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대공이 스포츠와 경마에 정통하므로 그 속임수를 곧 알아챌테고, 루 게임에서 속이는 행위는 더없이 가증스러운 범죄이고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인간사회에서 열대의 원숭이사회로 영원히 추방되었으므로, 그가 남자답게 그녀와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다정한 귀족의 단순함을 잘못 판단했다. 그는 파리들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죽은 파리나 살아 있는 파리나 똑같아 보였다. 그녀는 그 속임수를 스무 번 정도썼고, 그는 1만 7,250파운드(현재 화폐로는 대략 4만 885 파운드 6실링 8페니)가 넘는 돈을 그녀에게 지불했다. 그러다결국 올랜도가 너무나 지독히 속이는 바람에 그도 더 이상은속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가 사실을 깨달았을 때, 보기 괴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대공은 몸을 쭉 펴고 일어섰다. 얼굴은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물이 방울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자기에게서 큰돈을 가로챘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대로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속였다는 사실은 중요했고,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P189

이런 견해를 가진 일부 철학자들과 현자들이 있지만, 대개우리는 다른 관점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양성 간의 차이란 다행히도 매우 심원한 것이다. 의상은 그 아래 깊이 숨어
것의 상징에 불과하다. 올랜도로 하여금 여자의 옷과여자의 성을 선택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그녀의 내면에서일어난 변화였다. 어쩌면 여기서 그녀는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지만 명백히 표현되지 않는 것을 유난히 솔직하게 --솔직함은 실로 그녀의 천성이었다ㅡ 표현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는 진퇴양난에빠지게 된다. 양성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뒤섞여 있다. 어느 인간에게서나 한 성에서 다른 성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남성이나 여성의 모습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오로지의상밖에 없으며, 성의 밑바닥에는 위에 있는 것의 정반대가존재한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일어나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는 누구나 경험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올랜도라는 특정 인물의 경우에 그것이 미친 특이한 영향만 주목하겠다. - P195

강아지들은 꼬리를 흔들고 앞다리를 숙이고 뒷다리를 들어 올리며 구르고 뛰어오르고 발로 긁고 낑낑거리고 짖어 대고 침을 흘린다. 또 자기들 나름대로정중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재주를 부리지만,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전부 다 소용이 없다. 자신이 알링턴 하우스훌륭한 사람들과 벌인 말다툼도 그랬다고, 그녀는 강아지를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그들 역시 꼬리를 흔들고 숙이고 구르고 뛰어오르고 발로 긁고 침을 흘리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사교계에 나간 이 몇 달 동안……」올랜도는 스타킹 한 짝을 방구석에 내던지며 말했다. 내가들은 말이라곤 그저 피핀이 했을 법한 말이었어. 난 추워요.
난 행복해요. 난 배가 고파요. 난 쥐를 잡았어요. 난 뼈를 묻었어요. 내 코에 키스해 줘요.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않았다. - P202

한시간도채 지나지 않은 바로 얼마 전에 몰아친 것과 같은 지독한 환멸을 맛보게 되면 마음은 좌우로 흔들린다. 모든 것이 전보다 열 배는 더 황량하고 삭막하게 보인다. 인간의 영혼에 가장 큰 위험이 적재되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 여자들은 수녀가 되고, 남자들은 성직자가 된다. 그런 순간에 부자들은자기 전 재산을 양도하는 증서에 서명하고, 행복한 남자들은조각칼로 자기 목을 긋는다. 올랜도는 기꺼이 이런 일들을했겠지만 그보다 더 경솔한 일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녀가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 집으로 포프 씨를 초대한 것이다.
무장하지 않은 채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노 젓는 배로 대서양을 항해하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세인트폴 성당 꼭대기에 한 발로 서 있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시인과 단둘이 집에 가는 것은 더더욱 경솔한 일이다.
시인은 대서양인 동시에 사자이다. 대서양은 우리를 익사시키고, 사자는 우리를 물어뜯는다. 설령 우리가 사자의 이빨을 견디고 살아난다 해도 파도엔 굴복할 수밖에 없다. 환상을 부숴 버릴 수 있는 남자는 짐승이자 밀물이다. 영혼에 환상이란 지구를 둘러싼 대기와 같다.  - P209

