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과 윤국에 대한 근심 걱정과 그리움 사이에 가끔 끼여드는 송영광을 향한 환국의 감정이다. 그것은 오랜 우정을 통하여 서로 알고 이해하는 데서 우러난 순수한 감정인 것이다. 물론 천성적으로 타고난 영광의 인간적 매력에 매료된 점도 있었지만 상처 받은 영혼의 신음, 깊은 곳에 묻어둔 통곡 같은 것, 외톨이의 애잔한 그림자를 끌고 가는 듯한 모습, 그것은 슬픈 것이었지만 환국에게는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섬세하고 화사한 영광의 감수성을 사랑했으며 굽힐 줄 모르는 내면의 견고한 은빛 성(城)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특히 그림을 그릴 적에 환국은 영광을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어떠한 장점에도 백정이라는 신분의 꼬리표는 불어다녔다. 그 꼬리표는 그의 삶을 강인하게 지배하려 했고 그것에 불복하여 현실에서 유리, 방랑의 길을 택하였던 송영광. 환국은 길을 걷다가, 한밤중에도 가끔 그의 삶을 생각할 때가 있었다. 떠난 뒤에는 더욱 선명하게 그의 모든 것이 떠오르곤 했다.
‘영광의 어디가 어때서? 양현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째서 불행해지나. 왜 그런 말을 했지? 전염병 환자처럼,
양현으로부터 물러나라고, 그에게 상처를 주기론 나라고 예외는아니었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나를 용서했다.‘
환국은 그런 말을 혼자 중얼거릴 때 깊은 회한에 빠진다.
- P247

‘영원한 자유인 송영광, 세속적 욕망을 다 버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취했던 사내, 넌 백정의 그 시퍼런 칼날같이 절벽에 서 있었고방금 잡은 짐승의 피같이 신선(新鮮)했다. 상식에 찌든 내가 널 보고 무슨 말을 했지? 양현과 너를 저울대에 올려놓고 마치 인색한장사꾼처럼 저울질을 했다. 도대체 사람과 삶은 저울대에 올려놓을 수 있는 뭐 그런 거였나? 어쩌면 영광은 자신의 생애, 단 한번, 양현을 위하여 현실과 타협하려 했는지 모른다. 단 한번의 기회였는지 모른다. 그것을 박탈할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었는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지나놓고 보면 양현이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주변 사정에 따라서 마음을 달리할 그런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양현이가 세속적 욕망이 강했다면 영광이를 단념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비밀을 묻어둔 채 우리를 기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흑 오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순전히 양현의 감정 문제였지 두 사람이 뭐 장래를 약속한사이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안다."
"?"
"그애는 외로웠고 짝을 찾고 싶었을 거야."
이 경우 짝은 반드시 남자를, 결혼 상대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동류(同類)를 찾는다는 그런 뜻의 표현이다.
"네, 바로 그랬을 것입니다" - P248

찬하는 발길을 옮겼다. 명희는 말뚝같이 길 위에 서 있었다.
조찬하와 오가다는 환국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찬하가 급한 걸음으로 오가다를 따라잡았을 때 굳어버린 듯 오가다는 말이없었다. 뿐만 아니라 찬하를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귀었음에도, 옆에서 일의 전말은 알고 있었지만 찬하는 오가다에게 자기 마음 깊은 곳까지는 털어놓지 않았다. 그것은 굳이 비밀로 하려는 의도라기보다 찬하의 교양에 속하는 일인 듯싶었다. 보여지는 것을 감추려 하지는 않았으나 자기 감정에 대한 설명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가다는 가장 첨예하고 가장 절망적인 바닷가에서의 사건을 목격했으며 부서지고 깨어지는 찬하의 모습을 보았다. 한 사나이가 철저하게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오가다는 너무나잘 알고 있었다. 그때 찬하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얼마나 낭패를 했으면, 얼마나 자신이 처참했으면 인실과 오가다를 낯선항구에 내버려둔 채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떠나지 않았던가. 그것은또한 오가다에게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꿈같이 인실과 맺어졌고아들 쇼지와 이어진 진하고도 끈끈한 인연의 줄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거대하고 은밀하며 기적과도 같은 우연, 만나는가 하면 헤어지고 아아, 인간들의 끝이 없는 드라마, 오가다는진정 그 찬란함에 눈부심을 느낀다.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행복이든 불행이든 간에 삶은 찬란하고도 신비롭다. 그것은 어떠한 힘으로, 무엇에 의해 짜여졌더란 말인가.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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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이는 허겁지겁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양필구(梁必求), 그는 누구인가. 석이 처남이었다. 더 분명하게는 전처 양을례의 이복 오라비, 혼인 전부터 삼일 운동을 전후하여 사귄 친구로서 석이와 필구는 동지이기도 했다. 사악한 을례 친정어미가 석이 모친에게 작용하여 혼인이 성사되었을 때 양필구는 마치 타인과 같이 그들 결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또한 누이나 계모와의 관계 역시 타인과다를 것이 없었다.
석이 마음속 깊은 곳에 그리움은 있었으나 은인으로서 연상의 기생, 정작 본인 기화는 석이 감정 같은 것은 알지 못했는데 을례는 의심하여 질투하고 보복하려 했으며, 혹 석이에게 장래가 없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핑계로 삼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석이 뒤를 쫓는 나형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결국 석이는 만주로 피신해올 수밖에 없었다. 송관수 양필구 이범준은 그보다 늦게, 군 - P91

