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 정조시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최북, 1712~1786?)은 당대의기인(奇人) 중에 기인이었다. 그의 전기를 쓴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그를 주객(酒客)이라 했고, 어떤 사람은 화사(畫史)라 했고,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 [狂生)라 했다"고 한다.
최북은 스스로 호를 지어 호생관(毫生館)이라고 했다. 즉 붓으로 먹고 사는사람이라 했으니 이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게 한다. 어찌 보면 낭만적이고 어찌 보면 겸손함이 어린 대단히 멋있는 호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 속사정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먹고살 것이 넉넉한 문인화가가 이런 호를 썼다면 멋이라 하겠지만 천한 신분에 빈한하기 짝이 없었던 최북이고 보면, 호생관이란 "나는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쩔 테냐"
라는 저항적 냉소가 서려 있는 것이다. - P129

그는 실제로 그림을 그려 그것을 팔아 먹고살았던 화가였다. 어쩌면 그 이외에 생계를 꾸려갈 다른 방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엿한 양반이아니라 반대로 미천한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도화서 화원이라도 되어 녹봉을 받아 살아갈 수 있었겠건만, 어디에도 구속될 수 없는 그 오만한 성품과 스스로의 자만심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화원도 못되고, 한묵의 선비화가는 더 더욱 못 되고, 영낙없는 품팔이 환쟁이가되어 미술 시장이라고 해봤자 겨우 물물 교환 수준을 갓 넘은 상태에서 그것을 내다 팔아 먹고 살아야 했으니, 그 불 같은 성미에 겪었을 고통과 한숨을 알 만도 하다.
그래도 그는 할 수 없이 참고서 그림을 그렸다. 호생관이라는 이름답게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댔다. 남공철의 말에 의하면 "용돈이 궁하면 평양과동래에까지 가서 그림을 팔았다" 고 한다 - P129

최북은 스스로 ‘호생관‘이라 이름지어 불렀고 결국 호생관으로 일생을 살았다. 거기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서정과 기개를 남김없이 발현하면서 그림으로 영상과 얘기할 때는 명작을 낳았다. 그러나 그저
‘호생관‘이라 말하며 먹고살기 위해 그림을 그릴 때는 호생관이라는 것이 한낱 노동을 의미할 뿐이었다.
호생관 최북, 그는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량 있는 인물이었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 기걸 찬 성품이 화면 속에 녹아들었을 때는 심사정이나 이인상 못지 않은 높은 경지의 예술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기절한 작품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비천한 신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를 충분히 실현할 수 없었다. 칠칠이로서는 천분(天分)을 다하지 못하는 그 분풀이를 세상에 퍼부으며 살았다.
한 인간의 굽힐 줄 모르는 기개는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창조적 원동력이될 수 있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는 그런 기개의 소산이다. 그러나 최북의 기개라는 것이 세상도, 대중도, 역사적평가도 의식하는 일없이 자포자기의 폭력에 빠질 때면 그것은 대책 없는 오만이었고 그는 한낱 기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인 것이었다.
호생관 최북과 거의 동시대를 살며 진경산수나 속화가 아니라 문인화풍으로 일관한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과 비교해보면 이들 3인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현재는 몰락한 양반이었고, 능호관은 서출이었고, 호생관은 중인 출신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두 문인화풍을지향한 문사 기질의 화인이었다. - P163

