 작업이지난배하고 지난 조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을 질질 끌며 미루는 일이 많으니 지극히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제 일어나서 정말 몸을 움직여야겠다. 동네를 산책하는 일은 글쓰기 앞뒤에 있는 루틴이기도 하다. 산책도 내게는 노동에 준하는 일이다. 걷고 발견하고 사색해야 하므로. 이따금 길을 잃기라도 하면 평소 보이지 않던 것이 눈앞에 나타나므로, 그것이 또다른 쓰기로 연결될 것이다. 내친김에 일 년 가까이 연락하지 못한 친구에게 전화도 해야겠다. 잘 살아 있느냐고 묻는 대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어야지. ‘지금‘을 찌르는 대신, ‘지금까지‘를 어루만져야지.
이는 마음을 쓰는 일일 것이다.

모든 쓰기는 결국 마음 쓰기다. - P14

오발단: 봄물

오늘 발견한 단어는 ‘봄물‘이다. 봄물의 첫번째 뜻은 "봄이 되어 얼음이나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이다. 봄물에 발을 담그면 얼어붙은 정신이 퍼뜩 깨어날 것이다. 봄물의 두번째 뜻은 "봄철에 지는 장마다. 봄물이 져야 마침내 봄가물(봄철에 드는 가뭄이 해소될 것이다. 봄물의 세번째 뜻은 "봄의 싱싱한 기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봄물이 오른 나무를 볼 때면 진작 닫혀버린 성장판이 다시금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고 싶어진다. 어떤 뜻으로 사용하든 봄물이 새 길을 열어준다는 점만은 틀림없다. 5월은 봄물이 봇물 터지는 달이다. - P15

오. 발. 단: 군것지다

오늘 발견한 단어는 ‘군것지다‘다. 시 속에서 지는 일을 너무 많이 했더니 후유증이 길어서였나. 접미사 ‘지다‘로 끝나는 단어들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값지다, 멋지다, 건방지다, 기름지다, 덩굴지다, 그늘지다, 눈물지다, 주름지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지다‘ 안에 다 들어 있는 느낌이다. 그러다가 문득 ‘군것지다‘와 마주쳤다. ‘군것질의 군것일까‘라는 짐작이 맞긴 맞았다. 보통우리는 군것을 "끼니 외에 먹는 간단한 음식"으로 알고있지만, 이는 군것의 두번째 뜻이다. 군것의 첫번째 뜻 - P20

은 "없어도 좋을 쓸데없는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군멋지다"는 "없어도 좋을 게 쓸데없이 있어서 거추장스럽다"라는 뜻이다. 군것진 것에는 뭐가 있을까. 곧바로 미련이나 뒤끝, 혐오나 과욕 같은 게 떠오른다. 그러나군것질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다. 없어도 좋을 쓸데없는 것 덕분에 가없는 시간은 채워지기도 한다. 바스락바스락, 와그작와그작, 쪽쪽, 냠냠 등의 부사 친구들과 함께. - P21

삶을 이끄는 것은 동사임이 틀림없지만, 삶의 곳곳에서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은 부사 같다. "나는 네가 좋아"보다 "나는 네가 정말 좋아"라는 말이 더욱 강력한 것처럼 말이다. 단어는 뜻이 정해져 있고, 정해진 바대로 묵묵히 자신의 소용을 다한다. "난데없이‘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데려오고 ‘어칠비칠‘은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가지런히‘는 쓰는순간 나란해지고 ‘반드시‘는 발음하면서 결심이 더욱 단단해진다.

