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좌전 - 하 - 전면개정판 춘추좌전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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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2권은 진초(晋楚)가 양분되는 과정, 오월(吳越)이 세력을 다투는 과정이 담겨 있다.

BC 551년부터 473년까지 1권(BC 722~BC552)보다 상대적으로 더 짧은 시기를 다루는데 드라마틱한 사건은 더 많아서 흥미진진하다. 이는 춘추 시대에서 전국 시대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춘추 시대 초기만 해도 열국 간 법도와 예의를 따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말기로 갈수록 작은 일로 원한을 갖고 이것이 복수로 귀결되는 과정이 잦아진다. 춘추 시대만 해도 제후들은 '왕'이라는 칭호를 칭할 수 없었는데 가면 갈수록 스스로가 왕을 칭하는 제후들이 많아진다. 제후들은 등급도 나뉘어 있었는데 이에 따라 엄밀한 위계에 따라 행동해야 했으나 나중으로 가면 그런 경계도 허물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핵심적인 인물은 역시 오왕의 합려와 월왕의 구천이라 할 수 있다. 둘은 쌍벽을 이루었으나 결국 월왕 구천의 승리로 귀결되지만 그들이 어떻게 열국들 중 승자가 되었는지 과정을 지켜보며 리더의 자격,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합려는 BC 515년 노 소공 27년, 주 경왕 5년에 주군을 시해하고 등극하였다. 오나라의 공자 광(합려)은 무장한 갑사들을 지하실에 숨겨두고 오왕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오왕은 호위병을 자신의 주변에 단단히 깔아 놓았지만 합려의 계략에는 미치지 못했다.

공자 광이 발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지하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전설제(오나라 당읍 사람)가 물고기 요리 속에 칼을 감추고 들어가 마침내 그 칼을 뽑아 오왕을 찔렀다. 그 순간 호위병들이 양쪽에서 그의 가슴을 피로 마구 찔러 그를 죽였으나 결국 이때 오왕도 시해되고 말았다. 이에 합려는 전설제의 아들을 경으로 삼았다.

오나라에 합려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면서 주변 열국들은 긴장했고 변경 지역의 긴장은 더했을 것이다. 사실 합려가 등극하는 모습은 이 기술이 다라서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이 때의 모습은 실제 어떠했을까? 실감나는 묘사로 접했다면 더 드라마틱했으리라. 이런 아쉬운 부분은 동주 열국지를 통해서 상세하게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등극한 합려는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오왕 합려가 서(徐)나라 사람을 시켜 공자 엄여를 잡게 하고, 종오 나라 사람을 시켜 공자 촉용을 체포하게 했다. 두 공자가 초나라로 달아났다. 그러자 초소왕이 이들을 이용해 오나라에 위해를 가하려 했다. 그러자 대부 자서가 이같이 간했다.
"오나라의 광(光)은 새로 나라를 차지하고서는 백성들과 매우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백성을 마치 자신의 자식같이 대하고, 백성들과 동고동락하고 있으니 이는 장차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오나라의 변경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 그들을 유복(고분고분하게 복종함)하게 만들지라도 오히려 오나라가 쳐들어올까 두렵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원수를 강대하게 만들어 그들의 분노를 가중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강대해지기 시작해 중원의 여러 제후국과 견주게 되었고 군주인 광 또한 마음이 아주 넓어 스스로를 선왕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하늘이 장차 그가 포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혹여 그를 시켜 오나라를 멸망하게 하고 이성 나라의 영토를 넓히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끝내 오나라를 보우하려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결과를 알 날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잠시 우리의 귀신을 편히 쉬게 하고, 우리 백성들도 안정되게 만들면서 그 결과가 어찌될지 기다려 보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니 굳이 우리가 스스로 파양(힘들게 움직임)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초(楚)나라의 신포서가 진(秦)나라로 가 구원병을 청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오나라는 봉시(덩치 큰 멧돼지)와 장사(큰 뱀)처럼 욕심을 부려 중원의 제후국들을 천식(병탄)하고 있으니 초나라가 가장 먼저 그 침해를 입었습니다. 과군이 하신을 시켜 급히 고하기를, '이덕무염(오랑캐 오나라의 욕심은 끝이 없다)'하니 ..."

합려 자체의 인물됨은 오나라 안에서는 후한 평가를 받을 수도 있으나 다른 열국들 안에서는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왕위에 등극한 이후 지나친 욕심으로 열국들의 긴장을 높였던 탓이지 않았을까.

아무튼 오나라는 월나라가 침입하고, 신포서가 이끄는 초에 패한(BC 505년) 이후 국력이 점차 쇠하게 된다. 합려에 뒤이어 부차가 월왕 구천을 항복(BC 494년)시키기도 했으나 그 기세는 반짝이었다.

월왕 구천의 등장은 묘하게도 오나라가 월나라를 쳤을 때 나타난다.

