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심리학, 이 보다 더 매력적인 학문이 있을까? 나는 심리학에 대해서 상당히 호감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경제 문화적 현상에는 사람을 때어놓을 수가 없으며,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심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천년 앞서 손자가 말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병법의 바탕이 된다.

문화라는 토대는 사람이 쌓아올린 건물이다. 문화나 사회 속에 사람을 빼 놓고 무엇을 생각할 수가 없다. 또한 사람은 혼자가 아닌 모둠 속에 존재한다. 즉 사람 인(人)이 나타내는 뜻은 함축적이며 지시적 언어이다. 나는 이 단어를 통해 사람이 홀로 혹은 모둠 속에서 어떻게 숨쉬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곤 한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보면, 5분이 지나면 다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나는 서른해를 살아오면서 나를 모르는데 어떤 이는 만났는지 5분만에 안다 하고, 어떤 이는 A, B, O, AB형이라는 4가지 틀로 가두기도 한다. 과연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이를 묻고 답하는 것이 심리학이 아닐까? 심리가 궁금하여, 나는 책을 짚었다. 이 책은 열명의 사람들이 나오며, 그들은 새로운 창조자들이다. 즉 기존에 옳다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은이는 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기거나 포장되어진 거짓을 벗겨내기도 한다.

처음 만난 심리학자는 책의 제목에 나온 '스키너씨'다. 그는 비운의 아버지다. 딸을 상자에 가두어 실험을 하고, 결국에는 죽음을 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이 부분에 그렇지 않다고 들려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글쓰기가 책의 끝자락까지 따라붙는다. 즉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어쩌면 사실이 아닐런지도 모른다'라고 들려준다. 그렇다면 지은이만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인가?

(열명의 심리학자들의 이름이나 연구보고서를 취하는 대신에, 차례로 번호를 매긴다.)

① 스키너는 실험을 통해 정기적으로 강화(칭찬)를 하는 것 보다 마음가는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즉 "간헐적 강화"(27쪽)를 통할 때에 더 큰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카지노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주식 투자가 그렇다. 어쩌다 소 뒷걸음 쳐 쥐를 잡았는데, 우리는 항상 따라 다리는 행운이라 생각하고 많은 돈을 빌려서 쏟아 붇는다. 이를 역으로 써 먹는 이들이 있으니, 이름하여 '도박꾼들'이다. 그들은 처음에 잃어 주는 척 하다, 많은 돈이 붙으면 왕창 따먹는 것이다.



강산이 변하기 전에, 사랑이 꽃피는 나무라는 티비 드라마에서 남자친구가 여자를 좋아하는데, 어머님의 반대가 심하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날마다 보낸다. 한달 가까이 보내다 '뚝'하고 끊어버린다.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여자친구가 아닌, 검열관은 어머니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갑자기 끊어진 이 상황에 궁금증이 생기고….끝내는 허락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스키너의 '간헐적 강화'라는 어려운 단어보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쉽게 일상에서 이런 심리를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② 밀그램 아저씨의 이야기.

밀그램은 사람들이 명령에 따를 것일라고는 예상했지만 65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충격을 가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전제는 명령이다. 즉 누군가가 명령을 내리면 아랫사람들은 그 명령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모일 것인지에 대해서 자기도 몰랐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옳지 않은 명령에 따를까? 여기에 대해서 깊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지은이가 명령에 따른 몇 몇 사람을 찾아가 상황을 듣지만, 베트남 전쟁의 비극이나 한국전쟁에서 보여진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합리화하여 명령에 따르는가? 세계는 미국이라는 힘의 나라에 어떻게 굴복하는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는 35퍼센트의 사람들의 힘에 대해 무시, 수동적 반동(65퍼센트)과 적극적 반항(35) 사이에 어떠한 힘의 균형이 존재하는가? 즉 적극적 의지인가 비자율적 의지인가에 대해 묻지 않고 수치로 의분화, 단순화하는 한계를 짊어지고 있다. 그가 보여준 권위에의 복종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답하지 못하고 이미 보여진 상황을 실험실에 재창조했다고 보여질 수가 있다.

③ 엽기적인 사고에 대한 관찰자의 모습, 왜 그들은 전화를 하지 않았나. 혹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것이 아닌가?

"어떤 규모의 집단이든 피실험자가 처음 3분 안에 비상사태를 보고하지 않으면, 그 후 어느 시점에서도 보고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105쪽)

"도시인 특유의 냉담한 때문에 모르는척했다기보다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또는 두려움에 몸이 얼거나 어찌할 바를 몰라서"(107쪽)

엽기적인 사고의 발생, 사람들은 모른척 한다. 나 아닌 다름 사람이 전화할 것(?)이라는 가설만이 존재한다. 즉 3분안에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를 "책임감 분산"(108쪽)이라는 단어로 정의를 한다. 즉 가설이 정설이 되어버렸다.

