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척이다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미처럼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
지저귀는 붉은가슴울새처럼
울부짖음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울음원숭이처럼
바람 불 때마다 으악
소리를 내는 으악새처럼
불에 타면서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처럼

남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나는 평생을
천천히 서둘렀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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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마지막 시 마지막 행까지 읽고 나니 ‘바람‘은 어느덧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사람이라는 말은 꼭 바람 같다. 천양희라는 한 사람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날리다 이곳에 낙엽처럼 내린 것만 같다.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무사하기 위해 시와 한몸이 된 시인은 "철도 없이 제멋대로인"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낸 싸움과 사랑의 기록이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여기까지 왔다. 나는 시인이 바람의 갈피 속에 한장 한장 끼워 넣은 종이들이 풍기는 바람 냄새를 다 맡아본다.

황유원 시인 - P-1

ㅣ시인의 말



머리에서 가슴까지
걸어온 60년 시의 길이
나에게는 가장 먼 길이었다
그 먼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돌아보니 그동안 나는
사람이 그리운 사람이었고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다
마음자리를 잃고
밥처럼 먹은 슬픔을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편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살릴 수 있다면
이것이 시인의 말이 될 것이다

2024년 10월
천양희 - P-1

딱 한줄


「일흔살의 인터뷰」라는 시를 발표한 뒤
한 독자가 물었다

그 시에서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할 때
운다고 썼는데

「여든살의 인터뷰를 쓴다면
어느 때 웃는다고 쓰겠느냐고

나의 대답은
딱 한줄

‘가진 것이 시밖에 없을 때 웃는다‘ - P-1

하나의 사람과 예순한편의 슬픔


한 시인이
슬픔은 어깨로 운다고 합니다
한시인이
슬픔은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오래된 슬픔은 향기를 품고 있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만 꽃밭을 사야겠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이 택배로 왔다고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나이 먹은 슬픔이
오늘은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 P-1

다시 올 웃음에게


잘 웃지 못하는 내 웃음이
잘 웃는 네 웃음을 만나
비로소 웃기 시작했다

너의 첫 웃음을 보면서
새벽에 첫닭이 울듯
꼬기오 ㅡ웃었다

아마도 너는 하루에
사백번이나 넘게 웃을 것인데
나는 겨우
열번을 웃기도 힘들다

웃기 전에
나는 사람이 힘든 사람이었고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였다

너는 웃음으로
내 울음을 지불하고 - P-1

학습 없이 웃음보를 가지게 했다

아무리 성나는 일이 있어도
네 웃음을 피할 생각은 없다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네 웃음으로 배워야겠다

웃음에 길을 트면
사방이 웃음 천지

나를 웃게 한 웃음이
저기 앞에 간다

네가 웃는 것으로
이 세상 울음이 끝났으면 좋겠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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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꽃을 든다*


이름이 없어서
이름을 알 수 없어서 꽃을 들지 못했다
얼굴을 볼 수 없어서 향을 피우지 않았다

누가 당신의 이름을 가렸는지
무엇이 왜 당신의 얼굴을 숨겼는지
누가 애도의 이름으로 애도를 막았는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면
당신의 당신들을 만나 온통 미래였던
당신의 삶과 꿈을 나눌 수 있었다면
우리 애도의 시간은 깊고 넓고 높았으리라

이제야 꽃 놓을 자리를 찾았으니
우리의 분노는 쉽게 시들지 않아야 한다
이제야 향 하나 피워 올릴 시간을 마련했으니
우리의 각오는 쉽게 불타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초혼(招魂)이 천지사방으로 울려 퍼져야 한다 - P-1

삶이 달라져야 죽음도 달라지거늘
우리가 더불어 함께 지금 여기와 다른 우리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진정 애도다
애도를 기도로, 분노를 창조적 실천으로
들어 올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애도다

부디 잘 가시라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꽃을 든다
부디 잘 사시라
당신의 당신들을 위해 꽃을 든다
부디 잘 살아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물려줘야 할
우리 모두를 위해 꽃을 든다


* 2022년 11월 14일, 시민언론 ‘민들레‘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을 처음으로 공개할 때 함께 실은 시다. - P-1

선물



‘시인은 달력이 필요하다‘
유럽 여행을 다녀오신 스승께서
인상파 달력을 건네며 위와 같이 쓰셨다
필요 없던 것이 갑자기 필요해졌다
그날 이후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
포장지나 봉투에 한 줄씩 써 넣곤 했다
은희는 만년필이 필요하다
원택이는 10만 원이 필요하다
택배 기사님은 아이스커피가 필요하다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곤 한다.
필요 없는 것을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일
마음을 담아 선물할 때만 가능한 일
내가 필요로 하지 않아
오래 연락하지 않은 석이 현이 순이 훈이
잠 안오는 이 밤 무엇이 필요할지 - P-1

바람개비


바람이 없어도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있다

바람이 없으면
달려 나가는 바람개비

바람이 없어서
앞으로 달려 나가는 바람개비

오직 자기 힘으로
없는 바람을 만들어내는
없는 바람에게 바람을 보여주는

천지간 바람이 없어서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개비가 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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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


초승달 뜨면
멈춰 서서 오래 바라보기

초승달 비어 있는 곳
초승달 어두운 곳

눈으로 잇대어
동그라미 그려주기

갓 나온 초사흘 달
땅 위에서 보름달 만들어주기 - P-1

고통이 말해주지 않는 고통


고통이 말해주지 않는 고통이 있다
나무가 다 보여주지 않는 나무가 있듯이
내게도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당신이 있다
상처가 다 말하지 않는 상처가
그래서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꽃이 다 보여주지 않는 꽃 어딘가에
꽃의 꽃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다 보여주지 못하는 내가 있듯이
당신이 내게 다 말하지 못하는 당신이 있듯이
이별에게도 이별하지 못하는 이별이 분명 있겠다
만남에게도 만나지 못하는 만남이 분명 있겠다 - P-1

