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이 잡혀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조지에게 전한 사람은아일린이었다. 바로 아일린이 밤마다 호텔 로비에서 감수하고있는 위험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일린은 스페인에서자신이 했던 경험들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걸 알게된다. 그 경험은 조지의 일반적인 지식, 아일린은 기여한 적도 관련된 바도 없는 지식이 되어 있다. 경찰이 "누구든 손닿는 대로 체포하고 있었다"는 건 아일린의 동료들 이야기였다. 퍼지고 있던 소문, 벨트에 폭탄을 술 장식처럼 매달고 라운지를 성큼성큼 걸어다니던 러시아인 스파이・・・ 모두 아일린이 조지에게 말해 준 것들이다. 아일린 자신도 ‘내 아내‘로 일반화되어 있다. 아일린의 모든 정체성과 행동과 지식이 멋대로 조지의 것이 되어 있다. - P270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언어를 아일린은 사실상 찾아낼 수가 없다. 아일린은 조지의 원고 페이지들을, 여백에 온통 휘갈겨진 자신의 글씨들을 노려본다. 아일린은 누구에게도 보이지않을 방식을 통해서만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마치 발판이나 뼈대처럼, 최종 결과에서는 사라지거나 가려져 버리는 무언가처럼. 아일린이 생각하기에 자기말소 성향이란 오직 그것을지닌 사람이 여전히 존재할 때만 효과가 있다. 자신이 한 역할이 보잘것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거기에 오히려 주의를 집중시키는 교묘한 방법으로서만 자기말소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리 없는데, 그런데, 여기 그것이 있다.
아일린은 유리 재떨이에 가느다란 담배를 내려놓는다. 누군가가 여기, 타자로 치고 있는 행간에서 날 발견할 일이 있기는 할까. - P271

그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남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다. 리디아는 자신이 오웰을 거절하면 ‘내숭을 떤다‘는 모욕을 듣게 될 거라고 예상한다. 리디아가 ‘그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그건 곧 유머 감각이 없다는 뜻이 될 터였다. 리디아는 명확히 말로표현할 수 없는 상황 속에 갇혀버린다. 그 상황에서는 사랑하는 친구의 병든 남편과 키스하는 것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보다 어째선지더 쉬운 일이 되어버린다. 그 키스가 아일린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어쩌면 죽음을 부르는 키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다. 아일린이 스페인에서 언제든 죽을 수 있었던 조르주 코프에게 자신을 하나의 위안으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리디아는 자신을 오웰이 누려 마땅한 기쁨으로 여긴다.
키스는, 특히 첫 키스는 그저 키스만은 아니다. 그건 여성이 헤쳐 나가야 하는 하나의 상황이 된다.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내숭 떠는 여자 아니면 걸레, 혹은 유머감각 없는 년 아니면 공범이다. 그 둘을 나누는 경계선은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나아가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비좁은 공간이다. - P283

그 부부중 남편은 우리 아버지처럼 의학 교수였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에 그 교수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몸을 굽히더니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무슨 말을, 농담 같은 걸 했을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이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다.
나중에 나는 그 일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머니도그곳에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가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는 걸 믿을수가 없다. 어딘가에 정신을 팔고 계셨던 걸까? 음식을 챙기느라고? 정신없이 날뛰는 개를 제지하느라고?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꼭 자루에 든 버섯들을 만지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는 웃었다. 비유를 좋아하는 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흔히들 말하듯, 그게 다였다.
나는 정신적 외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 상황은 너무도 공공연하게벌어졌기에 위협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가 받은 충격은 한남자가 자기 아내와 우리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우리 집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그래도 된다고 느꼈거나, 그래야 한다고느꼈거나, 어쩌면 둘 다였을지 모른다는 깨달음에서 왔다. 그리고그는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보이지않는 존재가 된다는 건 손끝에 버섯들이 와닿고, 귓가에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경험이다. - P288

