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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의 현실 - 미술문고 64
오규원 / 열화당 / 1981년 8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 만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도서관에서 『궁』이라는 만화를 본다면 어떻게 될까? 지은이는 이 부분에 대해 보수주의와 엄숙주의로 인한 외압(?)이 스며들어 있다고 한다.
한국만화의 현실은 1980년대에 단행본으로 나온 책이다. 이 책이 쓰여지게 된 동기는, 그 이전에 짬짬이 기고한 글의 모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한 세대 앞서 지은이는 한국 만화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1980년대- 박정희의 유신과 종말, 사이에 한국만화는 어떠했을까?
만화란 무엇인가? 애는 부모가 누군인가? 지은이는 만화를 "풍자"를 부모로 두고 있으며, 그 부모들은 "풍자화"라는 행위로 민중 삶에 속속들이 파고들어가 권력을 비판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바다건너에 있는 [오노에 도미에]라는 분의 큰 업적이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만화의 전신은 풍자화이다. 문예사전에 나와 있는 그대로, 풍자화.풍자시.풍자문학 등의 어휘 앞에 붙은 풍자란, '언제나 현실에 대한 부정적.비평적 태도에 근거를 두고' 성립한다.
그런 만큼 현실에 대한 강한 관심의 소산이다. 만화의 전신이 풍자화라는 사실은, 그러므르 만화가 현실에 강한 관심을 표명하는 예술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12쪽)"
이러한 풍자는 한국에서 쉬이 숨을 쉴 수가 없다. 한국은 보수주의와 엄숙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만화를 보거나 외도를 하지 않는 것이며, 무조건 대학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부모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화가 한국에서는 문화적인 사실로 인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김현이 한 말은 보수주의의 측면을 잘 지적(10쪽)"해 준다고 김현의 말을 빌려서 말해준다. 한국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은 아직 요원(遙遠)해 보인다. 또한 "선비입네 하고 큰 기침하고, 그러면서도 마른자리 진자리를 골라 앉길 좋아(10쪽)"하는 엄숙주의가 만화를 죽인다고 한다. 즉 지은이가 보기에는 국가 권력의 통제가 아닌, 우리 스스로의 규제로 인하여 만화를 스스로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지은이의 말처럼, 만화가 풍자화를 몸 속에 품고 있다면 이는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유신의 발 아래, 스스로 풍자화를 죽여버린 모습은 가히 웃지 못할 비극이 아닐까?
[시사만화와 도식성]에서 신문의 한 칸, 네 칸 짜리 그림을 보고 시사만화의 사회현실을 그려려낸다. 이 부분은 분명 날카로워 보이지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나그네처럼, 허둥대둥 하다 조그마한 물웅덩이리를 만나 감격에 차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신문만화'에 대한 감격은 쉽게 현실을 담지 못하는 점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만화=풍자화'라는 자칫 이분법적인 병렬 연결로 인해, 만화가 그려내는 다양한 모습을 품지 못하는 아쉬운 점도 있다. 즉 지은이는 너무나 보수주의와 엄숙주의에 대해 목을 높이다 보니, 만화가 지니는 다양성에 대해서는 한발 물러 서 있다. 이런 점은 현실에 그대로 들어난다.
신년 초에 텔레비젼을 통해 안방에 올라온 『궁』다소 엽기적이만치 황당한 설정과 인터넷 은어(? 므흣..)을 그대로 들어낸다. 입헌군주제라는 설정아래 엽기 공주와 왕자병(?) 왕자가 펼치는 이야기라 하지만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는 보이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풍자 없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은이의 [풍자]에 대한 엄숙주의를 깨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좋게 보이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그것은 '재미'와 '돈'으로 야합한 만화를 보는 시선이다.
지은이의 엄숙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경계는 우리 내부의 적을 들어냈지만 국가의 헤게모니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것은 획일적인 기준점을 제시한 '표준평가법'이다. 올덕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지는 모습처럼 태어날 때 부터 우성과 열성을 가려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소설과 현실이 다른 점은, 소설은 직접 손으로 가려낸다면 현실은 스무해 동안 천천히 가려내어 철저히 합리화를 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공부'를 빼면 죽은 시체이다. 공부는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이며, 대학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영수증'을 전략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부=돈'이라는 헤게모니가 성립되고, 국가는 하나의 잣대를 만들었다. 즉 교과서 밖에 나오는 모든 현실은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과서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대학을 갈 수 없는 것이 되며, 돈을 벌 수 없는 것이 된다. 당연히 '만화'는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대학이 지니는 독단과 자율적 사고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지은이는 만화를 이야기 하면서, 이와같은 헤게모니를 잃지 않고 오직 풍자화를 통해 드러난 엄숙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똥침을 이야기 한다. 그는 박수동의 그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성(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우리 사회처럼 아직도 완고한 구석이 짙게 남아 있는 곳에서는, 성이란 더욱 은밀한 쾌감을 주는 한 요인이다. 뿐만 아니라 박수동이 다루는 성의 세계란 정운경의 「가불도사」에 나타나는 것철머 숨어서 은밀히 즐기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남녀가 모두 마땅히 요구하고 또 요구해야 하는 삶의 한 거강한 욕망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한 결과, 우리 사회가 감추고 있던 성의 세계를 노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고우영과는 다른 면에서 시사만화의 세계를 딛고 올라선 것이다.(36쪽)"
박수동의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는 성을 통해 우리의 참된(일상적인) 모습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금(線)은 너무 얇다. 동시대에 나온 『베르사유의 장미』가 보여주는 연출력과 박수동은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 안에서, 사회에 대한 금기를 조금 깨트렸다고 마냥 좋아하기에 너무 어린아이다. 그렇다. 아기가 갖 태어나 뒤집기를 한번 하니 모든게 용케 보이듯, 더 무엇을 바라지 않는다.
지은이가 본 시대를 지나, 한 세대가 훌쭉 넘어선 오늘날 만화는 어떠한가? 제자리 걸음이다. 한국에서 만화를 한다는 것은 빌어먹을 짓이고, 애니메이션을 한다는 것은 뭔가 되는 듯 하지만 만화와 애니메에션의 경계가 모호하며, 돈으로 포장된다. 즉 [쥬라기 공원]이 벌어간 돈, 다음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이 벌어간 돈에 눈멀어, 우리도 그와 같이 되리라고 환상에 젖어 있다. 여기는 일본과 미국에 밑그림을 그려준 저력이 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네들은 정말 모른다. 만화는 그림으로 되는 것이 아닌데...
『한국만화의 현실』은 보수주의와 엄숙주의에 길들여진 만화에 대해, 딴지를 걸기 시작한 박수동과 고우영, 신문만화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즉 풍자화를 통해 현실의 이야기를 한 점에 대한 높이를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너무 자료부족인지, 다른 면은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내 비친다. 30년 전의 한국 만화에 대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점은 색다르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