묘비명


그때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를 바랐다

돌아보니
나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아야 했다

다시 돌아보니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어야 했다

이렇게 죽기 전에
나는 다시 태어나야 했다 살아 있을 때
다시 태어나 제대로 죽어야 했다 - P-1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


참 많이 변했습니다.
올봄에도 다들 보셨겠지만 꽃 피는 모양새가 예전 같지않습니다. 우리 어릴 적에는 꽃들이 순서대로 피었습니다. 제 온기로 눈을 녹여 피어나는 복수초를 시작으로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가 피어나면 목련과 벚꽃이 기지개를 켜고 이어 영산홍과 철쭉이 만개했습니다. 그리고 라일락, 그것도 여학교 울타리에 피어나던 라일락 꽃향기라니요. 파란 잉크 자국이 지워지지 않던 반팔 하복 상의가생각납니다.

요즘 봄꽃들은 무슨 시위를 하듯이 한꺼번에 피어납니다.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습니다. 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전에는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기도 하고 향기를 맡아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우리 몸에 스마트폰이 장착(탑재)된 이후 꽃이 멀어졌습니다. 꽃이 피사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꽃을 보면 사진부더 찍습니다. 문제는 찍고(저장하고) 그만이라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전송하고는 그만입니다. - P-1

꽃이 지고 나면 사태는 더 심각해집니다.
꽃이 지면 우리는 꽃나무를 잊어버립니다. 신록으로, 녹음으로 돌아가 여름을 맞이하는 ‘열매의 시간‘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꽃진 자리에서 생각합니다. 낙화가 ‘아픈 성년식‘이겠구나. 그렇습니다. 꽃이 져야 여름입니다. "꽃이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라는 시의 한 구절은 그래서단순한 그리움이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각오이기도 합니다. ‘너‘가 지금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를 떠올리는 ‘나‘의 "꽃 지는 저녁"은 배가 고파야 합니다. 허기를 채워야 다음 날 거뜬히 일어날 수 있기때문입니다.

4월 16일입니다.
꽃이 져도 누군가를 잊은 적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화 한 통 없어도‘ 꽃 진 자리에서 더 나은 내일을 그리며 늦은 저녁상을 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신문 연재 지면(『농민신문 ‘시인의 읽기‘)에 발표한 글을 옮겼다. 제목은 정호승 시 「꽃 지는 저녁」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1998)]의 한 구절을 차용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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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문재는 1982년 동인지 「시운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지금 여기가 맨 앞」 「혼자의 넓이」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사저널 기자,「문학동네」 편집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 ‘60+기후행동‘ 운영위원, ‘오대산지구시민작가포럼‘ 대표를 맡으면서 ‘나를 위한 글쓰기‘ 촉진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마트료시카 인형 속에는 그와 닮은꼴의 인형들이 겹겹이 들어 있다. 인형들을 꺼내 나란히 놓고 보면 크기와 표정이 조금씩 다르다. 이문재의 시를 읽는 것은 마치 이 러시아 인형을 하나씩 꺼내는 일과도 같다. 인형 속의 인형 속의 인형처럼, 이문재의 시에반복되는 단어나 문장은 서로를 품거나 낳으며 사유의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너머의 너머, 다음의다음, 미래의 미래를 향해. - P-1

시인의 말


우리가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하지 못할 만큼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어느 경제학자의 말을 얼마 전에 들었다.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태어난다는 과학자의 말은 오래전에들었고,
나는 우리가 ‘시의 마음‘을 되찾는다면 이대로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2026년 1월
이문재 - P-1

눈동자


눈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눈동자다

눈동자는
다른 눈동자가 필요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눈동자는
내 눈앞에 있는 다른 눈동자다 - P-1

너도 봄날


거울 속의 거울

마주 보는 거울은 떼어놓기

눈동자는 다른 눈동자와 마주 보게 하기

눈동자 안에 다른 눈동자 빛나게 하기

반짝이는 눈동자에게

꿈을 꾸게 하는 꿈* 말해주기

시를 쓰게 하는 시 서로 읽어주기



* 전 지구를 무대로 활동한 일본의 생태주의 시인 나나오 사카키가 자주 하던 말로 알려져 있다. - P-1

소년


신도시
아파트 주차장 한구석
자전거 한대 누워 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누가 소년을 놓고 갔나보다
체인이 녹슬었다
왼쪽 페달이 없다
소년이 소년을 벗었나 보다
자전거가 버려진 이곳에서
어떤 길이 시작되었으리라
먼 곳이 시작되었으리라 - P-1

새봄


잔가지 맨 끝
늦겨울 이른 봄

처음 눈뜬 새순이
뒤돌아보며 말한다

무서워요
앞에 아무것도 안 보여요

가지가 말한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여

줄기가 말한다
네가 하늘을 보고 있는 거야

계속 올려줄 테니 앞만 보거라
뿌리가 말한다

하늘이 너를 보고 있는 거야
지금 네가 맨 앞인 거야 - P-1

아침


스위치를 내려야 밤이 온다

불을 꺼야 어둠이 어두워지고

밖으로 떠돌던 것들 제자리를 찾는다

그렇지 아니한가

눈을 감아야 눈 뜨는 것이 있다

두 눈을 떠야 사라지는 것이 있다

그럴 것이다

밤이 밤다워야 아침이 온다

아침이 아침에 온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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