변소 청소가 그 모든 일의 절정(혹은 밑바닥)이었다. 조지는몸이 좋지 않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아일린의 머릿속에 깊이새겨진 한순간이 있다. 일을 반쯤 했을 때, 조지가 저 창문을 열고 아일린을 불렀다. 아일린은 조심스럽게 몸을 빼냈다. 변기위로 넘쳐흐른 짙은 색 배설물에서 부츠 신은 발을 꺼냈다. 소용돌이치는 그 오물은 너무도 역겨웠고, 악취에 속이 뒤집힐지경이었다. 아일린은 조지가 뭐라고 하는지 들으려고 창문 쪽으로 네 걸음을 떼었다. 그러고는 거기 서 있었다. 조지의 녹색낚시용 장화를 신고, 장갑 낀 두 손을 옆으로 벌리고, 온몸이 똥투성이가 된 채로,
"차 마실 시간이잖아요. 안 그래요?" 그때 조지는 그렇게 말했다. - P334

아일린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었다. 조지가 자신을 위해 차를 끓여주려고 그 말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들지 않았다.
아일린은 딸기가 든 그릇을 창문 아래 싱크대 한쪽에 내려놓는다. 유리병들을 찬물에 씻고 헹구기 시작한다. 팔뚝에 팔꿈치까지 소름이 돋는 순간, 아일린은 깨닫는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그것이 어떻게 느껴지게 될 지 이해하는 거라고 아일린은 언제나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일린은 경험 자체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경험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머리가 채 깨닫기도 전에 피를 얼려버릴 수 있다. 아일린은 그 경험의 세부사항이 그렇듯 끔찍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조지가다른 여자들과 섹스하기 위해 자신에게 ‘허락‘을 구할 거라고는 그에게 강력해진 기분을 선사하는 건 그 여자들과의 섹스일까? 아니면 아일린이 느끼는 모멸감이 그런 효과를 내는 걸까? 모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아일린이 겨우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이 중요하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는 건 (아일린은 마지막으로 헹군 유리병을 마른행주 위다른 병들 옆에 놓는다) 결국 아일린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존재인 척하는 것이다. 아일린은 수도꼭지를 잠근다. 다정한 윌리엄이 필요하다. "흔들리는 마음의 균형을 바로잡는 워즈워스가. - P335

몽상가가 된다는 건 훗날의 작품이라는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예술가처럼 사고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자신이 남기고 갈 무언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닭들이 있고 폭탄이 터지지만 정해진목적은 없는 삶과는 달리, 이 꿈에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 오웰이 쓰는 모든 책은 불멸에 대한 착수금이 된다. 오웰은 유명한 작가가되겠다는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는 아일린이 필요하다. 인생이라는 끊임없이 흐르는 혼돈으로부터 원인과 결과를, 인물들과 그들의 운명을풀어내는 이야기꾼으로서 아일린이 지닌 재능이 필요하다. 삶을 변화시킬 수 없을 때는 아이러니로, 조각난 삶을 다시 한데 엮어내고싶을 때는 은유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아일린의 재능이 필요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일깨워줄 수 있는 로런스가 있었을 때, 아일린은 그런 재능 모두를 오웰에게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로런스가 사라졌다. 로런스의 죽음은 아일린에게서 삶에 대한 꿈을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른 모든 꿈이 그렇듯, 그 꿈 역시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 어렵다. - P362

