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말처럼 상처를 잘 극복하여 성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타격을 받더라도 잘 맞서 싸우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 같은 말이 옳다고 여길 수 있다면. 내가 경험한 고통은 나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강하게 하지도 않았다. 어떤 상처는 내 마음의 구조를 비틀어 내가 원하지 않은 모양으로 바꿔놓았고, 사람을덜 믿게 만들었다. 마음의 힘을 고갈시켜서 나를, 타인을 사랑하는 힘을 앗아가기도 했다.
"너는 참 강한 사람이야."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할일을 처리해나가는 내 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그렇게 말했다. 죽기 살기로 맞서 싸웠던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 시간을 대부분내 힘으로 지나온 것도 맞다. 그런 면에서 내가 강하다는 말은합당한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애쓰고 힘을 들였던 것이 내게 좋기만 한 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못 견디겠는 건 견디지 말고, 그냥 주저앉고 싶으면 주저앉아도 됐을 텐데. 참아야 - P92

할 일과 참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지 않고 그저 참으며 그로인한 분노를 안으로만 삼켜대면서 나를 병들게 하지 않아도됐을 텐데.
하지만 그게 그때의 내 최선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마냥 경직된 채 훼손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 시간을 거치며 치유된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 내 삶을 밑도 끝도 없는 숙제 무더기나 천벌처럼 느끼지 않는다. 가끔은 그래도 살아서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침내 내 목소리로 말할 수있게 되었기 때문일까. 마침내 내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까. 심지어 누군가는 내 목소리를 들어주고 있다. 이 삶에서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 이 축복 안에서 내 삶은 더이상 벌이나 짐이 아니다. - P93

겨울의 끝자락에서 이 글을 쓴다.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안다. 계절의 변화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음을,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라는진실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긴 겨울이었지만 이 겨울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새로 주어지는 하루를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 어려서는 이 생각을 하면 마음이 곧장 허무로 기울곤 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절도 언젠가는 지나가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 유한한 찰나가 지금 내 손안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려 한다. 이찰나를 보다 가볍고 자유롭게, 작은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고싶다. 겨울은 거듭하여 다시 다가올 테지만 영원하지 않으며나는 아무리 차가운 바람이더라도 그것에 몸을 싣고 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니까.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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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빛은 그늘에서도 죽지 않고 자라는구나


2022년 여름
최백규 - P-1

비행


목련도 모가지를 분지르는 사춘기였다

너는 웅크리고 앉아 꽃 덤불이나 뒤적거리며 홀로 우거진목련나무를 견디고 있다

버려진 관에 스스로 들어가는 나를 구경했다 마른 팔과다리는 가지런히 접어 넣기에 알맞아 보였다 새처럼 가벼운몸짓으로 죽어갔다 다가가보니 입안 가득 빛을 피운 미래가누워 있었다

언젠가 이 낙화가 멈추면 우리도 영영 추락할 거라 예감했다

갈 곳 없는 학생들은 빈 공사장으로 모였다 그늘에 널린몸을 아무도 해치지 못하도록 끌고 왔다 친구들은 멀리 버리거나 태우자 했다 시들어가는 식물의 뿌리를 대하듯이나는 서투른 우리를 모아 올린 대성당이라 칭했다 그곳에서 짧은 기도를 청하고 오지 않는 종말과 천사를 기다렸다 - P100

이대로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잊어버리지말라는 인사가 혀에서 떨어지지 않아 목이 말랐다

어깨에 쌓인 첫눈을 털어내는 온도와 닮은 이름을 덮히면

꿈에서
헤집어진 늑골엔
머릿속이 뒤흔들릴 정도로 화사한 사원이 펼쳐졌다

희박한 빗소리로 울고

선잠에서 벗어나듯 아침이 오고 있었다 공터를 돌아다니며 소리쳐보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목련도관도 공사장도 그대로 있는데 세상에서 나만 사라진 듯했다 몽롱한채로 열꽃의 잔해를 털었다