어떠한 행동이 '즉시'에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그의 이야기에 나는 공감한다. 이를 잘 표현한 만화가 『은과 금』이다. (여기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이야기는 말줄임표로 나타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은 현실에 대한 안주, 이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로 이어지며, 어떤 이야기에 대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 전이시킨다. 즉 평소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무지 중요하다. 위급시의 돌발 행동은 연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가 있다. 이 실험은 현실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면 어디에 숨을 줄 알지만,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핸들이 돌아버리면 혹은 버스가 늘 오다가 오지 않으면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우는 행위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책임감 분산'이라는 언어에 대해 반의 공감반의 반감이 존재하지만 그가 던진 '3분의 비상사태'를 내 안의 사고로 끌고 오면, 분명 무엇을 건질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위급시의 돌발행동에 대해서도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풍문에 들리더라. 일본에 지하철 사고가 나면, 우리나라 언론과 시민은 '꼬시다'하고, 일본 언론은 우리나라에 지하철 사고가 나면 자기네 지하철은 점검한다고…. 웃어 넘기기에, 거짓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베르터 효과(114쪽) 참조

④ 사람과 원숭이의 유전자는 완전 일치하는가?

"사람에 작용하는 변수가 세가지 있다는 것을 의미했지요. 스킨십과 움직임 그리고 놀이요"(135쪽)

이 부분은 원숭이에 대한 연구를 사람과 동일시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즉 지은이도 말하고 있지만, 원숭이의 실험이라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스킨십'과 '움직임', '놀이'라는 단어는 어느 동물에나 쓰여지지 않나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⑤ '인지 부조화'에 대해 설명이 미비하고, ⑥은 재기발랄한 실험이지만, 정신과 의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며, 정신병원이 사회에 지니는 가치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 있다. 즉 심리적인 면에 한정하며, 그들의 행동이 재치 발랄하다는 점에 머물렀다는 것이 장점이자 한계를 지닌다.

⑦ 57일 동안 헤로인을 주어 마약 중독 상태로 만든 다음(강제), 일반 물과 모르핀을 주었는데 두 분류의 쥐 가운데, 삶이 넉넉한 쥐(?)들은 모르핀을 멀리한다. 중독성이 없다는 결론에 대해….

"저는 마약과 마찬가지로 금단 현상 또한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약물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계속 들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마약 복용자들은 금단현상을 고통이 아닌 불안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쥐들도 고통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217쪽)

"만일 그의 쥐 공원 연구 결과가 올바른 대접을 받았더라면, 지금쯤 도심의 빈민가가 정비되고 마약 치료보다 교육 기금 조성에 힘쓰는 정책이 수립"(219쪽)

"그는 어려운 환경이 중독을 이끈다고 믿고 있었다"(226쪽)

쥐를 통한 실험이지만 유의 깊게 받아들인다. 다만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 이론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니… 도심의 빈민가를 정비하는 요원해보인다. 그네들은 몇 십억을 단 몇 분에 날려가며 불구경을 시켜 줄 수 있어도, 달동네 사람들의 밥 걱정은 하지 않는다. 아마도 불구경은 같이 할 수 있지만, 그는 오늘 밤 무엇을 먹을 것인가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⑧. "가짜기억 증후군"(237쪽) 이라는 단어를 통해, 기억의 거짓 창조를 말한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가지지 못하고 있다. 이를 변론하는 언어는 "희생자라는 정체성"(248쪽)이라는 모호한 개념. 전생을 보았는가? 최면을 통해 보여진 세계가 전생이라고 말하는 것과 큰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 하다. 즉 그의 언어는 새롭지만 증거는 미약하다.

⑨, ⑩번은 읽지 않았기에, 다음(PASS)….

이 책은 스키너에서 밀그램 등 유명하거나 혹은 잊혀진 열명의 심리학자와 그들의 이론을 들려준다. 심리학을 통해 사회환경적 문제와 연결고리를 찾다가 개인의 업적에 초첨을 맞춘다. 즉 폭넓고 깊이 있는 문제제기는 한 사람에 대한 감싸기로 길을 찾고 있다. 이르다 보니 사회문화 속에서 인간의 심리가 아닌 개인의 연구성과와 그의 성찰로 글이 돌아간다. 그들이 말하는 심리는 기존의 학계와 정면 배치되는 것으로 아웃사이더로서 존재한다. 과연 새로운 가설을 통해, 기존 학계에 대한 비판인지 증거 부족의 반항적 글쓰기인지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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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2-21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전반적으로 재미있군요. 5분만에 사람 판단하는 건 면접장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서류를 훑은 후 첫인상을 보고 결정하는 경우가 많죠. 은과금의 작가가 요즘에는 카이지와 쿠로사와로 이어지는데 보시즌지요 ^^

