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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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좋아하시나요?
세계화, 어떻게 보시나요?
축구는 좋아하지만 세계화에는 관심이 없다구요?
세계화는 비판적으로 읽어내려 하지만 축구는 나처럼 모른다구요?

축구를 통한 세계화, 어떻게 궁합을 맞출 것인가?

다시 월드컵 경기가 전세계(?)를 뜨겁게 한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도 있다. 5.31의 지방선거는 그렇고 그런 인물이 나와, 보름동안 '국민을 위해'라고 고개 숙이고, 다음날은 뒷간 갔다 온냥 싹하고 돌아서버린다. 하지만 축구는 어떠한가. 그네들은 한결같이 열심히 뛴다.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그들은 운동장에서 싹 가시게 한다. 축구는 정치처럼 머리를 아프게 하지 않고, 둘이 셋이 뭉쳐서 '대~한민국!' 외치면, 처음 만난 이도 '우리가 남이가'라며 동질감을 묶어낸다.

4년 전, 한국은 월드컵으로 하나되었다. 그 누구도 예상 못한 '신화'같은 일이 벌어졌고, 대한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다. 그리고 그 달에 효순이 미선이가 미군 탱크에 깔려 짧은 생(生)을 마감했다. 작은 땅, 한국에는 두 개의 신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나는 민중을 들뜨게 했으며, 하나는 민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다시 월드컵이 벌어진다고 한다. 나는 월드컵이 벌어지면 4년 전의 신화 같은 일 앞서, 나 보다 짧게 살다간 동생 같은 두 명의 학생을 기억한다. 월드컵이 벌어질 때 마다, 2002년 6월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되새김질은 나와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괴리감을 낳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 축구는 거대한 블랙홀이 아닐는지…….

축구는 과연, 어떻게 세계를 규율하는가?

지은이는 나와는 다르게, 무지 축구를 좋아하나 보다. 그는 유럽 어느 나라 축구구단의 이야기를 전설같이 풀어낸다.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지는 셀틱과 글레고스 양측 대립을 종교적 원인으로 읽어내고, 독재정권이 어떻게 축구를 통해 시민을 하나로 묶어내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또한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는 사람을 만나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기도 한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진척이 없다. 구단의 대립을 통한 역사적 이해를, 다른 몇 몇 나라를 통해 읽어낸다. 여기에는 한정적 지역공간이 존재한다. 즉 유럽 모퉁이의 어느 나라이지, 전지구적 공간으로 확대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축구 구단과 역사적 이해를 통해 축구가 세계를 지배하는 이유를 추적한다, 추적한다?

지은이는 직접적으로 축구가 세계화를 어떻게 장악하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구단을 통한 추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취하되 취하지 않아야 하며, 지루하게 끊임없는 물음이 필요하다. 그처럼 너무 빠져버리면 헤어나지 못하고, 나처럼 축구를 '발로 차는 것' 정도로만 안다면 구단사(史)만 읽을 어리석음에 빠질 수가 있다.

아래에, 어제 읽은 신문기사를 옮기며 글을 마감한다.
(지은이는 축구 구단의 갈등을 읽을 줄 알지, 이외에는 눈감고 있음이 안타깝다)

출처: 프레시안

축구공 꿰매는 아이들 - 파키스탄 씨알콧
  
축구공은 가죽 조각을 손바느질로 이어 붙이는 수작업을 통해 완성된다. 그동안 축구공 생산은 경제논리에 따라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 개발도상국의 아동노동을 착취해 악명이 높았다. 비난 여론이 일자 1999년 FIFA는 강요되거나 구속된 노동 혹은 아동 노동으로 생산된 축구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식 생산현장이 아닌 중간상인을 통한 생산은 통제하기가 어려워 여전히 많은 아동들이 축구공을 꿰매고 있다.

