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은 변하셨어요. 표정에 마음의 일을 전혀 내비치지 않던 분이 자주 우십니다. 당신의 눈물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얼른 고개를 돌리지요. 가장 많이 고갤 돌려야 하는 상대가 나랍니다. 다른 가족들이 직장일에 아이들 돌보는 일에 바쁜 탓으로 아무래도 아버지 곁에 자주 있게되는 사람은 단출한 나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가 울 적이면 나는 그저들고 있던 물주전자를 내려놓거나, 괜히 소형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거나 그럽니다. 우는 사람 곁에 있기는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힘이들지요. 더구나 우는 사람이 아버지이다보니 여러 날에 걸쳐 여러 번아버지의 눈물을 보건마는 그때마다 매번 당혹스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내가 허둥거리면 아버지는 이제는 주무시는 척하십니다. 얕게 콧소리조차 내시지요. 방금 울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금세잠이 들겠는가만 나는 아버지가 잠드셨다는 걸 잘 안다는 듯이 조심조심하는 태가 역력하게 발소리를 죽이며 문을 가만히 여닫고서 병실 바깥으로 나오곤 합니다. - P19

남동생의 종아리를 쪼아서 피를 내곤 하던 사나운 장닭을 눈 깜박할 새에 잡아올려 목을 비틀 때 아버지 팔뚝에 불끈 치솟던 힘줄도 기억합니다. 큰오빠에게 먹일 오리의 생피를 얻기 위해 희뿌연 새벽에 오리 정수리에 칼을 내리치던 모습도요. 원체 말씀이 없으신 분이었지만, 아아, 소리를 뽑아올리실 적의 아버지의 젊은 날들을 기억하지요. 3월 삼짇날 연자 날아들고호점은 편편 나무나무 속잎 나 가지꽃 피었다 춘몽을 떨쳐 먼산은암암 근산은 중중 기암은 층층 매사니 울어 천리 시내는 청산으로 돌고 이 골 물이 주루루루루루루 저 골 물이 퀄퀄 열의 열두 골 물이 한테로 합수처 천방져 지방져 월턱져 구부져 방울이 버큼져 건넌 병풍석에다 아주 쾅쾅 마주 때려 산이 울렁거려 떠나간다 어디메로 가잔 말 아마도 네로구나 요런 경치가 또 있나-아버지의 탄력 있는 젊은 목에서뿜어올려지던 그 소리들, 부친이 당신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 있는 소리를 누르고 이 누추한 삶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건 쑥쑥 발목이 굵어지고 있는 우리 형제들 때문이었을 테지요. 그렇게 좋아하던 낡은 가죽 북을 선반에 올려놓았던 건 자식들 앞에선 오로지 현재와 미래에 충실할 수밖에 없어서였겠지요. 그럴 적마저도 탄탄했던 부친의 어깨였는데, 문득 지난 생애의 자취를 한몫에 싹, 문질러버리고 울고 계시는겁니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느냐? 하시면서요. - P20