이들이 진경산수와 속화보다 문인화풍의 관념산수에 더욱 천착한 것은 어찌 보면 모순 같고, 이해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진경산수와 속화는현실을 보는 긍정적 시각이 있거나 현실 속에 기꺼이 개입할 마음 자세가있어야 다룰 수 있는 장르이다. 그렇지 못한 이들로서는 차라리 관념의 세계가 자신의 처지를 담아내는 데 맞았던 것이다.
같은 관념성을 지향하면서도 현재는 정서의 심화를 추구하였다. 그의 그림에 서려 있는 깊이가 바로 그것이다. 능호관은 관념산수를 통하여 높은 도덕과 정신적 고양을 추구했다. 그의 그림에 감도는 삼엄한 기상이 그것이다.
이에 반하여 호생관은 부정적 사유와 반항적 기질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였다. 그것은 낭만적 반항이기도 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흔히 예리한감성은 이성의 힘을 능가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데 호생관에겐 그런 호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예리한 감성이란 이성적 사유와 도덕적 행위에 기반을 두지 않을 때는 사실상 객기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낭만적 반항의 허점이다. 호생관에게는 그런 허점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 최북은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았고, 예술 세계의 준엄한 규율은 더 더욱 몰랐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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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림의 세계에도 바둑처럼 급수가 있다고 할 때 조선시대 화가 중에 입신(入神)의 경지라는 9단에 오른 이는 몇이나 되며, 9단 중에서 타이틀을차지할 만한 기량을 갖고 있던 화가는 누구일까? 또 그림의 세계에도 운동경기처럼 종목이 있다고 할 때 진경산수에서 겸재 정선, 속화에서 단원 김홍도가 금메달을 차지한다면 문인화 부문은 누가 차지할 수 있을까?
나는 단연코 능호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이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않는다. 이는 나 개인의 의견만이 아니다.
당대의 평가도 그렇고 오늘날 미술사가 대부분의 견해도 그렇다.
이인상보다 한두 세대 후배되는 문사인 이규상(李규象, 1727~1799)은 『일몽고一夢稿)』의 「서가록(書家錄)」과 「화주록」에서 이인상의 그림과글씨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의 그림은 보통 화가들의 좁은 오솔길을 훌쩍 뛰어넘어 곧바로 꼿꼿한 자태와 파리하면서도 강단 있는 정신으로 화가의 상승별품(上乘別品)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화주록」)
이인상 그림의 필획은 그윽한 맛이 있는 가운데 깎아지른 듯 삼엄하며, 화법이 독특하면서도 막힘 없이 산뜻하고 시원하여 고금 화가들의 뛰어난 경지를넘나들고 있다. 그의 전서(篆書)와 팔분(分)의 획은 비록 옛날의 명수라 하더라도 그와 대적할 만한 이가 많지 않을 것이며, 도장은 힘 주는 것이 가지런하여 천기(天)가 흐르고 있다. 따라서 전서와 팔분, 회화와 전각 모두 신품(神品)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서가록」) - P59

능호관이 서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양반 사회에 어엿이 한몫 끼어활동하는 것이 가능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당시 사회적 기류가 서얼허통(庶孼通)에 점점 관대해져 가는 추세였고 특히 그것이 노론의 입장이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가 완산 이씨라는 명문의 자손으로, 특히 백강의 후손이라는 집안 배경이 있었다. 이미 그의 증조부, 조부, 삼촌 등이 모두 백강의 음보로 현감이나 찰방을 지낸 바있다. 셋째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로 그의 높은 인품과 뛰어난 학식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능호관 이인상의 인품은 정말로 곧고 높았던 모양이다. 그 주변에 있던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개결(介潔)한 선비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사람됨이대단히 원칙적인 도덕 군자였고 타협을 모르는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던모양이다. 동년배 친구였던 황경원은 그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곧아서 남과 마음이 잘 맞지 않았으며, 아첨해서 세상에 출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과 말할 때는 씩씩하고 굳세며 엄하고 곧아서 법도를 바로 지키니 사람들마다 경복(敬服)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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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아침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시 읽는다
서늘하다

간밤 공방과 안채를 오가며 내가 내놓았던 발자국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눈을 뚫고 가려면 처음부터 다시 길을 내야 했다. 눈에 묻혀 자루 끝만 보이는 삽을 꺼내 털다 말고 나는 멈췄다. 살아오면서 보았던 눈송이 중 가장 커다란 것이 손등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결정의 세부가 흐릿해지며 얼음이 되었을 때에야 미세한 압력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얼음의 부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 P185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 흰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섬세한 조직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차갑고 가벼운 것은.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 부드러운 것은.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혀 나는 눈 한줌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손바닥 위에 놓인 눈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손바닥이 연한 분홍빛으로 부푸는 동안, 내 열기를 빨아들인 눈이 세상에서 가장 연한 얼음이 되었다.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그러나 이내 견딜 수 없이 차가워져 나는 손을 털었다. 흠뻑 젖은 손바닥을 코트 앞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삽시간에 딱딱해진 손을 남은 손에 비볐다. 열기가 지펴지지 않았다. 몸속 온기가 손을 통해 빠져나간 듯 가슴이 떨려왔다. - P186

가물거리는 촛불의 음영 때문에, 인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인지 빛과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뿐인지 구별할 수 없다.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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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2백 년을 대표하는 화가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3원 3개 여섯 분을 꼽고 있다. 3원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3재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碩),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등을 일컫는다. 이런 식으로 말을 만들어 한 시대의 예술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물론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회화사는 3원 3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으며, 사실상 이들이 영조, 정조시대라는 그림의 전성기와 왕조의 마지막 미술을 상징하고 있으니 이런 세평을 그저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또 그런 평가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나름의 역사성을 갖는다.
본래 3원 3재라는 말이 생기기 이전에 먼저 ‘3재‘라는 말이 있었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보면 "세사인명화삼재(世稱士人名畫三齋)라 했다"는기록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사대부 출신의 선비화가로 영조 연간을 대표한다. - P15