열린사회의적 2006-02-2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작품 모두를 대충 훓어보았는데...은과금에서 보여지는 은행의 비리구조를 명확하게 밝히는 듯 하다가 영웅이 되겠다고 억대 도박을 벌이는 모습에 너무 부풀리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더랫죠. 카이지는 많이 거론되고, 쿠로사와는 근래에 나왔는걸로 아는데... 1,2권 정도 보앗습니다. 아무튼 이 작가 그림은 개성있게 그리면서 사람의 심리를 깊이 파헤친다고 하는데.... 일본만화에서 보여지는 영웅을 통한 사회개혁이라는 모티브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소나무 - 한.중.일 문화코드읽기, 비교문화상징사전
이어령 책임편찬 / 종이나라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책 어떻게 읽을까?

[메모]
정수일의 시야와 이어령의 시야는 어떻게 나뉘는가?
정수일, 이슬람, 국제적
이어령, 한중일, 유교적

두번째, 세계 속의 한국 문화를 볼 때에 무엇이 기준이 되는가?
그것이 한국의 대표성인가 상징성인가?

세번째, 민중의 삶과 관계는 어떠한가?
네번째,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엮은이의 세계관, 갇힌 세계관

어쩌다 시골길을 지나다가 바위틈이나 벼랑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를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대단히 감상적이고 시적 언어를 쓰고 있다!!!!!!!!
[-솔직히 날씨부터 문화, 역사 이야기 등으로 들머리를 쓰기에는 내 필력이 모자라 거두절미하고]

어쩌다 시골길을 걷는 도시인이 바위틈이나 벼랑 위의 소나무에 대한 예찬은 거짓이다. 그는 책에서 보아온 소나무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이는 어쩌면 꽃과 여자, 사진만 있는 공간에 최민식의 사진을 보았을 때의 감정과 같다. 하지만 최민식의 사진은 본다고 하여, 사진 속 주인공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 듯, 어쩌다 시골 길을 걷다가 보는 소나무를 보고 그에 대한 이해를 한다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또한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우리 동네 소나무는 분명 산에, 숲으로 우거져 있다. 암만 시골길을 걸어도 보리하고 벼 밖에 볼 수가 없지, 소나무를 본다. 그럴듯 하게 '산길'이라 했으면 그렇거니 하며 넘어갔을 텐데.... 산에 있는 소나무를 '그냥' 보라. 내 틀에 다시 끼어서 조각내지 말고.

너무 극적 드라마를 연출하여 깊은 울림을 불러내는 것은 억지이며, 자연스럽지 못하고, 거짓말이 될 뿐이다. '눈비맞고, 밤하늘 별을 헤어려가며 한번도 눕지 않는 소나무를, 구들장에 누워 곰곰히 생각해 보니'라는 것이 더 진실되지 않을까?

지은이는 예술가의 삶 속에 그려진 그림을 불러내어 들려준다. 여기에는 스스로 그리지 않고 스스로 그렸다고 버젓이 우김과 다 이해한다는 오만함, 내 말이 옳다라는 자만심이 가득하다.

"소나무는 기암절벽의 높은 곳에 서 있어야 소나무답다(9쪽)"

다시 불려온 연출!

소나무는 그냥 소나무이지 어디에 얽매혀 있어서 소나무가 아니다. 그건 네가 바라보는 소나무일 뿐이다. 이는 자연을 내 눈에 끼어넣어 '별사탕'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엮은이(-지은이, 이어령)세계관은 자연을 自然 그대로 봄이 아니라, 그의 가치관이나 지향해야할 내재적 세계관과 동일선상에 놓인 그림이나 글만이 옳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책의 흐름은 지은이의 눈에 의해 재조합 될 가능성이 밤 보다 어둡다.

몇 몇 글쟁이(은둔, 처사)이나 특정 집단(선비라고도 불림)의 글을 통해 "소나무를 가까이 한 이들의 공통정은 한결같이 초월적이고 은둔적인 삶을 지향했고, 그런 삶 속에서의 소나무는 하나의 인격체로 반영(54쪽)"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편집인은 소나무를 가까이 한 이들을 나라인(人) 전체로 포장하여 내어놓는다. 즉 배부르고 등 따시거나 밥 벅고 사는게 별개인 사람들의 예술 작품을 우리 조선들의 숨결이라고 말한다. 밥 먹고 살기에 너무 바쁜 이들은 글을 알지 못하거나 시를 읊을 시간이 없었으니 전하는 것이 없으니, 이야기 되지 않고 묻힌다. 즉 눈에 보이는 특정 예술 작품을 한국의 숨결이다라고 고상한척 한다.

이런 글쓰기는 바위틈에 세워진, 등허리가 구부런지 소나무어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곱게 자란 소나무는 우리 조선들의 숨결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번씩 갈라진 소나무, 한번씩 걸러낸 작품, 이렇게 선별된 나무와 작품은 영웅으로 우상화된다.