칠 년 전이면 오빠가 지금의 제 나이였네요.
어쩌면 그때 그도 지금의 나처럼 처음으로 근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해서 그렇게 울었던 것일까요? 삶이 가져다주는 것 중엔 우리가물리쳐볼 수 없는 절대의 상실이 있다는 것을 그도 그때 처음으로 인지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질 보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눈물이 고이는까닭도 그것일까요? 혹시 오빤 그때 중환자실의 아버질 두고서 옛날의아버지, 그의 종아리에 그토록 모진 회초리질을 하던 부친의 건강한 팔뚝을 그리워한 건 아니었을지요. 생각해보면 부친과 늘 함께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십수 년 전에 이 도시로 떠나온 후론 아버진 시골에 우린이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슨 상징처럼요. 언제나 그곳에 계시는 분이었지 이 세상에 안 계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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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4월 광주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작고한 출판인 나병식이 지하출판으로 이만 부를 찍어 사방에 뿌리고는검거되었고, 나도 서로 말을 맞추고 시간을 벌기 위해 한 달쯤 도망다니다가 검거되었다. 그이는 경찰이 운암동 집을 수색하기 직전에 그동안 모아둔 항쟁 자료들을 마당의 창고 슬레이트 지붕 아래 숨겼는데, 방마다 뒤지고 화단까지 파헤쳤지만 다행히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의 안기부장은 장세동이었는데, 나병식과 나를 정식으로 구속하지 않고 ‘유언비어 유포죄‘ 정도의 경범죄로 다루더니, 마침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삼세계 문화제‘에 초청받은 나에게 외유하라며 일 년짜리 단수여권을 내주었다. 나는 급히 서울로 올라온 아내와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가지를 사고 밥 한끼 먹고는 공항으로 나갔다.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간나는 망명자 윤한봉과 실로 오 년 만에 상봉했다. 그와 함께 미주 한국청년연합과 재미 한국동포를 조직하기 위하여 13개 도시를 돌며 강연회를 열었고, 동포 원로들에게 그를 보증해주었다. 미국에서 문화패 ‘비나리‘를 만들고 ‘통일‘을 순회공연했으며, 도쿄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안내로 조성우를 비롯하여 교포 이삼세 청년들과 함께 같은 작업을했다. 그후 우리문화연구소와 문화패 ‘한우리‘를 조직하여 교토와 오사카에 지부를 두었고, 내가 귀국한 것은 일년 만인 1986년 5월 말경이었다. 다시 안기부에 연행되어 행적 조사를 받았으나 구속은 면했다. - P88

처음에는 광주를 떠나려고 운암동의 집을 내놓고 둘이서 서울과 수원 등지에 집을 보러 다닌 적도 있었다. 나는 1984년에 장길산을 끝내고는 정말로 광주를 떠나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는 당대에 대한 역사적 책무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창작하는 자로서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사회의 온갖 제약에 짓눌려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말 그대로 ‘창작의 자유‘
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광주항쟁을 소설로 쓸 생각은 없었다. 누가 파리코뮌이나 러시아혁명을 소설로 쓰는가. 그 모두가 역사기록과 르포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다만 그런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쓸 수 없는 것‘과 ‘쓸수 있는 것‘은 작가의 자유에 의하여 결정되어야만 한다. 나에게는 세상이 온통 ‘무등산은 알고 있다‘라든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부끄러움‘ 이라든가 하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동어반복이며 억압이었다. - P89

우리는 너무 현실 자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고 그 불에 데었다. 나는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생생한 기억들과 더불어 여전히 ‘도청‘에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아마도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앓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아들과 딸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이 사라진 빈집을 지키면서 적막 한가운데서 문득 그이가내린 생의 결단이 아니었을까.
그이는 ‘평온‘을 말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골의 무싯날 같은 그런 나날, 그이의 집요한 요구와 준비에 따라서 우리는 법원에 갔고 나는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와 서울행 밤기차를 탔다. 얼마 뒤에 그이가 꾸려서 보낸 책이며 물건들을 트럭에 싣고 화가 홍성 - P89

담이 내 거처에 찾아왔다. 그는 우리가 그냥 예전처럼 작업실을 따로 쓰는 줄 알고 있다가, ‘아마 그 사람은 나를 다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듣고는 헤어지면서 나를 붙들고 울었다.
어쨌든 나는 1980년에서 1990년대 말까지 국내외에서 소설은 쓰지않고 광주에서 비롯된 ‘사회봉사‘에 바쳤으니 그냥 이름과 몸으로 때운셈이다. 그이와 나 사이에는 깊은 회한이 오래갔다. 나의 갑작스런 방북은 ‘무산‘을 뛰어넘으려는 것이기도 했고 그것들의 연원인 분단이라든가, 빨갱이라든가, 사상이라든가 하는 억압을 벗어버리는 어떤 ‘글쓰기의 자유‘를 확보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뒷날 그이가 나를 내보낸 것을 후회했다고 김지하 부인은 내게 전했다. 그후 나는 다른 이와 덧없는살림을 차렸고(이 또한 길게 가지는 못했다), 막내 호섭이가 태어나자마자 방북과 망명생활이 이어졌다. - P90