실제로 3재의 화가들은 문자 그대로 우리나라 회화의 신경지를 개척한분들이다. 겸재는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담은 동국진경산수(東國眞景山水)라는 새로운 장르를 확립시켰고, 관아재는 그의 뛰어난 인물 묘사력과관찰력을 기반으로 하여 속화(俗)의 틀을 갖추어냈으며, 현재는 중국의남종문인화(人)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토착화시키는 데 성공한 분으로 관념적 화풍의 그윽한 멋과 조선 그림의 국제적 조응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ㅈ이들 3재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진경산수, 속화, 문인화라는 세 장르는 이후 조선 후기 화단의 일반적 경향으로 공인되어 훗날 3원의 화원들이 추구한 예술 세계는 모두 3재의 화풍에 근거해 있다. 그러니까 영조시대의 선비화가인 3재에 의해 개척된 그림의 새로운 지평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정조시대 이후에 일반화되어 3원을 비롯한 도화서 화원이라는 일종의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확산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조선 후기 회화사의 큰 흐름이며, 이는 영조와 정조시대 문화적 성격의 중요한 변별점이 된다. - P15

그런 3재 중에서 현재 심사정, 1707~1769)은 이래저래 가엾고 불우한 처지의 화가였다. 그의 삶이 딱했다는 것은 살아 생전의 팔자 소관으로 돌린다손 치더라도,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고독과 가난을 예술로 승화시킨 주옥 같은 명작들을 당시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은 바 없건만사후 2백 년이 넘도록 왜 그의 삶과 예술은 올바른 조명 한번 받아보지 못했는가.
심사정은 정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명화가였다. 
남겨진 유작들을 봐도 그의 회화적 기량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으며, 동시대의 평가 또한 당대의 최일류 화가였다. 영조시대 서화가에 대해 가장 풍부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이규상(李奎象)의 『일몽고(一夢稿)』 중 「화주록(畫廚錄)」에는 다음과 같이 증언되어 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은 현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앙하였고, 어떤 사람은 겸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숭하였는데, 그림이 온 나라에 알려진 것도 비슷하였다. - P16

그런 현재 심사정의 예술이 오늘날에 와서는 겸재에 비할 때 그 예술적성과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대중적인 지명도도 낮게 되어버렀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과 그림을 대하는 관념에서 영조시대와 오늘날은 엄청나게 차이가 생겼다는 점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림을 평가할 때 그 예술적 입장과 관계없이 거론하는 첫번째 덕목으로 작가의 개성, 독창성을 든다. 또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예술관에 입각한다면 현실적 리얼리티가 문제로 대두되는데, 이 두 측면에서 심사정의 예술은 결정타를 입는다. 같은 3재의 화가 중 겸재의 진경산수와 관아재의 속화는 장르 자체의 독창성도 돋보이고, 그 나름으로 사회적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스트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들의 예술은 오늘날 더욱 부각될 수 있는 소지를 담고 있지만, 현재에겐 그런 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이룩했다는 문인화풍의 확립이라는 것도 중국에서 제시된 패턴을 소화해낸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해버리면 그의예술에서 남는 것이라곤 붓을 다루고 먹을 쓰는 재주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 P18

조선 후기 중국의 남종문인화가 본격적으로 이입될 때 심사정만큼 대가의작품을 많이 방작한 화가는 없었고, 또 그것을 심사정만큼 자기화한 화가도없었다. 그의 방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 중 송나라 마원(馬)을방한 <방마원산수>, 송나라 미 남궁(南宮: 米芾)을 방한 <방미남궁산수>, 원나라 예 운림을 방한 <방예운림산수>등을 보면 구도 · 필법등은 대가의 고전적 작품을 본받아 그렸지만 단순히 그것을 본떠서 베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여기에 예를 든 작품은 그 누구를 방했건 관계없이 여름산수, 가을 산수의 그윽한 멋과 조용한 시정이 은은히 일어나는 명품들이다.
그 필치의 세련됨, 구도의 완벽성은 모두 심사정 산수의 특징으로 그는 이렇 - P20

게 자신의 예술, 우리 예술의 넓이와 깊이를 더해갔던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건 역사적 관점에서 보건, 현재 심사정은 이렇게 확고한 자기의 예술 세계를 견지해왔으니 그에 대한 오늘날의 대접은 부당한것이다.

