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훔친 소설가 -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국내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타인의 상식을 판단할 때 시금석 삼아 “관우 아세요?”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삼국지의 그 관우 말이다. 관우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한 사람의 상식 전반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이런 몰지각한 행동이 그 커뮤니티 유저들 사이에서도 잠깐 논쟁거리가 되었던 모양. 그런데 이런 발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황당하다. 어떻게 해야 특정 질문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판단한다는 추접스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길게 볼 거 없다. 삼국지가 ‘필독서’로 읽히는 사회에서 이런 몰지각한 이들이 나타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 어떤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도 그것이 권위로 ‘읽히게’ 되는 순간, 작품이 본래 지닌 훌륭한 점은 지워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관우 아세요?” 따위의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질문이랍시고 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되는 것이다.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 ‘필요에 따라 읽을 책’이 있을 뿐. 저마다 선 위치가 다르고 살아가는 환경도 다른 법. 누군가에게 좋은 책이 또 누군가에게는 쓰레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정말 읽어야 하는 책이라면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해주는 게 맞지 않을까? 더 나아가 독서가 좋은 것이라면 어떤 면에서 좋은지, 또 읽는다는 것이 왜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밝히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어째서 독서 목록 따위를 지정해서 읽기만을 강요할까? 학교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책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진다’, ‘책을 많이 읽어야 커서 부자가 될 수 있다’, ‘저 책은 읽으면 안 되고 이 책은 무조건 읽어라’, ‘이 책이 요즘 유명하니까 읽어라’ 등등.


이유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 책이란 그저 읽어야만 하는,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권위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주입식 교육은 ‘필독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독서를 강요하고 학생들은 책에 대한 감상마저 ‘독후감’이라는 숙제로 제출해야만 한다. 그 누구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나 문학의 필요성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 문학은 일종의 존엄. 학생 가운데 하나가 혹여나 문학의 필요성을 따진다면 십중팔구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디서 건방진 게 감히!” 라는 핀잔이 돌아온다. 이따위로 ‘책’을 배웠으니 성인이 되어서도 자발적 독서를 할 리 없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독서 무용론과 한국 성인의 낮은 평균 독서량은 학교가 국민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문학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로 석영중 같은 작가. 『뇌를 훔친 소설가』는 지금껏 학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못했던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를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한 저작이다. 흥미로운 것은 겨우 20세기에 와서야 밝혀진 인간의 신경과학적 행동들이 당시 문학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는 당시 문호들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의미다. 저자는 거울 뉴런, 기억 저장소, 몰입, 뇌가소성 등 다양한 신경과학 이론을 통해 작게는 문학 속 등장인물부터 크게는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문학 그 자체를 설명하려 드는 것은 아니다. 신경과학은 어디까지나 현재 진행형인 데다 아직 연구 초기 단계인 분야이기에 애당초 저자는 이것으로 문학을 설명하려는 무리수는 두지 않는다. 도리어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저자가 자신의 전공인 러시아 문학에 주안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러시아 대문호들의 문학 작품들을 두루 소개받을 수 있고 거기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신경과학으로 풀어주기에 쉽게 다가온다. 일종의 각론인 셈. 나는 감당하지도 못할 분야를 방대하게 다루다 변죽만 울리고 마는 책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하여, 이렇게 자신 있는 분야로 초점을 맞춘 각론이 내겐 더 맞는다. 석영중 작가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바로 한국에 있다는 것은 그래서 내겐 마치 축복과 같다. 독서를 강요하기만 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이 나라 교육자들과 기성세대는 이 책을 읽고 잠시나마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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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자 2016-02-20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공감되네요

5DOKU 2016-02-20 23:40   좋아요 2 | URL
다행이네요. ^ㅡ^

비로그인 2016-02-20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를 왜 해야할까? 라는 생각에 잠시 잠깁니다. *^