베를린이나 뉴욕에서 뭔가 어려운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나는 그래도 그이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을 했다. 그이는 언제나 사려 깊은 대답을 해주었고,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 내생각을 잘 아는 동지이기도 했다. 장남 호준이가 ‘전교조 교사들에 호응하여 ‘전고협‘을 조직했다가 구속되고 고등학교를 퇴학 맞았을 때 처음으로 그이는 전화기 너머로 울음소리를 냈다. 당시에 독일 정부와 협의하여 호준이를 초청했지만 한국 정부는 출국시켜주지 않았다.
나중에 돌아와 교도소에 있을 때 그이는 나와 이혼한 처지라 직계가족인 호준이를 앞세워 오 년 동안 나의 옥바라지를 했다. 나는 석방되어나온 뒤에 아들과 만나서 ‘돌아가도 되겠는지‘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한 달이 넘게 대답이 없더니 뒤늦게 말했다. "아버지 글쓰실 때의 긴장을 이제는 어머니가 같이 견디지 못하시겠답니다. 편하게 사시도록 놔두세요." 딸은 언젠가 말했다. 지금도 엄마는 꿈에 허둥지둥한다 - P90

고, 밥상 위의 반찬들이 모두 흙이나 재로 변하거나 손님은 잔뜩 왔는데빈 그릇뿐이어서 나의 성난 얼굴을 피하다 잠이 깬다고도 했다. 이게 내가 그이에게 저질렀던 짓들이다. 그이는 언제나 오고가는 사람들에게따뜻한 밥을 해주었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이나 되었고 보통 때도 늘서너 명의 식객이 끊이질 않았다.
어찌 그 모든 것들을 글과 말로 할 수 있으랴. 이 역시 나로서는 소설로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P91

홍희담의 「깃발」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것은 1988년 봄이었고 이는 한 해 전에 양김의 분열에 의하여 대선에 실패하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난 직후였다. "5월은 뭔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여전히 벌떡이고 불끈거린다. 아마도 5월 넋이 아직 잠들지 못했나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와 신경증과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속에 죽거나 사라진 사람들이 내뿜는 괴이한 힘에 고통받는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갑자기 자다 벌떡 일어나 밤을 새우며 미치도록 뭔가를 쓰게 만드는....... 그것이 「깃발」이다"라고 그이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참에 「깃발」에서 시작하여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문밖에서」 「김치를 담그며, 그리고 중편소설 「이제금 저 달이」에 이르기까지 다시 한번 읽었다. 마치 퇴색한 옛 사진을 보는 것처럼 아련했다. 마치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시기의 젊은이들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이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을 주었다. 나는 홍희담의 성정과 말투와 느낌의 결을 알고 있는데다가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까지도 현실 속의 누구라는 것을 대강 짐작할 정도로 나에게는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세월을 잘 아는 나로서는 어쩌면 객관적인 견해를 말하기가 어려울 것 - P91

같다. 나는 그야말로 ‘5월문학의 깃발처럼 뚜렷한 「깃발」을 여기서 언급하려 하면서도 사실은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와 「김치를 담그며」에더욱 애착이 간다. 선연한 색으로 나부끼는 「깃발」의 너무도 뚜렷한 투쟁적 계급성보다는 다른 두 작품에 드러난 항쟁 이후의 상처들을 어루만지는 일상의 여성성이 더욱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도 「깃발」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도달할 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나는 이 모든 중단편들을 ‘광주 연작‘으로 보고 연이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92