현재 심사정은 1707년(숙종 33), 죽창(竹) 심정주沈廷胄, 1678~1750)의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심사순(沈師淳, 1701~1723)과 누이가 있는 3남매중 가운데였다. 어려서 이름은 이숙(叔)이라 했고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호는 현재라 하고 묵선(禪)이라는 도인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1769년(영조 45)까지 63세의 일생을 살았는데, 배천(白川) 조씨와 결혼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여 사촌인 심사문師)의 둘째 아들 심욱진(沈郁鎭)을 양자로 받아들였음을 족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밝혀주는 전(傳)이나 행장은 고사하고 벗이나 동시대문장가들이 증언하는 제대로 된 글귀 하나 아직껏 발견된 것이 없다. 어쩌면 그런 기록은 씌어진 일조차 없을지도 모를 정도로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고적하고 불우한 일생을 살아갔다. - P21

그런 가운데 그의 삶을 얘기해주는 오직 한 편의 글이 전해지고 있으니, 그것은 심사정의 7촌 손자 되는 심익운(沈翼雲, 1734~?)이 쓴 「현재거사 묘지명(玄齋居士墓誌銘)」이다. 심익의 병세집(竝世集)』에 실려 있는 이 글은 "현재거사를 이미 장사 지낸 이듬해 경인년(1770)에 심익운이 그 묘의뜻을 돌에 새긴다"라는 부기와 함께 시작되는데, 쓸쓸하기가 이를 데 없다.
흔히 옛 사람이 묘지명을 지을 때면 고인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그 삶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 것이 관례였건만 어찌하여 그 손자뻘 되는 사람은 이토록 애절한 글을 지었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이 묘지명을 통해 심사정의 살아 생전 모습을 애처로운 마음으로 그려보게 된다.

청송 심씨는 그 공훈(功勳)과 덕이 세상에 빼어났다. 우리 만사부군(晩君之源)에 이르러서는 더욱 번창했는데 거사는 그의 증손자였다. - P21

거사는 태어나서 몇 해 안 되어 홀연히 물체 그리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네모 나고 둥근 형상을 모두 그려낼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워 수묵산수를 그렸는데, 옛 사람의 화결(訣)을 보고 탐구하고 나서는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여到] 드디어는 이제까지 해오던 방법을 크게 변화시켜 그윽하면서 소산한 데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종래의 고루한 방법을 씻어내는 데 힘써 중년 이후로는 융화천성(融化天成)하여 잘 그리려고 기대하지 않아도 공교롭게 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관음대사(觀音大師)와 관성제군(關聖帝君)의 상을 그렸는데 그것은 꿈에 본 것을 그린 것이었다고 한다. 연경(燕京)에 다녀온 사신들이 말하기를 연경의 시중에는 거사의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돌이켜보건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50년간 근심과 걱정, 낙이라곤 없는 쓸쓸한 날을 보내면서도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몸이 불편하여 보기에 딱할 때도 그림물감을 다루면서 궁핍하고 천대받는 쓰라림이나 모욕받는 부끄러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 P22

그리하여 통유(通幽)의 경지, 입신(入神)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으니 멀리 이국 땅까지 전파되고,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그를 사모하고 좋아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거사가 그림에 임한 바는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하여 대성(大成)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거사가 이미 세상을 떠났건만 집이 가난하여 시신을 염(殮)하지도 못했다. 나 심익운은 여러 사람의 부의賻儀)를 모아서 장례 치르는 것을 도와주어모년 모일 그의 상자(喪子) 욱진이 파주(坡州) 분수원(分水院) 언덕(坐原)에 장사 지냈다. 장지는 만사부군의 묘소 동쪽 어느 언덕이다.
이어 명(銘)을 붙이니, 거사의 이름은 사정이며 이숙은 그의 자이다. 아버님은 정주이고 어머니는 하동정씨였다. 아내에게는 자식이 없어 사촌형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고 향년 63세에 돌아가시어 여기에 장례를 치렀다.
애닯을지어다! 후세인이여, 이 무덤을 훼손치 말지어다!

이 애처로운 「현재거사 묘지명」을 읽노라면 그의 예술은 궁핍과 고독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야생화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 P22

늙을 때까지......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말 속에서 그의 작품은 감추어진 예술의 열정과 인내의 노작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심사정 예술의 남다른 매력과 개성은 바로 이런 삶의 조건에서 형성된 것이다.