다시 어둠 속에 들어서자 시인의 무릎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분노는 당장 사그라졌다.
<하지만 가여운 사람은 바로 나야.> 다시 완전히 깜깜한 곳에 들어서자 그녀는 생각했다. <당신이 아무리 비천한 인간일지라도 나야말로 더 비천하지 않을까? 나를 감싸고 보호하는 것은 당신이고, 야수를 겁주고 야만인들을 위협하고 내게누에 실로 만든 옷과 양털로 만든 카펫을 만들어 준 것도 당신이지. 내가 숭배할 대상을 원하면, 당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내게 제공하고 그것을 하늘 높이 박아 놓지 않았던가? 당신이 보살펴 주고 있다는 증거가 도처에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는 아주 겸손하게 고마워하며 고분고분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에게 봉사하고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내 모든기쁨이 되게 하라.> - P212

하지만 앞 문단을 근거로 판단해서 천재성이(그러나 천재병이라는 이 질병은 이제 영국 제도에서 뿌리 뽑히고 말았다.
세평에 의하면, 작고한 테니슨 경이 그 질병을 앓은 마지막인물이다) 한결같이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매 순간 만물을 명료하게 봐야 하고, 어쩌면 그 과정에서 불에 타 죽을지 모른다. 오히려 천재성이란 광선을 한 번 내쏜 다음 한동안 빛을 발하지 않는 등대와 비슷하다. 다만 천재성은 등대처럼 규칙적이지 않아서,
(포프 씨가 그날 밤에 그랬듯이) 예닐곱 번의 광선을 재빨리연속적으로 쏘아 대고는 1년간 혹은 영원토록 암흑 속에 묻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광선을 믿고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천재들은 암흑기에 빠져 있을 때 보통 사람들과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 P214

우리는 그 신사의 삼각모와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 다시 한번 수정을 들여다보자. 그가 신은 양말의 주름까지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그의 기지가 일으킨 온갖 파문과 굴곡, 그의 온화함과 소심함, 그의 세련미, 그가 어느 백작 부인과 결혼할 것이며 결국은 아주 품위 있게 죽으리라는사실이 우리 앞에 훤히 드러나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명료하다. 애디슨 씨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때맹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제멋대로 행동하곤했던 스위프트 씨가 예고도 없이 들어왔다. 잠깐만, ‘걸리버여행기』가 어디 있더라? 여기 있다! 휴이넘의 땅으로 항해하는 문단을 읽어 보자.
<나는 완벽하게 건강한 신체와 평화로운 마음을 누렸다.
친구의 배신이나 변덕을 보지 못했고, 은밀한 적이나 공공연한 적의 침해 행위도 보지 못했다. 나는 어떤 위대한 인간이나 그의 충신에게 호감을 사려고 뇌물을 주거나 아부하거나매춘을 알선할 필요가 없었다.  - P217

4월 초의 맑은 밤이었다. 초승달과 어우러진 수많은 별빛에 가로등 불빛이 더해져, 사람들의 얼굴과 렌 씨의 건축물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물의 형체가한없이 부드럽게 보였는데, 만물이 막 용해되려는 듯한 순간에 은방울 같은 것이 떨어지자 선명해지고 활기를 띠었다.
대화도 그래야 한다고 올랜도는 엉뚱한 공상에 빠지면서)생각했다. 사회는 이래야 하고, 우정은 이래야 하고, 사랑은이래야 한다.  - P222

