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오河鍾五
1954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975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월에서 오월로』,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쥐똥나무 울타리』, 『사물의 운명』, 『무언가 찾아올 적에』, 『반대쪽 천국』 굿시집 『넋이야 넋이로다』, 님 연작시집 「님 시편」, 「님』을 출간했다.
하종오 시인의 시에는 ‘의금상경(衣錦尙絅)‘ 이있다. 속에는 비단옷을 입었으되 겉에는 수수한 옷을 걸쳐 그를 감싼다. 시경(詩經)에 있는 말이다. 반짝거리거나 목청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음악으로 치자면 통주저음(通奏低音)이다. 리얼리즘의 행간을 그렇게 통과한다. 그렇다고 엄숙한 포즈의 그것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그저 소박한 마을 이웃들과 ‘너나들이‘로 ‘시시닥거리는‘ 인인애(隣人愛)가 사뭇 정겹다. 거기 그의 ‘남‘은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하게 자리해 있다. 그는 쓰고 있다. ‘님께서 만드시는 영역과 그이가 만드는 영역 그 틈새에 신생이 있었습니다. 모두 그것이 있다고 꼭 믿었기에 두 분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래저래 살아갔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여러 번 무릎을 쳤다. 그의 詩가 지니는 시의 임계속도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우리로 하여금 ‘님‘을 상면케 한다. 그의 시 ‘님 연작‘ 처처에 ‘님‘께서 자리하고 계시다. 그의 시를 읽고 이미 개운해진우리 몸과 마음의 실상이 님의 정체를 증거하고 있다. 그게 신생(生)이다. 정진규(시인)
■ 시인의 말
이 시집에 나누어진 세 개의 부에 등장하는 3인의 님, 그이와 저이는 모두 내가 살던 강화도 마을의 주민들이다. 논과 밭을 갈아먹는다는 점에서 신분은 같지만, 그들은 출신과 형편과 지향이 다르고, 그리고 생의 방편이 달랐다. 그들 중 더러는 토박이로 늙고 병들어 죽었고, 더러는 물려받은 전답이 작아서 남의 땅을부쳐먹거나 막노동을 했고, 더러는 땅값이 올라 부자가 되었는데도 농사를 지었고, 더러는 땅을 팔아서 탕진하는 바람에 다 털고 외지로 떠났고, 그 자리에는 외지에서 들어온 새로운 주민이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은 너나 나의 같은 모습이면서도 다른 모습이었고, 너희나 우리의 다른 모습이면서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萬人이었다. 내게 운문정신이라는 화두를 세우게 했던 님 시리즈는 外篇(「님 시편』, 1994년, 민음사), 『님』, 1999년, 문학동네), 前篇, 本篇, 後으로 이루어진다. 이 님 시집』은 前에 해당하는데, 2000년 말과 2001년 초에 걸쳐 겨울 동안 써서 2004년 「현대시학」에 분재했던 것을 일부 고쳐서 묶었다. 운문정신이여, 여전히 내게는 님이 현실이고 현실이 님이다. 2005, 6, 1. 하종오
제1부 제1편
님께서 가시자, 그이는 날마다 버덩을 태웠습니다. 그이가 왜 태우는지 아는 것들은 알 슬어놓고 사라진 곤충들뿐이었으므로 사방으로 연기만 흩어졌습니다. 그게 그이가님 그리워하는 모습이라고 나무들이 껍질 속으로 알단단하게 품고 이파리들을 털어 버렸습니다. 무서리 내리던 어느 밤에도 그이는 버덩에 들불을 피워 올렸고, 두루미 떼 날아오던 어느 낮에도 그랬습니다. 그이에게 긴겨울을 넘겨주실 님께서 아니 계시니, 그이는 묵묵히 순응해야 했습니다. 그이는 밤낮없이 버덩을 태운 뒤, 농기계에 기름 치고 창고 속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님께서 원하지 않으셨어도 이 일로 그이는 긴 겨울을 잡아두려는 것이었습니다. 하 많은 날 그이가 마실 다니며 술을 마셔대다가 고래고래 소리질러서, 땅 속에 잠든 개구리들이 이따금 비몽사몽 울기도 하고, 땅 위에 떨어져 있던 풀씨들이 천방지축 풀썩거리기도 했습니다. 그건 님 그리워하는그이의 마음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님 계시지 않는 마을에서 주민들도 그이를 따라 버덩을 태웠습니다. - P10