여러 글쟁이들이 저 마다 소나무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만 앞서서 말한, 특정인의 예술 작품에 한 하기 때문에 민중과 쉽게 동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또한 소나무에 대한 예찬은 책상다리를 하고서 글을 쓴 듯 하여 거짓으로 치장된 것이 보인다.

내 경험에 한하여, 소나무는 항상 푸르다. 봄이나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 푸르다. 그 푸르름은 어떻게 지탱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묻곤 했다. 멀리서 소나무를 본다면, 한 평생을 보아도 해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직접 소나무에 다가가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때 소나무의 푸르름을 진실로 알 수가 있다. 나는 길을 가다가 문득 바라다 보이는 소나무에 대한 예찬 보다 민둥산을 숨기고 숲을 만들어 온갖 동물을 불러 모우는 소나무가 좋으며, 고고한 선비의 시 보다 우리 어머니가 고이 걸었을 풍입송(風入松)을 새겨본다.

소나무의 쇄락과 퇴출은 바로 한국의 전통문화의 부피를 상징하는 척도(24쪽)"

이런 단순 논리는 상징성으로 대체되어 합리화 된다. 하지만 그의 이론적 근거는 특정 집단의 의식이며 실생화에서 불려나오지 못하니 아쉽기만 하다. 아울러 이 책은 같은 의미의 반복이 아닐까 할 정도로 다른 이들의 글이지만 공통된 함의적 의미를 곳곳에 보인다. 분명 다른 사람의 글인데, 왜 같은 결론이 나올까라는 점은 답이 정해져서일까?

한.중.일의 세 나라에 대한 문화적 고찰이라고 하지만 내용이 너무 부실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책값과 대비되어 내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울러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을 치장하여 두껍게 내어놓은 듯 하다는 생각은 책을 읽고도 마음이 씁쓸하다.

(추신: 한.중.일 문화 코드이지만 내가 읽은 부분은 한국에 집중되었음을 밝힘)

메모에 대한 답변.

책을 읽기에 앞서 잠시 가졌던 메모는, 그냥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나 역시, 엮은이 처럼 '별사탕 소나무'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에 허둥지둥 찢어 버렸다. 그냥 읽혀지는 대로 잠시 보았다. 깊이 생각할 수록, 책값에 대한 미련이 내 머리를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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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2-1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에는 매화에 대해서 한중일 비교한 책이 나왔던데 흘끔 보니 괜찮았습니다만. 이 책은 기대보다 별로인가 보죠. 별이 하나 라고 하니 쩝.

betterworld 2006-02-1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디도 그렇고 다른 리뷰도 그렇고 세상을 좀 비딱하게 보시는 듯

열린사회의적 2006-02-15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뭐라 적을까요. 세상을 비딱하게 본다. 하하... 낯설게 본다라고 하였으면 더 기분이 좋았을텐데... 세상이 비딱한건지 내가 비딱한건지 내세우지는 않겠습니다. 열린사회 의적인가 열린사회의 적인가? 주위의 평은 상관 없습니다. 내 기준은 명확하며, 일천년 전, 천구백년대에 정동주 선생님을 만나고 얻은 화두,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는 신이 되거라"가 내 삶의 절대 주제임만 밝힙니다. 그리고 사마천님께서 꼼꼼히 봐 주셔셔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음, 사마천님의 시선과 제 시선이 다른 것은... 저는 제가 하는 한에서, 민중의 입장에서, 현실감각과 함께 보려고 합니다. 책은 삶의 담는 그릇이자 도구이며, 절대 진리가 아닙니다. 책을 우상화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티비말하다는 다시보기하는데, 사회자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분을 잃고 있군요. 소나무를 과연 저렇게 포장하여, 한국의 소나무로 가두어야 하는가 하는데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입니다. 소나무는 그냥 소나무일뿐입니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이어령씨의 글은 자칫 이헌령비헌령에 빠질 수가 있음을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백면서생이지 농부나 어부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벼를 이야기 하고, 물고기를 이야기 한다는게 제 짧은 아집니다. 음, 짧게 글을 적으려고 했는데... 사마천님에게 고마움을 표해야겠고, 티비 말하다의 사회자가 이어령님을 우르러 보며 이상화하기에 한마디 더 붙이고, betterword님의 '비딱하게'하게 라는 말에 변을 달다 보니 말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두서 없는 글, 마무리는 따로 짓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제 글이 분명, 낯설다는 것을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찬욱의 몽타주
박찬욱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글은 직설적이다. 혹은 여유가 없다. 하지만 색깥은 짙다

수필인데 어때?
하지만 거친 숨소리가 옛까지 들리는 듯하다.