일상에서의 쓰임 때문에 운명이 달라진 경우도 있다. 너무 라는 부사가 그렇다. 이 단어는 본디 "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뜻이었다. 언뜻 느끼기에도 부정적 의미가 가득 담긴 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좋다" "너무 맛있다"처럼 긍정의 상황에서도 ‘너무‘를 사용한다. 2015년 이사분기에 ‘너무‘는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로 뜻의 외연이 넓어졌다. "너무 예쁘다"와 "너무 싫다" 를 모두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너무 추운데 너무 행복해"처럼 한 문장에 ‘너무‘를 두 번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 P27

생의 마지막에 만날 부사가 결국‘이 아닌 ‘마침내‘이기를바란다. ‘결국‘은 닥치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 발. 단: 어찌씨

오늘 발견한 단어는 ‘어찌씨‘다. 어찌씨는 부사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발음할 때 이미 의미가 한가득 느껴져쓸 때마다 왠지 흐뭇하다. 명사는 ‘이름씨라고 하고 대명사는 ‘대이름씨‘, 수사는 ‘셈씨‘라고 부른다. 동작이나 작용을 일컫는 동사는 ‘움직씨‘라 일컫고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는 ‘그림씨‘라 불린다. 관형사가 ‘매김씨‘로 자리매김할 때 감탄사는 ‘느낌씨‘로 흐느낀다. 퇴고할 때 마지막까지 고심하게 하는 조사는 ‘토씨‘라고 부른다.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의 바로 그 토씨가 맞다. 아홉 개의 씨를 모았으니 이제 심을일만 남았다. 씨를 심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싹트는 것은 아니다. 알아서 자라 열매를 맺는 씨도 없다. 아, 어렵고도 정직한 글 농사여. - P28

오. 발. 단: 간곳없다

오늘 발견한 단어는 ‘간곳없다‘다. 짐작할 수 있듯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온데간데없다"라는 뜻을 갖는다. 일상의 크고 작은 유레카 속에서 당장 다음날까지, 넉넉잡아 이듬해까지 기억나는 유레카는 거의 없다. 정보 위에 정보가 덮인다. 고해상도 영상은 초고해상도 영상 뒤로 사라진다. 역치도 덩달아 높아지기만 한다. 땅속에서 피어나지 못한 싹처럼, 아이디어는 머릿속 어딘가로 숨어버린다. 금세 간곳없어진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간곳없기에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자취를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의 행방이 늘 묘연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오늘은 대체 휴일, 휴일이야말로 눈 깜짝할 새 간곳없어지는 게 아닐까.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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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직 저 하나만을 위해 마련된, 제 일생 중 결코 흔치 않을 이 자리를 빌려, 저는 우선 저와 함께 본 명신고등학교의 설립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락을 같이 해온 여러 교육 동지 여러분, 그리고 우리 명신의 후원자이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명신을 아끼실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본교의 오늘이 있게 한 주역이신 강춘득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교직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외손 바닥은 울지 않는다는 말처럼, 저의작은 마음이 싹터 오늘의 명신이 있게 된 데에는 크든 작든 이 모든 분들의도움이 있었음을 저는 잘 알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잊지 않을 것임을다짐하면서 그 한 분 한 분들의 소중한 마음들을 평생 간직하고자 합니다.
돌이켜 보면 1983년 7월 2일 기공식 날,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논과 밭뿐인허허벌판이었던 이 초전 벌에 본교 건립을 위한 첫 삽을 꽂고 난 이후, 지나온 8년의 세월은 저로서는 일생 중 가장 뜻있고 즐거운 하루 하루였습니다. - P197

특히 본교가 처음 문을 열었던 1984년 3월의 첫 입학식 날은 마침 철 늦은 서설이 내려 본교의 개교를 축하해 주었고, 힘차게 교기를 흔드시던 강극영 초대 교장 선생님의 모습과 의지에 넘치던 젊은 선생님들의 활기찬 모습, 그리고 이 학교의 1회 졸업생이 되었던 그 학생들의 총명한 면면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 중에도 그때는 본관 건물이 아직 반쪽밖에 완성되지 않았고, 운동장은 아직 채 다듬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본교에 배정된 학생들은 신설 학교의 어설픈 모습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적잖이 가졌고, 학부모들 또한 우려를 감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 본교는 외형과 내실을 충실히 갖추어 본관 건물이 완성되고, 틈틈이 심었던 수목이 자라고, 그와 함께 학생들도 건강히 자라 대학 진학 면에 - P197

