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네 집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평소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분명 좋은 소식인데, 그것도 내가 아끼는 학생의 일인데, 마음이 허전하고 휑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거리에는 노란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내가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렸기 때문일까? 아니, 나는 시우를, 시우 어머니를, 그들이 사는 집을 내려다본 적 없는데. 그럼 마주보는 건 괜찮지만 올려다보는 건 싫은 걸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시우에게 좋은 일이잖아. 좀더 나은 일. 그런데도 시우 어머니가 ‘새집으로 계속 와주실 수 있느냐‘ 물었을 때 왜 흔쾌히 대답 못한 걸까? 지금보다 십오 분 더 멀어져서? 정말 그것 때문에? 순간 손에 쥔휴대전화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올 때 편의점에서 맥주 좀 사다줘.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 정류장을 한 - P130

참지나 있었다. 내년 봄, 남편과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여기서 얼마나 더 멀어지는 걸까? 옮기시는 곳이 어디든 4월까지는 과외를 하겠다‘고 말해야 했던 게 아닐까? 내가 경제적으로가장 쪼들렸을 때조차 시우네만은 수업료를 안 올렸는데, 그때 그냥 오만원 더 올려 받을걸…… 누가 누굴 걱정한 거지? 나는 발길을 돌려 정류장으로 돌아갈지, 이대로 그냥 좀더 걸을지 고민했다. - P131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안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 - P141

다시 어두워진 현관 한쪽에서 종이상자를 가만 내려다봤다. 집 우후, 집 주宙. 옛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큰 집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떤 존재들은 왜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못할까. 실은 돌아왔는데, 몇 번 돌아왔었는데 문이 굳게 잠겨있어서, 우리가 깜빡하고 닫아놓은 문만 한참 바라보다 떠난건 아닐까? ......사실 남편과 타임머신 대화를 나눴을 때 나는 남편이 우리만 아는 그때, 우리 아이를 구할 수 있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어쩌면 나를 배려해 일부러 엉뚱한 소리를 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왠지 그게 순도 높은 진심 같아, 앞으로도 같은 답을 할 것 같아 가슴 아팠다. 그리고 나는 손에 든 책을 보고야 비로소 종일 나를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그 낯선 당혹 앞에서 나는손에 쥔 책을 다시 어느 자리에 두어야 할지 몰라 불 꺼진 현관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2021년 어느 가을밤이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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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산책길에서 혼자 해변에 서 있는 갈색 말을 만났을 때는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말은해변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커다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길고 부드러운 갈기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검고 아름다운 눈은 깊이를 알 수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사로잡혔다. 난생처음 말을 ‘응시‘하면서 ‘경이‘를 느꼈다.
응시는 바라봄과 다르다. 정신과 시선을 하나의대상에게 집중하는 일, 내 앞의 대상에 대해 탐구하려는 태도, 감성과 이성을 동원해 의미를 알려는 시도다. 비인간을 응시하며 경이를 느끼는 것이 나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닐 테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돌고래, 날개를 펼치고 유유히활강하는 독수리, 초원에 앉아 바람을 맞는 여우를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경이라고 불러도 좋을것이다.
경이는 신비화와 다르다. 모르는 대상을 모르는채로 남겨두는 것이 신비화라면 경이는 지적 충동과 관련된 언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대상에깊은 첫인상을 받아, 그 인상 이후에 벌어지는 일을파악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경이라고 했다. 경이는 경외와 다르다.  - P187

가끔, 해변에 혼자 서 있던 말과 눈이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린다. 깊고 검고 아름다운 눈동자 앞에서나는 내 앞의 생명체를 ‘노동하는 동물‘이나 ‘착취당하는 동물‘로 보지 않았다. 나와 함께 그 시공간에 머무르는 타자, 나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하나의 장소를 점유하는 존재로 보았다. 내가 말을 바라보고 말이 나를 바라본다. 응시를 주고받던 그 순간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때 내가 어떤질문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인간은 비인간을 어떻게 공동의 세계에 초대할 수 있는가?‘ 나 또한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세계에 참여하는 동료로 상상하지 않았기에, 예기치 않은 이 질문은 비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흔드는 것이었다. - P195