파키스탄의 씨알콧은 대표적인 축구공 생산지역으로 파키스탄 축구공 생산의 무려 75%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브랜드만도 전 세계 50여 개에 이른다. 수 만 명으로 추정되는 씨알콧의 아동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8~9시간을 일하고 있고 그 중 30%는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일하고 있다. 이 지역은 가난하기도 하거니와 교육의 질도 낮아 아이들을 무리해서 학교를 보내기 보다는 기술을 배우게 하는 것이 낫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씨알콧 지역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서구 사회의 압력으로 파키스탄 정부와 단체들도 아동노동 근절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 시기에도 여전히 씨알콧 지역의 아동착취 축구공 생산은 악명을 떨쳤다. ILO나 유니세프와 같은 국제연합(UN) 기관들과 국제 언론, '아동노동을 근절하기 위한 세계행진(Global March)'과 같은 시민사회단체들이 나섰고 '축구공 프로젝트'를 실시해 '바느질을 멈추고 학교로'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축구공을 생산하는 아이들을 극한 빈곤으로부터 탈출시켜 학교로 돌려보내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여전히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동들이 많지만 전 세계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씨알콧은 대안을 찾아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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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땡하고 문 열면 '쾅'하고 찍고
나서야지 하면서도 뭉그적 뭉그적.

5분만, 5분만하며 반 시간을 채우고 대문을 나선다.

나는 6시가 조금 지난 아침에 고샅을 지난다. 아직 7시가 되지 않았으니, 5분만에 끝내고 출근해야지 하며 내 유년시절의 놀이터, 초등학교(투표소)로 들어간다.

'어 근데, 이게 왠일이야!'

내가 사는 동네는 시골이다. 머리 좋고, 몸 좋고 나이 젊은 이들은 서울, 서울하며 올라가 버리고 나이든 어른신들이 햇볕을 동무삼아 무논에서 수군파(삽) 한자루르 들고 아침을 맞이하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오늘은 삽 대신에 깔끔하게 차려입고, 신분증과 도장을 하나씩 들고 줄을 서 계신다.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주머니, 아저씨....

적어도 지천명이 최하한선이고, 이순이 평균선인 듯 해 보인다. 젊은이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허리가 구부러진 어르신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이렇게 아침 일찍 나왔는가.

나는 서서 30여 분 째 생각을 해 본다.

우리 동네를 지키는 건, 말 잘하는 정치인도 머리에 든게 만 젊은이도 아닌, 묵묵히 논밭, 무논에서 일하시는 울 어머니 아버지가 아닐까고...

며칠 전 부터, 투표하러 가까마까 고민했던 흔적들이, 아침 풍경에 밀려선다. 아침 일찍 오기를 잘 했다.


여섯시 십분쯤되었나.... 삼십여분을 기다렸다.


운동장에 아침해가 곱게 내려앉는다.


늙은 나무는 지난 시절의 나를 보고, 어른이 된 나를 묵묵히 본다.
지나가는 이가 이 나무 그늘에서 쉴 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내 부끄러움이 아니길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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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말이고 해서 오랫만(?)에 집에 들어간다.

나는 집에서 회사를 다니는 것이 아니기에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들어가곤 한다. 그러니까 오늘은 금요일이고, 동생도 일찍 집에 들어왔고, 축구도 한다.

"통닭하고 맥주 한 병 사 가까?"

술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날은 통닭을 시켜 맥주를 먹으며, 응원을 해야 한다는 주위의 흥에 나도 모르게 전염이 되었다. 집에는 동생도 있고, 엄마가, 엄마가 문제인데....

어머니는 저녁 아홉시를 넘기시지 못한다. 내일 아침 일찍 고추밭에 일하러 가야하기 때문이면서도, 하루 일의 피곤함에 많이 지쳐있다. 아침 일찍 나가 저녁 여섯시에 들어와, 다시 밭에서 잔일을 보태고 집에 들어와서 저녁이며 빨래 등 잔설거리를 하신다. 이렇게 저녁에 들어와 이것저것하면 밥먹고 곧바로 주무시는게 일상사이다. '오늘은 축구를 하니, 잠시 깨워볼까'라며 생각하고 집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동생은 옆집 할머니가 놀러 오셨다가 금방 가셨기에, 어머니가 아직 주무시지 않고 있단다. 나는 얼릉 통닭을 사서 집으로 간다하고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가 가시자 마자 누워버린 엄마를 아들이 다시 깨운다.