서도 기존의 명문을 능가하는 결실을 맺어 왔으며, 독립 도서관이 완공되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체육관 겸 강당이 완성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 8년이 저에게 힘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평소 하고자 했던일이고 그런 만큼 보람도 있었고 그 나날들은 곧 기쁨이 되어 저에게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저는 원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오직 가난 때문에 하고 싶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한약업에 어린 나이부터 종사하게 되어 작으나마 이 직업에서는 다소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욕심을 감히 내게 되었던 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 즉, 내가 배우지 못했던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 P198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전후로 해서 본 명신고등학교는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 - P198

해 보면 지금의 본교는 제 전부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의 신조는 앞서 말씀드렸듯, 제가 거둔 금전적 이득은 제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필요 이상은 절대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 근검 절약의 결과로 쌓이고 쌓인 것이 바로본교인 것이고 또 그것은 금전적으로도 저의 전 재산이며, 정신적, 상징적으로도 제 전부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버려두고떠나는 이 자리에 서고 보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라 해서 아깝고 서운한 느낌이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마음은 향후의 본교에 대한 더 한 층의 애정으로 키워 나갈 생각입니다. - P199

마음은 향후그리고 다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새로운 것을 쌓아 올려 볼 생각도 해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또 반대하고 나무라는 의견이 있음을 저는 알고있고, 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학교의 공립화만이 학교의 장래를 위한 최선의 방책인가 하는 것이며, 또 본교가 가졌던 명문사학으로서의 긍지, 명신인이라는 그 따뜻한 울타리가 엷어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일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아픔이 크다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뿐인 것입니다. 제가 계속 이 학교를움켜쥐고, 지원을 나름대로 해 나간다 하더라도 저의 생전이나 또는 사후에저와 또는 저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본교의 모습 또한현재의 발전적인 것을 영원히 지속되리란 보장 또한 희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공립화의 길을 걸어야 할 수밖에 없다면 시기는 바로 이때가가장 좋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곧 학교가 완전히 정상 궤도에 들어서 저의 큰지원 없이도 운영이 되게 되었고, 학교의 발전 또한, 어느 정도 탄력이 붙었기에 이제 제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시기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하는 것 - P199

입니다.
이러한 사정들로 해서 저는 일단 이 학교를 떠납니다마는 한 가지 죄송스럽고 가슴 아프게 생각되는 것은 바로 본교의 교직원 여러분들께 본의 아닌누를 끼치게 된 점입니다. 제가 이분들을 초빙할 적에는 본교에서 교육의 씨를 뿌리는 평생의 고락을 같이하자 하였고, 그러한 저를 믿고 본교에 오신분들이 대다수일진대, 이제 그분들께 저는 실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분들 또•한 생활환경이 달라짐에서 오는 제반 정신적 또는 물질적 손실을 보게 된것입니다. - P200

세상 일이란 게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저로서는 개인의 일을떠나 공익을 앞세운다는 것이 그만 교직원 여러분들께는 송구한 일이 되고말았습니다. 거듭 죄송하다는 뜻을 밝히면서 교직원 여러분들의 앞날을 위해서는 저는 또 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강구해 왔고, 또 앞으로 할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이일을 위해 진력할 것을 다짐 드립니다. 아울러본교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신 그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함께 올립니다. 그리고 우리 명신의 많은 졸업생 및 이 자리에 나온 재학생 여러분들도 다소 서운한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사립만이 가질 수 있는 전통과 그 긍지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이며, 영원히 변치 않는 모교를 가지고자 하는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들은 본질적으로 본교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며, 그 애정은 곧 개인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그 마음들을 계속 간직해 달라고 오히려 당부하고 싶습니다.
학교의 체제가 다소 달라진다 하여도 우리의 모교는 영원히 우리의 모교인 - P200