오나라가 월나라를 쳤다. 월왕 구천(允常의 아들)이 오나라 군사의 진군을 막으면서 취리(절강성 가흥현 남쪽)에 군진을 펼쳤다. 구천은 오나라의 군진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우려했다. 이에 사사(결사대)를 두 차례나 출동시켰으나 이들 모두 포로가 되었을 뿐 오나라의 군사에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죄인들을 3항으로 열을 짓게 한 뒤 각자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일제히 이같이 외치게 했다.
"양국 군주가 교전하는 중에 우리는 기고(군령)를 어겨 두 번 다시 병사가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감히 형을 피할 수 없으니 감히 귀사(죽음으로써 죄를 구함)하고자 합니다." 이에 죄인들이 스스로 목을 베어 차례로 자진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이 광경을 주목하는 사이에 월나라 군사가 일제히 진공해 오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공격을 받아 힘껏 싸웠고 합려는 이 때 엄지발가락에 부상을 입고 가던 중 숨을 거두고 만다. 이로써 구천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부차와 구천 간의 대결은 BC 473년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에게 포위되어 자살하고 오나라가 멸망하며 비로소 막을 내린다.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용동(절강성 정해현 동쪽의 해도에 위치)에 거처할 것을 허용하자 오왕 부차가 이같이 사양했다.
"내가 이미 늙었는데 어찌 군주를 섬길 수 있겠소."
그러고는 곧 목을 매어 자진했다. 월나라 군사가 오왕 부차의 시신을 이끌고 귀국했다.

건조한 문체로 적힌 간략한 기술이다. 역시 이와 관련한 자세한 상황은 동주 열국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춘추좌전을 통해 춘추 시대의 역사를 만났다. 춘추좌전은 춘추 시대 열국의 명멸을 편년체 기술로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다. 특히 전쟁을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할 때 거북점을 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었고 인의예지에 입각하여 사건과 인물을 평가한 기술도 특징적이었다. 또한 <시경>과 <서경> 등 과거의 고전이나 경전의 글귀를 인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해당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다.

춘추 시대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확인하기에 이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된다. 향후에도 참고서의 역할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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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1-20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기세가 읽으면서 오나라와 월나라의 스토리 읽었는데 지금 거의 다 까먹었어요.
그래도 이름들은 기억이 나네요~~
나름 인간의 처세술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뒷통수를 맞아 어쩔수 없는 운명의 슬픔 같은거도 느꼈어요^^

거리의화가 2023-01-23 22:23   좋아요 2 | URL
시간이 지나면 이야기는 잊어버려도 인물들은 기억나는 게 어딥니까^^
춘추좌전 읽는데 어찌나 인간의 마음이 훅훅 변하는지~ㅋㅋ 작은 거에 토라지고 그걸로 인해 싸움이 나고 하는 걸 보면서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구나 싶습니다^^

여울목 2023-01-21 0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사랑판은 한길사판과 비교해 조금 풀어썼던 기억이 있는데, 좀더 고풍스러운 한길사번역이 멋있었다고 느꼈습니다.
정치의 요체를 알 수있으며, 공자가 시를 공부해야한다고 한 이유를 좌씨전을 읽고서야 알 수있었습니다.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봅니다. 물론 조괄이 병법책 읽듯이하면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서도요.
숙향,자산,안영과같은 인물 앞에서는 무능과 교활한 궤변을 일삼는 사람은 신랄할 비판을 받았을 겁니다.
특히 자산은 매우 훌륭한 정치가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사건진행이 이해가지않는 경우도 있었는 데,아마도 자세한 사료가 없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대표적으로 왜 기씨와 양설씨가 그 정도의 사건으로 멸문되었는지는 의문이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1-23 22:53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한길사 번역으로도 만나보고 싶네요^^* 저는 사실 번역본 비교할 시간은 없었고 집에 있는 걸로 바로 읽은 경우라서요^^

네. 정치인들 뿐 아니라 리더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리더의 자질이 어떠해야 하는지와 사람을 쓰는 용인술도 배울 점이 많아 보여요.

저도 참모 중에 자산이 인상깊었습니다. 좌전에서 특히 굉장히 많이 나오더군요. 사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관중 같은 경우보다 어쩌면 더 많이 출현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인의예지에 입각한 평가에서도 후한 점수를 받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상세하지 않은 부분은 아마도 사료가 부족한 케이스가 아닐까 싶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희선 2023-01-22 0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더의 자격과 정치의 본질을 알게 해주는군요 역사에서는 배울 게 많겠지요 그런 걸 잘 못하지만... 역사 중요한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23 22:30   좋아요 1 | URL
네. 리더들이 꼭 좀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책이네요. 과거의 리더들의 우여곡절이 여기에 다 나타나 있으니 말이죠^^
 

오왕 합려의 최후
범씨 가문의 가신 왕생과 장류삭
왕기과 염유
오자서
공자, 세상을 떠나다
백공 승의 난
월앙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다