인간의 필요와 이익이 최우선 순위가 되고 동물과환경을 단순한 자원으로 여기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 모든 이야기는 이상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멀지 않은 미래에 종간 연대가 우리의 실천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동물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지금 같은 모습으로 지속될 수없다. 또한 인간이 중심이라는 오랜 관념이 무너진시대에, 우리는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새롭게 사유할 수밖에 없다. 관계 없는 권리와 권리 없는 관계가아닌, 철저한 이용과 완전한 분리가 아닌, 관계를 전제로 관계를 가능케 하는 관계의 가능성을 상상하기. 이것이 나에게는 응시-경이의 순간에서 비롯한 사유와 정동이 남겨준 과제이자, 응시에서 시작해 응답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 P198

어느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뒷목과 오른쪽 견갑골에 날선 통중이 들이닥쳤다. 몇 년 주기로 찾아오던고질병, 경추추간판탈출증 Cervical HIVD이 급성으로악화된 것이었다. 예전처럼 병원에 다니고, 물리치료와 도수치료를 병행하고, 휴식을 취하면 나아지려니 생각했다. 무심코 나쁜 자세를 오래 유지했거나, 원고를 집필하느라 몸을 혹사한 탓이라고 짐작했다.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진통제도 소용없었다. 통증은 목에서 어깨, 등, 팔, 손목까지 퍼져나갔다. 뒷목과 견갑골에는 칼로 쑤셔대는 듯한 날카로움이, 팔에는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찌릿찌릿함이지속되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하루종일 누운 채로 시간을 견뎠다. 너무 오래 누워 있어 등과 허리가짓눌렸지만 자세를 바꾸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기에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나에게만 멈춰버린 시간을 체감했다. 잠에서 깨는 일이 다시 고통에 갇히는 일처럼 느껴져 아침마다 눈물 - P205

이 흘렸다.
MRI를 포함한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은 끔찍했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공황증세가 찾아왔다. 네 번이나 발작을 일으킨 날도 있었다. 예고없이 몰려드는 공포와 오작동하는 내면의 경보, 울음과 비명, 식은땀, 어지럼증, 경련, 과호흡, 몸부림이 반복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상태에 빠지자 우울과 비관이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 고통이 영원히 이어질지 모른다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검사 결과가 나왔지만 원인은 불분명했다.
경추디스크가 돌출한 데 더해 흉추 1번디스크가 추가로 손상된 것을 확인했지만, 거동을 불가능하게할 만큼 결정적 원인은 발견하지 못했다. 의학적 진단과 체험된 고통 사이의 괴리는, 통증을 증명하는 - P206

일의 불가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원인이 불분명하다‘는 말은 ‘너는 네가 호소하는 것만큼 아프지 않다‘는 부정으로 들렸고, 나는 ‘언어화할 수 없는 통증‘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신경차단술과 재활치료를 병행하며 와병생활을한 끝에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이 경험은 나에게 깊은 파장을 남겼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불안속에 살아왔다. 언제 통증이 다시 나를 덮칠지 몰라서, 그 통증이 나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파괴할지 몰라서, 무엇보다 내가 통증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못할지 몰라서.


통증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그리고 통증이 다시찾아올까봐 불안해할 때도 나는 이 경험을 어떻게언어화할지 고심했다. 메모장에는 ‘뒷목을 도끼로내리치는 느낌‘ 같은 문장이 적혀 있지만, 이는 증상을 진부하고 과장된 비유로 기술한 것뿐이다. 통증을 쓰는 일은 왜 이토록 어려운가? 우리가 각자의육체 속에 갇혀 있다는 진실을 각인시키는 것 말고, - P207