로런스가 세상을 떠난 뒤로, 아일린은 매일 아침 깨어날 때마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다시금 쓰러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오늘 아침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 내일은 다시 그럴 것 같지만, 오늘은 아니다. 지금, 오빠와 함께 사라져버렸던 아일린의 일부는 되돌아오는 중이다. 눈을 뜨는 순간 아주 짧은 찰나지만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안다. 오빠를 남겨두고떠나는 순간에는 새로운 슬픔이 가슴을 찔러온다.
아일린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두가 누군가를 잃었고, 그 슬픔을 용감하게, 혹은 연극적으로 품고 살아간다. 대부분은 용감하게, 즉 드러내지 않은 채 품고 지낸다.
하지만 하혈과 어지러움, 복부의 통증과 온몸을 짓누르는 불쾌함을 숨기기는 더 어려워졌다. 한 달 전, 그웬은 아일린에게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단호히 말했다. 때로 아일린은 그저 침대시트 아래 놓인 하나의 곡선에 불과한 존재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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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을 만난 찰스는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키가 크고 여위고 팔다리가 길쭉했는데, 조금 어색해 보일 정도로 그랬다... 말을 잘하지 못하고 더듬었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보였다." 찰스가 생각하기에 오웰은 "의심의 여지 없이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아내가 필요했다.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으로서 말이다. 아일린은 이 말주변 없는 남자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게 도와주었다.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일린은 이미 오웰의 대변인이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아일린은 오웰이 "세상을 향해 뻗은 손"이었다. 
결국 찰스는 오웰을, "내 비서의 남편인 이 
민병대원을, 위아래가 붙은 자루 같은 황갈색 작업복을 입은 그를 존경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아일린 때문이었다. 그렇게 훌륭한 여자를 아내로 얻을 수 있었던 남자라면 어딘가 괜찮은 구석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아일린이 내게 보여준 남자는 단순히 얼간이 같은 모험가가 아니라 훌륭한 남자, 깊이가 있는 남자였다".
- P179

찰스 오어가 아일린을 흠모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오웰의 지휘관인 조르주 코프가 거대한 참모 차량에 타고 전선을 오가고 있다. 병사들의 소식을 가져오고 보급품과 우편물을 가지고 돌아가는그는 사무실과 참호를, 아일린과 오웰을 잇는 중개자다. 코프는 아일린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삶을 바꿔 놓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이어지는 사랑이다.
찰스는 코프를 이렇게 묘사한다. "덩치가 크고 육중하며 혈색이좋은 금발의 벨기에인으로, 유쾌하고, 아주 세련되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배운 남자였다.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아마도 직설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젊은 로이스만 빼고 그랬을 것이다. 로이스는 코프를 "비대한 인간" "배불뚝이" 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일린은 코프를 좋아한다. 모두에게 줄 꽃다발과 초콜릿을, 그리고 아일린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남자의 소식을 가지고 성큼성큼 사무실로 걸어들어오는 그 남자를. - P180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이 장면을 두 번 묘사한다. 한번은 자신이 노트와 팬레터 및 통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설명하기 위해서(그리고 답장을 하지 못한 것에 사과하기 위해서)다. 다른 한번은, 오웰은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아일린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게 놔둔다(물론 오웰은 그게 아일린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말이다). 오웰은 경찰이 "우리에게 히틀러의 《나의 투쟁》 프랑스어 번역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의심에 들뜬 나머지 황홀경에 빠졌다"고 쓴다. "만약 발견된 유일한 책이 그 책이었다면, 우리는 파멸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스탈린의 팸플릿 한 부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러고는 다소간 안심했다". 그곳에 머무르는 두시간 동안 "그들은 결코 침대는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내 아내가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내 귀에는 다 - P249

시 아일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매트리스 밑에 기관단총 대여섯자루쯤 있을 수도 있었는데, 베개 밑에 도서관 하나 분량의 트로츠키주의 관련 문서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죠. - 오웰은 아내의 용기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파멸‘을 피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함으로써 그 용기를 가려버리기까지 한다. 위험에 직면했던 건 아일린인데도 말이다. 오웰에게 이 일화의 주인공은 온통 남자들이다. "그럼에도 형사들은 침대에 손을 대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고, 침대 아래를 들여다보지조차 않았다. 나는 이것이 OGPU의 통상적인 절차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경찰이 거의 전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통제 아래 있었고, 그 남자들 자신도 공산당원이었을 거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스페인 사람이기도 했고, 여자를 침대에서끌어내는 건 그들로서는 조금 무리였다. 업무의 그 부분은 조용히 생략되었고, 그러면서 수색 전체가 무의미해졌다." 오웰에게 이 일화는 스페인 사람들의 ‘관대함, 그리고 일종의 고결함‘을 보여주는‘
작고 별난 사건‘이 된다.
오웰의 노트들은 사라졌다. 스페인 사람들은 고상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내 아내‘는 그곳에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250