"엄마 통닭 묵고 자라"

축구도 하니, 구경하면서 천치히 드시라고 하니, 잠자리에서 일어나 맥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커고 제자리에 누워버리신다. 동생과 나는 엄마 머리맡에서 통닭을 먹으면서 티비로 축구를 구경한다. 동생은 내가 알지 못하는 축구 선수를 무슨 연예인 이름 부르듯이, 줄줄 꿰어낸다. 나에게는 모두가 낯설다. 월드컵 경기 때에만 티비를 보는 내가 아직 열리지 않은 경기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부담스럽고, 할머니가 왜 왔냐고 물어보니, 선거 때문이라다. 나는 그렇구나라고 생각하며 축구를 보다, 심심하여...

"이게 머꼬?"

저 만치 구석에 있는 우편물을 꺼낸다. 혹시나 길잃은 연애편지가 들지 않았나라며... 선거 홍보물이다. 채 일주일을 남겨두지 않고-수요일이 선거일인데, 금요일에 집에 들어왔다. 열흘은 그냥 흘리고, 닷새를 남겨두고 홍보물을 날리다니... '나 만큼 부지런한가 보다'라고 중얼거린다.

"이번엔 여섯명, 여섯명 찍어야 한데이.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 참!"

잠자는 줄 알았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네 명이라 카든데'라고 말하신다. 어머니는 고추밭에서 아주머니들이 하는 소리를 어깨너머로 듣었는데, 분명 '4명'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신다.

"이번엔 시장, 시의원, 비례대표 시의원, 도지사, 도의원, 비례대표 도의원 이렇게 여섯명 뽑는다"
"비례대표라 카는게 머꼬?"
"그게 있다 아이가"


이래저래 설명을 해도 어머니는 말을 들을 수록 헤갈리신다고 하신다. 나도 비례대표, 비례대표 말로는 듣었지, 비례대표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동생은 내일 홍보 벽보를 보며 가르켜 줄테니, 오늘은 잠자라 한다.


2.
이번 선거는 총 여섯명! 1차 투표에서 3명, 2차 투표에서 3명. 1차에서 시장, 시의원, 비례대표 시의원 그리고 2차에서 도지사, 도의원, 비례대표 도의원을 합하여 총 여섯명을 뽑는다. 하지만 투표날만 알고 있지, 투표소가 어디며 누가 나왔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정보가 없다. 또한 1번 2번 다음에 왜 6번인지 7번이 나오는지, [2-가], [2-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해서도 말해 주지 않는다. 과연 그들이 어떤 일을 하며, 4년 동안 어떤 정책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홍보 방송만 듣고 있으면, 대통령이 못하는 일을 시장이 다해주고, 시장이 못하는 일은 '시의원'이 다 해낼 수 있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정작 누가 나왔는지.... 우리 집하고는 반나절이나 멀리 떨어진 서울 동네 시장의 이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오고 밤에는 무슨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정책의 타당성을 비교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동네 후보 시장님은, 시의원님은... 어디에 있는가? 주객이 전도 된 것은 아닌지...

오늘 상암벌에 6만명이 모여 대한민국을 외쳤다고 하는데.. 그곳에는 감정적인 대한민국이 모여 뜨거운 정(情)을 나누었는지 몰라도, 냉철한 이성으로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는 눈(目)은 없다.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공설운동장에서 합동 연설회를 하면 오늘처럼 모일까? 반이라도 모일까? 왜 운동장에서 합동 유세는 안되는 걸까? 운동장에서 안하니,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확성기로 동네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오죽하면 소음이라고 민원까지 나오지 않는가.

동생은 이번 선거날에 놀러간다고 한다. 하지만 네 명을 뽑는 것만으로 알고 계시는 우리 어머니는 투표하러 가신단다. 젊은이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우리 어머니는 투표하러 가는데, 막상 몇 명을 뽑아야하는지 모르신다. 고추밭 아주머니처럼 마음에 드는 한 번에 몰표'다라라~~' 찍어야 되나라고 묻는다. 티비에서는 무조건 투표하라 한다. 또한 투표하면 '떡'도 줄라한다.