것입니다. 변함없는 애정으로 늘 모교를 생각해 주시기 바라며, 또 모교의 창학이념인 ‘명덕신민‘의 정신을 영원히 간직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누이 들어아시겠지만, ‘명덕은 인간의 본성인 맑고 깨끗한 성품을 늘 밝히고자 하는 것으로 현세의 도처에 자리 잡은 모든 더러운 것과 그것에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겠고, 그럼으로써 나날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자는뜻이 바로 신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덕신민의 뜻이 우리 학교의 교훈인 성실과 결부될 때, 여러분들의 앞날은 창창히 열려 있다고 저는 감히 장담하고 싶습니다.
거듭 당부하건대, 부디 명덕신민의 뜻을 굳게 붙드시고, 성실로써 실행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모든 것을 남겨 두고 홀연히 떠난다는 자리의 인사가너무 장황하게 된 것 같습니다. 구구한 사정 이야기가 되었으나 저의 심정을 - P201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것이기에 널리 해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우리멩신과 인연을 맺은 모든 분들의 앞날에 더 많은 성공과 결실이 있기를 기원드리면서 이만 떠나는 인사말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1991년 8월 17일
학교법인 남성학숙 이사장 김장하


퇴임 인사말 중 우선 그가 학교를 설립한 이유와 헌납의 이유는 이문장에 압축돼 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전후로 해서 본 명신고등학교는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 P202

즉,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어 왔지만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법,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거나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여태전(1961~) 전 상주중학교 교장이 2022년 2월 4일 김장하 선생에게 세배를 드리고 난 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있다.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가 "명신고 이사장으로 계속 계시면서 훌륭한 선생님들 든든한 울이 되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어찌 그리 쉽게 공립으로 전환해버렸습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그때만 해도 한약방으로 돈도 많이 벌어 학교에 큰 도움이되었을지 몰라도, 나중에 나이들어 그럴 형편이 못되면 괜히 사사로운 욕심이 생길까 두려웠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못난 사학 이사장이 되어 선생님들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려 들 거고, 그렇게 되면 처음 내가 학교를 세우려고 했던 첫마음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던 거요. 교육이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사업을 하려면다른 일로 해야지, 학교를 갖고 사업하는 마음으로 하면 큰일 나는겁니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그냥 국가가 맡아 달라고 내어놓은 겁니다." - P203

어쩌면 김장하 선생에게 받은 돈을 갚은 사람은 여태훈 대표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이엠에프 이후 시기였다면 남성당한약방도 어려울 때였다. 아이엠에프를 계기로 한약방도 손님이 뚝 끊겼으니 말이다.
그냥 아는 사이라고 그런 큰 돈을 차용증도 없이 줬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진주시민의 문화공간으로서 진주문고의 공공재적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에게 그런 숙제를 주신 거죠. 자기는 부담감을 준 줄을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어쨌든 큰 숙제로 다가왔어요."
여태훈 대표에게 김장하 선생은 어떤 존재일까?
"한겨울에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이 몽롱할 때 정수리에 퍼붓는 한바가지 찬물 같은 분이죠. 정신이 혼미하거나 제가 중심을 못 잡을 때그분이 마치 뒤에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리저리 휩쓸리고 이리저리 계산하다가 제가 그 방향을 잃었을 때 또는 판단이 흐려져 잘못된 길로 가는 걸 막아주는 브레이크 같은 분이 김장하 선생님이죠." - P244

이듬해 5월 남성당한약방 폐업을 앞둔 2021년 12월 재단법인 남성문화재단이 해산절차를 밟았다. 남은 재산 34억 5000만원도 모두경상국립대로 이관됐다. 그중 현금이 6억 5000만 원, 서경방송 주식2만주(28억 원 상당)였다.
절차는 모두 끝난 상태였으나 경상국립대는 굳이 ‘남성문화재단 재산 수증증서 전달식‘을 열고자 했다. 행사를 열어 감사를 표시하고감사패라도 전달하며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새기겠다는 것이다. 행사는 12월 9일로 잡혔다.
이보다 앞서 12월 4일 현장아트홀에서 마지막 진주가을문예 시상식이 열렸다. 남성문화재단이 해산하면서 가을문예도 자동 중단된다. 제27회가 마지막이었다.
이사장 직함으로 하는 마지막 인사말을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굵은 글씨체로 출력된 제목은 ‘모든 인연이 소중했습니다‘였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무엇인가가 기다려졌습니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시 구절이 있지만, 가을이 되면 늘 기다려지는 인연이 있었던 겁니다. 그 인연은 울긋불긋 단풍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서른 - P279