1. 짧은 글
보네거트 유머가, 전지적 작가가 자기 인물에게 던지는 냉소적인 코멘"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건 일종의 '테도'라서 쉽사리 영화로 번역되지 않는 법이다.(27쪽)"

냉소적인 시선은 지은이의 글과 동일선상에 있지 않을까? [소리(들)]에 보인 가훈이나 [전쟁]에서 보여지는 분위기 등...(이는 뒷부분으로도 이어진다.)

물이 흐르듯이 이야기를 꺼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가지로 흐르는 물을 한움큼 담아 놓은 듯. 그래서 난 밑도끝도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담아 놓은 얘기지만 헤아릴 수 없으니 생각도 여러조각 나눠지고 흐름도 그릴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바가지에 담긴 물의 맛을 쫓는 것 뿐.

"내가 이 형제(-류승범 형제)를 존경하기 까지하는 이유는 뭐냐"라고 말문을 열고서는 이렇게 들려준다.

"유쾌하면서도 동시에 진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21세기를 살면서 그러기는 정말 어렵다는걸 여러분도 다 아시리라 믿는다(58쪽)"

그런가?

분명한 것은 ' 여러분'에 나는 금(線) 밖에 서 있다. 내 가치관은 어떤 색안경을 끼는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보인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지은이의 안경은 '냉소적인 안경'이리라. 류가 형제는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안경', 나는 어떤 안경을 끼고 있냐하면 '일곱빛깔 행복안경'이다.  세상을 담는 눈은 저마다 다를 지인데, 어떻게 그의 눈높이로 통일을 시키려하는 걸까?

치장의 역사, 둘
또한 그의 글쓰기는 화려한 지식의 나열이다.

그 만큼 영화를 사랑하지 않는 나는 김기영, 이두용을 이 자리에서 처음 뵙고, 임권택의 <우상의 눈물>보다 <창>을 기억한다. 그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는 무논에 개구리밥처럼 둥둥 떠 있을 뿐이다.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볼까하여 연습장을 꺼내어, 그가 불러주는 이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려고 적고 있다. 문득 학창시절의 '나'가 겹쳐진다.

2. 참 말이 많다.
자기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 스스르를 들어내는게 '상' 밖에 없는 듯 한 사람. 그는 스스로 "영화제라는 데 가면 특기 다 '거장'아니면 '놀라운 유망주'에 의해 연출되었고....(71쪽)"라며 비아냥 거리며, 색체없는 영화제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를 지탱하는 것은, 그가 말한 '영화제 상'이니 참 아이러니컬하다. 문득 지은이가 누굴까 궁금하여, 앞쪽 책날개를 펼쳐보면 그는 상 뒤에 숨어 있음을 볼 뿐이다.

다른 공간에서 그의 인터뷰를 만났다면  기대감이나 호기심으로 인해 볼펜 들고 밑줄 긋어 가며 읽었을 터이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공간의 부족함을 예전의 글로 메꾸어 새로움을 연출하려 하는 것인지?

사랑은 그냥 나이를 먹는게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눈이 두터워 짐을 나타낸다. 두터워진 눈은 쉽게 '가타부타'하지 않으며 내면적 성창을 두껍게 '퉤'하고  던져낸다. 근데 나이는 드셨는데, 글은 예전글이니...  나는 오늘의 그를 보고 싶지, 추억속의 인물이 그리운 건 아니다. 혹시 그때의 글이 지금에서도 유효하다는 건가? 유통기한이 아직 남았다는 말인가? 음...

그의 글쓰기는 밑도끝도 없는 단락적인 글쓰기에서, 영화를 통한 초상 만들기, 마지막으로 영화를 통해 자화상 세우기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3. 지식의 나열
앞에서 밑도끝도 없는, 너무짧게 끝났다고 얘기했는데, 마지막에 들려주는 '영화이야기'는 또한번 밑도끝도 없이 늘어 놓는다. 거미줄처럼 엮인 그의 지식은 어디로 날아들지 모르며, 영화에 대한 애착이 없는 나는 낯선 이름만 줄줄이 읽어내려가고 있다. 이름을 끝까지 읽어야 되는지 깊은 회의가 든다. 그의 지식은 화려한데, 부연 설명은 누추하다. 즉 '너 이때 동안 답답했지 네 지식을 한번 날려봐'했더니, 거침없이 쏟아내는 격이다. 여기에는 '개성'이라는 이름하의 '지식'만 있지 타자에 대한 입장이나 이해는 없다.

덜하고 더함에 대한 균형감각이 덜한 지은이는, 앞서의 부족함을 마지막에 채워넣어 책의 균형감각을 세우려는건가? 머리가 아프다.