오웰은 자신들을 본 코프가 "사람들을 밀치고 우리들 만나러 다가왔다. 그의 통통한 살구색 얼굴은 평소와 별로 다름없어 보였고, 그 불결한 장소에서도 그는 제복을 깔끔하게 유지하고용케 면도까지 하고 있었다"고 쓴다. "[코프는] 대단히 활기차 보였다. ‘음, 우리 모두 총살당할 것 같군요.‘ 그는 쾌활하게 말했다."
코프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대학살이 예상된다고 그들에게말해준다. "하지만 그가 살아날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지휘관이 보낸 편지다. 코프가 엔지니어로서 믿을 만한 사람임을 보증하고 그에게 동부 전선으로 돌아오라고 요청하는 편지. 하지만 그편지는 경찰에 압수당한 상태다.
오웰은 그 편지를 되찾으려고 경찰청으로 달려간다. 여러 전기작가들이 이 용기 있는 행동에 감탄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일린이 바로 그 직전에 정확히 같은 장소에 다녀왔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 P256

나는 로비 창문 너머로 폴리오라마 극장 건물을 바라본다. 오웰은 그곳의 옥상에 사흘 동안 앉아 있었다. 거기서라면 아일린의 방이 보였을 것이다. 전투가 멈췄을 때, 오웰은 주의를 끌지 않고 소총을 이곳으로 도로 가져와야 했다. 그는 바지의 다리통 속에 그것을 숨기고는 ‘몬티 파이튼 스타일로 걸어왔다. 어쩌면 아일린은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거리를 따라 100미터를 걸어 리볼리 호텔에 도착한다.
여기가 바로 코프의 검은색 참모 차량이 총에 맞았던 곳이다.
그날 아침 한 소년이 쓰러져 숨져 있던 곳.
나는 뒤를 돌아본다. 저 위에는 발코니가 있다. 아일린이 모든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을 발코니다.
저마다 독특한 모습으로 서 있는 플라타너스들이 너무도 아름답다. 가판대의 남자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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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회학자라고 규정할 자격이 사회학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김애란을 사회학자라고 부르는 게 사회학자에게도 그럴 테지만 김애란에게도 최선의 평가일 순 없다. 사회학만이 아니라 문학이라면, 재현은 표현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책에서도 ‘존재론적 단계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리한 재현 역량이 ‘경제적 인간‘의 내면을 탐사하는 표현 역량의 빛나는 지원을 받는다. R. G. 콜링우드에 따르면 남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악의 진정한 근원이고, 좋은 예술은 공동체를 제 마음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의식의 부패를 막는 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녕을 위해김애란의 안녕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 P-1

김애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했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바깥은 여름, 장편소설「두근두근 내 인생」 「이중 하나는 거짓말』, 산문집 『잊기 좋은이름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신동엽 창작상,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한무숙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최인호청년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달려라, 아비』 프랑스어판이
프랑스 비평가와 기자들이 선정하는 ‘리나페르쉬 상(Prix delinaperçu)‘을 받았다. - P-1

다섯번째 소설집을 냅니다.
그사이 여러 계절을 나며 사람과 풍경이 시절과 가치가 변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소설 속 인물처럼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인 양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먼 곳의 수신인을 향해 그들이 결코 들을 수 없는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상실이 무언지 모른 채 상실을 쓰고 부재가 무언지 모른 채 부재를 써왔다고 생각하면서요.

