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 SERI 연구에세이 47
송호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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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머리말에서 토크빌의 말을 빌려, 미국와 러시아의 강대국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한다.그리고 강대국을 지향할 수 있도록 한 토대는 자유와 평등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평등은 강대국으로 들어서기 위해 꼭 잡아야 할 동앗줄인 동시에 사회 윤리적인 면에서도 지향해야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즉 자유와 평등은 강대국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비상구이다.

"향후 강대국으로 등장할 국가는 미국과 러시아다. 미국은 자유와 평등에서 우러 나오는 자발적인 힘으로 강대해질 것이고, 차르 체제의 러시아는 집단적 동원이 국력의 원천이 될 것이다.(토크빌)"

나는 머리말을 읽으면서 몇 가지의 의문이 생겼다.

1. 자유와 평등이라는 단 한 줄로 전체를 말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를 피해갈 수 있나?
2. 실제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구조로 다져졌는가? 실증적 기록에 대한 의구심?
3. 평등과 자유, 그리고 집단적 동원을 동의어로 볼 수 있는가?
4. 혹시 자유와 평등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5. 미국이 지닌 강대국의 위치는 도덕적 우위에 존재하는가? 즉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등과 자유를 통해 강대국이 되었으며, 앞으로 계속 향해를 할 것인가?


위와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은 지은이의 다음과 같은 생각때문이다.

"자유주의로 견제된 평등이념, 시민 사회적 윤리와 교양으로 정제된 평등 이념,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6쪽)

"평등주의는 발전의 원동력이다.
"(6쪽)

다시 책을 찬찬히 읽어간다. 지은이는 몇 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 즉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문제점은 서로 잘 살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잘 되면 비방하거나 배 아파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면도 보여준다. 춘천이라는 동네를 들어 누구나 열심히 하면 잘 살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래의 글은 30쪽 이내에 그의 글을 읽으면서 가치관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이다.

가설(이 가설은 지은이의 세계관을 나름대로 정리할 글임)

1.
한국의 평등주의가 심하며, 이 격차가 '관용의 수준(12쪽)'을 넘어서면 자아의 상실로 이어져-불평등에 대한 상처를 치유할 다른 가치관을 찾지 못해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한국인이 지향하는 평등주의가 '하향 지향'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는 "특정 집단이나 계층에 이익이 돌아갈 기미가 보이는 정책은 바로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 한국(13쪽)"이기 때문이다. 한줄 요약, 못 살면 다같이, 정부의 복지 정책은 특정집단의 특혜!!

2.
개천에서 용나면, 개천 주인이 이름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장이 드높인다. 즉 위즈가 혼열인으로 성공하니, '뒤에는 [대한민국]이 있습니다'라는 식이다. 이는 일차적 연고주의이지만, "강한 성취동기"로 전이 되어 우리도 함께라는 자긍심자신감을 심어준다. 즉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 '우리도 그들처럼 잘 살아보자'라는 구호로써, '자유주의의 생산원료'가 되어 발전 가능성의 실현화 모델이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한국에서 그것은 연고주의와 결합해서 여러 형태의 균열구조를 낳았다.'(16쪽)

3.
"서울대 통합형 논술이 본고사에 해당한다."(17쪽)

이는 나쁜 뉴스이다. 즉슨,

"통합형 논술은 결국 사교육비를 댈 수 있는 부유층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은 평등주의적 발상이다."(18쪽)

저소등측에서는 이만한 인프라를 구축할 수 없고, 돈 많은 어느 집에서, 돈으로 교육을 시켜 서울대에 보내는 것은 불평등이며, '부유층에 유리하다'는 판단은 평등주의적 정의가 된다. 즉 '서울대 통합형 본고사'를 통해 우수한 인재를 가려내고, 이들이 다시 한국의 자유와 평등, 경제 발전의 최전선에서 나를 버리고, 우리를 위해 일하는가에 대한 고민보다, 내가 들어갈 기준이 너무 높다는 인식에 따른 평등문제인 것이다. 다시 하향 지향 정의를 내린다.

4.
"'성공한 너'와 '평범한 나', '잘된 너'와 '못된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좁히려는 심점, 나도 너 처럼 될 수 있다는 동일화 열망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발전을 낳는다." (23쪽)

실증적 보기로써, 춘천시 서변, 약 2000호에 박사가 100명이나 배출되었으니 이 보다 더 좋은 증거는 없다. 하지만 4인 기준으로 보면, 200*4는 8000명, 어르신 빼면 4000명, 4000명 가운데 100명이 박사?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하나?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라는 문제가 나온다. 이는 책 전체에 큰 문제가 되는 반면에 지은이는 무시한다.

