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4월 광주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작고한 출판인 나병식이 지하출판으로 이만 부를 찍어 사방에 뿌리고는검거되었고, 나도 서로 말을 맞추고 시간을 벌기 위해 한 달쯤 도망다니다가 검거되었다. 그이는 경찰이 운암동 집을 수색하기 직전에 그동안 모아둔 항쟁 자료들을 마당의 창고 슬레이트 지붕 아래 숨겼는데, 방마다 뒤지고 화단까지 파헤쳤지만 다행히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의 안기부장은 장세동이었는데, 나병식과 나를 정식으로 구속하지 않고 ‘유언비어 유포죄‘ 정도의 경범죄로 다루더니, 마침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삼세계 문화제‘에 초청받은 나에게 외유하라며 일 년짜리 단수여권을 내주었다. 나는 급히 서울로 올라온 아내와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가지를 사고 밥 한끼 먹고는 공항으로 나갔다.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간나는 망명자 윤한봉과 실로 오 년 만에 상봉했다. 그와 함께 미주 한국청년연합과 재미 한국동포를 조직하기 위하여 13개 도시를 돌며 강연회를 열었고, 동포 원로들에게 그를 보증해주었다. 미국에서 문화패 ‘비나리‘를 만들고 ‘통일‘을 순회공연했으며, 도쿄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안내로 조성우를 비롯하여 교포 이삼세 청년들과 함께 같은 작업을했다. 그후 우리문화연구소와 문화패 ‘한우리‘를 조직하여 교토와 오사카에 지부를 두었고, 내가 귀국한 것은 일년 만인 1986년 5월 말경이었다. 다시 안기부에 연행되어 행적 조사를 받았으나 구속은 면했다. - P88
처음에는 광주를 떠나려고 운암동의 집을 내놓고 둘이서 서울과 수원 등지에 집을 보러 다닌 적도 있었다. 나는 1984년에 장길산을 끝내고는 정말로 광주를 떠나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는 당대에 대한 역사적 책무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창작하는 자로서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사회의 온갖 제약에 짓눌려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말 그대로 ‘창작의 자유‘ 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광주항쟁을 소설로 쓸 생각은 없었다. 누가 파리코뮌이나 러시아혁명을 소설로 쓰는가. 그 모두가 역사기록과 르포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다만 그런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쓸 수 없는 것‘과 ‘쓸수 있는 것‘은 작가의 자유에 의하여 결정되어야만 한다. 나에게는 세상이 온통 ‘무등산은 알고 있다‘라든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부끄러움‘ 이라든가 하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동어반복이며 억압이었다. - P89
우리는 너무 현실 자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고 그 불에 데었다. 나는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생생한 기억들과 더불어 여전히 ‘도청‘에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아마도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앓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아들과 딸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이 사라진 빈집을 지키면서 적막 한가운데서 문득 그이가내린 생의 결단이 아니었을까. 그이는 ‘평온‘을 말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골의 무싯날 같은 그런 나날, 그이의 집요한 요구와 준비에 따라서 우리는 법원에 갔고 나는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와 서울행 밤기차를 탔다. 얼마 뒤에 그이가 꾸려서 보낸 책이며 물건들을 트럭에 싣고 화가 홍성 - P89
담이 내 거처에 찾아왔다. 그는 우리가 그냥 예전처럼 작업실을 따로 쓰는 줄 알고 있다가, ‘아마 그 사람은 나를 다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듣고는 헤어지면서 나를 붙들고 울었다. 어쨌든 나는 1980년에서 1990년대 말까지 국내외에서 소설은 쓰지않고 광주에서 비롯된 ‘사회봉사‘에 바쳤으니 그냥 이름과 몸으로 때운셈이다. 그이와 나 사이에는 깊은 회한이 오래갔다. 나의 갑작스런 방북은 ‘무산‘을 뛰어넘으려는 것이기도 했고 그것들의 연원인 분단이라든가, 빨갱이라든가, 사상이라든가 하는 억압을 벗어버리는 어떤 ‘글쓰기의 자유‘를 확보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뒷날 그이가 나를 내보낸 것을 후회했다고 김지하 부인은 내게 전했다. 그후 나는 다른 이와 덧없는살림을 차렸고(이 또한 길게 가지는 못했다), 막내 호섭이가 태어나자마자 방북과 망명생활이 이어졌다. - P90