현재 심사정이 그토록 불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그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청송 심씨 집안의 몰락 과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심사정의 집안은 묘지명에도 씌어 있듯이 당대의 명문이었다. 증조할아버지되는 만사(심지원, 1593~1662)은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으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려 평안감사, 이조판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올랐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셋째 아들인심익현, 1641~1683)은 효종의 둘째딸인 숙명(淑明)공주와 결혼하여 청평위(淸平)에 봉해지고 임금의 총애를 받아 세 차례나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여러 차례 지냈으니왕가의 사돈집으로 권문세가라 할 만하였다. - P23

그러던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심익현의 막내 동생이자 심사정의 할아버지 되는 심익창(沈益昌, 1652~1725)이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있을 때인1699년(숙종 25)에 단종의 복위를 경축하는 과거 시험에서 시험관과 공모하여 답안지에 이름을 바꿔치기 하다가 들통이 나서 엄벌을 받게 되는 과거 시험 부정 사건 때문이었다. 이때 심익창은 간신히 특명으로 곽산(郭山)에 귀양살이를 떠나는 것에 그쳤으나, 이른바 이 기묘과옥(己卯科獄)은 명문 청송심씨 가문을 파렴치한 패륜가로 전락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심익창은이후 무려 10년간의 유배 생활을 보내고 1709년(숙종 35) 11월에 풀려났다.
과옥의 수치와 10년간의 귀양살이 후 근신하고 있던 심익창에게 또다시정치적 풍파가 덮친 것은 이른바 왕세제(王世弟) 시해 미수 사건이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은 숙종의 유언을 내세워 연잉군(延礽君: 후에 영조)을왕세제로 책봉하는 데 성공하고 이어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 청정하게 했으나, 소론의 정치적 반격에 밀려 노론 4대신이 유배되고 종국에는 사사되는 신임사화(士禍)가 일어났다. - P23

이렇게 정권을 차지한 소론측은 아예 노론의 지지를 받는 연잉군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 사건의 주범은 소론 중에서도 과격파인 준소(峻)의 김일경(金鏡)으로, 그는 내시 박상검(朴尙)과 궁녀를 매수하여 왕세제를 시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사건 수사 과정에서 그 배후에 심익창이 있었다는사실이 드러났다. 심익창은 박상검의 옆집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그를 가르쳤고, 김일경은 심익창 전처의 외사촌 오빠였다는 사실 등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김일경이 내시 박상검과 궁녀를 죽여 증거를 없애버림으로써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그 후 3년 뒤인 1724년에 병약한 경종이 마침내 죽고 연잉군이 임금(영조)으로 즉위하게 되자 사태가 달라졌다. 영조는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이때의 사건들을 재수사하기 시작했다. 먼저 김일경을 신임옥사의 무고죄로처형하고 이듬해인 1725년 봄에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 미제 사건의 배후인물인 심익창을 극형에 처해버렸다. 그리고 심익창의 큰아들인 정옥(玉),
넷째 아들인 정신(神)은 죽기 직전에 감형되어 변방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니 집안은 완전히 절단나고 말았다. - P24

이때 심사정의 나이 18세였다. 젊은 나이에 그가 받았을 심적 타격은 능히 알 만하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의 저서로 생각되는 동패락송 속(東稗洛誦)』을 보면 "현재는 성품이 몽매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숙맥이었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가 이렇게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소년 시절에 겪었던 이 가정사적 충격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로부터 3년 후인 1728년에는 ‘이인좌의 난‘이 터졌다. 영조 즉위와 동시에 권력을 잃은 소론 중 준소가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여 이인좌가 참형되는 사건이었으니, 이후 소론 중의 준소는 출세할 생각은 꿈에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왕조 사회에서 이럴경우 얼마나 오랫동안 그 꼬리표가 따라다녔는가는 오늘날 우리로서는 결코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혹심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심사정의 그림은 "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에게는 패트런은 고사하고 어느 선비도 내놓고 그의 그림에 시 한 수 지어 붙이는 일조차 없을 정도로 철저히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24

사실 알고 보면 조선왕조 사회에서는 심사정처럼 불우한 환경에서 일생을보내야만 했던 수많은 양반이 있었다. 개중에는 세상을 등지고 처연한 은일자적 삶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도 있고, 세상을 비관하면서 술로 그 고통을잊으려 한 사람도 있었고, 풍류객이 되어 세상을 떠돌다 일생을 마친 사람도 있었다. 살아가면서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억울한 사람들이 보인 참담한 굴욕, 낭만적 반항, 생에 대한 의욕 상실은 그런 식으로나타나곤 한다.
그러나 심사정은 다행히도 그림 솜씨가 있어 그것을 통해 자기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마련했다. 마치 중종 때 양송당(堂) 김시(金)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김안로(金)가 처형되는 비극적 환경을 자신이 예술적 삶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아가서 현재는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쓰라림과 고독의 감정을 붓끝에실어 동시대 누구보다도 화가의 감정이 깊이 개입된 명상적이며 때로는 애수의 시정이 들어 있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삶이 불우했던 만큼 그의 예술은 정서의 심화를 일으킬 수 있는 회화적환경으로 전환해갔던 것이다. - P25

