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6개월에 걸친 중국 현지 촬영이 끝나고 스태프들은 이탈리아로 이동해 로마의 치네치타(영화 도시)라는 촬영소에서 그다음 부분을 찍었다. 스튜디오 바로 옆 동에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촬영을 하고,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휘적휘적 돌아다니고, 정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스트로이안니는 궐련을 입에물고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모습이 엄청 멋있었다. 치네치타는 무솔리니가 만든 거대한 영화 스튜디오여서, 성립 과정에 만주영화협회와 유사한 면이 있었다. 히틀러도 그렇고, 파시스트는 아무래도 다들 영화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일본의 파시스트가 만든 만주국의 수도 창춘에서 동시대에 이탈리아 파시스트가 만든 치네치타로 이동했다는 점도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같았다. 여기저기서 망령들이 어슬렁거리는 통에. - P202
파시즘에는 숭고한 미에 대한 강한 동경심 같은 게 있었다. 그저 야만적이었던 게 아니라 고귀하고 교양 있고 세련된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베르톨루치의 작품 속에 묘사된 파시스트들도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아마카스의 사무실은 미래파 그림으로 장식해야 했던 것이다. - P202
런던에 도착해보니, 이럴 수가, 영화 편집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당연히 내가 만들어온 음악과 맞을 리가 없었다. 베르톨루치감독은 그냥 가만히 놔두면 반년이든 1년이든 편집을 거듭해서전혀 다른 영화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이었다. 편집이 자꾸만 바뀌어서 원래 있던 장면이 없어지고 순서가 달라지고, 완전 난장판이었다. 다음 날 다시 녹음하기로 했지만, 음악과 맞지 않는 곳이 여기저기 생겨버렸으니 철야로 당장 그날 밤 안에 우에노와 함께호텔 방에서 곡을 새로 썼다. 피아노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호텔방에서, 그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어서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몇 - P205
초가 줄어들었으니까 아귀를 맞추려면 몇 소절하고 몇 박자를빼야 한다며 죽을 둥 살 둥 계산해서 고쳐나갔다. 완전히 난리법석이었다. 결국 런던에 도착한 뒤로 1주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낮에는 녹음, 밤에는 수정, 그 짓을 날마다 되풀이했다. 그러나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푸이의 두 번째 왕비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뛰쳐나가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나는 그 장면도 좋고 그 여배우도 무척 좋아했는데, 그 부분의음악 「Rain」을 처음 들려주었을 때, 다들 "벨리시모bellissimo! 벨리시모!"라고 환성을 지르며 서로 끌어안고 춤이라도 출 것처럼크게 기뻐해주었다. 깜짝 놀랐지만, 그 순간의 일체감은 잊을 수가 없다. 아아, 이게 이탈리아 사람과 작업하는 기쁨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 P206
그중에서도 이스트우드의 언급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9개 부문을 독차지했으니 올해는 「마지막 황제」의 해였다"라 치하하고 "미국은 이런 영화를 더 이상 찍을 수 없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이스트우드가 말한 "이런 영화"란 "군중을 찍어내는 영화였다. 할리우드는 멀리는 「인톨러런스」에서부터 대대적인 무대 장치를 준비하고 카메라와 조명 방법을 숙고하고 다양한 기술을 결집해 군중을 찍어내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영화는 완전히 내향적인 분위기로 바뀌어 거대한세계는 더 이상 묘사하지 않고 있었다. 내면으로, 내면으로, 아래로, 아래로, 라는 느낌이었다. "옛날 할리우드에서 볼 수 있었던 대규모 군중이 움직이는영화를 이탈리아 감독 베르톨루치가 만들어주었다. 미국은 이런 영화를 더 이상 찍을 수 없다"라고 이스트우드는 말했다. 그한마디를 들었을 때,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 P209