너는
타오르는 목련나무를 맹렬히 노려보고서 있다.
- P101

너무 뜨거워 설핏 녹아버릴까봐 겁이 난다 캄캄한 동굴같은 눈으로 나를 전부 집어삼킬 것만 같다 죄악감을 태우는 냄새가 번지기 시작한다 흰 날갯짓이 돋아나듯이

누가 계속 올라와야 할 시간이라 부르고 있어서

목련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나갈 것이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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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이라도 책상 앞으로 달려가서 글을 쓰고 싶었다. 조금 더 깊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 써보고 싶었다. 가끔은 한밤중에 잠이 깨서 완전히 각성한 채로 소설쓰기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생각이 났다.
그때 왜 그렇게까지 소설 생각에 몰두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오랜 시간 눌러왔던 깊은 욕구가 내 의식에서 인정받자마자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던 걸까. 첫 책의 작가의 말에 쓴 대로 이 일을 포기한다는 생각만으로 울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 말고는 그 상태를 설명할 언어가 없을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공모전에 응모했지만 예심도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래도 소설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소설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점차 손이 풀렸다. 내 관념 속 ‘멋진‘ 문장을 포기하고 나만의 문체로 글을 썼다. 문체는 내면의 고유한 리듬이었다. 나는 나의 리듬을 존중하고자 했다. ‘주제‘나
‘의미‘ 같은 관념도 버렸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매일 글을 쓴지 이년이 된 시점이었다. 그때 나는 경장편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원고지 기준 이백오십 매 정도를 썼을 때 갑자기 어떤문장이 나를 찾아왔다. - P35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나는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내가 쓰고 있는 소설 바깥에 있다는 걸 알았다. 해변에 앉아서 모래에 손을 넣고 밤바다를 바라보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받아 적었다. 그 사람은 밤의 해변에서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기존에 쓴 이백오십 매의 글을 버리고 갑자기 찾아온 낯선 목소리를 따라갔다. 마치 스크린을 보듯 눈앞으로 이야기가 펼쳐졌다. 장면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고, 다시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다. 노력해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저절로 그렇게 됐다. 그 소설을 쓰면서 나는 쓰는 기쁨을 깊이 느꼈다.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작품에 온전히 접속할 수 있었다. 나는 내 고유의 색깔을 고치거나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써나갔다. 마치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소설을 썼다. 막히는 부분이 없었고 그저 보이는 대로쓰기만 하면 됐는데,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완성한 소설 「쇼코의 미소」를 가장 가까운 공모전에 냈지만 예심도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 P36

 밝은 밤」은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면서 붙잡은 통나무같은 것이었다. 나는 원고를 붙잡고 삶의 물살에 몸을 맡겼다. 그것을 붙들고 있는다면 언젠가는 뭍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밝은 밤의 마지막 문장을 썼던 밤이 떠오른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침대에 누워 콧물을 훌쩍거리며 나는 그전에는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어떤 두려움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어떤 인정을 받았을 때조차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 그 글에 대한 보상은 글을썼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넘치게 받은 느낌이었다. 이 책이 세상에 나가 어떤 평가를 받든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 글이완벽하지 않아도, 나름의 결점이 있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않았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온 마음으로 글을 썼다는 걸 내가 알았으니까. 그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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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본능적인 반응이다. 슬프면 슬픈 것이고 화가 나면화가 나는 것이지, 거기에 이성적인 이유를 달 필요는 없다. 자기 감정을 변명할 필요도, 정당화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일기장 위에서 나는 머뭇거리고 멈추면서 내 감정이 정당하지않다고 판단하거나 ‘내가 이렇게 느껴도 되는 거야?‘라고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감정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으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너무 혼란스러웠으니까. 내 감정을 존중해야 한다거나 감정에는 나쁘거나 좋은 것이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일기장을 펼치면...... 나는 느끼지 않고 억누르려는 예전의 습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삼십대 어느 시점의 나는 울어야 하는 일을 겪고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울면 멈출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랬다는 걸 깨달았지만, 일기장 위에서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도 그와 같았다. 내 감정을 한번 인정하기 시작하면 올이 나간 나일론 스타킹처럼 점점 그 상처가 벌어져서 수습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 P15