「깃발」은 방직공장 여공인 순분과 형자가 중심화자로 5.18 이후 도청에 이르기까지 열흘 동안의 일을 다큐 형식으로 보여준다. 이 여공들은 미숙, 영순, 철순 등과 함께 공장에 다니면서 야학에 함께 동참한 동료들이다. 이들은 시내 각처에서 공수부대의 시민 학살과 항쟁의 과정이며 무장시민군의 등장에서 수습위원회의 강온 대립과 도청에서의 최후의 항쟁 등을 각자의 목격과 체험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들이 지도해주기를 바라던 이들은 야학의 강학이며 운동권 청년인 윤강일 같은 지식인들이었건만, 윤강일은 시위가 정점에 이르는 과정에 동참했다가총격전이 벌어지자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며 현장을 빠져나간다. 나중에 도청에서 항쟁하다 산화하는 여성노동자 형자의 자각의 과정은 이렇게 묘사된다.


이론적으로 그들은 혁명의 사상을 지녔고, 전사였고, 선진적이었다. 그들이 보통 말하는 무장투쟁, 시가전 등등이 형자의 일상생활을 파고든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에 대한 배신감은 윤강일의 도피로 이미 맛보았지만 역시 지금도 배신감이 치밀어올랐다. (...) - P92

꼬부라져 잠들어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누구인가. 지식도 없고, 이론도 없고, 운동 논리도 없는 저들은 왜 도청에 들어왔는가. 그녀는 동료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자부했으나, 지식인을 향한 신뢰의 부분만큼 동료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녀는 자신을 깊이 자책한다. 그녀는 지금 관통한다. 그녀는 바로 그들이었다. 거기에 잠깐 지식인이 끼어들었던 것이며 그것은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이번 항쟁으로 그녀는 다시 동료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 P93

학생들과 지방 향신층 등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가 계엄사의 요청을 받아 ‘무기 반납‘을 추진하고 있었던 데 대하여 도시 하층민, 서비스업 종사자 등 이른바 ‘룸펜프로‘ 계층과 노동자들은 뚜렷한 이론도 없이 총기 반납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이는 지난 며칠 동안의 시민들의 죽음을 더욱 짓밟고 모독하는 일이라고 맞서고 있었다. 몇몇 운동권 청년들과 노동자들이 이들에 합세하여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고 도청 사수를 주장하게 된다. ‘지든 이기든 누군가는 여기 남아서 지키다가 끝을내야만 항쟁이 완성되며, 그것만이 지난 며칠 동안 시민들이 홀린 피에 보답하는 길이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이들은 온건파인 전자에 비교하여 강경파로 기억된다. 형자는 말한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를…… 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거야."
도청은 죽음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 P93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자유는 무한히열려 있는 가능성 앞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분명한 당위를 뜻했다. 하나의 상황 앞엔 하나의 결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순분의 회상 속에서 그날 밤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말없이 눈만 번쩍이던 사람, 턱에 칼자국이 있던 사람, 거친 욕을 끊임없이 해대던 사람, 몸집은 작은데 손이 유난히 컸던 사람, 밥을 먹으면서도 총만은 거머쥐고 있던 사람, 해맑은 어린 사람, 사람들"이었다. 항쟁이 휩쓸고 지나가고 나서 사망자는 제외하고 부상자와 구속자만을놓고 따져보았는데도 칠팔십 퍼센트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원, 세차공, 식당 배달원, 무직, 외판원, 타일공, 양복공, 세탁공, 청소부, 노점상, 점원, 가난한 주부, 운전수, 보일러공, 소상인, 막노동꾼, 고물상, 행상, 용접공, 자개공, 목공, 구두닦이. - P94

도피하고 다니던 윤강일이 돌아왔을 때 예전 여공 제자들은 여전히 품이 넓고 따뜻했지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여긴 사람도 없고 도시가 텅 빈 것 같다고 그가 말하자 철순이가 말한다. 사람이 없다니요? 쓸 만한 사람들은 다들 감옥에 갔거나 잠수탔거나 죽었잖아? 죽은 사람은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상원이가 죽었잖아? 순분이 말한다. 그 외에 어떤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세요? 죽음조차도 윤선생님 쪽의 사람만 부상하는군요. 그제야 이름 없이 죽은 형자의 죽음을 순분이 말해준다. 죽었다구? 언제 어디서? 마지막 날 도청에서요. 시체는 찾았니? 못 찾았어요. 여공들은 잠든 수배자를 위하여 그의 아침 준비를 해놓고 제각기 돈을 털어 봉투에 넣어두고 출근한다. 안개 낀 이른 아침, 자전거를타고 출근하는 동료 노동자들이 길을 메운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작업복 자락이 펄럭였다. 점점 멀어지면서 새벽 여명 속에 옷자락의 펄 - P94

