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랜드 여행기 - Izaka의 쿠바 자전거 일주
이창수 지음 / 시공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덮을까, 덮을까 고민을 하다, 뒤에 뭐가 있겠지라며 끝내 다 읽었다. 여행, 그는 내가 동경하는 쿠바를 홀로 간다. 환경 수도 하바나, 혁명 영웅 게바라, 실존적 영웅 카스트로, 지구상에 몇 남지 않은 공산주의 국가이면서 미국과 대적하는 나라. 이렇듯 내 머리 속에 갇힌 쿠바의 이미지는 자본주의가 지니지 못한 다른 편의 모습이다. 즉 자본주의를 대신할 만한 대안적 국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멋진 곳에, 그는 자전 것을 길동무 삼아 떠난다.

"우와~~ 이 얼마나 멋진가!"

떠날 수 있다는 것과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다른 떠날 수 있음을 그곳에 가기 위한 마음이며… 이는 백만 번 떠났다 돌아올 수 있는 허상이라면,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의미는 백만 번의 틀에서 벗어나 몸으로 다가갔음을 말한다. 몸과 마음은 아주 가까운 듯 하지만 발걸음이 움직인 만큼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내 발걸음이 힘들수록 내 몸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이 느끼고, 웃거나 눈물짓게 한다. 나는 백만번 떠났다 돌아오기를 시지푸스처럼 반복하는데, 그는 이카루스처럼 날아올랐다.

"오, 놀라워라~~ 오, 부러워라~~"

과연 그렇다면, 그 여행길은 무슨 모험이 있는가? 어떤 풍경에 안겼나? 쿠바 여자라도 만나 뽀뽀라도 했나? 카스트로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나바의 수도는 어떤 모습일까? 대안 도시로서의 벤치마킹은 가능한가?

그는 거대 사장님과 거대 방송국의 양 후원을 날개인 냥 두르고, 쿠바로 떠난다. 물론 자전거로써 쿠바라는 나라라는 나라위에 있겠다는 설정은 잡혀져 있지만, 다른 문제는 일단 한국에서 다 해결된 체이다. 즉 경비 문제는 사장님으로, 언론의 인지는 방송국을 통해… 그는 짧은 기간 동안 먼 거리를 가야 한다는 목표 의식 때문에-왜 그가 그렇게 갔는지 여기에 옮기지는 않는다.-쉽게 일정을 엇나가게 할 수 없다. 계속 달려야 한다. 가닥 미친 듯이 노래 부르거나 제자리를 돌거나 혹은 그 풍경이 마비돼 하루 종일 선 체로 돌이 되는 변수는 여행 일정에서 빼버려야 한다.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체 반도 못 가서 다시 돌아와 비행기를 타야 하는 비운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뒤에 붙은 모 방송국의 PD는 시청자들이 '좋아할 그림'을 그려라라고 조른다. 즉 시청자가 기대하는 옷을 입고 나와서 춤을 추어야 한다. 나도 은근히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나올 것인지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와 PD의 여행길은 잘 짜여진 풍경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의 사유는 자전거 바퀴에 실렸고, PD의 그림은 창밖의 풍경뿐이다.

지은이는 쿠바에 내려, 관광화된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자칫 실패한 이상낙원에 대한 안쓰러움 보다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귀환할 것이라는 필연성을, 체제 우월성에 의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부분이 간혹 보인다.) 나는 내가 생각해온 나라가 아닌, 전혀 엉뚱하지만 낯익게 다가오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반 백 년 전 열기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내 실망감을 쉽게 잊기 위함인지, 지은이는 어느새, 저 앞에서 자전거를 굴리고 있다. 나는 PD와 하나되어 그의 그림만 담는다. 전혀 낯선 쿠바의 모습에 당황했다면, 넘길수록 다가오는 동의반복적인 일상의 낯선 도시를 빼버리면, 초등학생의 밥 먹고 학교 가서, 떠들다 화장실 청소한 하루 일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냥 자전거를 타고 달릴 뿐이다. PD의 요구가 거세질수록 지은이는 진솔한 연기자가 된다. 그리고 연기가 끝날 때 쯤에, 그는 연기자에서 자유인으로 돌아온다.