박찬욱의 나열된 모습을 통해, 그의 초상을 그려보면, 냉소적인 시선으로 조금은 거친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그의 영상미학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문체와 성찰을 논하는 자리이다. 나는 그의 영상미학이 어떠하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글이 너무 거칠다는 것은 단연코 말할 수 있다. 조금은 거슬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임 : 글이라는 것은 '삼다(三多)'라 했던가? 나는 그를 '영화인'으로 '행동하는 박찬욱'으로 볼 것이지 '글쟁이 박찬욱'으로 이렇게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글로써 생각을 들려주려면, 영화에 대한 사랑만큼 글에 대한 사랑도 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06,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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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2-0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이 책 살까 생각했는데 귀가 얇은지라 다시 생각 해봐야겠어요..
 
사진이야기 - 사진시대총서 2
수잔 손탁 지음, 유경선 옮김 / 해뜸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지은이를 세 번째 만나지만, 나는 아직도 벅차다. 그의 글쓰기는 나에게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진다. 『사진 이야기』가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고 하지만 그의 글은 내 부족한 머리에 들기에 너무나 고고하다. 왜 이렇게 어렵게 해야하는지... 정말 물어보고 싶다. 혹시 신비주의자가 아닌가... 아버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절대 아닌데... 음...

나는 다시 세번째의 책을 들었지만 솔직히 다 읽지는 못했다. 그 가운데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는, [사진으로 보는 암울한 미국]이라는 부분에 대해 몇 자 적어 본다.


미국에 순수 시인 '휘트먼("순수한 휴머니즘", 45쪽)'이라는 이가 나온다. 그는 아름다움과 거짓을 애써 구분하려 하지 않고, 모두가 아름답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움은 사진가들을 사진을 통해 재탄생을 하게 된다.  사진이 담는 영상이 "이상화(理想化) 된 영상"(42쪽)을 담기 때문이다. 이런 사진은 스타이 켄->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워커 에반스의 계보를 잇는다. 이렇게 사진은 감정이입, 부조화 속의 조화, 다양성 속의 단일성, 범세계적인 동화를 드러낸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1955년 열었던 사진 전시회 <인간 가족(The Family of Man)>속"에 실린다. "68개국에서 273명의 사진가들이 찍은 503점의 사진은 모두 한 가지 주제로서, 인류는 '하나'이며 인간은 결점도 있고, 비열하기도 하지만 역시 좋은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47쪽) 있기 때문이다.

보여지는 아름다움 보다, 더 아름답게 포장되어 지는 사진-"사진은 일종의 과장이요 물질세계의 영웅적인 결합이다."(46쪽)- 미국 정신의 구현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그네들의 찍은 사진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에 대한 포장일 뿐이다. 즉 사진을 찍기 앞서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나뉘어져 있으며, 아름다움은 더 아름답게 더러움은 애써 사진 밖으로 밀어냈다. 휘트먼의 "순수한 휴머니즘"을 계승하고 있지만 반쪽 자리였을 뿐이다. 그리고 아버스가 나온다. 그는 스타이켄의 사진 전시회 17년 뒤에 "'기형인간이나 혼열인간' 112장의 사진"을 모아 회고전을 연다.

"이들은 대부분 추악해 보이고 게다가 기괴하거나 경박해 보이는 옷을 입고 음산하거나 웽뎅그렁한 환경 속에 멍하니 멈춰 서 있는 포즈를 취하여 순진하고 격의없는 눈초리로 관람자들을 쳐다보는 것이 많다. 아버스의 작품은 보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촬영한 부랑자(pariah)나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드로가 동화하라고는 요구하지 않는다. 인류는 '하나'가 아니라는 이면의 세계"(49쪽)를 던져 주고 있다.

이는 미국의 휴머니즘, 박애주의에 대한 정면 반박이다. 휘트먼의 노래는 미국의 아름다움이며, 미국의 아름다움은 힘의 아름다움이지 현실에 대한 없는 이들에 대한 보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감성적으로 미(美)와 추(醜)의 벽을 허물었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바스는 "대부분 모든 사람들에게 괴물 같다고 느껴지는 대상"(52쪽)을 담았지만 왜곡은 없다. 즉 그네들은 있는 그대로 다가오며, 또한 정면으로 나를 보고 있다. 여기에는 사진기를 든 아바스가 내 앞에 있으며, 이는 이바스와 그네들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만일에 동정이나 폭로 등이 깔려 있다면 정면으로 다가온 사진을 담지 못하고, 한발 물러서기나 한발 내려다보는 사진이 나온다. 그렇다면 아바스가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지은이는 '친구'로서 '믿음'을 얻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즉 나는 많고 너는 적다 혹은 나는 바르고 너는 틀리다는 식의, 상하 수직적 위엄을 통해, 나는 강하고 너는 약하기에 불쌍하며 내 동정이 필요하다는 거짓 착함은 없다.  같은 눈높이를 맞춤으로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아버스의 사진에서 정면을 향한 자세를 취하게 하는 것이 그처럼 주의를 끄는 것은 그녀 앞에서 피사체가 왕왕 그렇게 붙임성있게 재취있게 사진기에 몸을 내맡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55쪽)

지은이는 비로소, 휘트먼의 아름다움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말한다.(이 부분에 대해서 타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는 강한 미국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휘트먼이 말한 아름다움을 아바스에 까지이어오는 것은 그렇게 보인다. 그는 휘트먼의 정신이 스타이켄에서 아바스에 까지 이어져 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지은이가 오늘 날에 같은 사진을 보고,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다가가지 않고 기계적인 힘을 빌려 먼곳에서 당겨 찍을 수 있는데... 이는 사진가의 몫으로 남겨 두자.