히럭임만이 보였다. 수없는 펄럭임이었다. 그것은 깃발이었다."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데가 점점 크게 드러나기 시작한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체제를 ‘87체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의가장 큰 약점으로 진작부터 광주에서 드러났음에도 1987년 6월항쟁을겪으면서 ‘7월 8월 노동자 투쟁‘과 만나지 못했던 정치적·제도적 한계를 표현하는 용어다. 이 소설의 계급성 당파성이 교과서적인 면이 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재 군부에 의한 학살과 항쟁이라는 모순이 증폭된 상황에서 사회적 조건이 명료하게 드러난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소 거칠고 관념적인 곳은 있으되, 우리가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적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를 이 소설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었다. - P95

그이가 소설가 남편과 함께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는 1976년 서른두살이었고 서울로 돌아온 것이 2004년 예순 살이었으니 광주에서 그이는 한평생을 보낸 셈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떠맡은 셈이었고, 내가 길을 떠나 새로운 것들과 대면하고 세계를 겪어가는 동안 그이는 ‘빈터‘에 남아서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고 남겨진 이웃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뒷마무리까지 해냈다. 이것이 내가 문학과 인생에서 놓친 부분이며 그이가 채워놓은 부분이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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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18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순분이가 다니던 야학은 일요일엔 예배를 보았다. 예배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노닥거리다가 버스를 탔다. 네시쯤이나 되었을까, 버스가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멈추어 섰다. 시위 군중들이 모여들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이 내리는 바람에 순분이도 따라 내렸다. 전경들이 쏘아대는 최루탄에 이미 부근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찼다. 금남로와 소방서 쪽에서 군중들이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순분은 군중들과 섞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쓰라린 눈을 가까스로 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날뛰고 있었다(나중에 그들이 공수특전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 P17

공수특전단들은 무조건 곤봉을 휘둘렀다. 머리고 가슴이고 닥치는 대로 내질렀다. 그들과 맞닿아 있던 군중들이 순식간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손을 뻗치는 사람에게 가차없이 대검으로 배를 쑤셨다. 누군가가순분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골목길로 내달리다가 앞사람을 좇아건물 속으로 숨어들었다. 서너 명이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창밖으로군용 트럭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트럭이 멈추어 서자 이미 포승으로묶은 사람들을 차에다 던져 올렸다. 올라온 즉시 옷을 찢어대더니 등뒤를 개머리판으로 계속 난타했다. 어떤 공수특전단원은 대검으로 청년의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어서 트럭 위에 던졌다. 노인 하나가 끌려가는 청년을 뒤따르며 손을 저었다. 공수특전단은 한 손에 청년의 발을 잡은 채로 대검으로 노인을 내리쳤다. 노인은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맴돌았다. 시뻘건 칼날이 햇빛에 번들거렸다. 트럭 안은 던져진 시체들로 가득 들어찼다. 트럭이 움직였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P17