"나는 구도자의 자세를 흉내내고, 체 게바라를 따라하는 객기 청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확고한 가치관도 없이, 영웅을 흉내낼 뿐, 그의 발뒷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런 한명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 없는 이기적인 동물이다. 내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76쪽)

"지금까지의 나의 여행은 무효다. 나는 정해진 지점에 도착하기 위한 여행, 중간 과정을 무시한 채 오직 목표만을 향해 움직였다." (178쪽)

"나는 도착할 지점을 잃었다. 그 대신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 (178쪽)


그는 길을 잃고, 길을 찾았다. PD속에 연기자를 담아 보내고, 실존적 자아가 존재한다. 이제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으로 달려간다.

그는 한나라를 전혀 다르게 보게 된다. 즉 지금까지 보아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쿠바가 그의 곁에 숨을 쉬고 있다. 이야기를 들려준다. 쿠바는 하나의 모습이 아닌 다양한 모습을 그의 품에 안긴다.

나는 '이제서야 지은이가 제대로 본다'하면서, 그러나 내 안의 틀에서, 나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쿠바'만을 생각한다. 쿠바의 자국책으로 선택한 '관광산업'을 이해하기 앞서, 자본주의에 구속 되었다고 비판만하고 있다.

책을 덮을 때쯤, 우리(지은이와 나)는 완전히 쿠바라는 나라를 여행하지는 않았다. 아니 여행 할 수도 없는 것을 안다. 하지만 쿠바를 좀 더 자유롭게 느낄 수 있었으며, 있는 그대로 다가가려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천리 길의 발걸음 이제 막 첫발을 땐 기분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지은이의 솔직함이라 할 수가 있다. 지은이는 숨김없이-내가 읽기에는-스스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쿠바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하고 다가갔는가의 문제이다. 여자친구를 소개 받기 위해서도, 이것저것 친구한테 물어보고 선물을 하곤 하는데… '그 먼 나라를 가면서 너무 쉽게 가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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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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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내가 읽은 십 인(人)의 그림, 그리고 현실에 대한 인식.

박재동,
그의 그림은 이분법 논리로서, 극단적 묘사를 추구한다. 원인 규명은 어디에도 없고 현실에 대한 단면 묘사. 현실의 어떤 모습을 그려내는가도 작가적 깊이를 드러낼 것이다. 지은이가 인식하는 차별의 깊이와 넓이, 즉 문제성은 어디어디에 있는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손문상,
조세평등(27쪽)으로 나아가는 재치는 웃음 속에 가시가 있지만, 모든 여성의 차별, 어머니의 그림(31쪽)에는 뭉개트렸다. 즉 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난, 무지, 국졸, 호남을 읽을 수가 없다. 치열함이 없다. 그냥 상징적 어머니로 그림을 그릴 것 뿐. 그림을 놔두고 국졸, 가난, 무지, 호남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는가? 나는 그러하지 못하다.

홍승우,
차별을 위한 차별적 그림, 부부애의 갈등만 그려냈지, 서로의 합일점을 찾지 않고 있다. 즉 여자는 무조건 차별받고 있고, 남자는 무조건 혜택만 누린다는 단순논리.

조남준,
아이들의 차별의식에 대한 안타까움 대신에 가벼운 현실 비판만 존재한다. 그러니 대안이라고 내세우는 게, '개한테 배워라'는 경비원 아저씨의 말, 저 아이가 커서 어떤 감정에, 어떤 차별에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그림밖에 있다.

이우일,
코미디가 지나치다. 희극이라는 것은 적당한 긴장감 속에 웃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의 만화는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만 깔려있다.

홍윤표,
그림이 부끄럽다.

유승하,
그의 그림은 낯설고, 선이 많이 가 있지만 정겹다. 『헬로우 블랙잭』처럼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잔잔한 이야기는 내 가슴에 오래도록 머물 듯 하다.

장경섭,
반전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왜 아버지였는가, 그의 이해력이 부족하지 않은가에 대한 점을 묻지 않기로 한다. 모든 문제는 아버지(=남자)한테 있고, 그가 왼쪽으로 고래를 돌리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로 그림을 마무리 한다.