구천은 오나라의 군진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우려했다. 이에 사사(死: 결사대)를 두 차례나 출동시켰으나 이들 모두 포로가 되었을 뿐 오나라의 군사에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죄인들을 3항으로 열을 짓게 한 뒤 각자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일제히 이같이 외치게 했다.
"양국 군주가 교전하는 중에 우리는 기고(旗 : 군령)를 어겨 두 번 다시 병사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감히 형을 피할 수 없으니 감히 귀사(死: 죽음으로써 伏罪함)하고자 합니다."
이에 죄인들이 스스로 목을 베어 차례로 자진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이 신기한 광경을 속(屬 : 주목하는 사이에 월나라 군사가 일제히 진공해 오나라 군사를대파했다. 이때 월나라 대부 영고부(浮)가 창으로 오왕 합려를 공격했다. 이에합려가 장지(將指:엄지발가락)에 부상을 입게 되었는데 영고부는 합려의 신발 한짝을 노획했다. 이때 오왕 합려는 급히 퇴병하던 중 취리에서 7리 떨어진 오나라의 형(經)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 P433

"지금 우리 오나라는 유과나라만 못하고, 월나라는 오히려 소강 때보다 강대합니다. 만일 월나라가 장차 이보다 더욱 강대해지면 어찌 오나라의 환난이 되지 않겠습니까. 월왕 구천은 백성들을 애호하고 은혜 베풀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는 은덕을 베풀면서도 인심을 잃지 않고, 백성을 애호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세운 공을 말살하지 않습니다. 월나라는 본래 우리와 동양 :국토가 접해 있음)하여 누대에 걸친 구수(원수)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하고도병탄하지 않고 그대로 보전시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고 원수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비록 후회한들 불가식이(不已: 우환을 제거할 길이 없음)일 것입니다. 희성의 나라인 오나라의 쇠망은 이미 손가락을 꼽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오나라는 이들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도 적의 흥성을 조장하면서 패자가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성사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원이 물러나와 어떤 사람에게 이같이 말했다.
"월나라가 10년간 생취(生聚:백성을 양육하고 재물을 모음)하고, 10년간 교훈(敎訓:백성을 가르치고 훈련시킴)하면, 20년 뒤 우리 오나라 땅은 월나라에 의해 황량한 소택지로 변하고 말 것이다." - P439

이제 듣건대 오왕 부차는 한 번 출행하여 이틀 이상 숙박하게 되면 반드시 대사피지(臺池:커다란 정자와 연못을 뜻하는 말로 부차가 출행하면 늘 연못에 배를 띄워 놓고 했음을 지칭)를 갖추고, 단 하루의 숙박일지라도반드시 비장빈(妃嬪御:시침드는 여인의 총칭으로 ‘비장‘은 이들 중 귀한 자,
‘빈어‘는 천한 자를 지칭)들이 모신다고 하오. 또 1일지행(一日之行 : 당일치기 출행)일지라도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고자 하여 반드시 완호(玩好:놀이 도구)를 휴대하고 진이(珍異: 귀한 물건)를 수집하여 오직 즐기는 데에만 힘을 쏟는다고 하오, 나아가 그는 백성들을 원수같이 대해 매일 백성들을 전쟁으로 내몰고 있다고하니 이는 지금 보는 바와 같이 그칠 기미가 전혀 없소. 이리하면 그는 자신이 먼저자패(敗:스스로 패망함)하고 말 터인데 어찌 우리와 싸워 이길 수 있겠소." - P442

당초 범씨 가문의 가신 왕생(王生)은 같은 가신 장류식(張柳朔)을 미워했다. 이에 범소자(것을 청했다. 그러자 범소자가 왕생에게 이같이 물었다.
"그 사람은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사구불급공(私仇不及: 사적인 원한은 공적인 일에 해를 끼칠 수 없음)입니다.
좋아하면서도 그 잘못을 지나치지 않고, 미워하면서도 그 좋은 점을 버리지 않는장유삭을 백인의 지방 장관으로 보낼사길석)에게 - P454

것이 의(義)의 근본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그 의를 어기겠습니까."
범소자가 백인을 떠나 제나라로 가려고 하자 장유삭이 자신의 아들을 불러 이같이명했다.
"너는 주인을 따라가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라. 나는 장차 여기를 사수할 것이다. 여기는 왕생이 나의 사절절조를 지켜 죽음을 위해 마련해 준 곳이다.
나는 나에 대한 그의 신임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러고는 드디어 사길석을 위해 진나라 군사를 저지하다가 백인에서 전사했다. - P455