그녀는 품위 있는 바지와 유혹적인 속치마를 번갈아 입었고, 양성의 사랑을똑같이 누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을 구별하기 어려운 중국식 가운을 걸치고 쌓인 책들 사이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는 그녀의 모습을그려 볼 수 있다. 그 차림새로 그녀는 의뢰인 한두 명을 맞이했고(그녀에게는 수십 명의 탄원자가 있었으므로), 그러고는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개암나무 가지를 잘랐는데, 그런 일에는 반바지가 편했다. 그런 다음에 그녀는 마차를 타고 리치먼드로 달렸고 신분 높은 귀족에게서 청혼을 받는 데가장 적합한 꽃무늬 견직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시런던 시내로 가서는 변호사의 옷 같은 황갈색 가운을 입고법원에 가서 자신의 소송 사건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알아보았다. 그녀의 재산은 매 시간 줄어들고 있었는데, 그사건은 1백 년 전보다 조금도 마무리 단계에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다음 마침내 밤이 되면 그녀는 종종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귀족 청년 차림으로 모험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 P228

그 순간 올랜도는 세인트 폴 성당의 둥근 지붕 뒤에 모인 작은 구름을 처음 보았다. 종소리가 울리면서 그 구름은 점점 커졌고, 놀랍게도 재빨리 시커메지면서 퍼져 나갔다. 동시에 산들바람이 일었고, 여섯 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는 동쪽하늘 전체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어두운 구름에 뒤덮였다. 하지만 서쪽과 북쪽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그러더니 구름이 북쪽으로 퍼져 나갔다. 도시너머의 언덕과 산들이 구름에 완전히 에워싸였다. 불빛이 빛나고 있던 메이페어만 대조적으로 더욱 휘황찬란하게 타올랐다. 여덟 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는 찢어진 구름 조각들이 급히 피커딜리 너머로뻗어 나갔다. 그 구름들은 모여들면서 급속히 서쪽 끝자락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았다. 아홉번째와 열 번째, 열한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 어마어마한어둠이 런던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열두 번째 종소리가 울리자 어둠이 완벽하게 내려앉았다 사납게 요동치는 어마어마한 구름이 런던을 덮어 버렸다. 사방이 깜깜했다. 사방이의혹이었다. 사방이 혼란이었다. 18세기가 끝나고, 19세기가시작된 것이다. - P232

영국의 기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비가 자주 내렸는데, 변덕스럽게 몰아치는 바람에 실려 온 까닭에 비가 그쳤다 싶으면 다시 시작했다. 물론 태양이 빛날 때도 있지만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고, 공기는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어서 광선이 퇴색했다. 칙칙한 자주색과오렌지색, 붉은색이 18세기의 보다 선명한 풍경을 대신했다.
멍들고 음침한 하늘 아래서 양배추의 초록색은 예전처럼 선명하지 않았고, 눈의 흰색은 희끄무레했다. 하지만 그보다더 고약한 일은, 이제 어느 집에나 습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햇빛은 블라인드로 차단할 수 있고 서리는뜨거운 난롯불로 말릴 수 있지만, 습기는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몰래 스며들기 때문에 가장 음험한 적이다. - P233

이처럼, 어느 누구도 변화가 일어난 날이나 시간을 꼭 집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히 눈에 보이지 않게 영국의체제가 변했고,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도처에서 그 영향이 느껴졌다. 고전적 품위를 갖추도록 애덤 형제‘가 설계했을 방에서 맥주와 쇠고기를 먹으려고 즐거운 마음으로 식탁에 앉은 강인한 시골 신사는 이제 방 안에 스며드는 냉기를 느꼈다. 그래서 양탄자가 등장했고, 턱수염을 길렀고, 바지를 발등 밑으로 단단히 조였다. 그 시골 신사는 자기 다리에 도는 한기를 이내 자기 집에도 이입했다. 그래서 모든 가구에 덮개를 씌우고 벽과 탁자를 덮어서, 덮이지 않은 것이없었다. 그다음에 음식의 변화는 필수적이었다. 따뜻하게 먹는 머핀이 나오고 크럼펫이 나왔다. 정찬 후의 포트와인은커피로 대체되었다.  - P234