최호철,
아홉시 뉴스를 봤다. 사장인 돈독이 올라, 외국인 근로자를 부려먹고 월급은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 어떤 이는 불치병에 걸려 두 다리를 평생 못 쓰게 되었다는 말도 들려오더라.

왜 공장에 가지 않느냐? 하루 종일 기름 묻히며, 월급 백만 원이 모자라는 돈으로 일하려 하지 않는가? 펜대 굴리는 것이 육체적 노동만큼 힘들다고? 티비 뉴스가 나오면, 사장만 욕한다.

물질만능주의의 톱니바퀴에 돌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사장과 외국인 근로자라는 이분법으로 치환된다. 그리하여 나와 우리는 면죄부를 받을 수가 있다. 열심히 공부하여 펜대를 굴려라, 욕은 사장에게 주고, 힘든 일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주고, 내가 하는 일은 티비를 보며 사장을 안주삼아 씹으면 된다. 그러면 내 죄는 모두 사하여 지고, 천국의 문이 가까우리라.

이희재,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 그의 글이 조금은 유치해도, 함께 나아간다는 말에 나는 가슴을 적신다. 이분법 시선으로 '너는 그러하다'는 어설픈 비판보다, 함께 나아갈 길 찾는 게 더 옳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가 살아있음에 대한 숭고미라면, 이희재의 그림은 함께 사는 나누미(美)이다. 조잡한 그림으로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보다 일상의 잔잔함을 희망차게 그려내는 이 그림이 나는 왠지 좋다.

2.
차별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며, 타산지석을 삼자는 의미인가? 아이한테 공부해라 공부해라하는 부모의 모습이 자꾸만 그려진다. 그런다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차별 없는 모습을 그려, 아름다운을 동화시킴이 어떨는지? 즉 엄마 아빠가 책을 보면 아이들이 따라하 듯……. 나는 만화책을 보다, 우리나라에는 차별만 존재하는 나라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다른 문제, 우리나라의 몇 몇 만화가들은 날로 먹으려고 한다. 옆 동네 사람들은 그림 하나하나에 세심한 관심을 보이는데, 우리나라 만화가들은 배경 빼고, 인물 감정 빼고, 눈하고 금(線)만 그린다. 아무리 봐도 연출력의 부족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내용의 단순함, 그림의 단순함, 양 단순함이 날개가 되어 책의 앞뒤에 붙어있다. 차별이 벌어지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그리고 그들이 인식하는 차별의 넓이와 깊이는 신문만평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발이 불어터지도록 걷고, 보고, 아파하고, 느끼면서 그린 그림이라는 생각이 저 멀리에 있다는 느낌이다.

3.
왜 남자는 가해자, 여자는 피해자인가? 이 만화의 공통점은 남자는 못 땐 놈, 여자는 착한이라는 이분법 시선이다. 만화를 그린 이들도 남자인데……. 남자는 폭력이고 여자는 선(善)의 대명사인가? 너무 얇거나 좁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아마 그들은 농촌에서, 가진 것 없는 부모님 밑에서, 지방대를 나왔다고 일자리 구하는 힘겨움을, 소도시에 사는 문화적 혜택과 시골에서 공부를 하는 어린아이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경험을 하지 않았거나 고민이 부족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책을 덮을 때 쯤 밀려온다.

차별에 대한 그림, 많은 만화가들이 한 가지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너무 단순하고, 이야기의 구성이 너무 단순하고, 생각의 폭이 너무 단순하고……. 이렇게 단순하게 줄 세우는 나도 단순하고……. 그러니깐 다양한 모습을 담아주지. 에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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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3-13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미있게 본 만화인데 꽤 세밀하게 평하셨군요.
 
용을 찾아서
박정석 지음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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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은이가 코모도를 가기 위해, 다시 들른 발리까지.

그는 문명의 편리함과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담아 보지만, 혜안(慧眼)은 없다. 사진을 찍 듯, 그곳의 풍경을 스케치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없다. 자아도 없다. 객관적 관찰자만이 저 만치 서 있다.