자금 강탈사건에 가담했고 군자금 수송에는 도솔암의 일진이 가세하여 만주로 건너왔으며 이곳 조직과 합류했던 것이다. 그들 중 송관수는 병사했으며 양필구 또한 왜헌병 총탄에 쓰러졌다 하니, 석이는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일진은 연안에 가있다는 확실찮은 소식이었고 이범준은 상해에 아직 있는 모양이었다. 일제가 망할 것을, 일각여삼추로 기다렸던 석이였다. 이제 언덕으로 올라가서 멀리 패망하는 일본을 보게 되었고 조선 독립의꿈이 확실하게 윤곽이 잡히게끔 되었는데 석이 마음속에는 일각여삼추의 기다림이 사라지고 없었다. 설렘이나 희망보다 이 비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석이는 자기 마음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죽었어야 했다. 눈보라치던 그 벌판에서 죽었어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사람이 그 얼마인가. 영광, 독립 투사, 어설프고도 또 어설프다! 그게 아닌데 진정 그게 아닌데.......‘ - P92

홍이 얼굴은 왠지 슬퍼보였다.
"서로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적어도 강두메는 깨끗하다. 깨끗한 정열이지. 사심이 없다. 그런 면에서 친구지만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리고 우수한 인물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어릴 적부터 두뇌가 비상했고 남다른 데가 있었지."
"그게 혹 그분이 말한 것처럼 형님의 감상 같은 것, 어릴 적 추억때문은 아닐까요?"
"추억?"
홍이는 가만히 영광을 쳐다본다.
"그럴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정당성이 있어."
"공산주의 말입니까?"
한동안 말이 없다가
"나같은 입장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있어. 획일적인 그것이 맘에 안 들어. 주의와 주장이 어떻게 다르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나 조직은 다수를 통제하는 것, 보다 이상적으로는 전부를 통제하는 것 아니겠어? 나는 정치나 조직 같은 게 생리적으로 싫어." - P108

"왜 그같은 인연을 맺는 거요? 밥벌이나 하면 됐지."
어리석은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뭔지 모를 분노 같은 것을 느끼며 지감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소망 때문이겠지요."
"소망?"
"예."
"무슨 소망?"
"한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뭐 세속적인 욕망하고는 다른 것 아닐까요? 절실한 것…… 사람들의 절실한 그 소망은 대체 무엇일까요?근원에서 오는 절실한 그것 말입니다."
"그걸 나한테 묻는 거요?"
"지감께서도 그 절실한 것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한평생을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았습니까."
"헛산 것이지 방황이라 하기도 민망하지요. 이건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니며 서서히 묻히면서 퇴물이 되어갔다.
그게 오늘날 조선의 소위 반가(班家)라 이름 붙은 자손들 말로가 아닌가요? 나야 세상사와 하직을 했고 천만다행, 조형은 변신하여 쟁이받이로 회생했으니."
가닥이 다른 말을 읊조리다가 지감은 무슨 까닭인지 씩 웃었다.
"그래, 그래서 조형은 그놈의 물과 인연을 맺으면서 소망을 이루었소?"
역시 우문이었다.
"아니지요. 애당초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 뭐랄까요? 소망을 위탁했다. 하하핫핫. 뭐 그런 것 아닐까요?" - P154

세 사람은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예불을 한 뒤 세 사람은 발길을 옮겨 관음탱화 앞으로 갔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본다.
"남현아, 우리는 나가세."
"예."
두 사람은 나가고 병수 혼자 남았다.
‘훌륭하다!‘
병수는 선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최서희의 모습이 안개같이 떠도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다만 그것은 아름답고 유현한 관음보살이었을 뿐이다. 머나먼 곳에서 비쳐오는 빛과도 같이, 구원과도 같이 아름다운 관음보살. 깊이 모를 슬픔이며 환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덧 경이로움과 감동은 떠나갔다. 대신 길상의 외로움이 가을밤처럼 숙연하게 묻어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병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자신의 외로움과 동질적인 길상의 외로움이 겹쳐지면서 외롭지 않다는 묘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영혼과 영혼이 서로 닿아서 느껴지는 충일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 P157