5.
부정부패가 만연한 국가는 많다. 지배층이 부도덕하고 사회적 책무를 이행하지 않는 국가도 많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들이 사회적 존경을 상실한다거나 극심한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다른 나라가 그렇게 한다고 우리고 그렇게 해라. 미국의 남의 나라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하니, 우리도 따라 해라(?) 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많이 벌면 좋다. 또한 부정부패가 만연한 국가와 사회적 존경 사이의 관계는 무관하다(?)

지은이가 말하는 나라는 얼마나 많은지 정말 궁금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인가에 대한 물음도 따라온다. 하지만 그는 머릿말에서 토크빌의 입을 빌렸고, 평등은 좋은 거라고 말했다.

* 세계관 (지은이가 그려내는 평등주의, 내 눈에 비친 모습)
우리 나라 사람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 한다. 하지만 나도 열심히 일해서 땅을 왜 안살까라고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도 열심히 일해 땅을 사자'라는 일념으로 책 한 권 내었다.하양 평등주의를 지양하고, 모두가 부자 되는 상향 평등주의를 지향하자!!

'경제적 불평등'과 '자유'라는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 하지만 자본주의의 피라미드 구조제로섬 게임 같은 어려운 말은 쓰지 말자. 또한 조금의 부정 부패는 어느 나라에도 있으니, 내 돈벌이가 부정과 부패와 손을 잡았다 하더라도 사회적 존경심을 잃을만큼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 너무 깨끗해서 그렇다.

마무리,
순진한 이는 열심히 공부하고 땀흘리는 사이(-그는 열심히 땀흘리고 돈을 버는게 가장 좋다고 12년 동안 배웠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도 그렇게 사셨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이들은 펜대를 굴리며 돈을 눈두덩이 처럼 굴린다. 어릴 때에는 같이 자라기도 했지만 서울에 올라가면, 땀을 흘리고 돈을 버는 짓이 바보 같다는 생각에 빠진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가 있는데, 하루종일 땡볕에서 피 뽑고 밭매는 짓을 왜 해. 어릴 때에는 같은 동네에서 자랐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한 명을 땅을 일구며 대한민국을 가꾸고, 한 명은 서울로 올라가서 돈을 굴리며 대한민국을 가꾼다.

위험한 책이다. 독이 될 수 있고, 약이 될 수 있는...

나는 그의 평등주의가 단순한 논리로써, 성취 동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자신감'을 불어넣는 책이라는 것을 안다.

"정부도 부촌 형성을 정책적으로 막았다. 현재는 강남 지역이 부촌이 되었지만 인프라나 거리의 모습은 부촌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고 볼 수 없다. 다만 학군이 좋고 사설학원이 밀집해 있으며 다른 지역보다 약간 나은 문화시설과 쇼핑센터가 몰려 있는 정도이다. 스억대, 수십억대를 호가하는 아파트라도 재질, 디자인, 인테리어 등이 월등 우수한 것도 아니다. 선진국의 부촌과 비교하면 아파트의 수준과 생활의 질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도 신흥부자들이 몰려 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30쪽)

열심히 일을 하여, 상향 평등을 추구하면 강남에 다 살 수 있다? 아니 미국의 부자를 보라, 우리도 될 수 있다.

앞서서 말했지만(반복, 강조) 지은이는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무시하고, 열심히 하면 다 된다는 아주 단순논리로 접근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 줄로 쓰면 이해가 가기 쉬우니 글을 돌려쓴다. 어려운 말을 만들어내고, 남의 입을 자기 생각인 냥 말한다.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읽어내고, 우리 사회가 제로섬게임인지 나눔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회피한 점은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고의적 실수]라고 생각된다. 지은이는 너무 높은 자리에서 세상의 평등을 이야기 한다.

솔직히 나는 책을 다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30여쪽을 읽고, 그의 글쓰기와 세계관이 나와는 전혀 다른 별나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글쓰기를 한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1. 비교는 선진국과 한다. (미국 등.... 그들의 부와 부정부패)
2. 이론을 뒷받침하면 되지, 증거는 필요없다.(1960년대에서 90년대의 경제발전 시야)
3. 비판을 받을 때에는 감정적으로 열심히 변론한다. 2번에 말한 것처럼 증거는 없다.(한국인의 삼성을 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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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5-01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구성원 상당수가 이민인데 이들이 자유를 찾아서 왔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처음 출발은 종교적 나중에는 경제적,사회적 자유를 위해. 당시 유럽이 혁명에 탄압을 가하면서 중간 이하층에서 의지가 강한 사람이 대거 이동했고 이것이 큰 자원이 되었다고 합니다만.
또 한국의 평등주의는 박정희 시대의 개발 패러다임이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고 모두가 같은 수준의 기회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수백배에 달하는 경제성장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가졌죠. 한데 이렇게 성장이 있고 나면 상위에 올라선 사람들은 새로운 경쟁질서를 원합니다. 자신이 계속 그 자리에 머무는.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 행위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교육차별화라고 보입니다. 크게 보아 구별짓기의 하나인 이 행위는 정부 정책을 교묘하게 활용합니다. 이해찬이 처음 발상은 단순하게 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서 훨씬 사교육이 강화되고 머리 좋은 일반인들의 진학이 막히죠. 논술,본고사에 대한 분석에서 보여주셨듯이.
송교수의 좌우를 넘나드는 성격에 비교해보면 점수가 너무 짜지 않으신가요? ^^