과연 객관적 관찰자가 사람과 어울리며 자연을 담으며, 혜안을 가질지는 미지수이지만, 내 고개는 쉽게 들리지 않고 옆으로 갸우뚱 한다.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없기에 계속 읽어갈 것이지만, 기우(奇遇)가 봄비 속에 돋아난다.

다음 읽을 쪽,
[띠르따강가에서]

문제,
1. 사진 찍 듯 담은 풍경이 인간 삶의 묘사이며, 삶의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적 표현인가?
2. 그렇다면 나는, 속을 못 보고 겉만 보는 바보. 글 읽기만 하고 있다.
3. 단순한 사진 찍기 글쓰기라면, 그의 글은 사색 없는 떠남일 것이며, 사진 대신 텍스트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4. 즉 그의 글이 담고 있는 상징성의 문제? 과연 있는가와 있다면 나는 제대로 읽어내고 있는가라는 점…


"발리 곡창 지대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중부와 동부의 농촌 지역이다. 파릇파릇 올라오는 푸른 모로 뒤덮인 논들은 지층의 결을 따라 세심하게 조각된 것처럼 발리의 산과 평야를 지나며 층층이 계단을 형성해 높아지거나 낮아진다. 색이 조금씩 다른 푸름 조각보를 정교하게 기워서 만든 것처럼 반듯반듯 네모지던 논들은 산기슭을 만나면서 위로, 위로, 조금씩 높이를 달리하며 조형미 넘치는 층계를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발리의 농촌을 찍은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계단식 논(rice paddy)의 모습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계단식 논이라면 필리핀 중부 산간지대의 비경 바나우에를 꼽겠지만 발리는 풍경 또한 그림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논이라면 사실 별것도 아닌데, 그래도 참 아름답단 말이야."
나는 발리를 방문한 적이 없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고 있으면 말할 수 없이 평온한 느낌이 들거든."
(44쪽)

논의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고 서정적(?)' 이 의미는? 우리나라 남해 가랑이 논은?

"주린 배를 부르게 해 줄 풍요로운 벼 이삭의 모체가 될 것이라는 흐뭇한 상상(44쪽)"

객관적 시선이 존재하고, 벼를 무논에 심고, 땡볕에서 피를 뽑고, 가을걷이하는 농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시골에서 못자리가 농사의 반이라 한다. 그 만큼 힘겹다는 이야기인데, 지은이는 아마도 무논에서 벼를 심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체험을 통해 몸에 벤 경험은 다른 곳에 갔을 때에, 다시 안개처럼 피어올라 낯선 곳에서 같은 경험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하게 한다. 무논에서 벼를 심어보지 않은 지은이는 그냥, ‘마냥 서정적이다’라고 표현한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지금의 모습 즉 보여지는 면, 자연뿐이기 때문이다.

2.
사람이 없는 그림이나 사진은 단지 죽은 사진이다. (아마 김영갑 아저씨는 나와는 반대로 말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사진에도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 사진에 비록 사람이 없지만 사진 뒤에 지은이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갔다 붙이기씩 이야기인가?) 즉 지은이가 보는 풍경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없다. 발리에서 "달려드는 메니큐어들과 마사지 아줌마(38쪽)"는 뿌리쳐야 할 대상, 즉 그곳에 그들이 없어야 비로소 풍경이 된다. 그는 사람과 소통하며 자연과 어울려 사는 사람들의 일상-행복, 힘겨움, 기쁨, 슬픔, 나눔 등을 묻지 않는다. 쌀은 아름다움 색이며, '米'가 지니는 참 뜻-여든여덟은 기억되지 않아도 되는 숫자이다. 어쩌면 일상에 얽매이지 않고, 떠나고 싶을 대 떠나는 자유로운 의지는 사람의 일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즉 그는 자연을 담음에, 사람을 빼버리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많이 보는 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24쪽)

위의 화두(話頭)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지는 함축적 의미가 빠져있다. 책을 읽으면서 잡히는 그 의미는 '많이 본다'는 것은 볼 것, 유명한 곳을 보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그 가운데나 혹은 낯선 곳을 나타낸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게 된 의미는 묻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한다.