초소왕이 이같이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초나라 군사가 재패(再敗:노정공 4년에 백거의 전투에서 이미 오나라에게 한 차례 패한 적이 있음)하게 되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그렇다고 맹약을 버리고 원수를 피하는 것 또한 죽느니만못하다. 어차피 죽기는 매일반이니 원수와 싸우다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고는 곧 공자 신(申:기원전 571년에 죽은 공자 신과 별개의 인물임)에게 왕이 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공자 신이 이를 사양했다. 초소왕이 또종실인 공자 결(結: 子期)에게 사왕이 될 것을 명했으나 그 또한 이를 거절했다.
초소왕은 다시 공자 계(啓 사왕이 될 것을 명했다. 결국 공자 계는 다)에게섯 번을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이를 승낙했다. - P458

이 싸움에서 공위(爲: 공무인)는 폐동(은 전차를 타고 분전하다가 함께 전사했다. 이에 이들을 함께 출빈(出치소 또는 묘지로 옮김)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공자가 이같이 평했다.
"왕기는 능히 간과를 잡고 나라의 사직을 지켰으니 가히 무상(無자의 대신 성인의 장례로 장사 지냄)할만하다."
염유는 창을 들고 제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이로써 노나라 군사가 능히 제나라 군사를 공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공자가 이같이 평했다.
"염유의 행동은 참으로 의(義)에 합당하다." - P480

그러고는 곧 오왕 부차를 찾아가 이같이 간했다.
"월나라는 우리나라에게 심복(腹)의 질환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접경하고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병탄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습니다. 구천의 유(柔服: 유순하게 服함)은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니 월나라를 속히 도모하느니만 못합니다. 우리가 제나라를 쳐 승리를 거둘지라도 이는 석전(경작을 할수 없는 돌밭)을 얻는 것과 같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월나라를 없애 소택지로 만들지 않으면 오나라는 장차 망하고 말 것입니다." - P483

"민천(旻어진 하늘)이 부조(不吊 : 잘 대해주지 않음)하여 국로(國老: 국가원 - P510

로)를 은유(遺:잠시 세상에 더 머무르게 함)하게 하지 않도다. 그로 하여금 여일인(余一人)을 보위하게 하여 재위했는데 이제 여(余)는 경경(勞勞:고독하여 의지할 곳이 없음)히 재구(在근심으로 병에 걸림)하게 되었도다. 오호애재(嗚呼哀哉 : 아, 슬프도다), 니보(尼 : 공자)여, 무자율(無自律 : 스스로 통제할 바를모름)이로다."
이를 두고 자공이 이같이 평했다.
"군주는 아마도 노나라에서 선종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공자)의 말씀에 이르기를, ‘예시즉혼: 예를 잃으면 혼합해 짐), 명실즉건(庶: 명분을 잃으면 잘못을 저지르게 됨)‘이라고 했다. 실지(志 : 뜻을 잃음)하면 혼암해지고, 실소(所 : 신분을 잃음)하면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살아 있을 때 중용치 못하고 죽은 뒤 뇌조사를 읽음)하니 이는 예가 아니다. 또한 조사( 전자가 쓰는 ‘여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는다. 군주는 예와 명분두 가지를 모두 잃은 셈이다." - P511

이때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의 신(愼: 안휘성 영상현 서북쪽) 땅을 침공했다. 그러자 백공 승이 군사들을 이끌고 가 이들을 격퇴했다. 이에 백공 승은 혜왕(惠王: 초소왕의 아들 章)에게 병사들의 전비(戰備: 무장)를 해제치 않은 채 곧바로돌진해 오나라 군사를 모두 포로로 잡을 수 종묘에 바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초혜왕이 이를 허락하자 백공 승은 마침내 기회를 틈타 반기를 들고 말았다.
가을 7월, 백공 승이 자서와 자기를 조정에서 죽인 뒤 초혜왕을 협박했다. 이때 자서는 옷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죽었는데 자기는 반군에게 잡혀 죽기 전에 이같이 - P514

말했다.
"지난날 나는 용력(勇力)으로 군주를 섬겼다. 이제 죽는 마당에 불종(弗終: 有始無終으로 시작만 있고 끝이 없음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러고는 곧 예장(豫章:樟木으로 곧 녹나무)을 뽑아 반군들을 죽인 뒤 분전하다가 죽었다. 이때 석기가 백공 승에게 이같이 주장했다.
"창고를 불사르고 왕을 시해해야 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백공 승이 이같이 반대했다.
"그리할 수는 없다. 시왕은 불상(不祥)이고, 분고(焚庫:부고를 불사름)하면무취(無: 비축한 물자가 없앱)하게 된다. 그리하면 장차 무엇으로 초나라를 지킬 것인가.‘
이에 석기가 반론을 제시했다.
"초나라를 차지해 백성을 다스리고, 공경히 신령을 받들면 가히 득상유취(得有聚:吉祥을 얻고 물자를 비축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엇을 걱정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백공 승은 이를 좇지 않았다. - P515