무엇을 주기 때문에 투표를 하러 가는 건, 종을 치며 밥 준다는 것을 알고 달려오는 뭐시기하고 뭐가 다른가. 우리의 주권을 우리가 내세워야-목소리를 높여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투표에는 [주민 소환제]라는 화두가 걸려있다. 2007년 7월 1일부터 유권자의 10% 이상(시, 도지사), 15% 이상(기초단체장), 20% 이상(지방의원)이 찬성을 할 때, 소환 대상자는 유권자 3분의 1 이상 투표, 과반 찬성이 나오면 즉각 해임이 가능하다. 지방자치 12년! '주니깐 부패밖에 없다', '너희 나라는 아직 민주주의가 이르다'라는 비아냥만 들어야 하는가? 내가 냉철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희망은 내가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나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발로 차버리면 그는 저 멀리 날아가서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우리 몸에 붙어있는 희망을 때어내려 하는가, 붙잡으려 하는가?

어젯밤 축구가 계속 맴돈다. 우리는 축구에 토해내는 그 열정, 십분의 일 만이라도 정치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가 없는가? 정부에서는 '떡'줄 생각을 하지 말고, 투표를 어디에서 어떻게, 그리고 새로 바뀐 정책과 주민 소환제의 의미를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어쩜 정부도 축구에 흥미가 더 가 있는 것은 아닌가?

축구만 하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모두 심판이자 감독이며 코치라고 했다. 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모두 국외자가 되어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한다.

이번 수요일의 지방 선거는 총 여섯명을 뽑으며, 내년 7월 1일에는 주민소환제가 시행된다. 시장을 뽑아 놓고 내 몰라라 하는게 아니라, 우리의 의지로 경계, 비판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소중한 한표를 행사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번 선거일은 선거일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나는 내 소중한 한표가 허튼길로 나갈 때에는 다시, 주민 소환제를 통해 엄중한 비판을 가할 것이다. 희망과 진보는 내 의지에 의해 나아가는 것이지, 다른이가 밀어주는 것이 아님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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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 SERI 연구에세이 47
송호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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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머리말에서 토크빌의 말을 빌려, 미국와 러시아의 강대국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한다.그리고 강대국을 지향할 수 있도록 한 토대는 자유와 평등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평등은 강대국으로 들어서기 위해 꼭 잡아야 할 동앗줄인 동시에 사회 윤리적인 면에서도 지향해야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즉 자유와 평등은 강대국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비상구이다.

"향후 강대국으로 등장할 국가는 미국과 러시아다. 미국은 자유와 평등에서 우러 나오는 자발적인 힘으로 강대해질 것이고, 차르 체제의 러시아는 집단적 동원이 국력의 원천이 될 것이다.(토크빌)"

나는 머리말을 읽으면서 몇 가지의 의문이 생겼다.

1. 자유와 평등이라는 단 한 줄로 전체를 말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를 피해갈 수 있나?
2. 실제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구조로 다져졌는가? 실증적 기록에 대한 의구심?
3. 평등과 자유, 그리고 집단적 동원을 동의어로 볼 수 있는가?
4. 혹시 자유와 평등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5. 미국이 지닌 강대국의 위치는 도덕적 우위에 존재하는가? 즉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등과 자유를 통해 강대국이 되었으며, 앞으로 계속 향해를 할 것인가?


위와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은 지은이의 다음과 같은 생각때문이다.

"자유주의로 견제된 평등이념, 시민 사회적 윤리와 교양으로 정제된 평등 이념,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6쪽)

"평등주의는 발전의 원동력이다.
"(6쪽)

다시 책을 찬찬히 읽어간다. 지은이는 몇 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 즉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문제점은 서로 잘 살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잘 되면 비방하거나 배 아파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면도 보여준다. 춘천이라는 동네를 들어 누구나 열심히 하면 잘 살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래의 글은 30쪽 이내에 그의 글을 읽으면서 가치관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이다.

가설(이 가설은 지은이의 세계관을 나름대로 정리할 글임)

1.
한국의 평등주의가 심하며, 이 격차가 '관용의 수준(12쪽)'을 넘어서면 자아의 상실로 이어져-불평등에 대한 상처를 치유할 다른 가치관을 찾지 못해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한국인이 지향하는 평등주의가 '하향 지향'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는 "특정 집단이나 계층에 이익이 돌아갈 기미가 보이는 정책은 바로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 한국(13쪽)"이기 때문이다. 한줄 요약, 못 살면 다같이, 정부의 복지 정책은 특정집단의 특혜!!