‘내가 옛날에 보았던 것은 최서희라는 계집아이가 아니었을 게야. 관음보살이었는지 몰라, 관음보살.‘
병수는 마음속에서 막연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한 여인을 그리워했던 것은 아니었을 게야. 관음보살을 향해서 절실하게 구원을 바랐을 것인지도 몰라.‘
빛이라고는 한 줄기 찾아볼 수 없는 캄캄한 밤과도 같았던 그 시절, 사방은 나갈 곳 없는 절벽, 병수는 한숨을 내쉰다. 시궁창과도같은 욕망과 생각만 해도 아득해지는 악행의 화신 같았던 부모, 그핏줄, 그것에 맞먹는 추악한 자기 자신의 모습, 그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었으며 자신은 그것에 사로잡힌 포로가 아니었던가. 스스로 육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영혼을 영원히 잠들게 하지 않고서는 그 운명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죽으려고 몇 번인가 강물에몸을 던졌던 일도 생각이 났다. 주막집 영산댁 얼굴이 떠올랐고 그의 양딸의 얼굴도 떠올랐다. 간절하게 간절하게 소망했던 것, 그것은 참된 것과 아름다움에 대한 그것이었다. 소망하는 것만으로 병수는 간신히 자신의 생명을 지탱할 수 있었다. - P164

‘그것이 없었던들 내가 어찌 살아남았으리.‘
지난날의 풍경을 화첩같이, 화첩 한장 한장을 넘기듯 병수는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저주스럽지가 않았다.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불행했다는 생각도 없었다. 삶의 값어치를 그런 대로 하고 살았었다는 슬픔만 있었다. 병수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관음탱화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길상형, 고맙소.‘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다가와서 병수의 손을 굳게 잡는것 같았다. 그것은 길상의 손이었고 관음탱화는 길상의 그 영혼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의 소망의 세계였다. - P164

모화는 통영으로 온 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어쩌다가 내려오는 사람이 있어서 마주치기는 했으나 골목은 호젓했고 소리가 없었다. 언덕으로 올라섰을 때 모화의 마음은 다소 진정이 되었다.
언덕에서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사방 언덕과 산에 둘러싸여 아늑해 보였다. 별천지 같았다. 항상 부둣가가 아니면 저잣거리를 오가는 모화에게, 몽치 때문에 정신이 산란한 모화에게는 마치남의 세상과도 같은 마을 풍경에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짓이겨진 자신의 팔자하고는 아무 인연도 없는 것 같은 남의 세상.
모화는 숙이를 따라 사립문으로 들어갔다. 말갛게 쓸어놓은 하얀 마당에 햇빛이 쏟아지고 모화는 순간 현기증을 느낀다. 장독가에는 빨간 맨드라미가 피어 있었다. 끝물의 봉선화는 나른해 보였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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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서 내는간행물 같은 것을 제작하기도 했고 지하 신문을 만들기도 했다. 다만 이상현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들에 대하여 열정적이기보다 이성적이며 기계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자신에게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민족주의의 강한 유대감으로 묶이어졌던 것이 차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 민족주의는 퇴색이 되었고 사회주의 성향이 짙어지는 판세, 만주 일대의 항일 세력이 특히 그러했다. 그런 판세에서 이상현의 입지가 미묘해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복고적 향수, 지난 시절의 생활 감정과 가치관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던 그의 심중 깊은 곳에는 아직 적의가, 혐오감이 남아있었다. 그는 최서희와 김길상의 결합을 아직 용서하지 않았고 증오하고 있었으니까. 조직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비조직적인 그의 생리가 조직 속에 들어 있다는 것에서 오는 한계 그것인데 그는 부친 이동진만큼의 현실주의자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의 주장, 다 좋소이다. 독립을 향해 가는 길을 함께 가는 것인데 뭐가 문제되겠소. 독립된 후 박이 터지게 싸우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서로 손을 놔서는 아니 되오" - P80