배우나 작곡가의 입장을 떠나 관람자의 시선으로도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에는 재미있는 점이 아주 많았다. 베르톨루치는 역시 문화대혁명을 가장 중요한 테마의 하나로 생각했다. 그는 이 혁명을 통해서 황제에서 일개 평민으로 변모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건 이른바 마오쩌둥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곤충으로 치자면 번데기에서 성충이 되어가는 식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귀뚜라미가 푸이 황제와 중첩되는 존재로서 상징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때까지 베르톨루치의 작품에서 다뤄진 다양한 주제가 이영화에 집약적으로 나타났다는 점도 놓칠 수 없는 재밋거리이다. 「1900년」과 「마지막 황제는 그 무대가 이탈리아와 청나라로 완전히 다르지만, 내게는 형제와도 같은 영화로 생각된다. 이를테면 "천" 모티프, 「1900년」 속에는 붉은 깃발이 수없이 펄럭이는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 황제」에서는 황제의 대관식에서 노란색의 거대한 천이 펄럭인다. - P210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자전거" 모티프이다. 자전거는 베르톨루치 감독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영화라면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소품인데, 「1900년」과 「마지막 황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몹시도 봉건적인 청나라 사회에서 황제가 자전거를 타는 일 따위 허용될 수 없었을 텐데도 영화 「마지막 황제 푸이는 역시 자전거를 탄다. 그밖에도 "문과 벽", "난무亂舞", "등을 돌리고 떠나가는 아버지" 등, 베르톨루치적인 주제가 많이 담겨 있다. 내가 만든 음악도 그런 베르톨루치적인 모티프를 충분히 의식한 곡들이었다. 문의 테마, 이별의 테마. 당연히 프로이트적인 시점에서 혹은 롤랑 바르트적인 시점에서 해석해보는 일도 무척 재미있다. 유럽의 관객들은 아마도 그런 점을 즐기면서 감상하지 않을까. - P211
베르톨루치라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감독과 한 팀이라는 사실 덕분에 이탈리아 전역의 사람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기도했다. 아무리 작은 시골 마을이라도 정말 귀하게 대해주었다. 때때로 나는 "사람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와인도 끝내주니까 앞으로 콘서트 투어는 이탈리아에서만 할까?"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반드시 공연 홀이있고 모든 관객이 열심히 귀를 기울여주었다. 딱히 베르톨루치의 영화에 삽입된 곡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상당히 실험적인 음악을 연주해도 연주자의 그런 열정을 받아주었다. 그런 점은 역시 로마 제국의 문화유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P212
이쿠타는 마지막 황제」의 촬영에도 동행해주었다. 그 작업은 이쿠타가 아니었으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은 그가 일본인의사 역으로 이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아카데미상 수상식에도 물론 함께 참석했다. 영화도 괜찮은 형태로 완성되었고 서로 장기간 엄청난 밀도로 일했으니까 잠깐 우리 자신에게 상을 주자, 라는 생각에 처음으로 긴 휴가를 냈다. 약 한 달 예정이었다. 이쿠타는 멕시코로가고 나는 오키나와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길로 이쿠타는 여행지인 멕시코에서 죽고 말았다. 자동차 사고였다.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일이었다. 나는 오키나와로 떠나기 전날 밤 멕시코에서 걸려온 전화로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즉시 여행을 취소하고 텍사스를 경유해 멕시코로 시신을 인수하러 갔다. 그가 사망한 곳은 푸 - P217
에르토 바야르타라는 극히 평범한 관광지였다. 자동차가 절벽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대체 얼마나 굉장한 절벽이기에, 라고 생각하면서 가봤는데 딱히 높지도 않고그저 몇 미터에 불과한 곳이었다. 현장이 전혀 극적이지 않다는점이 도리어 더 슬펐다. 왜 이런 데서 죽어버리는 거야, 하고. 그로부터 반년쯤, 나는 도저히 떨치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정말로 소중한 사람을 갑작스럽게 잃으면 거기에 어떻게도 저항할 수 없다는 데에 부조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강렬하게 느낀 바는, 이건 친한 사람을 잃었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얼마나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무지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와 몇 년씩 날이면 날마다 함께 지냈는데 그가 정말로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그런 틈의 깊이에 나는 완전히 절망해버렸다. - P218
어린 딸이 있으니 여기저기 이사를 다닐 수 없었지만, 아마나 혼자였다면 분명 사방을 떠돌았을 것이다. 실제로 유럽 쪽이 꽤 재미있다고 느낀 적이 많았고, 미국에 싫증이 나면 이탈리아로 가서 살 생각도 했다. 유럽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형편만 닿는다면 어디에서 살건 상관없고 누군가 불러준다면 어디든 간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교토 근처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가능하면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죽는 것만은 피하고싶다는 생각도 있고.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뒤에 주로 베를린이나 뉴욕에서 살았던 백남준 씨가 한 말 중에 아직도 인상적으로 기억나는 게 있다. 한국인은 약간 수렵민적인 성향이라서 사냥 - P224