해 가까이 동안 늘 그랬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글을 생산하는 친구들이 있어 그랬고 그것이 진주가을문예라는 인연으로 맺어졌습니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속에서도 글쓰기는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번창했습니다. 문학은 모든 공포에서 빨리 벗어나게 하고, 힘과 지혜라는선물을 인간한테 안겨주고 있습니다.
올해도 진주가을문예에 문을 두드린 문우들이 많았습니다. 당선의 영광을 안은 정월향 시인과 기명진 작가한테 축하를 드리면서 응모자 모두한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통해 많은 인연들을 만났습니다. 수상자들이 울면서 소감을 밝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수상자들이 가족처럼 우애 있게 지내는 걸 보고 또 다른 가슴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전국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진주가을문예에 보내는 애정도 컸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진주가을문예가 올해까지, 27회째 운영하고서 막을 내리게 되어저 또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동안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또 다른 문학공간에서 만남이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2021년 늦가을에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김장하" - P280

김장하의 유일한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는 명신고등학교 교지 《명신》 창간호에는 학생기자의 질문 중 이런 게 있다.
"이사장님의 인생관 혹은 생활신조를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김장하는 이렇게 대답한다.
"맹자(孟子)의 진심장구에 나오는 군자삼락(君子三樂), 모두 알죠? 그 중에서 제2락인 앙불괴어천(不愧於天)하고 부부작어인(俯不作於人)을 나의 생활신조로 삼고 있어요."
풀이하자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고개를내려 사람들한테도 부끄러울 게 없는 삶을 뜻한다.
그러면 제1락과 제3락은 뭘까? 찾아보니 이랬다.
1락은 부모구존(父母俱存) 형제무고兄弟無故), 즉 부모님이 모두살아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함이 첫째 즐거움이요.
3락은 득천하영재(得天下)이교육지(而敎育之), 즉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쳐 기르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 P349

이에 대해 이곤정 이사장은 "김장하 선생님이야말로 세 가지 모두를 실현한 분"이라며 "할아버지와 부모님을 잘 모신 것은 물론 형제까지 자신이 보살폈고, 하늘 땅 모두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으며, 수많은 장학생과 학교 설립을 통해 천하의 영재를 얻어 잘 길렀으니 다실현했다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3락 중 2락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고 대답한 것은 자신이항상 그런 자세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강호진 촬영감독이 국수를 좋아한다는 김장하 선생에게 우리밀 국수를 드린다는 핑계로 댁을 방문했다가 선생님이 좋아하시는말 한마디를 청해 받은게 있다. 「논어(論)」에 나오는 말이었다.
"인불지이불온人不知不)이면 불역군자호(不泰君子), 즉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군자가 아니겠는가" - P350

이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선생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나는 ‘생활신조‘나 ‘좋아하는 말‘이 아니라 ‘삶의 지침‘이 뭔지를물어봤다. 그랬더니 또 다른 대답이 나왔다. 바로 ‘기소불욕欲)물시어인(勿於人)‘이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살아가면서 이것 하나만 지켜도 세상에 싸울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사천에서 고등어파스타로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비란치아‘에 갔는데, 오너셰프 박영석(1978~) 씨가 김장하 선생을 방문했다가 받아온 글귀도 역시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었다.
명신고등학교 출신인 박 셰프는 김장하 선생을 
흠모하며 그를 닮으려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비란치아는 이탈리아어로 양팔저울을 뜻하는데, 김장하 선생이 가장 실현하고 싶어하는 형평(衡平) 세 - P351

