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 한.중.일 문화코드읽기, 비교문화상징사전
이어령 책임편찬 / 종이나라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책 어떻게 읽을까?

[메모]
정수일의 시야와 이어령의 시야는 어떻게 나뉘는가?
정수일, 이슬람, 국제적
이어령, 한중일, 유교적

두번째, 세계 속의 한국 문화를 볼 때에 무엇이 기준이 되는가?
그것이 한국의 대표성인가 상징성인가?

세번째, 민중의 삶과 관계는 어떠한가?
네번째,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엮은이의 세계관, 갇힌 세계관

어쩌다 시골길을 지나다가 바위틈이나 벼랑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를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대단히 감상적이고 시적 언어를 쓰고 있다!!!!!!!!
[-솔직히 날씨부터 문화, 역사 이야기 등으로 들머리를 쓰기에는 내 필력이 모자라 거두절미하고]

어쩌다 시골길을 걷는 도시인이 바위틈이나 벼랑 위의 소나무에 대한 예찬은 거짓이다. 그는 책에서 보아온 소나무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이는 어쩌면 꽃과 여자, 사진만 있는 공간에 최민식의 사진을 보았을 때의 감정과 같다. 하지만 최민식의 사진은 본다고 하여, 사진 속 주인공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 듯, 어쩌다 시골 길을 걷다가 보는 소나무를 보고 그에 대한 이해를 한다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또한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우리 동네 소나무는 분명 산에, 숲으로 우거져 있다. 암만 시골길을 걸어도 보리하고 벼 밖에 볼 수가 없지, 소나무를 본다. 그럴듯 하게 '산길'이라 했으면 그렇거니 하며 넘어갔을 텐데.... 산에 있는 소나무를 '그냥' 보라. 내 틀에 다시 끼어서 조각내지 말고.

너무 극적 드라마를 연출하여 깊은 울림을 불러내는 것은 억지이며, 자연스럽지 못하고, 거짓말이 될 뿐이다. '눈비맞고, 밤하늘 별을 헤어려가며 한번도 눕지 않는 소나무를, 구들장에 누워 곰곰히 생각해 보니'라는 것이 더 진실되지 않을까?

지은이는 예술가의 삶 속에 그려진 그림을 불러내어 들려준다. 여기에는 스스로 그리지 않고 스스로 그렸다고 버젓이 우김과 다 이해한다는 오만함, 내 말이 옳다라는 자만심이 가득하다.

"소나무는 기암절벽의 높은 곳에 서 있어야 소나무답다(9쪽)"

다시 불려온 연출!

소나무는 그냥 소나무이지 어디에 얽매혀 있어서 소나무가 아니다. 그건 네가 바라보는 소나무일 뿐이다. 이는 자연을 내 눈에 끼어넣어 '별사탕'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엮은이(-지은이, 이어령)세계관은 자연을 自然 그대로 봄이 아니라, 그의 가치관이나 지향해야할 내재적 세계관과 동일선상에 놓인 그림이나 글만이 옳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책의 흐름은 지은이의 눈에 의해 재조합 될 가능성이 밤 보다 어둡다.

몇 몇 글쟁이(은둔, 처사)이나 특정 집단(선비라고도 불림)의 글을 통해 "소나무를 가까이 한 이들의 공통정은 한결같이 초월적이고 은둔적인 삶을 지향했고, 그런 삶 속에서의 소나무는 하나의 인격체로 반영(54쪽)"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편집인은 소나무를 가까이 한 이들을 나라인(人) 전체로 포장하여 내어놓는다. 즉 배부르고 등 따시거나 밥 벅고 사는게 별개인 사람들의 예술 작품을 우리 조선들의 숨결이라고 말한다. 밥 먹고 살기에 너무 바쁜 이들은 글을 알지 못하거나 시를 읊을 시간이 없었으니 전하는 것이 없으니, 이야기 되지 않고 묻힌다. 즉 눈에 보이는 특정 예술 작품을 한국의 숨결이다라고 고상한척 한다.

이런 글쓰기는 바위틈에 세워진, 등허리가 구부런지 소나무어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곱게 자란 소나무는 우리 조선들의 숨결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번씩 갈라진 소나무, 한번씩 걸러낸 작품, 이렇게 선별된 나무와 작품은 영웅으로 우상화된다.