2.
개천에서 용나면, 개천 주인이 이름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장이 드높인다. 즉 위즈가 혼열인으로 성공하니, '뒤에는 [대한민국]이 있습니다'라는 식이다. 이는 일차적 연고주의이지만, "강한 성취동기"로 전이 되어 우리도 함께라는 자긍심자신감을 심어준다. 즉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 '우리도 그들처럼 잘 살아보자'라는 구호로써, '자유주의의 생산원료'가 되어 발전 가능성의 실현화 모델이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한국에서 그것은 연고주의와 결합해서 여러 형태의 균열구조를 낳았다.'(16쪽)

3.
"서울대 통합형 논술이 본고사에 해당한다."(17쪽)

이는 나쁜 뉴스이다. 즉슨,

"통합형 논술은 결국 사교육비를 댈 수 있는 부유층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은 평등주의적 발상이다."(18쪽)

저소등측에서는 이만한 인프라를 구축할 수 없고, 돈 많은 어느 집에서, 돈으로 교육을 시켜 서울대에 보내는 것은 불평등이며, '부유층에 유리하다'는 판단은 평등주의적 정의가 된다. 즉 '서울대 통합형 본고사'를 통해 우수한 인재를 가려내고, 이들이 다시 한국의 자유와 평등, 경제 발전의 최전선에서 나를 버리고, 우리를 위해 일하는가에 대한 고민보다, 내가 들어갈 기준이 너무 높다는 인식에 따른 평등문제인 것이다. 다시 하향 지향 정의를 내린다.

4.
"'성공한 너'와 '평범한 나', '잘된 너'와 '못된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좁히려는 심점, 나도 너 처럼 될 수 있다는 동일화 열망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발전을 낳는다." (23쪽)

실증적 보기로써, 춘천시 서변, 약 2000호에 박사가 100명이나 배출되었으니 이 보다 더 좋은 증거는 없다. 하지만 4인 기준으로 보면, 200*4는 8000명, 어르신 빼면 4000명, 4000명 가운데 100명이 박사?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하나?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라는 문제가 나온다. 이는 책 전체에 큰 문제가 되는 반면에 지은이는 무시한다.

5.
부정부패가 만연한 국가는 많다. 지배층이 부도덕하고 사회적 책무를 이행하지 않는 국가도 많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들이 사회적 존경을 상실한다거나 극심한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다른 나라가 그렇게 한다고 우리고 그렇게 해라. 미국의 남의 나라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하니, 우리도 따라 해라(?) 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많이 벌면 좋다. 또한 부정부패가 만연한 국가와 사회적 존경 사이의 관계는 무관하다(?)

지은이가 말하는 나라는 얼마나 많은지 정말 궁금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인가에 대한 물음도 따라온다. 하지만 그는 머릿말에서 토크빌의 입을 빌렸고, 평등은 좋은 거라고 말했다.

* 세계관 (지은이가 그려내는 평등주의, 내 눈에 비친 모습)
우리 나라 사람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 한다. 하지만 나도 열심히 일해서 땅을 왜 안살까라고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도 열심히 일해 땅을 사자'라는 일념으로 책 한 권 내었다.하양 평등주의를 지양하고, 모두가 부자 되는 상향 평등주의를 지향하자!!

'경제적 불평등'과 '자유'라는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 하지만 자본주의의 피라미드 구조제로섬 게임 같은 어려운 말은 쓰지 말자. 또한 조금의 부정 부패는 어느 나라에도 있으니, 내 돈벌이가 부정과 부패와 손을 잡았다 하더라도 사회적 존경심을 잃을만큼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 너무 깨끗해서 그렇다.

마무리,
순진한 이는 열심히 공부하고 땀흘리는 사이(-그는 열심히 땀흘리고 돈을 버는게 가장 좋다고 12년 동안 배웠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도 그렇게 사셨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이들은 펜대를 굴리며 돈을 눈두덩이 처럼 굴린다. 어릴 때에는 같이 자라기도 했지만 서울에 올라가면, 땀을 흘리고 돈을 버는 짓이 바보 같다는 생각에 빠진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가 있는데, 하루종일 땡볕에서 피 뽑고 밭매는 짓을 왜 해. 어릴 때에는 같은 동네에서 자랐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한 명을 땅을 일구며 대한민국을 가꾸고, 한 명은 서울로 올라가서 돈을 굴리며 대한민국을 가꾼다.