작가가 되고 언젠가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내게 여성주의가 ‘백신‘이었다고 말했다. 처음 여성주의를 받아들이고 공부하면서 느꼈던 분노, 슬픔, 자괴감은 이 세상을 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항체를 만드는 과정이었다고. 여성주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다치는 줄도 모르고 나를 다치게 했을 것이고 삶의 고비를 넘어가지 못하고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세상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존엄한 사람이야‘ 같은 소박한 수준의 자기긍정조차도 여성주의 없이는 내게 가능하지않았으리라는 걸 나는 안다.
내가 체득한 여성주의적 가치는 스스로의 가치를 회의하게 될 때, 누군가 내 공간을 함부로 침범할 때, 분명한 부조리를 맞닥뜨릴 때 미약하게나마 경고 신호음을 울리게 했다. 전에는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경고등이었다. 여성주의를 접하지 않고도 자기 가치를 긍정하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십대 초반에 여성주의를 만난 건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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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항구‘


은빛 섬광으로 휘번득이며
고기가 노닐고
해초 나른하게 꿈꾸듯 춤추었다
환하게 드려다보이던 남쪽 바다
내가 태어난 항구

조그마한 통통배 타고
섬으로 갈 때
물살에 손 담가보고
바다의 바닥을 내려다보고
하얀 등대 떠 있는 곳
용궁 생각을 했었지 - P-1

멀리 가까이
연인같이 오누이같이
다가서고 물러나는 섬,
순박한 사공 아저씨
환하게 웃던 얼굴
지금은 모두 전설이다 - P-1

동춘東春


사람이 살면 몇백 년을 살것는가!
해 떨어지고
공기도 모습을 감출 무렵
동춘 해안 집을 지나노라면
술판 치며 눈 감고 꺽쉰 목소리로
노래하던 뱃사람
항구에는 불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잡화를 펴놓은 노점에는
생선배 찔러먹고 사는 사내

푸른 가스등이 소리를 내며 탄다
소금끼 먹음은 바닷바람
방천을 치는 물결소리 - P-1

입항하는 뱃고동은 길게 길게 작별인 양 만만인 양상봉인 양 꼬리를 물고
아아 그게 언제였더라?
갯내음 실은 사람들은 모두 한복을 입던 시절
순사가 샤벨을 절거덕거리며 지나가던 시절 - P-1

개미


옥색 새벽이 걷히고
비스듬히 햇살 드러누운 마당에서
세상사에 귀 막고 오봉산 바라보며
돌을 깐다
나보다 먼저 새벽 헤치고 나온 개미들
그들 부지런함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모이를 물고 종종걸음 치는 것이
가련하고 안스럽다
그도 생명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행, 불행의 길을
아슬아슬하게 가고 있으니
비바람을 피하고 홍수를 피하고
포식자를 피하고 기근을 피하기 위해
어찌 저토록 나브대는가 - P-1

찰나의 별‘


인생살이 험난한 속에서도
쉬어갈 때가 있다고들 한다
쉬어갈 뿐이랴
황홀하고 아름다운 순간인들
없었겠는가
때로는 순간이
편안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한 것은
암흑 속에서 타는 촛불이거나
칠흑 같은 밤
빛나는 별 하나이기 때문이리라
한 송이 꽃이기 때문이리라
고독한 고통이기 때문이리라 - P-1

노을로 물든 강가*


상대방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고
단어도 곧잘 잊어먹는다
이승과 저승에다
한 다리씩 걸쳐놓은 듯
기막힌 상실감이
왜 이렇게 예사롭기만 한가

나는 인생을 다 살았는가
아니다 아니다 그럴 리 없지
온통 노을로 물든 강가
풀잎들이 사각거리는데
어릴 적에 심부름 가다가 - P-1

오십 전짜리 은전 하나 잃고
종아리 맞던 생각
엄마는 멀뚱멀뚱 울지 않는 나를
간 크다며 때렸지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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