내가 유추해 보기에, '사람이 없는 자연'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즉 사람이 없다. 홀로 방랑자이며, 자유인이며, 바람이다. 누구나 그를 부러워 할 수 있다. 어쩌면 일상에 더 얽매인 사람일수록 사람과 더 멀어지며 더 낯선 곳을 찾는다. 우리 곁에 숨 쉬는 자연의 신비함을 애써 찾으려 하지 않고 다가갔을 때, 그냥 다가오는 낯선 장면에만 취한다. 일상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 이는 영원히 떠돌뿐이다. 그 자유로움이 자칫 부러움을 비춰지겠지만, 내적 공허함을 감추지는 못할 것이다.

[흥정의 미학]
-펼쳐 놓고 고민 中….

더 읽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다. 진전이 없다. 한 푼이라도 벌려고 모이는 사람들은 돈독이 올랐으며, 관광지를 도는 일정은 이미 티비로 보아 익숙하며, 사색 없는 행적기는 낯선 이름으로 지루하다. '용을 잣으로 가서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호기심이 일기는 이는데… 너무 단조롭다. 하~~ 잠 온다.

"현지인의 순수함이라는 것이 돈에 대한 무관심을 일컫는 것(48쪽)"

완전 도둑놈 심보이다. 자기는 비행기며 차타고 와서,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며 달려 와서는, '너희는 돈을 몰라, 즉 내 돈을 탐내지 마라'라는 시선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들을 울타리 없는 동물원의 동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겠지? 순수함이란 돈에 대한 무지가 아니다. 정당한 대가이다. 즉 잠을 자게 해 주는 대신에 일을 하든가 노자를 주어 그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이다. 돈이라는 그 자체가, 순수와는 상관이 없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해 주고 그 대가를 돈으로 교환하는 것, 즉 물물 가치의 진일보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는 턱없이 '서울의 집값'이라면 순수함을 잃었지만 시골 장터 국밥집의 밥값이라면 순수하다. 또한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라는 인식으로 인해, 돈을 주지 않아도 되고 미국이나 유럽가면 입장료를 꼭 내어야 한다는 사고라면 분명 많이 엇나가고 있다. 이렇게 불쑥 나오는 지은이의 사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림에 무게를 더 하게 한다.

3.
"이런 천국에도 가난은 여전히 존재한다.(138쪽)"

천국이라 함은 어디이고 가난이라 함은 무엇인가?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내 돈 내고 문명의 최상위인 비행기를 타고 단순에 달려와서, 문명의 오지인 한적한-염라대왕마저 부러워할 곳에서 "발가락을 깊숙이 파묻는 해변의 모래"를 거닐며 "지칠 때 까지 스노클링?을(137쪽)" 할 수 있는 곳, 즉 그곳의 '삶의 체험'은 티비에만 나오면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자연, 즉 이것이 천국임을 말한다. 건데 이런 풍경에 옥의 티가 있으니, "얼굴이 검은 조그만 소녀가 파인애플과 칼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달고 시원한 파인애플 사세요!(138쪽)"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는 소녀를 붉은 녹이 잔뜩 슨 조그마한 칼로 쑥 내밀려 어쭙다는 표정을 짓는다고 적는다. 과연 그곳의 문화를 돈과 바꾼 이는 누구인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라는 책을 보면, 어린 여선생이 날마다. 집앞에 찾아와 선물하는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 동전을 한 잎 주었더니… 동내 꼬마들이 선생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줄을 서 기다리는 것을 적잖이 당황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들은 단순히 선생이 좋아서 선물을 했고, 선생은 그 고마움을 돈으로 표현했는데… 선물은 대가를 준다는 의미를 알게 된 아이들은 선물을 장사라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 한다. 과연 관찰자여야 하는가 참여자여야 하는가?

지은이는 비행기 타고 와서는 동물원 구경하듯 가면 되지만, 남은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바가지에 대한 감정 섞인 눈 대신에 돈을 많이 벌어, 다른 곳을 여행할 때 어떤 시선을 담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은 없다. 과연 그들은 다음에 어떤 모습으로 우리나를 찾아올까? 여유로운 자의 일상은 지지리 궁상인 삶에 과연하지 않는다.