상의 상징물이다. 1923년 진주에서 결성된 형평사(衡平)도 이 양팔저울을 조직의 상징물로 썼다. 그의 레스토랑 입구에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후원회원 가입원서와 관련 서적이 비치돼 있었다. 가게 앞간판에도 양팔저울 모형이 걸려 있다.
"김장하 선생님을 닮고 싶은데 도저히 제가 따라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목표를 바꿨죠. 김장하의 100분의 1. 아니 1000분의 1이라도 되자. 그렇게 100명의 김장하, 1000명의 김장하가 생기면 사람사는 세상이 좀 더 빨리 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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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이 가져서는 안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48세, 1991년 8월 17일 명신고등학교 국가 기증 선언 및 이사장 퇴임식에서 김장하가 한 말이다. 여기에 그가 장학사업을 비롯한 재산의 사회 환원을 결심한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언제부터, 얼마나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지원했는지, 그 전체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학교재단 남성학숙 장학회를통해 공식 지원한 장학생 숫자와 명단은 학교의 공식 기록물 《명신30년>(2015)에 나와 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7년간 213명이었고, 그 중 21명은 졸업 후 대학 4년간(의과대는 6년)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았다. 재학생의 장학금은 입학금과 1년간 수업료 전액이었다. 또김장하는 학교 헌납 후 퇴임하면서도 5000만 원의 장학금을 추가로내놓고 떠났다. 덕분에 명신고등학교는 공립 전환 후에도 ‘명신장학회‘를 계속 운영할 수 있었다. - P105

지금까지 취재한 바를 바탕으로 김장하 장학금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장학금 수여식 또는 전달식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진도 찍지않는다.
② 성적보다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우선하여 선발한다.
③ 가급적 1회성이 아니라 졸업할 때까지 전액 지원한다.
④ 등록금뿐 아니라 생활비 등 각종 경비까지 지원한다.
⑤ 드물지만 재수생에게 입시학원비와 하숙비까지 지원한다.
⑥ 살 곳이 마땅찮은 아이는 아예 자신의 집에 들여 함께 살면서 자식처럼 키운다.
⑦ 그런 기록 자체를 남기지 않고 누가 물어봐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그렇게 지원한 학생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
앞서 남성당이 문 닫는 날 서울에서 찾아왔다던 그 장학생 김종명씨가 선생에게 말했다.
다.
"제가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선생이 이랬다고 한다.
"내가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 - P117

하고 있는 거야."
‘평범한 사람들?" 아! 그랬다. 돈·권력·명예보다 늘 ‘시시하고 소박한 삶‘을 강조했던 채현국 선생의 생전 말씀과 김장하 선생의 ‘평범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오버랩되는 장면이었다.

우종원(1961~)과 이준호(1962~)는 진주고등학교 동기생이다. 둘다 공부를 잘했으나 공납금을 제때 내지 못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1977년 1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러 "너는 참 운이 좋다"며 김장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음을 알려줬다. 둘은 그렇게 1학년부터 3학년 졸업까지 전액 공납금 지원을 받았다. 3개월에 한번씩 남성당한약방으로 오라 해서 찾아가면 김장하 선생이 점심을사주며 봉투에 공납금을 넣어줬다고 한다.
둘은 졸업 후 각각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생물학과로 진학했다. 김장하 선생의 장학 지원은 대학 졸업 때까지 계속됐다. 등록금뿐 아니라 생활비도 함께였다. 이준호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지원을 받았다. 우종원은 7년, 이준호는 9년 동안 장학금을 받은 셈이다. - P118

(...전략)  
저는 1965년 경남 하동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태어났습니다. 낡은 교복과 교과서일망정 물려받을 친척이 있어 중학교를졸업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있었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업사로서 번 돈으로 명신고등학교를 건립하여 경상남도에 기증하였고 수백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진주오광대복원사업, 경상대학교 남명관 건립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갚아라‘고 하신 선생의 말씀을 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법관의 길을 걸어온 지난 27년 동안 저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한민국헌법의 숭고한 의지가 우리 사회에서 올바로 관철되는 길을 찾는 데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선생의 가르침대로 제가 우리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길이라 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제가 헌법재판관에 임명되더라도 지금까지 간직해 온 저의 초심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 P137