감이 있으면 어디든 따라가며 산다. 사냥감이 다른 쪽으로 옮겨가면 그것을 찾아 이동한다. 하지만 일본인은 어민적인 성향이라고 할까, 원양어업에 나서기는 해도 자신의 포구,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런 말이었다. 그게 맞는 말이라면 나 역시 지금은 원양어업을 나와 있지만 이러다가 문득 내 포구, 내 마을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 P225
뉴욕에는 그때까지 몇 번이나 일 때문에 들락거렸지만, 호텔 숙박과 실제 주민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역시 전혀 달랐다. 현지에서 생활하는 사이에 많은 것을 배웠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가구를 사게 되었다. 가게에 가서 구경하고 그 자리에서 주문했다. 그다음 주쯤에는 배달될줄 알았더니 3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내 귀를 의심했지만 어쩔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3개월 뒤에 드디어 물건이 도착해서 포장을 풀어보니 직접 조립해야 하는 가구였다. 화가 났지만 아무튼 조립에 돌입했는데, 이번에는 부품이 부족했다. 게다가 부품이 도착하는 데 다시 2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성질 급한 나는 정말 펄펄 뛸 만큼 분개했다. 전화를 개설할 때에도 업자가 도무지 - P225
와주지 않았다. 나는 있는 대로 화가 나서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업자와 대판 싸움을 했다. 그러나 물건을 주문하면 금세 도착하고 사람을 부르면 즉시달려오는 나라는 일본을 비롯한 몇몇 나라들뿐이다. 그러니 잘와주는 쪽이 오히려 특이한 편이다. 아마 이탈리아나 모로코나중국이라면 그런 서비스를 받기가 훨씬 더 힘들 것이다. 일본의 잣대로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진리를 1년쯤 지나서야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 P226
무슨 동경심이 있어서 뉴욕으로 이주한 건 아니지만 이따금 뉴욕이란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물론 있다. 음악에 관해서 말하자면, 역시 "인종의 도가니"라는 말대로 전 세계의 음악이 바로 손이 닿는 곳에 모두 모여 있다. 이곳으로 건너온 뒤로 브라질 음악가 네트워크를 통해 힙합을 하는 젊은이들과 친구가 되기도 했다. 가까운 델리 deli의 한국인 점주가 사실은 가야금 명인이었던 일도 있었다. 레코딩을 할 때, 잠깐 아프리카의 기타를 넣고 싶어서 친구에게 문의하면 벌써 그다음 날에는 아프리카 연주가가 직접 와준다. - P226
도쿄도 꽤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지만 아무래도 그런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역시 뉴욕은 뮤지션 층이 다른 어느 곳보다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발리나 런던에도 외국인 뮤지션이 많지만 뉴욕만큼 다양한 나라의 폭넓은 음악을 커버하지는 못한다. 뉴욕이라면 남아메리카인, 중동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이 모두 모여 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또 한 가지, 뉴욕이라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무관심이랄까, 그런 것이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뉴욕에서는 공동체적인 뭔가에 결코 기댈 수 없다고 할까, 그리 쉽게는 타인을 사랑해주지 않는 도시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어렸을 때부터 어딘가에 소속되는 일이 몹시 싫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편안하다. 우선은 어떤 사람도 아닌 채로 살아갈 수 있다. 내성향에 딱 맞는 일이다. 아무튼 어느 날 훌쩍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문득 돌아보니 벌써 19년째이다. 어느 새 미국은 내 인생에서가 오래 머문 지역이 되었다.. - P228
9월 11일 아침 9시, 나는 뉴욕의 내 방에 있었고 슬슬 아침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항상 우리 집에 드나들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울면서 뛰어들어왔다.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세계무역센터가 불타고 있다. 친구가거기서 일하는데 아까부터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라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깜짝 놀라 얼른 텔레비전을 켜봤더니 불타오르는 빌딩 영상이 흘러나왔다. 사고가 났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우리끼리 두런거리는 참에 두 번째 비행기가 빌딩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그때쯤에는 이미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영상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결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카메라를 들고 7번가로 뛰어나갔다. 빌딩을 바라보며 셔터를 눌렀다. 나는 평소에 사진을 그리 많이 찍는 편이 아니다. 그리 잘 찍 - P250