고통을 말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이 글의 서두를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내가 느낀 통증을 ‘충분히‘ 묘파했는가? 아니다. 비명과 신음, 호소와 울부짖음이 ‘충분히‘ 드러났는가? 아니다. 육체적 고통이 언어에 저항하고, 언어를 적극적으로 분쇄하는 문제‘임을 ‘충분히‘ 보여주었는가? 아니다. 이 통증이 제3자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로 전환되었는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통증을 쓰는 일은 ‘불충분함‘과의 고투다. 이 글은 시작부터 실패했다. 그리고 이 실패가 곧 이 글 전체의 질문이 될 것이다. ‘고통은 왜 이야기되어야 하고 어떻게 이야기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통증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실패한다. 그럼에도우리는 계속 고통에 대해 쓰려고 한다. 내가 사용한 표현들 ㅡ "칼로 쑤셔대는 듯한 날카로움"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찌릿찌릿함ㅡ은 얼마나 전형적인가? 게다가 이 표현은 내가 칼로 쑤셔지거나 전류가 흐르는 경험을 한 적 없다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지도 않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 불타는 듯한 통증, 쥐어짜는 듯한 통증, 살이 에이는 통증, 온몸을 휘감는 통증, 욱신거리는 통증, 얼얼한 통증...... 고통의 - P208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이에게는 이 모든 언어가 ‘충분하지 않다.
이 불충분함 속에서 ‘솔직함‘과 ‘정직함‘이라는 또다른 문제가 출현한다. 솔직함이 통증을 날것의 언어로 쏟아내려는 충동이라면 정직함은 어디까지 드러낼지, 어떻게 드러낼지를 질문한다. 솔직함의 극단이 비명이라면 정직함의 극단은 침묵이다. 전자는과잉되어 본질을 잃고 후자는 정제하다못해 회피한다. 결국 통증에 대해 쓰려는 자는 두 원칙 사이에서균형을 잡는 데 실패한다. 언어는 아슬아슬한 균형속에 파편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고통에 대해 쓰려고 한다.


영문학자 일레인 스캐리는 말한다. 환자에게 통증은 논박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현존이어서 ‘고통스러워하기‘는 곧 ‘확신하기‘이다. 그러나 타인의 통증은 붙잡히지 않는 것이므로 ‘통증에 관해 듣기‘는곧 ‘의심하기‘이다. 통증은 상호 간에 공유될 수 없는 감각이다. 부정될 수도, 확증될 수도 없는 무엇이다. - P209

솔직함이란 무엇인가? 장르로서의 에세이는 (육체적 고통에서 비롯하든 정신적 고통에서 비롯하든) 상처 입은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낸다고 여겨지는 글쓰기이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저마다 아픈 시대에 자신의 아픔에 집중하는 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글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적 부담을 지우고 자의식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지나친 동일화를 요구하는지 모른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읽을때 나는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지, 타인의 고통이 불러낸 나의 고통을 느끼는지 분간하지 못한다. 고통을 쓰는 나와 읽는 나는 모두 고통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아픈 몸과 정신에 대해 쓰는 일은 책임을 수반한다. 나의 아픔을 말하는 글이 아픈 타자에게 어떻게번역될까? 고통의 문장은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에어떤 관계를 만들어낼까? 나의 글이 누군가의 오래된 상처를 헤집지 않고, 누군가의 정신적 외상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까지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를 때 쓰지 않음을 선택하는 일이나, - P213

‘솔직한 글‘이라는 말에는 때로 환상이 덧씌워 있다. 독자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타인의 벌거벗은 자아와 마주한다고 느낄 수 있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그렇다. 그러나 에세이는 ‘나의 아픔을 솔직하게 재현하는 장르‘라기보다 ‘솔직하고 싶은 욕망과 솔직할 수 없는 한계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글쓰기‘에 가깝다.
때로 글을 쓰는 이는 에세이라는 영토에서 자기고통의 경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위치에놓인다. 전자가 머뭇거리는 글쓰기라면, 후자는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이 요청되는 복잡한 자리다. 고통의 재현은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에 의한 구성이다. 아픔은 그 자체로 중립적 경험이 아니며,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주체(누가 말하는가?)와 해석되는 대상(누구의 고통인가?) 사이에 권력 구도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 같은 맥락을 고려하면 에세이는 ‘솔직함‘을 명목으로 자신(그리고 연루된 타인)에 대해 모든 것을발설하는 장르가 아니라, ‘정직함‘을 윤리의 기준으 - P214

로 삼는 장르여야 하는지 모른다. 솔직함이 말해지지 않아야 할 것까지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자주굴복한다면, 정직함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남길지스스로를 집요하게 추궁한 끝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이는 나의 고백에 연루된 타인의 비밀을 동의 없이공개하는 것이나, 누군가의 ‘기억되지 않을 권리‘를침해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감정이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무엇일 때 ‘아직은‘ 말하지 않는 것, 유보한 채 기다리는 것도 정직함의 한 방식일 것이다. 고통에 관한 증언이 폭력이나 분출이 되지 않도록
‘말함‘과 ‘말하지 않음‘의 경계에서 타인을 상상하는일, 에세이의 균형은 솔직함이 아니라 그 상상력에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에세이의 정직함이 유보와 미완에 있을 때, 에세이스트는 맴돌고 서성이고 에두르는 가운데 실패한 언어와 불완전한 사유를 낳는다. 내가 추구하는 에세이즘"이 사실의 나열이나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말하지 않음‘과 ‘머뭇거리며 말하기‘라면, 에세이스 - P215