이처럼 아바스에 대한 예찬은 과연 객관적인가?

[사진으로 보는 암울한 미국]이라는 제목이 있지만 시대가 나오지 않으며, 아바스에 대한 예찬은 주저리주저리, 왜 미국의 모습이 암울한가에 대한 다양한 사진을 통해 숨겨진 이면을 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편집부에 붙인 제목이 아니라며 이는 분명 편향되거나 과장된 제목이다.

휘트먼의 순수 휴머니즘이 어떻게 미국의 문화를 포장하고-혹은 아버스에게 어떻게 전이 되어갔는가, 아버스가 던지 자화상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할 듯 하다.

[침울한 대상]에 나온 사진찍기에 관하여 짧은 얘기

"관광객들은 인디언의 프로이버시를 침해하고 성체(聖體)와 신성한 춤과 그런 현장을 촬영했으며, 필요하다면 인디언에게 돈을 지불하고 포즈를 취하게 하며 좀더 촬영에 적합한 재료를 제공받기 위하여 그들의 의식을 바꾸어 놓기까지 하였다."(87쪽)

동정과 호기심, 이는 나와 너라는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대상을 타자화하여, 사랑 밖으로 몰아내버린다. 즉 찍히는 사람은 마땅히 사진을 찍어도 되며, 사진을 찍고 나사도 그들은 영혼이나 가치관을 가진 존재가아닌 물건으로 전이된다. 또한 불쌍하며 감정을 불러 일으켜 일말의 동정심을 토하게 하기는 하지만 관광지에서 벌어지는 일은 큰 자지를 차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이는 그들의 행하는 폭력에 대해 '절대 무지'하다는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가 발 아래 지나가는 개미를 손으로 누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즉 어린아이의 동물적 행위가 돈과 기술로 무장하여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단 한 군데는 함부로 침범할 수가 없다. ( -어디일까요? ) 이런 문제점을 제기한 책이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이다. 하지만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의 피해의식에 젖은 점에서 외부적 시선이 아닌 내부적 시선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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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의 현실 - 미술문고 64
오규원 / 열화당 / 1981년 8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 만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도서관에서 『궁』이라는 만화를 본다면 어떻게 될까? 지은이는 이 부분에 대해 보수주의와 엄숙주의로 인한 외압(?)이 스며들어 있다고 한다.

한국만화의 현실은 1980년대에 단행본으로 나온 책이다. 이 책이 쓰여지게 된 동기는, 그 이전에 짬짬이 기고한 글의 모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한 세대 앞서 지은이는 한국 만화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1980년대- 박정희의 유신과 종말, 사이에 한국만화는 어떠했을까?

만화란 무엇인가? 애는 부모가 누군인가? 지은이는 만화를 "풍자"를 부모로 두고 있으며, 그 부모들은 "풍자화"라는 행위로 민중 삶에 속속들이 파고들어가 권력을 비판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바다건너에 있는 [오노에 도미에]라는 분의 큰 업적이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만화의 전신은 풍자화이다. 문예사전에 나와 있는 그대로, 풍자화.풍자시.풍자문학 등의 어휘 앞에 붙은 풍자란, '언제나 현실에 대한 부정적.비평적 태도에 근거를 두고' 성립한다.
그런 만큼 현실에 대한 강한 관심의 소산이다. 만화의 전신이 풍자화라는 사실은, 그러므르 만화가 현실에 강한 관심을 표명하는 예술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12쪽)"

이러한 풍자는 한국에서 쉬이 숨을 쉴 수가 없다. 한국은 보수주의와 엄숙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만화를 보거나 외도를 하지 않는 것이며, 무조건 대학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부모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화가 한국에서는 문화적인 사실로 인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김현이 한 말은 보수주의의 측면을 잘 지적(10쪽)"해 준다고 김현의 말을 빌려서 말해준다. 한국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은 아직 요원(遙遠)해 보인다. 또한 "선비입네 하고 큰 기침하고, 그러면서도 마른자리 진자리를 골라 앉길 좋아(10쪽)"하는 엄숙주의가 만화를 죽인다고 한다. 즉 지은이가 보기에는 국가 권력의 통제가 아닌, 우리 스스로의 규제로 인하여 만화를 스스로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지은이의 말처럼, 만화가 풍자화를 몸 속에 품고 있다면 이는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유신의 발 아래, 스스로 풍자화를 죽여버린 모습은 가히 웃지 못할 비극이 아닐까?