아이들이 태어난 침실에 스며들어간 빛은 당연히 혼탁한 녹색이었고, 어른 남녀가 지내는응접실에 스며든 빛은 갈색과 자주색 벨벳 커튼을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외적인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습기는 내부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가슴속에서 냉기를 느꼈고마음속의 습기를 느꼈다. 자신들의 감정을 어떤 따뜻한 것에감싸 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그들은 잔꾀를 하나씩 부리기 시작했다. 사랑과 탄생, 죽음은 온갖 멋진 문구에 감싸였다. 남성과 여성은 점점 더 멀리 떨어져 나갔다. 솔직한 대화는 절대로 용인되지 않았다. 양성 모두 얼버무리고 은폐하는데 공을 들였다. 바깥의 축축한 땅에서 담쟁이덩굴과 상록수가 무성하게 자라듯이 안에서도 생식력이 왕성해졌다. 평범한 여자의 일생은 출산의 연속이었다. 열아홉 살에 결혼해서서른살쯤이면 열다섯이나 열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쌍둥이가 많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 제국이 탄생하게되었다. 그리하여 ㅡ 습기를 막을 길이 없었다.  - P235

그는 지상의 어떤 불도 방대하게 뻗어 나간 저 거추장스러운초목을 태워 버릴 요량을 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걷잡을 수 없이 자란 식물들뿐이었다. 오이줄기들이 <풀밭을 가로질러 뒹굴며 그의 발치까지 뻗어 왔다. 거대한 꽃양배추가 층층이 솟아올라, 그의 혼란스러운상상력에는, 느릅나무와 경쟁하는 듯했다. 암탉들이 쉴 새없이 뚜렷한 색깔이 없는 달걀을 낳았다. 그는 자신의 생식력과 지금 실내에서 열다섯 번째 출산의 진통을 겪고 있는가여운 아내 제인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고, 자신이 어떻게가금을 탓할 수 있겠느냐고 자문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국 그 자체도 아니 천국의 방대한 현관인 하늘도, 실로 천사들의 동의를, 부추김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 P236

영국 전역에서 이런 상황이 전개되는 동안, 올랜도는 아무문제 없이 블랙프라이어스의 자기 집에 파묻혀 지냈다. 그녀는 기후가 달라지지 않은 척하면서, 사람들이 아직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기분 내키는대로 반바지를 입거나 스커트를 입을 수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도 시대가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세기 초의 어느 날 오후에 그녀가 장식 판자로 꾸민 자신의 구식 마차를 타고 세인트제임스 파크를 드라이브하고 있을 때, 종종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쩌다 간신히 땅에 도달한빛줄기가 내려오면서 몸부림치다가 기묘하게도 무지갯빛 색깔구름에 무늬를 넣었다. 18세기의 한결같이 맑은 하늘을보다가 그런 광경을 보게 되자 너무나 신기해서 그녀는 창문을 내리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 P237

그녀는 우울한 소년이었고, 소년들이 대개 그렇듯 죽음을 사랑했다. 그러고 나서는 혈기 왕성하고 호색적인 청년이었다. 그다음에는 활기차고 풍자적이었다. 그녀는 때로 산문을 시도해 보았고, 때로는 희곡을 써보았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도 자신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예전과 똑같이 우울한 사색에 잠기는 기질을 갖고 있었고,똑같이 동물과 자연을 사랑했고, 똑같이 시골과 계절을 열정적으로 찬미했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집과 정원은 예전에 있던 그대로야. 의자 하나 옮기지 않았고, 장신구 하나도 팔지 않았어.
똑같은 산책로와 똑같은 잔디밭, 똑같은 나무들, 똑같은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똑같은 잉어가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지. 물론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이 왕좌에 있지만, 그렇다고 무슨 차이가…….〉 - P243

다음 날 아침에 펜을들어 글을 쓰려 했을 때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펜이 눈물을 글썽이듯 커다란 얼룩을 하나씩 만들어 냈다. 그러지않으면 펜은 더욱 놀랍게도 때 이른 죽음과 타락에 관한 감미롭고 유창한 글을 느긋하게 써내려 갔는데, 그것은 생각을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더 고약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그녀의 경우가 입증했듯이 ㅡ 쓰는 듯하기 때문이다. 펜을 조절하는 신경은우리 몸의 모든 조직을 휘감고, 심장을 누비고, 간을 헤치고나아간다. 통증이 일어난 부위는 왼손 같았지만, 그녀는 온몸이 구석구석 감염되었음을 느꼈다. 결국 그녀는 필사적으로 치유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시대정신에완전히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여 남편을 얻는 것이었다. - P249