트로서 나는 단호한 증언자이기보다 흔들리는 기록자다. 내가 쓰는 에세이의 가능성은 모이고 흩어지는 단상에, 그것을 꿰어맞추려는 ‘시도""에 있다.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한순간도 공유하지 못한다해도, 언어화될 때 형태를 가지는 아픔이 있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정직하게 시도되어야 한다. 닿지 못할 것을 각오한 글만이 누군가에게 닿고, 실패할 것을 예감한 글만이 끝까지 읽힐 것이다.
네번째 책의 작가 소개글에 이런 문장을 썼다. "불완전한 내가 불완전한 타자와 연결되는 글쓰기를소망한다." 내가 고통을 말해야 한다면 연결을 위한말하기여야 할 것이다. 더 솔직하게 아픈 글로써가아니라 닿지 못한 자리에서 허정대며 시도하는 이야기, 아픈 내가 아픈 당신의 곁에 설 때 우리 사이에 흐르는 고요로써 가능한 것. 불충분함과의 고투 - P216

에서 패배하고 피하면서 언어의 고갈을 경험하고경험하면서 다시 모두가 아픈 시대에 나의 아픔을쓰는 일에 대해 질문하면서 나는 머뭇거리며 쓴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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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귀신


눈에서는 무엇이 나올까
나를 사랑하는 눈물말고

눈동자는 무슨 맛이 날까
영혼의 맛이 이럴까

눈에서 나오는 빛을 빛이라 할 수 있을까. 눈에서 나왔다고몸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눈빛은 미리 귀신일까. 아빠 가고달 열흘을 울고 방문을 연 엄마의 눈빛을 뭐라 할까. 280일간 검은 물에 떠 있다가 생전 처음 컬러로 된 내 얼굴을 마주 보던 내딸의 눈에서 나오던 빛은 뭘까.

우리는 영혼의 뒤꿈치로 보는 걸까
우리는 선 채로 꾸는 꿈일까

식기 전에 먹자면서
생물의 시신을 나누는
가족의 눈에서 나오는 - P223

빛은 무얼까

바닥에 쏟아진
두 모금의 물이
되쏘는 빛은 뭘까

문 닫은 창 앞에서 서성거리는
별의 눈빛은 어떨까

죽은 다음에도 보는 일을 쉬지 않는
저 슬픔을 뭐라 할까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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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 이야기‘를 추구할 때 생기는 또다른 문제는 내가 목도한 장면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계에 있었다. 2차세계대전 직후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집단수용소를 촬영한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연합군이 침투했던 바로 그 순간뿐이다. 그 사진들은 해방과 그 직후의 순간을 보여줄 뿐 수년에 걸쳐 누적된 억압과 고통의 맥락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개농장이든 번식장이든 도살장이든, 어떤 장소에 들어섰을 때 내가 보는 것도 그 순간뿐이다. (활동가들 또한 그렇다.) 쓰고자 하는 것이 ‘파편의 나열‘이 아니라 ‘이야기‘일 때 일부가 아닌 전체를 보여주려는 욕망은 불가능하지만 불가피하다. - P175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인물들을 만나면서 글쓰기는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되었다. 상충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나는 누구의 편에서 있는가? 누구의 편도 아니라면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어진 질문은 다음의 질문에 다다랐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이야기의 주체에 대한 물음은 나를 누구와 동일시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리베카솔닛은 동일시란 나를 확장하는 연대이며, 내가 누구와 혹은 무엇과 동일시하느냐가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반면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은 타인과 연대하고자 한다면 슬픔과 고통의 주체를 함부로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솔닛의 말처럼 나와 동일시하는 대상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것이다. 또한 이라영의 말처럼 고통의 주체를 나로 착각할 때, 타자의 고통을 이야기할 명분과 진실을 말하겠다는 글의 목적은 당위를 잃을것이다. 상반되는 듯 보이는 두 문장 사이를 오가며 나의 자리를 작가나 창작자가 아니라, 목격자이자 전달자의 위치에 놓았다.  - P179