마치 현대미술에서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국제성이라는이름 아래 외래 사조를 추종하는 데 지나지 않았느냐, 아니면 그 모더니즘의 미학에 자극받고 힘입어 우리 미술의 폭을 넓히고 질을 고양시킨 무엇이있느냐에 따라 그 예술을 달리 평가하게 되는 것과 같다.
현대미술에서 대부분의 화가들이 국제적 유행 양식을 추종하는 것에 급급하여 자기 예술을 만들어내지 못했음에 비해, 수화(樹) 김환기(金煥基)와고암 이응로(李應魯)가 보여준 예술 세계는 우리 현대미술사의 가장빛나는 부분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듯이, 심사정은 중국 그림을 모방하면서그것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이동하거나 물리학적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에 의한 재창출이라고 할 만큼 자기화하였다는 데 중요한 미 - P53

덕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겸재나 관아재처럼 현실과 현상을 추구하다보면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근원성 내지 철학성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의 남종문인화풍속에서 보이는 작가정신의 철학적 고양과 작가적 감성의 적극적 개입이라는미덕을 살려내어 심사정은 그런 관념성과 정서를 적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진경산수나 속화의 박진감과는 또 다른 미감의 세계, 즉 그림 속에서차분하고 명상적이고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서 고양과 정서의 환기작용이 거기에는 있었던 것이다. 이규상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심사정은 "그림에서 정신을 숭상(畫尙精神"한 화가였다. - P54

조선 후기 회화에서 사람들은 진경산수와 속화가 지닌 사회 변혁적 기류를 읽어내고, 그것이 이 시기의 중요한 미술적 동향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사실인즉 그렇고, 특히 시대 분위기 내지는 현실의 직접적 반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게 해석할 만하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진경산수와 속화라는 즉물적 사고의 뒤안에 서려 있는 철학적 관념적 사고로서 문인화풍이 공존하고있었음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철학적·정서적뒷받침에서 즉물적 사고는 깊이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겸재의 진경산수와 현재의 남종문인화를 그런 면에서 대비시켜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겸재에게는 존재론적 사고가 우위를 차지한다면, 현재에게는 인식론적 사고가 앞선다. 겸재에게는 개별성 · 사실성·현실론이 중요했다면, 현재에게는 보편성. 관념성 · 원칙론이 중요했다. 겸재는 대상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면, 현재는 그 대상의 성격을 보편화시키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그림 형식에서 겸재는 묵법(墨法)보다 필법(筆法)을 중시한 데 비해, 현재는 필법보다 묵법을 중시한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있었다. 그것은 양자의 강점이자 곧 특징이기도 하다.
모든 대비는 대비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혼연히소통되는, 그리하여 서로의 약점을 보강할 수 있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 P54

현실적 사고에 얽매이다보면 보편성을 잃기 십상이고, 존재론에 집착하다보면 인식론의 지평을 망각하게 마련이다. 겸재의 진경산수가 박진감을 표현한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실경의 개별적 성격을 조선 산수의 보편적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할 때 반드시 보완했어야만 했던 그 무엇이 있었다. 현재가 보여준 보편성 관념성이라는 것도 당대적 정서와 조선적 서정에 뿌리지 않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겸재의 진경산수에 서려있는 남종화적 분위기, 현재의 문인화에 배어 있는 조선적 서정은 바로 그런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힘이었다. 또 겸재도 관념적 남종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렸고, 현재도 금강산 같은 진경산수를 그렸다는 사실은 양자의 대척적 측면 못지 않게 상호 보완적 측면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3재의 시대가 지나가고 3원의 시대가 오면, 단원 김홍도는 바로 이 대비된 양자를 통합하면서 그림의 새 차원을 펼치게 된다. 한마디로 줄여서 겸재의 진경산수를 현재의 남종문인화풍으로 재해석한 것이 곧단원의 산수화라고 할 것이다. 그런 현재 심사정인데 우리는 영조시대의 회화적 성과를 말하면서 그를 너무 소홀히 대접하고 있다는 자책이 일어난다.
살아 생전에 쓸쓸한 나날을 보냈던 현재 심사정의 신세를 더욱 가엾게 만든 것은 사실 이 시대 미술사가들이었다는 미안한 생각이 내 손끝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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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전도>에서 완성된 겸재 화풍의 중요한 특징은 대담한 구도의 변형과 필묵의 농담 대비로 요약될 수 있다. 이제까지 그의 금강산 그림이 기본적으로 대상의 충실한 묘사에 있었다면 여기에 이르러서는 사실(寫實)에서사의(寫)로 대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겸재 진경산수의 가장 큰매력이며 미학이다.
그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에는 화가의 주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의사상과 시정이 화면 속에 충일된다. 겸재에게 『주역(周易)』을 배운 금석 박준원이 "겸재는 『주역』을 좋아하여 자못 역리(易理)를 잘 풀었는데 역의 이치를 잘 푸는 이는 변화를 잘하는 법이니, 겸재의 화법은 『주역』에서 얻어 그러하던가"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는 겸재 그림에서 음양의 대비란 외형상의 형태만이 아니라 그 내용과 정신까지 말한 것이었다.
그래서 훗날 송호(松湖) 유언술(兪彦述, 1703~1773)이 박대원(朴大源,
1694~1766)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화첩』에 부친 다음과 같은 글은 소박한 감상론이지만 실상은 겸재의 미학을 핵심적으로 잡아낸 명문이다. - P259