이때 제나라 사람이 전에 제평이 계수 한 데 반해 노애공이 단지 하배(下拜)만 한 사실을 책하여 이를
러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노인지구(魯人之 : 노나라 사람의 잘못이라는 뜻으로 ‘‘는 ‘쌈’의 뜻을 지니고있어 ‘구‘로 읽는 것이 옳음)를 수년이 지나도 스스로 깨닫지 못해 우리로 하여금화를 못 참아 펄쩍 뛰게 만드네. 노나라는 오직 유서여 두 나라 사이에 커다란 근심만 조성하네." - P529

노애공 22년 여름 4월, 주은공(隱公)"이 제나라에서 월나라로 달아난 뒤 월나라 사람에게 이같이 호소했다.
"오나라가 무도하여 아비인 나를 억류하고 내 자식을 보위에 올려놓았소."
이에 월나라 사람이 주은공을 귀국하게 하자 이번에는 태자 혁(革)이 월나라로 달아났다.
겨울 11월 27일,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용동(雨東:절강성 정해현 동쪽의 海島에 위치)에 거처할 것을 허용하자 오왕 부차가이같이 사양했다.
"내가 이미 늙었는데 어찌 군주를 섬길 수 있겠소.‘
그러고는 곧 목을 매어 자진했다. 월나라 군사가 오왕 부차의 시신을 이끌고 귀국했다. - P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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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갈 거에요?"

"내일 아침 일찍 가야지."

설 명절이 코 앞이다. 시댁을 방문하는 것은 여전히 내게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른들을 만나서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왜 이리 익숙해지지 않는지.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음식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약간 돕다가 뒷정리 돕고 어른들 이야기에 장단 맞추는 것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껄끄럽고 부담스럽다.
옆지기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가기 싫다는 말을 되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갈수는 없는 노릇이고 간다면 좀 늦게 갔으면 하는 바람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야 할 이유를 찾는다. 시아버님 산소에 가봐야 하니까.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지만 늘 어떤 분이셨을까를 생각한다. 옆지기의 따뜻함과 배려가 분명 아버님께 물려받은 것일 거라고 나는 그를 만나며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나의 지나친 이기심과 탐욕을 그이기에 받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1년에 몇 차례 방문할 때 잠시 동안 아버님을 생각할 때 옆지기의 얼굴을 자연스레 보게 된다.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덤덤해보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그는 아버님이 그리웁겠지. 이번에도 아버님을 찾아뵙고 우리를 잘 봐달라고 인사드리고 와야겠다.


책을 가져가봐야 읽을 수 없을 테니 오디오북을 들으려고 한다.

 


그리고 아마 강의도 듣지 않을까 - 정희진 쌤 매거진 남은 에피소드들과 <통감절요> 강의



그리고 책이 귀에 들어오지 않으면 중드를 볼 것 같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걸 보니 날이 심상치가 않다. 무척 추워질 거라고 하는데 어디 나갈 때는 옷깃 단단히 여미시고, 건강하고 행복한 설 연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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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1-20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디오 북도 좋을 것 같네요. 잘 다녀오시고 평온한 명절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3-01-20 10:34   좋아요 0 | URL
네. 오며 가며 듣기에는 오디오북이 좋아요. 아무래도 차 안에서 종이책은 보기 어렵죠^^
자목련님도 명절 잘 보내시길!

독서괭 2023-01-20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옆지기님이 참 좋은 분이시군요! 이렇게 배우자 칭찬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데😅 멋집니다!
제 옆지기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뵙질 못했는데 저는 딱히 남편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요…
오늘 진짜 너무너무 추워요. 빙판 조심하세요!

거리의화가 2023-01-20 10:3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배우자 칭찬... 사실 직접적으로는 못하고 주변에 이야기할 때만 칭찬을!(귀에 들어가긴 하겠죠?ㅋㅋ)
아... 괭님 배우자님도 그러시군요ㅠㅠ 연애하기 전 썸탈 때 좀 외로워보일 때가 있었거든요? 그 모습이 짠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홀랑 넘어간 것 같은ㅋㅋㅋ
춥죠~ 목도리 칭칭 감아매고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명절도 잘 보내시길요!

stella.K 2023-01-20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댁 가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군요. 그러니 시월드겠죠? ㅋ
그래도 안전하게 잘 다녀오십시오.
명절 즐겁게 보내시구요.^^
이젠 겨울도 다 간 모양인가 보다 했는데
역시 겨울은 겨울인가 봅니다.
이 추위 지나면 뭐 또 춥겠나 싶네요. ㅎ

거리의화가 2023-01-20 13:13   좋아요 1 | URL
이번에도 유연하게 잘 처신하고 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대한인 만큼 막판 추위가 기승인 모양이에요. 스텔라님도 명절 즐겁게 잘 보내시길요^^