숙소 근처의 어느 식당에 들러니, 종업원이 값싼 메뉴판을 내밀자 좋아라하며, 친절하다고 자랑하는 지은이의 글 솜씨는 바닥을 드러낸다. 혹시 메뉴판이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라면… 과연 그네들의 문화와 삶에 대한 이해가 있는가? 아니 관심이라도 있는가? 그냥 낯선 곳의 자연이 그리운은 아니겠지. 그리고 무인도라는 용을 찾아가는 여행기가, 아직 섬에 닿지 않았으니 혹시 발을 디디면 끝나는 것이 아닌지… 약 반을 넘기고 있는데, 무인도는 수평선 너머에 있고, 나오지 않던 'G씨'가 나와 이야기를 엉뚱한 곳으로 에둘러 간다. 영……. 밋밋하다.

148쪽, [대탈주]
고민고민 하던 난, 여기까지 읽은 부분에 대한 내 이해만 기록하고 책을 덮는다. 용을 찾아 무엇을 했는지……. 조금 궁금하지만 급반전을 기대할 수 없으니, 바가지를 씌우는 이를 만나며 못된 사람이라 할 것이고, 사람이 없는 풍경에서 발 담그고 하루 종일 잠을 자는 것을 지상천국이라 하겠지. 혹시라도 다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뒷부분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저는 성격이 곱지가 않아, 계속 동행을 하지 못하고, '대탈주'를 합니다. 그럼 이만… 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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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_lee 2006-03-10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게 독후감을 쓰셨는데 솔직히 책을 제대로 읽은 건지 의문입니다.
저자는 여러차례의 발리 여행을 통해 발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숭배가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저자의 인도네시아 문화와 언어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글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데 저자가 발리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재단하니 이육사의 청포도를 읽고 한가하게 과일을 논하는 시라고 평하는 우매함과 같습니다.
독후감의 수준으로 봐서 심훈이나 이광수의 계몽소설이나 한비야류의 책을 읽으셔야 할 분인 듯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자가 상징하는 용은 발리 그 자체고 발리에 헌정한 훌륭한 기행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마개 2006-08-2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저자의 발리에 대한 이해 정도가 얼마만큼인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책을 보면 저자가 나르시즘에 도취되어 있다고 느껴지긴 합니다.
'나는 도회적이고 세련되었다'라는 점을 끊임없이 말해주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있음도 보이고...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테마 한국문화사 5
김문식.신병주 지음 / 돌베개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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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말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아마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깊은 잠을 청하지 않았나’하는 흐릿한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나는 의궤를 알지 못하고, "어, 이 그림은 많이 보았는데……."라며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어본다. 즉 의궤에 담기 '반사도'라는 그림은 낯익지만 '의궤'라는 단어는 낯설게 다가온다.

이런 내 모자람은 지은이는 아는지 처음부터, 의궤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을 해 준다. 그는 국사 시간에 졸았던 학생이 많은 것을 아는지 자세하고, 이것요것저것 자세한 설명을 해 준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아~~ 이게, 의궤구나'라고 거푸집을 짓는다.

의궤와 비슷한 책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는 조선시대 살았던, 선비로서 홀로 벼슬을 하며 기생집에 가지 않았다고 마누라한테 편지를 섰지만,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이다. 그는 어떤 일이건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며, 그의 일기 들어있는 글을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기나 개인의 사적인 기록이라면, 의궤는 공적인 기록이라 하면 틀린 말일까? 틀려도 할 수 없다. 누군가가 ‘니가 아는 게 사실이 아니다’라고 할 때 까지, 잠재적 정답으로 곁에 둔다.

지은이의 의궤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지만 지루하다. 하품이 몇 번이고 나를 불러들이지만 나는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티비 책을 말하다] 선정 도서이기 때문…)으로 책장을 넘긴다. 이렇게 지루하게 넘기니, 솔직히 글이 쏙쏙 달려와 안기는 것은 아니다. 내 눈은 먼 산을 더듬듯 글을 읽어가곤 하는 것이다. 꾹 참고 눌러가면서, 나는 우리 조상들의 철저한 기록과 유산에 대해 가히 존경을 표한다. 어느 누가 이렇게 상세하게 글로서 적고 기록할까? 왜 그렇게 했을까? 그(지은이)는 임금에 대한 감시의 기록을 통해, 임금의 경계를 지운다고 한다. 하지만 읽지 않고, 가만히 서고에 보관만 한다면… 감시와 성찰일 수가 있을까? 기록에 대한 감탄할 말한 보고라고 느껴진다. 그렇지만 남는 문제는 과연 언제 볼 것이기에 저렇게 꼭 꼭 묶어 두었는가 하는 문제… 조상을 공경하고, 후손을 두려워하는 자리에 앉아있다면…

