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서성이는 사람 위수정
최근(이라고 말하지만 꽤 오래전부터)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채 거실 소파에 앉거나 누워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영화 보는것을 좋아하지만 요즘엔 영화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책을 펼쳐도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 같은 드라마를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딴짓을한다. 성인 ADHD인가? 정신과의사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건 아닐 거라고 한다. 나는 친구의 말을 믿을 수 없지만 굳이 병원에 찾아가 검사를 할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 ADHD라면? SNS에서 본 적이 있는데, ADHD 환자가 약을 먹으면 평소에 산만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길 수 있고 집중력도 놀라울 정도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약은 나를 - P221
위한 것이 아닌가? 내가 병원에 가겠다고 한다면 친구는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어찌되었든 가능한 한 약은 먹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 친구는 약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의사니까. 나는 내가 집중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약을 먹는 쪽을 택할 텐데, 하고 생각하며 공상의 나래를 펼친다. 일찍 잔다. 일찍 일어난다. 공복에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신 뒤 책상 앞에 앉는다. 글을 쓴다. 약 두 시간 정도 천자에서 이천 자 분량을 쓴다. 그렇게 글쓰기를 마친 뒤 기분좋게 스트레칭을 한다. 건강한 아침식사를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한다. 잔잔한 클래식이나 감성적인 인디밴드의 음악을 틀어놓은 뒤 강아지와 함께 각자의 식사를…… 평온하고 이상적인 루틴. 불가능할 것도 없는 일상.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잘 안 되는 일들이다. 역시, 오늘도 글렀어. 자기 전에 거의 매일하는 생각이다. 여행을 다니 - P222
여행을 다니면서 유독 눈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여성복(이라는 말도 언젠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저 스커트라든가 드레스 같은 말로만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을 잘차려 입은 남성들. 나는 왠지 그들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슈트 차림의 여성을 볼 때와는 또다른 감정이었던 것 같다. 사회적 편견에 맞서려는 좀더 깊은 의지와 용기가 전해진달까. 그리고 그중 어떤 이들은 외부의 시선 따위 개의치 않는 듯 수염을 기르고 가슴의 털을 그대로 노출한 채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자연스럽게 걷고 있기도 했다. 국내에서 - P222
도 크로스드레서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기이함과 존경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응원의 마음이 든 것은 내 안에 학습된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의 작용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마음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학습된 작용이든 뭐든 그것이 내 진심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입고 싶은 옷을 입고도 그 누구의 어떤 종류의 폭력에도 노출되지 않은 채 행복하고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비단 옷차림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거리낌없이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혹시 내게 배우자나 아이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까, 가정이 있는 이들이 사회적 규율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역시 소수의 말에 좀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까. 써야하니까. 아니, 그 이전에 국가나 사회가 ‘잘‘ 작동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을 본능적으로 의심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내안에 다양한 형태의 보수성이 있음을 종종 느낀다. 그런 것들은 의식적으로 떨쳐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노력하고 싶다. 잘 안 되더라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사람은 먼지만큼, 또는 우주만큼 다르다고 믿는다. - P223
「귀신이 없는 집에 나오는 코요와 관련된 설화를 들었을 때 나는 머리에 작은 등이 깜빡 켜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 경험은 잘 찾아오지 않는, 작가로서 언제나 고대하는 순간이다. 기나사 설화는 「귀신이 없는 집」보다 한 계절 앞서 발표한 단편소설 「눈과 돌멩이」의 초고를 먼저 읽어주신 허병식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내 소설을 읽고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하셨는데 그 순간 그동안 쓰고 싶었던 이야기의 구름들이 손에 닿았다. 쓸 수 있겠다는 기분. 작가로서 가장 설레는 순간. 한 작품으로는 그리고 싶은 인물들을 다 그리지 못해 두 편의 소설에 코요의 이야기를 담게 되었다. 하지만 두 편으로도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2부작보다는 3부작이 익숙해서인가? 코요에게서 뻗어나간 작품 하나를 더 쓰고 싶다. 연결되는듯 전혀 다른 독립된 작품으로, 언젠가는 쓸 수 있기를. - P224
사실 나는 시간을 낭비해도 좋다는 입장이다. 성실함이라는 것 역시 사회에서 요구하는 덕목 아닌가. 과거의 양반이나 귀족들의 행태를 보면, 성실함의 미덕은 피지배층을 부려먹으려는 지배층의 계략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함에도, 역시 나태하다는 생각이 들면 불안하다. 반면, 유용하게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면 안정감이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행인 점은 내게 유용한 시간은 문학을 할 때가 거의 유일하다는 것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나는 어쩌다. 이 시대에 글을 읽고 쓰는 시간을 유용하다고 느끼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전시회에 가거나 영화를 보는 일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당을 주는 일을 하는 것보다 유용하게 느껴진다. 나는 비경제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가진 유 - P224
일한 자부심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이 유용하다고 믿는 마음을 억지로 가지려 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그렇게 향한다는 것. 이런 마음은 타고난 것은 아닐 것이다. 문학의 가치를 높게 여기는 환경에서 자란 것(부유하게 자랐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경제적 이득보다 다른 가치를 더 중요하며 살아가는 동료와 선생님들이 내 주위에 있어서 나는 불안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문학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예술의 가치를 외면하지 않(못하)는 사회에도 빚을 졌다면 졌을 것이다. 작가는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서 서성이는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위치인 동시에 시대가 부여한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경계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의 내면에 감추어진 각자의 소수성을 찾아내고 관찰하는 것이 나의 임무. 그들이 오십대 남성이건, 십대 소녀이건, 나는 꾸준히 그들을 찾아나설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나는 성실한 작가가 되고 싶다. 힘을 주세요. 내일은 좀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기를. 오늘도 잠들기 전에 기도해본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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