페넬로페 2023-01-20 13: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아버님을 뵌 적이 없는데 시댁 식구들 전체가 자상하고 정이 많아 가정을 무척 따뜻하게 하셨던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이상하게 시댁 간다는건 부담이 있죠^^
한파가 온다고 합니다.
화가님, 시댁 잘 다녀오시고 따뜻하고 자상한 남편분과 설 연휴 행복하게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3-01-20 14:52   좋아요 2 | URL
가끔 직접 뵈었으면 어땠을까 그럴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남편 모습을 보며 시아버님이 이랬겠구나 떠올려보곤 하는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도 그러시겠죠. 희한하게 시댁 가는 건 왜 부담이 되는 걸까요?ㅎㅎㅎ
모쪼록 행복한 설 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라로 2023-01-20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아버님이 몇 년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몇 주 동안 우리가 굉장히 많은 대화를 나눠서 그런가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요,, 거리의 화가님 아버님도 남펴분에 대한 것을 읽으니 그런 분인 것 같아요. 이번 설 잘 다녀오시고 가족분들과 (시댁) 좋은 추억 만들고 오시기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2023-01-20 15:09   좋아요 0 | URL
라로님 그 시간이 참 소중하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님 생각이 나시는 거겠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을 안겨주고 떠나간다는 건 그 사람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삶을 살고 가신 것 같네요.
라로님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1-20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님 돌아가신지가 올 해 10 년쯤 되었네요. 10 년 조금 넘게 뵈었구요.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말 맞는 것 같아요.
저도 남편을 지켜보면서 한 번씩 ˝당신, 아버님 많이 닮아가는 것 같네˝ 라고 야기해 주면 남편은 썩~ 좋아하진 않던데(남편은 아버님보다 어머님을 더 좋아하거든요ㅋㅋ) 그래도 제겐 제가 기억하는 아버님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문득문득 생각하는 방식이나 말투가 비슷하다~ 아들은 닮는구나! 생각하곤 합니다. 아마 화가님의 남편 분도 시아버님 많이 닮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버님께 인사 잘 드리시고, 설 연휴 평안하게 계시다 오시길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2023-01-20 21:40   좋아요 1 | URL
남편 분은 어머니를 더 좋아하시는군요!ㅎㅎ 그래도 어쨌든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본인도 갈수록 그걸 느끼지 않을런지~^^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남편은 막상 시아버님 생각이 점점 드문드문 나겠지만... 또 그 빈자리는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다녀올게요. 나무님도 설 연휴 무사히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3-01-20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것도 안해도 부담스럽죠^^
저도 남편 보며 시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생각해보곤 해요^^

날씨가 많이 춥네요
명절 잘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3-01-20 21:41   좋아요 1 | URL
그쵸. 아무 것도 안해도 뭔가 불편한 그 느낌!
어쨌든 아들과 아버지는 특별하다는 생각이에요. 딸과 엄마의 관계처럼요.

날이 너무 춥습니다. 명절 따뜻하게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3-01-20 23: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뭐 여전히 명절날 시댁을 가는건 전쟁을 치르러 가는 기분입니다. 이건 뭐 안 바뀌는거 같고요.
완전히 편해질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분위기에서(심지어 tv도 나 보고 싶은거 못보잖아요. 저는 미스터트롯 너무 싫어하는데 명절날 가면 눈 뜨 있는 시간은 계속 그거 보고 듣고 해야 합니다. ㅠ.ㅠ) 긴 시간을 있어야 하니까 그런거 같아요. 일종의 수련, 봉사정신 이런걸로 버틴다고 생각해요. ㅎㅎ
무사히 잘 다녀 오세요. 저는 가까워서 내일 아침에 갈건데 마음은 똑같습니다. ㅎㅎ 명절 잘 보내시고요.

거리의화가 2023-01-23 22:19   좋아요 0 | URL
명절 전날 시댁에 내려갔는데 어찌나 피곤하던지 밤 9시를 못 넘기고 잠들었습니다^^;;; 채널은 포기한지 오래됐구요ㅋㅋ 저는 생긋 생긋 웃는게 힘들더라구요. 뭐 그렇지만 다년간의 사회 생활로 쌓인 노하우로 버티고 돌아왔습니다! 바람돌이님도 연휴 잘 보내셨길 바라요~*^^*

희선 2023-01-22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절이면 시집에 갈 일이 걱정스럽겠습니다 마음 편하게 먹으려 해도 잘 안 될 것 같네요 그래도 편안하게 조심해서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추위가 설연휴에도 이어지는군요 거리의화가 님 명절 잘 쇠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23 22:21   좋아요 0 | URL
마음처럼 그렇게 실상 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는 어른들께 사근사근 하는것을 잘 못해서 음... 시간이 지나도 이건 잘 안되는 것 같네요. 그래도 점점 나아지는 것 같긴 합니다만^^;
희선님도 명절 잘 보내셨길 바랍니다. 내일 날이 엄청 춥다던데 건강 유의하시구요^^
 