위험한 책이다. 독이 될 수 있고, 약이 될 수 있는...

나는 그의 평등주의가 단순한 논리로써, 성취 동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자신감'을 불어넣는 책이라는 것을 안다.

"정부도 부촌 형성을 정책적으로 막았다. 현재는 강남 지역이 부촌이 되었지만 인프라나 거리의 모습은 부촌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고 볼 수 없다. 다만 학군이 좋고 사설학원이 밀집해 있으며 다른 지역보다 약간 나은 문화시설과 쇼핑센터가 몰려 있는 정도이다. 스억대, 수십억대를 호가하는 아파트라도 재질, 디자인, 인테리어 등이 월등 우수한 것도 아니다. 선진국의 부촌과 비교하면 아파트의 수준과 생활의 질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도 신흥부자들이 몰려 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30쪽)

열심히 일을 하여, 상향 평등을 추구하면 강남에 다 살 수 있다? 아니 미국의 부자를 보라, 우리도 될 수 있다.

앞서서 말했지만(반복, 강조) 지은이는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무시하고, 열심히 하면 다 된다는 아주 단순논리로 접근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 줄로 쓰면 이해가 가기 쉬우니 글을 돌려쓴다. 어려운 말을 만들어내고, 남의 입을 자기 생각인 냥 말한다.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읽어내고, 우리 사회가 제로섬게임인지 나눔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회피한 점은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고의적 실수]라고 생각된다. 지은이는 너무 높은 자리에서 세상의 평등을 이야기 한다.

솔직히 나는 책을 다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30여쪽을 읽고, 그의 글쓰기와 세계관이 나와는 전혀 다른 별나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글쓰기를 한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1. 비교는 선진국과 한다. (미국 등.... 그들의 부와 부정부패)
2. 이론을 뒷받침하면 되지, 증거는 필요없다.(1960년대에서 90년대의 경제발전 시야)
3. 비판을 받을 때에는 감정적으로 열심히 변론한다. 2번에 말한 것처럼 증거는 없다.(한국인의 삼성을 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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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5-01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구성원 상당수가 이민인데 이들이 자유를 찾아서 왔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처음 출발은 종교적 나중에는 경제적,사회적 자유를 위해. 당시 유럽이 혁명에 탄압을 가하면서 중간 이하층에서 의지가 강한 사람이 대거 이동했고 이것이 큰 자원이 되었다고 합니다만.
또 한국의 평등주의는 박정희 시대의 개발 패러다임이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고 모두가 같은 수준의 기회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수백배에 달하는 경제성장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가졌죠. 한데 이렇게 성장이 있고 나면 상위에 올라선 사람들은 새로운 경쟁질서를 원합니다. 자신이 계속 그 자리에 머무는.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 행위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교육차별화라고 보입니다. 크게 보아 구별짓기의 하나인 이 행위는 정부 정책을 교묘하게 활용합니다. 이해찬이 처음 발상은 단순하게 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서 훨씬 사교육이 강화되고 머리 좋은 일반인들의 진학이 막히죠. 논술,본고사에 대한 분석에서 보여주셨듯이.
송교수의 좌우를 넘나드는 성격에 비교해보면 점수가 너무 짜지 않으신가요? ^^