나는 의궤에 무서울 정도의 기록이라는 점을 짐작하지만 지은이의 글쓰기가 너무 지루하고, 내가 좋아하는 반차도에 대해서는 깊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문득 책을 읽어가다, 산으로 올라간 배를 보기 위해 정동진 산길을 걷다 담에 빼곡히 적힌, 춘천 어느 역 기둥에 적힌 수많은 기록은, 혹시 버릴 수 없는 '조선인(人)의 원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지은이는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말을 쓴다. 즉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한다“(250쪽) 간혹 명절이나 기념일에 들려오는 소리는, 마음에 우러나지 않는 제사는 필요 없다, 마음이 가야지 몸만 가면 안된다라는 말을 통해 형식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이야기다.

조선 시대에 형식에 너무 얽매였다면, 오늘은 자율에 너무 얽매였다. 형식의 상징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 마음이 안 간다는 말로서 그들의 자율을 합리화하는 이야기가 난무하는 게 아닌지…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어떤 이의 말과 같이 형식과 내용은 서로 조율되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나 지루한 책이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오늘의 나와 우리나라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읽으라고 말한다면, 그냥 별을 불러서 밤을 청할래…….


한줄 요약 : 지루한, 의궤에 대한, 기본 설명의 평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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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
이원재 지음 / 원앤원북스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책이라는 것은 절대 진리나 신화가 될 수 없다. 책은 인간의 사고를 글이라는 그릇에 담아 세상에 내어 놓은 도구이다. 즉 책을 통해서, 글 속에 숨은 지은이를 볼 수가 있으며, 지은이를 보게 되면서 그의 세계관을 읽을 수가 있다. 그의 세계관 읽기의 시발점은 '차례'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즉 차례는 이 책의 길라잡이며, 광장이며,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의 차례를 펼쳐놓고, 내가 읽어온 책에서, 티비에서 건네진 장면, 라디오에서 흘러온 이야기를 아집으로 뭉쳐진 사고 등은 수 없이 들였다 뺐다하며 지은이의 세계관과 랑데부를 시도하고 있다. 나와 그는 우주라는 공간에서 처음 만났으며, 우리의 이끌림은 '그래도 사랑만이 희망이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내게는 대한민국이 희망이 있음을 근거로써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잡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그의 이야기를 통해, 때론 고개를 끄떡이며, 때론 고개를 흔듦을 통해 세계관을 다질 것이다. 즉 어렴풋하게 그려지는 아웃트라인 '대한민국 희망론(論)'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희망의 크기가 다를 뿐, 존재상을 깊이 인식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차근하게, 혹은 잘근잘근 '차례'를 씹고 있다. 천천히 체하지 않게…

장님 소 더듬듯, 한국경제를 어렴풋이 잡고 있는데… 지은이의 결론은 단순명쾌하다.

"한국 지식인들의 자학증은 소비와 투자 침체를 가져오면서 한국경제의 목줄을 죄고 있었다."(17쪽)

한국 지식인들의 자학증? 이로 인해 소비와 투자 침체….

실체를 모르는 지식인들이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한다. 시민들은 바보같이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시민들의 생각이 없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지은이는 한국인의 실체를 다음 쪽에서 말한다.

"시류에 영합해 사실을 왜곡하여 비관을 확대 재생산하는 지식상업주의의 비겁함"(8쪽)

지식인들은 시류에 영합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또한 비관을 재생산하여 지식을 상업주의를 전락시킨다? 그리고 또한 시민들은 지식인들의 사실 왜곡과 비관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나는 여기에 밑줄을 긋고, 다시 묻지 않는다.