주정뱅이 이상현, 결국 그가 도달한 것은 자신이 낙오자라는 인식이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그를 편안하게 했다. 모든 불꽃은 다꺼져버렸고 갈등과 고뇌와 자책감은 가라앉았으며 차디찬 공간에다 이상현이라는 한 사내, 한 피폐한 사내를 놓았을 때 상현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고 그 객관화한 자신을 통하여 타자를 인식할 수 있었다.
이상현은 그러나 그것이 사람으로 향한 새로운 인식, 출발로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나이 탓이었는지 모른다. 기질 탓이었는지모른다. 어쩌면 그는 현재에서 미래의 시간을 닫아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졌던 시간을 그 시간 속에 흘러간사물, 그 원래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기록하는 행위로서 시작하는 출발점, 그의 기억은 보물의 창고였다. 이번에는 꽤 오래 참았다고 한 석이의 말은 실상 틀린 것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하여 밖에 나가서 추태를부리지 않기 위하여 의지력에 의해 참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방 안에서 책상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 P81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대립을 익히 알고 있는 석이는 마음속으로 홍이가 빨리 와주었으면 싶었다. 겨울을 잘 넘긴 중늙은이가 꽃샘 바람에 얼어죽는다는 말이 있듯, 요즘 석이 심정은 그러했다. 만주에 와서 십여 년 굽이굽이 잘 넘겨왔는데 요즘 들어서 석이는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패망은 시간 문제라했고 매우 고무되어 있다는 두메의 말은 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여하튼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목표한 그 날을 맞이할 것이요 고향에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석이는 조금도 설레지지 않았다.
지구라는, 우주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밑의 인간들이, 마치 어릴적 돌을 들어낸 개미집에서 미친 듯 방향감각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개미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하여 이상현이 - P87

기우하는 그런 상황을 석이도 예감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석이는진정 강두메와 같이 확신할 수 없었다. 일종의 무력감이었다. 그것은 송관수의 죽음에서 시작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성환이 학병에끌려갔다는 최근의 소식은 더욱더 석이를 무력감에 빠뜨렸다. 원래 과묵한 편이기도 했고 학식이 두 사람보다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예리한 칼날 같은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하는 것 이외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인데 오늘은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지만 석이는 이상현에게 잠재워두고 있는 어떤 분노가 있었고 확신에 찬 강두메는 그에게 늘 거북한 마음을 갖게 했다. 홍이가 와서 빨리 떠넘겨주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니까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온다.
- P88

석이는 허겁지겁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양필구(梁必求), 그는누구인가. 석이 처남이었다. 더 분명하게는 전처 양을례의 이복 오라비, 혼인 전부터 삼일 운동을 전후하여 사귄 친구로서 석이와 필구는 동지이기도 했다. 사악한 을례 친정어미가 석이 모친에게 작용하여 혼인이 성사되었을 때 양필구는 마치 타인과 같이 그들 결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또한 누이나 계모와의 관계 역시 타인과다를 것이 없었다.
석이 마음속 깊은 곳에 그리움은 있었으나 은인으로서 연상의기생, 정작 본인 기화는 석이 감정 같은 것은 알지 못했는데 을례는 의심하여 질투하고 보복하려 했으며, 혹 석이에게 장래가 없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핑계로 삼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석이뒤를 쫓는 나형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결국 석이는 만주로 피신해올 수밖에 없었다. 송관수 양필구 이범준은 그보다 늦게, 군 - P91

자금 강탈사건에 가담했고 군자금 수송에는 도솔암의 일진이 가세하여 만주로 건너왔으며 이곳 조직과 합류했던 것이다. 그들 중 송관수는 병사했으며 양필구 또한 왜헌병 총탄에 쓰러졌다 하니, 석이는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일진은 연안에 가있다는 확실찮은 소식이었고 이범준은 상해에 아직 있는 모양이었다. 일제가 망할 것을, 일각여삼추로 기다렸던 석이였다. 이제 언덕으로 올라가서 멀리 패망하는 일본을 보게 되었고 조선 독립의꿈이 확실하게 윤곽이 잡히게끔 되었는데 석이 마음속에는 일각여삼추의 기다림이 사라지고 없었다. 설렘이나 희망보다 이 비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석이는 자기 마음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죽었어야 했다. 눈보라치던 그 벌판에서 죽었어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사람이 그 얼마인가. 영광, 독립 투사, 어설프고도 또 어설프다! 그게 아닌데 진정 그게 아닌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홍이가 온 것 같았다. 두메는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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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밀수, 결코 명예롭다 할 수 없는 사건으로, 통영에 와서는 유치장 그 어둡고 캄캄했던 기억, 부끄럽고 음침하고 처참했던곳, 살벌한 그곳과 그곳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상의에게 오욕, 오욕 그 자체로 가슴 깊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에 대하여 정다울 수없는 감정도 그 일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영이를위시하여 친한 친구들은 상의가 병적으로 예민하며 상처받기 쉬운성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상의에게 대하여 묘한 보호 심리 같은 것을 가지게 되는데 특히 진영이가 그러했다. 그것은 참 이상한 현상이다. 집에서는 가족들에게 보호자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의였으니까 말이다. 사카모토 선생은 상의를 다만 평범한 학생, 희미한 존재로 보고 있었다. 소심하고 온순하며 늘 선생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여 쩔쩔매는 학생으로만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 상의의 태도는 강심장인 학생도 감히 취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사카모토 선생이 경악하는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니었다. 방 안의 하급생까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간 2료에서 온, 원한 찬 패거리들이 은근히 사카모토 선생을 골탕먹이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간접적인 행동이었다. 결코 정면 대결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생으로서그 한계를 넘을 수도 없었다.
"리노이에상! 그 태도가 뭐냐? 그게 학생으로서 취하는 태도야! 고개 빳빳이 쳐들고 누굴 노려보는 거야!"
"그럼 선생님이 취하시는 태도는 어떤 것이지요? 떳떳하신가요?" - P54