이렇게 저렇게 그녀의 옛친구들은 모두 떠나 버렸고, 드루리 레인의 넬과 키트 같은여자들이 더 좋기는 했지만 기대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그녀는 창틀 위에 무릎 꿇고 앉아서 두 손을 움켜쥐고 실제로 그렇듯 호소하는 여인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빙빙 돌아가는 구름에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내가 누구에게 기댈 수있을까?」 그녀의 펜이 스스로 글을 썼듯이 이런 말이 저절로흘러나왔고, 양손이 저절로 쥐어졌다. 그 말을 한 것은 올랜도가 아니라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누가 물었든 간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떼까마귀들이 보랏빛 가을 구름 사이에서 허둥지둥 공중제비를 넘었다. 마침내 비가 그쳤고, 하늘에 무지갯빛이 떠올라 그녀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끈 달린 작은 신발을 신은 뒤 저녁 식사 전에 산책을 해야겠다고생각했다. - P253

다시 말해서 그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파도 위에 서린 푸른 인광을 보았고, 돛대 밧줄에 매달려 쨍그랑거리는 고드름을 보았다. 그가 돌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돛대꼭대기에 올라가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숙고하고, 다시 내려오고, 소다수 넣은 위스키를 마시고, 뭍으로 올라가고, 어떤흑인 여자의 함정에 빠지고, 후회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파스칼을 읽고, 철학서를 쓰기로 결심하고, 원숭이 한 마리를 사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 토론하고, 혼곶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 등등을 보았다. 그가 들려준 이 모든 것과 수천 가지 다른 것도 이해했다.  - P265

그녀는 몸을 굽혀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그 단어를 뜻하는 가을 크로커스 한 송이를꺾어, 너도밤나무 숲 사이로 푸른빛을 내며 굴러떨어진 어치깃털과 함께 가슴에 꽂았다. 그러고 나선 소리쳤다. 다인 그 소리는 숲속에서 이리저리 튀어나가, 풀밭에서 달팽이 껍데기로 모형을 만들며 앉아 있던 그에게 가서 부딪혔다.
그는 그녀를 보았고, 크로커스와 어치 깃털을 가슴에 달고다가오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었고, <올랜도!>라고 외쳤다.
그 말은(파란색과 노란색처럼 밝은 색깔들이 우리의 눈에서혼합될 때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의 생각을 물들인다는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선 무언가 뚫고 나가는 듯 휘어지고 흔들리는 고사리를 뜻했는데, 그것은 돛을 활짝 펼치고약간 꿈꾸듯이 들썩거리며 흔들리는 배라는 것이 드러났다. - P267