5DOKU 2016-02-20 23:42   좋아요 0 | URL
저마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저는 읽지 않으면 제 안에서 목소리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yamoo 2016-02-2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난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5DOKU 2016-02-20 23:42   좋아요 0 | URL
군더더기가 아직 많습니다. ㅠ_ㅠ 칭찬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보여줘라, 아티스트처럼 - 당신의 능력이 빛을 보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10가지 방법
오스틴 클레온 지음, 노진희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무언가를 잘하고자 하면서 배우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쓰기가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다. 모두 글을 잘 쓰고 싶어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 이상한 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사람들이 쓰지는 않고 읽기만 한다. 잘 쓰려면 물론 어느 정도는 다독을 해서 좋은 문장을 골라내는 능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지만 백날천날 읽기만 하면서 잘 쓰고 싶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야말로 글을 글로 배우는 격. 당연한 말이지만 잘 쓰려면 쓰는 게 먼저다. 그것도 많이. 쓰지 않고서는 ‘잘’ 쓸 수가 없다. 왜 인풋을 하는가? 결국 아웃풋을 하기 위해서다. 안 그런가? 뭐 인풋 그 자체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을 듯싶다. 다만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굳이 눈에 보이는 어떤 성취가 아니더라도 결국 활용, 아웃풋을 하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열심히 배웠으니 이제 그것을 보여줄 차례인 것이다.


『훔쳐라, 아티스트처럼』이 ‘인풋’을 위한 책이었다면 이번에는 ‘아웃풋’이다. 지금까지 이것저것 많이 훔쳤던 이유는 바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저자 오스틴 클레온은 먼저 ‘잘’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웃풋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잘’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잘’ 보여주려다 ‘안’ 보여주고 마는 게 다반사라는 사실. 그러니까 그냥 그 부담감 내려놓고 일단 뭐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저자는 말한다. ‘진짜 중요한 차이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뭐라도 하는 것에 있다.’(p.24)고. 나는 보여줘야 할 대상이 반드시 남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남들에게 보여주기가 민망하다면 ‘나’에게 보여주면 그만 아닌가? 요지는 어쨌든 뭐라도 하라는 것이다. 잘하든 못 하든 뭔가를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작품 활동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웃풋은 곧 ‘결과물’이라는 건 통념일 뿐이다. ‘과정’ 역시 엄연한 아웃풋이다.




“쌓아두는 것의 문제는 그 축적물에만 의지해 살게 된다는 점이고, 그러면서 점점 당신이 고리타분해진다는 점이다. 쌓아둔 모든 걸 버리고 당신에게 아무것도 안 남으면 어쩔 수 없이 새롭게 보고, 자각하고, 다시 채워 나가게 된다. 더 많이 버릴수록 더 많이 얻게 된다.” - 폴 아덴


p.80



책을 읽다 보면 아웃풋에는 실로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작게는 하루하루 나만의 프로젝트 일지 작성하기부터 크게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그룹을 만들어 협업해보기까지. 여기서 핵심은 바로 ‘공유’. 저자는 역사 속 천재들이 대개 어느 집단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는 그들의 결과물이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 그들은 서로의 작품을 피드백하며 용기를 얻고, 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을.


아웃풋 과정에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 일테면 표절이나 비난 같은 걱정거리에 대해 저자가 던지는 몇 가지 충고가 좋다. ‘비법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당장 경쟁자가 붙는 것은 아니다. 마스터의 기술을 안다고 해서 곧장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p.124)이라거나 ‘비난 하나하나가 전부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가능성이 된다. 어떤 비평을 받게 될지는 컨트롤할 수 없지만,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지는 컨트롤할 수 있다’(p.159) 같은 말들은 비단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