얼마간 안정은 되었지만 상의는 자기 자신이 그 얼마나 망가졌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치욕감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빌었다는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에게는, 처음부터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상의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과함께 마룻바닥에 꿇어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더할 수 없는굴욕감이었다. 요와무시! 하고 내뱉던 사카모토 선생의 비아냥거림은 아직 귓가에 쟁쟁했고, 누구 누구가 왔느냐 하고 물었을 때도사카모토 선생은 상의가 왔는지 안 왔는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잘못했다고 비록 빌지는 않았지만 꿇어앉았다는 자체가구차스런 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뭣 땜에 따지고 반항을 했는가. 상의는 물론 퇴학당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떠나고 싶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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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생활사에 대한 깊고도 풍성한 기록이자 생명들의 삶과 한(恨)에 대한 극진한 연민과 사랑의 세계인 우리의 「土地」는 여기 마침내 완결편에 이른다. 우리 근현대사의 어두운그늘 속에서 민족적 삶의 의의와 가치를 풍부하게 길어올린 「土地」는 온갖 사상과 이념의 틀을 넘어서 생명세계의 소망이 가득히 깃든 거룩한 생명관과 우주관의 세계를 열어 놓고 있다.
이 완결편에 이르러 침략과 정복의 망상에 절은 일본의 패전(敗戰)은 각일각 다가오고,
이 신(新)새벽의 어스름 앞에서도 깊은 상처를 사는『土地」의 주인공들은 짓누르는 역사의 무게속에서 삶의 허무를 보듬으며, 다시금밑바닥으로부터 강렬한 생의 의욕을 자각한다.
사랑의 상처에 괴로워하는 양현과 그녀를ㅈ모정으로 거두는 서희, 명희가 보낸 자금으로조직 재건에 힘을 얻은 지리산사람들, 사상의편견과 개인적 고뇌를 아파하며 조국의 독립만을염원한 만주의 인물들, 이들 모두는, 마치지리산이 생명들의 생사(生死)와화전(和戰)의 갈등을 껴안아 주듯, 모신(母神)의 드넓은 품속에서, 저마다의 포한(恨)의 삶 깊은 곳에서 새로운 역사의 빛을, 새로운 생(生)의 빛을 예감한다. - P-1

「토지」는 소설로 시작했지만, 소설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이제 끝에 다다랐다. 그 동안 작가는 끙끙 앓으면서 써왔고, 독자 또한 끙끙 앓으면서 읽어왔다. 이 땅의 바람도 앓았고 강도 앓았고 산도 앓았다. 삶이 앓는 모습이었지만, 이제 그 아픔으로 삶은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이 『토지』는 단순한 대하소설이 아니다. 확장되면서 바로 그 넓이와 깊이 덕택에 또한 분산되고 지워지는 소설이다.
조선 말기에서 해방까지의 긴 시간을 통해 이야기가 확장되지만, 예정된 목적으로 몰려가고 끌려가는게 아니고 시간의 그물망 속으로 흩어지면서 퍼지고퍼지는 이야기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인물들이 수없이 등장하지만, 단순히 최참판댁이라는 중심에 중속된 엑스트라가 아니고 모두 나름대로 생명의 접지점이자 분기점인 그들. 많은 인물들과 사물들을창조해내면서 작가의 힘이 팽창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들 사이사이 그들의 숨결 속으로 잦아드는 작가의 소리. 배경으로서 역사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지는듯하지만, 그것에 짓눌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틈과 구멍을 내고 실핏줄을 내는 문학. 그러면서 모든 생명체의 실존에 거룩함을 주는 문학.

金鎭奭 인하대 교수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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