열린사회의적 2006-05-02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답글 고맙습니다. 우선 댓글에 대한 답변을 적는 것이 예의이고 제 변명인 듯 하여... 몇 자 더 붙여 봅니다. 미국의 이민자에 관한 문제. 과연 그들의 자유 의지가 미국을 강하게 했다고 했을 경우, 미국의 자유는 왜곡된 자유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땅에서 힘겨워 남의 땅에 왔는데.... 남의 땅 사람과 함께 살 생각을 하지 않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렸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미국의 자유정신은 힘에 의한 자유라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즉 무력에 의한 자유가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만들어 놓으니, 미국의 차별과 무력은 이야기 하지 않고 자유만 이야기하는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와 같이 흐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잘 살아 보세라고 했기에 이 만큼 살 수 있다는 것은 틀린 경우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좁은 방에서 피땀흘렸기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것입니다. 몇 개의 회사가 대한민국을 일으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국가적 정책과 추진력등이 민중의 노동력과 쌍두마차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은이의 글을 처음 읽었고, 다 읽지를 않습니다.
지은이는 머릿말에서 자유와 평등은 경제적 원동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평등이 내기 힘든데, 니가 배부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발목잡는 평등은 옳지 못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네 친구가 잘 되면 나도 잘 될 수 있다라고 자신감을 가지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과 헤게모니, 제로섬 게임등은 함구합니다. 이는 님께서도 생각하시겠지만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언어를 누가 쓰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여 다 같이 잘 살아보세라고 말하는 것과 배부른 자가 열심히 일하면 너희도 우리같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천지차이입니다. 피라미드 회사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흔히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지은이의 이야기가 피라미드 사장님의 말처럼 들렸다는 점입니다. 또한 머릿말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좋게 바라보면서 자본주의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불문률이 있고, 돈은 벌면 족하다는 물질만능주의의 시선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은이는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앞서서 말했지만 지은이의 글은 감정적이며, 실증적 증거가 없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합니다. 모든 논리가 자기 입맛대로 맞춰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느낌은 입맛에 맞춰진 글쓰기입니다. 그의 직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는 글쟁이로서, 지은이라서 송호근이라는 이가 있습니다. 긴글을 화답하여 주셔셔 정말 고맙습니다. 제 답변이 조금이라도 설득력이 있었으면 하는 욕심으로 글을 마감합니다. 항상 재미나고 행복하세요^^

사마천 2006-05-02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민지에서 만들어진 착취로 선진국 노동자에게 분배해주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이런 문제가 어렵더군요. 인디언에게서 빼앗은 땅을 유럽에서 넘어온 가난한 이민자에게 분배하는 행위가 오클라호마, 텍사스 등에서 발생했습니다. 인디언 학살을 보자면 슬픈 영화가 만들어지고 이민자의 자유 쪽을 보면 톰 크루주 나왔던 Far and away인가 같은 낭만적 영화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만을 봅니다. 한쪽에서는 자유와 정의의 역사가 미국사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착취와 강탈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편화하기란 쉽지 않더군요. 한국도 매한가지인게 조정래의 한강을 보면 기층민중의 소외감이 진하게 느껴지지만 재벌들이 편찬한 기업사를 보면 자신감과 성취의 역사입니다.
다음으로 송교수 논점 부분은 분명 님이 말씀하신 비판도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어느 정도 기회가 불평등해져가는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찬양은 도그마적으로 보여집니다.
단 변화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한 사회의 내부적 갈등을 통제하며 국가간 경쟁에 나서자 이런 논법도 일부 가능합니다. 장하준의 논리인데 멀리 보면 독일의 후발자본주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합니다.

아르미안 2006-06-24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 있는 토론 내용이 두분 다 모두 좋네요. 저도 사서 읽고 여기에 한번 끼여볼랍니다. 열린사회의 적님과 사마천님 두분 글 잘 읽었습니다.
 
에코토이, 지구를 인터뷰하다 - 태양, 물, 바람과 함께하는 좌충우돌 생태 여행
리오넬 오귀스트.올리비에 프뤼쇼.토마 가이 지음, 고정아 옮김 / 효형출판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여행,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내 눈을 가지고 그곳에 가서 무엇을 찾는다면, 내눈에 담긴 자화상만 담게 된다. 하지만 나를 버리고 그곳에 서면, 자연이 건내는 수많은 모습을 담게 된다. 이토록 여행이라는 것은 무엇을 담는 여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지은이도 여행을 한다. 그들의 목적은 지구를 한바퀴 돌며, 대안적 문제-환경 단체를 만나 화석 연료를 대체하고 자연친환경적인 에너지를 탐구한다. 책에 갇힌 이론서가 아닌, 현장에 가서 그들을 만나 사람과 이야기 나누며 토론하는, 이 얼마나 가슴설레이는 여행인가! 지은이가 담을려고 하는 여정의 기록은 어느정도 구체성도 띄고 있다. 그럼 그들의 여행을 따라가볼까.