채색된 창문을 통해 빛과 그림자가 허겁지겁 날아 들어와 그들의 얼굴은 환히 빛났다가 어두워졌다. 수많은 문들이 탕탕거리고 놋쇠 냄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오르간이울렸고, 우르르 울리는 오르간 소리는 번갈아가며 커졌다가작아졌다. 몹시 늙은 더퍼 씨가 그 요란한 소음보다 더 큰 소리를 내려고 애썼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한순간 사방이 고요해졌고, 한 구절이 - 아마 <죽음의 손아귀였을 것이다 ㅡ 또렷이 울려 퍼졌다. 그동안 장원의 모든하인들은 갈퀴와 채찍을 손에 든 채 몰려들어 귀를 기울였고,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고 다른 이들은 기도했다. 새 한 마리가 판유리에 부딪히기도 하고 천둥소리가 울리기도 해서, 그누구도 순종하라는 말은 듣지 못했고, 손에서 손으로 건네진반지를 금빛 광채 말고는 보지 못했다. 오르간이 우렁차게울리고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들은 일어섰다. - P270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창밖을 내다보는 일뿐이다. 제비들이 있고, 찌르레기가 있고, 많은 비둘기와 까마귀한두 마리가 있다. 모두들 제 나름대로 무언가에 몰두하고있다. 어떤 것은 벌레를 찾고, 다른 것은 달팽이를 찾는다. 어떤 것은 퍼덕거리며 나뭇가지로 날아가고, 다른 것은 잔디밭에서 조금씩 뛰어다닌다. 그때 어떤 하인이 녹색 베이즈 앞치마를 두른 채 안뜰을 가로지른다. 아마 그는 식품 저장실의 어떤 하녀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지 모르지만, 눈에보이는 증거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저 최선을 바라며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얇거나 두터운 구름이 지나가면서 그 아래잔디밭 색깔이 약간 탁해졌다. 해시계는 평소처럼 아리송하게 시간을 가리킨다. 우리의 마음은 인생에 대한 한두 가지질문을 한가하게, 헛되이 던지기 시작한다. 인생, 그것은 노래한다. 아니, 인생은 벽난로 시렁에 올려놓은 주전자처럼흥얼거린다. 인생아, 인생아, 그대는 무엇인가? 빛인가 어둠인가, 하급 하인의 베이즈 앞치마인가 아니면 풀밭에 드리워진 찌르레기의 그림자인가? - P278

인생이 무엇이냐고 우리는 농장 대문에 기대서서묻는다. 인생, 인생, 인생! 찌르레기가 외친다. 마치 우리의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다음에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는작가들이 늘 그러듯, 안팎에서 질문을 해대고 살짝 엿보고데이지 꽃을 따면서 성가시게 캐묻는 이 습관이 무슨 의미가있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듯이. 그럴 때면 저들이 여기 와서인생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 거야, 라고 새가 말한다. 인생,인생, 인생!
그러면 우리는 야생화가 만발한 황야를 터벅터벅 걸어 검붉고 푸르고 짙은 자줏빛이 어우러진 언덕의 높은 등성이에올라 털썩 몸을 던지고는 거기 누워 몽상에 빠지고, 작은 구멍 속의 자기 집으로 지푸라기를 운반하는 메뚜기 한 마리를본다. 메뚜기는 (메뚜기의 쓱싹쓱싹 소리에 그토록 성스럽고다정한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다면) 말한다. 인생은 노동이야. - P279

혹은 먼지에 막힌 식도에서 나오는 붕붕 소리를 우리는 그렇게 해석한다. 개미가 동의하고, 꿀벌도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오래 누워 있다가, 저녁이 되어야 나타나 색깔이 흐릿해진 야생화 벨 헤더 사이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는 나방에게 묻는다면, 나방은 몰아치는 눈 폭풍 속에서 떨리는전신선의 거칠고 무의미한 소리를 우리의 귀에 대고 속삭일것이다. 히히, 하하. 웃어라, 웃어라! 나방이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새와 벌레에게 물어보았고, 수년간 녹색동굴에 홀로 살면서 물고기의 말을 들어 보려 했던 사람들의얘기로는 물고기는 결코, 절대로 말을 하지 않으므로 - P279

이 순간, 이 책을 소멸의 위기에서 구해 줄 시간에 딱 맞춰,
올랜도가 의자를 뒤로 밀었고 팔을 쭉 뻗어 펜을 내려놓고는창가에 가서 소리쳤다. 「끝났어!」그녀는 이제 눈에 와닿은 특이한 광경 때문에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정원이 있고, 새들이 있었다. 세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녀가 글을 쓰고 있던 동안에도 세상은 내내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겠지!」 그녀가 소리쳤다.
이 감정이 너무도 강렬하게 밀려와서, 그녀는 해체되는 자기 몸도 상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쓰러질 듯 현기증이 났을것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무심한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며 잠시 서 있었다.  - P280