【癸亥】十七年秦王聞孟嘗君之賢使涇陽君爲質於齊以請孟嘗君來入秦 秦王以爲丞相或謂秦王曰孟嘗君相秦必先齊而後秦秦其危哉秦王乃以樓緩爲相囚孟嘗君欲殺之孟嘗君使人求解於秦王幸姬姬曰願得君狐白裘孟嘗君有狐白裘已獻之秦王無以應姬求客有善爲狗盜者 入秦藏中盜狐白裘以獻姬姬乃爲之言於王而遣之王後悔使追之孟嘗君至關 關法鷄鳴而出客時尙早追者將至客有善爲鷄鳴者野鷄聞之皆鳴孟嘗君乃得脫歸

○ 趙王封其弟勝爲平原君平原君好士食客常數千人

진왕이 맹상군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경양군(동생)을 제나라에 볼모로 있게 하고 맹상군에게 요청하여 진나라에 맹상군이 들어온다. 진왕이 맹상군을 승상으로 삼았는데 어떤 이가 ˝맹상군이 진나라에 재상이 된다면 반드시 제나라를 먼저 하고 진나라를 나중으로 할 것이니 진나라는 위태롭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에 진왕은 누완을 재상으로 삼은 뒤 맹상군을 가두고 죽이고자 했다. 맹상군은 탈출을 위해 사람을 시켜 진왕에게 총애받는 여인을 이용해 자신을 풀어줄 것을 구했다. 마침 객 중에 손 수완이 좋은 사람이 있어서 진나라 창고로 들어가 훔친 호백구는 진왕의 여인으로부터 최종 진왕에게까지 전달되었다. 하지만 훔친 것이 탄로나 쫓기게 된 맹상군은 성문을 통과못할 뻔 하다가 닭 울음 소리를 잘하는 자가 닭 소리를 내어 무사히 성문이 열려 탈출할 수 있었다(성문은 닭 소리가 울려야 열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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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채소공(蔡昭公: 채도공의 아들 채후 申)이 패옥(佩玉) 두 개와 갖옷 두 벌을마련해 초나라로 가 패옥 하나와 갖옷 한 벌을 초소왕에게 바쳤다. 초소왕이 이를착용하고 채소공을 위해 향례를 베풀었다. 마침 채소공도 나머지 갖옷과 패옥을착용하고 향례에 참석했다. 이를 본 초나라 영윤 자상(子常)이 이를 갖고 싶어 했

으나 채소공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상이 채소공을 3년 동안이나 초나라에 억류해 두었다.
마침 이때 당성공(成公)도 초나라에 왔는데 그는 숙상마(馬) 두 필을 갖고있었다. 이에 자상이 이를 갖고 싶어 했으나 당성공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상은당성공 역시 3년 동안 초나라에 억류해 두었다. 이때 당나라 사람들이 서로 숙의한 뒤 우선 초나라에 전에 당성공을 수종하던 자들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초나라가 이를 허락하자 교대 차 간 사람들이 이전의 수종자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만든 뒤 당성공의 말을 훔쳐 자상에게 바쳤다. 그러자 자상이 당성공을 귀환시켰다.
당성공이 귀국하자 말을 훔쳐 자상에게 바친 자들이 스스로 몸을 묶은 뒤 자진해서 사패(敗:사구)에게 나아가 이같이 말했다.
"군주가 농마(馬 : 말을 애호함)로 인해 곤경에 빠지고 나라와 군신들을 버리게되었습니다. 청컨대 저희들이 말을 키우는 자를 도와 장차 말을 배상할 수 있도록해주기 바랍니다. 그리되면 두 마리의 숙상마를 다시 찾는 것과 같은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당성공이 이같이 후회했다.
"이는 모두 과인의 잘못이었소. 그대들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그러고는 그들에게 두루 상을 내렸다.

"채군(蔡君)이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머문 것은 그대들이 전별의 예물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일까지 예물이 완비되지 못할 경우 그대들을 사형에 처할 것이다."
이에 채소공이 귀국하게 되었다. 채소공이 귀국 도중 한수에 이르러 옥을 꺼내 강물에 내던지며 맹서했다.
"내가 다시 이 한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 대천(大川)이 내 다짐의 증거가

될 것이다."
얼마 후 채소공이 진나라로 가 아들 원(元)과 대부의 자제들을 인질로 바치면서 초나라 공벌을 청했다.