여러 글쟁이들이 저 마다 소나무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만 앞서서 말한, 특정인의 예술 작품에 한 하기 때문에 민중과 쉽게 동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또한 소나무에 대한 예찬은 책상다리를 하고서 글을 쓴 듯 하여 거짓으로 치장된 것이 보인다.

내 경험에 한하여, 소나무는 항상 푸르다. 봄이나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 푸르다. 그 푸르름은 어떻게 지탱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묻곤 했다. 멀리서 소나무를 본다면, 한 평생을 보아도 해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직접 소나무에 다가가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때 소나무의 푸르름을 진실로 알 수가 있다. 나는 길을 가다가 문득 바라다 보이는 소나무에 대한 예찬 보다 민둥산을 숨기고 숲을 만들어 온갖 동물을 불러 모우는 소나무가 좋으며, 고고한 선비의 시 보다 우리 어머니가 고이 걸었을 풍입송(風入松)을 새겨본다.

소나무의 쇄락과 퇴출은 바로 한국의 전통문화의 부피를 상징하는 척도(24쪽)"

이런 단순 논리는 상징성으로 대체되어 합리화 된다. 하지만 그의 이론적 근거는 특정 집단의 의식이며 실생화에서 불려나오지 못하니 아쉽기만 하다. 아울러 이 책은 같은 의미의 반복이 아닐까 할 정도로 다른 이들의 글이지만 공통된 함의적 의미를 곳곳에 보인다. 분명 다른 사람의 글인데, 왜 같은 결론이 나올까라는 점은 답이 정해져서일까?

한.중.일의 세 나라에 대한 문화적 고찰이라고 하지만 내용이 너무 부실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책값과 대비되어 내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울러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을 치장하여 두껍게 내어놓은 듯 하다는 생각은 책을 읽고도 마음이 씁쓸하다.

(추신: 한.중.일 문화 코드이지만 내가 읽은 부분은 한국에 집중되었음을 밝힘)

메모에 대한 답변.

책을 읽기에 앞서 잠시 가졌던 메모는, 그냥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나 역시, 엮은이 처럼 '별사탕 소나무'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에 허둥지둥 찢어 버렸다. 그냥 읽혀지는 대로 잠시 보았다. 깊이 생각할 수록, 책값에 대한 미련이 내 머리를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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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2-1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에는 매화에 대해서 한중일 비교한 책이 나왔던데 흘끔 보니 괜찮았습니다만. 이 책은 기대보다 별로인가 보죠. 별이 하나 라고 하니 쩝.

betterworld 2006-02-1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디도 그렇고 다른 리뷰도 그렇고 세상을 좀 비딱하게 보시는 듯

열린사회의적 2006-02-15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뭐라 적을까요. 세상을 비딱하게 본다. 하하... 낯설게 본다라고 하였으면 더 기분이 좋았을텐데... 세상이 비딱한건지 내가 비딱한건지 내세우지는 않겠습니다. 열린사회 의적인가 열린사회의 적인가? 주위의 평은 상관 없습니다. 내 기준은 명확하며, 일천년 전, 천구백년대에 정동주 선생님을 만나고 얻은 화두,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는 신이 되거라"가 내 삶의 절대 주제임만 밝힙니다. 그리고 사마천님께서 꼼꼼히 봐 주셔셔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음, 사마천님의 시선과 제 시선이 다른 것은... 저는 제가 하는 한에서, 민중의 입장에서, 현실감각과 함께 보려고 합니다. 책은 삶의 담는 그릇이자 도구이며, 절대 진리가 아닙니다. 책을 우상화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티비말하다는 다시보기하는데, 사회자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분을 잃고 있군요. 소나무를 과연 저렇게 포장하여, 한국의 소나무로 가두어야 하는가 하는데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입니다. 소나무는 그냥 소나무일뿐입니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이어령씨의 글은 자칫 이헌령비헌령에 빠질 수가 있음을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백면서생이지 농부나 어부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벼를 이야기 하고, 물고기를 이야기 한다는게 제 짧은 아집니다. 음, 짧게 글을 적으려고 했는데... 사마천님에게 고마움을 표해야겠고, 티비 말하다의 사회자가 이어령님을 우르러 보며 이상화하기에 한마디 더 붙이고, betterword님의 '비딱하게'하게 라는 말에 변을 달다 보니 말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두서 없는 글, 마무리는 따로 짓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제 글이 분명, 낯설다는 것을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