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곳, 저녁과 아침과
열두 번의 바람이 지나간 하늘을 넘어
나를 만들기 위한 생명의 원형질이
이곳으로 날아오고, 여기에 내가 있네.

이제, 숨결이 한 번 스치는 동안 나 기다리니아직 산산이 흩어지지 않은 지금
내 손을 얼른 잡고 말해주오,
당신 마음에 품고 있는 것들을.

지금 말해주오, 내가 대답하리니.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말해주오.
내가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끝없는 길을 나서기 전에.

<슈롭셔의 젊은이>, A. E. 하우스먼


이 단편집은 화가들이 일명 ‘회고전‘이라 칭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책은 내가 서른두 살이라는 늦었지만 겁이 없던 때 데뷔한 이래 10년 동안 발표한 단편들을 한 예술가가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충이나마 글 쓴 연대순으로 엮은 것이다. 나는 연대의 전후 관계에 엄격한 사람은 아니다(연대의 전후 관계에 엄격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글은 쓰는 데 1년이 걸리기도 하고, 그 이후 2, 3년이 지나도록 발표되지 않을 수 있으며, 퇴고를 거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글을 완성한 날을 언제로 보아야 하겠는가). 하지만 순서 변동은 그리 크지 않다.
내가 쓴 단편들이 모두 이 책에 수록된 것은 결코 아니다. 초기에 발표한 작품 중 하나는 내가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 뺐다. - P9

그리고 판타지소설이나 SF과학소설의 범주 안에 속하지 않는 작품 또한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최근 몇 년 새 발표한 단편들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 작품들이 맨 처음 수록된 단편집이아직도 출판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 있는 마지막 두작품은 1973년과 1974년에 발표된 것으로, 이 단편집에 수록된열일곱 편의 이야기는 지난 10년 내지 12년을 아우르고 있다.
소설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의 관계는흥미롭다. <샘레이의 목걸이>는 그 자체로 완벽한 이야기지만장편소설의 토대가 되었다. 나는 이 작품을 끝마쳤을 때 샘레이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다 썼다. 하지만 단편에서 단순히 방관자역할로 중요하지 않게 등장했던 인물이 이야기가 끝났음에도불구하고 고분고분히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자꾸 나를 괴롭혔다. 그자는 "내 이야기를 써. 난 로캐넌이라고 해. 난 내 세계를 탐험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난 그 사람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런 종류의 사람과는 논쟁해봤자 소용없는법이다. - P10

<겨울의 왕> <해제의 주문> <이름의 법칙> 모두 장편소설의 토대가 된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장편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무대 배경을 제공해주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마지막 작품은 토대가 아니라 열매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 나온 다음에 고맙게 얻은 궁극의 선물이다.
사실, 이 책에 실린, 시간순 서술 방식을 따르는 단편소설 대부분은 내가 쓴 모든 SF가 따르는 다소 아귀가 안 맞는) ‘미래 - P10

사‘의 개요에 그럭저럭 들어맞는다는 점에서 내 장편소설들과관련이 있다. 이런 개요에 맞지 않는 작품들은 초기에 쓴 판타지소설과 내가 ‘심리신화‘라 부르는, 이후의 다소 초현실주의적인작품들이다. 심리신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역사나 시간대가 아닌 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며, 그곳에서 사는 생명체는 불사라는 개념에 호소하지 않아도 시공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판타지소설과 공통점이 있다.
수집가라면, 이 책에 실려 있는 작품의 제목을 내가 직접 골랐으며 예전에 발표했을 때의 제목과 달라진 점을 알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 P11

<샘레이의 목걸이>는 처음에 <앤기어의 결혼 지참금>이라는제목으로 발표(‘앤‘ 발음을 제대로 할 줄 모르던 편집자의 실수였다).
<물건들>은 <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
<시야The Field of Vision>는 <시야Field of Vision>로 발표.
단어 하나 또는 문장 하나 정도 고치거나 지면관계상 삭제된부분을 복원하거나 출판 당시에 있었던 오류를 수정하는 정도가 아닌, 새로 고쳐 쓴 글들은 다음과 같다:<겨울의 왕> (해당 단편 앞머리의 짧은 글 참고)<아홉 생명>(해당 단편 앞머리의 짧은 글 참고)<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첫 문단에서 한군데 삭제) - P11

1963년에 쓴 이 글은 1964년에 <앤기어의 결혼 지참금>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으며, 1966년에 발표한 내 첫 번째 장편소설 《로캐넌의 세계》 도입부이기도 하다. 비록 출판된 순서로는 여덟 번째이지만 나는 이 글로 책을 시작할까 한다. 이이야기에 내가 쓴 초기 SF와 판타지소설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고 또한 이작품이 가장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로부터 단편집의 마지막인 1972년에 쓴 단편까지, 내 글의 문체는 공공연한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이었다. 나는 여전히 낭만주의자이고그 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며 또한 내가 낭만주의자인 게 기쁘다. 하지만 <샘레이의 목걸이>의 솔직 담백함과 단순함은 점차 단단하고 강력하고 복잡한 것으로변하게 되었다. - P14