[시사만화와 도식성]에서 신문의 한 칸, 네 칸 짜리 그림을 보고 시사만화의 사회현실을 그려려낸다. 이 부분은 분명 날카로워 보이지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나그네처럼, 허둥대둥 하다 조그마한 물웅덩이리를 만나 감격에 차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신문만화'에 대한 감격은 쉽게 현실을 담지 못하는 점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만화=풍자화'라는 자칫 이분법적인 병렬 연결로 인해, 만화가 그려내는 다양한 모습을 품지 못하는 아쉬운 점도 있다. 즉 지은이는 너무나 보수주의와 엄숙주의에 대해 목을 높이다 보니, 만화가 지니는 다양성에 대해서는 한발 물러 서 있다. 이런 점은 현실에 그대로 들어난다.

신년 초에 텔레비젼을 통해 안방에 올라온 『궁』다소 엽기적이만치 황당한 설정과 인터넷 은어(”? 므흣..)을 그대로 들어낸다. 입헌군주제라는 설정아래 엽기 공주와 왕자병(?) 왕자가 펼치는 이야기라 하지만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는 보이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풍자 없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은이의 [풍자]에 대한 엄숙주의를 깨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좋게 보이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그것은 '재미'와 '돈'으로 야합한 만화를 보는 시선이다.

지은이의 엄숙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경계는 우리 내부의 적을 들어냈지만 국가의 헤게모니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것은 획일적인 기준점을 제시한 '표준평가법'이다. 올덕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지는 모습처럼 태어날 때 부터 우성과 열성을 가려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소설과 현실이 다른 점은, 소설은 직접 손으로 가려낸다면 현실은 스무해 동안 천천히 가려내어 철저히 합리화를 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공부'를 빼면 죽은 시체이다. 공부는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이며, 대학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영수증'을 전략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부=돈'이라는 헤게모니가 성립되고, 국가는 하나의 잣대를 만들었다. 즉 교과서 밖에 나오는 모든 현실은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과서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대학을 갈 수 없는 것이 되며, 돈을 벌 수 없는 것이 된다. 당연히 '만화'는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대학이 지니는 독단과 자율적 사고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지은이는 만화를 이야기 하면서, 이와같은 헤게모니를 잃지 않고 오직 풍자화를 통해 드러난 엄숙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똥침을 이야기 한다. 그는 박수동의 그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성(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우리 사회처럼 아직도 완고한 구석이 짙게 남아 있는 곳에서는, 성이란 더욱 은밀한 쾌감을 주는 한 요인이다. 뿐만 아니라 박수동이 다루는 성의 세계란 정운경의 「가불도사」에 나타나는 것철머 숨어서 은밀히 즐기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남녀가 모두 마땅히 요구하고 또 요구해야 하는 삶의 한 거강한 욕망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한 결과, 우리 사회가 감추고 있던 성의 세계를 노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고우영과는 다른 면에서 시사만화의 세계를 딛고 올라선 것이다.(36쪽)"

박수동의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는 성을 통해 우리의 참된(일상적인) 모습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금(線)은 너무 얇다. 동시대에 나온 『베르사유의 장미』가 보여주는 연출력과 박수동은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 안에서, 사회에 대한 금기를 조금 깨트렸다고 마냥 좋아하기에 너무 어린아이다. 그렇다. 아기가 갖 태어나 뒤집기를 한번 하니 모든게 용케 보이듯, 더 무엇을 바라지 않는다.

지은이가 본 시대를 지나, 한 세대가 훌쭉 넘어선 오늘날 만화는 어떠한가? 제자리 걸음이다. 한국에서 만화를 한다는 것은 빌어먹을 짓이고, 애니메이션을 한다는 것은 뭔가 되는 듯 하지만 만화와 애니메에션의 경계가 모호하며, 돈으로 포장된다. 즉 [쥬라기 공원]이 벌어간 돈, 다음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이 벌어간 돈에 눈멀어, 우리도 그와 같이 되리라고 환상에 젖어 있다. 여기는 일본과 미국에 밑그림을 그려준 저력이 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네들은 정말 모른다. 만화는 그림으로 되는 것이 아닌데...

『한국만화의 현실』은 보수주의와 엄숙주의에 길들여진 만화에 대해, 딴지를 걸기 시작한 박수동과 고우영, 신문만화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즉 풍자화를 통해 현실의 이야기를 한 점에 대한 높이를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너무 자료부족인지, 다른 면은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내 비친다. 30년 전의 한국 만화에 대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점은 색다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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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4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