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잠깐이나마 외부인의 시선을 견지(見地)해본 사람은 내부의 문제점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이게 마련인 듯하다. 홍세화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을까? 프랑스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그에게 한국 사회가 처음으로 건낸 말은 “여러분 부―자 되세요! 꼭이요!”라는 자본의 목소리였다. 유행어가 될 만큼 국민은 그 목소리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내남없이 지갑을 열어 응답했다.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고국을 떠나 있었던 세월 동안 한국이라는 나라의 어딘가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타국 생활을 해본 사람들 가운데서도 제3의 눈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뉜다. 전자는 내부에서 볼 수 없는 건물의 균열을 외부를 비롯한 다양한 위치에서 파악하고 사유할 줄 아는 데 반해 후자는 잠깐 경험한 이상적인 건물의 내부와 현재 자신이 머무르는 건물의 내부를 비교하는 데서 그치고 만다. 결국 ‘지 자랑’일 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관심 밖이다. 아마도 홍세화는 전자에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그는 내부인이자 외부인의 시선으로 이 나라의 교육에서부터 노동, 주류와 비주류, 앎과 무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을 세세히 훑어 내려간다. 대개 그가 다녀온 프랑스와의 비교로 채워져 있긴 하다. 다만 단순히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 나온 비교라 보기에 그의 비판은 논증의 구조는 견고하고 사유의 날은 뾰족하다.


책을 읽다 보니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는 물음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문제는 오늘 사회가 이 책이 나온 시점보다 더 절망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줄곧 말하는 ‘생각의 주인’으로 살기가 이제는 정말이지 힘들기만 한 세상이다. 물신 지배로 부추긴 계급 사회와 교육 획일화를 통한 세대 양극화는 자본과 정치가 합작한 최고의 발명품이자 이데올로기. 기업은 더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 소비자로 하여금 원해서 지갑을 열었다는 착각에 빠뜨리고 정치는 오늘의 사회를 개선할 의도가 전혀 없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으레 그렇듯이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이란 사실을 상기시킬 다양한 정치적 공세를 펼쳐댄다. 이는 삶의 불안감을 조성하고 보수를 집결시키는 진부한 레퍼토리지만 유권자들은 내가 던지는 표가 누구의 판단에서 나왔는지는 전혀 의심하지 못한다.


가령 그들은 개성공단 폐쇄가 정부의 ‘합리적’ 판단이라 믿는다. 언제 북한이 핵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마당에 돈줄(개성공단)을 계속 방관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받을 경제적 타격이 억 단위든 조 단위든 무슨 상관이랴. 오로지 “니들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로 대변되는 공포만이 현재 사회 최고 역점으로 부각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노인들은 당대 정치의 좋은 먹잇감이다. 선동과 선거의 도구가 따로 없다. 노인들이 ‘요즘 애들’을 운운할 때 입시 제도 교육에 길든 젊은 세대는 그들을 멍청한 개 취급한다. 정작 이 세대 전쟁의 승자가 누군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전쟁의 주체는 표를 챙기고 뒤처리는 국민의 몫이다. 도래할 경제적 타격과 사회적 부작용은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부채와 같다.




우리의 애국주의는 자발성을 기대할 수 없다. 국가는 나를 지배할 뿐 나를 위해 해주는 게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외치게 하고, 애국주의를 주입시키려고 애쓴다. 학교에서는 애국을 강조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게 한다. 후진국일수록 스포츠가 '국위선양'의 도구로 동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166



이러한 세상에서 진정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까? 홍세화는 끊임없는 자문만이 정답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강조했듯 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고집하고 쉽게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더욱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 라고.’(p.16) 말이다. 독서와 토론을 통해 주체적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고 익숙한 제도 교육과 쉴새 없이 떠드는 미디어의 목소리를 부단히 의심하는 생활. 이것만이 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버리고 이 미친 세상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