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때, 어떤 위악적인 상징처럼, 상 위에는 이름 없는 개 한 마리가 삶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사람 몇을 위해 온몸을 찢어 고기로 꿇고있었다. 선생님은 당신이 당장 내일 죽을지 아니면 몇 개월, 몇 년을 더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어떤 특정한 것도 희망하지 않겠노라고 했다. 생과 사 따위 자신이 주관할 수 있다고 감히 믿었던 모든것을 자연의 섭리에 신의 뜻에 맡기겠다는 것.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고, 왜 살고 있는가. 섬뜩한 단언이지만 질문을멈추는 순간 우리는 즉사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서 산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시 왜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품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살기 위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대답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질문에 대응하고 작동하는 정신의 힘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질문을 해야 한다. 낙엽이 하나둘씩 떨어지면 알 수 없는 것과 알지못하는 세계에 대한 몽상이 무성해질 텐데, 내 가슴속에서는 매일매일바람에 슬리는 질문과 대답이 지나간다. - P18
9월 11일이다. 불세출의 반미 저항운동가 빈 라덴이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 뉴욕의 월드트레이드 빌딩을 공격했던 날. 하지만 내게 9월 11일은 릴케가 쓴 일기 형식의 매력적인 소설 《말테의 수기가 시작되는 첫날로 기억된다. 책의 첫 페이지, 9월 11일자 일기는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몰려든다. 하지만 내 생각에 사람들은이 도시에서 죽어가는 것만 같다. 방금 집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내 눈에보이는 것은 이상하게도 병원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즈음, 릴케는 도시의 음울한 풍경을 비관적으로 묘사한다. 묘사하는 시인의 눈, 시인의 입술이 보이는 듯하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몰려들지만, 도시는 사람들에게 쉽게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도시는 자본과 욕망으로 들끓고 그 거품 위에서 자란다. 그 거품에 질식할 수밖에 없는 섬약한 사람들은 도시를 경멸하면서도 도시를 떠나지도 못한다. 이미 전원으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마치 선악과를 맛본 최초의 인류처럼. 이 책이 쓰인 것은 20세기 초, 산업자본이 삶의 레토릭을 막 지배하기 시작할 즈음이다. 릴케는 그 시대의 불우한 공기를 맡는다. - P23
진화의 시절은 끝났다. 나에게 어울리는 퇴행의알맞은 속도를 참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점차 말을 지우고 침묵앞으로 나가야 한다. 구호와 선언으로 들끓는 세계, 좁은 골목과 비대한차들, 무너지는 집과 태어나는 욕망들, 착시와 오물들, 비극배우를 열심히 흉내 내는 시인들, 수많은 선구자들, 옳고 바른 이들, 영악한 자들이섞여 있는 이곳에서 맹렬한 혁명을 꿈꾸며 사는 것도 퍽이나 민망한 일이다. 나는 이곳을 버리거나, 아니면 진즉에 투항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이가 되어 있다. 한잔의 순결한 술을 마시고 중얼거려보자. 살아 있는 몸은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진부한 것 아닌가. 이를테면, 살아 있는 몸은 체중과 성욕을 관리해야하고, 날씨와 은행 잔고 등을 체크해야 한다. 부패하지 않은 몸의 형편은 그토록 남루한데 나는 오늘 어디를 바라보나. - P55
당신들도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모든 문장은 온도를 가진다.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문장도 있고 피까지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문장도 있다. 좋은 문장은, 적정한 온도를 가진문장이다. 문장의 적정한 온도는 작가의 비범한 감각에 의해 통제된다. 문장의 온도를 통제할 감각을 가지지 못한 작가는 불행한 작가이거나혹은 가짜 작가이다. 그 감각은 훈련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천연적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이지만, 글을 쓴다 - P68
는 행위 자체가 뜨거운 일은 아니다. 그것이 어떤 선동에 소구되는 격문일지라도, 글을 쓰는 행위는 작가의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과는 놀라울정도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장의 온도와 현실의 온도가 구분되지 못하고 연계될 때, 광고 문안이나 반성문 같은 천격의 문장이 나온다. 문장의 온도는 문장이 갖는 의미 내용에 대한 작가의 심리적 태도가만들어낸다. 그 태도는 필연적으로 ‘거리‘를 상정한다. 거리두기에 실패할 경우 작가는 문장의 온도를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은, 가마에 불을 넣는 도공의 운명과도 같다. 가마에 바짝 다가갈 경우 도공은 화마를 입을수 있고, 너무 멀리 떨어질 경우엔 불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다. 의미 내용에 조건적으로 반응하는 자신의 심리적 태도가 뜨겁다고 느낄 때,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작가는 문장의 온도를 떨어뜨리는 노력을 해야한다. 반대로, 문장이 묘사하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미적지근하다고 느낄 때, 문장을 가열시키는 감각이 필요하다. 문장은 대상에 대한심리적 태도가 변개하는 동안 빚어지는 의식의 흐름 같은 것이다. 요컨대 한 문장의 머리와 꼬리의 온도마저 다를 때, 그것을 감각으로 다스리는 것이 가능할 때, 그것은 천상의 시가 된다. - P69
문학은 모여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이고 싶어도 모일 수 없는 소외되고 유리된 작가들의 이름을, 그 변방의 상상력을 우리는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가급적 환한 곳과 등을 질 때, 그의 정신과 문장은 홀로 영험해진다. - P135
병들어 죽은 대추나무를 베어냈다. 신동옥 시인이 거들어주었다. 마당이 훨씬 훤해졌다. 이제 햇볕과 대추나무는 서로 다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 내 키보다 조금 더켰을 뿐인 대추나무, 해마다 쭉쭉 커서 대추알을 주렁주렁 매달더니, 올해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요절한 천재처럼 굵고 짧게 살다 간 대추나무. 베어낸 잔가지는 뒷산으로 끌고 가 버리고 큰 가지는 화목재로 쓰기위해 양지에 눕혀 놓았다. 잘 마르면 장작을 만들어 난로에 넣고, 그 불로 동태탕이나 끓여먹어야겠다. 그런 계절이 온 거다. 파블로 카잘스의 첼로가 잘 어울리는, 펄펄 끓는 탕에 독한 술이 어울리는. 12월은 11월을 장사지내는 달. 11월을 엄하면서 보내는 달. 나는 허리가 아프고, 아픈 허리 때문에 손가락만 민첩하다. - P1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