나에게는 들어감보다 물러남이 중요했다. 누군가는 글쓴이의 감응으로 독자를 더 깊이 연루시키는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타자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확신도 없었고, 그들의 고통과 나의 자의식 사이에서 언제나 균형을 잡을 자신도 없었기에 자주 물러나야 했다. 아직 이야기가 문장이 되지 않았을 때, 그래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뒤엉켜 있을 때, 한 대목쯤에서는 개 산업의 카르텔을 쫓는 나의 모습을 쓰고 싶었다. 불과 몇시간 뒤 죽을 동물의 눈빛을 마주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고문당하고 학대당하는 동물을 지켜보는 무력감에 대하여, 악몽에 시달리다 소스라치며 깨어나는 밤에 대하여 쓰고 싶었다. 그때마다 나는 저 문장을붙들고 나아갔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지만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고통이지만 나의 고통이 아니다.‘ - P180

손택의 또다른 문장에서 사람을 동물로 바꿔 읽는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동물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동물에게는거대한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계에서, 내가 쓴 책이 ‘우리의‘ 제도와 관습을 바꾸는 데 기여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세계는 거대하고 복잡한 이익집단들의 집합체이고 고작 한 권의 책으로 이 집합체에 균열을 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 나름의 방식으로 지옥을 기록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나조차도 그 지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 채 기록하기. 이것이 내가 고통에 응답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 P181

손택은 독일출판협회 평화상 수상소감에서 문학은 대화이자 응답이라고 말했다. 살아가고 있는 것과 죽어가는 것을 향해 인간이 보여준 반응의 역사가 곧 문학이라고. 『개의 죽음』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 이야기는 자격 없는 자의 응답이다."나는 이 책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하려고 썼다. 그것은 미코를 처음 만난 순간과 비슷했다. 산골마을 유기견,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 바둑이를만났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나는 어떤 식으로든 미코의 눈빛에 응답해야 했다. 미코를 구하는 것은 내가해야 했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응답이었다. 이 책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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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지 않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알코올사용장애에 관한 글을 쓰기 전에 내가 술을 참을 수 있는지, 참는다면 며칠이나 가능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 금주가 계기가 되어 술을 끊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인터넷에서 중증 알코올중독자의 사례를 검색하며 조금은 우쭐한 기분으로 중얼거린다. ‘이 사람은 정말 심하네. 나는 이 정도는아니지.‘ 갑자기 피부과에 가서 리쥬란힐러에 대해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낮에 온라인쇼핑몰에서 본 스웨터가 품절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금주를 하는 동안 이미 코트와 청바지와 구두를 구매했으면서.
알코올사용장애가 고통, 욕망, 결핍을 즉각적으로해결하려는 상태라면, 지금의 나는 그 충동을 다른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상태다. 새로운 대상에 매료되 - P90

고 그 매료가 일으킨 충동에 굴복하는 방식으로 ‘한잔만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라는 속삭임은 ‘피부 시술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저 스웨터를 사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로 바뀐다. 갈망이 끝없이 이어지면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는 대상을 갈망할 것이다. ‘시내 한가운데에 새로 들어선 고급 아파트에 살면 행복해질 거야.‘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내가 중독자라는 사실만 명백해진다. 캐럴라인 냅이 말했듯 소비사회의 특징적 신념은 고통을 즉각적으로 해결하는 것이고, 알코올이 아니라도 ‘욕망을 쫓으라‘ 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 P91

그러나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벤만큼, 벤보다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벤의 말처럼 늙은이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것이다. 빨리 걷거나 균형을 잡는 일이 어렵거나 때로는 불가능하게 느껴질 것이다. 기억력은 빠르게 감퇴하여 누군가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는 데 애먹을 것이다. 모든 공간을 점령한 듯 보이는 젊은이들을 관망할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들이 세상을 차지했다고, 내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고 옹색한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그리고 마흔여섯 살 가을 더는 젊지 않다고 느꼈던 순간을, ‘속수무책으로 나이들기 시작한 첫날‘을 떠올릴 것이다. - P105