열린사회의적 2006-05-02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답글 고맙습니다. 우선 댓글에 대한 답변을 적는 것이 예의이고 제 변명인 듯 하여... 몇 자 더 붙여 봅니다. 미국의 이민자에 관한 문제. 과연 그들의 자유 의지가 미국을 강하게 했다고 했을 경우, 미국의 자유는 왜곡된 자유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땅에서 힘겨워 남의 땅에 왔는데.... 남의 땅 사람과 함께 살 생각을 하지 않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렸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미국의 자유정신은 힘에 의한 자유라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즉 무력에 의한 자유가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만들어 놓으니, 미국의 차별과 무력은 이야기 하지 않고 자유만 이야기하는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와 같이 흐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잘 살아 보세라고 했기에 이 만큼 살 수 있다는 것은 틀린 경우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좁은 방에서 피땀흘렸기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것입니다. 몇 개의 회사가 대한민국을 일으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국가적 정책과 추진력등이 민중의 노동력과 쌍두마차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은이의 글을 처음 읽었고, 다 읽지를 않습니다.
지은이는 머릿말에서 자유와 평등은 경제적 원동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평등이 내기 힘든데, 니가 배부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발목잡는 평등은 옳지 못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네 친구가 잘 되면 나도 잘 될 수 있다라고 자신감을 가지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과 헤게모니, 제로섬 게임등은 함구합니다. 이는 님께서도 생각하시겠지만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언어를 누가 쓰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여 다 같이 잘 살아보세라고 말하는 것과 배부른 자가 열심히 일하면 너희도 우리같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천지차이입니다. 피라미드 회사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흔히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지은이의 이야기가 피라미드 사장님의 말처럼 들렸다는 점입니다. 또한 머릿말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좋게 바라보면서 자본주의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불문률이 있고, 돈은 벌면 족하다는 물질만능주의의 시선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은이는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앞서서 말했지만 지은이의 글은 감정적이며, 실증적 증거가 없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합니다. 모든 논리가 자기 입맛대로 맞춰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느낌은 입맛에 맞춰진 글쓰기입니다. 그의 직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는 글쟁이로서, 지은이라서 송호근이라는 이가 있습니다. 긴글을 화답하여 주셔셔 정말 고맙습니다. 제 답변이 조금이라도 설득력이 있었으면 하는 욕심으로 글을 마감합니다. 항상 재미나고 행복하세요^^

사마천 2006-05-02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민지에서 만들어진 착취로 선진국 노동자에게 분배해주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이런 문제가 어렵더군요. 인디언에게서 빼앗은 땅을 유럽에서 넘어온 가난한 이민자에게 분배하는 행위가 오클라호마, 텍사스 등에서 발생했습니다. 인디언 학살을 보자면 슬픈 영화가 만들어지고 이민자의 자유 쪽을 보면 톰 크루주 나왔던 Far and away인가 같은 낭만적 영화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만을 봅니다. 한쪽에서는 자유와 정의의 역사가 미국사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착취와 강탈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편화하기란 쉽지 않더군요. 한국도 매한가지인게 조정래의 한강을 보면 기층민중의 소외감이 진하게 느껴지지만 재벌들이 편찬한 기업사를 보면 자신감과 성취의 역사입니다.
다음으로 송교수 논점 부분은 분명 님이 말씀하신 비판도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어느 정도 기회가 불평등해져가는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찬양은 도그마적으로 보여집니다.
단 변화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한 사회의 내부적 갈등을 통제하며 국가간 경쟁에 나서자 이런 논법도 일부 가능합니다. 장하준의 논리인데 멀리 보면 독일의 후발자본주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합니다.

아르미안 2006-06-24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 있는 토론 내용이 두분 다 모두 좋네요. 저도 사서 읽고 여기에 한번 끼여볼랍니다. 열린사회의 적님과 사마천님 두분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