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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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엇을 보태든 무엇을 외치든 세연이 말하는 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는 모든 것이 휘발된다. 표백세대는 이 완성된 세상에서 개인의 색깔과 목소리를 잃은 채 살아가야만 한다. 모든 규칙은 기성세대가 정해 놨으니 유지하고 보수하는 삶은 우리 표백세대의 몫이라는 것이다. 세연은 위대한 업적을 이룰 자격을 박탈 당한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저항을 '자살'로 규정하고 '와이두유리브닷컴'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한다. 더불어 자신의 자살선언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잡기 모음이라는 소설을 집필한다.


  표백을 읽으며 세연이 주장하는 자살 저항은 나에겐 그저 무책임한 방법으로 느껴졌다. 얼마나 더 읽었을까. 잡기 모음 내용을 반절 이상 읽었나? 그 논리가 완벽해 어떠한 반박거리도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모 대학교 학생들의 자살 문제와 전교 1등을 하고 부모에게 이제 됐느냐는 유서만 남긴 채 자살해버린 어느 고등학생의 사연은 허구가 아닌 내가 숨 쉬는 이 나라 어디선가 일어난 현실이기에 그리고 내가 이 '표백세대'의 일원이기에 세연의 이야기는 극단적이지만 한편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현 세대와 이전 세대가 처한 환경의 격차가 매우 뚜렷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그 시대적 사명을 이뤄낸 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 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190p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으며 나 이외 모든 사람은 경쟁자라 교육 받고 자란 우리 세대. 누군가의 삶을 짓 밟으며 올라간 그곳에 우리가 바라던 행복이라는 게 있을까? 그렇게 세연은 자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표백세대에게 저항하라 유혹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자살이라는 저항이 극단적이라 생각한다. 아무런 색깔을 가지지 못하는 세대라 할지라도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의미를 부여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파이트 클럽」을 쓴 척 팔라닉은 '최고의 복수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누군가가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것을 보는 것 만큼,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세상은 아직 세연의 말처럼 완성된 곳이 아니며 우리 세대는 어떤 방법으로든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성공'만이 아니다. 우리는 세연에 대한 휘영의 반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살 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중략)...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에는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삶에도 가치는 있는 거야. 297p



  위대한 일을 해야만 하는 세대와 자격라는 게 애초에 있긴 한 걸까. 그런 업적을 남기라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현실이 힘들고 어렵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기성세대끼리 정해 놓은 규칙 속에 교육 받으며 살아온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우리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죽음도 저항의 방법일 수는 있지만 최고의 저항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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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코스모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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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나 영화는 수없이 봤지만, 같은 '연기'를 하는 연극은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분명히 작정하고 갔으면 어느 작품 하나쯤은 봤겠지만, 왠지 이제까지 연극이란 장르에 관심은 없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연극은 드라마나 영화보다 접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크겠고, 작품이 가진 다양성이 적다는 점과 상영료 등을 들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부담감'이다. 연극을 떠올리면 막연히 묵직한 작품성과 주제의식이 가진 심각성이 떠오른다. 자연스레 눈이 안 간다. 감상하며 즐긴다기보단 무언가 학습하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부담감 없이 보긴 어렵다.


 하지만 모든 건 연극을 체험해보지 못한 내 생각에 불과하다. 사실 지금 난 연극을 정말 보고 싶다. 온다리쿠의 <초콜릿 코스모스>는 이런 날 간절하게 한 작품이고.


 연극이, 무대의, 배우가 발산하는 열정과 에너지는 영화나 드라마에선 맛볼 수 없는 아름다움과 쾌감이 있다.무대에 선 배우와 객석에서 바라보는 관객이 서로 공유하는 설레임. 그것이 바로 연극이라는 것을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눈 앞에 하나의 세계가 있다.  바로 저 앞에 있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데도 전혀 다른 세계가..



 이제까지 그저 단순하게만 생각하던 무대에 이젠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객석과 무대의 거리는 불과 몇 미터 되지 않지만, 그곳엔 내가 가보지 못한, 체험할 수 없었던 미지의 공간이 있고 배우는 단순히 연기하는 게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이 되어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되거나 때론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독이 든 사과를 건네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마녀가 된다. 관객은 이 조그마한 공간에서 하나의 역사가 바뀌고 전설이 되는 영웅을 지켜보며 애절한 슬픔과 벅찬 감동 그리고 쓸쓸한 웃음을 맛본다.


 두 번의 오디션에 걸쳐 이뤄지는 두 천재 소녀의 성장 과정은 이 모든 감동을 담고 있다. 연예인 집안에서 성장한 교코는 비록 깨닫지 못했던 연기의 본질을 알아가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연기 실력을 지닌 아스카는 이를 계기로 자아 확립을 하게 된다. 어느 시점에선가 난 관객의 입장이 되어 가미야가 느낀 충격과 다쓰마가 느낀 두근거림을 오롯이 맛볼 수 있었다. 정말 열정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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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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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왠종일을 기숙사에서만 뒹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펜을 들고 하루종일 책과 마주했던가? 그것도 아니다. 아.. 참으로 한심했던 시절이었다.  도대체 뭘 했던걸까? 무엇을 내 마음대로 이뤘을까? 꼬박 강의실에 앉아 결석을 단 한번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오직 그것이 결석을 밥먹듯이 하며 어른 흉내나 내는 어중이 떠중이들과 나의 차이점이라 여겼다. 나름대로 조금은 자부심도 있었나보다. 하지만 어설펐다. 그것도 많이.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했어야 했고, 농땡이를 쳐도 눈치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어디쯤에서 서성댔다.