동시에 총소리가 계엄군의 서치라이트를 박살내었다. 주위는 다시캄캄해졌다. 동지들과 더불어 김두칠은 방아쇠를 당겼다.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그들의 자동화기가 콩 볶는 소리를 내며 일시에퍼부어왔다. 김두칠은 달려오는 수많은 군홧발을 보았다.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 하나가 날아와 김두칠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은폐물 뒤로 나동그라졌다. 동지들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군홧발은 마치대지를 뒤흔드는 것같이 은폐물 위를 넘어 그들을 밟고 지나갔다. 김두칠은 기를 쓰고 몸을 일으키려고 애써보았다. 가까스로 손 한쪽을 은폐물 위에 올려놓았다. 온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총을 은폐물위에 올려놓았다. 아까보다 더 많은 군홧발이 몰려들고 있었다. 여러 발의 총탄이 천지를 흔들었다. 김두칠은 은폐물 위로 몸을 늘어뜨렸다. 총은 가슴께에 품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이 먼 곳을 응시하였다. 두 눈은군홧발을 넘어, 탱크와 장갑차를 넘어, 쭉 뻗은 시가지를 넘어 먼 곳 고향산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입속에서 나오는 마지막 부르짖음이 총성과 군홧발 소리에 묻혀버렸다. - P61

당시 여덟 살 외동아들이 걸려 마지막 순간 도청에 남을 수 없었던 그. 하지만 그때 만난 노동자들의 그 선한 웃음과 따뜻한 마음, 죽음을 넘나드는 절박한 순간에 꽃피던 동지애∙∙∙∙∙∙ 홍희윤에게 그것은 평생을 안고 살아갈 자산이 됐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역사의식에 눈을 떴다.
이후 홍희윤은 두 차례나 수사기관에 끌려가 모진 협박을 당했다. 1980년 5월항쟁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 때 송백회의 자금책으로 몰려경찰에 시달렸다. 결국 그해 송백회는 겉으로 해체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여성노동자들과 구속자 지원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엔 황석영의 평양 방문을 간첩사건으로 조작하려던 안기부에서 닦달했다.
홍희윤은 인터뷰를 지독히 싫어한다. ‘나는 한 일이 없어. 그냥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야.‘ 수줍게 손사래를 칠 뿐이다. 하지만 환갑이 넘어서도 여전한 소녀 같은 열정과,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이 어느 5월 그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쓴 글이 바로 1988년 ‘작가 홍희담‘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인 「깃발」이다.
"「깃발」의 주인공은 5월 도청에서 살아 숨쉬었던 모든 노동자들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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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게임
오정희


꼭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것 같잖아. 밥물이 끓어 넘친 자국을 처음에는 젖은 행주로, 다음에는 마른 행주로 꼼꼼히 문지르며 나는 새삼마루와 부엌을 훤히 튼, 소위 입식 구조라는 것을 원망하는 시늉으로등을 보이는 불안을 무마하려 애썼다. 그래도 가스레인지 주변의, 점점이 뿌려진 몇 점의 얼룩은 여전히 희미한 자국으로 남았다. 아마 지난겨울 아버지가 약을 끓이다가 부주의로 흘린 자국일 것이다. 승검초의뿌리와 비단개구리, 검은콩과 두꺼비 기름을 넣고 불 위에 얹어 갈색의거품이 끓어오를 즈음 꿀을 넣고 천천히 휘저어 검은 묵처럼 만든 그것을 겨우내 장복하며 아버지는, 피가 맑아지고 변비가 없어진단다라고말했었다. 내의 바람으로 군용 항고에 콜타르처럼 꺼떻게 엉기는 액체를 긴 나무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아버지는 영락없이 중세의 연금술사였다. - P321

병원에서 호송차가 왔을 때 어머니는 식탁 아래로 기어들었다. 아가 난 싫어, 무서워, 날 데려가지 못하게 해줘. 호송인들에게 반짝 들리워나가며 내가 안 보일 때까지 고개를 비틀어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왜웃어. 왜 웃어. 심한 짓을 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모르는 소리야. 달리 무슨 수가 있었겠니. 넌 아직 어렸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어. 갓난애도 그렇게 없애지 않았니? 넌 마치 네 엄마가 그렇게 된 게 모두내 탓이라는 투로구나. 잘 보살펴드릴 수도 있었어요. 외려 네 엄마에겐 그곳이 편한 곳이야. 친구들도 있고 가족이란 생각하듯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너부터도 내심 네 엄마를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된다는걸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니? 그전에 번번이 네 혼담이 깨지던것도 어미 탓이라고 원망했을걸.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아버지는 화투장 뒷면에 가로질린 금을 손톱으로 긁어 지우려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었다. - P335

