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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몽타주
박찬욱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글은 직설적이다. 혹은 여유가 없다. 하지만 색깥은 짙다
수필인데 어때?
하지만 거친 숨소리가 옛까지 들리는 듯하다.
1. 짧은 글
보네거트 유머가, 전지적 작가가 자기 인물에게 던지는 냉소적인 코멘"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건 일종의 '테도'라서 쉽사리 영화로 번역되지 않는 법이다.(27쪽)"
냉소적인 시선은 지은이의 글과 동일선상에 있지 않을까? [소리(들)]에 보인 가훈이나 [전쟁]에서 보여지는 분위기 등...(이는 뒷부분으로도 이어진다.)
물이 흐르듯이 이야기를 꺼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가지로 흐르는 물을 한움큼 담아 놓은 듯. 그래서 난 밑도끝도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담아 놓은 얘기지만 헤아릴 수 없으니 생각도 여러조각 나눠지고 흐름도 그릴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바가지에 담긴 물의 맛을 쫓는 것 뿐.
"내가 이 형제(-류승범 형제)를 존경하기 까지하는 이유는 뭐냐"라고 말문을 열고서는 이렇게 들려준다.
"유쾌하면서도 동시에 진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21세기를 살면서 그러기는 정말 어렵다는걸 여러분도 다 아시리라 믿는다(58쪽)"
그런가?
분명한 것은 ' 여러분'에 나는 금(線) 밖에 서 있다. 내 가치관은 어떤 색안경을 끼는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보인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지은이의 안경은 '냉소적인 안경'이리라. 류가 형제는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안경', 나는 어떤 안경을 끼고 있냐하면 '일곱빛깔 행복안경'이다. 세상을 담는 눈은 저마다 다를 지인데, 어떻게 그의 눈높이로 통일을 시키려하는 걸까?
치장의 역사, 둘
또한 그의 글쓰기는 화려한 지식의 나열이다.
그 만큼 영화를 사랑하지 않는 나는 김기영, 이두용을 이 자리에서 처음 뵙고, 임권택의 <우상의 눈물>보다 <창>을 기억한다. 그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는 무논에 개구리밥처럼 둥둥 떠 있을 뿐이다.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볼까하여 연습장을 꺼내어, 그가 불러주는 이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려고 적고 있다. 문득 학창시절의 '나'가 겹쳐진다.
2. 참 말이 많다.
자기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 스스르를 들어내는게 '상' 밖에 없는 듯 한 사람. 그는 스스로 "영화제라는 데 가면 특기 다 '거장'아니면 '놀라운 유망주'에 의해 연출되었고....(71쪽)"라며 비아냥 거리며, 색체없는 영화제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를 지탱하는 것은, 그가 말한 '영화제 상'이니 참 아이러니컬하다. 문득 지은이가 누굴까 궁금하여, 앞쪽 책날개를 펼쳐보면 그는 상 뒤에 숨어 있음을 볼 뿐이다.
다른 공간에서 그의 인터뷰를 만났다면 기대감이나 호기심으로 인해 볼펜 들고 밑줄 긋어 가며 읽었을 터이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공간의 부족함을 예전의 글로 메꾸어 새로움을 연출하려 하는 것인지?
사랑은 그냥 나이를 먹는게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눈이 두터워 짐을 나타낸다. 두터워진 눈은 쉽게 '가타부타'하지 않으며 내면적 성창을 두껍게 '퉤'하고 던져낸다. 근데 나이는 드셨는데, 글은 예전글이니... 나는 오늘의 그를 보고 싶지, 추억속의 인물이 그리운 건 아니다. 혹시 그때의 글이 지금에서도 유효하다는 건가? 유통기한이 아직 남았다는 말인가? 음...
그의 글쓰기는 밑도끝도 없는 단락적인 글쓰기에서, 영화를 통한 초상 만들기, 마지막으로 영화를 통해 자화상 세우기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3. 지식의 나열
앞에서 밑도끝도 없는, 너무짧게 끝났다고 얘기했는데, 마지막에 들려주는 '영화이야기'는 또한번 밑도끝도 없이 늘어 놓는다. 거미줄처럼 엮인 그의 지식은 어디로 날아들지 모르며, 영화에 대한 애착이 없는 나는 낯선 이름만 줄줄이 읽어내려가고 있다. 이름을 끝까지 읽어야 되는지 깊은 회의가 든다. 그의 지식은 화려한데, 부연 설명은 누추하다. 즉 '너 이때 동안 답답했지 네 지식을 한번 날려봐'했더니, 거침없이 쏟아내는 격이다. 여기에는 '개성'이라는 이름하의 '지식'만 있지 타자에 대한 입장이나 이해는 없다.
덜하고 더함에 대한 균형감각이 덜한 지은이는, 앞서의 부족함을 마지막에 채워넣어 책의 균형감각을 세우려는건가? 머리가 아프다.
박찬욱의 나열된 모습을 통해, 그의 초상을 그려보면, 냉소적인 시선으로 조금은 거친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그의 영상미학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문체와 성찰을 논하는 자리이다. 나는 그의 영상미학이 어떠하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글이 너무 거칠다는 것은 단연코 말할 수 있다. 조금은 거슬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임 : 글이라는 것은 '삼다(三多)'라 했던가? 나는 그를 '영화인'으로 '행동하는 박찬욱'으로 볼 것이지 '글쟁이 박찬욱'으로 이렇게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글로써 생각을 들려주려면, 영화에 대한 사랑만큼 글에 대한 사랑도 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06, 02,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