제1부 제2편
그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이 눈썹 위로 낮은 능선이 와서 어른대다가 지나가고, 그이 가슴 위를 스친텃새 한 마리는 처마 끝에 앉아서 짖어댔습니다. 님께서 계셨다 해도 일어날 기미라고 그이가 알아챘다면 기뻐했을지 슬퍼했을지 정녕 알 수 없지만, 아마 님께서라면 손뼉치며 크게 웃으셨을 겁니다. 사지오체를 산야에두고 마음을 그 위에 띄워놓고 풀빛깔 꽃빛깔 품는 시간을 가장 원하셨던 님이시니, 만약 님께서 떠나지 않으셨으면 그이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했던 일을 금년에도그대로 했을 겁니다. 시장에 나가 곡식 값을 흥정하고 집에 돌아오면 개밥그릇에 식은 밥을 담아주던 그 일은 그이에겐 살림살이인 너무나 살림살이인 일과였드랬습니다. 그이가 손놓고 지내는 동안 바람은 성질부리다 온데간데 없이 달아나고 쌀가마니는 들썩거리다가 헛간에 주저앉고 마늘통은 부엌에서 싹 뾰족이 내었습니다. 님 사셨던 집만 가만히 있었습니다. - P11
제1부 제3편
하루는 그이가 님 사셨던 집 뒤란 백목련 가지에 얼굴을 얹었습니다. 겨울낮에 그이 몸이 푸른 잎 되려는지 흰꽃 되려는지 껍질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눈이 내렸습니다. 언젠가 님께서 논둑에 핀 들꽃 꺾어들어 그이에게 보여주셨을 때, 들일에 지친 그이가 외면하자, 님께서는 꽃잎 떨어져 눕듯이 쓰러지셨드랬습니다. 흙 묻은 맨발로 님을 업고 집으로 돌아온 그이가 다시 논둑으로 나가 들꽃 꺾어 님께 보여주자, 꽃잎 벙그듯이 님께서는 홀연히 일어나셨드랬습니다. 그이가 들꽃을 님으로 알기시작했던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님을 볼 수 없는 날에는들길에서 만난 들꽃에게 그이는, 꽃아 네 속으로 이 길 틀어다오, 내 가서 줄기가 되마, 꽃아 내 속으로 저 길 옮겨놓을게, 네 와서 몸이 되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눈이종일 내렸습니다. 그 하루 님 사셨던 집 뒤란 백목련은 어디론가 가고, 그이 몸만 눈에 싸여서 흰 꽃을 피우고 서있었습니다. 저물녘 껍질을 찢긴 백목련이 돌아와서는시린 눈망울 되고픈지 뜨거운 심장 되고픈지 그이 몸 속으로 비틀비틀 걸어 들어갔습니다. - P12
제2부 제4편
님의 비닐하우스 속에는 벌써 상추가 먹을 만큼 자랐습니다. 일찌감치 씨 뿌린 이유야 초봄 밥상 차리는 데는청청한 잎사귀가 가장 넉넉해서이겠지요. 저 역시 그러해서 님께 얻으러 왔지만 아니 계셔서 눈치 보며 상추잎을 땁니다. 제 손에 잡힐 때마다 파르르 떠는 한 잎 한잎이 님의 마음으로 느껴집니다. 아직도 님께서는 남한테바치고픈 여생이 있어서 재배에 정성 쏟으시는가요. 저는 햇볕에 뜨거워져서야 님께서 비닐하우스 세우신 의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무서운 건 사람의 한입 채우는 일이니까요. 겨우살이 끝낸 뒤 간맞추어 먹을 게 없는 삼시 세끼를 님께서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겠지요. 밭에 푸성귀가 돋아나지 않는 철에 끼니를 만들어야 하고, 삼사월 한나절 해 지도록 밭에 나가 있어야 하는 님을이해합니다. 님의 비닐하우스 속에 출렁이는 열기에 숨헐떡거리며 이제 저도 조숙해집니다. 인간은 먹을거리앞에 두고 깨달을 때 가장 순해져서 함부로 허리 펴지 않고 비로소 곡식에 육화되는 게 아닐는지요. 잎을 저에게 - P48