나는 두 가지에 가슴 설렌다. 내가 꿈꾸는 여행을 그들이 먼저 한 점과 환경단체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하는 점이다. 여행은 규칙이 없다.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오줌 주는 것도 정해진 시간이나 장소가 없다. 더구나 사람과의 만남은 전혀 생각밖의 일을 만들어 내고, 떠나기전에 무수히 기록하고 기획한 금(線)은 지렁이를 몇 마리나 불러오곤 한다. 이렇게 변수가 많기에, 때때로 놀라곤 하면서 나름대로 적응을 해간다. 그리고 환경단체를 만나 직접 보고 내가 묻고 싶은 물음을 하고 그들과 토론을 한다. 전지구적인 생각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대안적 생태를 궁리하고 나중에는 내가 선 땅에 집을 짓는다. 눈에 담는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환경단체들은 나에게 선생이 되어 소중한 경험을 들려줄 것이다. 이는 돈으로 혹은 책에서 구할 수가 없는 산 지식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40여개 이상의 환경단체를 만나며 느낀 점이나 미래에 대한 비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309쪽)"

솔직히 부럽다. 40여개의 환경단체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그들은 어떤 비전을 가슴에 품었을까? 하지만 내가 이 글자가 나오는 동안 읽는 내내 지은이는 지루한 여행기만 늘어놓는다. 즉 그들은 에코토이라는 자동차를 타고 환경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또한 삶에 대한 성찰은 없으며, 무지개 보다 고운 풍경은 '좋다'라고 동의 반복으로 모든 색과 빛을 드러낸다.

자동차의 매연 연기는 빼고서라도, 자동차는 문명의 이기가 지니는 닫힌 공간의 상징성이다. 즉 그들은 편리성과 시간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고 할지라도 자동차 바퀴에 깔린 수많은 생명을 인지하지 못한다. 아울러 자동차는 문을 닿으면 내 안의 공간을 만든다. 즉 바깥과 안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나와 타자를 구분한다. 내가 자동차에 내리지 않는한 자연과 사람은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자동차 안에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곱다라고 할 수가 있다. 이는 눈에 보이는 부분이기에... 하지만 사람은 이렇게 쉽게 말할 수가 없다. 사람은 겪어야 그 맛을 알 수가 있다. 지은이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이 없다. 그들은 자동차가 없기라도 하면, 지구에 구멍이라도 난냥 호들갑과 전전긍긍을 한다.

"이런 우울한 풍경 앞에서, 가까운 미래에 지구 전체가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52쪽)"

사막을 자동차로 건너며, 지구 전체가 사막화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솔직히 이건 코미디다. 패스트푸드를 먹으며 지구를 걱정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하며, 지구의 사막화를 걱정한다. 나는 이런 부분에서 지은이의 세계관을 훔친다.

'그들은 40여개 이상의 환경단체를 만나서' 얼마만큼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몰라도, 진정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정담(情談)을 나누지는 못했으리라 짐작하는 이유가 위와 같다. 무지개 보다 고운 풍경이 '곱다'라는 이유로 줄서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앞서서 말했지만 환경단체와 나눈 이야기는 몇 몇, 아주 사소한 일상이며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여행담이다. 즉 우리는 환경을 생각하는 여행을 했다며 소리치고는, 우리의 여행담을 들어주세요라고 말한다. 화려하게 옷을 입고 나를 유혹한다. 그러나 조용히 도서관에 앉아 그와 알몸으로 이야기를 나누니, 지루한 여행기가 아닌가. 이런 Љ장!!

봄에 본 뱀의 다리, 잠시 그 이야기를 하려한다. 지은이들의 기획은 정말로 부럽다. 하지만 여행기 따로 연구 보고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안적인 문제에는 접근이 눈꼽만큼 있다. 즉 에코토이를 타고 간 1년 동안의 여행기라는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지만 여행기는 여행기인데 설레임이 없다. 너무나 지루한 여행기다. 왜 그럴까? 그리고 숱한 낯선 이름에 그림(지도)하나 없음은 예의가 아니다. 나는 분명 대안적 물음으로 그 답을 찾아나선 지은이를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여행 추억만 잠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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