그러나 정신적 지지대만 있으면 우리는 상실과 변화 사이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할까? 우리의 삶은 진정 몰락하지 않고 우리의 정신은 끝내 노화하지 않을까? 견딤의 태도를 무엇으로 선택하느냐(체념으로? 집착으로? 의연함으로?)의 차이일 뿐, 결핍은 결핍으로 남아 언제까지고 메워지지 않는 것 아닐까? 외모강박으로 표면화된 나의 두려움은 무엇일까?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상실 그 자체보다 내가 잃은 것으로 초래되는 균열이 아닐까?
균열은 삶의 곳곳에서 징후처럼 나타나고 있다.
스스로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심으로, 중심에서 밀려나는 불안으로, 시간을 유예하려는 헛된 시도로 나는 과거의 방식으로 더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면서, - P108

새로운 방식에도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채 자주 비틀거린다. 젊음의 상실에 잇따르는 것은 허방을 딛는 감각이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상태.
전신거울 앞에 서는 일은, 알고 있는 것과 겪고 있는 것 사이에 나를 놓아두는 일이다. 영혼의 노예가된 자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지점은 지적 이해와 정서적 경험이 충돌하는 모순적 내면인지 모른다. 지적인 사람도 노화와 쇠퇴, 환대받지 못하는 현실로 말미암아 무력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육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에 환멸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나, 다시금 외모강박에 사로잡힌 나는 오늘도 내면의 전신거울 앞에서나의 몸과 이목구비를, 처지고 겹치고 불거지고 주름진 살을 면밀히 뜯어본다. 이 가학 행위를 통해 나이듦을 말하기에는 젊고, 젊음을 말하기에는 나이든 나의 진실을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 P109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의 전환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만, 반려동물보다 확장된 개념을요청하는 이들도 있다. 도나 해러웨이는 『해러웨이 선언문 중 ‘반려종 선언‘에서 반려동물을 넘어서는
‘반려종companion species‘"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반려종은 반려동물보다 거대하고 이질적인 범주다. 인간의 애정을 받는 동물만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구성하기도 하고, 인간의 삶을 통해 구성되기도하는 모든 유기체적 존재자를 의미한다. 이 범주는 - P156

쌀, 꿀벌, 장내 세균총까지 포함하며 공구성과 유한성, 불순성과 역사성, 그리고 복잡성을 전제한다. 20반려동물이 인간의 대용물이나 가족으로 기능한다면, 반려좋은 서로를 변화시키는 존재자들 사이의관계적 생성의 장이다. 해러웨이에게 중요한 것은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벗어난 ‘얽힘entanglement‘의 존재론적 의미이며, 인간과 인간이 공동으로 존재를구성해가는 ‘함께ㅡ되어감becoming-with‘의 과정이다."
나의 ‘얽힘‘은 내가 마음쓰지 않았던 것을 마음쓰게 한다. 산책을 하다가 개미를 밟지 않으려 걸음을멈추고, 호동이가 한참 냄새 맡은 나뭇잎을 집으로가져온다. 건물을 세우기 위해 오래된 아름드리나무를 잘라낸 이들에게 하릴없이 원망을 품다가, 나 또한 이 세상에서 더없이 유해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무수한 생명체가 얽혀 있음을 돌연히 체감하는 ‘함께ㅡ되기‘의 순간, 어딘가에 있지만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비인간을 떠올리며, 감응하지만 개입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각한다. - P157

반려인 동시에 타자인 나의 개는 양가성으로 인해수많은 질문을 불러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는가? 나와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는 너의 인간적 자질인가. 나에게서 사라졌거나 사라졌다고 믿는 너의 야생적 본성인가? 내가 너와 소통한다면 나는 무엇을 소통이라 믿는가? 너의행동에 대한 인간중심적 해석인가, 비언어적 교감의순간인가? 너와 내가 닮았다면 그 유사성은 인간성인가, 짐승인가? 언제나 수긍하고 마는 것은 내가타자에 관해 알지 못한다는 것, 알지 못하기에 알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또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인가,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인가? 아무에게도선택받지 못한 이 개가 나를 선택했다고 느낀 순간그 감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인간과 비인간의 - P160

관계에서 선택하는 쪽은 인간이고 선택받는 쪽은비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물을 인간의 의도와 감정에 반응하는, 무력하고 순응적인 객체로만 보는 시선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호동이는 사유나 담론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의 사고방식과 삶의 형태에 개입한다. 그리하여 나를 새로운세계로 데려간다. 호동이의 입양 공고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작고 하얗고예쁜 개는 아니지만......"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이 개에게 선택받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사건 가운데 하나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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