오빠는 어딜 가 있을까요. 그 녀석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아버지는버럭 화를 내었다. 그 녀석이 생기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어.
아버지는 둘이서 하는 화투놀이가 셋이서 하는 것보다 재미가 덜하다는 것 때문에 오빠의 부재를 노여워하는 걸까. 더러운 게임이야. 오빠가 어느 날 갑자기 식탁을 떨치고 일어나 팽팽하게 당겨진 줄의 한끝을놓아버렸을 때 삼각 구도는 깨지고 아버지와 나는 균형을 잃은 힘의 반동으로 형편없이 비틀거렸다.
나도 오빠처럼 훌쩍 나가버릴 수가 있을까. 침몰하는 선체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결사적으로 탈출하듯 그렇게 달아나버릴 수 있을까. 나는매조를 먹을까 칠띠를 깨뜨릴까에 긴장되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좁고 긴 얼굴, 매처럼 구부러진 코끝은 볼의 살이 빠짐에 따라 더욱 길게 늘어져 보였다. 아가, 날 데려가다오. 여긴무섭고 쓸쓸하단다. 그러나 어디나 마찬가지예요. 화투는 아버지의 손에서 내 손으로 옮겨갔다. - P337

1966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 책으로만 만나던 김동리, 서정주 등의 강의를 들으면서 몇 편의 소설을 써보았지만 작가의 길은 아득하기만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스무 살의 환상, 스무 살의절망에 사로잡혀 발밑을 보고 다녔다. 이학년 가을학기부터 그녀는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자신을 냉정히 바라보고 진로를 결정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절에 가서 중이 되든가 고아원에서 밥 짓는 보모가 되든가 아니면 땅장사를 해서 돈을 벌든가, 하여튼 무엇이든 결정을 해야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 오래전에 쓰고 던져버린 초고를 찾아내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그녀를작가로 만들어준 「완구점 여인」이었다. 오정희는 그때부터 사실상의 습작기가 시작되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한 해에 두어 편씩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그녀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소설을 쓰겠다는 말뿐으로‘
일생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잡지사에 근무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에 어렵게 어렵게 적응해가던 1974년에는 한 해 동안 한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글을 못 쓰는 괴로움, 열등감도 컸지만 글을 쓰 - P348

는 두려움, 빈 원고지의 공포도 그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오정희에 대하여 「넉넉함과 깐깐함」이라는 기록을 남긴 소설가 윤후명의 글에도 나오지만, 쓰는 두려움과 자신없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추스름과 안간힘으로 쓴 것이 「목련초였고, 그저 내게는 쓸 수 있었다는 것만이 중요해요‘라고 말할 정도로 결혼은 이 여성작가에게 창작적 위기의 시초였다. 윤후명의 말에 의하면 작품이 머릿속에 들었을 때 오정희는 재처럼 말이 없고 눈에는 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잠재우고 한밤중에 그녀는 공책을 펴놓고 연필심을 뾰족하게 갈아서 연금술사처럼 한 획씩 또박또박 썼다. - P349