그런데 어쩐지 예전의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던 활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실로 재치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 허물없고 편안하게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내 가까운 친구 포프>나 <내 너그러운 친구 애디슨>을 2초마다 한번씩 언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점잖은 분위기가 그를 감싸서 짓눌렀다. 그는 예전처럼시인들에 관한 스캔들을 들려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친척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왠지 모르게 올랜도는 실망했다. 그녀는 이 오랜 세월 동안(그녀의 은둔 생활과 신분, 그녀의 성이 그 핑곗거리가 되겠지만) 문학이란 바람처럼 거칠고, 불처럼 뜨겁고, 번개처럼 신속한 것이라고, 정도에서 벗어나 예측할 수 없고 돌연히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보라, 문학은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나 늘어놓는 회색 정장 차림의 노신사였던 것이다.  - P288

「원고로군요!」 니컬러스 경이 금테 코안경을 쓰며 말했다.
「매우 흥미롭군요. 대단히 흥미로워요! 한번 읽어 보게 해주세요! 그래서 약 3백 년의 시차를 두고 니컬러스 그린은 다시 올랜도의 원고를 집어 커피 잔과 술잔들 사이에 내려놓고는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내린 판단은 과거와 판이하게 달랐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는 이 시가 애디슨의「카토」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톰슨의 사계절」과 비교해볼 때 양호했다. 현대 정신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말하면서 다행스러워했다. 진실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가슴이 명하는 바를 심사숙고함으로써 태어난 시이고, 그것은 실로 무원칙한 기벽이 넘쳐나는 시절에 매우 찾아보기 어려운자질이다. 이 시는, 물론, 당장 출판되어야 한다.
사실 올랜도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드레스의 가슴 부분에 늘 그 원고를 품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러자니컬러스 경은 상당히 재미있어 했다. - P289

올랜도는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이제 그 시가 사라지고나니 - 원고를 품고 다니던 가슴이 텅 빈 듯했다ㅡ그녀는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인간 운명의 예사롭지 않은 우연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지금 세인트제임스 스트리트에 있었다. 기혼 여성으로서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과거에 커피하우스가있던 곳에 지금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햇살이 빛나고 비둘기세 마리와 잡종 테리어 한 마리, 이륜마차 두 대와 4인승 랜도 마차가 있었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무엇일까? 이 생각이맹렬하게, 느닷없이 늙은 그린이 왠지 그 생각을 불러일으킨게 아니라면) 떠올랐다. - P290

긴 생애를 살아오면서 그녀는 주로 원고를 보아 왔다. 스펜서가 작고 읽기 힘든 필체로 쓴 거친 갈색 종이 원고도 직접 들고 보았었다. 셰익스피어와 밀턴의 원고도 본 적이 있었다. 사실 그녀는 4절판과 2절판 원고를 꽤 많이 소장하고있었는데, 그녀를 칭송하는 소네트도 종종 끼여 있었고 때로머리칼 한 타래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선명한 글씨에, 모양이 동일하고, 판지로 제본되고 얇은 종이에 인쇄되었기에 단명할 수밖에 없는 이 무수한 작은 책들은 그녀를 한없이 놀라게 했다. 반 크라운에 살 수 있고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는셰익스피어 전집이 있었다. 활자가 너무 작아서 거의 읽을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놀라운 책이었다. 작품들 - 그녀가 직접 보았거나 들어 본 적이 있던 작가들의작품과 그 밖의 더 많은 책들이 긴 선반들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늘어서 있었다. 탁자들과 의자마다 더 많은 <작품들>이 쌓여 뒹굴었다. 그녀는 한두 장 넘기다가 이것들이 종종 다른 작품에 대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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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3-01-08 0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에서 이룬 트렌스젠더...아니 젠더트랜스라고 해야 할까요. 놀라운 소설..덕분에 다시 읽고 싶습니다!

2023-01-08 14:27   좋아요 0 | URL
놀라운 소설이예요. ㅎ~그죠. 저는 해리포터의 시작이 올랜도였구나, 싶었어요. 습한 영국의 기운이 환상성을 만드나 싶어졌다지요.
여튼 대단한 작가의 대단한 소설임은 분명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