초소왕이 수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신포서가 진(秦)나라로 가 구원병을 청하면서이같이 말했다.
"오나라는 봉시(封: 덩치 큰 멧돼지)와 장사(長蛇큰뱀처럼 욕심을 부려 중원의 제후국들을 천식(食: 병탄)하고 있으니 초나라가 가장 먼저 그 침해(害)를 입었습니다. 과군은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현재 재초망(越在草: 원래는 잡초가 우거진 곳으로 몸을 옮긴다는 뜻으로 민간의 궁벽지로 피해 다니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에 과군이 하신을 시켜 고급(告急)하게 하기를, ‘이덕무염(夷德無厭: 오랑캐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뜻으로 夷는 오나라, 德은 탐욕, 厭은 만족을 의미)하니 만일 오나라가 초나라를 점령해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 진나

라의 변경도 그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나라가 아직 우리 초나라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틈을 타 즉시 출병하여 초나라 땅의 일부를 점거하십시오. 만일초나라가 멸망하면 그 땅은 곧 군주의 영토가 될 것입니다. 만일 군령(君: 군주의 은덕)에 기대어 초나라를 무사히 안정시키게 되면 초나라는 반드시 대를 이어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애공(아들)은 사람을 보내 완곡한 어조로 이같이 사절景公의하게 했다.
"그대가 걸사(師)하는 사정을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대는 우선 잠시 객관으로 가쉬도록 하오. 우리가 잘 생각한 뒤 회답하도록 하겠소."
그러자 신포서가 이같이 말했다.
"과군은 월재초망 중이어서 안신(身)할 곳조차 찾지 못한 형편입니다. 어찌 감히하신인 제가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궁정 담장에 기대어 밤낮으로 통곡하며 작음(飮: 물 한모금)조차 입에 넣지 않았다. 이러한 일이 7일 동안 계속되자 이에 감동한 진애공이 <시경> <진풍·무의(無衣참전 용사를 칭송하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 그러자 신포서가 진애공에게 9돈수(九首:아홉 번 머리를 땅에 댄 채 조아리며 극도의 사의를 표시함)한 뒤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진나라 군사가 드디어 출병하게 되었다.

이때 초나라 대부 자기가 균 땅에 화공을 펴려고 하자 자서가 만류했다.
"작년에 오초 양군이 교전할 때 전사한 초나라 부형의 친속들이 아직 균 땅에 폭골(暴骨:뼈가 들판에 나뒹굴고 있음)되어 있소. 우리는 이를 수습조차 못하고 있는데 또 이곳에 불을 질러 뼈까지 태우려 하니 이는 안 될 일이오."
그러자 자기가 반박했다.
"나라가 장차 망할 지경이오. 만일 우리의 부형의 친속들이 죽은 뒤에도 지각이 있다면 적을 이겨야만 흠구사 : 자손들이 올리는 제사를 받는다는 뜻으로 ‘흠’은 ‘후‘, ‘구사‘는 전래의 제사를 의미)할 수 있게 되니 어찌 불에 타는 것을 두려워하겠소."
그러고는 곧 불을 지르면서 오나라 군사와 싸웠다. 이에 오나라 군사가 패하게 되었다.

"대덕(大德)을 베풀고자 하면 응당 소원(怨 작은 원한)은 괘념치 말아야 하오.
이것이 옳은 도리요."
그러자 신포서가 주위 사람에게 이같이 말했다.
"내가 진나라에 걸사(師)한 것은 군주의 위난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내가 상을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군주의 자리가 안정되었으니 내가 더 이상 무엇을바랄 것인가. 게다가 나는 전에 자기(子: 투성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어찌 내가 그와 똑같은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초소왕이 내리는 상을 받지 않으려고 몸을 피했다.

"양호는 노나라에서 계손씨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오히려 계손씨를 죽이려 했고, 이제 또 노나라를 불리하게 만들려고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유한 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어진 사람은 멀리하는데 군주는 어찌하여 그를 쓰려는 것입니까. 군주가 계손씨보다 부유하고 제나라가 노나라보다 강대하자 양호는 이를 뒤엎으려는 것입니다. 노나라는 이제 그의해를 면하게 되었는데 군주가 오히려 그를 거두게 되면 장차 그 해가 우리에게 미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제경공이 양호를 체포해 동쪽 변경에 수금하려 하자 양호는 스스로 동쪽 변경으로 가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자 제나라에서는 오히려 그를 서쪽 변경에 수금했다. 이에 양호는 읍내 사람의 수레를 모두 빌려 계축(軸:바퀴의 축을 칼로 깎아 망가뜨림)한 뒤 이를 삼끈으로 묶어 돌려주었다. 이어 총령(옷가지를 싣는 수레에다 짐을 가득 실은 뒤 짐 속에 몸을 숨겨 달아났다. 그러자 제나라 사람들이 곧바로 그를 추격해 잡아서는 제나라 도성에 수금했다. 이에 양호는 다시 총령에 몸을 숨겨 마침내 송나라로 달아났다가 진나라로 가 조씨趙氏조간자)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를 두고 중니가 말했다.
"장차 조씨 집안에 대대로 화란이 있을 것이다."

위나라 군사가 회군할 때 대부 활라(羅)가 전군교郊 :(殿軍:후군)이 되었다. 그러나 조나라 국경을 넘어서기 전에 활라는 대열에서 빠져나와 뒤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어자가 이같이 말했다.
"후군이 되어 대열 속에 있으면 어찌 용기가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활라가 이같이 대답했다.
"소려(素厲:헛된 勇名)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무용(無勇: 용기가 없음)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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