특히 ‘배고픈 아티스트’라는 낭만적 환상을 극복하라는 충고가 와 닿았다.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아니, 가난해야만 훌륭한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고정관념. 당신이 이 진부한 환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한평생 돈만 저주하다 그 가난이라는 진창 속에서 죽게 될 거라고 말이다. 저자는 돈이 창작을 타락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의미 있는 문화재나 예술 작품들은 실제로 돈 때문에 만들어진 경우도 많다고 한다. 공감. 나는 돈과 예술에 대한 이분법이 도리어 예술을 망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목적이 오로지 돈이라면 문제겠지만 돈이 없으면 내가 좋아하는 일도 하지 못하는 시대에 여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지녀야 할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물론 생과 사를 논하는 순간에서 걸작이 탄생한 사례도 있다. 근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의 삶이 좀 더 여유로웠다면 더 나은 걸작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책을 읽고 완벽이라는 부담과 가난이 곧 예술이라는 환상을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뭐라도 해보자 하는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 아티스트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서 탄생한다는 걸 알게 됐다면 망설이지 말고 아웃풋이다. 쌓아두지만 말고 이제는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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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서유기 4 대산세계문학총서 24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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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자금 홍호로(紫金紅葫蘆)와 양지옥 정병(羊脂玉淨甁)으로 유명한 금각대왕, 은각대왕 형제 그리고 말미에 잠깐 등장하는 우마왕과 나찰녀의 자식 홍해아 등. 슬슬 이름난 악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개는 3편에서 인삼과를 먹은 삼장을 잡아먹기 위해 일행을 공격하는 요괴(삼장법사를 잡아먹으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소문이 요괴들 사이에 돈다)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이들이 관세음보살의 설계(?)라는 설정. 삼장 일행의 여정이 너무 쉬운 것(?)을 염려한 관세음보살이 일테면 난이도 조절을 한 셈. 3편에서 느꼈던 게임 개발자(관세음보살)와 게이머(삼장 일행)의 관계가 자꾸만 떠올라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편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손오공이 별명을 바꿔가며 금각, 은각 형제를 속여먹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본래 별명 ‘손행자’를 행자손이니, 자행손이니 순서만 바꿔 삼 형제 행세를 하는데 금각과 은각은 이걸 또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는 장면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겠다. 금각, 은각 에피소드의 전반적 분위기가 코믹 그 자체다. 손오공이 두 형제의 졸개를 속여 보배를 바꿔치기 하는 장면 역시 그렇다. 마치 한 편의 콩트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두 형제는 원래 태상노군의 금로와 은로를 맡아 관리하던 동자들이었던 것. 꼬맹이들이 일으킨 소동답게 순박한 면이 있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안타깝게도 금각, 은각 역시 관세음보살의 설계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를 한탄하는 손오공의 모습마저도 참 재밌다.




원, 보살님도 너무하시지! 이 손오공을 풀어주실 때만 하더라도, 일심전력으로 당나라 스님을 안전하게 모시고 서천 땅으로 가서 경을 얻어오라고 하시며, ‘길이 험난하여 나아가기 어렵더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위급한 지경에 처하게 되거든 내가 친히 가서 구해주겠다’ 하시더니, 이제 와서 도리어 요괴 마귀들을 시켜 우리 갈 길을 가로막고 이렇게 훼방을 놓을 수 있단 말이오? 이야말로 언어도단이고말고! 그러니 보살님도 어지간히 사나운 팔자를 타고나셔서 평생토록 남편감을 못 만나셨지 뭔가. 