베를린이나 뉴욕에서 뭔가 어려운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나는 그래도 그이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을 했다. 그이는 언제나 사려 깊은 대답을 해주었고,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 내생각을 잘 아는 동지이기도 했다. 장남 호준이가 ‘전교조 교사들에 호응하여 ‘전고협‘을 조직했다가 구속되고 고등학교를 퇴학 맞았을 때 처음으로 그이는 전화기 너머로 울음소리를 냈다. 당시에 독일 정부와 협의하여 호준이를 초청했지만 한국 정부는 출국시켜주지 않았다. 나중에 돌아와 교도소에 있을 때 그이는 나와 이혼한 처지라 직계가족인 호준이를 앞세워 오 년 동안 나의 옥바라지를 했다. 나는 석방되어나온 뒤에 아들과 만나서 ‘돌아가도 되겠는지‘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한 달이 넘게 대답이 없더니 뒤늦게 말했다. "아버지 글쓰실 때의 긴장을 이제는 어머니가 같이 견디지 못하시겠답니다. 편하게 사시도록 놔두세요." 딸은 언젠가 말했다. 지금도 엄마는 꿈에 허둥지둥한다 - P90
고, 밥상 위의 반찬들이 모두 흙이나 재로 변하거나 손님은 잔뜩 왔는데빈 그릇뿐이어서 나의 성난 얼굴을 피하다 잠이 깬다고도 했다. 이게 내가 그이에게 저질렀던 짓들이다. 그이는 언제나 오고가는 사람들에게따뜻한 밥을 해주었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이나 되었고 보통 때도 늘서너 명의 식객이 끊이질 않았다. 어찌 그 모든 것들을 글과 말로 할 수 있으랴. 이 역시 나로서는 소설로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P91
홍희담의 「깃발」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것은 1988년 봄이었고 이는 한 해 전에 양김의 분열에 의하여 대선에 실패하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난 직후였다. "5월은 뭔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여전히 벌떡이고 불끈거린다. 아마도 5월 넋이 아직 잠들지 못했나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와 신경증과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속에 죽거나 사라진 사람들이 내뿜는 괴이한 힘에 고통받는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갑자기 자다 벌떡 일어나 밤을 새우며 미치도록 뭔가를 쓰게 만드는....... 그것이 「깃발」이다"라고 그이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참에 「깃발」에서 시작하여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문밖에서」 「김치를 담그며, 그리고 중편소설 「이제금 저 달이」에 이르기까지 다시 한번 읽었다. 마치 퇴색한 옛 사진을 보는 것처럼 아련했다. 마치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시기의 젊은이들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이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을 주었다. 나는 홍희담의 성정과 말투와 느낌의 결을 알고 있는데다가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까지도 현실 속의 누구라는 것을 대강 짐작할 정도로 나에게는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세월을 잘 아는 나로서는 어쩌면 객관적인 견해를 말하기가 어려울 것 - P91
같다. 나는 그야말로 ‘5월문학의 깃발처럼 뚜렷한 「깃발」을 여기서 언급하려 하면서도 사실은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와 「김치를 담그며」에더욱 애착이 간다. 선연한 색으로 나부끼는 「깃발」의 너무도 뚜렷한 투쟁적 계급성보다는 다른 두 작품에 드러난 항쟁 이후의 상처들을 어루만지는 일상의 여성성이 더욱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도 「깃발」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도달할 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나는 이 모든 중단편들을 ‘광주 연작‘으로 보고 연이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92
「깃발」은 방직공장 여공인 순분과 형자가 중심화자로 5.18 이후 도청에 이르기까지 열흘 동안의 일을 다큐 형식으로 보여준다. 이 여공들은 미숙, 영순, 철순 등과 함께 공장에 다니면서 야학에 함께 동참한 동료들이다. 이들은 시내 각처에서 공수부대의 시민 학살과 항쟁의 과정이며 무장시민군의 등장에서 수습위원회의 강온 대립과 도청에서의 최후의 항쟁 등을 각자의 목격과 체험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들이 지도해주기를 바라던 이들은 야학의 강학이며 운동권 청년인 윤강일 같은 지식인들이었건만, 윤강일은 시위가 정점에 이르는 과정에 동참했다가총격전이 벌어지자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며 현장을 빠져나간다. 나중에 도청에서 항쟁하다 산화하는 여성노동자 형자의 자각의 과정은 이렇게 묘사된다.