그토록 먼 세월이 떨어진 세상들에 대한 전설과 사실을 당신은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름도 없이 그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과거는 신화의 영역이 되고 여행에서돌아온 탐험가들은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벌였던 행동이 신의몸짓이 되어버린 사실을 깨닫게 되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행성들에서 우리의 광속 우주선이 다리를 놓은 시간의 틈은 광기어린 어둠이 잠식하고, 그 어둠 속에서 불확실과 불균형이 잡초처럼 자라난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그러한 이름 없고 반미지의 세계로 떠났던 어떤 남자, 한 평범한 연맹 과학자의 이야기를 하려니, 마치 수천 년의 폐허 한복판에서 얽히고설킨 잎과 꽃 가지와 덩굴사이에서 돌연 모습을 드러내는 바퀴 모양 기하 도형의 배열이 - P15

나 마모된 머릿돌 따위를 찾아다니던 고고학자가 어느 평범한장소의 양지바른 현관으로 발을 디뎠는데, 그 안의 어둠 속에서상상치 못했던 불꽃의 깜빡거림을, 보석의 반짝임을, 여인의 팔이 슬쩍 움직이는 모습을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든다.
당신은 어떻게 전설에서 사실을, 진실에서 진실을 구분해낼수 있는가?
푸른색으로 반짝이며 슬쩍 모습을 보였던 보석이 로캐넌의이야기를 통해서 돌아온다. 그 보석과 함께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 P16

남편의 재산이라곤은거울과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그마한 수정 천 개로 장식한신부 드레스가 전부였다. 이들보다 지체가 낮은 친척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금실은실을 섞어 짠 비단옷으로 가득한 옷장, 금박을 입힌 목재 가구, 은제 마구, 은으로 장식한 칼과 갑옷, 보석과장신구들을 가지고 있었고, 갓 결혼한 두르할의 신부는 부러운눈으로 그 물건들을 바라보았으며, 심지어 그런 장신구들을 걸친 사람들이 여인의 혈통 그리고 두르할과의 결혼으로 인해 생긴 신분에 경의를 표하며 길을 양보할 때도 여인은 고개를 돌려보석 왕관이나 황금 브로치를 힐금거리곤 했다. - P19

두로사는 엄마와 고모 사이에서 모피 깔개에 앉아 자신의 갈색 발가락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아기에게 고개를 숙였다. "샘레이는 바보란다."두로사는 아기에게 중얼거렸다. "유성처럼빛나는 샘레이, 남편이 사랑하는 건 세상의 황금이 아니라 아내의 금빛 머리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샘레이……두로사의 말에 샘레이는 입을 다물고 먼 바다로 향한 여름의 푸른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추운해가 지나고, 별의 지배자들이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 다시 세금을 걷으러 왔다갔다. 별의 지배자들은 이번에 통역으로 진흙인 난쟁이 한쌍을 썼는데, 이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앤기어인은 거의 반란 직전까지갔다.  - P23

"그래." 관장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저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금발의 샘레이, 황금빛 샘레이, 목걸이를 한 샘레이. 진흙인은 샘레이의 의지에 따라 자신들의 의지를 굽혔고, 심지어 진흙인이 샘레이를 데려갔던 끔찍한 곳, 밤의 끝에 사는 별의 지배자들조차 샘레이의 뜻에 따라주었다. 별의 지배자들은 샘레이에게 절을 했고, 자신들의 물건 가운데 샘레이의 보물을 기꺼이 돌려주었다.
하지만 샘레이는 동굴에서 느꼈던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바위가 머리 위를 내리누르는 곳, 누가 말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곳,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고 회색 손이 뻗쳐오던 곳. 이제 충분했다. 샘레이는 목걸이 값을 치렀다. 아주후하게. 이제 목걸이는 샘레이 것이었다. 대가는 지불했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 P48

샘레이는 자기 목을 내리누르는 금사슬에 손을 댔다. "그이에게 제가 가져온 선물을 주겠어요."
"기다리거라, 샘레이! 두르할의 딸이자 네 딸을 보고 가렴. 아름다운 할드레를!"
샘레이가 처음에 말을 걸었던 여자아이, 두로사에게 자신이온 걸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바로 그 아이였다. 열아홉 살 정도로, 두르할의 짙푸른 눈동자를 그대로 닮은 아이였다. 할드레가두로사 옆에 서서 차분한 눈으로 자신의 어머니인 샘레이를, 자신과 동갑인 샘레이를 바라보았다. 둘은 나이가, 황금 머리털이, 아름다움이 같았다. 다만 샘레이가 키가 약간 더 컸고 가슴에 푸른 보석을 달고 있을 뿐이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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