는 편도 아니다. 하지만 문득 깨닫고 보니 내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연히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서 반드시 기록을남겨두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곧 하나둘 정보가 정리되고, 탈레반과 알카에다에대한 내용이 보도되고, 아프간 공격이 시작되고, 나아가 이라크전쟁이 발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일이 그렇게 되자 그 모든 일의 참된 진상까지는 알지 못해도 어떻든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채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그려낼 수 있는 스토리를 짜내고 다양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이를테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도 그 한 가지 버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테러가 일어났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맛본 적이 없는 공포를 느꼈다. 완전히 새로운 진짜 공포와의 조우였다. - P251
그래서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이 9-11 직후에 "그것은 최대의 예술 작품이다"라고 말했던 게 나는 이해된다. 그는 이 발언으로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그 테러는 분명 모든 사람을 수수께끼 속으로 빨아들인, 해석을 뛰어넘는 사건이자 퍼포먼스였다. 인간을 단 한순간에 전혀 해석 불가능한 상태에 빠뜨리고 공포라든가 외경 같은 것을 부여한다. 그것은 바로 예술이 - P251
지향해온 바이다. 앤디 워홀만 해도, 요제프 보이스만 해도, 존케이지만 해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압도적인 충격의 이 사건앞에서 예술은 아예 묵사발이 되었다. 라고 해도 무방하다. 너무 무서워서 한시라도 빨리 뉴욕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1주일 동안 터널도 다리도 모조리 봉쇄되어 어느 누구도 도망칠 수 없었다. 맨해튼이 섬이었기 때문이다. 봉쇄가 풀린 뒤에도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알래스카에는 군사 기지가 있고 하와이에도 군사 기지가 한두 군데가 아니고 일본은 온통 미군 기지투성이이다. 어디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 P252
인간은 위급한 처지가 되면 평소에는 무심코 넘기던 하찮은 정보까지 모조리 끌어모으려 들게 된다. 전방위적으로 과민해지는 것이다. 그러자 음악을 할 수 없었다. 감각의 허용량을 넘어버렸다. 음악이 사라진 것뿐만 아니라 그 소란스러운 뉴욕이 온통괴괴해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클랙슨을빵빵거리지 않고 제트기도 날지 않았다. 엄청나게 조용했다. 바늘 하나만 떨어져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돌아볼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뉴욕 전체를 뒤덮었다. 그런 판에 누군가 기타 같은 걸연주했다면 아마 얻어맞았을 것이다. 아아, 이런 것이 전쟁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윽고 노래가 들려온 것은 체념 때문이었다. 테러로부터 사 - P254
홀이 지나고 더 이상 생존자가 나올 수 없음을 모두가 받아들였을 때 추모 기도 행사가 개최되었다. 촛불을 들고 거리 곳곳에서묵도를 올렸다. 음악이 다시 나타난 건 그때부터였다.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장송이라는 의식을 위해, 비로소 음악이 필요했다. 예술의 근원을 지켜본 것 같았다. 테러 직후는 공포 속에서 필사적으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는나날이었다. 인간이란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하는 존재다. 정보를 수집하고 상황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고민하지 않으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공포가 정말로 극에 달하면 사고가 정지되는지도 모르지만, 그 한 걸음 전 단계에서 인간이란 필사적으로 사고하는 존재였다. 예를 들어 옆집에 번개가 떨어지면 다음에는 과연 어디에 번개가 떨어질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한다. 분명 거기서 과학이 태어나고 예술이 창조되었을 것이다. - P255