내준 상추는 또다시 먹을 만큼 자라날 것이고, 저는 이제건방진 자세를 버릴 것입니다. 님이시여, 비닐하우스 밖으로 나오자, 저는 먹지 않고도 포만하여 그만 신록에 겸손해집니다. - P49
제2부 제7편
제가 님을 볼 적마다 님께서는 물 아니시고 불이시고님께서는 불 아니시고 기름이시고 님께서는 기름 아니시고 나무이시고 님께서는 나무 아니시고 풀이시고 님께서는 풀 아니시고 익충이시고 님께서는 익충 아니시고 농약이시고 님께서는 농약 아니시고 비료이시고 님께서는비료 아니시고 똥이시고 님께서는 똥 아니시고 곡식이시고 님께서는 곡식 아니시고 소이시고 님께서는 소 아니시고 트랙터이시고 님께서는 트랙터 아니시고 농부이시니, 님께서 저를 볼 적마다 저는 농부 아니고 백수이고 저는 백수 아니고 흙바람이고 저는 흙바람 아니고 먹구름이고 저는 먹구름 아니고 장대비이고 저는 장대비 아니고 흙탕물이고 저는 흙탕물 아니고 찌꺼기이고 저는 찌꺼기 아니고 개밥그릇이고 저는 개밥그릇 아니고 사료이고 저는 사료 아니고 밥이고 저는 밥 아니고 푸성귀이고저는 푸성귀 아니고 상품이고 저는 상품 아니고 소비자이니, 님께서는 저 아니고 님이시고 저는 님 아니고 저였습니까. - P54
제2부 제10편
달빛이 지상으로 내리고 벌레울음이 천상으로 오르는 밤길입니다. 저는 아직도 님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낮 동안 님께서는 무얼 보셨는지요? 흙 속에 뿌리 퉁퉁하게 키워야 값을 하는 고구마의 분투를 보셨나요? 흙바닥에 넝쿨로 기어야 성질을 찾는 호박의 비애를 보셨나요? 태어나서 울기만 하다가 죽어 가는 참매미의 기막힌 생사를 보셨나요. 저에게 보이던 님의 옷가지에는 님의 육신이 없었습니다. 님께 보이던 저의 허우대에는 저의 존재가 없었겠지요? 땅에게 주고받을 대가로는 이제 죽어 편히 누울 무덤만 남아 있지만, 님의 본모습을 보려는 저에게는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을지모릅니다. 저의 본모습은 정지된 공간에 차는 입체도 아니었고 흐르는 시간에 편승하는 허상도 아니었기에 저는님께서 하시는 밭갈이 김매기를 따라함으로써 일체의 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오늘밤 님께선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 깊이 잠들어 코고는 소리가 들녘에 울려 퍼집니다. 제가밤 새워서 님의 무엇을 볼 수 있을는지요? 그만 저는 - P59
달빛에 가득 차서 천상으로 오르거나 벌레울음에 덮이어지상에 엎어지고 싶습니다. 홀연히 제 발길을 낚아채고는 밤길이 까마득하게 사라집니다. - P60
제3부 제3편
가을 밖으로 저이가 걸어 나갔을 때 감나무에서 투툭홍시가 떨어졌고, 까치가 놀라 날아올랐습니다. 감나무가 낙과를 즐거워한 적 없지만 이제 저이를 보면 가지가 절로 흔들렸습니다. 깊드리 논둑에 저이가 옮겨 심어주었던 묘목 시절에는 저이도 어렸는데, 해마다 모내고 나락 베는 사이에 함께 늙어 버렸습니다. 감나무는 더 많은감을 맺어 왔지만, 저이는 살림이 줄어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감나무가 저이에게서 달아나고 싶어할 때 님께서나타나 높드리에서 내려다봐 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님께서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시니, 해거리를 하려던 감나무는 갑자기 감을 많이 달고 싶어졌습니다. 저이가 본체만 체하든 말든 감나무는 감꽃을 희디희게 피워내고 감을 주렁주렁 달고서 님을 향하여 이파리 흔들어댔고, 날이면 날마다 까치가 찾아와 짖어대면 감을 붉혔습니다. 그런데 저이가 가을 밖으로 나가고 나자, 일시에 가지에서 홍시가 투툭 떨어졌습니다. 감나무는 저이가 가을밖에서 돌아오지 않으니 공연히 불안하였습니다. - P78
제3부 제16편