"선생님은 늘 듣기만 하셨어요. 말씀이라곤 ‘학교는 어떻노?‘ ‘뭐필요한 건 없나?‘ 묻기만 하시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걸 들어주셨어요. 저는 선생님이 지어주신 한약도 여러 번 먹었죠."(이준호)
"선생님께서 과묵하신 것도 있지만 그때 젊은 저희들한테 해 주실말씀은 많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일부러 안 하신 것 같아요. 왜냐면 선생님이 베푸는 입장이고 또 젊은 친구들한테 자신이 뭔가 말씀을하시면, 좋은 뜻으로 볼 때는 어드바이스나 격려가 될 수도 있지만 부담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생님께서 굉장히 자제를 하신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우종원)
"제가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그게 전혀 저를 위축시키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그럴까봐 선생님이 배려를 해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자유롭게 학생운동도 할 수 있었던 거죠." (권재열)
"그러니까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승인해주신 거죠. 자기가 간섭하는 게 아니고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네가하고 싶은 걸 해봐라‘ 그렇게 하신 거죠."(우종원)
이준호 교수가 학문적 성취를 이뤄 언론에 알려졌을 때는 선생이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와 격려를 해주기도 했다.
"언론매체에 기사가 나온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요. 받았더니 ‘김장하다‘ 이러는 겁니다. 놀랐죠. 선생님 웬 일이십니까? 했더니 ‘세계적인 연구를 했더라. 축하한다‘ 그러셔 가지고 제가 너무 감사했습니다."(이준호) - P153

가난했던 한 시민운동가는 아들의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감일까지 마련하지 못하자 급한 마음에 염치불구하고 김장하선생을 찾아갔다. 빌려달라고 했다. 선생의 도움으로 등록을 마치고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가 빠른 시일 내에 갚겠습니다."
그랬더니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에게 갚을 필요는 없고, 다음에 당신처럼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그때 그 사람한테 갚으면 됩니다." - P155

1982년 39세의 김장하는 필생의 사회환원 프로젝트 고등학교 설립에 착수한다. 자신은 끝내 진학하지 못했던 고등학교를 직접 설립,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당시만 해도 진주지역 고교 연합고사에서 매년 낙방하는 학생이 5500여 명에 이를때였다. 학생은 많은데 수용할 학교는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김장하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배움터를 마련해 주어야 하겠다.‘명신 30년>, 163쪽)고 결심했다.
1983년 7월 학교 신축 기공식을 거쳐 1984년 3월 2일 신입생488명의 입학식을 열었으니 바로 학교법인 남성학숙 명신고등학교였다. 학교 설립 동기에 대해 김장하는 명신고 교지 《명신> 창간호 이사장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기라면 먼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군요. 첫 번째는 다름 아닌 저자신의 배움의 ‘한‘입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중졸에 그쳐야 했던, 가난에 쪼들리는 농촌생활의 그 한맺힌 과거, 지금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여러분은 그 배움에의 갈망을 잘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또 빈 손으로 사회에 뛰어든 나였지만 부지런히 일해서 약간의 재산을 모았어요. 이 재물을, 나는 내가 모았기에 영원한 내 재물이다 라는 관념보다는 이사회나 국가의 재물을 잠시 위탁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사회로 환원하기로 결심한 거지요. 이것이 학교 설립의 두 번째 동기라 할 수있습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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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날 함께 가기로 했는데, 제가 워낙 허약체질이어서 못 따라 올라가면 어쩌죠?"
그랬더니 김장하 선생 왈,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가면돼. "(모두 웃음)나도 그 자리에서 함께 듣고 웃었는데, 며칠 뒤 우연히 박노정 시인의 시집 「운주사』를 읽던 중 이 시를 발견했다.


사부작 꼼지락
ㅡ달팽이에게


사부작거리는 게 네 장점이야
있는 듯 없는 듯 꼼지락꼼지락
거리는 것만으로 아무렴
살아가는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지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황홀해
눈부셔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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