환경 문제에 대해 발언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인지 "환경 친화적인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게 된다. 기본적으로그런 음악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그 답을 찾고있는데, 만일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죽었다"까지는 아니어도 인간을 부정하는 뭔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신교적인 것, 즉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 역사에는 목적이 있다는 식의 발상, 인간이 생각해낸 그런 것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고 싶다. 그런 마음이 점점 강해진다. 그 마음이 아마 이번 앨범에서도 드러났을 것이다. - P282
2008년 가을에 그린란드에 갔던 체험의 영향도 컸다. 열흘 남짓한 여행이었지만, 출발 시점이 마침 앨범 제작 시기와 맞물려본격적으로 창작 의욕이 솟구치던 참이었다. 일의 흐름이 끊기는게 싫어서 그 여행이 영 내키지 않았다. 결국 출발 직전에 "역시가고 싶지 않다"라며 한 차례 거절까지 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때 작업을 잠깐 멈춘 것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다. 예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 특별하고 풍성한 시사점을 얻어낸 자극적인 중단이었다. 그린란드에 다녀오기 전과 후는 분명 음악의 느낌도 크게 달라졌다. 작품의 방향성이 보다 선명해진 것 같다. - P282
과연 어떤 시사를 얻어왔는가. 그 체험의 의미를 열심히 소화해서 요약해보려고 하는데 아직은 제대로 언어적인 표현을할 수가 없다. 자연이라는 것의 거대함에 압도되었다, 라고 말할수밖에 없을 듯하다. 참으로 압도적인 양의 물과 얼음덩어리. 그것이 빚어내는 풍경과 추위. 그 인상이 너무도 강력해서 나오지를 않는다, 말이. 인간이 자연을 지킨다, 라는 식으로 우리는 말하곤 한다. 환경 문제를 언급할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건 발상 단계에서부터 잘못 짚은 말이다. 인간이 자연에 거는 부하負荷와 자연이 허용할 수 있는 한계가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패자가 되는쪽은 당연히 인간이다. 즉 난처해지는 쪽은 인간이지, 자연은 전혀 난처하고 말 것도 없다. 자연의 거대함, 강함에서 보자면 인간이란 정말 한주먹감도 되지 않는 소소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여행 내내 얼음과 물의 세계에서 보내면서 끊임없이 느꼈다. 그리고 인간은 이미 없어도 좋을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 P283
뉴욕으로 돌아온 뒤에도 어쩐지 영혼을 북극권에 두고 온 것처럼 좀체 문명 사회의 일상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고, 한편으로는 금융 위기에 따른 공황이 점점 확대되는 상황이지만 그 힘겨운 일조차 뭔가 정말로 작고 사소한 것처 - P283
럼 느껴진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세계에서 가장 인공적으로 구축된곳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의 맨해튼, 그야말로 금융 위기의 진원지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인간 세계나 현재의 일과는 조금 동떨어진, 보다 먼 곳을 향하고 있다. 최대한 손을 대지 않고, 조작하거나 조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소리를 가만가만 늘어놓고 찬찬히 바라본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지고 있다. - P284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坂本龍一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78년 앨범 Thousand Knives』로 솔로 데뷔했으며, 같은 해에 YMO를 결성했다. YMO 해체 후에도 다방면으로 활약하며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음악으로 영국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마지막 황제」 음악으로 아카데미 음악상, 그래미어워드, 골든글로브상 등을 수상했다. 항상 혁신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자세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삼림보전단체 "모어 트리즈More Trees"를 설립하는 등 환경과 평화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창립하여 음악을 통해 동일본대지진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다. 주요 영화음악 작품으로는 「마지막사랑」(1990), 「하이 힐」(1990), 「팜므 파탈」(2002), 「토니 타키타니」(2005),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분노」(2016), 「남한산성」(2017), 「당신의얼굴」(2018), 「미나마타(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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