  다무라의 20대는 나에게 이상적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내가 바라던 일상. 평범한 20대의 일상 그대로다.  그의 거침없는 20대는 어설픔이란 찾아볼 수 없다. 적성에 맞지않자 때려치운 대학생활과 빠르게 시작한 사회생활. 나름의 커리어를 쌓아가며 서서히 자신을 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내가 그리던 20대의 모습 그 자체다.


  다무라를 보고 있자면 난 참 남자답지 못했구나란 생각이 든다. 패기도 없거니와 결단력은 물론이요, 용기 또한 결여되었으니 한심하기 그지않다. 될대로 돼라식 삶은 앞으로도 나를 계속해서 과거속에 묶어 두겠지...  '내 꿈은 뭘까?' 또 한번 질문을 던져본다. 학창 시절 줄곳 내게는 풀리지 않던 숙제...


  몸이 근질거린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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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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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는 게 그저 좋았다. 좋은데 이유가 있을까. 그냥 걷다 보면 수많은 생각이 든다. 무슨 생각이든 상관없다. 잡념이라도 떨쳐버릴 수만 있다면 말이다. 뭐든 과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좋은 싫든 적당히 하는 게 좋지만 사람 마음이 그리 쉬운 게 아니니까.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더 먹어보고 싶고 생각나는 사람은 계속 보고 싶은 건 당연한 이치. 하지만 예외는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다.  대체로 공부가 그랬다. 적당히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하면 할수록 괴로운데 한눈이라도 팔면 진도는 저만치 도망가기 일쑤였다. 머리 굵어지고 보니 공부는 과하게 해도 탈 나는 꼴은 한 번도 못 본 것 같다. 


  온다리쿠의 <밤의 피크닉>엔 고교 생활 3년간 매해 한번씩 치르는 '야간보행제'란 행사가 등장한다. 이 행사는 전교생이 하루 동안 80km를 걷는 것이 그 목적. 수많은 학생이 저마다 소망을 품고 교문을 나서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짧은 거리도 아닌 무려 80km. 다들 낙오 될 세라 열심이다. 힘들면 그만두면 될 텐데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걷게 만드는 걸까?


  입대 당시의 나는 행군이란 훈련이 생소했다. 육군 훈련소에서 걸었던 주간행군과 야간행군은 그야말로 최악 그 자체였다. 고작 20km 정도 걷는 것뿐인데 그 정신적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마치 강철로 제작된 게 아닐까 의심되는 전투화를 비롯한 30kg에 육박하는 군장의 무게는 아마도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거라 생각한다. 야전부대에 배치받고도 상황은 그다지 좋아지진 않았다. 거리는 40km가 기본이고 4박 5일의 훈련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대부분 이 행군이라는 녀석이었으니 내가 걷는 것에 질려버릴 만도 했다.


  물론 이 소설 속 주인공 다카코와 친구들의 여건은 이곳에 비할 수도 없겠지만 날 압박하던 군장의 육중한 무게나 다카코가 멘 빵빵한 배낭이나 걷다 보면 결국 잊혀버리기 마련이다. 계속해서 걷다 보면 현재 내가 신고 있는 것이 운동화인지 전투화인지, 어깨에 메고 있는 건 군장인지 배낭인지 상관없다. 오로지 정신력과 체력만이 내 몸뚱이를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처음엔 그게 너무 싫었다. 문득 '내가 왜 걷고있지' 란 생각에 미쳤을 땐 견디기 어려웠다. 목표 없이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작은 목표라도 생긴다면. 얘긴 달라지지 않을까? 다카코는 마음속에 작은 내기를 걸고 야간보행제에 참가한다. 오로지 자신만 알고 있는 내기. 그리고 깨닫는다. 모두 단순히 걷고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누군가는 마지막이 될 이 순간. 짝사랑하던 이와 함께 완주하길 원하고 누군가는 찾고 싶은 사람이 있기도, 누군가는 절친과 학창시절의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단순하지만 그 과정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떠난 누군가를 추억하며 아름다웠던 그때를 회상한다. 도착지점이 가까워졌을 때 오는 일말의 후련함. 걸으며 용서하고 화해하고 추억하며.. 성장한다.


  얼마 전 뛰었던 내 군 생활 마지막 훈련 혹한기.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을 읽지 않았더라면 최악의 훈련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겹도록 보이던 물집 하나 생기지 않던 발. 붉어진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마저 기분 좋게 느껴지던 그날 새벽. 난 행복했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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