이는 겸재 팔십 노인의 그림으로 박대원의 소장품이다. 박대원은 그림을 알지 못하나 이 그림을 아주 사랑하여 보배로 여기며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으니어찌 그 사랑하는 바가 그림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겸재는 그 흉중에 있는 바를 붓끝에 정신을 실어 발현한 분으로, 그는 늙어서까지 이를 잃지 않았다.
겸재의 그림을 말하는 세상 사람들은 문득 그 빼어나고 기이함을 보면서 절규하듯 말하기를 "핍진하도다" "신운이 감돈다"라고 하니 이는 그림을 아는소리이다. 그러나 겸재는 모르는 말이다. 박대원은 홀로 필법의 기교를 뛰어넘어 신회가 통하듯 겸재의 마음을 얻고 팔뚝 아래에 두며 마음으로 그것을 사랑하니, 박대원은 이른바 그림을 아는 자는 아니지만 그림 보는 법은 아는 자가 아니겠는가. - P260

이런 그림들을 겸재의 첫 금강행 때 소작인 「신묘년 풍악도첩』과 비교해보면 초년작과 만년작의 차이를 한눈에 알게 되며 과연 같은 화가의 솜씨인가 의아심조차 일어나게 된다. 만년의 원숙한 노필이 갖고 있는 위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 <만폭동도> 를 보면 겸재의 적묵법과 스스럼없는 필치가 뒤엉켜 있는데 그 빠른 필치로 화면상에는 더할 수 없는 동감(感)이 일어나고있다. 마치 내금강 계곡의 물소리가 울려퍼지는 듯한 생동감이 일어난다. 나무, 산봉우리, 바위, 물결 어느 것을 그리든 스스럼없는 붓놀림이 그대로 감지되니 이것이 바로 겸재가 말한 천취인가 보다.
<비로봉도>는 우뚝한 비로봉 아래 뾰족한 중향성 봉우리들을 배치한 단순한 구도지만 부드럽고 날카로운 붓의 거침없는 필세(筆勢), 그리고 능숙한 번지기 솜씨로 표현한 운연(雲煙)의 모습은 가히 천취를 느끼고도 남음이 있다. - P303

<만폭동도> <비로봉도> 선면 수묵 <금강전도>가 겸재의 금강산 그림 중남성적 진경산수의 멋이라면, 여성적 진경산수로서 만년의 명작은 단연코간송미술관 소장의 <금강대도>와 <정양사도>를 꼽게 된다. 이 작품들은 담묵의 은은한 설채와 필선으로 아름답고도 신비한 화면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마치 망원 렌즈로 포착한 듯 금강대를 강하게 클로즈업한 시각부터 노련한 경지인데 유연한 묵법은 실경의 사실성을 넘어 필법과 묵법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그것은 현대미술에서도 이룩하지 못한 이형사신(神)의 극치라 할 만하다.
겸재 만년의 금강산 그림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선면 수묵<금강전도>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우리를 부채살 모양에 따라 꺾어돌리듯 한껏 펼쳐놓은 구도로 더할 수 없는 박진감이 느껴진다. 이런 대담한 구도의 변형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만년의 자신감이 아니면 다다를 수 없는 경지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안개를 표현한 담묵의 번지기는 그야말로 원숙미의 극치로 그 감동이란 실경을 보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 P303

겸재 만년의 원숙미가 절정에 달한 작품, 그러니까 겸재의 대표작을 꼽자면 누구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박연폭도(朴淵瀑圖)>를 빼놓지 못한다. 사실상 겸재 예술의 최고봉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1751년 겸재 나이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는 겸재의 인곡정사 뒷산으로 그 준수한 바위봉우리가 비안개 걷히며 환히 드러나는 모습을 장쾌하게 잡아냈다. 바위봉우리의 미끄러운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몇 번이고 붓을 가하여 그 붓자국이 더욱 질감을 느끼게 한 것이 이 그림의 핵심인데, 이에 못지 않게 주변 산자락의 바위와 소나무 그리고 태점이 너무도 천연스런 붓놀림으로 묘사되어 화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박진감이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숲을 그리는데 농담의 밀도를 지니고 있고 산자락을 타고 오르는 성곽의 모습이나 적묵의 시커먼 바위 위에도 소나무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디테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치밀한화면 경영이 있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하나의 작품이 명작으로 칭송됨에는 그만한 노력과 완결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이 76세 노화가의 필치라는 사실이니 만년에도 최선을 다했던 겸재의 창작태도에 우리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 P313

