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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
이원재 지음 / 원앤원북스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책이라는 것은 절대 진리나 신화가 될 수 없다. 책은 인간의 사고를 글이라는 그릇에 담아 세상에 내어 놓은 도구이다. 즉 책을 통해서, 글 속에 숨은 지은이를 볼 수가 있으며, 지은이를 보게 되면서 그의 세계관을 읽을 수가 있다. 그의 세계관 읽기의 시발점은 '차례'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즉 차례는 이 책의 길라잡이며, 광장이며,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의 차례를 펼쳐놓고, 내가 읽어온 책에서, 티비에서 건네진 장면, 라디오에서 흘러온 이야기를 아집으로 뭉쳐진 사고 등은 수 없이 들였다 뺐다하며 지은이의 세계관과 랑데부를 시도하고 있다. 나와 그는 우주라는 공간에서 처음 만났으며, 우리의 이끌림은 '그래도 사랑만이 희망이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내게는 대한민국이 희망이 있음을 근거로써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잡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그의 이야기를 통해, 때론 고개를 끄떡이며, 때론 고개를 흔듦을 통해 세계관을 다질 것이다. 즉 어렴풋하게 그려지는 아웃트라인 '대한민국 희망론(論)'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희망의 크기가 다를 뿐, 존재상을 깊이 인식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차근하게, 혹은 잘근잘근 '차례'를 씹고 있다. 천천히 체하지 않게…
장님 소 더듬듯, 한국경제를 어렴풋이 잡고 있는데… 지은이의 결론은 단순명쾌하다.
"한국 지식인들의 자학증은 소비와 투자 침체를 가져오면서 한국경제의 목줄을 죄고 있었다."(17쪽)
한국 지식인들의 자학증? 이로 인해 소비와 투자 침체….
실체를 모르는 지식인들이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한다. 시민들은 바보같이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시민들의 생각이 없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지은이는 한국인의 실체를 다음 쪽에서 말한다.
"시류에 영합해 사실을 왜곡하여 비관을 확대 재생산하는 지식상업주의의 비겁함"(8쪽)
지식인들은 시류에 영합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또한 비관을 재생산하여 지식을 상업주의를 전락시킨다? 그리고 또한 시민들은 지식인들의 사실 왜곡과 비관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나는 여기에 밑줄을 긋고, 다시 묻지 않는다.
계속 책을 읽어가니, 적잖이 부담스러운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IMF 원조 프로그램 이후 아시아에서 가장 탄탄하게 성장하던 한국경제에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했다."(26쪽)
나는 IMF가 국가적인 원조정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이나 장하준의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사다리 걷어차기』등에서 보여지는 이론을 보면, IMF는 돈으로 상대 국가를 침략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물론 그들은 그럴듯한 자유화라는 혹은 세계화라는 헤게모니를 삐라처럼 뿌리고 다닌다. 또한 IMF 이후 한국 경제는 미친 듯이 찍어낸 신용카드로 인하여 눈 가리고 아웅 한 격이 없지 않아 있고, 이론 인해 공적자금은 은행의 부실채권에 돈을 주었지만 그 돈은 서민들의 주머니에서 두 번 뺀 돈이다. 한번은 신용카드로, 한번은 공적자금이라는 세금으로……. 그 많은 돈들은 다 누가 먹었나?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래서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다 잊혀진다고 하는가?
시야가 틀릴 수는 있다. 내 짧은 가방끈으로 누구와 옳고 그름을 논하기에 머리가 너무 무겁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논거가 필요하다. 객관적인 그리고 여기에 세계 속에 한국 경제를 이야기 하려면 세계의 경제와 한국 경제의 톱니바퀴를 읽어내는 눈이 더 있으면 좋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의 어느 부분, [세계 경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내심 기대를 하였다. 하지만 내 기대는 5분은 버티지 못했다.
이 부분에서 꾹꾹 눌러 참고 있던 감정이 폭발하였다. 나는 서점 주인을 불러,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저씨, 우째 이 책이 경영,경제에 꼬쳐 있어예. 제가 읽어 잠시 읽어보니 이 책은 수필이라예!'
그래, 지금 내 손에 잡힌 책은 수필집이다. 한국 경제가 아닌, 아시아 경제가 아닌 세계 경제를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이렇게 글을 적으면 안된다. 브레진스키의 시선에 쫓아가지 못하더라도 흉내라도 내어야지, 지은이의 시선이 혹시 국민의 심리에 동요를 일으켜, '잘살아 보세'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무식하면 용감하다. 아무것도 멋 모르는 것은 하룻강아지의 심장과 같다. 하지만 용감함이 전장에서 이김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덮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계경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의 문제 제기와 시선의 한계,
월가의 등 뒤에 숨어서, 알아서 그들의 시선을 쫓는 주관적 입장.
(월가의 정체나 그들의 가치관이 객관적인지 묻고 싶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힘이 지식인이며,
그들의 입에 시민들이 놀아난다는 이분법, 상하구조식의 논리.
무엇보다 객관적 사료 없이 지은이의 감정에 호소하는 글솜씨.
나는 잠시 수필집을 읽었다. 그는 여느 시민과 같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걱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 그의 이야기가 큰 울림이나 깊이는 월가에 남겨두고 온 듯하다.
蛇足: 요즘 [티비 책과 말하다]를 예습하고 있는데, 왜 이런 책을 택했는가 고민을 해 본다. 이어령씨의 시적 언어를 존중하지 않나? 영화 잘 만들었다고 수 년 전에 절판된 책이 나오니 그를 다시 불러온 거나(그때는 그를 몰랐나? 영화를 통해 보니 그의 글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꼈나?) 한국 경제가 힘이 드니, 새해가 크게 나아가지 않았으니 희망을 가져보자는 의미에서 그를 불렀나?
티비에, 교수라는 직함에, 기자라는 이름에 눈 멀지 말고, 서점에서 몇 줄만 읽어보시고 권하시길 붙입니다. 이 모든 선택이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덧붙인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