이론적으로 그들은 혁명의 사상을 지녔고, 전사였고, 선진적이었다. 그들이 보통 말하는 무장투쟁, 시가전 등등이 형자의 일상생활을 파고든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에 대한 배신감은 윤강일의 도피로 이미 맛보았지만 역시 지금도 배신감이 치밀어올랐다. (...) - P92
꼬부라져 잠들어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누구인가. 지식도 없고, 이론도 없고, 운동 논리도 없는 저들은 왜 도청에 들어왔는가. 그녀는 동료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자부했으나, 지식인을 향한 신뢰의 부분만큼 동료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녀는 자신을 깊이 자책한다. 그녀는 지금 관통한다. 그녀는 바로 그들이었다. 거기에 잠깐 지식인이 끼어들었던 것이며 그것은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이번 항쟁으로 그녀는 다시 동료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 P93
학생들과 지방 향신층 등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가 계엄사의 요청을 받아 ‘무기 반납‘을 추진하고 있었던 데 대하여 도시 하층민, 서비스업 종사자 등 이른바 ‘룸펜프로‘ 계층과 노동자들은 뚜렷한 이론도 없이 총기 반납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이는 지난 며칠 동안의 시민들의 죽음을 더욱 짓밟고 모독하는 일이라고 맞서고 있었다. 몇몇 운동권 청년들과 노동자들이 이들에 합세하여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고 도청 사수를 주장하게 된다. ‘지든 이기든 누군가는 여기 남아서 지키다가 끝을내야만 항쟁이 완성되며, 그것만이 지난 며칠 동안 시민들이 홀린 피에 보답하는 길이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이들은 온건파인 전자에 비교하여 강경파로 기억된다. 형자는 말한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를…… 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거야." 도청은 죽음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 P93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자유는 무한히열려 있는 가능성 앞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분명한 당위를 뜻했다. 하나의 상황 앞엔 하나의 결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순분의 회상 속에서 그날 밤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말없이 눈만 번쩍이던 사람, 턱에 칼자국이 있던 사람, 거친 욕을 끊임없이 해대던 사람, 몸집은 작은데 손이 유난히 컸던 사람, 밥을 먹으면서도 총만은 거머쥐고 있던 사람, 해맑은 어린 사람, 사람들"이었다. 항쟁이 휩쓸고 지나가고 나서 사망자는 제외하고 부상자와 구속자만을놓고 따져보았는데도 칠팔십 퍼센트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원, 세차공, 식당 배달원, 무직, 외판원, 타일공, 양복공, 세탁공, 청소부, 노점상, 점원, 가난한 주부, 운전수, 보일러공, 소상인, 막노동꾼, 고물상, 행상, 용접공, 자개공, 목공, 구두닦이. - P94
도피하고 다니던 윤강일이 돌아왔을 때 예전 여공 제자들은 여전히 품이 넓고 따뜻했지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여긴 사람도 없고 도시가 텅 빈 것 같다고 그가 말하자 철순이가 말한다. 사람이 없다니요? 쓸 만한 사람들은 다들 감옥에 갔거나 잠수탔거나 죽었잖아? 죽은 사람은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상원이가 죽었잖아? 순분이 말한다. 그 외에 어떤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세요? 죽음조차도 윤선생님 쪽의 사람만 부상하는군요. 그제야 이름 없이 죽은 형자의 죽음을 순분이 말해준다. 죽었다구? 언제 어디서? 마지막 날 도청에서요. 시체는 찾았니? 못 찾았어요. 여공들은 잠든 수배자를 위하여 그의 아침 준비를 해놓고 제각기 돈을 털어 봉투에 넣어두고 출근한다. 안개 낀 이른 아침, 자전거를타고 출근하는 동료 노동자들이 길을 메운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작업복 자락이 펄럭였다. 점점 멀어지면서 새벽 여명 속에 옷자락의 펄 - P94
히럭임만이 보였다. 수없는 펄럭임이었다. 그것은 깃발이었다."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데가 점점 크게 드러나기 시작한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체제를 ‘87체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의가장 큰 약점으로 진작부터 광주에서 드러났음에도 1987년 6월항쟁을겪으면서 ‘7월 8월 노동자 투쟁‘과 만나지 못했던 정치적·제도적 한계를 표현하는 용어다. 이 소설의 계급성 당파성이 교과서적인 면이 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재 군부에 의한 학살과 항쟁이라는 모순이 증폭된 상황에서 사회적 조건이 명료하게 드러난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소 거칠고 관념적인 곳은 있으되, 우리가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적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를 이 소설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었다. - P95
그이가 소설가 남편과 함께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는 1976년 서른두살이었고 서울로 돌아온 것이 2004년 예순 살이었으니 광주에서 그이는 한평생을 보낸 셈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떠맡은 셈이었고, 내가 길을 떠나 새로운 것들과 대면하고 세계를 겪어가는 동안 그이는 ‘빈터‘에 남아서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고 남겨진 이웃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뒷마무리까지 해냈다. 이것이 내가 문학과 인생에서 놓친 부분이며 그이가 채워놓은 부분이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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