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 사진시대총서 2
수잔 손탁 지음, 유경선 옮김 / 해뜸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지은이를 세 번째 만나지만, 나는 아직도 벅차다. 그의 글쓰기는 나에게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진다. 『사진 이야기』가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고 하지만 그의 글은 내 부족한 머리에 들기에 너무나 고고하다. 왜 이렇게 어렵게 해야하는지... 정말 물어보고 싶다. 혹시 신비주의자가 아닌가... 아버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절대 아닌데... 음...

나는 다시 세번째의 책을 들었지만 솔직히 다 읽지는 못했다. 그 가운데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는, [사진으로 보는 암울한 미국]이라는 부분에 대해 몇 자 적어 본다.


미국에 순수 시인 '휘트먼("순수한 휴머니즘", 45쪽)'이라는 이가 나온다. 그는 아름다움과 거짓을 애써 구분하려 하지 않고, 모두가 아름답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움은 사진가들을 사진을 통해 재탄생을 하게 된다.  사진이 담는 영상이 "이상화(理想化) 된 영상"(42쪽)을 담기 때문이다. 이런 사진은 스타이 켄->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워커 에반스의 계보를 잇는다. 이렇게 사진은 감정이입, 부조화 속의 조화, 다양성 속의 단일성, 범세계적인 동화를 드러낸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1955년 열었던 사진 전시회 <인간 가족(The Family of Man)>속"에 실린다. "68개국에서 273명의 사진가들이 찍은 503점의 사진은 모두 한 가지 주제로서, 인류는 '하나'이며 인간은 결점도 있고, 비열하기도 하지만 역시 좋은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47쪽) 있기 때문이다.

보여지는 아름다움 보다, 더 아름답게 포장되어 지는 사진-"사진은 일종의 과장이요 물질세계의 영웅적인 결합이다."(46쪽)- 미국 정신의 구현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그네들의 찍은 사진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에 대한 포장일 뿐이다. 즉 사진을 찍기 앞서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나뉘어져 있으며, 아름다움은 더 아름답게 더러움은 애써 사진 밖으로 밀어냈다. 휘트먼의 "순수한 휴머니즘"을 계승하고 있지만 반쪽 자리였을 뿐이다. 그리고 아버스가 나온다. 그는 스타이켄의 사진 전시회 17년 뒤에 "'기형인간이나 혼열인간' 112장의 사진"을 모아 회고전을 연다.

"이들은 대부분 추악해 보이고 게다가 기괴하거나 경박해 보이는 옷을 입고 음산하거나 웽뎅그렁한 환경 속에 멍하니 멈춰 서 있는 포즈를 취하여 순진하고 격의없는 눈초리로 관람자들을 쳐다보는 것이 많다. 아버스의 작품은 보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촬영한 부랑자(pariah)나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드로가 동화하라고는 요구하지 않는다. 인류는 '하나'가 아니라는 이면의 세계"(49쪽)를 던져 주고 있다.

이는 미국의 휴머니즘, 박애주의에 대한 정면 반박이다. 휘트먼의 노래는 미국의 아름다움이며, 미국의 아름다움은 힘의 아름다움이지 현실에 대한 없는 이들에 대한 보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감성적으로 미(美)와 추(醜)의 벽을 허물었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바스는 "대부분 모든 사람들에게 괴물 같다고 느껴지는 대상"(52쪽)을 담았지만 왜곡은 없다. 즉 그네들은 있는 그대로 다가오며, 또한 정면으로 나를 보고 있다. 여기에는 사진기를 든 아바스가 내 앞에 있으며, 이는 이바스와 그네들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만일에 동정이나 폭로 등이 깔려 있다면 정면으로 다가온 사진을 담지 못하고, 한발 물러서기나 한발 내려다보는 사진이 나온다. 그렇다면 아바스가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지은이는 '친구'로서 '믿음'을 얻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즉 나는 많고 너는 적다 혹은 나는 바르고 너는 틀리다는 식의, 상하 수직적 위엄을 통해, 나는 강하고 너는 약하기에 불쌍하며 내 동정이 필요하다는 거짓 착함은 없다.  같은 눈높이를 맞춤으로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아버스의 사진에서 정면을 향한 자세를 취하게 하는 것이 그처럼 주의를 끄는 것은 그녀 앞에서 피사체가 왕왕 그렇게 붙임성있게 재취있게 사진기에 몸을 내맡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55쪽)

지은이는 비로소, 휘트먼의 아름다움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말한다.(이 부분에 대해서 타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는 강한 미국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휘트먼이 말한 아름다움을 아바스에 까지이어오는 것은 그렇게 보인다. 그는 휘트먼의 정신이 스타이켄에서 아바스에 까지 이어져 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지은이가 오늘 날에 같은 사진을 보고,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다가가지 않고 기계적인 힘을 빌려 먼곳에서 당겨 찍을 수 있는데... 이는 사진가의 몫으로 남겨 두자.

이처럼 아바스에 대한 예찬은 과연 객관적인가?

[사진으로 보는 암울한 미국]이라는 제목이 있지만 시대가 나오지 않으며, 아바스에 대한 예찬은 주저리주저리, 왜 미국의 모습이 암울한가에 대한 다양한 사진을 통해 숨겨진 이면을 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편집부에 붙인 제목이 아니라며 이는 분명 편향되거나 과장된 제목이다.

휘트먼의 순수 휴머니즘이 어떻게 미국의 문화를 포장하고-혹은 아버스에게 어떻게 전이 되어갔는가, 아버스가 던지 자화상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할 듯 하다.

[침울한 대상]에 나온 사진찍기에 관하여 짧은 얘기

"관광객들은 인디언의 프로이버시를 침해하고 성체(聖體)와 신성한 춤과 그런 현장을 촬영했으며, 필요하다면 인디언에게 돈을 지불하고 포즈를 취하게 하며 좀더 촬영에 적합한 재료를 제공받기 위하여 그들의 의식을 바꾸어 놓기까지 하였다."(87쪽)

동정과 호기심, 이는 나와 너라는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대상을 타자화하여, 사랑 밖으로 몰아내버린다. 즉 찍히는 사람은 마땅히 사진을 찍어도 되며, 사진을 찍고 나사도 그들은 영혼이나 가치관을 가진 존재가아닌 물건으로 전이된다. 또한 불쌍하며 감정을 불러 일으켜 일말의 동정심을 토하게 하기는 하지만 관광지에서 벌어지는 일은 큰 자지를 차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이는 그들의 행하는 폭력에 대해 '절대 무지'하다는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가 발 아래 지나가는 개미를 손으로 누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즉 어린아이의 동물적 행위가 돈과 기술로 무장하여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단 한 군데는 함부로 침범할 수가 없다. ( -어디일까요? ) 이런 문제점을 제기한 책이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이다. 하지만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의 피해의식에 젖은 점에서 외부적 시선이 아닌 내부적 시선이 그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