님께서는 님대로 사시고 저이는 저이대로 사는 동안에 가을은 들길 몇 리 산길 몇 리를 갔습니다. 저는 님과 마주치지 않는 날, 저이대로 뒤쫓아가서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가을을 보았습니다만, 쭉정이를 이끌고 가는그 모습에서 저이는 남루한 자신을 보았습니다만, 님께서는 저이와 마주치지 않는 날, 님대로 뒤쫓아가서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가을을 보셨습니다만, 단풍을 이끌고가는 그 모습에서 님께서는 유유자적하던 자신을 보셨습니다만, 적막한 산야에서 님께서는 다른 님을 기다리지도 않으시고 저이는 다른 저이를 기다리지도 않으니, 가을이 왔다가 가는 속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가을에는 높드리 깊드리에서 거둬들인 양식이 얼만지, 셈이 가장 중요하였으므로 님께 다른 님이 올 리도 없고 저이에게 다른 저이가 올 리도 없었습니다. 가을이 가고 난 뒤로 더욱님께서는 님대로 사시고 저이는 저이대로 살았습니다. 저마다 차지하고 앉은 터가 다르니, 님께서는 자신에게만 님이시고 저이는 자신에게만 저이였습니다. - P96
제3부 제17편
님께서도 모르셨고, 저이도 몰랐습니다.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져, 차갑게 식은 산야에 잎턴 나무와 씨 턴 잡초만 가만히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 위 허공이 팽팽해져서 날아갈 수 없는 새들은 울음을 접고 내려앉았습니다. 가을이 다 갔습니다. 지상에 모여드는 무리들은 햇살한 줄기에도 인색해져서 양지를 차지하면서부터 님과 저이 틈이 더 벌어짐을 알았습니다. 님과 저이만 모르고 있었지, 그 관계를 아는 무리들은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준비하였습니다. 님과 저이 틈에 끼어 들었다가는 명년 봄에 붙어살 땅 한 귀퉁이마저 얻지 못할 것입니다. 가을은 가면서 님과 저이 사이의 하늘 수십 리 마음수십리 지상 수십 리를 허허벌판으로 만들어놓고 갔습니다. 님께 저이는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었고, 저이에게 님께서는 논일을 모르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을이 가는 동안에 두 분이 외면하여서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놀빛이 떠돌았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가득 채울 이는 님께서도 아니셨고 저이도 아니었습니다. - P97
제3부 제20편
첫눈이 내렸습니다. 저이의 깊드리에도 님의 높드리에도 내려 쌓였습니다. 눈보라는 허공에 지어진 새의 집을 무너뜨리고 지하에 지어진 네발짐승의 집을 뭉개었습니다. 동네를 떠나지 않은 님께서는 침묵하셨고, 동네를 떠난 저이는 소식 없었습니다. 님께서 첫눈 마중 아니 나오셨고, 첫눈 배웅 나갈 저이가 없었으므로 밤새 내렸습니다. 저이의 깊드리든 님의 높드리든 명년에는 가뭄이 들지 않을 테지요. 한동안 님께서는 저이를 못 만나시고 저이도 님을 못만나겠습니다만, 첫눈이 그치면 님의 높드리나 저이의 깊드리에 굶주린 새들의 부리짓이나 네발짐승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힐 것입니다. 그걸 보게 된다면 님께서는 집안에서 나와 땅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논일을 찾아서 해야 하고, 저이는 동네로 돌아와 땅을 덜 가지겠다는 생각을 하며 곡식을 잘 키워서 아껴 먹어야 한다는것을 알게 될는지요. 첫눈을 님께서도 보지 못하셨고 저이도 보지 못하였으니, 어느 날에는 님과 저이는 가깝지 않을것이고 어느 날에는 님과 저이는 멀지 않을 것입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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