‘가부장적 질서‘는 한국 중산층의 가족사를 결정짓는 이데올로기다. 전쟁과 근대화의 변동을 겪어나가면서 여성들은 남자들과는 달리 무서운 괴물로 변한 일상에 의하여 서서히 상처받고 무너져갔다. 그것은 종종 남자들에게는 억척스레 새끼들과 더불어 살아간 ‘어머니라는 여성영웅‘으로 오래오래 기억되었다. 느닷없는 낯선 사내와의 정사 장면과스스로 창녀처럼 돈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나‘의 고독한 저항에소름이 돋으며 몸서리를 치게 된다. 끝 장면에서 아기를 재우는 이층여자의 발소리가 이어지고 모성은 조난당한 배의 마스트에서 구조 요청을 하는 헝겊 쪼가리가 되어버린다.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연필심을 날카롭게 깎아 들고 이 소설을 쓰던 그 무렵의 오정희를 문득 떠올려본다. ‘가부장제의 감옥‘으로부터 꾀어내려는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를 그녀는 무수히 귓전으로 들어왔으리라.
아, 참으로 좋은 작가를 알게 되었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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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은 1939년 경북 청송에서 출생했고 장터가 있는 진보읍은 그의 문학적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대구에서 대구농림고를다니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1959년 농대에 진학하라는 의붓아버지의 분부를 뿌리치고 도망하다시피 상경했다. 고교 시절에 동시를 써서 지방지에 투고를 하여 지면에 실리기도 했으니 은근히 문학에 뜻을두었던 터였다. 서라벌예대의 장학생 모집에 응시하여 입학했으나, 김동리와 박목월로부터 시보다는 산문을 써보는 게 어떠냐는 ‘삼엄한 권유‘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군에 입대했다. 1962년 군에서 제대하고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뒤 안동의 엽연초생산조합에 취직했다. 김주영은이십대부터 삼십대에 이르기까지 십육 년간을 엽연초조합의 주사 경리직으로 근무한다. - P284

키 크다고 난쟁이 흠한 적없고, 대하소설 썼다고 잡문장이를 손가락질해본 적도 없으니, 있어도없는 것 같고 없어도 있는 것 같던 그 무던한 처신은, 이것이 곧 비록 복은 더디 와도 재앙이 저절로 물러갈사람이 된 그의 근본이다"라고 기록한 문장이 족집게가 되었다. 그렇기는 하여도 그가 예전 소설가 이병주의 충고를 회상하기를 "절대 도덕적인 것에 얽매여선안돼. 생활도 그래야 돼"라고 했다는 말에는 나도 적극 지지 찬성이다. 예술가가 도덕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지만 ‘무던한 처신‘은 어쩐지 아쉬운 면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예술가의 삶이란 부딪치고넘어지고 깨져서 상처가 아물 날이 없거나, 억제된 가운데서도 참을 수없이 터져나오는 애증의 미친 구석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 P289

이 작품은 시종 거침없는 욕설과 음담으로 이어지는데도 등장인물모두가 어쩐지 ‘순둥이‘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그것은 작가가 하층민의 악착같은 밑바닥 고생에는 어딘가 벗어난 것 같은 순진함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작의 둑방동네에 대한 실감이나, 조세희의 추상화되었지만 빈민의 도시생활을 꿰뚫는 난장이 연작에서 우리가 느꼈던 강렬한현실은 김주영의 고물수집소에 이르면 어딘가 시골 장터의 아직 순박하고 어수룩한 ‘것‘들을 데려다놓은 듯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들이 사용하는 은어도 다르고 도회지에서의 먹이사슬의 관계도 내가 알고 있는 현장의 그것과는 달리 어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읽히면서 재미있다. 그것은 작가의 입심과 천부적인 낙관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무난함‘이 그로 하여금 오랫동안 글을 쓰게 해주었던 미덕이 아니었을지. - P290

당시에는 과작이라고 했어도 작가가 일생을 바친 어느 즈음에는 저절로 쌓여서 적지 않은 책들이 남게 된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서영은은 십여 권의 산문집을 제쳐놓고라도 중단편전집 다섯 권에 장편소설 여덟 권을 써놓았다. 나는 어쩐지 서영은의 글도 그렇고 그의 삶도수도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정돈되고 성실하고 반듯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그가원로 작가 김동리와 결혼을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길이 될지 우리 몇몇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연보에 짤막하게 한 줄도못 되게 나와 있는 결혼, 병구완, 사망, 이사 등등의 단어 밑에는 그야말로 드러내놓고 표현 못할 인고의 시간이 감추어져 있다. 칠십이 다되어 한반도를 걸어서 종주한 것과 같은 사십여 일의 ‘스페인 산티아고길 위에서 그녀는 신과 더불어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새로이 갈무리했을 것이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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