계속 책을 읽어가니, 적잖이 부담스러운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IMF 원조 프로그램 이후 아시아에서 가장 탄탄하게 성장하던 한국경제에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했다."(26쪽)

나는 IMF가 국가적인 원조정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이나 장하준의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사다리 걷어차기』등에서 보여지는 이론을 보면, IMF는 돈으로 상대 국가를 침략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물론 그들은 그럴듯한 자유화라는 혹은 세계화라는 헤게모니를 삐라처럼 뿌리고 다닌다. 또한 IMF 이후 한국 경제는 미친 듯이 찍어낸 신용카드로 인하여 눈 가리고 아웅 한 격이 없지 않아 있고, 이론 인해 공적자금은 은행의 부실채권에 돈을 주었지만 그 돈은 서민들의 주머니에서 두 번 뺀 돈이다. 한번은 신용카드로, 한번은 공적자금이라는 세금으로……. 그 많은 돈들은 다 누가 먹었나?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래서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다 잊혀진다고 하는가?

시야가 틀릴 수는 있다. 내 짧은 가방끈으로 누구와 옳고 그름을 논하기에 머리가 너무 무겁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논거가 필요하다. 객관적인 그리고 여기에 세계 속에 한국 경제를 이야기 하려면 세계의 경제와 한국 경제의 톱니바퀴를 읽어내는 눈이 더 있으면 좋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의 어느 부분, [세계 경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내심 기대를 하였다. 하지만 내 기대는 5분은 버티지 못했다.

이 부분에서 꾹꾹 눌러 참고 있던 감정이 폭발하였다. 나는 서점 주인을 불러,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저씨, 우째 이 책이 경영,경제에 꼬쳐 있어예. 제가 읽어 잠시 읽어보니 이 책은 수필이라예!'

그래, 지금 내 손에 잡힌 책은 수필집이다. 한국 경제가 아닌, 아시아 경제가 아닌 세계 경제를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이렇게 글을 적으면 안된다. 브레진스키의 시선에 쫓아가지 못하더라도 흉내라도 내어야지, 지은이의 시선이 혹시 국민의 심리에 동요를 일으켜, '잘살아 보세'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무식하면 용감하다. 아무것도 멋 모르는 것은 하룻강아지의 심장과 같다. 하지만 용감함이 전장에서 이김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덮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계경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의 문제 제기와 시선의 한계,
월가의 등 뒤에 숨어서, 알아서 그들의 시선을 쫓는 주관적 입장.
(월가의 정체나 그들의 가치관이 객관적인지 묻고 싶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힘이 지식인이며,
그들의 입에 시민들이 놀아난다는 이분법, 상하구조식의 논리.
무엇보다 객관적 사료 없이 지은이의 감정에 호소하는 글솜씨.

나는 잠시 수필집을 읽었다. 그는 여느 시민과 같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걱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 그의 이야기가 큰 울림이나 깊이는 월가에 남겨두고 온 듯하다.

蛇足: 요즘 [티비 책과 말하다]를 예습하고 있는데, 왜 이런 책을 택했는가 고민을 해 본다. 이어령씨의 시적 언어를 존중하지 않나? 영화 잘 만들었다고 수 년 전에 절판된 책이 나오니 그를 다시 불러온 거나(그때는 그를 몰랐나? 영화를 통해 보니 그의 글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꼈나?) 한국 경제가 힘이 드니, 새해가 크게 나아가지 않았으니 희망을 가져보자는 의미에서 그를 불렀나?

티비에, 교수라는 직함에, 기자라는 이름에 눈 멀지 말고, 서점에서 몇 줄만 읽어보시고 권하시길 붙입니다. 이 모든 선택이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덧붙인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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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2-27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분석입니다. 리뷰도 이렇게 컬러풀 해지니 공부가 되는군요. ^^
한겨레 신문 기자 출신으로 지금 MBA하는 분이 쓰기는 했는데 아직 기대보다 아래입니다. 저도 평점을 낮게 줄 수 밖에 없더군요.

abcd4737 2006-03-01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한 진단입니다. 저도 방송을 보면서 저자가 팩트보다는 자신의 주관에 기초한 글을 썼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반대 논거에 대한 반박이나 실증이 많이 부족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