p.290



사족 하나만 붙이자면 몇 편인지 가물가물한데 변신술을 쓰는 손오공에 대한 묘사가 ‘변검’과 매우 흡사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번 편에서도 역시 그 변검을 묘사한 듯한 ‘손바닥이 문지르고 지나간 자리에는 손행자의 본래 모습이 여실하게 드러났다.’(p.57) 같은 구절이 등장하길래 신기해서 검색을 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변검술은 19세기에 와서야 등장한 중국의 가면극이란다. 오승은이 서유기를 쓴 시기가 16세기인데 어째서 소설 속에는 변검술처럼 보이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일까? 역자 임홍빈 씨의 자의가 들어간 해석일까? 아니면 그저 신뢰성 떨어지는 인터넷 정보일 뿐일까? 누가 속 시원히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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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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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주 잠깐이나마 외부인의 시선을 견지(見地)해본 사람은 내부의 문제점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이게 마련인 듯하다. 홍세화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을까? 프랑스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그에게 한국 사회가 처음으로 건낸 말은 “여러분 부―자 되세요! 꼭이요!”라는 자본의 목소리였다. 유행어가 될 만큼 국민은 그 목소리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내남없이 지갑을 열어 응답했다.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고국을 떠나 있었던 세월 동안 한국이라는 나라의 어딘가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타국 생활을 해본 사람들 가운데서도 제3의 눈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뉜다. 전자는 내부에서 볼 수 없는 건물의 균열을 외부를 비롯한 다양한 위치에서 파악하고 사유할 줄 아는 데 반해 후자는 잠깐 경험한 이상적인 건물의 내부와 현재 자신이 머무르는 건물의 내부를 비교하는 데서 그치고 만다. 결국 ‘지 자랑’일 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관심 밖이다. 아마도 홍세화는 전자에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그는 내부인이자 외부인의 시선으로 이 나라의 교육에서부터 노동, 주류와 비주류, 앎과 무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을 세세히 훑어 내려간다. 대개 그가 다녀온 프랑스와의 비교로 채워져 있긴 하다. 다만 단순히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 나온 비교라 보기에 그의 비판은 논증의 구조는 견고하고 사유의 날은 뾰족하다.


책을 읽다 보니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는 물음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문제는 오늘 사회가 이 책이 나온 시점보다 더 절망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줄곧 말하는 ‘생각의 주인’으로 살기가 이제는 정말이지 힘들기만 한 세상이다. 물신 지배로 부추긴 계급 사회와 교육 획일화를 통한 세대 양극화는 자본과 정치가 합작한 최고의 발명품이자 이데올로기. 기업은 더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 소비자로 하여금 원해서 지갑을 열었다는 착각에 빠뜨리고 정치는 오늘의 사회를 개선할 의도가 전혀 없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으레 그렇듯이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이란 사실을 상기시킬 다양한 정치적 공세를 펼쳐댄다. 이는 삶의 불안감을 조성하고 보수를 집결시키는 진부한 레퍼토리지만 유권자들은 내가 던지는 표가 누구의 판단에서 나왔는지는 전혀 의심하지 못한다.


가령 그들은 개성공단 폐쇄가 정부의 ‘합리적’ 판단이라 믿는다. 언제 북한이 핵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마당에 돈줄(개성공단)을 계속 방관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받을 경제적 타격이 억 단위든 조 단위든 무슨 상관이랴. 오로지 “니들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로 대변되는 공포만이 현재 사회 최고 역점으로 부각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노인들은 당대 정치의 좋은 먹잇감이다. 선동과 선거의 도구가 따로 없다. 노인들이 ‘요즘 애들’을 운운할 때 입시 제도 교육에 길든 젊은 세대는 그들을 멍청한 개 취급한다. 정작 이 세대 전쟁의 승자가 누군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전쟁의 주체는 표를 챙기고 뒤처리는 국민의 몫이다. 도래할 경제적 타격과 사회적 부작용은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부채와 같다.




우리의 애국주의는 자발성을 기대할 수 없다. 국가는 나를 지배할 뿐 나를 위해 해주는 게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외치게 하고, 애국주의를 주입시키려고 애쓴다. 학교에서는 애국을 강조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게 한다. 후진국일수록 스포츠가 '국위선양'의 도구로 동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166



이러한 세상에서 진정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까? 홍세화는 끊임없는 자문만이 정답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강조했듯 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고집하고 쉽게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더욱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 라고.’(p.16) 말이다. 독서와 토론을 통해 주체적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고 익숙한 제도 교육과 쉴새 없이 떠드는 미디어의 목소리를 부단히 의심하는 생활. 이것만이 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버리고 이 미친 세상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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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정리학 - 뒤죽박죽된 머릿속부터 청소하라!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뜨인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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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출판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3명은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뒤집으면 6.5명 정도가 1년에 책을 고작 한 권 정도 읽는다는 얘기가 된다.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그 6.5명 중 하나였다. 1년에 많으면 두세 권 정도 읽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작년(2015)에 읽은 책 권수를 합쳐보니 대략 40권 정도가 나왔다. 다독가들은 콧방귀를 뀔 수준이지만, 나에겐 비약도 이만한 비약이 없다. 그리고 내가 독서에 ‘재미’를 붙이게 된 건 어디까지나 이 책의 공이 컸다.