<인왕제색도>가 겸재의 진경산수에서 대상에 충실하면서 박진감을 잡아낸 작품이라면, <박연폭도>는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켜 사실성을 뛰어넘어 곧바로 회화미로 나아간 명작이다. 겸재가 이 작품에서 겨냥한 조형목표는 흑백의 강렬한 대비를 통한 화면상의 울림이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폭포수의 흰 물줄기를 강조하기 위해 양옆 벼랑을 한껏 꺾고 구부리고 짙은 먹으로 겹겹이 비비듯 칠하여 그 대비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강함을 생경한 곳으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역시 소나무와 태점으로 활기를 넣어주고 있다. 정자 아래로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 선비의 모습과 절벽 위 성문으로 화가의 시점이 분주히 오르내리는 역동감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정밀하게 묘사한 것이 없으면서도 어떤정밀한 그림도 따라올 수 없는 박진감을 일으키는 것, 이것이 바로 만년 겸재의 노필이 보여준 가장 큰 미덕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가 겸재 예술의 종점이었다. 겸재는 이렇게 자기 예술의 절정에서 인생을 마감했다. <박연폭포> 이후 겸재의 삶과 예술이란 그 절정의 여운일 따름이었다. - P313

겸재의 이러한 만년의 필치를 보면 인생과 예술의 오묘한 리듬을 생각하게 된다. 그림으로 말할 때 대상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며 미세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는 성실성은 중년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런데 노년을 지나 만년의 무르익은 경지로 들어선 대가들은 언제 그랬더냐 싶을 정도로 그 치밀함을 버리고 대상을 되도록 간략하게 요약하려 든다.
디테일을 과감히 생략하는 것은 물론이고 형상의 골격 자체에 과장과 변형을 가하여 요점만 제시하고 만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불성실하고 소략하다는 생각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예술이란 오묘하여 그런 만년의 소략함이중년의 치밀함보다 더욱 박진감 있고 깊은 멋을 전해준다. 그것이 만년의 경지이다.
그러나 인생과 예술에는 준엄함이 있어 만년의 원숙한 경지란 반드시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성을 경험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중년 시절에 만년의 작업을 시도했다면 그것은 불성실이고 일시 성공한다고해도 조로(早老)하고 마는 법이다. 겸재로 말할 것 같으면 60대를 다 보내는노년에 이르기까지도 그런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성을 버리지 않았다. 때문에 겸재의 만년은 더욱 원숙했고, 남들은 노년의 경지에 머물고 만 것을 만년에 이르러 한번 더 높이 끌어올렸던 것이다. 더욱이 겸재는 84세까지 장수하는 천복을 누렸다. 단원 김홍도를 겸재 정선과 비교할 때 아쉬운 것은 단원은 나이 60세 무렵에 세상을 떠나 겸재가 70대에 보여준 만년의 원숙함같은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 P316

조선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분인 겸재의 일생은 이렇게 끝맺었다. 그런데 겸재의 전기를 쓰면서 나는 겸재의 죽음에 대해 이상하리만치애도의 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죽음에 임하여 일어나는 감정이란 오로지 그의 위업에 대한 공경과 찬양뿐이다. 한치 모자람이 없는 고마운 인생이었다는 감사의 마음뿐이다.
겸재가 이룩한 진경산수의 세계는 진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적 산수화를 창시하고 완성했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성숙에 힘입어 이를 자신의 숙명적 과업으로 알고 신분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천하다고 비웃는 소리에 괘념치 않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래서 그의 위업은 더욱 위대하게 다가온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당대부터 문인들의 상찬과 존경을 받았다. 그로 인하여 시와 그림은 더욱 가까워졌고 그림의 사회적 위치도 한껏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겸재의 진경산수는 당대부터 많은 화가들이 추종하는 바 되어 그의 제자는 물론이고 화가라 지칭하는 사람으로 겸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강희언, 김희겸, 김윤겸, 정충엽, 정황, 마성린, 김응환, 김홍도, 이인문 ....... 그리하여 18세기에는 ‘겸재 일파의 진경산수화풍‘이 형성되었고, 진경산수는 마침내 하나의 회화 장르로 확립되었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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