앞으로도 저는 여전히 삶이 무언지 모른 채 삶을, 죽음이 무 - P-1

언지 모른 채 죽음을 그릴 테지만, 때로는 그 ‘모름‘의 렌즈로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음을 새로 배워나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뒤늦은 깨달음의형태로 다가오니까요.

이 책에 깊은 말과 색, 숨을 입혀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전합니다. 여러 번의 계절을 나며 많은 게 변하는 걸 보았지만, 독자분들과 더불어 이 모든 분의 안녕을 비는 제 마음은변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점점 말과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마치 세상에 아는 말이 그것뿐인 양 가족의 이름만은 이따금 또렷이 발음하시는 아버지께, 딸이 새 책을 내고 신문에 날 때마다 누구보다 기뻐하셨던 아버지께, 이제는 그가 읽을 수 없는 책의 한면을 빌려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2025년 초여름
김애란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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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은 늘 소재를 찾아 떠도는 존재 같지만, 실은그 반대인 경우가 더 잦다. 말하자면 소재가 스스로 늦은밤 작가의 작업실 문을 두드리며 차랑차랑 열쇠 꾸러미 흔들리는 듯한 소리를 내는 일이 더 빈번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작가의 역량과 응대가 시험대에 오른다.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 실린 이야기들은 그렇게 찾아온 손님들에 대한 성실하고 치열한 기록이다. 묘한 것은 그 기록들이 소재의 서사학적 구조 자체에천착하기보다는, 그 구조를 떠받치는 사람들의 누추한 상처를 투시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건축, 영화, 메탈, 조형예술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사람들만 남는다. 반짝이는 ‘스테인리스스틸‘ 때문에 더 밝게 빛나는 상처들. 

이기호 소설가 - P362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충무로는 성해나라는 걸출한 배우를 잃었다. 그야말로 의문의 1패.‘
성해나의 작품은 실제로 그 인물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생각해낼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구체적이면서도 명료하다. 실로 우습고 담백하기까지 하다. 뛰어난 연기력이다.
책을 읽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명의 인물과 한곳의 장소를 검색해봤다. 완전히 속아버렸다. 질투 나는 재능이다. 성해나의 앞에서 나는 그저 "존나 흉내만 내는 놈" 에 불과하다. 가끔 대본을 보다 풀리지 않는 인물이 있다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해독을 요청해볼까 싶기도 하다. 천재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거늘.

박정민 배우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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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은 암탉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어린이 책을 써볼까 한다며 말을 꺼낸다. 135 하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한 끼 설거지를하고 다음 끼니 준비를 시작할 때까지 겨우 25분밖에 시간이 없다면서 말이다. 게다가 아일린은 논문 작업을 끝낼 거라고 계속 리디아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 마을에서 아이들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가장 가까운 학교도 4.8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일린은 집안일을 하고 ‘가게에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좀처럼 나지않았다." 그리고 아일린은 여위고 창백해져 있다. 어느 시점부턴가자궁내막증으로 보이는 증상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빈혈까지 생겼다. 리디아의 눈에 아일린은 이미 "거리가 얼마나 되든, 자전거를 탈 체력이 안 돼 보였다".  - P131

리디아에게 이런 일들은 친구의 "의심할 바 없이 상당한 심리학적 재능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어쩌면 아일린은 리디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이미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다음번, 그리고 가장 야심 찬 계획이
위층에서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아일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으며 타자로 치고 있다. 처음에는 오웰이 아일린의 의견을 경계했기 때문에 많은 의견을 내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아일린은 리디아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대신 노라에게 편지를 써서 런던에서 만날 시간을 정하자고 말한다. 너무도 간절히 보고 싶구나. 아일린은 쓴다. 그는 리디아가 분노에 차서 불시에 찾아오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여행 일정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 여행은 결코 성사되지 못한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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