그때 내가 독서에 재미를 붙이지 못한 이유를 최근에 와서야 깨달았다. 첫째, 책과 친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친해질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지금 관점에서 본다면 책이라는 것도 친밀감을 쌓아야 마치 밥을 먹듯 독서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듯하다. 둘째, 집중력 부족. 이건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성싶다. 주변에 티브이니 컴퓨터니 만화책이니 온갖 재미난 일들로 가득해서 그런가 의자에 궁둥이 붙이고 1시간 이상 책 읽기가 무모한 도전처럼 느껴지는 사람 많으리라. 중요한 건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사실. 그런데 어떻게 책과 친해질 수 있었냐고?


바로 낙천적인 아침 두뇌 덕분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수면 도중 뇌를 정리한다. 일명 렘Rapid Eye Movement 수면 상태.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 우리가 맛보는 상쾌함은‘밤사이에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되어 널찍한 빈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다.’(p.45) 더불어 그 시간대 집중력이 가장 높아진다고 한다. 당시 나는 아침에 할 일이 딱히 없었다. 속는 셈 치고, 욕심부리지 말고 하루에 한 시간씩만 읽어보자 하는 심정으로 시도해보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일 년. 특별한 일이 있던 날을 제외해도 거진 하루도 빠짐없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오늘까지도 꾸준히. 무려 내가 말이다.


저자는 아침 두뇌의 활용법뿐만 아니라 창작에 필요한 여러 가지 팁을 알려준다. 이런저런 팁도 팁이지만 더 재미난 점은 저자의 ‘비유력’이다. 비유들이 하나같이 그럴싸하고 재미있다. 입시 교육에 길든 사람들을 글라이더 인간에 비유하는가 하면 오로지 배우기만 하고 활용하지 않는 사람의 뇌를 창고형 두뇌에 비유한다. 아이디어 개발 과정을 술 담그는 양조법에 비유하는 것도 특이하다. 금방 떠오른 아이디어는 바로 활용하지 말고 술을 재우듯 잠시 잊어보라는 것. 그래야 나중에 확인해봤을 때 잘 익은 술과 그렇지 않은 술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고. 이뿐인가? 거짓 좀 보태서 이 책은 거진 모든 챕터가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이렇게 비유력이 좋은 작가를 사랑한다. 나에게 좋은 책이란 곧 비유가 좋은 책이기도 하다. 혹여나 재미가 좀 없더라도 비유만 괜찮다면 그깟 별점 아낄 이유가 없다. 


비유도 일종의 창작 행위다.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게 바로 비유. 아무리 저명한 학자가 쓴 교양서면 뭐하나? 일반인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온갖 전문용어로 도배된 책이라면 그건 수면제와 다를 바 없는데. 나는 이미 이 책을 통해 그 비유의 덕을 본 독자다.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최근 이 책의 개정판(책이있는풍경 출판, 『생각의 틀을 바꿔라』)이 출간되었다고 들었다. 사실 일본에서 이 책이 나온 지는 20년도 훌쩍 지났다. 국내에서는 비교적 최근에야 알려진 모양이지만 홍보 한 번 하지 않은 책이 서점 매대를 꾸준히 비워내고 또 이렇게 개정판까지 찍어냈다는 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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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코드 2016-02-16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기좋습니다.읽고싶네요.

5DOKU 2016-02-16 13:10   좋아요 0 | URL
개정판이 나왔던데 한 번 읽어 보시죠.

3코드 2016-02-16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장바구니에담아놓을께요.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